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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래의 역사

역사 2014. 10. 19. 13:38

 


상거래의역사

저자
한스외르크바우어 외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도)(주)(+청운출판사) | 2003-05-0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책소개907-3 200여점의 예술 작품을 통해 인류의 경제사를 ...
가격비교

- 그리스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창조자이면 수많은 시인과 정치인을 배출. 하지만 그리스가 이룩한 놀라운 경제기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음. 그리스의 경제기적은 해상무역,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인 화폐에 기반을 둠. 다시 말해 그리스인들은 금의 무게를 달아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종전의 방법을 탈피하고 명실상부한 동전을 주조해서 사용. 화폐와 상업의 도입으로 가난한 목동무리는 부유한 민족으로 거듭났으며 복지체계도 마련됨. 그리고 이 복지체계의 기반위에서 그리스의 매력인 아름다운 정신이 꽃필 수 있었음.
- 19~20세기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에서 재화의 가격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 하지만 이런 인식은 2천년전인 기원전 2세기 살았던 중국인 학자 치엔이 이미 주장한 바 있음.
"산둥지방에서는 생선, 소금 유약, 비단, 악기가 생산되며 양쯔강 남쪽에 위치한 키앙난에서는 삼나무, 생강, 계피, 주석, 진사, 코뿔소 뿔, 바다거북 껍질, 진주와 모피가 생산된다. 북부지방에서는 말, 소, 양, 모피와 짐승의 뿔이 생산된다."
"이 물건들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산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죽은 조상의 제사를 위해서도 쓰인다. 농부들은 이 물건들을 생산하고, 도매상인들은 이것들을 시골에서 도시로 운반하고, 수공업자들은 가공하고, 소매상인들은 판매한다. 이 모든 일들이 정부나 철학자의 도움 없이 이루어진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가격의 조정이 이루어진다. 싼 물건은 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높은 물가를 낮춘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의 직업에 종사한다. 그것은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 모든 물건이 자발적으로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은 채 생산되고 필요로 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과정이 매우 자연스런 방식으로 나름대로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 1520년 푸거의 거래망은 유럽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었음. 야콥 2세 때에는,
* 지구차원으로 발전하는 세계시장을 기회로 이용. 그는 국내 섬유제품에서 출발하여 벨벳, 비단, 향, 향료, 밀랍, 꿀, 사프란(착색 향미료) 등 이국적 제품까지 거래 품목을 다양화
* 은과가 구리의 채굴을 독점
* 긴 안목을 갖고 용감한 무역정책을 채택, 거래망을 확충
- 야콥 2세때 이르러 푸거는 또 중요한 금융업자로 발전. 그들은 황제와 교황 그리고 북유럽과 폴란드 및 헝가리의 성직자를 위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신자들이 교회에 돈을 내고 그 죄를 용서받는 면죄부 거래에도 손을 댔음. 하지만 이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의 주 공격대상이 되어야 했음. 푸거는 주로 중개료 징수를 통해 금융 서비스에서 이익을 올림. 푸거는 일단 손을 댄 영역은 모조리 독점하려는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권력도 엄청나게 커짐. 1511년부터 1527년까지 푸거 기업연합은 연평균 54.5%의 이익률을 기록. 푸거사의 사업규모는 피렌체 부호 메디치 가문이 가장 번창했을 때의 다섯배에 달했음.
- 19세기는 차 무역의 위대한 시대였음. 영국이 1831년 동인도회사의 차 무역독점을 해체한 뒤 새로운 국민음료가 된 차의 무역은 중간이윤이 높았기 때문에 경쟁이 심했음. 경쟁의 효과는 특히 운송분야에서 나타났는데 쾌속화물선의 경우 중국에서 런던까지 95일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됨. 모든 회사가 햇차를 맨 먼저 시장에 내놓아 좋은 값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햇차 수확때는 마치 화물선 경주가 벌어지는 것 같았음. 1866년에는 중국에서 11척의 화물선이 동시에 출발했는데, 그중 3척이 동시에 런던에 도착하기도 했음. 오늘날에는 스리랑카에서 로테르담까지 컨테이너 선박으로 18일이 소요되지만 고급차는 특별히 항공기로 운송됨.
