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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토의 중세상인

역사 2014. 10. 19. 13:35

 


프라토의 중세 상인

저자
이리스 오리고 지음
출판사
앨피 | 2009-09-14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 책을 읽고 오늘날 프라토 거리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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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에서처럼 프라토에서도 모직물 길드의 성립 초기에는 많은 장인들이 대개 독립적이었음. 특히, 직조공, 보풀 세우는 장인, 방적공과 염색공이 그러했음. 또한 원모를 구입해서 양보 상인에게 판매하며 상인과 장인 사이에서 중개인 역할을 한 몇몇 소규모 사업가, 즉 양모 판매상이 있었음. 이런 상인들에게 양모를 구입한다음 실로 만들어서 다시 이 상인들에게 되팔았던 독립된 실 거래상도 있었음. 그러나 프란체스코 시절에 이런 소규모 분야들이 모두 '아르테 델라 라나', 곧 모직물 길드에 흡수됨. 이제 모직물 직종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경향으로 운영됨. 모직물 상인은 다양한 종류의 장인들을 고용한 대규목 기업가가 되었음. 가장 가난하고 의존적인 이들은 양모를 세탁하는 장인과 보풀을 세우는 장인이었음. 그들은 그들이 세탁실과 작업장에서 신던 나막신을 뜻하는 촘피라는 이름으로 부릶. 그들 바로 위에 있었던 방적공, 날실 제조공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독립성을 누림. 그들 대다수는 경제적, 도덕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톳대와 날실대, 직조기를 가지고 작업했음. 맨처름 독립적인 길드를 구성했던 염색공도 점차 모직물 길드에 흡수되어 모직물 길드의 규칙을 준수해야 했음. 자신들의 작업장과 작업도구를 갖고 있던, 마지막 공정을 담당하는 장인들(축융, 가위질, 수선, 포장) 만이 부분적이지만 계속 독립을 유지했음
- 그러나 최종적으로 길드 법령을 이용해 직물생산을 통제하고, 결과적으로 직물생산에 종사하는 모든 이의 생활을 통제했던 사람은 자본주의적인 모직물 상인이었음. 이런 통제가 얼마나 세세하고 꼼꼼했는지는 길드의 법령이 보여줌. 특히 축융하는 장인과 포장하는 장인은 직물을 인수하기도 전에 담보 명목으로 보증금을 내야했고, 독립적인 성향의 염색공들은 수많은 특별 예방책들로 묶였음. 그들은 길드 대표들에게 신의와 복종을 맹세했고, 자신들에게 맡겨진 모든 직물과 실을 작업해서 돌려주어야 했으며, 길드 소유가 아닌 것은 어떤 직물도 염색해서는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염료를 사용할지와 대청(염색재료)이나 검은색으로 염색할 직물의 종류까지 정확하게 지시받음
- 실제로 직물거래사업의 가장 큰 약점은, 특히 작은 상사들의 경우 초기 자본지출과 수익의 실현 사이에 필연적으로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는 것.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양모를 구매해서 완제품을 최종판매하기가지 그 거래를 완성하는 데 적어도 3년반이 걸렸음. 첫단계(마요르카에서 프라토 작업장까지 양모를 운송하는)에 14개월이 소요. 1394년 피렌체에 있는 프란체스코 상사는 팔마 디 마요르카에 있는 분점에 주문장을 보냈음. 분점에서는 양털을 깎는 이듬해 5월 대리인을 미놀르카로 파견하여 미노르카산 양모와 양가죽 29자루를 구매하고, 에스파냐 선박을 전세냄. 선박은 폭풍우 때문에 7월말에야 미노르카에 도착. 그러고 나서 카탈루나의 페니스콜라 항구로 출항했고, 카탈루냐 해안을 따라 바르셀로나까지 갔음. 여기서부터 공해를 가로질러 피사로 갔음. 당시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던 바르셀로나까지는 다른 두 선박의 호위를 받음.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 피사항 까지는 단독으로 항해했기 때문에 선박의 안전을 위해 열두명의 궁수를 탑승시킴. 바르셀로나에서 피사항까지는 7주가 걸렸음. 양가죽은 피사항에서 나귀에 실어 육로로 피사까지 운송했고, 양모는 바다와 강을 이용해서 운반했음. 피사에서 양모는 39자루로 다시 포장되었고, 그중 21자루는 피렌체에 있는 고객에게, 18자루는 프라토에 있는 프란체스코의 창고로 보내짐. 그 자루는 1396년 1월 14일 프라토에 도착했음.
