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미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12.25 제국의 미래

제국의 미래

사회 2014. 12. 25. 14:46

 


제국의 미래

저자
에이미 추아 지음
출판사
비아북 | 2008-05-23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총 달러 그 이후… 제국과 그에 맞서는 도전자들의 숨 막히는 주...
가격비교

- 한 사회가 한 지방이나 지역이 아닌, 전 세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군사적/경제적인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만 함. 어떤 역사적 상황이라고 해도, 세계 유수의 인적자본이라는 것(지성이든, 신체적 강인함이든, 기술이든, 지식이든, 독창성이든, 연결망이든, 상업상의 혁신이든, 기술적 발명이든, 그 형태는 관계없이)은 어느 한 장소나 어느 한 인종 혹은 어느 한 종교집단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임. 한 사회가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배경을 따지지 않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함. 이것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대몽골제국, 그리고 대영제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초강대국들이 해온 일들임.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의지해온 것이 관용이었음.
- 세계적 패권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할 목적이라면, 강압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고 박해는 그 대가가 지나치게 비싸며, 인종적 혹은 종교적 균질성은 근친교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생산성이 떨어짐.
-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강대국들은 자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외국 주민들의 충성, 그것까지는 아니라도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로마제국은 피정복민들 가운데 핵심적인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세계패권국가의 전형적 사례임. 로마는 군사력만을 동원했을 경우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피정복민들을 로마의 생활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음. 로마는 고대의 제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멀리 떨어져 있고 몹시 이질적인 민족들에게 엄청난 흡입력을 발산하는 정치적 동맹과 문화상품을 제공했음. 현재의 미국 역시 세계 전역의 수십억까지는 아니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을 겨냥하여엄청난 매력을 내뿜는 문화상품(슈퍼모델, 스타벅스, 디즈니, 더블치즈버거, 코가콜로, SUV승용차 등)을 제공하고 있음.
1부. 고대제국의 관용
1. 최초의 패권국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 오늘날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정책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 키루스는 해당지역의 신(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유대의 여호와)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앙화 반란 가능성을 줄였음. 키루스와 후대의 왕들과, 오늘날 인권으로서의 종교적 자유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관용은 그저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뿐임.
- 아케메네스 왕조가 권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썼던 전략은 피정복민을 균질화하고 페르시아화 하는 전략이 아니라, 민족과 문화적 측면에서 제국이 가진 다양성을 보존하고 통합하고 개발하는 전략이었음.
-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했던 강국이었음. 키루스와 다리우스는 전략적 관용이라는 전략에 정통했으며, 덕분에 당시에 알려져 있던 세계 전체와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대규모의 영토를 아우르는 아프리카의 불타는 사막으로부터 얼음으로 뒤덮인 중국의 국경까지 뻗어나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음. 그러나 역사는 키루스와 다리우스는 미화했지만,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폭군으로 취급했음. 크세르크세스의 전제적인 통치기(BC 485~465)에는 페르시아가 여러차례 군사적 좌절을 경험하고 대신 그리스가 처음으로 우세의 조짐을 보였는데, 이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임.
2.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로마
- 로마제국은 영토면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밖의 거의 모든 면에서는 그 이전의 초강대국을 능가했음.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조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은 하나의 관념이었음. 로마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음.
- 정복된 도시는 자체의 법률에 따라 자체의 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두가지 조건만은 감수해야 했음. 첫째, 각 도시는 로마와는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으나, 상호간에는 자유롭게 교역할 수 없었음. 이 때문에 소규모 도시국가들의 로마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급격히 심화됨. 둘째, 각 도시는 로마에 병력을 공급해야 했음. 이런 평화조약 덕분에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크게 성장.
