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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18 세계를 뒤흔든 경제대통령들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저자
유재수 지음
출판사
삼성경제연구소 | 2013-05-27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인물로 읽는 세계 경제정책의 역사 1930년대 말 총수요 확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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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을 공부하는 데 고도의 전문화된 재능은 별로 필요치 않음. 지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경제학은 철학이나 순수과학 등의 고등학문 분야에 비해 매우 쉬움. 참 쉬운 분야인데도 잘하는 사람은 매우 드뭄. 그 이유는 경제학자가 여러가지 재능을 남다르게 겸비해야 하기 때문. 몇가지 다른 방면에서, 갖추기 쉽지 않은 재능을 수준높게 지녀야 하는 것. 즉 경제학자는 어느 정도 수학자, 역사가, 정치가, 철학자가 되어야 함. 상징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말로 표현해야 함. 보편적인 것을 통해 특수한 것을 생각해야 하고, 추상과 구상을 공평하고 동일한 잣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함. 경제학자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연구해야 함.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규범 중 미세한 일부라도 관심의 대상에서 빠뜨려서는 안됨. 경제학자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동시에 초연함을 지녀야 함. 예술가처럼 때묻지 않고 초연하면서도 정치가처럼 현실적이어야 함
- 만일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한다면 상황은 정부의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는 손이 받는 손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은행가에게는 애국심과 고귀함이란 없다. 다만 이익을 추구할 뿐이다. (나폴레옹)
- 파리는 패션, 영국은 경매, 그리고 제네바는 은행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네바는 오랫동안 유럽의 금융 중심지였음. 지금도 로스차일드 등 세계적 금융회사들이 전 세계 고객을 상대로 영업중이고 특히 고액 자산가에게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라이빗 금융회사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음. 15세기에는 세계적 금융가인 메디치가문이 은행업을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 제네바가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된 데는 프랑스의 영향이 컸음. 프랑스의 태양와 루이 14세가 개신교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탄압을 가하지 개신교파인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은행업, 가죽수공업, 그리고 시계 제조 종사자들이었음. 오늘날 제네바가 세계적인 은행업과 시계제조업의 중심지가 된 이유가 여기 있음
- 영국은 17세기 후반에 이미 재정혁명을 통해 탄탄한 재정을 유지했기 때문에 전쟁 등 위기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음. 이것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건설의 원동력이기도 했음. 영국은 의회주의를 바탕으로 국왕의 경비를 꼼꼼히 관리하고 예산의 씀씀이도 철저하게 통제했으며 차입을 하더라도 단기보다는 장기로 차입. 저금리로 장기차입을 하려면 정부의 신용상태가 튼튼해야 했음. 영국의 경우 단기채권이었던 유동공채 대신 원금상환 없이 이자만 영구히 지급하는 확정공채를 발행. 평상시에 안정적 조세수입과 저금리 차입으로 재정을 건전하게 관리했고 이를 통해 유지된 높은 신용도로 전시 등 위기상황에서 단시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가능했음. 이런 재정건전성 덕분에 영국은 7년 전쟁 동안 막대한 경비를 자체조달한 것은 물론 동맹국들을 지원해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음.
-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 부른다. 내가 천재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제가 주어지면 아주 깊게 공부한다. 밤이고 낮이고 항상 공부한다.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내 천재성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노력과 생각의 결과물일 뿐이다. (알렉산더 해밀턴)
- 중앙은행 설립을 둘러싼 해밀턴과 매디슨의 정치적 대립은 중앙은행 문제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 시스템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정당정치의 탄생을 가져온 것. 중앙은행 설립안이 하원에서 비교적 여유있게 통과되었지만 상공업을 기반으로 한 북부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남부의 주들은 예외없이 편을 지어 갈라섰음. 중앙은행 논쟁을 계기로 중앙정부의 권한을 중시하는 연방주의자들과 주 정부의 권한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자들 간의 대립은 이후 정치적 이념대결로 이어졌으며 대법관을 역임한 마샬은 미국의 정당정치의 근원을 캐다보면 결국 해밀턴과 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의 대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바 있음. 특히 제퍼슨 등 공화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은 친프랑스 주의자들이었고 연방주의자들은 영국의 의회정치 시스템에 영향을 크게 받은 친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건국 초기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간에 분쟁이 있을 때마다 어느편을 들 것인지를 놓고도 대립
- 만일 미국인이 은행에 은행권 발행권한을 주면 그들은 인플레와 디플레를 활용해서 아버지가 지켜낸 이 땅의 아들들이 집도 없는 처지가 될 때까지 재산을 앗아갈 것이다. 은행권 발행권한을 은행으로부터 빼앗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국민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지폐는 가난을 의미한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돈의 유령일 뿐이다. (토머스 제퍼슨, 1778년 애드워드 캐링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 통상 보불전쟁(1871)이후부터 1차대전(1914)발발 직전까지를 가리켜 벨 에포크라 부름.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의미. 물론 1차대전이라는 인류사 초유의 참극이 일어나기 전이니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경제정책의 역사에서 보면 어느시대 못지 않은 격변기였음. 이 시기에는 각국이 기존의 정책 노선에서 탈피하기 위해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추구하는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기득권층의 날카로운 대립이 지속됨.
