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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마법

경제 2015. 12. 2. 15:56

- 자본주의 폭력의 승리는 고대 장군들과 황금시대 제국주의자들의 승리처럼 결정적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지만, 우리 시대의 통치자들은 특별한 유형의 지배를 행사한다. 주요 국가들이 주장하는 폭력의 독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형의 명령이 출현했다. 한편으로 세계를 자기 고유의 이미지로 조형하는 텔레테크놀로지 권력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무엇이 존재할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화폐권력에 의해 행사되는 현재성의 독점이 그것. 이런 통제의 실질적 지평은 뉴스수환주기와 경기순환 사이 어딘가를 왕복함. 시시각각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현재시제로 바굼.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오늘날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승인하는 데서만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것은 꼼꼼하게 상각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부지런히 할인한다. 과거는 오직 지금 당장 보존할 가치가 있을 때에만 보존할 가치가 있고, 미래는 이미 만료가 예정되어 있거나 그 길이 닦여져 있지 않는 한, 자연히 처리될 것이다. 불안정하게 만드는 자본의 흐름에 의해 자유롭게 되어 전례없이 빡빡한 경쟁의 그물망에 포획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더 조마조마하고, 더 당혹스러우며, 더 방어적이고, 더 압박받는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방식을 사회적 삶의 결 속으로 깊숙이 밀어넣는 시장 이데올로기는 보다 절대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기회를 위해 현재의 모든 모욕을 정당화한다. 자연법의 지위로 격상된 시장논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선택과 계산가능한 결과의 순환 속에서 살 것을 요구하면서도,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실질적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전방위 기술을 발명한다. 그리고 보상은 즉시 위로 보내는 반면, 나쁜 결과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로, 다른 어딘가로, 이후 언젠가로 떠넘긴다. 예상되는 것에 대한 빈틈없는 관리와 대안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통해, 우리의 공통의 삶은 생존을 위한 무수한 계획들로 분할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정신이 여전히 군사력과 기술의 발명을 찬양하는 동안 주요한 역사의 줄거리는 왕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자본의 대주에 따라 써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역사의 공식 판이 승리자들이 아니라 채권자들에 의해 써지게 되는 이유다. 채권자들을 위해 모든 인류의 성취나 염원은 이제부터 끝없는 언쟁과 축장에 시달리게 된다. 어장와 윤작에서부터 제약, 원자력, 노령연금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기본적 결정을 초영토적인 경제적 이성이 좌우하는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삶의 회로들(동맹, 의무, 연대)은 유해한 반사회적 에너지들을 전파하는 것으로 조작되어 왔다. 사정이 좋을 때에도 궁지에 몰린채로 있는 집합적 가능성과 약속에 대한 어떠한 표현도 막대한 부를 끝없이 찬양하는 수다로 가득 찬 환경에서 자신이 들릴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이런 시기에 가장 숙명적인 세계사적 형상들은 국가수반은 고사하고, 재벌총수나 세계 곳곳을 누비는 기업가도 아니며, 중앙은행장, 펀드매니저, 보험중개인, 그리고 이들 뒤에 득실거리는 거래인과 조정자들의 부대들이다. 그들은 이 세계를 스스로 통치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정당성을 믿는다. 각자는 그저 가장 수익성 있는 영역을 개척하여, 한두가지 변수들을 관리하고, 동향을 추측하며, 평균초과수익을 달성하고, 배당을 받고, 수수료를 징수하고, 나머지 세계는 자기 갈길을 알아서 가기를 원할 뿐이다. 그들은 정책이나 계획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자신들의 이윤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전지구적 체계에 대해 무관심하며, 심지어는 무지하다. 