- 로마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에게 로마는 코무니스 파트리아, 즉 공동의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음. 사실 로마 문명은 다른 어떤 문명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음. 그러나 로마는 정복된 민족의 지도계층을 멸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로마문화를 권력과 특권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했음. 정복된 민족들은 로마의 도시와 원형경기장을 건설하는 일에 계속 종사했으며, 대개는 두세대도 지나기 전에 로마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임. 각 지역의 지도계층은 자식들을 로마에 있는 학교에 보냈고, 이 아이들은 자라서 로마시민이라는 공동체의 충실한 성원이 되었음.
- 로마가 다른 민족들을 자국내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추구했던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었음.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음. 로마의 관습, 생활약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음. 그러나 로마인들은 야만적인 관습을 보전하거나 존중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음.
- 지나친 다양성은 로마 쇠퇴의 부분적 원인에 지나지 않음. 그보다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 불관용은 로마 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
-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갖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 종교적 불관용과 인종적 불관용이 결합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고, 전쟁에서도 내란에서도 이기지 못했음. 이런 상황에서 로마제국은 로마의 혈통, 문화,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심혈을 기울임. 다시 말해 로마는 클라우디우스와 기번이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실책이라고 꼽았던 행동을 되풀이함. 바로 그 시점부터 로마는 분열과 망각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기 시작.
3. 중국의 황금기-당
- 시황제의 통치기간은 짧았지만 그가 세운 강력한 원칙은 중국사회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등장하게 됨. (물론 한왕조를 비롯해서 몇 번의 두드러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 필요하다는 것. 그후 2000년 이상 중국의 불관용은 인종 및 종교에 대한 산발적 억압, 그리고 문화적인 숙청, 외국인과 외국사상에 대한 거부,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중화사상과 중국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단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됨.
- 당이 채택했던 전략적 관용정책은 당이 중국인이 아닌 피지배민에게 한족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의미. 당 제국은 그 덕분에 크게 뻗어나갈 수 있었음.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당 제국이 야만인들과 중국인들을 한데 묶어 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
- 중국은 로마와는 달리, 중국민족과 비중국민족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고, 똑같이 매력을 끌 수 있는 공민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함. 게다가 중국을 통합시켰던 지배적인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은 중국인 고유의 것으로 야만인은 배제되어 있었음. 제국 안에서 균열이 나타나고 위그르족, 티베트족 등 비중국 민족이 점차 위협을 가하자, 중국인들의 타고난 불관용이 급격하게 끓어 올랐음.
4.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몽골
-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된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들임. 중국에서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호칭을 만들고, 중국왕조를 세웠으며, 중국의 미술, 음악, 경극에 묻혀 살았음.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몽골의 칸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페르시아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했으미.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음.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은 단기간에 네개의 덩어리로 갈라졌고, 각 덩어리는 갈수록 편협해지고 종교적 광신에 사로잡혔음.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몽골 제국은 멸망함.
2부. 계몽화된 관용
5.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스페인
- 아라곤 왕국은 13세기에 정복사업을 통해서 영토를 두배나 넓힘. 스페인은 이슬람교도들을 내쫓거나 학살하기 보다는 그곳에 이미 살고 있는 이슬람교도에게 관용을 베풂으로써 정복지역들을 확고히 장악하고 스페인 남부의 비옥한 농지를 경작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음. 농업노동력에 대한 수요야말로 스페인 왕들이 피정복 이슬람교도의 공동체들과 협정을 맺고 이슬람교를 허용한 주된 이유였음.
- 16세기 몇십년 사이에 제노바의 금융업자들은 스페인 함대에 대한 물품 공급권을 장악했고, 괴국의금융업자들이 왕국의 재정을 관리했음. 공격적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고 있던 스페인으로서는 외국 금융업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음.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원정과 전쟁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음. 스페인은 당시 가장 큰, 값비싼 자원의 저장고를 발견하고도 국고는 텅 비어 있는 기이한 상황을 맞음. 스페인의 선박들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아마어마한 금광과 은광에서 원석을 실어왔지만 그 원석들은 그 선박과 군대, 스리고 스페인 왕실에 자금을 공급하던 외국 금융업자들에게 저당잡혀 있었음. 1557년과 1575년 스페인 왕실은 파산함. 스페인 왕실은 유대교 금융업자들이 얼마나 쓸모가 있었던가를 뼈저리게 느끼게됨.