- 양모를 운송하는 데만 6개월이 걸린 것이다. 다음 단계는 양모를 직물로 바꾸는 것. 양모를 두드리고, 선별하여 기름을 제거하고 씻고, 빗질하고 보풀을 세워 실 감는 막대에 얹고 실을 잣는 일이 여기에 속했음. (이 작업은 자신의 농가에서 일하는 농부 96명의 아낙들이 담당) 그 다음 실을 재서 나누고 직물을 짠 뒤 피륙의 마디를 없애고 (여전히 축축한 상태에서) 보풀을 베어 내고 펴서 말린 뒤 보풀을 세우고 다시 한번 보풀을 제거하는 작업이 이어졌음. (붉은 색으로 염색할 경우) 이 직물은 염색장인들에게 인계됨. 그런뒤 다시 보풀을 베어 마지막에 눌러서 접었음. (각 과정은 전문화된 장인이 담당) 7월 말, 길이가 35야드쯤 되는 직물 여섯필이 준비됨. 판매용 직물은 마요르카를 거쳐 에스파냐나 북서아프리카 시장을도 다시 보내고자 두자루로 포장됨. 하지만 당시는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들이 모두 피렌체와의 무역을 중단한 시기였음. 그래서 두자루는 7월14일 노새에 실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볼로냐와 페라라를 경유에 베네치아로 보냈음. 그곳에서 베네치아 선박에 실어 9월 1일 최종목적지인 팔마 디 마요르카에 도착. 이 여행에는 단 7주가 걸림. 그 다음에 완제품 판매라는 마지막 단계가 시작됨. 예외적으로 심각했던 역병(1348년 대역병때가 아니라 그 뒤에 발생한 흑사병) 이후 시장은 침체되었고, 직물의 색깔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 같음. 프란체스코 상사는 모든 직물을 발렌시아로 보냈고, 그곳에서 처분하지 못한 직물의 일부를 나중에 북서아프리카로 보냈음. 이 가운데 일부는 다시 팔마로 돌아왔음. 양모를 주문하고 나서 3년반이 지난 1398년 봄에야 마침내 직물이 모두 팔렸음.
-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프란체스코와 그 동업자들이 얼마나 많은 수익을 얻었는지 알아보자. 모든 비용(원료구입, 포장, 수송, 세금, 보험, 세금과 관세, 제작과 판매)을 공제하고 남은 이윤은 투자금의 8.92%에 불과했음.
- 1368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가 한 말이라고 전해지는 예언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음. 이 예언에 따르면 "땅속의 벌레들이 머지 않아 사자, 표범, 늑대들을 잔인하게 삼켜 버리고 지빠귀와 작은 닭이 탐욕스러운 독수리를 먹어치울 것이다. 동시에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민중들이 독재자와 거짓 배반자들을 파괴할 것이다. ... 그때 대기근과 역병이 일어나 나쁜 사람들은 죽고, 교회는 세속재산을 모두 빼앗길 것이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속삭이던 예언은 점차 더 크게 이야기되고 널리 퍼져나갔음. 이는 이전 두세기 동안의 경제구조를 지탱했던 사고체계가 점진적으로 붕괴되고 있음을 의미. 권위, 특히 길드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 존경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길드의 법령들은 그것들이 항상 확언하는 것처럼 신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음. 이런 믿음은 널리 받아들여짐. 심지어 1333년에는 모직물 길드의 대표자들이 피렌체와 피에솔레의 주교들에게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가난한 방적공들에게 파문이라는 위협을 행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정도임
- 그는 매일 나쁜 소식을 예상하며 전쟁, 흑사병, 기근, 봉기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음. 어떤 정부가 안정되어 있다는 말도, 어떤 사람이 정직하다는 말도 믿지 않음. 1397년 루카 델 세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당신은 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만큼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장사를 해보면 인간이 위험한 존재이며 인간과 거래하는 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썼음. 그가 지나치게 많은 자금을 한 사업에 투입하지 않고, 사업동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위임하지 않으며, 자신의 부를 되도록 많은 부문에 분산시키고, 손실이 나면 즉시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여 한 분야에서 잃은 것을 다른 분야에서 만회한 것은 바로 이런 두려움 때문이었음. 그가 부자가 된 것도 이런한 주의, 즉 끊임없는 경계심 덕분이었음.
