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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박스

인문 2014. 10. 19. 13:35

 


원더박스

저자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출판사
원더박스 | 2013-04-0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알랭 드 보통과 함께 [인생학교]를 대표하는 문화사학자 로먼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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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피드는 에로서의 로마식 이름이도, 에로스는 그리스의 사랑과 다산의 신임. 고대 그리스인에게 에로스는 성욕과 욕망을 상징했고, 가장 중요한 사랑 가운데 하나엿음.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에로스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장난꾸러기 악동과는 거리가 멀었음. 에로스는 사람을 사로잡고 조종하는, 때로는 위험하고 불처럼 뜨거운 분별없는 사랑이었음. "욕망이 갑절이 되면 사랑이고, 사랑이 갑절이 되면 광기이다." BC5세기 철학자 프로디쿠스가 했던 말이다. 에로스는 이성적 통제능력의 상실을 수반했기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많은 이들이 남녀관계에서 추구하는 바가 이처럼 이성적 통제능력을 상실한 경지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임. 요즘 사람들은 미친듯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천생연분을 만났다는 증거라고 생각함
- 흔히 우정으로 번역되는 두번째 종류의 사랑, 필리아는 저속한 성욕이 지배하는 에로스에 비해서 훨씬 고결한 사랑으로 간주됨. 우선 가족간에 존재하는 필리아가 있음. 부모와 자식 사이에 느끼는 친밀감과 애정, 혈연관계로 묶인 형제자매나 사촌들 사이에 느끼는 깊지만 성적인 것과는 무관한 친밀감을 말함. 사업상의 협력자나 정치적 동맹처럼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공리주의 버전의 필리아가 존재했음. 한쪽이 다른쪽에 쓸모가 없어지면 이런 필리아는 쉽게 깨짐. 이런 도구적 우정은 현대사회에서 흔한 형태임. 회사에서 출세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영향력 있는 동료와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대표적. 하지만 그리스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필리아는 전장의 동료들 사이에 싹트는 깊은 우정이었음.
- 필리아는 상당히 진지한 사랑임.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번째 사랑유형은 유희적 사랑임. 학자들은 보통 이런 사랑을 라틴어 루두스로 표현하는데, 아이들 사이, 혹은 가볍게 사귀는 연인들 사이에 있을 법한 기분좋게 놀고 즐기는 애정을 말함. 장난치고 놀고 즐긴다고 하면 흔히 이성관계의 초기단계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음. 관심을 끌기 위해 시시덕 거리고, 공연히 놀리고, 유쾌한 농담을 하는 과정이 구애초기에 의례처럼 수반되기 때문. 이런 유희적인 사랑방식은 18세기 프랑스 귀족계급 사이에서 일종의 예술로 발전했음. 그들에게 사랑은 비밀편지, 흥분을 자극하는 외설스러운 유모, 한밤의 위험한 밀회 같은 흥미진진한 요소가 가득한 하나의 놀이요 게임이엇음. 요즘 청소년들은 병을 바닥에 눕히고 돌려서 멈춘 병의 입구가 가리키는 사람과 키스하는 게임을 하는데, 장난스럽고 유쾌한 루두스의 전형적 모습임
- 고대 그리스에서 결혼은 유희적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음. 결혼은 보통 부모가 정하는 중매결혼이었고, 아내는 남편 뜻에 순종하면서 규방에 해당하는 일정한 공간에 머물러야 했음.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인은 프라그마, 즉 성숙한 사랑이라고 하는 네번째 유형의 사랑을 찾아냈는데, 결혼한지 오래된 부부가 키워가는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의미. 프라그마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부부관계가 지속되도록 하고, 필요한 경우 타협하고, 인내심과 관용을 보여주고, 상대에 개한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사랑임. 프라그마에서는 서로의 다른 욕구를 지지하고,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여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하고, 재정적으로 안정된 가정을 만드는 일도 포함됨. 무엇보다 프라그마는 서로에게 헌신하고, 부부관계가 상대에게 도움이 되게끔 하면서 사랑을 호혜적인 행동으롤 변화시키는 것임.
- 프라그마가 배우자에게 사랑을 주는 것인 반면, 아가페, 즉 이타적 사랑은 훨씬 근본적이고 이상적 사랑임.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중에 아가페는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
-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었던 마지막 사랑 유형은 필라우티아, 즉 자기애임. 얼핏보면 아가페의 정반대 개념이자 아가페를 파괴할 경쟁자라고 할 수 있음.
