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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19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저자
스베냐 플라스펠러 지음
출판사
로도스 | 2013-04-19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당신의 노동은 어떠십니까?우리는 매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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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중독자는 강박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일로 소진함. 그는 일을 해야하며 도저히 일을 멈출 수 없음. 지속적인 흥분상태가 갑자기 중단되면, 어찌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불안이 엄습하기 때문. 과도한 향락 노동자에게 일체의 여가는 오히려 고통임. 책상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시간 감각이 완전히 상실되어 야근도 야근이라 느끼지 않지만, 할일이 없어지면 시계소리조차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게 느껴짐. 그는 계획되지 않은 시간이나 따분함을 견딜 수 없으며, 한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하늘에서 당장 날벼락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박적 분주함에 빠져듬. 메일체크, 조깅, 정리정돈이 가장 흔한 대리행동임. 오늘날의 성과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노동충동을 열정이나 활력과 쉽게 혼동하는데, 사실 이는 우울증에 저항하는 절망적 투쟁에 다름 아님. 향락 노동자는 밤이 되어도 쉬지 못하고, 어느 순간 힘이 다 떨어져 완벽한 무감각에 빠질때까지 쉼 없이 머리를 굴려야 함.
-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모든 것이 정상이면 잘 작동하고 작동이 멈추면 약품이나 기술을 동원해 고칠 수 있는 논리정연하고 자율적이며 투명한 체계가 아님. 오히려 인간은 처음부터 흠집투성이의 존재임.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함. 인간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함.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서 꼭 필요함. 애정관계에서뿐 아니라 일에서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욕망과 관련이 있음.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타인과 관련이 있음.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좀더 노력하면 가능할 거란 희망으로 인정에 대한 끝없는 야망을 불태움. 타인에 대한 바로 이 필수적인 의존성은 한편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끝없는 절망으로 밀어넣음. 우리는 절대로 타인의 인정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 실제로 인간의 의심은 인간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에너지, 호기심, 성적욕망, 야망, 창조력을 포함해서) 근본적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이 같은 불안에 기인. 우리들은 플라톤이 향연에서 묘사하듯 자신에게 만족하며 명랑하게 세상을 굴러다니는 다리 넷, 팔 넷의 생명체가 아님. 우리는 욕망하는 존재임. 제우스가 둘로 갈라놓자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는 그들처럼 우리는 인정을 갈망함.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말을 빌면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임.
- 쉼 없는 행동과 강박적인 자기 최적화의 시대에 다시 놓아두는 법을 배워야 함. 다양한 형태의 놓아두기는 이용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목적의 자유, 무목적의 자유임. 모든 요구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에만, 모든 가능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박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움. 그것은 풀어주고 들여보내고 존재하게 하는 자유, 무위의 자유, 중단과 여유, 놓아주기의 자유임. 능동성 옆에 수동성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가 사는 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음. 금욕과 방탕의 자리에 우리를 흥분시킬 향락이 들어서야 함.
- 향락의 극단성은 자유의 증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 충동포기의 증상임. 향락이란 결국 금욕을 배경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금욕이 클수록 향락은 더욱 커지기 때문. 현대 사회의 정신분열증은 명백함. 사방에서 즐기라는 명령이 울려오고 우리가 그 명령에 복종한다는 사실은 이 문화의 핵심이 얼마나 답답하고 점잔을 빼며, 또 얼마나 금욕적인지 잘 보여주는 것임.
- 문명화된 향락주의자는 통제된 향락을 우상으로 승격시킴. 그리고 이 우상에 모든 것을 바침. 자발성, 욕망, 쾌락, 심지어 향락 자체도. 이제 향락 대신 엄격한 자제가 전면에 나섬. 이 금욕적 향락주의자는 이제 포도주 한 모금을 마셔도 부작용을 생각함. 고기를 좀더 드시겠냐는 물음에 마치 그 질문이 생명에 위협을 가하기라도 하는 듯 손사래를 치며 거절의사를 표함. 물론 늦은 저녁이나 밤에 과식을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포도주 한병까지 곁들이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몸은 우리에게 감사할 것임. 하지만 벤야민의 말대로 모든 것을 자제하기만 한다면 참된 세계를 경험하지 못함. 탐하는 자만이 사물의 본성에 깊이 빠질 수 있기 때문. 항상 절도를 지키는 그는 아직 어떤 음식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음식에 대한 향락은 배우지만 절대로 음식에 대한 탐욕같은 것을 경험할 수 없다. 식욕의 평평한 도로를 벗어나 폭식의 원시림으로 이어지는 샛길은 그에게 감추어져 있다. 폭식에서는 두가지가 만난다. 욕망의 무절제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들의 동형성. 폭식이란 무엇보다 이런 의미이다. 한가지를, 모조리 먹어치운다. 그것은 향락보다 음식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모르타델라 소시지를 빵처럼 베어먹고, 멜론을 베개처럼 끌어안으며, 워석거리는 종이에서 캐비아를 핥아먹고 에담치즈 한 덩어리에 지상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폭식인 것이다.
