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견문록

인문 2015. 5. 22. 21:01

 


베트남 견문록

저자
임홍재 지음
출판사
김영사 | 2010-11-1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외교관과 학자의 눈으로 살핀 새로운 베트남 읽기! 한국과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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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말 포르투갈, 스페인 선교사들이 전파하기 시작한 카톨릭교는 베트남 왕조 제도권으로부터 고립된 자들, 벽지 및 오지의 빈곤한 자들을 중심으로 신분평등, 천국약속 등을 통해 급속히 확산됨. 나아가 카톨릭 선교사들은 베트남 봉건영주들의 정치, 군사 자문관 역할도 하였다. 이중 파리 소재 해외선교단에서 파견된 피뇨 드 비헨느 신부(1741~99)는 당시 베트남 남부 봉건영주였던 응우옌푹아인이 권력을 쟁취하도록 지원했고, 그의 아들 카잉이 루이 16세를 알현하도록 주선. 응우옌푹아인은 1802년 지아롱이라는 이름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응우옌 왕조를 세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응우옌 왕조는 카톨릭을 베트남 문화를 위협하는 이단으로 간주, 선교를 금지시키고 박해를 가함. 2대 왕 민망, 3대왕 티에우찌, 4대왕 뜨득은 프랑스에 대해 적대적 정책을 취하면서 카톨릭 포교를 금하는 칙령을 발표. 이에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인 1858년 베트남내 카톨릭 보호라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무력개입하였는데, 프랑스군은 프랑스, 스페인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베트남에 진군. 1858년 다낭을 점령하고, 1865년 사이공을 점령. 이때 벌써 40만명에 이르는 카톨릭 신도와 민란, 왕위계승으로 인한 왕가 내분 드응로 응우옌 왕조는 1884년 프랑스와 보호령 조약에 서명하게 됨. 베트남을 보호령으로 한 프랑스는 1887년 북부의 통킨, 중부의 안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를 합쳐서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 1862년부터 1945년까지 약 80년간 계속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 정책은 베트남을 착취하는 것이지 알제리에서처럼 프랑스인의 정착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1930년경까지는 베트남 왕조의 권위를 약화시켰으나, 1920년대말부터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 공산주의 부상을 막기 위해 베트남 왕조의 미화를 시도. 프랑스 식민당국은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베트남 역사를 교육시키는 데 관대했다. 베트남 어린이들은 베트남의 잔다르크인 쭝 자매, 1000년의 중국지배를 종식시킨 응오꾸옌 장군, 몽골의 세차례 침략을 격퇴시킨 쩐홍다오 장군, 중국 명나라를 격퇴시킨 레러이 장군 등 중국과 싸운 베트남 영웅들에 대해 배웠다. 프랑스식민 당국은 베트남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반감을 세뇌시켜 프랑스는 베트남을 중국의 압제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교육시킴. 그러나 중국에 저항한 전쟁을 치른 영웅들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존경심은 베트남인들 마음에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1789년 프랑스 혁명사상도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부채질했다. 프랑스 식민시대 판보이저우, 판쭈찐 등 개혁성향의 유교학자들을 중심으로 반봉건, 민주주의를 표방한 개혁운동이 일어남. 판쭈찐은 교육확산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당시로서는 과격한 접근을 제시하기도 함. 나아가, 1927년에 초등학교 교사인 응우옌타이혹이 베트남 국민당을 창당했고, 1930년 응우옌아이꿕의 지도아래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됨. 호찌민은 판보이쩌우, 판쭈찐의 사상을 계승발전 시키는 한편 반식민, 반봉건과 무력투쟁, 사회 및 지식층 개혁을 내세우면서 베트남 국민해방을 세계혁명과 연계하여 국제적 지지도 얻어냄. 호찌민의 공산당은 1945년 8월 혁명을 주도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 외부문화의 선별적 수용 : 베트남은 중국, 인도 및 동남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중국문화가 압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음. 베트남은 정치에서는 중국을 배척했지만 문화면에서는 중국에 매료되고 답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베트남의 관습, 전통, 신앙에 맞는 것만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프랑스의 식민지 문화는 건축과 음식에 많이 자취를 남김. 종교 면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음. 여기에 조상숭배, 힌두 전통 및 가톨릭의 영향이 더해짐. 유교의 영향으로 장유유서의 위계질서가 확실하고 가부장제의 사회. 가족과 형제애가 최고의 가치이며 교육을 중시
- 자연을 정복하기보다는 순응하며 :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함. 그러나 베트남의 자연환경은 온화화기도 하고 때로는 거칠기도 하다. 이런 환경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베트남의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 자연을 정복하기보다는 순응하며 살았다. 이렇게 수천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 의식, 적응, 탄력성 등이 전통으로 발전. 벼 경작은 관개, 댐 및 운하건설 등 집단적 대처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공동체 인식이 발전하여 촌락이 생기고 상부상조, 조상숭배 및 영웅숭배 사상이 전통으로 자리잡음
- 원리는 밖에서 오고 정서는 안에서 온다 : 베트남에서 촌락은 고도의 자치를 누렸으며, 베트남이 역사의 시련을 극복하고 정체성을 보존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있어서 버팀목 역할을 함. 이런 촌락문화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서로를 정으로 대함. 백개의 설명보다도 약간의 정서가 더 가치있다. 원리는 밖에서 오고 정서는 안에서 온다. 등의 속담은 베트남인들에게 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줌. 띤깜은 베트남의 가치 중 하나다.