-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세계 각국의 정치경제는 혼란 그 자체였음.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국수주의, 무정부주의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이념이 그대로 분출됨. 1차대전이후 잠깐의 경제특수는 곧 불황에게 자리를 내줌. 하지만 각국 경제의 최우선 관심사는 불황극복이 아니라 금본위제 복귀였음. 1차대전 직후인 20년부터 세계 주요국들은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시장. 이 모든 논의의 이면에는 JP 모건 쿤론사의 폴 와버그 등 국제투자은행가들의 무시할 수 없는 압력이 있었음. 세계경제의 중심축이었던 유럽과 미국이 금본위제의 복귀 및 유지를 위해 경제현실가 동떨어진 긴축을 강화하면서 각국의 불황은 깊어만 갔고 이 불황은 금본위제로 연결된 망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음. 그 결과 대공황이 초래됨. 그제야 금본위제의 늪에 빠져 있는 현실을 알아챈 각국은 서둘러 금본위제를 버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불황이 만들어낸 파시즘은 또 한차례의 세계대전을 이끌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음. 1차대전 이전의 금본위제가 비교적 오랜기간(1873~1914) 국제경제질서를 유지했다면 양차대전 사이의 금본위제가 유지된 기간은 겨우 6년 정도. 하지만 이시기의 각국 경제정책은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를 토대로 고안할 수 있는 상상가능한 모든 정책이 다 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했고 이는 비단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 파급효과를 발휘했음. 게다가 한 나라에 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책이 동일한 처지의 이웃나라에는 맞지 않는 등 정답없는 상황이 반복되었음.
-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는 미국으로 경제의 중심축이 옮겨진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 영란은행과 시티 오브 런던 금융가들의 무모한 시도였으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일자리에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옴.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는 영국에게 영광을 돌려주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국의 금융시장을 월가에 종속시켰으며, 영국은 심각한 불황을 맞아 결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코너로 몰림. 한편 주목할 만한 것은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가 미국의 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훗날 대공황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 당시 미국의 금융정책을 총괄하던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총재 벤저민 스트롱은 영국을 금본위제로 끌어들여 세계 외환시장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다. 그는 영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이를 지원하기까지 했음. 당시 벤저민 스트롱은 1차대전 이후 미국으로 계속 유입되는 금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라 금의 추가유입을 막고 영국의 금본위제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금리를 낮게 유지했음. 하지만 이 저금리 기조는 미국의 주식시장을 과열시켰고, 결국 주식시장의 대폭락과 함께 전 세계에 대공황을 불러오게 됨.
