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방향 감각을 찾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을지 궁금 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게는 종교적인 의문들, 철학적인 의문 들이 남겨졌고 그것들이 나를 아주 심하게 괴롭혔다. 나는 죽는다 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침대에 누워서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잦았고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위안을 얻고자 애썼다. 마치 뒤통수가 간질간질해서 긁어야겠는데 손이 잘 닿지 않는 상황과도 같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바로 그런 종류의 실 존적 불안이 사람들을 철학 공부로 몰아가는 공통의 경험이 된다. 예를 들어, 철학자 스피노자 pino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상태가 매우 위중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온 힘을 다해 아무리 불확실한 것일지라도 가리지 말고 치료제를 찾아내라고 나 자신에게 명령하였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서 투병 중인 병자가 치료제를 구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죽음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의 온 희망이 바로 그 치료제에 있는 까닭에 그것을 온 힘을 다해 찾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였다."
- 좋은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놓고 말싸움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냥 좋은 사람이 되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어린 꼬마들을 겁주기 위해 험상궂은 가면을 쓰고 도깨비 옷을 입고 다니는 장난 꾸러기 같은 녀석이라고 말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이 조심스레 그 가면을 벗기고 그 뒤의 얼굴을 보게 되면 거기에 두려워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 평생에 걸친 준비 덕분에 마르쿠 스는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일 때에 비해 지금이라고 더 죽음 을 두려워할 일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의사들에게 지금 자기 몸 안 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 보라고 침착하게 요청한다. 그래야 자신의 증세들을 자연철학자의 짐짓 의도적인 무 심함으로 사색할 수 있겠기에 그렇다. 그의 목소리는 쇠잔하고 입 과 목 속에 생긴 염증들 때문에 말을 하는 것도 힘들다. 금세 지친 그는 의사들에게 나가 달라는 몸짓을 한다. 조용히 혼자 명상을 계속하고 싶은 것이다.
- 오늘날 'cynicism' (소문자 '로 시작하는)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우리는 부정적이고 무언가 불신하는 태도 같은 것을 의미한다(이 경우에는 우리말로 '냉소', '비꼬기’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옮긴이). 하지만 그 단어는 대문자 'C'로 시작하는 'Cynicism (견유주의)’의 의미와는 아주 미약한 정도로만 관계가 있을 뿐이다. 견유주의라고 하는 고 대의 철학은 다양한 형태의 '자발적 고난을 견디어 내는 등과 같 은 가혹한 단련을 통해서 덕과 성품의 역량을 함양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것은 금욕적으로 자기를 훈련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제 논의 추종자들은 나중에 그것을 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부르게 된다.
- 염료 상인 제논이 스토아학파를 창시한 이후 거의 다섯 세기가 지난 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여전히 사물을 자주색으로 물들 이는 일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품을 황실의 자주색 으로 물들여서 카이사르로 변신하는 일을 피하고, 대신 자신의 철 학적 원리들을 속이지 않는 존재로 남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스스 로에게 경고한다. 그는 자신의 자주색 황제 의복들은 단지 발효시 킨 조개의 진액으로 염색한 양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두 번이나) 되된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스토아의 스승들로부터 전 수되어 내려온 철학적 격언들의 지혜로 물들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을 스토아주의자로 생각하는 것이 먼저였고 황제는 그 다음이었다.
