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베트남 이야기

저자
권쾌현 지음
출판사
연합뉴스(연합북스) | 2010-08-28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2000년부터 총 6년에 걸쳐 연합뉴스 하노이 특파원을 지냈던 ...
가격비교

- 베트남 공산당은 30년 호찌민이 창설. 소련과 중국을 드나들던 호찌민은 태국을 거쳐 홍콩에 들어간 30년 현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인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통치를 받아 현재의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묶어 인도차이나로 불리고 있었다. 공산당은 이때부터 당의 전위조직으로 베트민이라 불리는 민족해방전선과 베트콩이라 불리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미국과의 반식민지 전쟁에서 승리. 보 응웹 지압 장군과 팜 반 동 전 총리 등으로 구성된 베트민은 40년 마지막 왕조를 몰아내는 반봉건 투쟁과 53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성과를 거둠. 보 응웬 지압 장군은 베트민의 마지막 생존영웅으로서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원로그룹의 중심 축 역할을 함. 60년 미국의 베트남 점령에 항거해 결성된 베트콩 역시 공산당의 전위조직으로 75년 미국을 굴복시키는 전과를 올림. 베트민과 베트콩은 현재 조국전선이란 이름으로 공산당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당원교육부터 국회의원 선거 등 각종 선거를 관장하고 후보자의 자격검정 역할까지 맡고 있다.
- 호찌민 본인이 전 세계 어느 지도자보다도 민족을 아낀 지도자라는 점에서 동포애를 강조했음은 당연하고 특히 남북이 분단되어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사망했기 때문에 민족의 분열을 최악의 적으로 지적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항상 추종자들에게 국민을 사랑하는 아들딸과 같이 생각하고 국민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라고 가르침. 유훈은 특히 권력을 고루 나눠 서로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 그래서 나온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집단지도체제이고 이는 국민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는 통치방식. 이런 유훈통치는 전쟁 후 남북간 화합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를 했고, 미국 등의 경제봉쇄로 인한 엄청난 가난 속에서도 베트남인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각국이 성장경쟁에 뛰어들면서 유훈통치는 현실에 맞지 않는 방식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 2000년 이후 베트남이 고속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집단지도체제의 문제점이 자주 지적됐다.
-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베트남에 투자할 때 가장 어려운 점 중의 하나가 결정이 매우 느리다는 것. 투자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시간이 곧 돈인 경우가 많은데, 한국 기업인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에서 사업을 할 때에 비해 2~3배 이상 시간이 걸린다는 것. 이 밖에 경제성장과 함께 필요한 것이 국토개발인데 베트남에서는 땅 한평도 소유주의 승인없이는 건드리지 못한다. 우리나라에도 과거 사유재산 때문에 공공사업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사회주의 베트남에서 주민의 반대로 공공사업이 늦춰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유재산이 문제가 되면 정부조차 어쩌지 못하는 게 국민을 위한 정부의 기본정책이기 때문. 중국에서 사업을 해본 사업가들은 중국과 베트남의 토지수용방식이 너무 다르다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필요한 사업이면 일정기간 말미를 두어 사전에 통보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집행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베트남 정부는 모든 것을 정해 놓고도 여론이 나빠지면 집행을 연기하거나 아예 번복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 때문인지 하노이의 행정 중심지인 바딩 광장에는 농민이나 지주들의 토지수용 반대 데모가 심심찮게 벌어지지만 그 무섭다는 공안들도 구경만 하고 있는 게 예사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보기드문 진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 1800년대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했다. 특히, 프랑스는 1800년대 중반부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할 때까지 거의 100년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통칭. 1859년 미토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 지배 아래 들어간 베트남은 1900년대 들어 호찌민을 중심으로 끈질긴 독립항쟁을 계속. 1940년 일본의 침략으로 베트남에서 물러났던 프랑스는 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해 불러나자 다시 베트남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파견. 45년 호찌민을 주석으로 베트남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베트남은 강력 반발하며 무력투쟁을 시작했고 54년 디엔비앤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내쫓는데 성공. 그러나 베트남민주공화국 창설에 도움을 주었던 미국이 55년 친미 응오 딘 지엠 정권을 수립하자 베트남은 다시 세계 최강인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됨. 