-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에 대한 접근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다양한 범주의 사랑, 말하자면 친구, 가족, 배우자, 이방인은 물론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을 찾고 키울 수 있다는 사실. 현대인은 사랑에 대한 모든 욕구를 한방에 충족시켜주리라 기대하는 한 사람을 찾으려 하고, 주로 이성간의 낭만적 사랑에 집중.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은 이런 접근방식은 극도로 협소한 관점이므로 각자 삶에서 다양한 유형의 사랑을 키우고 발전시키라고 조언
- 페르시아의 유산, 궁정연애, 네덜란드의 우애결혼, 낭만주의 운동 이외에 낭만적 사랑이라는 신화에 더해진 마지막 요소는 20세기 자본주의적 사랑의 도래였음. 시장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성관계가 오염되고 뒤틀리면서 사랑이 사고파는 상품이 됨. 돈을 주고 섹스기회를 사는 일은 항상 있었지만, 사랑 자체를 구매하는 일은 분명 새로운 변화였음. 이런 새로운 흐름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다이아몬드 산업이었음. 19세기에는 부유한 귀족이 아니고서는 연인에게 값비싼 보석을 사주는 일이 아주 드물었음. 하지만 30년대부터 매스미디어 광고를 통해 다이아몬드 선물이 일생을 함께할 여자에 대한 궁극적이고 필수적인 사랑표현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음.
- 자본주의적 사랑으로 인해 훨씬 은밀하게 퍼진효과는 사람들이 점점 스스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시장에 내놓고 거래한다는 사실. 최소한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인간은 좋은 옷과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해왔지만, 인간이 잠재적 연인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자 막대한 양의 돈까지 써가면서 스스로 온전한 상품이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 생긴 현상. 이런 흐름은 2차대전 이후 경제 호황기에 명품의류의 유행에서 시작되었고, 현재는 막대한 규모의 성형수술산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남. 미국에서는 매년 가슴확대수술과 코성형, 지방흡입술, 복강성형술 등 대략 1000만건의 수술이 행해지고 있음.
- 일부 심리학자들은 상대의 결함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구매의 질을 극대하하는 데만 치중한 결과 파트너를 마음대로 버려도 되는 소지품처럼 대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 지금까지 살펴본 자본주의적 사랑은 결국 우리를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지나치게 중점을 두는 상태로 빠뜨리고 말았음. 그리스인들이 이런 상황을 본다면 자본주의 문화가 서서히 사람들을 건강하지 못한 필라우티아, 즉 부정적 자기애에 빠지게 했다고 단언할 것임.
- 인간사회에서 발견되는 육아방식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다양함. 이런 차이들을 설명해주는 것은 생물학이 아니라 상황과 문화임. 여자들이 식량확보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 그리고 남자가 전사역할을 하느라 너무 바쁘지 않은 사회일수록 남자들이 집안일에 깊이 관여하고 많은 책임을 지는 경향이 있음.
- 중세에 일이란 성취감을 느낄 방법이라기보다는 고된 짐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음. 기독교 교리는 노동이 아담의 원죄에 대한 벌이라고 강조했던 반면, 그리스 고전전통에서는 땀 흘리는 육체노동보다 여가생활에서 미덕을 찾았음. 하지만 16~17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모든 것이 달라짐. 마틴 루터와 존 칼뱅같은 당시 신학자들은 저임금의 구두수선공으로라도 열심히 하는 것은 가치있는 행동이며 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는 종교적 의무라고 독려. 게으름은 크나큰 범죄로 간주되었고, 토니의 말을 빌리면 속세의 힘든 노동은 자체로 일종의 거룩한 의식이었음. 이런 소위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오늘날 신문지상에서 혹평을 받고 있음. 특히 북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과도한 노동문화가 발달한 근본원인이라는 비난임.
- 오스트리아 심리치료사 빅터 프랭클의 글을 보면 현대의 소명 개념을 깊이 있게 설명한 대목이 보임.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46년 발간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저서에서 프랭클은 "강인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일부 수용자들이 신체 건강한 사람들보다 수용소 생활을 잘 버티는 명백한 모순상황"을 설명하려고 함. 이런 의외의 생존자들은 단순히 생존을 넘어서서 미래의 뚜렷한 목표를 지닌 사람들이었고, 그런 목표가 그들의 삶을 정신적으로 깊이 있게 해주고 의미있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주었음.
- 서구문화에서는 단선적 시간개념이 지배적. 시간의 화살이 과거에서 나아와 현재를 통과한 다음 미래로 날아가는 식으로 생각. 이처럼 화살이 통과하는 찰나에 있는 우리는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면서 정작 현재에 머물면서 지금을 만끽하지는 못함. 이런 시간관에서는 생각과 대화도 끊임없이 지나가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다가오는 미래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상태에 있음. 말하자면 지금 여기는 영원히 유동하는 상태에 있으며, 우리는 지금 여기에 차분히 머물거나 음미할 수 없음. 하지만 이런 단선적 시간관을 탈피하여 지금여기로 가는 길을 찾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님. 실제로 귀가 솔깃한 방법을 제공하는 다른 문화들이 존재. 시간을 바퀴로 보는 발리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고, 아예 시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하는 선불교 수행이 그러함.