- 스토아주의자들은 많은 글을 남긴 저술가들이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글은 아마 채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유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토아주의 문헌은 제국 시기에 활동한 세명의 잘 알려진 로마 스토아주의자들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세네카 의 다양한 편지와 논고들, 에픽테토스의 『대화록』과 『요약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다. 우리는 또한 키케로가 초기 로마의 스토아주의에 관해 남긴 몇몇 저술들과 초기 그리스 스토아주의자들이 남긴 책 한 권 분량의 파편적인 글들, 그 밖에 많은 종류의 사소한 문헌들을 접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불충분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그 철학의 핵심 신조들에 대해서 하나의 일관된 그림을 제공해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혜를 혹은 덕을 사랑했다. 만약 '덕'이 약간 고지식하게 들 린다면, 그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arete'는 주장컨대 '성품의 탁월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만약 어떤 것이 그 기능을 잘 수행한다면 탁월한 것이다. 인간은 명료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잘 판단할 줄 안다면 탁월한 것이고, 그것은 곧 현명하게 산다는 뜻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주된 덕을 지혜, 정의, 용기, 절제라고 나눈 방식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혜를 뺀 나머지 세 가지 덕은 인생의 상이한 영역 들에서 우리가 하게 되는 행동에 지혜가 적용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의는 대체로 사회적 본령에,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적용되는 지혜이다. 용기와 절제를 드러내는 것은 각 각 우리의 공포와 욕망을 정복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서, 스토 아주의자들이 이른바 불건전한 '정념asion (욕정, 분노, 공포, 기쁨, 증오 심, 연민 등 쾌락이나 고통의 일시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혹은 격심한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 상태로 간주되는 동시에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욕정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됨-옮긴이)' 이라고 부른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정념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지혜와 정의에 부합하여 살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훼방 받게 될 것이다.
- 이쯤 되면 독자들은 'Stoicism (대문자로 시작하는)과 'stoicism (소문자로 시작하는)을 뒤섞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혼란이 야기되었는지 헤아리게 될 것이다. 소문자로 시작하는 스토아주의'는 단지 하나의 성격 특성일 뿐이다. 그 단어는 불평하지 않고 고통이나 역경을 견디어 내는 정신적 강인함이나 인내심을 가리킨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스토아주의'는 그리스 철학의 온전한 한 학 파이다. 감정적으로 강인해지거나 회복력을 갖는 것은 그 철학의 그저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소문자 스토아주의'는 정의, 공정, 타인에 대한 친절 등에 관련된 스토아적인 덕의 사회적 차원 전체를 무시한다. 또한 사람들이 소문자 스토아적인 태도, 즉 불굴 의 정신을 갖는 것에 관해서 말할 때 그것이 단지 감정의 억압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감정의 억압은 실제로는 아주 건강하지 않은 태도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것이 마르쿠스 아 우렐리우스나 다른 스토아주의자들이 권장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 을 매우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불 건전한 감정들을 건전한 감정들로 전환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 성을 사용하여 가치판단과 그것의 근거가 되는 다른 믿음들에 도 전함으로써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현대적인 합리정서 행동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 REBT와 인지행동치료 BT에서 활용하는 치료법과 상당히 비슷하다.
- 세네카는 『화에 관하여』에서 감정을 이해하는 스토아의 모형을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그는 정념을 경험하는 과정 을 세 가지 '운동' 혹은 단계로 나눈다.
제1단계 최초의 인상들이 자동적으로 마음에 부과된다. 여기에는 생 각들과 새로 생긴 감정들이 포함되는데 스토아주의자들은 후자를 '프 로파테이아이 Propatheia, 즉 '원형적 정념'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인상은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초기 불안을 유발할 것이다.
제2단계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대다수 사람들은 그 첫 인상에 동의하고 부화뇌동하면서 더 많은 가치판단들을 보탤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파국적인 사유에 골몰할 것이다. 이제 나는 끔찍하게 죽을지도 몰라!' 그들은 그렇게 걱정을 하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 속적으로 그 생각에 매달릴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그 익명의 철학자 같은 스토아주의자들은 초기의 생각과 감정 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그것들에 대한 동의를 보류할 줄 아는 사람들 이다. 그들은 이렇게 되됨으로써 이를 실행할 수도 있다. “너는 그냥 하나의 인상일 뿐이고 네가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실제 사정과는 전혀 달라.” 혹은 “우리를 당황케 한 것은 실제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일 뿐이야.” 배는 가라앉고 있지만 나는 어쩌면 뭍에 오를 수도 있다. 설령 그러지 못한다 해도 어쨌든 겁을 집어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침착하게 용기를 내서 대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동일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런 태도를 실천한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칭찬할 일이 아닌가. 제3단계 반면에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이 본래적으로 나쁘다거나 파국 적이라는 인상에 동의해 버리면 완전히 무르익은 '정념'이 발달하게 되며, 그로 인해 빠르게 통제 불능의 상태로 휘말려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폭풍에 갇혀 있을 때 세네카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 상황에서 그는 점점 멀미가 심해지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바람에 어리석게도 물로 뛰어들어 손수 파도와 암초를 헤치며 해변으로 건너가겠다고 나섰다. 배 안에 남아 있는 편이 훨씬 더 안전했을 텐데도 말이다.