- 상인으로서 프란체스코의 두드러진 점은 활동이 다양했다는 점. 아비뇽에서 무기거래상으로 출발한 그는 그 다음에 포목상, 프라토에 가서는 직물제작업자가 되었고, 피렌체에서 다시 상점 주인이 됨. 이후 그는 수출입 무역으로 성공했고, 다양한 상사들의 핵심 동업자가 됨. 이를 통해 양모, 직물, 베일, 곡물, 금속, 가죽, 향신료, 그림과 보석 등을 취급. 1404년에는 직물의 마무리 과정을 담당하는 아르테 디 칼리말라 길드에도 가입. 짧은 기간이었지만 프라토시의 곡물과 포도주 관세징수를 맡기도 함. 그는 보험업에도 손댔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은행을 설립. 이처럼 다양한 사업형태는 프란체스코 시대의 전형적 특징이었음. 이 시대에는 국제상인과 소규모 상인간의 차이가 도매냐 소매냐, 즉 상품거래량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유형의 사고방식에 달려 있었음. 지역상인은 삶의 방식에서나 진취성, 인색함의 측면에서 여전히 장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음. 즉, 지역상인은 익숙한 고객들과 거래하면서 자신이 속한 길드의 규칙을 엄격히 지키며 큰 모험을 하지 않고 작은 이윤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음. 반면 알베르티 상사처럼 대형상사의 핵심동업자이든 아니면 프란체스코 상사처럼 작은 상사의 핵심동업자이든 상관없이. 국제상인은 조상인 여행상인의 진취적 정신과 과감함을 어느정도 갖고 있었음. 그는 큰 모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위험을 가능한 한 넓은 영역에 분산시켜 부담을 줄였음. 국제상인은 외국어와 외국생활에 익숙했고, 해외시장의 요구에 잘 적응했으며, 상인이자 은행가였고, 도매업과 소매업을 동시에 했음.
- 프란체스코가 일련의 빛나는 대성공이 아닌, 작은 이윤을 계속 축적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음. 위험을 피하고 가능한 한 많은 기회를 잡으면서 말이다. 그가 다른 많은 동시대인들과 달리 어떻게 성공적으로 파산을 피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음. 14세기 첫 반세기에 활동한 대형상사들과 그보다 약간 작은 프란체스코 시대의 상사들은 무역, 산업, 은행업, 정치 등 모든 영역의 사업활동에 참여했음. 이런 상인들이 달성한 엄청난 권위와 힘음 거의 전적으로 신용에 근거. 이들이 처분할 수 있었던 자금과 그들이 다양한 활동으로 얻은 연간 매출액 사이의 불균형은 놀라울 정도임. 그들은 자신들을 추방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외국 군주가 요구하는 자금대부를 결코 거부할 수 없었고, 도시성벽을 방어하고자 도시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것을 거부할 수도 없었음. 그들으니 정치적, 군사적 재앙이 일어나면 맨 먼저 피해를 입는 첫 희생자들이었음. 상사가 크고 힘이 세면 셀수록 그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더 컸다고 할 수 있음. 그런데 프란체스코와 같은 상인은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었고 실제로 피했음. 라포 마체이와 도메니코 디 캄비오는 프란체스코의 대담함에 놀랐지만, 사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음. 프란체스코의 작은 상사들은 좀더 큰 규모의 상사들과 달리 정치와 거리를 둠. 그는 왕이나 고위 성직자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전쟁자금을 제공하지도 않음. 당시에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고향에서조차 어떤 정치적 파당에도 관여하지 않음. 그가 신뢰한 것은 자신처럼 건실한 상인과 자시 상사와 같은 상사들이었음. 그래서 비록 알베르티나 소데리나, 말라바일라, 귀니지 상사와 같은 당시 일류 상사와 맞먹는 위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다른 상인들처럼 정치나 전쟁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았음. 그는 자신의 배가 모든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음.