그들의 역사의식은 찰나의 차익거래, 급변하는 포트폴리오 회전율, 이자의 여파, 변덕스런 환율조작 보험통계표의 준엄한 셈법에 의해 조정된다. 그들은 거래하고 위험에 대비하면서 너무 이른과 너무 늦은 사이에서 가능한 오랫동안 정지하는, 즉 좋은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만큼 오래 지속되지만 좋지 못한 결과나 역류에 직면할 만큼 지속되지 않는 일종의 자동적인 초월성을 획득하기를 열망한다. 자본권력을 휘두를 수 잇는 사람은 누구도 일상생활과 물질적인 것의 완고한 시간성에 고착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로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 "여기서 현대경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적 요소는 노동과 자본간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자본간의 수평적 관계이다. 성장 혹은 경기후퇴의 보다 깊은 리듬을 지배하는 것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경쟁의 논리다." 모든 단계에서 브레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계획적이고 무조절적인 속성"이 서사를 주도하며, 여기서 개인 행위자들과 국가전략들은 나무랄 데 없는 비즈니스 감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을 지닌 채 행동하지만, 그럼에도 체계를 계속해서 막다른 골목으로 데려간다는 것에 주목한다. 가장 사나운 지역 지도자들이 여기서 재현하는 세계경제는 성공과 복수를 여러차례 거치며, 그 과정에서 선량하게 보이는 비교우위를 향한 추구는 부의 상호확증 파괴라는 무자비한 위험으로 바뀐다. 장기상승 동안 미국은 국내경제의 전시 호황을 연장할 뿐 아니라 전후 전지구적 거래체계를 미국에게 유리하게 조작함으로써, 빠르게 성장하는 세계경제에서 가장 큰 몫의 보상을 차지하려 애썼다. 독일과 일본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세계 무역의 몫을 가로채는 것에 맞춰진, 보다 국가주의적 변종 자본주의를 추구함으로써 그들을 따라잡으로 노력했다. 그 성장패터은 73년 한계에 도달했는데 브레너는 이를 주로 "국제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때문이라고 여긴다
- 팽창순환들에 대한 아리기의 강조는 페르낭 브로델이 자신의 연구에서 발전시킨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 브로델은 세권의 책으로 된 그의 연구에서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자본주의와 문명을 다룬다. 그러나 브로델의 작업은 잘 알려진 것처럼 전통적인 역사서술의 구조를 피한다. 대신 그의 설명은 세가지 수준에서 구조화된 자본주의 문명을 보여준다. 가장 아래 있는 수준은 물질생활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족과 생존이라는 매개변수 내에서 살아가며, 자신을 둘러싼 체계들과 흐름들에 대해 대부분 알지 못한다. 중간 수준은 시장경제이며, 이것은 훨씬 더 크고 조밀한 네트워크들 안에서 펼쳐지는 교환관계들의 일상적 회로로 기능한다. 가장 위에 있는 수준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즉 물질생활의 노동들에 기반을 둘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시장을 넘어서는 금융권력의 축적이다. 실제로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사회의 최상층"에서 펼쳐지는 반시장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 그는 근대성의 기원을 초기 금융가들의 권력이 증대되고 그들이 국가에 점점 더 밀착하게 되는 것에서 찾는다. 이들은 은행이 산업과 상거래 양쪽을 다 장악하고, 경제전반이 이 구성물을 영속적으로 떠받칠 수 있을만큼 충분한 활력을 획득했던 19세기 중반에 가서야 최적의 방책을 획득했다. 아리기의 관점에서, 시장경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는 영속적이거나 비가역적인 것은 아니며, 이 둘 사이의 긴장은 현 상황에 맹렬하게 돌아왔다. 그는 오늘날의 최종적 위기가 다시 또 다른 체계적 순환(또 다시 자본의 감제고지로부터 인도되어, 헤게모니 지배와 금융숭배로 향할 운명을 지닌)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그 대신, 향후 수십년 사이에,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뿌리박힌 본연의 생명주기순환 같은 거슬러, 시장경제의 역사적 원형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 제프리 삭스는 열성적인 신보수주의적 정치풍토에 직면하여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처방들을 고쳐쓰기 위해 빈곤의 종말을 썼다. 그것은 전지구적 남부의 새로운 일군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의 충격요법 처방의 이미지 쇄신을 의미. 그 책의 출간은 글렌이글스 정상회담과 같은 시기로 맞추어졌고, 책의 주된 매력을 극대화하는 홍보활동을 갖추었다. 책 표지는 다음을 알리고 있다. 