남과 북이 갈라져 통일의 기회를 엿보돈 북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올린 남부의 베트민을 베트콩으로 재편해 게릴라전을 시도하고 끊임없이 민중항쟁을 선도. 게릴라전에 시달리던 미국은 64년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65년 북의 핵심항구인 하이퐁항을 폭격함으로써 10년간의 길고 긴 베트남 전쟁이 시작됨. 베트남은 69년 9월, 호 주석이 사망하는 위기를 맞게 되지만 나머지 지도자들의 선전으로 75년 4월 30일 미군의 철수와 함께 남베트남을 함락시킴. 이로써 미국을 이긴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됨. 베트남은 통일 후인 79년 중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한다. 중국이 지원하던 캄보디아를 침공해 10년간의 통치를 결정한 데 대해 못마땅해 하던 중국은 국경문제를 이유로 베트남을 공격. 그러나 이미 초강대국 프랑스와 미국을 잇따라 이긴 베트남은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과 미국으로부터 획득한 초현대식 무기를 활용해 구식군대인 중국군을 초기에 진압. 베트남은 형식적이긴 하지만 44년 10년간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에 대항해 미국을 도와 게릴라전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로 승리를 맛보기도 했다. 일본은 베트남 지배 10년 동안 수많은 군수물자와 식량을 수거해 감으로써 수십만명에 이르는 베트남인들을 기아와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이로써 베트남은 44년부터 79년까지 불과 30여년 동안 세계 최강 프랑스와 일본, 미국, 중국을 차례로 물리치는,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을 보유하게 됨
-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남 전쟁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싸움, 월남과 월맹의 싸움으로 알고 있다. 국제역사를 미국과 소련의 양강 권력구도로만 본다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분석으로는 베트남전에서 월맹이 미국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을 찾기 힘들다. 베트남전은 그보다는 남부에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에 대해 통일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베트남인들의 목숨을 건 저항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 즉,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드디어 눈앞에 왔다고 생각했던 독립이 미국에 의해 무산된 데 대한 투쟁이라 보아야 함. 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보 응웬 지압 장군에게 패한 프랑스가 제네바협정을 토대로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자 베트남은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듯 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8개국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리해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였다. 호찌민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미국의 야심을 꺽을 수 없다는 판단아래 은밀히 주요 지도자들을 남쪽에 내려보내 베트콩을 전투세력으로 육성. 이미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을 치러 싸울 줄 아는 베트콩은 장비만 첨단인 미군에게 뒤질 것이 없었다. 더구나 남베트남의 응오 딘 지엠 정권에는 이미 베트콩 세력이 철저히 침투해 있어 미국은 월맹의 전략을 전혀 몰랐은나 월맹은 미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다. 심지어 월남 대통령의 가장 신뢰받던 고문조차도 북에서 파견된 요원으로 밝혀졌고 전쟁이 끝나자 월남정부의 주요 직책 가운데 절반이 베트콩 요원들로 드러났다.
- (1) 상당수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전의 한국 참전을 잘 모름. 각급 학교에서는 그들이 미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베트남전에서 한국 등 연합국이 참가한 사실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 오로지 그들은 미국과 싸우 승리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 따라서 많은 베트남인들은 한국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한국이 참전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가 많음
(2) 한국의 참전을 아는 정부나 당의 주요 인사라 하더라도 한국은 정식 참전국이 아니라 미국의 권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용병으로 참전했다고 보고 있따. 베트남인의 인사들은 한국이나 호주, 필리핀 등 연합국들이 참전을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또는 돈을 벌기 위해 용병을 파견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과 전쟁을 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입장에서는 한국이 사과하는 것이 적절치 않으며 누군가 사과해야 한다면 그 당사자는 미국이라 강조
(3) 베트남은 패전국이 아니라 전승국이기 때문에 상대편 어느 누구한테도 사과를 받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 그들은 지금까지 미국에 고엽제 피해 등에 대한 보상금은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차원에서의 전쟁보상금은 요구하지 않고 있다.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인들이 베트남인들에게 참전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패배자가 승리자에게 사과를 하는 우스운 상황을 연출하는 일이다.