- 합자회사는 대부분의 중세 상업조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남. 그러나 막강한 해상공화국들의 상업조직은 코멘다라 불리는 형태였음. 이것은 한 상인은 국내에 머물면서 자금을 제공하고 다른 상인은 해외로 여행하며 사업을 수행하는, 주로 단기간의 피동적 동업관계였음. 반면 토스카나 지역의 상업조직은 콤파니아라는 형태였음. 동업자들은 각자 자본의 투자와 경영을 동시에 맡고, 다른 동업자들이 초래한 부채에 대해서도 공동책임을 져야 했음. 콤파니아의 이런 구조, 그들의 사업방식과 그들이 누린 엄청난 신용은 그 기원을 살펴보면 잘 이해됨. 콤파니아는 원래 같은 집에 살면서(콤파뇨 : 빵을 같이 먹는 사람) 같은 빵을 자르며,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그래서 상대의 행동에 무한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으로 구성된 작은 합자회사를 가리켰음. 물론 동업자들은 임금을 받지 않고, 콤파니아의 번영은 그들의 기술과 활동에 달려 있었음. 콤파니아는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가족처럼 안정적이었고, 콤파니아의 신용은 부분적으로는 그 가족이 소유한 견고한 토지재산에 근거했음. 나중에 콤파니아의 범위가 확대되어 가족외부의 성원까지 포함하게 되었고,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콤파니아를 결성하기도 했음.
- 상인의 현명함은 "모든 행동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 즉 무엇을 잡아야 하고 무엇을 포기하는지를 아는 것, 너무 멀리 나가지 않는 것,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넘어서는 일을 맡지 않는 것"에서 드러남. 현명한 상인이라면 옷이나 다른 물건에 대한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소비를 피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려는 것만큼 마음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명한 상인이라면 너무 인색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신중함이라는 걸 알아야 함. 예를 들어 장인과 중간상인들에게 응당 치러야 할 것 이상을 지불하는 것이 늘 잘못은 아임. 판사나 심판자들은 쓴 돈은 항상 잘 쓴 돈이다. 성경 말씀에도 선물은 현자의 눈을 멀게하고, 정직한 사람의 말을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도 현명함은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어떤 문서도 문자 그대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시간과 장소와 정도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신중하게, 그리고 문서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의도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모든 거래는 처음부터 의심해서 살펴야 한다. 상인들을 유혹하고자 속임수와 나쁜 계략이 많이 사용되고, 모든 사람이 돌멩이가 자기 손에서 황금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구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 다양한 부류의 친구를 사귀는 것은 좋지만 쓸모없는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은 좋지 않다. 부유한 친구들과 사귈 때에도 항상 경계해야 한다.
- 1366년 피렌체 고위 정무관들은 흑사병으로 인한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고려하여 몽골이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수입과 판매를 허가했음. 단,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교도이거나 이교도 지방 출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음. 그리하여 중세 마지막 두세기동안 피렌체 사회는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게 됨. 토스카나 도시들에서는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 밑으로 심지어 포폴로 미누토, 즉 억압받고 배고픈 군중보다도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새로운 계급(인간적 권리나 법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가족도 없는, 주인이 붙여준 이름 외에는 이름조차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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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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