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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사회 2014. 10. 7. 13:26

 


상처받지 않을 권리

저자
강신주 지음
출판사
프로네시스 | 2009-07-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킬로의 ...
가격비교

- 화폐경제는 물물교환 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인격성과 물질적 관계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해체해버림. 매 순간 화폐경제는 인간과 특수한 사물 사이에 완전히 객관적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특성도 없는 돈과 화폐가치를 삽입시킴. 개인과 소유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매개된 관계를 만들어 버림으로써 화폐경제는 이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기도록 만듬. 이런 식으로 화폐경제는 인격적 요소와 지역적 요소 사이에 존재하던 이전의 밀접한 관계를 분리시켰음. 이를 통해서 돈은 한편으로는 모든 경제행위에 미증유의 비인격성을 부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은 정도로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고양시키게 된 것이다.
- 돈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인격적이며 특별했던 모든 관계를 철저히 유보하고 개인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르쳐주었음. 필연적으로 돈을 지불하면 우리는 그 대가로 일정하고 구체적인 가치를 얻게 됨. 그래서 돈은 동일한 경제권의 구성원들을 매우 강력하게 연결함. 돈은 직접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님. 그런 이유 때문에 돈은 우리를 실제로 구입하려는 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해줌. 따라서 현대인은 고대 게르만 민족의 자유인이나 혹은 으 후의 농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급자와 공급원에 의존하게 됨. 그래서 현대인은 매순간 돈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수백가지의 결합관계들에 의존하게 된 것임. 이런 결합관계가 없으면 현대인은 마치 체액의 순환이 차단된 유기체처럼 더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임.
- 화폐경제 이전 시대 사람들은 좁은 지역에 같이 살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과 상호의존하고 있었음. 그래서 그들은 서로 누구인지 인격적으로 결정되어 있었음. 반면 오늘날 우리는 익명적인 상품 공급자들 일반에 의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자주 그리고 자의적으로 바꾸고 있음. 그래서 우리는 특정한 상품 공급자에 대해 훨씬 더 독립적인 것임. 바로 이런 유형의 관계가 강력한 개인주의를 만들어냄. 타인들로부터의 고립이 아니라 차라리 타인들의 익명성과 그들의 개성에 대한 무관심이 사람들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시키고 각각의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만 의존하게 하기 때문. 과거 다른 시기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외적인 관계가 인격적 특성을 지녔음. 이에 비해 오늘날 돈의 존재는 - 근대에 대한 우리의 성격 규정에 상응해서 - 인간의 객관적인 경제행위를 개인적 색채 및 고유한 자아로부터 더욱 명확히 분리해버림. 결국 인간의 고유한 자아는 외적인 관계들로부터 물러나서 과거 어느때보다도 심가헤 자신의 가장 내면적 차원으로 회귀하게 되었음.
- 인간은 외적 환경에 대해 자극과 반응을 주고받는 존재. 짐멜의 표현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음.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때그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된다." 만약 새로운 인상이 이전의 인상보다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인상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을 것임. 그런데 문제는 선행하는 인상과 뒤따르는 인상의 차이가 클 때 발생. 이 경우 우리는 새로운 인상을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음. 물론 이 새로운 인상은 우리 삶에 부담으로 인식됨.
-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음.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니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 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음.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양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생활을 하게 됨. 다시 말해 상호불간섭으로 규정되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도래한 것. 그런데 이 같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는 공간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을 깨닫게 됨.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시대보다 더욱 강해짐.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설명함.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음.
- 현대 도시인들은 다양한 방식의 소비행위들, 예를 들어 값비싼 오페라를 감상한다든가, 명품의류를 입고 다닌다거나, 아니면 골프장에서 골프태를 휘두르는 식의 화려한 소비로 자신들의 고유성을 드러냄. 전자본주의 시대든 자본주의 시대든 인간에게는 특이한 허영심, 즉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이 있음. 짐멜이 대도시의 삶에서 보았던 질적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된 현상인 셈. 따라서 짐멜이 니체를 통해서 긍정하고자 했던 질적 개인주의는 인간이 새로운 역사로 나아갔다는 진보의 표시로 보기 어려움. 겉으로는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표현하는 자유가 실현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생산의 차원이 아니라 소비의 차원에만 국한된 문제이기 때문.
