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은 것이든 좁은 것이든 진화심리학은 정신이 단순히 크고 강력한 범용 정보메커니즘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따라서 어떤 문제에나 일반적인 내용중립적 추론과 지역문호적 추론을 적용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의 경우에는 틀의 문제, 즉 어떤 정보나 추론이 문제에 적절하거나 부적절한지 결정하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하기위해 우리 정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의 문제에 특별히 관련된 정보를 학습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 헨리 플로트킨은 일반적인 견지에서 그 어려움을 설명한다.
세계를 분할하고 기술하고 학습하는 방식은 무한히 많다. 만약 세계에 아무런 제약없이 학습하는 진정한 범융학습장치를 풀어놓는다면, 그 장치는 무한히 넓은 탐색공간에서 무한히 많은 탐색경로들 중 하나를 택해 정보를 얻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생물학적으로 유용한 것을 학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이 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은 단 하나뿐이다. 무한정한 탐색시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방대한 탐색공간에서 얻은 지식을 선택적으로 보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진화다. 진화는 유기체의 무한한 세대에 걸쳐 세계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여 필요의 기준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존한다.
그 집합적 지식이 종의 유전자 풀에 저장되어 개체에게 분배됨. 그리하여 개체는 특수한 방식으로 특정한 대상만 학습하는 내재적 관념과 성향을 가지고 세계속에 태어난다. 모든 인간, 모든 종의 학습자는 삶을 시작할 때 무엇을 배울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탐색해야 하는 공간은 이미 상당히 좁혀져 있는 것이다. 이 견해를 종 전체 범위에서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가 있다.

- 이야기는 사회적 감사에 대한 커다란 관심에서 생겨났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을 사회적 정보에 집중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 형태는 한담이 될 수도 있고 픽션이 될 수도 있다. 현대의 수렵채집사회들은 한담을 통해 지위를 추구하려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교훈적 이야기를 통해 평등한 규범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경고함으로써 평등주의를 튼튼하게 유지한다. 어떤 규모의 사회에서든 비상한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기억을 사로잡는다. 또한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고 형벌을 가하거나 보상을 내리는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널리 확산되고 오래 존속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협력 행동을 자극하고 추적하는 강력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종교 이야기는 비밀스런 영혼의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한다.

- 자연선택은 예언이론이다. 다윈주의자는 자신있게 예언할 수 있다. 만약 비버에게 둑을 쌓는 일이 쓸모없는 시간낭비라면 둑을 쌓지 않는 다른 비버가 더 잘 생존할테고, 둑을 쌓지 말라는 유전적 성향을 후대에 전승할 것이다. (리터드 도킨스)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만약 진정으로 예술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예술적 성향이 별로 없고 엄격히 실용적이고 경쟁적인 현실주의자들이 생존과 대량번식에 성공했을 테고, 그 후손들이 오랜 진화를 거치며 예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몰아냈을 것임. 독자적으로 옷, 노래, 이야기를 만들려는 성향이 없는 사회가 그런 성향을 가진 사회를 몰아냈을 것임. 예술이 없는 개인과 집단은 예술을 가진 개인과 집단보다 번영해야 할 것임.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예술이 없는 인간사회는 없으며, 지금까지 성공적인 사회는 예술이 크게 발달한 사회였다.

- 예술이 흡인력을 가지는 이유는 쾌락을 일깨우기 때문이며, 예술이 쾌락을 일깨우는 이유는 놀이처럼 우리의 신체를 미세조정하기 때문. 소규모 사회에서는 모두가 노래와 춤, 직조와 조각, 분장과 의상 등 공동체의 예술에 동참한다. 분업이 상당히 진척된 대규모 사회에서 전문예술가는 고도로 집중된 연습과 노력덕분에 실력이 향상된다. 그런 사회의 경우 유년기가 지나면 성인은 각종 예술의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된다. 생산자에게나 소비자에게나 예술은 권태를 피하게 해준다. 예술은 호기심을 되살려주는 감정이며, 타성에 젖는 것을 막아준다.
인지놀이로서의 예술이 우리의 능력을 높여준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 각각의 예술이 중점을 두는 영역에서 효과적인 견해와 행동을 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소리, 동작, 시각화, 표현의 예술이 생겨나며, 특히 이야기의 경우 우리 자신가 타인의 계획이나 행동을 추측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 아기가 유형화된 놀이를 좋아하도록 자극을 주는 어른의 행동은 모성어, 원시대화, 자장가와 마찬가지로 문화에서 옴. 그러나 여러 문화권에 걸쳐 상당히 비슷하고 훈련이 필요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행동이므로 문화적으로 습득된 행동의 견지에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부모는 아기의 신체적 욕구에 대해 종에 적합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듯이, 인간의 부모는 아기가 예술의 유형화된 인지놀이를 좋아하게 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다.