- 8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전쟁에서 헤어나 경제를 챙기려 하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들의 강력한 경제 제재에 직면. 86년 6차 전당대회에서 도이 머이(개혁) 정책을 들고 나왔지만 필요한 재원을 구할 길이 없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베트남이 실질적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게 된 때는 한국(92), 미국(95)과의 수교가 이루어져 선진국들의 경제제재가 풀린 뒤였다. 95년 미국과의 수교에 영향을 받아 1차 베트남 붐이 불기는 했으나 98년 아시아를 강타한 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로 모처럼의 기회는 반짝 경기에 그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세계경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10년 남짓이다. 두번째로 베트남은 무한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한반도 면적의 1.5배에 이르는 베트남은 넓고 긴 영토를 자랑. 2500킬로가 넘는 해안선은 풍부한 해양자원을 보유하고 있음. 특히 원유 매장량은 50억톤에 이르며 아시아에서 세번째로 많다. 02년 이후 우리도 석유공사가 원유개발에 참여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고 최근 많은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자원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이밖에 육지에서는 석탄과 철광석, 주석 등이 엄청난 매장량을 자랑하며 보크사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장량을 보유. 또 미래의 자원인 쌀과 커피는 세계 2위의 수출을 기록하고 있고 후추아 수산물 수출도 증가하고 있음.
- 베트남을 유망한 투자국으로 보는 이유는 젊고 잘 교육된 인력 때문. 수년 전 통계에서 베트남은 30대 이하 인구가 전체의 64%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될 만큼 젊은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로 꼽힘. 덧붙여 베트남 교육열은 우리나라만큼이나 높아 젊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대학졸업자이다. 결국 베트남에는 젊고 유능한 노동력이 다른 어느나라보다 많고 이는 투자기업 측면에서 보면 우수한 노동력을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된다. 즉, 베트남에서는 다른 나라에서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
- 사람들은 베트남 하면 흔히 도이 머이를 연상한다. 도이머이는 우리말로 하면 바꾼다는 뜻의 doi와 새롭다는 뜻의 moi가 합쳐진 말. 결국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 도이 머이와 흔히 혼동하는 도 무어이는 도이 머이 정책을 도입하고 이를 실천한 주역의 이름이다.
- 도이 머이 정책은 공산주의 베트남이 이전의 정책적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추진한 의미있는 변화. 그렇다면 도이 머이는 왜 나왔을까?
(1) 통일 후 시도한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실패 때문. 베트남은 75년 통일 이후 소련과 중국 등의 조언을 받아 국영집단농장제를 실시하는 등 공산주의 정책을 시행. 그러나 남부에서 이미 자본주의 경제를 맛본 반쪽 국민들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북부에서도 생산성 저하라는 치명적 결과를 낳음. 이로 인해 국민들은 생활이 어려워지고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은 커져갔다. 통일정부가 추진한 중공업 정책도 재정확보의 어려움으로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베트남에 대한 경제 제재를 유지해 실질적 압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이 끝나자마다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중국과 국경전쟁을 치르는 등 전쟁으로 인한 지출미 많아져 재정난은 더욱 심해졌다
(2) 중국과 소렴의 개방정책이 큰 영향을 미침. 중국은 70년대 말, 이미 개혁, 개방정책을 시도해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베트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소련마저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이 되면서 냉전을 종식하고 개방을 추진. 즉, 도이 머이는 중국과 소련의 정책을 모방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통일 후 30년간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이끌어 온 레 주안 당 서기장이 사망한 것도 큰 요인이 됐다.