-16세기 스페인이 쇠퇴하게 된 이유는 역사학자들이 자주 거론하는 화젯거리임. 기술적 후진성, 견고한 봉건적 전통, 엄청난 외채, 중요한 산업부문의 결여, 인구감소, 국가기구의 허약성, 그리고 만성적 예산위기 등이 스페인의 쇠퇴를 야기한 이유로 가장 자주 인용됨. 사실 이런 요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스페인 왕실이 1480년대부터 종교적 숙청과 화형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데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음.
- 이단 심문소의 무수한 재판과 고문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했지만, 증오와 편집증만 빚어냈을 뿐 지식이나 부는 일체 창출하지 못함. 뿐만 아니라 격렬한 광신주의가 고개를 들때마다 스페인은 인적자본, 금융자본 그리고 사회자본이라는 가장 귀중한 자원들을 파괴하거나 몰아냄. 결국 스페인의 정화활동은 농민과 장인, 의사와 과학자, 상인과 금융업자, 그리고 심지어는 카톨릭을 믿는 귀족에 이르기 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을 파괴함.
6.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제국-네덜란드
- 1558년 자기방어 능력이 없었던 네덜란드 주연합은 프랑스와 영국에 나라를 넘기려고 했으나 수포로 돌아감. 이것을 보면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세계를 쥐락펴락할 만한 힘이 없을 것처럼 보임. 그러나 1625년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패권을 장악한 강국,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제패했던 최초의 국가가 됨. 작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강국이 됨.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동시적으로 일어난 몇가지 사건들이었음. 예컨대 영국, 스페인, 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이들 국가들을 전쟁에 전념하게 하여 재정이 고갈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사람들이 스페인의 공격에서 벗어날 틈을 줌.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음. 여기에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음.
-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음. 이들은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계적 무역,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만듬.
- 200년 후에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네덜란드는 관용정책을 통해 유럽에서 박해를 받아 추방된, 재능있는 사람을 유인. 이런 관용정책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집단 가운데 일부(그리고 귀중한 무역 네트워크, 최첨단의 산업기술, 엄청난 양의 자본)를 좁은 네덜란드로 끌어들여,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이 경제발전을 이루어내고, 부의 측면에서 대륙의 경쟁자들을 크게 앞지르게 함. 네덜란드는 이 부를 이용해서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
- 기술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네덜란드는 세계의 여러지역을 약탈대상으로 삼게 되었으며, 패권이 목표로 하는 것을 바꾸어 놓음. 이웃나라로의 영토확장은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됨.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는 금과 은, 인도제국에서 나는 후추와 향신료, 카리브해의 설탕 등을 비롯하여 발트해에서 지중해, 그리고 아프리카에 이르는 사치품 교역(커피, 찬, 코코아, 직물, 담배, 보석류)은 엄청난 이윤을 낳는 새로운 노획품이 됨.
- 세계 지배와 관련된 새로운 현대적 전략은 군사력에 의한 영토정복이 아니라 군사력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였음.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와 카리브해를 비롯한 여러지역에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사실 네덜란드 제국의 가장 큰 구성부분은 준 민간기업인 동인도회사와 서인도 회사가 장악하고 있던 수많은 교역소였음. 네덜란드는 전함을 동원하여 교역로에 독점권을 행사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던 이 회사를 보호했음.
- 네덜란드와 영국의 힘이 합쳐지면서(네덜란드의 빌렘이 영국 왕이 됨) 영국이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되는, 참으로 모순이라 할 만한 일이 일어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관용정책과 진취적인 금융업자들과 현대적인 사업방식을 영국에 수출했고, 이로써 영국은 네덜란드 연반공화국을 대신하여 다양한 이주민들과 종교교파들에게 자유와 기회를 제공하는 특별한 지역을 자리잡게 됨. 얼마후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세계 최고의 해상국가로서의 지위까지 넘겨받아, 사상 최고 규모로 세계의 상업과 식민정책을 주무르는 제국으로 탈바꿈함.