- 예링은 패션을 개인적 욕망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학적 층위에서 사유함. 벤야민이 인용한 패션에 대한 예링의 주장은 다음 세가지로 정리됨. 첫째, 패션은 상류사회로부터 기원. 상류사회는 스스로 하류사회와 구분하기 위하여 새로운 패션이 필요했음. 둘째, 패션은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자마자 곧바로 소멸돔.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게 되면, 특정한 패션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폭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드러남. 이것은 스스로 상류계급을 지향하는 중간계급으로서는 상류계급이 택한 패션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임.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예링이 패션의 소멸, 즉 사회적 차원에서 기능하는 패션의 소멸을 꿈꾸었다는 점. 그것은 중간계급이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엄에 눈을 뜨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 그러나 예링은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산업자본이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음. 계속해서 새로운 패션을 창출해내어 인간의 허영심을 끊임없이 자극할테니까...
- 푹스에 따르면 패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함.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이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음.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함. 푹스가 예링의 패션론을 비판했던 이유는 예링이 패션과 관련된 첫번째 측면만을 염두에 두고 나머지 두번째나 세번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
-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음. 마르크스는 종교 자체를 거부한 무신론자였다는 식으로 단순화함. 그러나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무척 고통스러운 곳임. 이때 종교는 그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는 아편처럼 기능. 만약 종교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현실의 고통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렸을 것. 따라서 사람들에게 종교를 부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그들에게 마취제 없이 고통을 감내하라는 것과 같음. 물론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려고 했던 최종결론은 아님.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말은 만약 현실의 고통이 사라진다면 종교적 공상 또한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었음.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가진 모순과 고통을 치료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 그러면 우리의 불쌍한 이웃들이 종교를 맹목적으로 믿을 이유도 곧 사라질 것이라고 본 것.
- 부르디외에 따르면 전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인간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미래와 관련된 시간의식에 있음. 전자본주의적 인간에게 미래란 가능성의 장이 아니라 단순히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만 이해됨. 두가지 사이의 구별이 어려울 수도 잇음. 미래, 가능성의 장, 그리고 잠재적으로 올 것 등과 같은 표현들이 모두 비슷한 의미처럼 보일 수 잇음. 부르디외에게 미래에는 두 종류가 있는 셈. 우선 미래란 자본주의적 인간의 내면에서는 가능성의 장으로서 이해됨. 이에 반해 미래는 전자본주의적 인간의 경우에는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 표상됨. 가능성의 장으로서 미래란 다양한 경우의 수들 가운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남. 예를 들어 내가 프랑스에 여행가기로 결정하면 미래에 나는 프랑스 파리의 센 강에 있을 테고, 만약 체코에 여행가기로 결정하면 나는 미래에 프라하의 야경을 보면 맥주를 마실 것이. 이것이 바로 가능성의 장으로서의 미래의 모습. 반면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올 것임. 잠재된 어떤 무엇인가가 펼쳐지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미래가 나에게 도래할 뿐이고,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래할 그것을 기다릴 뿐.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로 이어지는 순환에 비유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음. 만약 지금이 봄이라면 여름, 가을, 겨울이 나에게는 잠재적으로 올 미래를 의미
-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란 구별이나 수익성이 있는 노동과 수익성이 없는 노동이란 구별도 부차적 차원으로 물러나게 됨. 이 사회에서 보다 근본적인 대립은 사회적 의무를 결여한 무위도식하는 혹은 나태한 사람과 노력의 산물이 무엇이든 간에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하는 사람 사이에 세워짐. 휴식하는 순간에도 진정한 농민은 조그만 작업이라도 수행하려고 하며, 그것에 매우 자긍심을 느낌. 이 조그만 작업들에는 밭에 울타리치기, 나무깎기, 짐승들로부터 어린 가축을 보호하기, 밭의 감시 같은 것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마치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농민생활의 기술에 속하는 것들임. 농민들이 수익성과 수확고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혹은 생산성에의 강박관념도 없이 주어진 일을 성스럽게 수행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와 노력은 그 자체로서 수단이고 목적이기 때문.