- 베트남인들은 가정에서나 일상 생활에서는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를 중히 여기며 인간관계에서는 신의를 지키는 등 동양의 유교적 사고를 갖고 있음. 그러나 회사업무나 개인적 이익과 연관되면 다른 무엇보다 실리를 따르는 서양적 사고로 변함. 많은 한국 사업가들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면서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사업과 인간관계를 동일시 하는 우리와 사업과 인간관계를 별개로 생각하는 그들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 베트남에서는 직원을 관리할 때 인간관계보다는 철저한 인사관리를 통해야 하고 채용하거나 내보낼 때도 정확한 근거와 급여수준을 고려해야 함. 아무리 잘해 준다해도 급여가 낮으면 직원은 떠날 것이며 정확한 근건 없이 직원을 내보내려 한다면 그들은 반발할 것이다. 국내 대기업의 현지 법인에서 근태가 나쁜 직원을 인사고과 자료나 근태에 대한 자료 없이 내보내려다 반발에 부딪혀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고 그 직원을 그대로 둔 일이 있는 반면, 인근 일본 업체는 평상시 철저한 근무일지를 작성해 해마다 근무태도가 나쁜 5%를 내보내고 있는 것은 참고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근거없이 폭력 등을 동원해 불이익을 주려하면 크게 반발하지만 정확한 근거를 대고 설득하면 쉽게 받아들이는 서구적 면을 보임. 한국의 주먹구구식 인사관리는 베트남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 베트남에서는 당 서기장이나 주석, 총리를 부를 때도 우리처럼 각하 등의 호칭을 쓰지 않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직책을 불러주지만 만찬 등 공식적 자리를 떠나면 그저 오 어이(ong oi)로 부름. 옹은 나이많은 사람이나 직책이 높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쓰이는 호칭이다. 옹과 부르는 말인 어이 사이에는 상대방의 마지막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즉 응웬 민 찌엣 주석을 부른다면 '옹 찌엣 어이'로 부르면 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찌엣 선생님 정도로 보면 됨. 보다 친근한 사이라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땐 '아잉 어이', 나이가 어리면 '앰 어이'로 부른다. 만약 상대가 여자라면, 나이가 많을 땐 '찌 어이', 어리면 '앰 어이'가 된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중간에 마지막 이름을 넣어 '농 득 마잉' 당 서기장이라면 '아잉 마잉 어이'라 부름
- 우리는 낮술을 가급적 피하고 일과 후에 술을 마시지만 베트남 남성들은 반대다. 점심을 겸해 낮에 술을 마시고 밤에는 가급적 일직 들어감. 그들은 11시 30분 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어떤 때는 3~4시까지 마신 뒤 회사에 들러 책상을 정리하고 5시가 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퇴근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그들의 음주방식은 물론 낮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되도록이면 저녁시간을 집에서 아내, 아이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남자들이 저녁에 빨리 가야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1) 학교나 학원에 간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거나 학원에 갈 아이들을 데려다 주어야 한다. 베트남 가정의 경우, 대부분 주부들이 직장을 다니거나 바쁘기 때문에 남편들이 일찍 귀가해서 자녀들의 귀가를 도와야 함. 더러는 일을 나간 아내를 집으로 모시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2) 남편은 아내 또는 자녀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거나 저녁 운동을 해야 한다. 베트남은 집이 좁고 집에서 취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저녁은 물론 아침도 사먹을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아내와 함께 인근 음식점을 찾아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을 남편의 작은 임무로 생각. 이 외에도 남편들이 일찍 귀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 전통적으로 베트남에서는 성에 대한 관념이 우리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직장에서도 치정문제가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게 됨
- 아내가 '하동의 사자'가 된 데는 50여년간 이어져 온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 남성들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전쟁만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생활이나 가정일은 모를 수밖에 없다. 대신 남편들이 해야 할 농사일에서부터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 자녀들을 키우는 일 등 모든 것이 아내들의 몫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들이 돌아왔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석도 없었다. 모든 생활은 아내들이 그대로 맡아 했다. 남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식을 낳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축구를 보고, 노름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유혹하는 것은 마약이었고, 남의 여자와 어울리는 일이었다. 자연히 아내들은 남편을 신뢰하지 않고 속박하게 됐고 남편들은 점점 더 아내를 무서워하게 됐다.
