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유일하게 찾아낸 오래 사는 법이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
- 두 세기 전에는 30세면 이미 늙기 시작했다. 1800년 당시 평 균 수명은 30~35세였는데 1900년에는 45~50세가 되었고 현 재는 1년에 세 달꼴로 수명이 연장되고 있다. 지금 태어나는 여자아이 두 명 중 한 명은 100세까지 살 것이다. 수명 연장의 파급 효과는 모두에게, 아주 어린 아이에게까지 미친다. 밀레 니얼 세대는 18세부터 자기네가 100세까지는 살리라 예상한다. 이리하여 학업, 직업 이력, 가족, 사랑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인생은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다. 빈둥대거나 방황하거나 실패하더라도 다시 걸어가면 되는 머나먼 여정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20세에 결혼해서 애를 낳을 필요도 없고, 학업을 빨리 마치려고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직업을 여러 개 가질 수도 있으며, 결혼도 여러 번 할 수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최후 시한을 아예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이리저리 돌아갈 여지가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점도 있다. 망설임에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선택지가 너무 많아 정신을 차릴 수 없으니 곤란하기도 하다.
- 빅토르 위고는 좀 더 간단하게,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짐 은 정말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사는 것”이라고 했다. 어쩌 다 보니 주어진 이 20년, 30년으로 뭘 해야 하나? 우리는 이 미 제대했는데도 또다시 전투에 동원된 병사들과 비슷한 신세 다. 할 일은 얼추 다 했고 결산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 그래도 계속하기는 해야 한다. 삶이 두렵고 이 길의 끝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약속의 땅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는 늙는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인디언 서 머, 역사에 전례 없는 이 새로운 만년晩年은 그들의 소망을 부정 한다. 그들은 쉬기를 원했는데 버티라고 한다. 전에 겪어본 적 없는 이 유예는 흥미로운 동시에 불안하다. 추가로 주어진 날들의 수확을 채워야 한다. 장-폴 사르트르는 1964년에 《말》에서 “내가 더는 전진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 이 나의 진전이다”라고 했다. 당시 59세였던 그는 “산을 오르는 자의 젊은 취기가 그립다고 고백한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시한이 짧아지고 가능성은 축소되었으나 여 전히 발견, 놀라움, 기막힌 사랑이 있다. 시간은 희한한 우군이 되었다. 우리를 죽이지 않고 떠받친다. 불안과 경쾌함의 매개, “과수원 같기도 하고 사막 같기도 하다.”(르네 샤르) 인생은 여름 날 저녁처럼 죽죽 늘어진다. 싱그러운 공기, 맛있는 음식, 다정 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잠보다는 그저 이 마법 같은 저녁을 오래오래 누리고만 싶다.
- 프랑스 시인 클로드 루아는 절묘하게도 “인생이 문장을 끝맺지 않는 법”을 말했다. 끝을 딱 맺지 않고 반쯤 열린 문처럼 내버려두는 편이 인간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닫아주고 마침표를 찍어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우리 팔자가 어쩌니 저쩌니 떠들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인생의 여정을 세 단계로 구별했다. 미학적 단계에서는 즉각적인 것을 좇는다. 윤리적 단계에서는 정신의 요구를 좇는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단계에서는 자기 실현을 좇는다. 고무적인 이야기이기는 한데 과연 누가 자기 인생을 논술문 개요처럼 세 단계로 딱 떨어지게 나눌 수 있을까?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 전개 따위는 끝까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문 앞에 떠밀려 있는 상태로만 시간 속에 정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되 고정 거주지는 없는 노숙자들이다.
- 원래 노년은 평정심의 시간이었다. 손자의 일이라면 뭐든 이해하고 용서하는 애정 넘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시간. 이 시간에 군더더기는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다. 신체의 수분이 빠지고 가장 중요한 것, 정신의 위대함과 영혼의 아름다움만 남는다. 생은 점점 감퇴하고 불꽃 하나만 남지만 바로 그 고고한 불꽃이 만인의 존경과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제 생에 대한 이분법적인 생각은 흐릿해졌다. 한쪽에는 활발한 생이 있고, 다른 쪽에는 정반대로 숨이 차서 헉헉대는 생, 병석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생이 있다는 생각 말이다. 후자는 사 람들이 귀신 보듯 두려워한다. 기력을 자기 보존에 다 쏟아붓고 그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매일 전쟁을 치르는 생.
여기에 또 다른 클리셰가 겹친다. 노년은 지상의 즐거움을 탐하는 자세에서 차츰 벗어나 명상과 연구에 몰두하고 지혜의 말씀으로 신탁을 전하며 저승길을 준비하는 시간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요즘도 그러한 내려놓음이 일부에게는 먹힐지도 모르겠다. 사실,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에 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어라. 요컨대,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
본질을 지키고 싶다면 무엇을 버려야 할까? 일단, 나이가 들 었으면 포기하라든가, 어차피 노년에는 욕망이 감퇴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버려라. 결국은 노년이 우리를 제압하고 수용하 겠지만 그래도 노년은 재건의 대상이다. 엎드려라, 포기하라, 라는 강요를 거부해야 한다. 고전적인 지혜는 사실 체념과 다르지 않았다. 삶이 척박해지지 않도록, 이름은 거창하지만 결국 요양병원과 다르지 않은 시설에 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저항해야 한다.
- 여론조사 기관들이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스트레스에 초연해지면서 행복을 가장 잘 느끼는 때는 70세라고 한다. 어쩌면 그 초연함은 그들이 이미 세상에서 벗어나 있어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70세에는 물질적 문 제들에서 벗어나 40세 때보다 자기다운 충만감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노동의 중단과 정신의 평온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연금 삭감과 일을 그만둔 후의 공허감에 시달리다가 거세게 들고일어난 은퇴자들을 못 보았는가? 그러니 가난과 노쇠의 결합에 기쁨의 색을 덧칠하는 것이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이스 (0) | 2022.05.07 |
---|---|
엑셀런스 (0) | 2022.05.02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0) | 2022.04.16 |
오리지널의 탄생 (0) | 2022.04.16 |
게으른 뇌에 행동 스위치를 켜라 (0) | 2022.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