- 오늘날 우리가 성적인 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지 않고 강렬한 세상의 빛 속으로 끌어냈다는 사실이 곧 우리 모두가 더한 쾌락을 즐기고 더욱 에로틱해졌으며 쾌락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 실제는 정반대임. 섹스가 터부의 구역에서 걸어나와 상품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었다.
- 21세기의 섹스는 더 이상 부재하는 것, 숨겨진 것, 신성한 것,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것이 아님. 오히려 노골적으로 강요되고 그래서 점점 더 세속적인 것이 되었음. 끊임없이 집요하게 노출되고 상업화될수록, 성적인 것은 폭발력을 잃어버리고 식상해졌다.
- 분주함은 결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분주함은 기존의 것을 재생산하고 가속화한다. 창조적으로 일하고 자신의 문제에 개방적일 수 있는 사람은 쉬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산책하고, 잠을자고, 꿈을 꾸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권태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 의례의 문화를 쓴 크리스토프 불프와 외르크 치르파스는 말한다. 의례화된 행동들이 일상생활의 특수한 실천들에 틀을 부여함으로서 그것의 제약을 통해...불특정 행동이 특정행동으로 변화한다. 이런 맥락에서 의례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동질화된 과정을 형성한다. 의례와 결부된 기술이나 책략은 필요한 실행의 반복가능성, 조종가능성, 통제가능성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의례에는 매우 실용적 기능도 있다. 의례가 있으면 고민이 없어진다. 제과점에서 식빵을 살지 크로와상을 살지, 퇴근 후 운동을 할지 매번 고민할 필요가 없다. 또 행위의 자동화는 그 행위를 활기차게 실행에 옮기는 데에도 어느정도 도움이 된다. 매일 아침 시리얼을 먹는 사람은 오늘만 시리얼을 먹는 사람보다 훨씬 노련하게 준비를 한다. 필요한 것들이 다 있는지 항상 꼼꼼하게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탈진할 때까지 일을 하는 것은 일을 하면서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며, 다시 말해 자아를 실현하기 때문도 아님. 또 순전한 생활의 필요성 때문도 아민. 일에 온 힘을 쏟아붓는 이유는 문화적으로 이식된 죄책감과 싸워야 하기 때문. 일을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만 가치 있는 인간이 됨. 설렁설렁 일하거나 아예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은 죄를 짓는 것임. 인간의 가치를 노동력에 따라 판단하는 기존 사회의 법칙앞에 죄인인 것임.
- 현대의학은 통증과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음.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통증은 이제 더 이상 참고 견뎌야 하는 숙명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하는 장애물. 물론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통증과 싸워왔음. 약초를 먹고 아편을 피우는 것은 물론이고 악령을 몸에서 꺼내겠다고 두개골을 열거나 피부를 찢는 등 잔혹한 방법도 동원했음. 하지만 통증을 보다 확실하게 제거하거나 회피할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아스피린과 마취제가 개발되면서 부터임. 요즘 수술환자는 마취없이 살을 찢던 200년 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함. 끈질긴 감염도, 심한 부상도, 진행된 암도 진통제 덕분에 일정지점까지는 참고 견딜 수 있음. 의약품이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거의 모든 종류의 유기적 통증에 국한되지 않음. 우울증, 탈진, 불안을 막아주는 약품까지 나옴. 80년대의 스타가 아스피린이었다면 요즘엔 플루옥세틴, 메트프롤롤, 두랄로잠 등이 대세임. 그냥 알약 한알만 삼키면 발표를 앞두고 공포로 사지를 벌벌 떨던 여대생이 연방의회 토론장에 등장한 독일 여성 수상 앙겔라 메르켈처럼 당당해짐. 진통제의 발전은 인간의 통증경험을 바꾸어 놓음. 알약을 복용하기만 하면 통증이 제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통증을 참겠다는 환자의 각오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춤. 통증은 진보가 제거해야 할 불필요하고 비생산적 잔재로, 사라져야 할 무서운 시대착오로 취급됨.