보노의 서문. 사실 그 서문은 효과적으로 책의 주요 주제를 열거. 먼저 보노는 삭스의 전문지식과 지혜를 극구 찬양한다. 둘때, 그는 좋은 대중가요처럼 그 주장을 판매할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거부할 수 없고 불가피한 것으로 보기에 할 쉬운 구호를 만들려고 노력함. 핵심문장 하나만 보자. 보노는 삭스가 "인적자본과 금융자본을 교차시키는 방적식, 부유한 세계의 전략적 목표들과 빈곤한 세계의 새로운 계획을 교차시키는 방정식"을 제안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구호들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면, 그의 표현에서 어색함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 우리가 세계의 모든 문제와 가능성들이 자본의 용어로 기술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왜 우리가 인적자본과 금융자본 사이의 방정식을 그리고 싶어하는 것일까? 마치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보다 엄밀한 경제적 접근이 정치의 변덕스러움에서 우리를 구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이 방정식은 그 용어들의 균형을 유지하기는 커녕, 거침없이 한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으며, 기본적인 인간사들을 금융언어로 고쳐쓰고 있듬. 무엇보다 그것이 채무위기가 지닌 문제 아니었나요? 부유한 세계의 전략적 목표들이 빈곤한 세계의 계획과 결합되면 무슨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모두에게 가장 파멸적인 방정식이 됨. 거기서 부유한 세계는 자신이 선호하는 계획을 부과함으로써 자신의 전략적 우위를 확인함. 한가지 측면에서 보노의 표현은 정확함. 그 계ㅗ힉은 빈곤한 세계에서 일어날 것임. 빈곤한 세계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 세계를 위해서도 아님
- 지난 10년에 걸친 보노의 캠페인이 보여준 궤적은 전지구적 집합성에 대한 어떠한 감각도 점점 희박해 보이는 세계에서 자선활동과 개혁, 대중정치의 한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줌. 그 궤적의 초기단계에서 채무탕감 노력은 오랜 역사적 부정의들에 도전하고 있었던 기성운동들에 의지했음. 보노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부시 그리고 블레어아 거래하기 위해 그 운동들을 뒤로 했음. 그는 장애물을 만날때면, 진보적 마찰보다는 보수적 경건함을 택하고, 이질적인 주장들은 주류 미디어로 옮겨간 일괄 프로그램에 쓸어담으면서, 더 넓은 원을 그리며 그 의제를 몰고 갔음. 프로덕트 레드 캠페인은 소비주의가 진부한 자선행위와 공식적 원조 모두를 능가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고 함. 수년에 걸친 합병이후, 기구 ONE은 이제 일종의 다목적 NGO로, 유명인사의 지지와 컬러 손목밴드를 연료로 하는 그림자 유엔으로 기능. 보노는 도덕적 분개를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형태로, 그러한 분개를 염려하는 국가수반들을 달랠 수 있는 형태로 재포장했고, 이를 통해 시장을 궁지에 몰아넣는데 얼마간 성공했던 것처럼 보임. 그렇지만 거창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말을 거는 서구의 일반 대중과 자신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전지구적 남부의 주체들 사이에 연대와 의무의 유대를 구축하고 싶어하지 않음. 그러한 유대는 그가 봉사하는 체계에 너무나 쉽게 등을 돌릴지도 모름.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빈곤의 종말이 사물의 현 질서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는 사실을 감출 수 없음. 그것은 보노가 제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들과 새로운 이미지들을 요구할 것임
- 인클로저는 그 최초의 형태에서 사람들을 토지에서 내쫓고 공유지를 없애버림으로써 자본주의적 농업의 지형을 생산. 그 가장 기본적이고 잔혹한 단계에서 인클로저는 울타리와 재산증서, 상호 경계, 그리고 배타적 법적 관할권들로 명료하게 나타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푸코는 가장 큰 행정구역들과 가장 촘촘한 감금의 공간들을 균질화하는, 보다 엄밀하게 합리화된 종류의 인클로저에 대해 묘사. 그것의 거대기계들은 분명히 여전히 우리 곁에 깊숙이 존재하며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대체되는 것(이는 구획된 주권과 사회화된 훈육에 의존하는 정치모델들과 경제과정들로부터 시작)을 감안하여 인클로저의 모든 형태들과 기능들은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감방, 교실, 조립라인, 본사, 관료지구, 도시경제, 국민경제, 안정적 노동력, 그리고 선한 시민, 이 모든 장소들과 단위들은 그 자리에서 흩어지거나 찢겨져 나가고 있으며, 외부로부터 재형성될 준비가 되어 있다.