- 산업혁명이라 불리던 이 시기는 인류 역사상 첫번째 대량 소비시대이기도 함. 하지만 거품이 너무 커졌음. 1872년의 세계경제는 엄청난 실망과 거대한 추락 그 자체였음. 복지의 상승폭이 너무 커졌고, 물품의 세계적 수요도 너무 커졌으며, 주문의 홍수도 너무 과했고, 가격도 너무 높이 치솟았음. 상업의 세계는 끔찍한 퇴락을 겪어야 했음. 물론 이 모든 재앙은 자유경쟁의 탓으로 돌려짐. 그리하여 보호주의자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보호관세가 새로운 슬로건이 됨. 폐쇄적 시장경제와 높은 보호관세는 마침내 제국주의로 이어짐. 무역상들은 그늘속에 묻혔고 제조업자들이 권력을 쥐게됨.
- 1800년부터는 25년을 주기로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 19세기의 첫 25년은 독일의 시각에서 보자면 함부르크가 런던, 암스테르담의 뒤를 이어 유럽에서 세번째로 중요한 상업도시로 발전하는 성장기로 기록됨. 하지만 그때까지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대외무역은 벌써 그 핵심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었음. 1798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831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고 해체됨. 미국독립(1783년)으 여파로 남미의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 그리하여 무역제국주의자들의 독점적 무역장벽은 무너지게 됨. 1825년~1859년은 상거래의 두번째 혁신단계. 독일 관세연합(1834)이 창립된 것도 이때임. 관세연합으로 그때까지 독일내에 상존했던 수많은 관세장벽들이 제거됨. 영국과 프랑스의 상업조약도 같은 맥락에 있었음. 1849년 당시 맨체스터의 상인회 회장이었던 리처드 코브던이 주도로 영불 상업조약이 체결됨. 큰 흐름으로 보면 이들은 오늘날의 유로랜드로 가는 선구적 모델임. 1850년부터 1875년까지는 상조회와 소비자협동조합이 창립되던 시대. 상조회는 1844년 영국 직조공의 붉은 선구자들이 결성한 것이 첫 출발이었고, 그 뒤를 이어 1845년 저축 및 소비자 협회가 캠니츠에서 1851년 소비자협회가 취리히에서, 1852년 수공업자 협동조합이 델리취에서 그리고 생필품 분배협회가 함부르크에서 결성됨. 1854년 독일에서는 농민들을 위한 라이프아이젠 농업신용조합이 생김. 1875년부터 1900년까지는 백화점들이 주도. 1869년 프렝탕 백화점과 라파예트가 문을 열었고, 1872년 페히트, 1877년 벤칭(나중의 카우프링), 1879년에는 로온하르트 티츠와 울워스, 1881년에는 카르슈타트, 1882년에는 오스카 티츠가 문을 열었음. 1900부터 1925년의 시기는 협동조합들이 초지역적으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협력하던 시대였음. 1903년에는 666개 소비자연합이 참가한 독일 협동조합 중앙협회가 결성되었거, 1907년에는 독일 상인협동조합 동맹이 결성. 1925년부터 1950년까지는 통신판매업이 생겨난 시대. 1924년 에두쇼가 커피 통신판매를 시작했고, 1925년에는 클링겔과 바우어가 첫활동을 개시. 1926년에는 벤츠통신판매사가 출범했고, 1927년에는 구스타프 쉬케단츠 합자회사, 1929년에는 바더와 쇠프플린이 문을 열었음. 1950년부터 1975년 전후 재건시기는 셀프서비스의 도입기였음. 셀프서비스의 도입은 상점의 다량복제 그리고 지점 시스템의 기반이 됨. 1949년 함부르크의 프로덕션은 전후 최초의 기업으로 셀프서비스 상점을 열었음. 그 뒤를 이어 1952년 카이저스, 네덜란드의 하인, 1953년 텐겔만, 1957년 테르플로트와 스노에크가 도매업에서 현금판매주의 영업방식으로 대규모 할인점을 열었음. 1959년 영국과 캐나다가 합작한 최초의 슈퍼마켓 웨스턴 콘체른이 생기자 독일의 4대 백화점 기업인 카르슈타트, 카우프호프, 헤르티, 호르텐은 에클뢰 주식회사를 세움. 외국 슈퍼마켓 기업의 독일 내 성장세를 막아보려는 의도였음. 마지막으로 1975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기는 대형할인점과 대형쇼핑센터의 단계. 미국과 영국에서는 공장 아웃렛 센터도 크게 대두됨. 이런 유통형식상의 혁신과 함께 조직적 혁신, 다시 말해 국제화가 이루어짐.
- 1585년 안트베르펜의 몰락, 상업제국 푸거의 몰락, 한자동맹의 약화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관문이 됨. 게다가 스페인이 지역연합의 형성하고 1609년 평화협정을 맺자 네덜란드 상업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됨.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선박의 완벽한 제조와 설비(돛, 삭구, 무기),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해양지도와 설계도 등 중요 사업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노동자 기숙사를 건설했고, 거대한 창고와 자체 조선소까지 보유. 1664년 암스테르담에 길이 180미터, 폭 20미터에 높이가 4층인 중앙창고가 신축되기도 함. 향료. 도자기, 비단, 금과 은 등 상품의 원활한 유통, 그리고 국내외 인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선박의 운행도 시간표에 맞춰 정기적으로 이루어짐. 성공적인 상거래와 그 상거래의 미래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면밀히 계획된 조직구조와 로지스틱스가 필요했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했고 또 일관성있게 실천에 옮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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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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