- 부드럽고 탄력성 있는 물이 바위를 부식시킨다 : 베트남인들의 강한 의지와 신속한 적응력은 거친 자연여건에서 생성된 것. 강한 바람은 강한 의지로만 막을 수 있다. 조롱박에서 살 때는 둥글게 되고 긴 관에서 살 때는 길게 되어라. 등의 속담은 이를 말해준다. 베트남인들의 전통 특히 공동체 의식은 자연환경의 공동대응여건에서 생성되고 발전해왔다. 베트남의 전통에서 촌락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촌락을 다스리는 정부도 거대하고 강압적이기보다는 극단을 피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 베트남인들의 특성은 가끔 물에 비유되는데, 물은 부드럽고 탄력성이 있으면서도 바위를 부식시키기도 하고 거대한 힘이 있어서 뚝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베트남 사람들의 행동은 단호하면서도 매우 탄력적인 측면을 띄고 있다.
- 안팎으로 평화를 유지하라 : 베트남의 전통에서 또 하나의 현상은 안팎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는 것. 베트남은 54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해안선이 3200킬로에 이르고 서쪽으로 산악지대, 동쪽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다. 이처럼 취약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조직화되고 통합된 대응이 필요했으며, 나라사랑, 조상숭배, 외부침략 거부, 생사초월 투쟁 등의 특성이 형성됨
- 빈랑 나무 잎과 열매를 씹으면 혈액순환이 활발해지고 눈이 빛나며 혈색이 좋아지며 입술이 더 붉어짐. 전통 의학에서는 빈랑 나무가 살균기능이 있고 악취를 제거해주고, 충치와 류머티즘을 예방하며 위통을 완화시켜주며, 고약으로도 쓰이고 여드름을 없앤다. 빈랑 나무는 마리화나나 대마초와 유사하며, 제단에 올려놓는 제물 중 하나. 베트남에서는 손님이 오면 빈랑나무와 차를 대접. 빈랑나무를 씹는 것은 대화의 시작을 의미. 빈랑나무는 윗사람에게 줄 때는 존경을 뜻하고 결혼식이나 장례식 참석자에게 줄 때는 감사를 의미. 빈랑나무 씹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이는 것을 의미. 부모는 딸아이에게 낯선 사람이 주는 빈랑나무를 절대 받아서 씹으면 안된다고 조언한다. 빈랑나무는 약혼식이나 결혼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 과거에는 신랑은 신부가족에게 200~300개 빈랑 나무잎과 열매를 주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요즘 빈랑나무를 씹는 사람은 없지만 이 관습은 베트남의 문화예식으로 남아 있다.
- 1911년 호찌민은 사이공으로 내려가 프랑스 상선 라미랄 라투시-트레빌호의 요리사로 취직하여 해외라 나갔다. 그는 스페인, 포르투갈, 알제리, 튀니지, 콩고, 다호메이, 세네갈, 영국, 미국 등을 여행하면서 요리사, 정원사, 청소부, 가축 사육사, 호텔 웨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 1913년 미국에서 살았는데, 뉴욕의 브루클리에서 흑인 근로자들과 살기도 했고, 보스턴에서는 보스턴 파커하우스 호텔에서 일하면서 크림파이와 롤을 만들었따.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서구의 자유사상, 자본주의의 폐해, 노동자 농민 계급의 억압을 보았다. 1917년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호찌민은 파리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인 17구에 거주하며 사진관 점원, 중국 고가구 거래상을 위해 그림을 그리며 베트남 국민운동을 시작.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호찌미은 낙관과 금욕생활을 신조로 삼았다.