- 채권자와 채무자에 대한 맑스의 가장 초기의 광범위한 논의는 제임스 밀에 대한 1844년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맑스는 자신의 가장 추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그 문제를 현실적인 것에서 과대한 것으로 고양시킨다. 그는 인간사회성의 교환의 도구들로의 점진적 소외로서 신용 및 은행체계의 진화를 추적한다. 그 진화의 결과 결국 인간성 자체가 가장 발달된 통화체계 부문들로 흡수된다. "신용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경제학적 판단이다. ... 인간적 개성, 인간적 도덕성은 상업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화폐가 그 속에 존재하는 물질로 된다. 그 실체, 화폐정신을 입고 있는 신체는 화폐나 종이가 아니라, 나의 개인적 실존, 나의 살과 피, 나의 사회적 가치와 지위마다 신용은 이제 화폐가치를 실제화폐가 아니라 인간의 살과 인간의 심장속에 현실화시킨다." 이 해석의 논쟁적 미덕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여전히 헤겔적 좌표들 내에 확고히 남아 있다. 신용은 공동화된 커뮤니티 내의 소외된 활동의 가장 높은 소용돌이들에서 스스로 발전하는 일종의 타락한 절대이념으로 나타난다. 맑스는 신용이 상호인정의 가장 순수한, 가장 투명한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 모든 사회적 및 문화적 질서의 차원들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가장 직접적인 예속의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신용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채무자)은 채권자의 판단에 종속된다. 채권자는 부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의 판단을 대표한다. 신용은 주인과 노예사이의 투쟁을 중재하는 보다 완전한 방식이 된다. 그로 인해 투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의 형식적 구조를 유지하는 데 헌신하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마르크스는 여기서 신용체계를 본질적인 사회적 부의 소외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해에 기반하여 빚은 시초적 또는 잠재적 충만함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마일 그 반대로 빚이 부의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유지와 살아있는 실존 사이의 근절할 수 없는 마찰로부터 생겨난다면,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흐르기 때문에, 모든 우발성들은 물질적 갈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빚은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필요한 것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한 모든 사회적으로 절합 가능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관념은 두번째, 즉 맑스의 사고에 있어 보다 엄밀한 경제적 단계에서 좀더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는 빚을, 필연의 왕국과 신체적 필요들의 통화적 상관물로 다룬다. 여기서 빚짐이라는 조건은 명백히 역사적 현상으로, 봉건적 의무들과 노예상태에서 사람들이 해방된 이후 자유로운 주체들의 창조의 결과로 나타난다. 빚짐이 상호의존을 자급자족의 상실로만 기록하는 한, 그것은 모든 시장관계들과 짝을 이룬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 노동자는 어쨌든 살아있다는 점에서 자본에 대한 의무를 진다고 생각하는 자본가의 형상을 조롱하며 제시. 빚이 생존에 근거한다는 관념은 자본론 1권에서 여러차례 등장. 이는 고대 로마 시대 이래 빚을 갚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로 채무자가 사지절단을 당했던 방식들을 상술하는 긴 주석에서 가장 두드러짐. 맑스는 빚의 제물적 기원을 믿는 것처럼 보이며, 그는 자본의 통화적 형식을 뒷받침하는 원시적 폭력을 강조하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베니스의 상인을 인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채무자들은 그들에 대한 법 앞의 처벌이 비유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고대의 채무자처럼 모든 프롤레타리아는 가죽이 벗겨지고, 쥐어짜지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고 이야기된다. 때문에 자본론 1권 전체에서 빚짐은 더이상 형식적인 또는 정신적 위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빚진 신체들은 바로 자본이 모든 수준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매 순간 갱신되는 시초축적의 유산이 있다 빚짐은 살아있는 신체에 대한 최초의 인클로저이자, 첫번째 생명정치적 사건이다. 빚진 신체들은 임금노동의 노동하는 신체들, 산업예비군의 유휴신체들, 비생산적이며, 경쟁력 없는 기업들의 굶주린 신체들, 그리고 어디서나 빚의 법칙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신체들이 된다. 요컨대 빚은 비참함이 사회화되는 수단이다
- 레위기 25장에서 명확히 설명되듯이, 희년은 50년마다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빚의 탕감, 원 소유주에 대한 주택의 상환과 토지반환, 노예와 종의 방면, 해당 연도동안 노동의 중지를 요구함. 신약에서 희년은 이사야의 예언의 실현이라는 복음을 예고. 이것은 예수가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상심한 자들을 치유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것임을 알리는 순간에 드러남. 여기는 이 종교적 전통이 왜 역사적 시간의 취소와 복원이라는 이러한 비전을 그 자체내에 담고 있는지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다. 희년의 사고가 종교적 수사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지닌 해방의 비전은 즉각적으로 실천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희년이 계속해서 되돌아오면서 혁명적 정치운동들을 고취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는 것으로 충분. 피터 라인보우와 마커스 레디커가 뛰어나게 보여준 것처럼, 희년이라는 사고는 17세기 영국 급진파와 18세기 대서양 노동계급에게 근본적인 시금석으로 기능했음. 그것은 가장 신비스런 비유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문자 그대로의 그리고 세속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도덕률적 입장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했다. 여성노예와 노예 주인의 아들인 자메이카의 로벗 웨더번이 구체화하고 유포함에 따라, 희년의 개념은 한편으로는 1830년대의 총파업과 차티스트 토지정책을, 다른 한편으로는 아메리카의 노예제 폐지를 낳았다. 라인보우와 레디커에게 있어 희년은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대한 예기치 않은 일련의 저항들을 결집할 수 있는 긴요한 급진적 요구를 제기함. 라인보우의 최근 저작 마그나카르타 선언은 빚의 경감과 부의 공유를 공유지 회복과 나란히 두면서 동일한 교훈을 아주 상이한 계통에서 끌어내어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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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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