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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15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저자
권용선 지음
출판사
역사비평사 | 2014-10-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은 발터 벤야민이라는 지식인이 자신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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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란 무엇일까? 우리가 공부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머릿속에 동시에 연상되는 것은 책, 노트, 펜, 책상, 컴퓨터, 사전, 도서관 등의 이미지임. 보통 사람들에게 공부란 조용한 방안의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 즉 지식의 습득에 가까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읽고 이해한 내용을 글로 쓰는 것. 이 과정을 통과할 때만 배우고 익힌 것을 온전히 자기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음. 이런 점에서 보자면 공부란 무엇보다 고독한 독서의 시간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음. 하지만 이런 공부는 모든 공부의 시작, 혹은 공부로 나아가는 하나의 들머리에 불과함
- 낯선 것, 미지의 것을 읽고 이해하고 자기화할 때, 즉 그것을 다시 객관적인 방식으로(글을 쓴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지식은 발생함. 이때 읽고 이해하고 자기화하는 과정 속에는 그 지식의 대상을 특정한 기준에 맞추어 체계화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됨. 이런 식으로 훈련된 우리의 이성은 어떤 대상에 대해 추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됨. 그런데 이것은 문자를 읽고 쓰는 부류의 인간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임. 월터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지적했듯이, 문자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식이란 철저하게 경험적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엇인가를 분류하고 연상하고 체계화하고 추론하며 추상화하는 능력이 없음. 대신, 그들에게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자연과 세계를 모방함으로써 그것들을 이해하는 능력, 세계 속에서 인간과 뭇 생명과 사물들의 질서를 파악하고 교감하는 능력이 있음.
- 기술문명의 발달은 지식을 대중화하고 사람들의 감각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지만 경험과 모방으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이전 시대의 방식을 빼앗가가버렸음. 벤야민은 그러한 상태를 '지성의 인간다운 사용법'을 잃어버린 상태로 이해함.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이성중심주의, 모든 것을 체계화하고 분류하고 목록화하는 것으로 인간과 사물, 자연과 세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실제로 인간이 갖고 있던 하나의 능력인 '예견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현실에 눈감게 만드는 사회의 우둔함으로까지 나아갔다. 예견은 인간의 신체가 자연과 가까웠던 시절에 경험과 모방으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던 인간들이 지닌 능력이었다. 사람들은 그 능력을 통해 도취의 상태에서 우주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새로운 신체를 조직할 수 있도록 했다면, 벤야민은 그것을 통제한느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적 신체를 조직함으로써만 자본-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벤야민의 시대에 그 공동체적 신체의 이름은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힘은 그 신체가 회복되어가는 과정의 척도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규율이 그 신체의 뼛속까지 스며들지 않는 한 그 어떤 평화주의적 숙고도 그 신체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 벤야민에게 도시는 삶의 장소이자 그의 사상이 만들어지는 핵심적 공간임. 도시를 빼놓고는 벤야민이라는 한 인간을 이해할 수 없고 그의 독특한 사상에도 접근할 수 없음. 그는 무엇보다 도시 그 자체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낯선 도시로 여행하는 경험을 통해 그만의 고유한 이론적 방법을 만들어냈음. 도시는 독서나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이미 어린시절부터 도시에 대한 피상적 인상을 넘어서는 중요한 본질에 접근하도록 이끌고 있었다.
- 벤야민은 도시를 장보기의 무대로 처음 만난다. 돈이 오가고 물건이 거래되는 시장으로서 도시는 어린 벤야민에게 상품과 화폐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처음 가르친 곳이다.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상점, 그곳에 고용된 점원, 상품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거울, 그리고 원하기만 하면 그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아버지의 돈, 이 모두가 도시의 첫인상으로 기억하는 시장에서 경험했던 것들이다. 도시의 야단법석은 상품과 화폐가 부리는 마술이었고 저 불가해한 산맥, 아니 상품지옥의 대열, 그곳이 도시였다. 어린시절 그가 경험했던 장보기의 무대로서 도시의 이미지는 훗날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케이드를 상품들의 신전으로 명명하고, 아케이드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일부항목속에 상점, 점원, 거울 등을 배치함으로써 다시 호명된다.