-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든다. 통증으로부터 절대적 해방이라는 유토피아는 대체 어떤 인간상을 기초로 삼는 것일까? 물론 통증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요즘 누가 전신마취도 안하고 수술을 하려고 하며 또 그럴 필요가 있는가. 통증 제거의 가능성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경우라도 통증완화치료는 인도주의의 계명임. 그렇지만 모든 통증을 버튼 하나 눌러서 없앨 수 있다면 인간은 기계와 무엇이 다른가? 통증없는 생명이란 것을 상상할 수 있기는 한가?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유기체는 주변 세상에 녹아들어 갈 것임. 나는 통증을 통해서만 나와 세상의 경계를 느끼고 통증을 통해서만 일이건 사랑이건 운동이건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내 몸이라도 내가 남김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며, 몸이 저항할 때는 그 뜻을 존중해 주어야 몸이 상하지 않는다는 것도 배운다.
- 신체의 위대한 건강에는 통증의 인식과 감수도 포함됨. 통증을 느낄 수 있어야만 우리가 언제 자신은 물론 남의 신체를 과도하게 도구화하여 우리 몸의 자율성을 파괴하기 시작하는지 확실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 그러므로 통증은 단순히 병든 신체의 신호가 아니라 능력있는 신체의 가능성의 조건임. 합리적 신체사용과 그 덕분인 신체와의 관계의 성공적인 기술인 것. 자신의 통증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만이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에게 휴식과 후퇴를 허용함. 통증은 건강을 지키느니 파수꾼이요, 온정주의 방식으로 경계선을 그어주는 수호성인임. 여기까지만, 더 이상은 안돼! 하고 말이다. 나아가 통증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요청이다.
- 신체는 성과사상에 반대함. 안되면 약을 먹어서라도 억지로 적응시킴. 나는 세상에 나에게 요구하는 만큼 혹은 나 스스로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만큼 일을 해야 함. 이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감각을 상실함. 스포츠에서도 통증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경고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음. 물론 과거에도 사람들은 세계기록을 깨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 하지만 지금처럼 도핑이 스포츠의 일부가 된 적은 없었음.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마취를 하면 찌르는 듯한 통증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승리의 욕망만 불타오름. 그러니 아마추어 선수들까지도 일년에 한번 열리는 마라톤 경기를 포기하느니 무릎주사 한방으로 통증을 진정시키는 쪽을 택함
- 예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 통증제거 방법은 애정과 신체접촉, 마사지, 위로, 기도 등임. 그러므로 고통과 허약함을 보여주는 것은 또한 인간적 친밀함이 필요하다는 표시이기도 함. 실제로 그런 친밀함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받기 쉬운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에서만 존재함. 내가 나의 상처받기 쉬운 모습으로 상대를 신뢰할 때에만 관계가 탄생할 수 있고, 나의 상처받기 쉬운 허약함에 대해 알아야 상대도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음.
- 통증으로부터 자유를 바라는 마음은 질병과 관련없는 영역까지 범위를 확대하고 있음. 하지만 통증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철학자 니체는 알고 있었음. 그에 따르면 예민한 감각과 예민한 미각은 인간이 통증을 느낄 수 있고 부상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 다양한 종류의 통증은 그런 인간에게 끝없는 눈보라처럼 몰아치고 가장 강한 번개처럼 내리침. 사방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밀려드는 통증에 항상 자신을 열고 있는 이런 조건에서만 가장 예민한 최고의 행복에게 자신을 열 수 있는 것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통증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탈지면으로 둘둘 말려 있어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세상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음.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탁 트인 벌판에서 소나기를 맞는 것처럼 취약함. 어느 순간이라도 통증이 번개처럼 내리칠 수 있음. 하지만 최고수준의 행복, 엑스터시를 느끼려면 바로 이런 개방성이, 이런 취약성이 필요함. 쾌감과 욕망, 사랑과 동경, 낯선 것이 풍기는 매력, 그 어떤 고통도 나를 열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임.
- 매끈한 피부와 균형잡힌 얼굴, 잘 빠진 몸매를 가진 사람은 더 나은 인간이다. 쉰 살에 서른살처럼 보이는 여성은 활력이 넘치고 성공한 인물이지만 자기나이대로 보이는 사람은 자신을 함부로 사용한, 자신을 낭비하고 홀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임. 유한성의 흔적을 수술로 지우는 것은 시간이 멈춘, 시작과 끝이 서로 뒤엉킴 나르시즘의 공간으로 도망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것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절대적 권력의 망상을 쫓지 말고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것은 수영을 하는 원리와 아주 흡사함. 물에 나를 맡기면 저절로 몸이 물에 뜬다. 하지만 겁이 나서 물 위로 오르려고 버둥거리며 팔을 저으면 더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물을 믿고 물을 잘 다룰 줄 알아야 몸이 물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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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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