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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문명

역사 2014. 10. 17. 22:51

 


시계와 문명

저자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3-08-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13세기 후반, 유럽과 아시아의 길을 결정지을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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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기술진보는 최근의 열광적 저술들이 무비판적 독자들을 착가가하게 할만큼 급속하거나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진보가 일어났으며 그 수준은 상당했음. 11세기부터 15세기말까지 유럽기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보했음. 농업을 비롯해 건축, 항해, 조선, 직물, 야금술, 목공, 회계, 금융, 운송, 에너지 생산과 전술 분야가 발달. 기술사에 관한 어떤 책을 보든 독자는 이런 진보의 세부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음. 저자는 중세 유럽에서 적지 않은 수의 무명 수공업자들이 그들답게 다소 조잡하지만 결연한 방식으로, 온갖 종류의 바퀴와 장치, 다양한 형태의 나사를 갖고 실험했다는 사실을 강조. 고대에도 이런 종류의 기구에 대한 취미가 있는 아르키메데스나 헤론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음. 하지만 그들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그들의 노력은 호기심 어린 실험단계나 제한적인 응용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음. 기계들은 비잔티움과 이슬람 중동은 예술적 기교가 뛰어난 기술전통을 유지하면서 고대인들의 예를 따랐고 두 지역 모두 기계장치를 다루는 수공업자가 있었음. 그러나 그런 수공업자의 수는 언제나 극소수였음. 더구나 당시의 수요구조와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는 대개 수공업자의 솜씨를 회전목마나 압축공기분수, 자동필 등과 같은 화려한 오락거리, 즉 비잔티움과 무슬림 통치자들의 극적 장관에 대한 열광을 충족시키는 일로 국한시켰음. 반대로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시작. 이들은 응용역학을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 연구했음.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
- 숙련 이주민들이 가져온 자극이 경제에 지속적 효과를 낳으려면 수혜국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에 문을 열어야 했음. 많은 이탈리아 기술자들이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으로 갔지만 오스만 경제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음. 반면 숙련공의 유출은 한 나라의 쇠퇴에 일조하면서 동시에 쇠퇴의 징후이기도 했음. 예를 들어 많은 수의 유능한 수공업자를 잃은 이탈리아는 역동적이고 고도로 수용적인 사회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정체되고 보수적 사회로 바뀌었음. 17세기 초에 파인스 모리슨은 르네상스 후기의 이탈리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음. 자신들이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며, 이탈리아에서는 훌륭하고 유익한 것이 많이 나고 불후의 예술작품과 건축물이 많다고 생각. 이는 그들이 외국으로 아예 나가지 않거나 좀처럼 나가지 않기 때문. 그들은 전쟁에 따라나서거나 외국과 교역하기 위한 모종의 필요에 의해서만 바깥으로 나감.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거나 알려진 것은 이탈리아에서 모두 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은 자국의 지식과 지혜를 자만함. 마침, 숙련 노동력을 수입하던 나라들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도 채택했는데 이 새로운 신앙에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 지상주의는 문자해득을 장려함으로써 인적자원의 질적 향상에 기여. 이것들과 다른 요인들이 결합하여 1550년부터 1650년 사이 유럽 경제력의 균형추가 이동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 베사리온 추기경이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로 가서 서방의 최신기술을 배우라고 촉구한지 두세기가 지난 후, 기술발달과 경제발전의 지도적 위치는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야금술에 한해서는 스웨덴이 차지하게 됨.