-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나 실론 사람들을 위대한 네덜란드제국의 충실한 백성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함. 네덜란드는 애초에 그런 제국을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음. 그일에 성공한 것은 영국이었음. 영국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계몽주의 원칙과 유럽의 자민족 중심주의, 그리고 로마식 전략을 결합함으로써 피지배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음. 그리하여 그들 피지배민들은 대영제국의 군대를 채우고, 대영제국의 영토를 관리하고, 대영제국의 예법을 따르고, 대영제국 왕실의 재산을 증식하는 데 기여함.
7. 불관용의 덫-오스만, 명, 무굴
8.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영국
- 현대세계에서 관용의 의미는 계속 달라지고 있음. 고대제국들은 훌륭한 말이나 노래를 부리는 것처럼 우수한 집단들과 인재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순전히 수단적 의미의 관용을 베품. 이런 관용으로는 자유, 평등, 자치라는 현대적 이념을 충족시키지 못함. 따라서 영국의 역사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함. 세계의 패권국가가 현대의 계몽주의적인 의미에서 참된 관용을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적인 초강대국, 그것도 과거에 몸소 식민지의 처지를 경험했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임.
- 메디나, 기드온, 골드 스미스 같은 유대교도들과 몬터규 가문, 스턴 가문, 그리고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주식거래를 도입하고 새로운 자본시장을 발전시키고 엄청난 양의 공채와 사채를 인수함으로써 런던을 세계적 금융중심지로 바꾸어 놓는데 일조함. 1815년 이후 암스테르담은 부수적 역할에 머물고 세계적 금융시스템은 런던에서 형성됨.
-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보다 훨씬 가난했음. 귀족과 상류계층 가운데에는 다리엔 계획(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합병)으로 파산한 사람들이 많았음. 후진적인 스코틀랜드의 경제도 그다지 믿을만한 구석이 없었음. 잉글랜드의 좋은 일자리는 모두 잉글랜드인들이 차지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에서 성공하기는 쉬운일이 아니었음. 스코틀랜드인들은 무슨일이 일어나도 밑져야 본전인 처지였으므로, 제국 건설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 보상을 챙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음.
-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했음. 1830년대에 스코틀랜드는 철강산업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고, 스코틀랜드의 조선기술은 영국내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인 증기엔진은 영국의 산업가인 매슈 볼턴과 동업관계에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에 의해서 완성됨.
-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을,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의 공헌은 압도적 수준을 넘어서 중추적 수준이었음. 그 한가지 사례로는 세계 최강국이 가진 최강의 금융기구이자 영국이 프랑스를 앞지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잉글랜드 은행을 들 수 있음. 잉글랜드 은행은 입안한 것은 스코틀랜드인이었고, 그 은행의 창립자금을 댄 것은 위그노교도들이었으며, 그 은행의 대부금을 중개한 것은 유대교도들이었음. 유대교도들은 또한 런던 주식거래소를 설립하고, 영국에서 다이아몬든, 금, 은이 거래되게 했으며, 런던을 암스테르담에 맞설 세계적 금융중심지로 만듬.
- 개신교가 19세기 영국의 정체성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제국이 세계적 규모로 챙창함에 따라 영국인들은 점차 스스로를 식민지 주민들과는 달리 백인미며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규정하게 됨. 카톨릭교에 대한 적대적 편견이 아일랜드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인종적 오만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움.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제국의 보석 인도였음.
- 전성기때 동인도 회사는 인도인 기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맹을 맺었지만, 20세기의 영국출신 이주민들은 토착 기업과의 협조를 고집스레 거부함. 이런 공격적인 불관용 전략은 자멸적 결과를 초래. 영국출신 이주민들의 극심한 인종주의는 인도 엘리트층의 분노를 격화시켰고 인도엘리트틍은 차츰 대중적인 민족주의 운동과 영국 기업의 민족 기업화 또는 추방운동에 참여하게 됨.