- 『명상록』에서 마르쿠스는 본인도 인상들을 떨쳐내는 데 어려 움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는 있으나 그런 인상들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왜냐하면 그런 인상들은 그 나름의 “오래된 방 식”에 따라 생겨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상들은 동물들에게 기본적인 감정들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겨 난 것들이다. 이것은 폭풍우에 시달리는 겔리우스의 배에 탄 그 익명의 스토아 교사처럼 마르쿠스가 그런 인상들을 본래적으로 나 쁜 것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무심하게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 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신체에 생기는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들 은 불가피하게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감각이건 마음이건 다 동일한 유기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감각들에 저항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것들의 발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좋거나 나쁜 것이라는 판단을 보태는 일만 마음이 허용하지 않으 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유한 철학 사상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스 토아주의 Soicism(대문자 'S'가 사용된)”와 단지 '불굴의 정신을 갖는 것' 등과 같은 어떤 성격상의 특징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스토아주의 Stoicism(소문자 s’사용된)”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흔히 스토아주의란 불안처럼 자기들이 나쁘거나 해가 되거나 창피하다고 간주하는 감 정들을 억누르는 태도와 관계가 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그런 태도는 나쁜 심리학일 뿐만 아니라 스토아 철학과도 완전히 상충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비자발적인 감정적 반응 들, 돌연 생겨나는 불안감을 무관심하게 수용하라고 우리에게 가르 친다. 그런 것들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그런 느낌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있다.
-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소피스트들은 전형적으로 찬사를 따내기 위해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애썼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토아주의자들은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진리를 파악하고 소통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이것은 감정적인 수사나 강한 가치판단의 사용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수사 학을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데 사용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사학을 통해 실은 자기 자신에게까지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말을 할 때만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해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확 실히 우리의 말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는 우리의 언어 선택을 통해서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우리는 과장하고, 과도하게 일반화하고, 정보를 생 략하고, 강한 언어와 화려한 은유를 사용한다. “저 인간은 언제 봐 도 나쁜 놈이야!” “저 개자식이 나를 완전히 열받게 만들었어!” “이 일은 완전 개수작이야!” 사람들은 이런 절규들이 분노 같은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역으로 우리의 감정을 야기하거나 지속시키고 있다면 어쩌 겠는가?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수사는 강렬한 감정들을 유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일한 사건을 더 객관적 으로 기술함으로써 감정적 수사의 효과를 무효화하는 것이야말로 고대 스토아의 정념 치유법의 기초를 형성한다.
- 우리는 마르쿠스가 그가 태어난 가정에서 배운 검소함과 꾸밈없는 언행 같은 가치관이 제2차 소피스트 운동 시기와 하드리아누스의 궁정 수사학자들의 가치관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스토아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언어 사용을 역(逆)수사학적 기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객관적인 언어로 사건을 다시 서술하는 것 같은 기법을 통해 가치판단으로부터 자 유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인지치료에서 이야기하는 탈파국 화하기의 오래된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서술할 때(그것이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이런 접근 법을 수용하는 것은 스토아의 다른 수행들을 공부하는 기초 단계 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음 단계가 이어진다. 내가 가진 어떤 자원 과 덕이 나를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해 줄까, 현명한 사람이 라면 같은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까 숙고하는 것이다. 인지적 거리 두기라고 부르건 카타르시스라고 부르건, 우리는 사물에 대한 과도 한 집착을 내버림으로써 강한 가치판단을 외적 사건과 분리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그리 신통치 않은 착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에픽테토스의 유명한 격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진정으로 훌 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우리의 속을 뒤집는 것은 사물들이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우리는 마르쿠스가 궁정 생활과 형식적인 수사학의 미혹에서 벗어나면서 점점 더 철학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보 았다. 아마 마르쿠스에게 더 철두철미하게 스토아 철학으로 개종해서 그 철학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라고 설득한 사람은 그의 개인적인 정신적 지주 유니우스 루스티쿠스였을 것이다.