- 베를린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벤야민은 이미 자신의 방향감각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고, 지도의 사용법을 익히기까지 30년이나 걸렸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고유한 무기로 바꿔버렸고, 힘들여 익힌 실용적 지식을 또 한순간에 던져버림.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타고난 결점같아 보였지만 그는 여행에서 심하게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이런 결점을 낯선 도시를 배우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 즉 길을 잃고 헤매기의 기술로 바꿔냈다. 그런가하면 애써 익힌 지도 사용법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쓸모없는 것을 유용한 것으로 바꾸거나, 아무리 중요해도 자신에게 필요없다면 미련없이 던져버리는 그의 공부법은 무엇보다 자신의 무력함을 극복하려는 와중에 나왔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 아마도 어떤 일에서든 무력함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일에서 겨로 장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에 수긍한다면 그러한 무력함이 처음에, 혹은 노력을 시작하기 이전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의 와중에 생긴다는 점 또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년시절의 끝무렵부터 대학시절 초기에 걸친 시기인 내 삶의 중간에 나는 베를린과 그러한 관계에 놓였던 것 같다. (베를린 연대기)
- 벤야민은 모스크바 여행을 통해 자신이 떠나온 곳, 즉 베를린을 다시 발견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에 관한 에세이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를 알게 되기 전에 먼저 모스크바를 통해 베를린을 보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모든 여행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여행은 낯설고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과정속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지만 언젠가는 일상의 삶이 있는 원래의 출발지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점에선 삶의 예외적인 방식이기 때문. 여행의 진정한 의미, 혹은 여행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낯선 곳의 경험으로 익숙한 삶의 공간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벤야민의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은 정신적 상태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정신적 상태에 대해 이런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는 것이야말로 러시아 체류에서 얻은 것 중 가장 확실한 것이다. 러시아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의식적인 지식을 가지고 유럽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을 배운다.
- 기존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다시 말해 역사주의적 관점은 역사를 하나의 연속적 흐름으로 파악.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가 축적되는 것으로, 시간상 후대에 해당하는 역사가 그 앞 시대보다 진보한 것으로 바라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의 기술과 지식이 진보하며 그 자체가 인류의 진보를 의미한다고 보는 이런 관점은 "역사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여 진행해 나간다는 생각과 분리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역사주의적 방법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사유에는 생각들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들을 모으는 역사주의에는 반성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에 현재를 덧붙인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일 수밖에 없음. 하지만 벤야민이 바라보기에는 역사는 언제나 직선 혹은 나선형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지 않았다. 역사는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연속적인 흐름을 갖지 않고, 따라서 균질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 중에서, 이를테면 전쟁이나 혁명같은 것이 세상을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역사주의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침략과 지배의 결과인 문명에 대한 해것이 단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지배에 저항하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성취했던 저 비상사태들의 가치를 그 이전의 역사나 그 이후의 역사와 동질적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을 역사주의는 모름. 이런 까닭에 벤야민은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 영화와 축음기의 발명 등 기술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보고 듣는 방식을 결정적으로 바꾸었지만, 그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과 도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옴. 보들레르라면 이런 시대와 도시, 그리고 군중사이를 산택하면서 편안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벤야민 역시 때때로 산책하고 헤매면서 도시와 군중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카프카의 방식, 집요하게 굴을 파고 사막에 길을 내듯 글을 쓰며 공부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줌. 그것은 소외와 불투명이 모든 관계의 특징이 된 시대와 인간의 삶을 한층 펴안하고 즐겁게 만들기 위한 도구들에 의해 인간 자신이 도구로 전락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 노력,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발견하려는 공부, 즉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발견해가는 실천이었음.