- 많은 학자들이 큰 땅덩어리와 부존자원 등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때 슘페터는 한 나라의 발전은 그 나라가 가진 자원, 예를 들어 인구, 국토, 부존자원 등에 좌우되기보다는 가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 또한 다른 주류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혁신, 기업가 정신, 그리고 신용에 주목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끊임없는 혁신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자 창조적 파괴의 끊임없는 원동력이라고 봄. 아울러 기업가를 고정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기존의 자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사람으로 보았고 이러한 기업들의 새로운 생각이 경기변동을 가져온다고 생각. 따라서 국가는 이들 기업가가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 사유재산권, 안정적 물가, 자유무역, 합리적 세금 일관성 있는 규제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 예를 들어 무역을 자유화하면 혁신이 가능하고 이런 혁신을 통해 인구, 영토, 그리고 자원 등 한 국가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
- 내부의 치명적 결함으로 인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너질 것으로 예상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종말을 가져올 것으로 보았음.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발달이 많은 지식층을 양산할텐데 이들이 거꾸로 사유재산권과 자유 등 자본주의의 근간을 받치고 있는 시스템을 공격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무너지리라 보았음.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하고 이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슘페터는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예측한다고 해서 환자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서 나타나든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언한 것. 슘페터는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마르크스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의회민주주의의 다수결 투표제도에 의해 혁신을 주도하는 자본가 정신이 제약을 받을 것이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게 될 것으로 보았음. 즉, 의회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인들이 책임질 수도 없는 분야에서 주장을 하거나 아울러 자신이 속하지도 않은 사회계층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자본가 정신을 제약하는 제도를 만들어내면서 이들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이끌 것으로 예측한 것. 이로 인해 그의 자본주의 종말이론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를 가장 옹호하는 주장이 되었음.
- 미국의 금리인상은 금본위제로 연결된 세계 경제환경에서 금의 유출을 막기 위한 다른 나라들의 금리인상을 불어왔으며 이는 미국의 불황을 전세계로 수출한 꼴이 되었음. 이로 인해 다른 나라들에 불황이 초래되었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이는 소비시장의 몰락을 의미. 수출시장을 잃은 미국의 제조업자들은 도산의 길로 들어섬. 대공황의 서막이 오른 것.
- 리플레이션 정책은 기업의 수익을 높여주고 사람들의 불황심리를 진정시키며 이는 자산사격의 상승에도 긍정적으롤 작용한다. 물가수준을 이전으로 돌리기 위해 장기 금리 이상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소위 리플레이션 정책은 30년대 일본과 미국 양국에서 경제를 호전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일본에서는 리플레이션 정책으로 대공황에 빠져 있던 경제를 훌륭하게 구출해낸 재무장관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있었으며 미국에는 금융완화를 통한 리플레이션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있었다. (벤 버냉키)
-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일본 재무장관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우리나라보다 서양에 잘 알려짐. 많은 학자들이 다카하시의 확장적 재정정책의 성과를 연구해 발표하고 있으며 미국 연준의장 벤 버냉키는 그를 확장정책을 통해 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일본을 탁워라게 구해낸 재무장관으로 극찬.
- 다카하시는 러일전쟁의 자금을 조달하면서 이후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많은 교훈을 깨우쳤음.
(1) 유럽과 미국의 자금지원이 없었다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음. 비록 유대인을 탄압하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긴 했지만 특히 쉬프와 워버그 가문이 일본에 발행한 국채의 절반가까이를 인수해 준 것과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 은행이 전쟁 이후 차환발행을 지원해준 것이 전쟁승리에 결정적이었음.
(2) 영국이 만든 군함과 미국의 석유회사 쉘이 연료를 공급해주지 않았다면 역시 러시아를 이기기 어려웠음. 발틱함대를 물리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만주에서 승리를 거둔 노기 장군이 전쟁직후 신격호되다시피 했지만 사실 영국이 제공한 신형 군합이 승리에 결정적이었음.
(3)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투명성을 유지해야 함. 그는 채무자의 신용 및 상환능력에 대한 상세한 자료 없이는 외국인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배움.
(4) 상환능력이상으로 돈을 빌리는 것은 위험하다
(5) 일본과 같은 개도국은 영국과 미국이 이끄는 세계질서 내에서 기회를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재정을 건전하고 유지하고 군비를 억제해야 한다.
(6) 일본이 빚을 갚아 나가기 위해서는 재정긴축 등 절약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재정확대를 통한 경제성장으로 상환자금을 마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배움. 이러한 다카하시의 깨달음은 훗날 일본의 지나친 군비확장과 중국 경영에 대해 정부 내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갖게 했으며 특히 군비확장에 대한 반대입장으로 인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됨
- 전세계가 대공황의 영향 아래 있고 일본 역시 극심한 불황 속에 있을 때 대장대신에 복귀한 다카하시는 케인스 주의 정책을 구사. 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성공적 정책이었음. 그가 보여준 재정정책, 통화정책 및 환율정책의 조합은 케인스 이론이 미처 정립되기도 전에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이 주장하는 정책조합의 실례를 보여주었음.