- 베트남어는 표기만 달랐지 아직도 한자어휘가 많이 남아 있음. 중국 한나라 시대 베트남에 한자가 전파된 것으로 알려짐. 그 이후 중국의 중원에서 한민족이 아닌 이민족들이 힘을 차지하자 중국 한인들이 남으로 밀려났다. 이들을 객가인이라 부르고 이들을 통해 중국 문화가 남쪽으로 전해졌다는 말이 의관남도이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중국에서도 한자의 발음이 변했으나 한국, 베트남에서 한자의 원음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왔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한자 발음이 변해 우리가 알아듣기가 어려운데, 한국과 베트남은 한자발음이 비슷하여 잘만 들으면 한자어휘는 상당부분 알아들을 수 있다.
- 베트남 사람들은 자연과 전쟁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해왔다. 적응성과 유연성이 힘이다. 조롱박에서 살 때는 둥글게 되고 튜브속에서 살 때는 길게 되라는 베트남 속담이 베트남인의 적응능력과 유연성을 보여줌. 베트남의 중국과의 관계를 보면 한편으로는 저항과 투쟁을 하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문화적으로는 중국문화에 매료되어 이를 배우고 따라하려고 했다. 호찌민이 미국, 영국, 프랑스의 혁명을 연구한 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혁명노선으로 채택했듯이 베트남은 개방과정에서 정치체제에서는 중국을 모방하고 경제발전에서는 한국, 일본 등의 개발경험을 답습하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베트남 정부는 미국 거주 과거 월남 정부의 인사도 이들을 반정부인사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의 해외교민으로 포용하여 이들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경우 베트남 국민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고 있음. 이런 모습들은 베트남이 장점으로 갖고 있는 지속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것.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격멸시킨 베트남의 영웅 오응우옌지압 장구은 디엔비엔푸 전쟁에서 '신속타격, 신속진군' 전술 하나에만 매달리지 말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 이것이 지속적 유연성이다.
- 베트남 사람은 체면을 중시. 공동체 의식이 강한 베트남 사람들은 체면손상은 치명적인 것으로 생각함. 서양 사람들은 타협을 합의에 이르는 중요 과정으로 보는 데 반해 베트남 사람들은 타협은 자기의 취약을 드러내는 일로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보고 있다. 다만 타협은 상대를 패배시키는 대전략의 일환으로만 이용. 호찌민의 원칙있는 타협은 그런 의미로 해석됨. 한편, 베트남인들은 자기체면도 중시하지만 상대의 체면도 중시함. 베트남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이겨놓고도 먼저 찾아가서 화해를 요청했는데 이는 상대의 체면을 배려한 예이다.
- 베트남 사람들은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만날 때 대개 악수를 함. 좀 친한 사이가 되면 포옹하거나 볼 키스를 한다. 포옹이나 볼 키스는 친근감의 표현이다. 아시아 국민 중에서 유럽식 인사방법을 가장 빈번히 보여주고 있다. 포옹은 레닌주의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고 프랑스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오래 산 호찌민의 포옹인사 방법을 베트남 국민들이 따른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은 눈을 마주보며 대화한다. 대개 동양사람들은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면 불손한 것으로 오해받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진지한 태도로 듣는 표시로 눈을 마주보며 대화. 베트남 사람들은 대화시 손이나 머리 움직임이 적다. 조용하게 말하고 목소리를 여간해서는 높이지 않는다. 베트남 속담에 상대의 영혼에 이르려면 부드럽게 말하라고 한다.
- 유교 및 불교의 영향으로 위계질서와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깊게 자리잡음. 염화시중의 미소가 통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정중하고 간접적이며 분쟁을 피하길 원한다. 이견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문제가 생기면 직접 대면하여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중개인을 내세운다. 시를 사랑하는 베트남인들은 논리와 이성보다는 완곡하고 모호한 표현을 선호. 정확성의 법률적 접근보다는 윤리적 도덕적 접근을 선호.