- 베트남인들은 월급 외에 사업 등을 통한 부수입이 있어 이를 개인별로 분배하기도 하고 회식비로 쓰기도 한다. 그래서 회식 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의 이런 접대 문화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빚을 내서라도 손님들을 잘 모셔야 한다고 생각. 그들이 하노이에서 가장 고급스런 회식장소라 생각하는 코리아나에 오면 베트남식으로 주문을 한다. 먼저 파전 등을 에피타이저로 시키고 이어 갈비에서부터 삼겹살 등 고기류를 실컷 먹는다. 우리는 고기를 먹고 나면 냉면이나 된장찌개를 먹지만 그들은 부대찌개나 해물탕 등 탕류를 더 먹고 마지막으로 볶음밥이나 삼계탕, 국수 등의 식사를 한다. 물론 주문한 음식을 다 먹지는 않지만 그들은 음식이 충분히 남아있어야 참석자들이 만족스럽게 회식을 즐겼다고 생각한다. 접시가 다 비워져 있으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음식을 중국이나 베트남 스타일로 먹는 것이다. 술도 여러가지를 많이 마신다. 처음엔 포도주로 시작하지만 이어서 양주를 마시기도 하고 인삼주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다보니 회식비가 만만치 않은 것은 당연지사다. 회식 분위기도 독특하다. 처음에는 한 사람 두 사람식 들어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모임을 시작. 그러나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면 그들의 축배사인 '축 숙쾌'가 이어진다. 함께 잔을 들 때는 '못 하이 바 요(하나 둘 셋 자!)'를 외치며 잔을 비운다. 회식이 한시간 쯤 계속되면 술자리가 매우 소란해지고 좌중을 돌며 술을 권하는 사람이 늘어남. 다시 한시간쯤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떠들며 술자리를 돌아다닌다. 일부는 먼저 자리를 뜨기도 하고 뒤늦게 도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중에도 술자리는 계속된다. 보통 한번 회식을 하면 3시간 정도 이어짐. 도중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전화로 불러내는 경우도 있다. 또 하나 우리와 다른 점은 여성들의 목쇨가 크다는 점. 베트남은 남녀 차별이 거의 없어 여자들 중에 고위급이 많고 술을 마실 때도 남자들에게 거의 지지 않는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술을 권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대부분 받아마신다.
- 베트남인들에게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시키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우리는 업무가 밀리면 여러가지 일을 지시한 후에 어느날 한꺼번에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곤란하다. 우선 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 본 적이 없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자리는 적고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많아 정부에서는 일을 나누어 고용을 확대하는 정책을 펴왔다.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급여를 적게 받더라도 여러 사람이 골고루 혜택을 받게 하자는 것. 이 때문에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업무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 2000년대 후반들어 많은 외국회사들이 몰려오고 국영회사들의 민영화가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어 베트남 직원들의 생산량 높이기와 자동화도 큰 진전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너무 많은 업무를 한꺼번에 요구하는 일은 자제하는 게 좋다. 대신 업무 하나하나를 매일 체크하고 순서대로 지시하는 거이 베트남에서는 훨씬 높은 업무효율성을 얻는 일이다.