- 과거의 패권국가와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관용의 정책(당시의 기준으로 볼때)으로의 극적인 전환이었음. 영국이 경쟁상대도 없이 세계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시기(1858~1918)가 유대교도들, 위그노교도들, 스코틀랜드인들이 국회의원, 수상 등 영국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참여하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님.
- 영국이 쇠퇴한 것은 국내에 불관용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만은 아님. 어찌 되었든 20세기 초반 영국은(이민정책과 선거권 확대를 지표로 볼때) 국내에서 인종적, 종교적 소수집단에 대한 관용의 폭을 넓혀갔음. 역사학자들마다 비난하는 대상과 강조하는 대상이 다르지만,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는 제1차세계대과 제2차 세계대전에 소요된 막대한 비용, 정부의 복지예산의 급증, 엄청난 외채부담,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산업의 상재적인 정체,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증가,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에 대한 적의. 민족주의자들의 반란, 그리고 인종 혹은 종교와 관련된 폭동 때문에 빚어지는 비용의 증가 등을 꼽는데에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함. 그렇지만 시야를 넓혀서 보면 영국이 쇠퇴한 것은 해외에서 관용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함.
3부. 세계 제패의 미래
9. 최첨단 과학기술의 개척자-미국
- 미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남다른 성공을 거둔 까닭은 무엇일까? 비옥한 경지, 풍부한 자원,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지정학적 특징, 그리고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사유재산제, 자유시장제,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의 제도들이 한몫을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임. 그러나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이 그랬든시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자원에 있음.
- 미국이 인종적 차원과 민족적 차원에서 역사상 손꼽히는 관용적 사회가 된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의 일.
- 미국의 지위가 상승하게 된 것은 미국이 끊임없이 다양한 집단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지하고, 보상하고, 흡입해 왔기 때문.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후일에는 경쟁국과 개발도상국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발전과 기술혁신을 창조했고, 이것을 토대로 유례없는 최고의 부와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함.
- 유럽의 무수한 두뇌유출 덕분에 19세기의 미국은 기술의 벽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국가로 변모함. 이런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관용은 필수적 역할을 함. 물론 뛰어난 기술과 발명의 재능을 가진 이민자들 가운데 태반은 종교적 혹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경제적 성공을 노리고온 사람들이었음. 그러나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원인은 상대적 개방성과 다원주의였음.
- 19세기(그리고 20세기 대부분의 기간)에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종교적 반감, 문화적 배타주의, 사회적 경직성, 언어의 차이를 비롯한 여러 장벽들 때문에, 가난하지만 진취적인 유럽인들은 조국을 떠나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적었음. 이와 달리 미국은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적 유동성, 언어적 다원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인들의 온갖 경험에서 비롯한 재능과 진취적인 동기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었음. 비유적으로 말하면, 미국에서는 기회가 하늘끝까지 열려 있었음.
- 19세기의 미국사회는 다양한 출신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가지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음. 첫째,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도 있었음. 둘째, 민주적 정부제도는 부패하기는 했어도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쥐어주었음. 세째, 활발한 자유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밖의 기회를 제공했음. 19세기에 다른 나라들은 이 세가지 장점 중에 일부 혹은 극히 일부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세가지 장점을 미국과 똑같은 수준으로 제공할 수 없었음.
- 두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강화된 이민반대경향은 이미 미국에 도착한 수천만의 이주민들에게는 오히려 이로운 것이었을지도 모름.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불운한 사람들(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핀란드, 독일, 체코, 헝가리 출신 그리고 유대인)이 해마다 100만명씩 대거 유입되면서 미국내에는 엄청난 사회적 긴장감이 형성되었음. 두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분위기는 일시적 유예기간을 제공했고, 기왕의 이민공동체들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 사회에 흡수되고 동화될 수 있었음. 이것은 미국으로서도 다행한 일이었음. 새내기 미국인들의 수많은 아들들이 전쟁에 소집되어 사망하면서 미국은 다시한번 세계무대로 진출하게 됨.