-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주장. 도덕 및 종교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개인적 이윤추구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오히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가들이 프로테스탄티즘 원리에 입각해서 자신의 직업을 종교적 의무와 책임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로빈슨 혹은 베버의 아비투스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원주민 방드르디는 이제 기독교 신자 혹은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음.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기대하기 힘든 일. 로빈슨과 베버의 아비투스를 공유하지 않는 방드르디는 웃음과 게으름으로 자본주의적 아비투스를 무력화해버리고 말았으니까. 이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집필할 때 투르니에가 품었던 속내를 짐작할만 함. 그는 베버의 생각을 조롱하고, 심지어 전복시키고자 한 것임. 이런 심오한 역할을 방드르디에게 부여했으니, 결국 방드르디는 투르니에의 화신이 아니었을까...
- 특수한 생활조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미적 성향은 동일한 생활조건을 공유한 사람을 함께 묶어줌. 그렇지만 미적 성향은 동시에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시켜줌. 그리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구분시켜 줌. 왜냐하면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됨. 취향, 즉 겉으로 표현된 선호도는 피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현실적 증거라고 할 수 있음. 따라서 취향이 정당화될 때 순전히 부정적으로, 즉 다른 취향에 대한 거부의 형태로 확인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 아마 취향의 문제만큼 모든 규정이 부정일수 밖에 없는 그런 영역은 없을 것임. 그리고 취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혐오감,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한 공포감 또는 본능적인 짜증에 의해 촉발되는 불쾌감이라고 할 수 있음. 취미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모든 취미가 본성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 취향이 스스로를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정말 그렇기 때문에 취향은 결국 아비투스가 된다. 그리하여 다른 취향은 비자연적이며 따라서 타락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부되는 것이다.
- 우리는 이제 왜 하류계급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상류계급의 미적 취향을 동경하는지 알게 되었음. 그것은 상류계급이 우리 사회의 모든 찬양과 칭송을 한몸에 받기 때문.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지속적인 찬양을 얻고자 상류계급은 하류계급이 따라올 수 없는 상류계급 특유의 미적 취향을 계속 고집. 물론 새로운 미적 취향을 만들어내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음. 미적 취향은 아비투스의 한 종류이기에 구조화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림. 사실 미적 취향만큼 상류계급 사람들의 무의식적 구별짓기 욕망이 잘 드러나는 경우도 없음. 그리고 이런 구별짓기 욕망의 이면에는 파스칼이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허영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음.
- 지금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이 미적으로 선호하는 아이콘은 사실 19세기 산업자본을 상품화한 것에 지나지 않음. 세잔과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가치를 드높인 것은 19세기 화상들이었음.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주로 19세기에 사회적 힘을 얻게 된 부르주아 계급의 눈높이에 맞춰 그려진 것들이 대부분. 세잔,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등은 아케이드가 거미줄처럼 퍼져 있던 파리의 풍경, 센 강의 뱃놀이, 파리 대로에 있던 야외카페 등을 주요 테마로 삼아 그림을 그림. 그러니 당시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삶을 그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선호.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 리스트나 파가니니에게 환호했던 최초의 관중들도 바로 19세기의 부르주아들이었음. 물론 리스트와 파가니니를 곳곳에 선전하고 다니면서 청중을 음악회에 끌어들인 것은 당시의 음악중개업자들이었음. 심지어 이들 음악중개업자들은 더 많은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 교향곡과 같은 거대한 규모의 작품을 작곡가들에게 강력하게 요구. 바로 이때를 즈음해서 신격화된 음악의 대가들이 곧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등이었음. 보다 많은 흥행을 창출하기 위해 음악중개업자들은 이 당시 악성이니, 음악의 아버지니, 혹은 음악의 천재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내서 청중을 불러 모음. 음악중개업자들의 이와 같은 판매전략에 부합해, 작곡가들의 전설적 삶이라는 레퍼토리도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만들어짐. 현대 부르주아들, 혹은 상류계급들의 미적 취향의 기원이 19세기에는 너무나도 대중적이었다는 것음 매우 흥미로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류계급의 미적 취향의 기원보다는, 클래식 음악과 인상파 미술로 대변되는 19세기의 예술이 현대 상류계급의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
- 68혁명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제 두가지 문제에 직면. 첫번째 문제는 인간을 경쟁으로 내몰며 삶과 노동을 소외시키는 산업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두번째 문제는 누구에게도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 직접 민주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였음. 물론 이 두문제는 서로 분리된 문제라고 볼 수 없음. 산업자본주의 도한 삶의 권리를 자본에게 양도하라고 강요하는 체계이니 말이다. 68혁명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보드리야르가 산업자본주의 체계가 유지되는 원동력에 대해 깊이 숙고한 것도 결국 이 시대의 필연적 산물임. 그런데 산업자본주의가 극복의 대상이라면, 무엇보다 산업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객관적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 68혁명이 실패로 끝난 3년 뒤, 1970년에 보드리야르는 그의 출세작 소비의 사회를 출간. 그는 산업자본주의의 핵심에서 바로 소비의 논리를 발견.