- 베트남에서 일을 하다보면 'tai', 또는 'vi', 또는 'tai vi'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됨. 특히 한국과 베트남 합작법인인 경우에는 함께 근무하다보면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이 말은 따로 쓰기도 하고 함께 쓰기도 하는데 모두 우리말로 '~때문에', '왜냐하면'이란 뜻이다. 보통 어떤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할 때 많이 쓰인다. 제일 많이 쓰이는 경우는 잘못에 대해 변명할 때다. 2000년 초 LG전자 법인장을 맡았던 성낙길 사장은 어느날 직원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tai vi'라는 말을 자주 쓰는 직원들에게는 근무평가에서 불이익을 주겟다고 선언. 성 법인장이 법인장으로 부임한 후 현지 직원들은 술렁이기 시작. 성 법인장 부임 후 회의를 할 때마다 베트남 직원들은 한국기업의 공격적 사업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안된다,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주어진 임무를 시도해보지도 않고 변명만 늘어놓았기 때문. 또 잘못을 고쳐 잘하게 하려해도 이를 받아들이려는 노력보다는 안되는 이유만 대려했다. 이래서는 이들에게 한국식 경영방식을 전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성 법인장은 한동안 이들에게 이유를 대지말고 무조건 따라하라는 뜻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 이런 결정을 내리자 베트남 직원들은 한동안 말도 안하고 한국직원들이 하는 대로 묵묵히 따라만 했다. 두어달이 지나자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새로운 시장이 생기기 시작했고 실적도 올랐다. 베트남 직원들은 비로소 무리라고 생각했던 한국식 업무방식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고 성 법인장의 방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석달 후 성 법인장은 모든 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지난 석달간의 실적표를 놓고 그 동안 어렵다는 말 대신 묵묵히 따라와 준 현지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상당액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날부터 'tai vi'에 대한 사용금지조치는 풀렸다. 그러나 그후 어느 누구도 '왜냐하면'을 쓰는 직원은 없었다. 이 사례는 새로 부임한 법인장이 한국식 경영방식을 잘 모르는 베트남 직원들에게 이를 알려주기 위해 썼던 하나의 방편에 불과. 실제로는 'tai vi'를 쓰는 그들의 문화에 거스르려 하기보다 이해하려 해야 한다. '왜냐하면'을 자주 쓰는 것은 그들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됐기 때문. 그들은 18세기부터 프랑스식 문화를 접했다. 처음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이었고 그들은 동양식 주입교육이 아니라 토론문화를 배웠다. 50년 사회주의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대화문화는 역시 토론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고 어릴 때부터 자신을 적극 표현하는 교육을 받았다.
- 택시운전자들도 조심해야 할 상대 중 하나.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고 현지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택시를 탈 때 조심해야 한다. 일부 운전사는 외국인이 타면 백미러를 통해 먼저 그 사람을 면밀히 주시한다. 우선 어떤 사람인가를 체크한 다음 말을 시켜본다. 베트남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인가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베트남어를 전혀 못하고 현지물정도 모르는 듯하면 먼 길로 돌아가거나 요금을 속이기도 한다. 베트남 택시의 미터기에는 천동 단위로 표시가 돼 있다. 기본요금이 9처동이라면 9.00으로, 2만 5천동이라면 25.00으로 표시된다. 외국인들은 헷갈리기 십상이다. 어떤 운전사는 2만 5천동이 나온 요금을 25만동이라고 말한다. 만약 관광객이 밤늦은 시각에 술을 먹고 택시를 탔거나 졸았다면 25달러라고 우기는 일도 있다. 택시를 타는 관광객들은 택시미터기가 1천동 단위로 되어 있으며, 베트남은 숫자를 표기할 때 천동 단위로, 우리가 쓰는 쉼표 대신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또 관광객들이 택시 운전사에게 가라오케를 소개해달라고 하면 바가지를 씌울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호텔 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 운전사들은 좋은 술집을 소개해주겠다며 관광객을 유인한 뒤 자신들과 연계된 술집으로 안내. 이곳에 가면 주인은 운전사에게 알선료를 주는 대신 관광객에게는 정상요금의 10배 이상 바가지를 씌운다.