- 「황금 시편」에 나오는 다음의 유명한 시구는 에픽테토스가 학 생들에게 들려주기도 한 것으로서 저녁 명상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그대가 낮에 한 일들 모두를 낱낱이 되짚어 보기 전에는 결코 피로에 지친 눈을 감아 잠을 허락하지 말라 "내가 어디서 틀린 것인가? 난 무엇을 했던가? 그리고 해야 할 일 중에 하지 않고 남겨 둔 것들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가 한 행위들을 검토하고 그런 다음에는 야비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그대 스스로를 꾸짖되, 제대로 된 일들에는 기뻐하라
- 스토아적인 기쁨에 관해 강조해 둘 만한 두 가지 핵심적인 요점이 더 있다.
1. 주로 스토아주의자들은 기쁨을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인생의 목표는 지혜이다) 그것의 부산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의 희
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기쁨을 직접 추구하려 하는 것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2. 스토아적인 의미의 기쁨은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라기보다는 능동 적이다. 그런 기쁨은 우리의 행위들 우리가 한 일들에 담겨 있는 덕스러운 성질을 지각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반면 육체적인 쾌락은 설령 그것이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등의 행위들의 귀결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에게 어쩌다 생긴 경험들로부터 생긴다.
『명상록』에서 마르쿠스는 통증과 질병에 관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들로 거듭 되돌아온다. 특히 에피쿠로스의 원론적 교의 Principal Doctrines』에 실린, 통증에 대처하는 조언이 담겨 있는 에피쿠로 스의 유명한 격률에 관심이 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이란 급성이 거나 만성이지만, 결코 둘 다는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견딜 만한 것임을 스스로에게 일깨워야 한다고 말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Perulians는 에피쿠로스가 “작은 고통은 하찮은 것이고 큰 고통은 지속되지 않는다” 라는 격률을 지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원래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극심한 통증이라면 오래가 지 않을 것이며, 만성적인 통증이라면 아주 나쁜 상태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되됨으로써 통증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사 람들은 자신의 통증은 만성적이면서 극심하기도 하다고 말하며 이 런 조언에 반대하곤 한다. 하지만 『명상록』 앞부분에서 마르쿠스는 에피쿠로스에게서 따온 같은 인용구를 다음과 같이 풀어쓴다. “통 증에 관하여: 만약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를 데려가 버릴 것이요, 지속되는 것이라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요점은 우 리가 견딜 수 있는 능력치를 넘어서는 만성적인 통증이라면 우리 를 죽였을 것이므로 우리가 여전히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은 아주 나쁜 상태도 견딜 수 있다는 의미이다.
- 에픽 테토스는 원래 노예였고 네로 황제의 심복이 었던 에파프로디토스 peophroditus가 주인이었다. 교부 오리게네스 Origenes 에 따르면, 에파프로디토스는 어느 날 화가 나서 에픽테토스를 붙 잡고 그의 다리를 잔인하게 비틀었다. 에픽테토스는 반응하지 않았고 조금도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는 그저 뼈가 곧 꺾이게 생겼다고 주인에게 알려 줄 뿐이었다. 에파프로디토스는 다리를 계속 비틀어 댔고 정확히 그가 말한 그 일이 발생했다. 에픽테토스 는 불평을 터뜨리기는커녕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듯 이 렇게 응답하였다. “그거 보십시오, 부러질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 았습니까?" 에픽테토스는 『대화록』에서 자신이 불구임을 넌지시 암시하 지만 결코 그 이유를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질병에 대처하는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자신의 불구를 사례로 사용한다. 그 는 질병이란 우리 몸의 방해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러겠다고 작심하지 않는 한 우리 의지의 자유를 방해하지는 못한다고 학생 들에게 말한다. 다리를 저는 것은 다리의 방해물이지만 마음의 방 해물은 아니다. 에픽테토스는 날개가 안 자라나서 날 수 없는 것 때문에 심란해하지 않듯이 절뚝거리는 다리 때문에 심란해할 일 이 없었다.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단지 인생에서 자신의 통제 너 머에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절뚝거 림을 지혜와 성품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했다. 인생 후반에 그는 자유를 얻어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의 주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신체적 고통을 바라보는 스토아주의자들의 저 유명한 무관심을 강력하게 예증해 준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마르쿠스도 틀림없이 들어 봤을 것이다.