-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안에서 사물들은 교환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가능하게 된다고 말함. 객관적 기능의 영역이란 구체적 사용의 세계를 의미.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해주는 객관적 기능이 있으며,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하게 해줌. 객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음.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 반면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넘어서면 사정은 달라짐. 만약 자신의 신분이나 부유함을 나타내는 차원이라면, 고급 자동차나 고급 아파트는 대체 가능할 것임. 이런 경우 다이아몬드나 골프 회원권도 자동차나 아파트를 대신할 수 있음.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 즉 암시적 의미의 영역에서 사물은 기호의 가치를 갖는다고 이야기함. 기호의 차원이 바로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증거로서, 보드리야르는 그 사례의 하나로 세탁기를 언급. 세탁기가 도구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함.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쉽게 이해됨. 그것은 세탁기라는 어떤 사물의 사용가치를 의미. 세탁기는 사람들을 빨래에 대한 힘든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준 장치임. 지금은 밀린 빨래들을 세탁기 안에 넣고 버튼만 누르면 깔금하게 세탁이 되는 시대임.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주목한 것은 세탁기가 상징하는 행복, 위세 등의 요소라는 다른 가치임. 보드리야르는 세탁기의 사용가치와 무관한 이런 관념적 가치를 기호라고 부름. 보드리야르가 말한 소비의 논리란 바로 이 기호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 있음.
-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음.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 사실 이 점은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통찰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 있음. 부당하게도 자신의 현재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피해의식 말이다. 또한 이런 피해의식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에게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비관도 함께 깔려 있음. 그래서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것. 스스로 그런 소수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은 부르디외가 말한 귀족적 취향에 대한 욕망과 같음.
- 소비사회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유대감을 소비자들 사이의 경쟁적 허영심으로 변질시킴. 이에 휩쓸린 소비자들은 자기과시의 치열한 소비경쟁에 빠져듬. 그 결과 우리는 연대의 전망을 잃고 고립된 개인들로 산산이 분해되고 만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최근 산업자본의 경향. 산업자본의 소비논리는 이제 한 인간의 내면마저도 산산이 쪼개어 분열증적 소비촉진의 경향으로 심화하고 있기 때문. 아내로서의 자아, 어머니로서의 자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아, 동창모임 성원으로서의 자아 등으로 쪼개질수록 한 개인이 소비하는 상품의 목록은 그만큼 커질 수 밖에 없음. 이처럼 소비사회는 궁극적으로 소비자이며 동시에 노동자의 연대 가능성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통일성 마저도 가능한 분해하려는 것. 매우 무서운 일이다. 노동자이며 소비자라는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게 하고, 동시에 소비자의 내면조차도 소비행위의 촉진을 이해 산산이 분열시키고자 함. 하지만 이런 비극적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역설적 교훈을 얻음. 분열된 자아상을 연결하여 통일적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아가 분열된 개인들을 연결하여 통일적 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결국 우리는 산업자본주의가 던져놓은 거대한 욕망의 집어등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교훈을 말이다.
- 기호와 차이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소비의 논리를, 그 논리에 얽혀 있는 여러가지 다른 논리로부터 구별해낼 필요가 있음. 네가지 논리가 논쟁의 대상이 될 것임. (1) 사용가치라는 기능적 논리, (2)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 (3) 상징적 교환의 논리, (4) 가치/기호의 논리, 첫번째는 실제적인 작용의 논리임. 두번째는 등가의 논리임. 세번째는 애매성의 논리임. 네번째는 차이의 논리임. 또한 유용성의 논리, 거래의 논리, 증여의 논리 신분의 논리, 물건은 이 가운데 어느하나에 입각하여 정돈됨에 따라 각각 도구, 상품, 상징, 또는 기호의 지위를 취하게 됨. 그런데 마지막 것만이 소비라는 특수한 영역을 규정지음
- 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임.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님.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 볼 수 있음.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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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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