- 성에 관한 한 동양적 사고보다는 서구와 남방 문화에 가까운 베트남은 애정표현을 비교적 쉽게 하는 편인데 공원이 아니면 마땅히 표현할 장소가 없다. 비좁고 공개된 공간에 3대가 엉켜 사는 베트남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어른들의 성을 보고 자라서 우리보다 일찍 성에 대해 눈을 뜨고 성에 대한 터부가 적은 편. 그들이 일찍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것은 에너지 절약과 더위를 피하기 위한 이유 등도 있지만 가정의 성 문제를 서로 해결해주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음. 요즘은 이런 문제 때문인지 여관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베트남의 끌어안기 문화는 꽤 오래된 전통문화로 알려지고 있음. 옛날부터 중국, 프랑스, 일본 등의 지배나 침략을 받았으며 숱한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은, 가족들의 안녕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문화가 생겼다는 설이 있다. 항상 불안하고 가난한 생활을 해 왔던 그들에게 가족들과의 끌어안기는 삶을 확인하는 행위임은 물론 끝까지 살아남자는 무언의 약속이기도 했던 것. 또 일각에서는 그들의 기후와 체질이 '옴 문화'를 만들었다고 주장. 더운 날씨 때문인지 그들은 조금만 기온이 내려가도 추위를 탄다. 또 그들의 피는 우리에 비해 차갑다고 한다. 특히 북중부 지역은 겨울이면 기온이 상당히 내려가지만 그들의 집은 바람이 술술 들어올 정도로 엉성하고,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이불조차 제대로 갖춰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추위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식구들끼리 끌어안고 견디는 것. 그들은 혼자 잘 때 대부분 베개를 끌어안고 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마도 이런 습관 때문이 아닐까. 옴 문화는 세옴, 비어옴, 가라오케옴 이라는 파생어를 낳기도 했다. 특히 세옴은 외국인도 자주 이용하는 것으로 오토바이로 택시와 같이 손님을 태워주는 것. 오토보이를 타다보면 자연히 운전사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비어옴이나 가라오케옴은 끌어안을 수 있는 여종업원이 있는 맥주집이나 가라오케라는 의미. 베트남의 옴 문화는 그들 생활의 일부이며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인 듯 하다.
- 북베트남은 전쟁에서 승자가 됐지만 남북간의 완전한 통합을 위해 승자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자치정부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전후처리를 하도록 했다. 또 미국과 연계된 인사들에게는 스스로 베트남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설령 국내에 남더라도 숙청하지 않고 교육과 노동으로 교화시켰다. 즉, 월맹은 남베트남과 총칼을 맞대고 싸웠지만 같은 민족임을 감안, 강력한 처단보다는 함께 전후 조국을 이끌어나가는 방안을 선택. 이런 베트남의 정책 방향은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지속됐으나 남부 베트남인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여 왔다. 가장 큰 불만은 북측 인사들이 남쪽의 요직을 독차지 했다는 것. 또 북측과는 달리 자본주의 노선을 택했던 월남에서 많은 땅과 좋은 집을 소유했던 사람들은 그것들을 정부가 압수한 데 대해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북쪽에서 온 사람들을 박끼라고 부른다.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북쪽 사람들이란 의미.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북쪽에서 온 융통성 없고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란 의미. 남부의 주요 행사 때 북측에서 온 인사가 담화를 하면 '저 친구, 좀 딱딱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수근거린다. 반대로 남측 인사가 북쪽에서 강연을 하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알 들을 수가 없다'고 핀잔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남과 북의 말이 서로 다른 탓. 일부 단어의 경우 남과 북의 의미나 발음이 다르다. 특히 말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크다. 북베트남은 보수적 생활양식을 반영하듯 발음이 딱딱 끊어지고 강하다. 그러나 남베트남 사람들은 상대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입안에서 굴리듯 말을 한다. 또 북쪽 사람들은 알파벳 R을 J로 발음하고 남쪽에서는 J를 Y로 발음한다. 또 뒤에오는 NH발음은 남에서는 그냥 N으로 북쪽에서는 NG로 각각 다르다. 이렇다 보니 말투만으로도 그가 남쪽 출신인지 북쪽 출신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이상한 점은 공중파 방송에서도 표준말을 쓰지 않고 남과 북의 말을 모두 쓴다는 점. 하노이 방송은 북쪽 말을, 호찌민 방송은 남쪽 말을 그대로 쓴다.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조차 그 지역 말을 그대로 사용. 양쪽 사람들은 사고방식도 다르다. 남쪽 사람들은 비교적 개방적인데 반해 북쪽 사람들은 보수적이다. 그래서인지 사업을 하려면 남쪽이 수월하다는 인식이 지배적. 베트남에 투자하는 많은 외국인들도 가급적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남쪽을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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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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