- 베트남은 정치 우선 사회다. 정치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 베트남의 통치이념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이념을 원치으로 하면서 시장경제는 하나의 전략으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 개혁, 개방으로 국민의 의식주 개선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만 아직도 경제나 사회문제가 별도의 영역을 갖는 것은 아니고 정치가 경제와 사회를 이끌고 있다. 정치는 말이고 경제, 사회는 마차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유된다
- 베트남 사람들은 아니요를 말하지 않는다. 베트남 사람이 알았다고 말한 것을 동의한 것으로 오해한다. 베트남의 알았습니다는 앞으로 생각해보겠다는 정도의 뜻이지 전혀 동의한 것은 아니다.
- 베트남은 컨센서스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로 보인다. 유교와 레닌주의 영향으로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정책 결정은 촌락문화와 레닌주의의 영향으로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고 반대하지 않는 컨센서스로 이루어짐. 베트남에서 최종 정책결정도 당서기장,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조국전선 주석 등 집단 지도체제에 의해 컨센서스로 결정됨. 물론 군사, 안보, 주권, 외교 등 주요 문제는 최고 리더십에 의해 결정되지만 대개는 최고 리더십에 상정되기 전에 이미 각 부서의 중간층 이해당사자간에 충분히 검토되기 때문에 정책 결정의 방향과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중간층에서 형성됨. 이런 컨센서스 관행 때문에 베트남에서 의사결정이 늦는 경우가 허다함. 성미 급한 한국인들에게 지연은 지옥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의사결정 절차를 이해하면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80%는 기다리고 20%는 실행하라.
- 흥정단계에 들어가면 상대가 먼저 발언하게 한다. 베트남에서 협상할 때는 손님이 먼저 말하라고 하고, 외국에 나가서 협상할 때는 주인이 먼저 말하라고 한다. 흥정단계에서 지연전술이 이용되곤 한다. 문제해결의 대안제시보다는 자기 입장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월남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파리협상에서 월맹의 레드토는 협상상대인 키신저에게 거의 3년간 똑같은 입장을 반복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마지막 단계에서 의미있는 양보를 한다. 가끔 합의한 후에도 다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사례도 있다.
- 월남전 종식을 협상한 키신저와 레득토는 협상 스타일에서 서로 닮은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협상의 진행방식. 키신저도 레득토도 모두 협상의 틀이 되는 원칙을 정한 후 세부사항을 협상하는 연역적 접근을 택한 것으로 분석됨. 레득토는 먼저 협상의 원칙이 될 미군의 일방적 철수, 티에우 축출, 월남 내 월맹군 잔류, 월남 내에 월맹이 승인하는 연립정부 수립 등을 협상의 원칙으로 3년간 계속 반복해서 주장. 원칙문제에 대해 합의가 없는 한 세부사항은 별 진전이 없었다. 물론 72년 2월 미국과 중국 수교, 같은 해 5월 미국과 소련간 데탕트 등 국제정세가 월맹에게 불리하게 전개된 것도 영향을 주었지만, 월맹은 미군의 일방적 철수, 월맹군의 월남 내 잔류 묵인 등이 합의되자 티에우 축출 등을 철회하면서 미국과 합의에 동의. 키신저는 협상의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는 가운데 세부사항을 제시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할 정도로 협상의 틀이 되는 기본원칙을 먼저 합의한 후 세부사항을 협상하는 방법을 선호했음. 그렇다고 키신저가 세부사항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키신저는 "디자인에서처럼 외교에서도 신은 세부사항에 있다"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아랍-이스라엘 협상 시에는 그들간 불신의 벽이 원체 높았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가는 귀납적 접근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양측이 상대의 원칙을 수용하고 양보를 통해 일거에 타결하는 중국식 접근을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음