- 다카하시는 대공황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본위제 탈퇴라는 환율정책, 저금리 정책인 통화정책 그리고 재정지출 확대를 동시에 구사하는 정책조합을 선택. 다카하시는 취임직후인 31년 12월 금본위제를 탈퇴하면서 곧바로 외환에 대한 통제를 실시. 아울러 엔화에 대해 약 40퍼센트의 평가절하를 실시하여 금본위제로 인한 디플레이션 압력에서 벗어났고 일본의 수출품에 대한 가격경쟁력을 제고함. 다카하시의 금본위제 폐지와 엔화에 대한 평가절하로 인해 30년 100엔당 49달러였던 엔화의 가치는 33년경 25달러까지 떨어짐. 물론 일본이 금본위제를 포기할 것으로 예상하고 투기한 세력들은 이렇게 50퍼센트 이상 엔화가 평가절하되자 큰 돈을 벌었음. 엔화의 평가절하는 수출확대로 이어졌고 흑자로 전환됨. 다카하시는 또한 장기금리를 낮게 유지해서 투자를 유인. 일부에서는 지나친 저금리는 산업의 구조조정을 저해할 것이라며 비판했지만 다카하시는 산업계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저금리 기조를 계속 유지
- 47년 오랜 투쟁끝에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를 이끌게 된 간디는 향후 인도경제를 이끌 재무장관에 네루를 임명. 동인도회사 등 무역을 빙자하여 인도를 철저히 착취해온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해 자급자족운동인 스와데시를 주도했던 간디가 독립이후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론과 반대로 철저하게 보호주의 정책을 취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음.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싸운 초기 인도 지도자들은 영국이 무역을 구실로 자신들을 착취하자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경제적 자유 또한 죄악시했음. 일부는 이런 인식을 인도의 전통적 계급제인 카스트를 통해 설명하기도 함. 즉 승려(브라만) 무사(크샤트리아) 계급에 비해 상업과 교역에 종사하는 바이샤는 낮은 계급으로 분류 되었음. 물론 간디의 주변에도 독립투쟁을 같이 하던 동료들 중에 시장경제제도를 지향하는 라자 고팔라차리와 파텔 등이 있었지만 간디는 영국의 사회주의자인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는 런던정경대학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한 네루를 경제 책임자로 선택
- 인도경제가 30년 넘도록 우울한 저성장 속을 헤메게 된 데는 그의 딸 인디라 간디의 책임이 크다고 보아야 함. 67년 인디라 간디는 대다수 업종을 소규모 기업에게만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69년에는 독점방지법을 통해 사실상 대기업의 출현을 저지. 이후 외환을 통제하여 수입을 제한했고 노동분쟁법을 통해 노조의 권리를 대폭 강화. 또한 은행국유화를 통해 저소득층에 대한 선심성 신용공여를 추진하는 등 포퓰리즘적 경제정책을 강화. 그 결과 인도에는 수많은 규제와 국가의 개입으로 상징되는 경제시스템이 고착됨
- 인디라 간디는 소위 라이선스 라지라 불리는 각종 허가제를 계속해서 확대. 라이선스 라지로 인해 수입업자는 수입품목을 정할 때, 기업인은 새로운 상품을 만들 때, 또 공장을 신설하거나 폐쇄할 때 거의 모든 경제행위에 대해 허가를 받아야 했음. 혹자는 이를 가리켜 인도는 경제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만들기 위해 경제를 운영한다고 말했을 정도임.
- 캐나다의 금융감독 시스템이 잘 유지되는 근저에는 미국보다 훨씬 보수적인 문화적 배경이 있음. 하지만 보다 금본적으로는 법과제도에서 그 차이를 찾을 수 있으며 최근에는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중. 미국의 금융시스템은 역사적으로 정치권력과 은행 경영자 간 담합의 산물이어서 위기에 취약. 또 미국의 은행시스템은 은행이 지점을 보유하지 않는 단일은행제도여서 지역의 정치권력과 은행 경영자가 자연스럽게 결탁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임. 반면 캐나다의 경우 광활한 국토를 많은 지점망으로 연결하고 있는 몇몇의 거대은행이 지배하는 구조여서 지역의 정치권력과 은행경영진이 결탁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무분별한 경영이 이루어지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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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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