10. 추축국의 야욕-독일, 일본
- 인종적 순수성, 인종청소, 또는 종교적 광신을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부상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음. 그러나 20세기 중반 나치독일과 제국주의 일본, 대단히 편협했던 이 두 정권은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고 세계를 집어삼키려고 했음. 추축국들의 급속한 부상은 극단적 불관용이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불관용을 토대로 한 사회는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줌.
- 20세기 초반 일본의 저술가들은 서구의 인종이론과 유가철학, 그리고 도덕적, 영적 순수성이라는 신도의 개념을 결합하여 일본인 특유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듬.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시기에 서양에서는 사회진화론과 이른바 과학적 인종주의가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음. 서양의 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아시아인들과 흑인들을 비롯한 유색민족들의 생물학적 열등성을 입증하는 경험적 증거를 만드는데 몰두하고 있었음. 포함외교와 강제조약, 서양의 우월한 경제발전 역시 아시아의 열등성을 확증하는 것으로 여겨짐. 일본의 국수주의 사상가들은 일본의 열등한 지위를 뒤집기 위해 신에서 비롯한 황실의 혈통, 일본 사람들의 순수성과 미덕을 강조하는 정교한 신화적 역사를 고안해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이 이야기는 정복과 지배와 착취의 완벽한 근거로 활용됨.
11. 21세기의 새로운 도전자들-중국, 유럽연합, 인도
-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하나같이 깨닫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인이라는 개념자체가 전랴적인 관용의 성공적 결과라는 사실. 중국은 3000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날 유럽연합이 목표로 삼고 있는 성과를 이루어왔음. 다시말하면,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으로 이질적 배경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을 단일한 정치적 정체성 안에 소속시키고 통합시켜온 것. 중국문명 자체가 다양한 문화의 거대한 융합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것.
- 중국은 여러나라의 제도, 과학기술 등을 도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음. 중국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카드를 적절히 이용하겨 해외중국인들의 자부심과 충성심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음. 현재 160개국 이상에서 살고 있는 중국계 혈통은 대략 5,500만명에 이름. 여러면에서 볼 때 해외중국인들은 엄청남 보물창고임. 그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대략 2조달러에 이름. 또한 그들은 연간 약 6000억 달러의 생산량을 창출하는데, 이는 호주의 국내총생산과 비슷한 규모임. 뿐만 아니라 이들 가운데에는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해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음.
- 유럽연합의 영토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해 의지. 이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관용이라 할 수 있음. 유럽연합은 새로운 유형의 각종 자유와 경제적 유인책을 동원하여 나라들을 유인하고 있음. 이런 관점에서 볼때 유럽연합은 로마와 비슷함. 황금기의 로마역시 민족들을 통째로 제국안으로 끌어들였음. 그러나 로마는 늘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자진해서 항복하지 않는 민족들은 무력을 동원해서 위협함으로써 병합할 수 있었음. 유럽연합은 무력을 행사하거나 위협을 가하지 않고 여러나라들을 끌어들임.
- 유럽연합의 진정한 목적은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만한 힘을 만들어 내는 데 있음. 유럽연합은 힘을 규합하기 위하여 본질적으로 전략적 관용을 채택하고 있음.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유럽연합이 채택한 관용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미국의 관용전략과 경쟁할 수 있느냐임.
- 유럽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임. 유럽의 관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는 전략일 뿐이지, 제3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국가를 미국고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님. 유럽연합의 기본헌장은 이주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인들이 노르웨이로 이주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님. 유럽연합의 출현을 전후로 한 수십년간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민에 대한 태도는 몹시 적대적이었음.