(2) 체면의 고려. 전통적 공동체 생활에서 형성된 체면유지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의 체면유지도 중시했지만 상대의 체면도 중시했다. 과거 중국과 싸워 이긴 후 먼저 찾아가 화해를 요청한 것이 그 사례. 레득토는 키신저가 건설적 모호성을 통해 월맹과 월남간 군사 분계선, 월남 주권, 월남 내 연립정부, 월맹에 대한 보상 등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정면 거부하지 않았다. 레득토는 키신저가 직설적인 사람이 다루기에 제일 어렵게 여긴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 같다. 키신저는 협상 당사자들에게 항상 체면을 세울 수 있게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강조. 키신저가 적용한 건설적 모호성은 그런 접근의 대표적 사례다. 키신저는 협상 당사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는 "외교란 분명한 것을 모호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직설적인 사람이 다루기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 호찌민 시는 베트남 제일 도시.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는 월남의 수도였음. 86년 도이머이 정책으로 개방을 추진하 이후 가장 번성하고 있는 도시. 호찌민 시 지역은 원래 습지대였고 캄보디아 지배하에 있었음. 캄보디아 왕국이 타이와의 전쟁으로 약해져서 이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지고, 베트남인들의 이주가 급증하자 서서히 베트남화되어감. 토착민들은 사이곤으로 불렀다. 1859년 프랑스에 의하여 정복 이후,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의 수도가 된 사이곤은 식민지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도 수많은 전통 서양식 건축양식을 반영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는 사이곤이 동아시아의 진주, 또는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1954년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비엣민에게 패배하여 베트남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러나 프랑스는 남부 베트남은 퇴임했던 바오다이 황제를 다시 추대하였고, 50년에 바오다이 황제는 사이공을 남부베트남의 수도로 삼음. 베트남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도, 사이공은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이끌던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여 이 도시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통치를 받게 됨. 이를 미국에서는 사이공 함락이라고 부르나,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해방이라 부름. 통일된 후인 76년 7월부터 호찌민 주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호찌민 시로 변경됨. 호찌민 시의 인구는 700만이 넘는 베트남 내 도시로 경제수준도 베트남 전체 평균을 두배 이상 넘는다. 09년 베트남 국민의 1인당 GDP가 1052불이었는데, 호찌민 시의 1인당 GDP는 2534불이었다. 호찌민 시는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거주 우리 동포들도 대부분 호찌민과 인근 성에서 거주하고 있다. 호찌민 시 내 쩌런 지역은 베트남내 최대 화교거주지역이다.
-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처럼 음식을 밥상에 한꺼번에 올려 놓음. 밥, 끓여서 간장에 절인 메꽃, 소금에 절인 가지, 데친 채소, 신맛이 나는 생선 수프 등을 올려놓음. 생선으로 만든 액젓인 느억맘은 빼놓을 수 없는 밥상 반찬이다. 밥통은 어머니나 큰 딸 옆에 놓는데, 다른 사람의 밥그릇이 비면 여기에 덜어주는 역할을 함. 밥상이 차려지면 가장 어린 사람이 식사하십시오 하고 어른들을 밥상으로 모셔온다. 식사는 가족 단합의 상징이다. 식사하고 있는 데 방문객이 나타나면 밥그릇과 젓가락을 갖다 놓으면서 식사를 권한다. 베트남 말에 친구하고는 어떤 음식이든 함께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개 아침은 6시에 먹고 점심은 정오에, 저녁 6시 또는 6시반에 저녁을 하고 이내 집으로 돌아간다. 식사때 맛있는 밥 한그릇과 국 한그릇을 먹는데 만족한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하고 소식을 해서인지 베트남에 9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식사는 매우 검소하다. 고기는 드물게 먹고 단백질은 생선, 새우, 홍합, 콩으로 보충하며, 쌀 대신 고구마, 옥수수, 타피오카 등을 주식으로 먹기도 한다.
- 베트남의 국민음식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탄 퍼, 쌀국수는 불어로 불을 뜻하는 feu를 베트남 식으로 발음한 것. 프랑스식 pot au feu(쇠고기 수프)에 베트남 쌀국수를 접목시킨 음식으로, 18세기 하노이 주변에서 알려지기 시작. 베트남 사람들은 주로 채식을 해왔는데 13세기 몽골침략으로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농사를 돕는 동물로만 알려졌던 소를 먹기 시작. 이후 프랑스 식민지배가 남쪽으로 뻗어가면서 퍼 역시 남쪽 지방으로 전파됨. 북부 베트남의 퍼는 맑은 쇠고기 국물과 향초를 사용하고, 남부의 퍼는 쇠고기 힘줄이나 닭고기 등을 더 사용함. 프랑스에서는 퍼를 똥낀누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통킨만의 음식이란 뜻으로 예나 지금이나 베트남의 대표적 음식임을 알 수 있다.