- 우리는 일상에서 미래의 존재를 느끼고, 시간과 책임 사이를 새롭게 연결시킬 방법을 찾아야 함. 스스로를 바이킹 전사라고 상상해야 할지도 모름. 바이킹 전사들은 전사자들이 머무는 천상의 궁전 발할라에서 조상들이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을 느끼고, 동시에 아득한 미래의 후손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마음속에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고 함. 미국 남부의 테와 인디언처럼 스스로에게 "핀 페예 오베", 즉 "산을 쳐다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이는 산꼭대기에서 조망하듯 삶을 보아야 한다고 일깨우는 지혜의 말씀이었음. 자신들이 산기슭을 지나가는 여러세대 중에 한 세대일뿐임을 의식하라는 의미
- 18세기 중반까지는 소비자라는 단어가 낭비하는 사람, 돈을 헤프게 쓰는 삶을 의미하는 경멸적 용어였고, 지금은 소비라고 해석하는 consumption이라는 단어는 몸이 쇠약해지는 질병을 가리켰음. 사람들이 소비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이후. 이때부터 사람들은 안락함, 물질적 편안함. 돈을 주고 끊임없이 물건을 구매하는 사치풍조에 사로잡힘. 올해는 지난해보다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많이 소유하는 삶을 살기 시작. 결과는 우리가 행복한 생활과 물질이 풍요로운 생활을 혼동하게 되었다는 것. 풍요로운 서구사회 시민들이 삶에 불만족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가 물질적인 부분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음.
- 최소한 18세기부터는 개인의 자긍심과 사회적 지위가 수입 및 소비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됨. 돈에 윤리성이라는 특성까지 부여되어, "부유한 생활은 존경할 만한 훌륭한 삶이라는 신호가 되는 반면에 녹슨 고물차를 끌거나 낡은 집에서 살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경제적 성공을 보여주지 못하면, 말하자면 근사한 옷을 입고 좋은 차를 몰지 못하면,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가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이것이 바로 지위불안임.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느낌과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함. 이런 지위불안을 피하고 소비지상주의 생활방식이 주는 안락함과 쾌락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더욱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호화로운 경험을 쌓을 방법을 찾기 시작.
- 미국에서 단순하게 살기의 역사는 소로에서 끝나지 않음. 60년대 히피공동체가 있었고, 이어서 70년대에는 환경에 대한 각성에서 시작된 반소비주의 운동이 등장. 특히 반소비주의 운동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같은 마니아층을 거느린 책들에 자극을 받은 것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우리가 최소의 소비로 최대의 행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 반소비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발적 단순함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많음. 자발적 단순함이란 과시적 소비가 아닌 양심적 소비를 장려하는 철학이자, 외적으로 단순하면서 내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방식임
- 자기감지력이란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해 방향, 고도, 위치 등을 인지하는 능력. 코의 뒤쪽, 눈과 눈 사이에 위치한 사골 혹은 벌집뼈라고 불리는 곳에 작은 자철광 결정체가 있는데, 이것이 지구의 자기장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함. 자기 서식처나 둥지로 돌아오는 귀소본능을 가진 비둘기, 박쥐 등의 조류, 계절에 따라 일정한 경로로 이동하는 회유어인 연어, 돌고래 등도 마찬가지로 자성을 가진 광물을 지니고 있음. 자기감지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무도 모름. 하지만 낯선 도시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도 좀처럼 길을 잃지 않는다면 자기감지력이 훌륭하게 작동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음.
- 인간은 항상 생존을 향해 지구를 이용해왔음. 하지만 유럽문화가 중세 암흑기 이후 가장 무모한 이데올로기를 확고하게 받아들인 것은 16세기에 와서임. 바로 세계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자연은 인간의 이익을 위한 약탈의 대상이라는 이데올로기임. 이런 이데올로기의 토대는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존재라는 인간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이었고, 기독교 사상, 초기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발전 등이 이런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했음. 인간이 사용하는 자원으로서 자연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지구에 사는 다른 생물과는 다르며 그들보다 우수하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상이 이를 정당화할 구실을 제공했음.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합리성을 갖고 있으며 귀를 꼼지락거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재라고 주장. 르네상스 시대가 되자 인간은 다른 언어를 가지고, 도구를 사용하며, 양심을 보여주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주장이 대두. 하지만 인간과 다른 창조물의 핵심차이는 이성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음.