- 벤야민은 비평가이자 역사연구가였지만, 일반적 의미에서 비평가나 역사연구가이기 이전에 수집가였다. 그는 수집의 기초가 명주실처럼 매끄럽게, 모든 데이터를 완벽하게 보관해 놓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수집가의 능력 혹은 재료와의 관계가 그들의 기능적이고 실용적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풍경이나 운명의 무대인 양 연구하고 사랑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음. 그는 전형적이고나 분류가능한 것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재료들을 다루었는데, 그것은 흡사 수집가가 자신의 아이템을 소유하고 대할 때의 태도와 같았다. 그는 수집에서 중요한 점은 그 사물이 갖고 있는 본래의 기능, 즉 유용성에서 벗어나 새롭고 독자적 방식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료들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관점과 태도로 대하며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역사의 체계속에 배치하는 것을 의미했다
- 그때 그곳의 경험을 기억하기 위해 아이들은 사물을 모은다. 아니, 아이들이 수집하는 것은 사물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어떤 아우라다. 아이들이 모은 물건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리되고 보관된다. 이를 무시한 체계적 정돈은 아이들에게 혼돈을 주는 행위이며, 하나의 구조물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을 수집해서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외에도 벤야민의 수집에 어떤 고유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파티나 생일잔치가 끝나면, 그는 자신이 받은 선물 중에서 어떤 것을 새 장롱에 넣을 지에 대해 즐거운 고민을 했다. 그의 새 장롱안에서 물건들은 오랫동안 새거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일은 새것을 갖는 게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새 주인이 된 내가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이 되었다. 내 서랍에 쌓여 있는 수집품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발견한 것은 어린 벤야민의 상상력이었던 셈이다
- 자료가 될 만한 텍스트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벤야민의 태도는 자신이 쓴 글을 취급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남. 그는 한편의 글을 독립적이고 완결된 것으로만 취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신이 쓴 텍스트를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는 건축물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음. 필요에 따라서는 새로 쓰는 글 속에 이전에 썼던 글의 일부를 잘라내서 다시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음. 현재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기표절의 혐의를 피할수 없을지도 모를 이런 방식을 워드프로세스의 복사하기와 붙여넣기 기능이 만들어지기 한참 전에 스스로 개발해 낸 것. 수집품의 일부를 필요에 따라 원래 보관했던 상자에서 다른 상자로 이동시키듯, 그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단어와 문장 그리고 개별 단락들을 어느 한 곳에 고정하지 않고 그것들이 어울릴 수 있는 글에 잘라다 붙이면서 그 각각이 고유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취급하며 활용했음. 그에 더해 완결된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그것들을 취급하는 것이 아닌, 취급하는 이의 관점과 위치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는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해했음. 그리하여 마치 레고블록들처럼 각기 독특한 색깔을 지닌 그것들은 벤야민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나 절단되고 채취되어 새로운 텍스트 위에 재배치되었음. 각각의 요소들과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지식에는 어떤 위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쓴 글을 포함해서 어떤 텍스트와 마주했을 때 벤야민이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아카이브화하고, 수집하고, 구성(배치)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가 보여준 독특한 시각은 자료들을 발췌, 번역, 몽타주화, 재배치하는 데서 다시 확인됨. 그는 이런 태도를 통해 기존의 연구방법과 거리를 두는 한편, 쓸모없는 것들 혹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떤 역사의 자료와 인물들과 사건들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텍스트를 베껴쓰는 일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하는 것과 같음.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 길 위의 사소한 풍경이 보이고, 어떤 냄새나 소리, 분위기까지 섬세하게 경험할 수 있음. 반면, 문장을 단지 읽기만 하는 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높은 곳에서 지형과 도로의 상태를 조망하는 것에 비견할 만함. 넓게 조망할 수는 있어도 구체적으로 느낄수는 없고, 사소한 풍경을 발견할 기회도 놓친다. 문장을 베껴쓴다는 것은 길을 걷다가 무엇인가 기대치 않은 것을 발견하는 우연이나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를 듣게 되는 신기한 경험과도 같음. 오래된 책에서 마주친 어떤 문장을 베껴 쓸 때, 먼 과거로부터 온 소리를 듣고, 과거의 어떤 사건과 순간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셈. 이로써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진정한 수집가의 형상, 즉 사물이 그의 속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 사물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사물 속으로 밀어넣는 자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베껴쓰기와 인용을 극한으로 밀어붙였고, 그 작업은 인용부호 없이 인용하는 기술을 실험하는 것으로 이어짐. 인용부호의 사용은 그것을 인용하는 사람의 관점과 입장을 보강하는 보조 텍스트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움. 벤야민은 인용부호 없이 그 출전만을 명시한 채 문장들을 인용하고 그 문장들을 다시 연대기적 배열과는 다른 방식으로 배치함으로써 그것들이 지닌 독자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그는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역사를 인용하는 것이며, 인용은 역사적 대상을 그것의 관련성으로부터 떼어내는 낙업이라고 보았다.