- 퍼는 북부 베트남 특히 하노이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다. 그래서 하노이 수프라고도 불린다. 하노이 사람들은 남부의 퍼는 퍼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하노이의 특산음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남딘에서 시작되었다. 25년 번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처음 개점했다고 한다. 하노이 퍼 요리사는 대부분이 남딘 성의 번쿠 촌락 출신이다. 하노이 퍼 식당의 80%는 이 촌락 출신들이 소유하고 있다. 퍼는 쌀국수, 가늘게 썬 쇠고기, 양파, 향초, 양념이 주 원료임. 퍼 요리방법은 소뼈를 5시간 이상 가마솥에 넣고 펄펄 끓여 국물을 내고 적당량의 가느다란 쌀국수를 큰 그릇에 넣고 그 위에 이미 끓여 놓은 쇠고기나 닭고기, 얇게 썬 양파, 파 등을 함께 넣음. 이를 퍼 육수와 섞는데, 육수는 고기, 골이 들어 있는 정강이뼈, 말린 새우 등을 넣고 펄펄 끓인 다음 생강, 느억맘으로 맛을 낸다. 먹을 때 레몬주스, 식초, 얇게 썬 빨간 고추, 후추가루 등을 추가해 먹기도 함. 퍼 국물은 맑고 맛있어야 하며, 고기는 질겨서는 안된다.
- 분차(bun cha) : 북베트남에서 생긴 음식으로 주로 점심 메뉴. 양념된 돼지고기를 불에 구워 각종 야채, 신선한 향초, 쌀국수와 함께 새콤한 맛이 나는 수프인 느억참(느억맘에 식초 등을 넣어 희석한 소스)에 담가 먹는다. 분차 냄새를 한번 맡으면 이내 침이 흐른다. 입맛 없는 사람에게도 분차는 큰 기쁨이라 한다. 토란 비슷한 손하 잎줄기를 벗겨 같이 먹기도 하는데 그 맛이 독특하여 신이 이 목적으로만 손하를 만들었다고 하는 말도 있다.
- 느억맘 : 약 3200킬로의 해안선을 두고 있는 베트남의 대표적 조미료. 말린 생선을 주 원료로 함. 요리할 때 쓰이기도 하고, 음식의 간을 맞추는 소스로 사용됨. 베트남 음식점의 테이블마다 그릇에 느억맘 소스가 담겨 있음. 보통 얇게 썬 고추를 띄워 얼얼한 맛을 내기도 하고 고수나 향초를 넣기도 함. 발효식품 느억맘은 한국의 젓갈과 비슷. 생선을 발효시켜 만든 소스로 영양가가 있고 베트남 요리에서 소금대신 사용됨. 판띠에트, 푹꿕 섬에서 생산되는 느억맘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함. 한번 맛을 들이면 모든 음식에 이 느억맘을 찾게 됨. 베트남 사람들은 느억맘을 베트남의 영혼이라 말함. 식초, 레몬, 설탕을 넣어 물로 희석해 사용하기도 한다.
- 넴잔 : 다진 고기 튀김인 이 요리는 언뜻 중국식 춘권과 비슷하지만, 얇은 쌀 종이피를 사용하므로 더욱 바삭함. 퍼와 함께 베트남 대표 요리
- 자가 : 하노이 도안 가족이 100년전 처음 발명했다는 요리로, 엄청난 인기 덕에 이 가족의 음식점이 있는 길을 짜까거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함. 짜까는 민물생선을 딜풀을 얹은 기름판에 직접 튀겨먹는 북베트남 요리. 땅콩과 고추를 띄운 느억맘에 찍어 먹음
- 비아호이 : 생맥주로 대개 카페의 길거리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마시며 현지인을 부담없이 만나기에 가장 좋은 음료. 한잔에 우리 돈으로 400원 정도. 흥이 나면 건배를 제의하곤 하는데, 우리의 위하여 대신에"하나, 둘, 셋, 듭시다!'(mot, hai, ba, yo!)라고 함
- 베트남 사람들은 사무실에서나 집에서나 손님이 오면 제일먼저 차를 대접. 베트남 차 중 타이응우옌성에서 나는 차가 제일 맛있다고 함. 그래서 베트남 말에 여자는 뚜엔꽝 여자가 제일 예쁘고, 타는 타이응우옌차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 다랏 차 : 베트남 차를 이야기할 때 다랏 차를 빼놓을 수 없다. 해발 1550미터의 고원지대의 선선한 기후 덕에 국화과 차의 주요 생산지로 떠오른 다랏의 특산품. 프랑스 식민지 시절 들여온 국화과 식물을 차로 만들어서 대량 생산하는 곳은 세계에서 다랏이 유일함. 03년에는 이 국화과 차를 미국 특허로 공개했다. 이 차는 간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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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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