12. 제국의 미래
- 초강대국의 의미는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음. 가장 단순한 관점에서 보면 정복으로부터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변모가 이루어짐. 그러나 이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가지 근본적인 문제, 접착제라고 표현되는 문제에 직면함.
- 세계적인 부를 형성할 수 있는 방편이 땅에서 바다로, 정복에서 교역으로 옮겨지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의 연관관계도 변화하기 시작. 초강대국이 멀리 떨어진 땅에 있는 부를 손에 넣기 위해서 침략, 점령, 병합이라는 본질적인 필요조건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어졌음. 정복을 위한 통치는 비용이 많이 들지만, 교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은 그렇지 않음.
- 냉전의 시기 특히 80년대에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을 막으려는 총괄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세계 전역의 민주주의 운동을 지원했음. 미국의 이런 전략에는 민주주의 제도와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를 퍼뜨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음. 당시에는 미국의 막강한 권력에 대한 적대감이 비교적 적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극도로 억압적인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확실한 대안은 곧 미국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확산을 막는 결정적 방해물인 소련이 붕괴하자, 세계의 다른 지역들이 미국의 주도권을 받아들일 가느성은 커졌음.
- 역사에 존재했던 초강대국들 가운데, 멀리 떨어진 피지배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업에 가장 성공했던 제국은 로마제국이었음. (이 공통의 정체성은 로마제국의 놀라운 장수를 설명해주는 유력한 요인이기도 함) 로마는 흡인력 있는 문화상품과 시민권을 그리스, 골, 브리튼, 스페인 출신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함으로써 멀리 떨어진 영토에 사는 몹시 다양한 민족들을 로마화할 수 있었음. 1500년 후에 대영제국 역시 이런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둠. 1890년대까지도 인도의 국회의원들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환호성을 울렸음. 2차세계대전 때에는 수십만의 인도병사들이 영국을 위해 싸웠고, 후일 인도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된 간디와 네루 같은 사람조차 스스로를 대영제국의 시민으로 여겼음.
-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범한 가장 큰 실수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 미국의 상품과 상표, 소비자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 공통의 가치관과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내면서 다른 민족들을 미국화할 것이라고 추측한 데 있음. 이런 추측은 해방된 이라크 국민들이 미군들을 꽃과 미소로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만큼이나 순박한 것임. 양키스 야구모자를 쓰고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이 미국사람으로 바뀌지 않음.
- 성장하는 강국이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국을 개방하고, 관용의 제도를 세계 모든 나라에게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임. 그러나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미국시민권을 외국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련느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님. 선의를 가진 수많은 미국인들이 우려하듯이,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포함한 서구적 관용정책을 수출하려는 미국의 시도들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이자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실체로 여기느 수백만명의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분노를 사고 있음.
- 미국이 이민을 제한할 권리가 있고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음. 한없이 많은 외국인들에게 수문을 열어주거나 그들 때문에 국가안보를 희생시키는 것은 현명한 이민정책이 아님. 그렇지만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미국국경을 폐쇄하는 지나친 대응은 세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것임.
(1) 초강대국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런 대응은 외국인 혐오라는 반감을 조성할 수 있음. 과거 세계를 제패한 강국들은 모두 핵심집단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혹은 순수한 정체성을 거듭 단언하면서 동화가 불가능한 집단들에 대해 배타적 정책을 채택하는 등 불관용으로 돌아서는 순간 무너졌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민자들을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돌리거나 미국의 성공원인을 앵글로 색슨과 개신교의 가치관에서만 찾는 것은 그릇된 것임.
(2) 상대적으로 개방된 이민정책은 미국과 비미국인 간에 호의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효과적임
(3) 과거에 세계를 제패했던 모든 강국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인적자본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렀기 때문.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법의 제국  (0) 2014.12.28
법- (자유주의시리즈 22)  (0) 2014.12.25
개혁의 확산  (0) 2014.12.25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0) 2014.12.25
탐욕의 시대  (0) 2014.12.25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