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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세계를 바꾸다

역사 2014. 10. 11. 17:49

 


설탕 세계를 바꾸다

저자
마크 애론슨, 마리나 부드호스 지음
출판사
검둥소 | 2013-09-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설탕은 세계를 바꾸었다.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닌 인류 역사에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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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후 400년 이래 침입자들이 로마를 휩쓸며 지나갔고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유럽은 더욱 폭력적이고 무지하고 극심한 분열상태에 있었음. 무슬림이 고대 그리스의 언어를 연구하는 동안, 유럽인 대부분은 손가락을 이용한 셈법에 의지하고 있었고 극소수만이 글을 읽을 줄 알았음. 돈 될만한 사업을 좇는 일부 상인들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감히 아주 멀리까지 떠나는 모험을 하지 않았음. 바깥세계는 그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일 뿐이었음. 그래도 모든 사람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향신료로 자신들의 음식에 맛, 특히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여 할지도 모르는 한가지 맛을 내기를 좋아했음. 비록 출간되는 책마다 향신료의 신화를 반복적으로 싣고 있을지라도 향신료의 인기는 부패한 육류나 생선의 맛을 돋우는 것과 무관했음. 값비싼 향신료를 구매할 여력이 있는 영주는 신선한 고기나 생선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것들이 항시 준비되어 있었음. 한 요리사가 맛이 간 음식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향신료는 지독한 냄새나 맛을 감출 수 있었음. 인기가 높아진 향신료를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게 되면서 후추, 생각, 설탕, 때때로 사프란 등의 향신료는 값비싼 필수품이 되었음. 진정한 부자들만이 수컷 향유고래의 창자속에 생기는, 생소하면서도 향기로운 바다의 맛을 제공하는 용연향같은 고가품을 살 수 있었음.
- 십자군 전쟁은 전쟁 그 이상의 것이었음. 그것은 또한 정보교환의 장이었음. 유럽인들이 무슬림과 접촉한 결과 그들은 꽁꽁 봉인된 자신만의 세계를 부수고 나오기 시작. 그들은 수학을 배웠으며 일부학자들에 따르면 풍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됨. 풍차는 유럽인들이 과거 전혀 쓸모 없었던 습지에서 물을 빼내 경작지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준 아주 훌륭한 동력장치였음. 더 많은 토지와 함께 유럽인들은 더 많은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음. 무슬림들이 가졌던 이 지식은 유럽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줌. 무슬림에 대한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설탕을 가져다 주었음. 성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 기독교도들은 보통 사람들이 꿀나무라고 부르는 갈대랑 아주 흡사한 어떤 숙성된 식물들을 목격했고 배고 고픈 상태에 있던 우리는 그 꿀같은 맛때문에 하루종일 그것들을 씹었다고 기록. 여러 성지에서 기독교도의 십자군 전쟁도 실패했음. 유럽인들은 무슬림들에게서 빼앗은 지역들은 아주 오랫동안 보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음.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시칠리아, 사이프러스, 로도스 섬 등 지중해의 비옥한 섬들을 통제하게 되었음. 그곳에서 그들은 사탕수수 재배법, 설탕 정제법 등 무슬림에게서 배운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 설탕 정제법은 귀중한 지식이었음. 사탕수수를 기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설탕을 만드는 것은 특별한 도전에 직면하는 것이기 때문.
- 많은 설탕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많은 노동자들을 수수밭에 풀어놓고, 그들이 수숫대를 자르고 수숫단을 끌고 와 밟아 시럽으로 만든 후 그 시럽이 가열실로 흘러가게 하는 단일시스템을 설비하는 것. 이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들은 시간과 싸우면서 부글부글 끓는 액체를 조리하고 불순물을 씻어내 가장 달콤한 시럽을 가장 달콤한 설탕으로 환원시킴. 이는 벌꿀의 시대였던 지난 수천년 동안 남성들과 여성들이 했던 방식의 농경이 아님. 그것은 공장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 안에서 대규모 사람들이 모든 단계를 정확하게 주어진 시간안에 함께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 시스템은 붕괴하고 만다. 무슬림들은 설탕을 취급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농업을 고안해냈고 이는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불리게 되었음. 플랜테이션은 새로운 기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물을 기르고 베어내고 정제하는 것을 조직화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음. 통상적으로 농가에는 소와 돼지, 닭, 경작지, 과일로 가득찬 과수원이 있기 마련이며, 종류가 다른 많은 식품을 소비하고 판매함. 그와 반대로 플랜테이션은 오로지 한가지 목적만 있었음. 즉, 그것은 기르고 빻고 끓이고 말려서 원거리 시장에 판매하는 단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 사람은 설탕만 먹고 살 수 없으므로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된 사탕수수는 그것을 수확한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도 없었음. 수천 킬로 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구매자들의 열망 단 하나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기계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된 농가는 인류 역사에서 그 이전에는 결코 없었음. 플랜테이션에는 50명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노동자 무리들이 있었음. 제조공장이 재배작물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재배와 제조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음. 그리고 모든 노동은 극도로 엄격하며 옥죄는 규율에 의해 관리되었음. 무슬림들은 이 새로운 형태의 농경을 위한 규칙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 무슬림들과 기독교도들은 노예를 이용하여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실험을 수행. 지중해의 설탕 플랜테이션들에서 일하던 많은 노예들은 처음에는 러시아인들이나 전쟁에서 사로잡힌 이들이었음. 그러나 심지어 이 모든 정교한 조직안에서도 설탕과 관련된 두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 그 통들이 계속 끓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땔감이 필요했음. 나중에야 설탕 경작자들은 으스러진 사탕 수숫대를 연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냄.