- 인간특유의 고도한 정신이론을 지탱하는 토대는 다층적인 능력으로 구성된다. 가장 단순한 것은 최초로 진화한 근본적인 능력으로, 산 것을 감지하는 능력. 더 섬세한 것은 머리와 눈의 방향, 표정과 자세의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더욱 복잡한 것은 그 외적 신호돌을 가지고 목표, 의도, 욕망을 직관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다. 이 단계에서도 빌리고, 움직이고, 제거하고 돌려주고, 바꾸고, 파는 등등의 신체운동을 똑같게 보일 수 있다. 다만 행위자의 목표와의도만 다를 뿐이다. 인간의 고유한 정신이론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중대한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또한 우리는 타인의 욕망과 의도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타인이 알고 있는 것을 추측한다.

- 호혜적 이타주의의 주요한 매력은 온전한 가치를 그대로 돌려받는 데 있는 게 아님. 한담을 나누거나 소식을 전할 때 우리는 대개 정보와 정보를 교환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우리는 한담을 회피해야 할 궂은 일이나 희생이라 여기지 않음. 그보다는 최신 소식을 전하기 위해 경쟁한다. 왜 그럴까?
한담은 개인적 이득과 집단적 이득을 모두 가짐. 집단내의 협력은 비협력자에 대한 징벌에서 이득을 얻는다. 한담은 대단히 중요한데, 주로 타인의 도덕적, 사회적 위반행위에 관한 것이 대부분. 타인의 선행에 대한 한담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한담은 타인의 관심을 협력의 위반과 사회적 규범의 훼손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경찰이나 교사와 같은 역할은 한다. 직접적 징벌은 비용이 많이 드는 데 반해 소규모 사회의 경우 한담은 저비용으로도 비협력자무리의 행동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함. 수렵채집사회에서 한담과 조소는 강력한 평등주의 규범을 침해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다. 한담이 사회적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한담으로 사적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면) 집단의 구성원들은 한담을 귀중하게 여길 것이다.

-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고실험은 현실적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현실에 관한 우리의 사고를 명료히 해야 한다.: 픽션의 사고실험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처럼 사실성에 부합할수도 있지만 이솝우화처럼 사실성에 어긋날수도 있다. 우리가 사마리아인의 따뜻한 마음씨를 배우기위해 사마리아인이 되거나, 예수살렘에서 예리코까지 여행하거나, 길가에서 강도를 당한 여행자를 만날 필요는 없다. 짧은 우화임에도 구성과의미가 명료한 이유는 픽션이기 때문.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교훈적 이야기는 우리가 왜 남을 도와야 하는지 성찰하기 위한 튼튼한 기반이 된다.
이 우화는 짧음, 명료한, 유형화된 구성, 사실성을 통해 기능한다. 절박한 처지에 놓은 나그네는 우리가 얼마든지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이솝의 우화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예상을 거부하고, 인물을 단순화하고, 다른 종을 의인화함으로써 우리 감각에 호소한다. 또한 간결함과 도식적 집중화보다 지속성과 정교한 사실성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섬에 조난을 당할 일은 없겠지만, 그의 인내, 결의, 재주를 본보기로 삼고 배울 수는 있다. 상황의 특이함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가 크루소의 처지에 공감하면 그 교훈은 감정적으로 몰입된다. 우리에게는 크루소의 곤경을 보고 느낄 여유가 있다.

- 자비를 요하는 상황, 혹은 아부를 경계해야 하거나 책략과 결의가 필요한 상황을 맞을 때,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솝의 까마귀와 여우 우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상적인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세부시나리오까지 비슷할 필요는 없다. 
정신은 미래를 발생시킨다. 정신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견해 행동을 이끈다.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매우 가변적이고 변화무쌍하고 탄력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사적 경험이나 전해들은 경험만이 아니라 가상놀이와 픽션의 사고실험을 이용해 상황을 해석하고 여러가지 시나리오, 행동, 대응을 시험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면 명백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 모든 이야기꾼은 지위를 얻는다. 이야기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 일에 관한 더 깊은 설명을 가능케 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이야기꾼은 더욱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과거에는 신화를 만드는 사람이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과학자가 그런 이야기꾼에 해당.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정신적 힘에 의거한 설명은 픽션,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 뿐 실제의 준거가 없다. 하지만 종교적 신화는 사실이 아닌데도 인류가 문명을 가꾼 이래 많은 사람에게 심층적 표준형태가 되었다. 그런 이야기는 추가 설명을 원하는 우리의 욕망, 행위에 대한 우리의 심층적 독해, 예외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제거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직관적 심리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간사의 상당부분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행위적 설명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탓에, 과학이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행위자가 없는 설명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행성운동을 중력의 견지에서 파악한 뉴턴의 설명에 많은 사람이 만족했으나, 신이 없는 우주 혹은 비인격적 신을 허용하고 우주의 시계공이 우리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이유로 거부한 사람도 많았다. 다윈이 제기한 자연선택에 의한 설계의 관념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뿌리깊은 성향에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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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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