- 실리주의적 풍조는 중세 도시 문명에서 탄생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촉진했으며 베이컨 철학에 의해 범위가 좁혀지고 강화되었음. 그리고 이 풍조는 새로운 기계에 대한 커져가는 열광과 그러한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나타났음. 다른 한편으로, 역학, 화학, 현미경 관찰, 정성 천문학은 이제 막 태동했고 새로운 탐구분야로의 진입장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 가브리엘 하비는 1593년에 "뛰어난 숙련공이나 생각이 있는 근면한 전문 직업인이라면 비록 학교에서 배운적이 없거나 책을 읽지 않을지라도 누구나" 과학의 진보에 눈에 띄는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적었음. 이것은 장밋빛 과장이었음. 한세기가 지난 후 더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존 에벌린은 로버트 보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계에 밝지만 생각이 엉뚱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변 그중 많은 부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투덜거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도구 제작자같은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많음. 유럽의 상황과 중국의 지배적 상황을 대조한 조지프 니덤 교수는 근본적으로 옳았음. 그는 이렇게 적음. "유럽에서는 중국과 달리 일정한 영향이 작동했다. 실제적 지식가 수학공식 간의 교차로 나아가는 그러한 현상의 일부는 신사와 기술자가 교류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유럽의 사회변화와 틀림없이 관련이 있다. 사실 그것은 신사가 기술과 과학의 문제에 전념해도 위신을 잃지 않게 된 사회문화적 변화와도 적지 않은 관계가 있다. 유럽에는 학자와 수공업자 이외에도 학자나 수공업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아마추어 과학자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음. 17세기와 18세기 초기 과학의 진보에서 이 명인들이 했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확실히 숙련공들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컸음.
- 종은 중세 도시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음. 종은 공동체의 삶을 지배했고 종소리는 만물을 질서와 평온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음. 모두가 종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종소리는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했음.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불이 났거나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군대나 평화로운 모임에 소집하며,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때, 일터에 나갈 때 기도할 때와 싸울 때를 알려주고 장을 열 때와 닫을 때를 알리고, 교황의 선출과 국왕의 즉위, 승전을 축하했음. 널리 퍼진 믿음에 따르면 종소리는 폭풍과 전염병을 막는데도 도움이 되었음. 도시와 교회, 수도원이 아름다운 종이나 소리가 맑은 종을 갖는 것은 그곳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장치도 개발됨. 톱니바퀴와 왕복 지렛대로 구서오딘 이런 장치들이 기계식 시계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음. 마지막으로 중세에는 천문학자와 점성학자를 포함한 사람들이 있었음. 그들은 지구의나 천구의를 만들고 그것들이 별과 행성의 운행을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데 관심이 많았음.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러한 장치들을 제작하면서 개발된 기술이 수공업자들로 하여금 기계식 시계를 제작하는 데에도 한걸음 더 다가서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시계였으므로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 대장장이, 일반적인 금속 노동자인 것은 이해할 만함. 하지만 가내용 시계와 회중시계가 점차 흔해진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화. 더 작은 시계들은 값비싼 장치였고 부유층이 소유. 시계는 사치품이라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를 특징짓는 장식과잉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음. 새로운 유행을 만족시켜야 하는 수공업자들은 대장장이나 자물쇠공보다 보석 세공인의 기술이 필요했음.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다란 공공 시계 제작자와 작은 시계 및 회중시계 제작자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
- 과학연구 활동이 만발하고 폭발적인 활기를 띤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에 새로운 과학의 대변자들은 측시학에 열렬한 관심을 보임. 그들이 보기에는 시계는 우수한 기계였고 시계는 그들을 사로잡음.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한 매혹 이상이 존재. 16세기와 17세기는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을 목도하고 대양항해가 크게 확장된 시기. 천문학자와 항해자 모두 정확한 경도를 결정하고 별이 뜨는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한 정밀한 측시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과학혁명의 핵심인 역학의 기본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음. 시간을 측정하고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문제에 몰두한 사람들로는 갈릴레이,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로버트 후쿠, 호바르트 벤델런, 니콜라스 파티오, 빌헬름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음.