- 벤야민이 보기에 집필에는 세단계가 있는데, 글의 재료를 모으고 생각을 조직하는 사고의 단계,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면서 문체를 구축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한편의 글로 완성되는 단계이다. 벤야민은 이상의 세가지 단계를 죽음에 비유한다. 무엇인가를 죽이지 않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고, 새로운 것은 태어날 수 없다. 사고는 영감을 죽이고, 문체는 그 사고를 묶으며, 글은 그 문체를 보상해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을 그는 구상의 데스마스크라고 불렀다. 한편의 글은 구상의 단계에서 가졌던 무수한 가능성들 중 선택된 단 하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글쓰기는 선택의 연속이다. 예시를 선택하고, 문장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선택하고, 어떤 문장으로 생각을 표현할 것인지 선택한다. 선택한 것들 중에서 최후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또 선택해 나간다. 이런 선택의 과정에서 글 쓰는 작가 고유의 스타일이나 문체가 만들어진다. 선택을 위한 논리적 사고가 시작되면 이미 한편의 글에 출발이 된 영감은 사라지지만, 사고의 진행과 글을 쓰는 신체적 행위의 결과 그 작품은 완성된다. 완성된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고, 이런 점에서 하나의 작품은 구상의 데스마스크라 할 만하다. 글쓰기 단계에 대한 이런 죽음의 비유 외에도 벤야민은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이 세단계를 표현함. 그것은 예술의 어떤 분야들과의 유사성을 연상시키는 비유였다. 바로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이다.
-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한느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는 얼핏 당연한 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고의 고투를 통해 나온 것이 아님을. 그 말은 글쓰기에 타인의 생각과 경험을 포함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의 생각과 경험에서 배우지 않고는 완전히 새로운 글을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벤야민이 말한 생각하는 것 속에는 우리가 읽고 보고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을 날것 그대로 둔 채가 아니라 충분히 비판하고 숙고하여 다시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능력까지를 포함한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일뿐만 아니라 실현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라는 형식으로 입을 통해 발화하거나 펜을 손에 쥐고 특정한 방식으로 힘을 부여해 문자로 정착시킨다는 의미다. 훌륭한 작가는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능력을 지닌 자이다.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스타일을 갖고 사유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창안해야 한다. 그때 그 스타일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적합한 방식이어야 한다.
- 우리시대의 공부는 점점 더 밥벌이의 기예를 익히는 데 한정해서만, 또는 개인의 수양을 연마하는 태도로서만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공부는 그것이 비록 실험과 실패의 연속일지라도, 더 좋은 삶을 위해 자신과 더불이 이 세계를 호흡하는 모든 존재를 해방시키는 쪽에 서야한다. 손쉬운 화해에 대한 의심과 불화를 통해서만 삶 혹은 공부는 긍정할 만한 것이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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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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