- 마르쿠스는 가치판단의 보류를 마음이 신체 감각들로부터, 지금 경우에는 통증과 질병의 신체 감각들로부터 '퇴각' 혹은 '분리' 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정화utsis' 하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그는 또 한 판단의 보류를 설명할 때 고통과 쾌락은 원래의 자리, 즉 그것들 이 속해 있는 신체 부위에 남겨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 한다. 설령 마음의 가장 절친한 동반자인 몸이 “베이거나 타거나 곪 거나 썩거나 하더라도, 신체 감각이란 본래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 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한, 평화로운 상태에서 우리의 통제력을 보 존할 수가 있다.
마르쿠스는 이것을 “무관심의 대상들에 무관심해 지는 것”이라 고 부른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스토아 심리학의 미묘한 측면들을 상세히 설명하는 특별히 중요한 구절이 있다. “우리는 고통과 쾌 락의 신체 감각을 포함하여 외적인 것들이 우리의 통제력을 뒤흔드는 일이 늘 없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마음 둘레로 선을 그어 경계선을 표시하고 신체 감각들을 그 선 바깥에 위치시킴으로써 우 리가 마치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저 건너편에 있는 것들을 바라 보듯 하라는 뜻이라고 그는 말한다. 반면에 우리가 고통 같은 외적 감각들에 대해 강한 가치판단을 내리도록 스스로 허용한다면, 우리 의 마음이 그런 것들과 융합되어 버리고 결국 괴로움의 경험 속에 서 우리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 불쾌한 감각을 괴로운 신체 부위에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일에 덧붙여, 마르쿠스는 그런 감각의 지속성 과 관련하여 그것이 시간과 공간 둘 다의 측면에서 모두 한도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라고 스스로를 자주 일깨운다. 그는 이 전략을 외 적인 것들 일반에 적용하지만 특히 질병의 고통스런 감각과 증세에도 적용한다. 이것은 격심한 고통은 그저 잠깐일 뿐이라는 사실 에 유념하라는 에픽테토스의 충고와 비슷하다. 어쩌면 아브라함 링컨이 인용한 적이 있는 옛 페르시아의 속담에 친숙할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지나갈지니.” 이 격언도 유사한 요점을 제안하 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불쾌한 감각의 덧없음을 부각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과거에 얼마나 많은 불쾌한 감각이 이미 왔다가 사라졌는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울 수도 있다.
- 이 접근법은 스토아적인 무관심의 태도를 권장할 때 마르쿠스가 가장 선호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사물들을 흐르는 강물처럼 늘 변화하는 것들로 바라보는 것이 그것들에 대한 감정적인 집착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때때로 그는 더 나아가 바로 자기 자신의 덧없음, 즉 자신의 유한성을 스스로에게 일깨운다. 고 통스런 감정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요구할 때 어쨌든 그 것에 한도가 있으리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런 감정에 대 한 무관심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짧고 금방 종착역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 『명상록』을 쓸 무렵의 마르쿠스는 프론토와 불만을 주고받던 시절에 비해 고통과 사뭇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스토아주의자 들에 따르면, 통증이나 질병에 대한 우리의 첫 반응은 자연스럽고 합당한 것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해 점차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우리의 괴로움을 증폭시키거나 영속화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것이다. 동물들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한 동안 상처를 핥을 수도 있지만, 그 후로 여러 주 동안 그 고통을 반추하거나 친구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잠을 설치고 있는지 불평하는 편지를 쓰거나 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