- 점점 더 많은 유럽인들이 노예노동과 함께 신세계에서 자라는 설탕을 부를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시작. 설탕 재배는 처음에 히스파니올라에서 선풍을 일으킴. 근처 멕시코에서 아즈텍인들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농업은 스페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음. 그러나 그로 인해 다른 유럽인들이 설탕이 주는 막대한 부를 찹아 선두에 나설 기회를 얻음. 유럽인들은 다음으로 브라질을 설탕 중심지로 만듬. 영국인들이 뒤따라 바베이도스를 설탕섬으로 탈바꿈시킴. 그 후 프랑스인들은 다시 한번 히스파니올라에서 옥토를 발견. 더 많은 설탕이 재배될수록 그것을 빻기 위한 더 많은 제조공장이 세워졌고 설탕을 실어나를 배를 대기 위한 더 많은 부두가 건립되었고 플랜테이션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노예화된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공급됨
- 전통적으로 영국 노동자들은 맥주를 직접 주조해서 주식인 빵과 함께 마심. 1700년대 후반 한 스코틀랜드 작가는 더 이상 맥주를 사 마실 수 없는 상항에 처한 노동자들에게 차는 맥주를 마시는 중하층 사회의 경제적 대체제가 되었다고 논평. 아시아에서 운송해온 차와 서인도제도에서 가져온 설탕은 맥주보다 값싼 음료를 만들었다. 새로운 음료는 곧바로 값싸면서도 필수적 상품이 되었음. 왜 영국인들이 특히 저가의 뜨거운 음료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공장들때문이었음. 영국은 주로 농원이나 탄광, 작은 점포 등 전통적 장소에서 돈을 벌던 것에서 공장으로 이행한 최초의 국가였음. 1800년대 초 영국인들은 직물을 짤 기계를 어떻게 제작하고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하여 그 방직기계들을 돌릴지를 해결. 공장 노동자들은 집을 떠나 일터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음. 그들은 자신만을 위한 식량을 재배하는 농지위에 서 있지도 않았고 간식을 먹고 싶다고 도중에 일을 멈출 수 있는 가게안에 있지도 않았음. 그대신 그들은 장시간 함께 일했고 허락을 받고 난 후에야 휴식을 취했음. 공장 노동자들은 들고 다니기 쉬우면서 다음 휴식시간까지 에너지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값싼 음식이 필요했음. 영국전역, 특히 맨체스터와 리버풀과 같이 검은연기로 가득 찬 도시들에서는 공장안에 호각소리가 울려퍼지면 노동자들은 일제히 쥐고 있던 프레스를 내려놓고 우르르 몰려 나와 설탕으로 단맛을 낸 차 한잔을 재빨리 마심. 그들은 보통 따뜻한 음료에 빵 조각을 적셔 먹음. 곧 영리한 공장장은 이 잠깐의 휴식과 단것을 한입 먹고 싶어하는 욕구는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 그래서 영국 노동자들에게 설탕으로 맛을 낸 쿠키와 사탕이 제공됨. 오늘날 에너지바라고 불리는 이런 식품들은 노동자들이 그것을 재빨리 집어먹고 장시간 교대근무를 수행하도록 촉진함. 1800년경부터 설탕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경제기구인 영국 공장들이 가동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기초식품이 됨. 설탕은 에너지와 미량의 영양분, 또 가장 빈곤한 노동자조차고 기대할 수 있는 따뜻한 차에 가미되는 달콤한 맛을 제공.