- 미켈란젤로에게 위탁한 주요 작업에 대한 역사기록을 보면, 미켈란젤로가 조수를 채용하면서 지불한 금액에 대한 청구서가 수북함. 적어도 10여명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임. 하지만 그런 부분을 생략한 미켈란젤로의 재능에 대한 뵤사는 창조적 천재는 스스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능한 신에게서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믿음에 일조했음. 창조성이란 독창성과 관련되며 학습된 능력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재능의 산물이라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은 바로 르네상스 시대 사고의 유산이고, 이후 수백년 동안 서구인의 사고를 지배해왔음. 말하자면 재능이란 애초부터 있느냐 없느냐지, 노력해서 얻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었음. 나아가 창조성이라는 재능은 선택된 소수에게만 허락됨. 그러므로 공교롭게 운이 좋은 소수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예술가로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일 가능성이 높지 않음. 이처럼 창조성은 처음부터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 배타적인 엘리트만이 향유하는 철저하게 비민주적 개념으로 등장했음.
- 서구 미술사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 독창성이 돋보였던 두번의 중요한 시기
(1) 1425년 피렌체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직선원급법을 발견(혹은 재발견)했을 때 일어났음. 고대 그리스인들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기위해 물체를 축소해서 그리는 기법을 알고 있었음. 하지만 이런 기법은 어찌된 일인지 수백년 동안 자취를 감췄음. 문화사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사건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중세회화에서는 멀리 있는 사물이 일반적 관차자의 시각에서 균형이 맞지 않고 너무 크게 보일 때가 많았음. 브루넬레스키의 혁신은 화면에 있는 모든 점들이 수렴되는 소실점의 발견이었음. 브루넬레스키는 수학적 정확성을 동원하여 그림속 물체들이 관찰자로부터 거리에 정비례하여 작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2차원 표면에서 3차원 같은 환상을 만들어냈음.
(2) 두번째 중요한 변화는 대략 400년 뒤에 일어났음. 바로 입체파의 탄생이었음. 입체파의 탄생은 1907년 경 피카소와 브라크가 탄생시킨 놀라운 작품들까지 거슬러 올라감. 입체파의 독창성은 선원근법이라는 관습에 따라 지배적 기준이 되었던 단일 시각을 거부한 데 있음. 대신에 입체파들은 동시에 여러가지 시각에서 동일한 주제를 그렸음. 아마 입체파 형성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는 세잔느였을 것임. 세잔느는 하나의 화폭에 자신의 관점이 살짝 달라질때마다 따라서 달라지는 물체의 모습을 표현.
- 피카소는 예술작품이 일정한 경지에 도달해 꽃을 피우려면 모든 규칙을 무시하거나 망각해야 한다고 했음. 우리 삶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함. 그리고 창조성에 관한 사회관습을 따르지 말고 창조성을 개인의 독자적 철학에 포함시켜야 함.
- 창조성은 인간활동 중에 가장 신화화된 측면 중 하나로 남아있음. 절대다수는 여전히 창조성은 재능있는 화가, 앞을 내다보는 시인, 창의적 물리학자처럼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소수의 몫이라고 생각함. 하지만 역사를 보면 창조성은 훨씬 넓은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휘될 수 있음. 주방에서 요리를 통해 개성을 표현하고, 도구로 물건을 만들면서 호모 파베르의 기쁨을 경험하고, 사회관습을 타파하는 여러방면에서 우리는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음.
- 중세 파리, 런던, 로마의 묘지들은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이자, 와인, 맥주, 리넨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은 번화한 장소였는데,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성인들의 축일에는 한층 사람들로 붐볐음. 사람들은 묘지사이에서 거닐고, 묘지에서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즐겁게 웃고 떠들며 놀았음. 아이들은 교회 옆 납골당에서 사람뼈를 장난감 삼아 놀았음. 새로운 거주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고 파낸 납골당 뒤쪽에는 해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음. 묘지에서 죽은자와 교감하며 춤을 추는 고대 전통이 워낙 널리 퍼져서 프랑스 교회가 이를 금지하려고 여러차려 시도했지만 허사였음. 매장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중세에 묘지는 도시, 시골할 것 없이 어디서든 가장 시끄럽고, 분주하고, 활기가 넘치고 상업적 지역에 있었음.
- 중세에 죽음은 사람들의 일상에 워낙 널리, 그리고 깊숙이 퍼져서 오히려 삶의 소중함과 취약함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음. 삶이 언제든 자기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느꼈음.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과거 1000년 동안 죽음에 대한 태도를 연구한 논문에서 "중세 말기 사람들만큼 삶을 사랑한 이들은 어느시대에도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유가 여기 있음. 죽음이 당장이라도 자기 목숨을 낚아챌갈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면, 사람 허벅지 뼈들을 가지고 놀고 해골들이 벽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면, 삶이란 최선을 다해 마음껏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순간을 선물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길지 않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확률이 훨씬 높아짐. 죽음의 편재는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생동하게 만들고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살게 만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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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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