- 적어도 17세기 말까지 시계산업은 커다란 자본설비나 복잡한 조직이 필요하지 않았음. 수요측면에서 만족스러운 여건만 조성된다면 커다란 시계산업 중심지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은 몇 안되는 수공업자들뿐이었음. 이미 지적한 것처럼 17세기 중반에 파리에는 시계장인이 24명이었고 시계산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의 장인숫자도 그보다 많지 않았음. 산업을 건설하거나 파괴하려면 십여명의 수공업자를 해고하거나 떠나게 하면 되었음. 오늘날 우리의 측시학 수준은 그렇게까지 취약하지 않지만, 더 고차원적인 수준에서 뛰어난 과학자 십여명을 골라 학살한다면 여러 과학분과의 진보가 정체될 것임. 뉘른베르크와 아우크스부르크는 쇠퇴한 반면 제네바와 런던은 시계산업의 주요 중심지로 부상. 두지역 모두 산업의 발달은 소수의 피난민의 유입- 적지만 귀중한 분량의 인간기술의 투입과 관련이 있었음.
- 처음으로 극동에 도달했을 때 유럽인들은 주로 향신료에 관심이 있었지만 다른 여러 상품, 즉 일본산 구리, 인도산 면직물, 페르시아산 비단과 카펫, 중국산 도자기, 17세기 말부터는 중국산 차도 이윤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림. 그러나 무역의 주요 장애물은 동양의 산물과 교환할 때 내놓을 상품이 자신들에게 거의 없었다는 점.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과학에서 서양의 우위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동양은 내놓을 원자재와 상품이 많았던 반면 서양은 아시아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거의 내놓지 못했던 상황을 쉽게 상상하지 못함.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지배적인 양상이었음. 대포를 탑재한 원양범선으로 유럽인들은 대해의 주인이 되어 이슬람의 해운과 교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아시아 내 무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음. 일본의 은을 중국에, 일본의 구리를 중국과 인도에, 향신료 제도의 정향을 인도와 중국에, 인도산 면직물을 동남아에, 페르시아산 카펫을 인도에 가져옴으로써 유럽인들은 해운과 상업활동에서 만족스러운 이윤과 수익을 얻음. 이것으로 유러벵 수입되는 아시아의 생산물 일부에 대금을 지불. 그러나 수익은 충분치 않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아시아 수입품에 대해서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대규모의 정금을 이전하는 방법으로 지불할 수 밖에 없었음. 대량의 은이 레알화, 즉 세비야에서 주조된 에스파냐 은화나 멕시코 달러,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주조된 은화, 프랑스 크라운화, 네덜란드 릭스달러 은화 형태로 매년 아시아의 수중에 들어감.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의 무역흑자 덕분에 유럽인들은 은을 풍부하게 구할 수 있었음. 에스파냐의 아케리카 식민지와 극동 사이에 필리핀을 통해 비교적 제한된 형태로 직접적 교역이 이뤄지고 있었음. 하지만 이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유럽으로, 그곳에서 다시 동쪽의 아시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방향으로는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것이었음. 아시아의 상품은 유럽으로 갔고 유럽의 상품은 아메리카로 갔음.
- 서양인들에게 서양상품에 대한 동양의 낮은 수요는 심각한 문제였음. 하지만 그보다 더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의 제품들이 주요 경제부문에 걸쳐 유럽시장에서 유럽의 상품과 성공적으로 경쟁한다는 사실. 브리스톨의 상인이었던 존 캐리가 표현한대로 동인도 무역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데 우리의 정금을 수출할 뿐 우리의 상품이나 제품은 거의 수출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제조된 상품을 수입해와 우리 제품의 소비를 저해하기 때문. 동인도의 비단과 광목이 영국으로 수입되어 영국 직물업에 어려움을 야기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 거론할 필요도 없음. 영국으로서는 인도의 리카도가 등장해 비교우의의 법칙을 들어 영국은 모두 양치기로 전환하고 필요한 직물은 인도에서 전부 수입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영국인들을 설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음. 그 대신 영국은 인도산 직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일련의 법령을 통과시켰고 얼마간 좋은 결과를 얻음.
-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라고 그리고 왜 중국은 산업화로 나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함. 그러나 로빈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님.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님. 어쩌면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름.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의미할지도 모름.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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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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