- 영국인들은 왜 직물가공공장을 건설한 최초의 국민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벌어들인 재산과 그들이 형성한 교역망, 노예와 설탕 교역을 통해 그들이 발전시킨 금융제도 때문이었음. 아닌게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된 값싼 직물은 노예들에게 옷을 입히는데 이용되었음. 영국공장들은 설탕에 의해 건설되고 돌아가고 지불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음.
- 1765년 4월 7일 일요일 저녁 북아메리카 로드아일랜드에서 남성 한무리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상선 폴리에 올라가 화물인 커다란 통을 공격. 커다란 통마다 설탕섬들에서 실어오는 당밀이 들어있었음. 이 사건은 보스톤 차 사건이 일어나기 8년전에 일어났는데, 그 쟁점은 같았음. 영국 의회는 북아메리카인들에게 아무런 통지도 없이 설탕에 세금을 부과했고 식민지 개척자들은 격노했음. 순수하고 단순하게 말해서 당밀 통들을 배에서 굴려 바다로 빠뜨려 설탕세를 내지 않겠다고 하는 로드아일래드인들은 영국인들의 입장에서 밀수꾼들이나 다름 없었음. 하지만 그 아메리카인들은 자신들이 세금에 저항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노예가 될 것이라고 주장. 그 아메리카인들이 믿기로는 자유민에게는 스스로의 힘과 두뇌와 의지로 일구어 온 것에 대한 권리가 있었음. 분명히 자유인들은 여전히 법률을 준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그러한 규칙들을 제정하는 데 자신들의 말과 목소리가 담겨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음. 자유인들은 왕 같은 아버지를 조용하게 충실히 따르는 아이들이 아니었음.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어른들이었음. 이것은 낡은 꿀벌의 시대 (이 시기 한 인간의 책무는 살아 있는 동안 쓸모 있으면서 순종적이고 자신의 숙명에 만족하는 것이었음.) 로부터 벗어나는 중대한 첫걸음이었음. 미국인들에게 재산을 소유하고 제어하는 일은 자유와 노예제 사이의 차이과 같은 것이었음. 그들은 어떠한 세금에 대해서도 저항했지만 그들에게 설탕은 대단히 취약한 약점이었음.
- 아이티이들이 프랑스군을 무찔렀을 때 나폴레옹은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높은 섬들과 함께 막대한 설탕수익을 얻겠다는 꿈도 잃었음.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갓 획득한 북아메리카 땅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음. 그것이 방대한 루이지애나 땅을 그가 단돈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제퍼슨에게 판매한 이유였음. 여러 교과서에서 미국의 루이지애나 매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 설탕 매입이라고 명명되어야 함. 아이티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달성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가의 중앙부를 구성할 땅을 프랑스로부터 획득.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아이티 노예소유주들에게 새로운 짐을 제공했음. 설탕 농장주들이 아이티혁명으로부터 도주할 때 일부는 쿠바의 오리엔테 지방으로 이주했고, 또 다른 일부는 북아메리카, 곧 루이지애나로 이주. 아이티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과 감독관들이 뉴올리언스로 도착할 때만 해도 노예 폐지론자들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종식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음. 노예제 종식을 위한 이 운동은 루이지내아 상황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극이었음. 사실 노예들이 라우지(형편없는) 애나라고 부른 이 주는 미국 아프리카인들에게 최악의 장소였음. 그것은 또 다른 카리브해의 반복, 곧 사형장이었음. 노예무역이 폐지된 후에도 모든 미국 노예 주에서 노예인구는 꾸준히 증가. 그것은 충분히 많은 노예 어린이가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되었기 때문. 이 규칙에 예외가 되었던 지역이 딱 한 곳 이었음. 바로 루이지애나였음. 루이지애나 현지에서 태어난 노예인구가 계속 감소했음. 설탕은 살인귀나 진배없었음.
- 재즈는 루이지애나에서 생김. 10대로 구성된 인구집단, 그것도 대부분 남자들인 이들이 속내를 말하고 주인에 맞서며 자신들이 세상에서 누구인지를 널리 알리는 방식의 하나로서 자신들만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영감을 어떻게 얻었던 것일까? 주인들이 노예들을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만든 기계안의 톱니바퀴라고 각인시켰을 때 푸에르토리코의 봄바, 브라질의 마쿨렐레, 루이지애나의 재즈는 모두 사람들에게 삶을 살아가고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다양한 사고와 꿈과 열정을 품을 기회를 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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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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