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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경제학

경제 2014. 10. 23. 21:37

 


선악의 경제학

저자
토마스 세들라체크 지음
출판사
북하이브 | 2012-07-2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유럽을 이끄는 새로운 리더로 주목받는 젊은 경제학자의 도발적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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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마음은 이야기라는 형태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짐. 결국 인간의 동기는 대개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즉 동기의 뼈대를 이루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과정에서 나옴. 그러한 이야기가 없다면 삶은 그저 지긋지긋한 일의 연속일 뿐임. 국가와 기업 혹은 조직의 경우도 마찬가지임. 훌륭한 지도자는 가장 뛰어난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임
- 상식적인 개인이 원하는 주된 사항은 그가 가진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더 많고 더 나은 욕구이다. (조지 스티글러)
- 유대인들의 경제습관은 다양한 방면에서 근대경제학의 발전을 앞지름. 이미 중세의 암흑기부터 유대인들은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나가는 경제수단을 일상적으로 사용했으며, 이런 수단들은 훗날 현대경제의 핵심요소가 됨. 그들은 돈놀이를 하고 다양한 자산을 거래. 특히 자본시장의 지분거래에 관여하고 환전을 담당했으며, 종종 금융거래의 중개인 역할을 함. 그들은 은행의 역할을 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재산양도에 관여. 고대와 중세와는 대조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법적 측면에서 특정형태의 활동이 천부적으로 또한 필연적으로 존재함.
-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천상의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됨. 누구도 재산을 모으려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음. 금욕주의를 주장하거나 가난이 죄를 씻어주고 영적으로 이롭다고 외치지도 않음. 따라서 유대교를 창시한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모두 부자였다는 사실은 유대교와 부합함
- 히브리인들이 진보사항 외에 인류문화에 근본적으로 기여한 또 다른 부분은 영웅과 자연, 지배자에 대한 비신격화임. 유대사상은 인류문화에 영향을 끼친 그 어떤 사상보다도 현세를 기반으로 하는 가장 현실적인 사상임. 유대인들은 추상적 세계는 알지 못했음. 유대교는 지금까지도 하느님과 사람, 동물을 상징이나 그림, 동상으로 묘사하는 행위조차 금지함. 유대인들에게는 현실을 표현하는 상징이나, 현실을 상징하는 표현을 만드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았음.
- 플라톤식의 일반적 역사해석에 따르면 이 세상은 이데아의 구름속에 존재하는 더 나은 세상의 그림자일 뿐.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세상이 단지 그림자가 아니라 실재라고 생각. 히브리인들은 후대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영혼이 육체에 맞서 싸운다거나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그와 반대로 육체와 물질세계, 그러므로 경제적 세계도 선한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믿음. 유대인들에게 땅과 세상, 육체와 물질적 현실은 하느님의 역사와 창조의 정점을 이루기 위한 최고의 환경임. 이런 생각은 경제학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그 자체로는 영척 자원이 없고 전적으로 세속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데 이바지함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세속적 발상에 따라 정당화됨.
- 인류학에 따르면 영웅의 원형에는 몇가지 종류가 있음. 가장 오래된 원형은 사기꾼이며, 그 다음으로는 문화의 전수자인 토끼가 나타남. 세번째 단계는 초인적 위력을 지닌 영웅으로 붉은 뿔이라 불림. 마지막으로 가장 발전된 단계는 쌍둥이임
- 히브리의 영웅들은 대부분 사기꾼과 문화의 전수자, 쌍둥이와 상응. 우리가 영웅이라고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신격화된 근육질의 영웅은 히브리에는 존재하지 않음. 이는 민주적 자본주의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데, 유대인의 영웅적 원형은 후대에 나타난 영웅의 양상에 훨씬 든든한 토대가 되었기 때문. 그러한 영웅은 오늘날의 삶과 한결 부합됨. 영웅들은 무기를 버리고 부자가 되기 이해 장사를 시작함. 알다시피 장사에는 근육이 필요없으며, 아름답거나 영웅적일 필요도 없음. 인류의 문명을 현재의 위치로 이끈 영웅이라고 한다면, 교활한 사기꾼과 문화의 전수자, 수난자라는 영웅적 원형이 한결 어울릴 것임.
- 현대경제사상에서는 도덕적 차원이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춤. 이는 특히 개인의 악덕이 반대로 공익을 이끌어 낸다는 맨더빌의 개념이 보편화된데 기인. 이런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도덕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훗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신비스럽게 표현될 무언가가 개인의 악덕을 공익으로 바꿔 놓을 것이기 때문. 최근에 와서야 일부 경제학 조류는 조직의 역량과 공평성의 수준, 기업윤리, 부패 등을 측정하고, 이런 것들이 경제 성장 뿐 아니라 경제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데 있어 도덕과 신뢰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됨.
- 지폐와 동전은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없지만, 이것들은 돈이 가진 에너지의 상징이자 물질로 구체화된 존재에 불과.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는 현재에 이익이 되도록 미래의 에너지를 당겨올 수 있음. 빚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에너지를 옮겨 올 수 있음. 반면 저축은 과거로부터 에너지를 축적해 현재로 보냄.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이 에너지의 운용임. 현재로 넘어온다면 에너지로서의 돈의 특징은 GDP통계 따위에서도 나타남. GSP성장에 대한 논쟁은 종종 무의미함. 미래의 불확정성 때문. GDP성장은 단순히 채무에 따라(또는 적자나 흑자예산 형태의 재정정책을 통해) 좌우됨. 이면에 몇배나 더 큰 적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GDP성장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일 재산을 쌓기 위해 돈을 빌렸다면, 재산을 헤아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안식일은 인간이 일하기 위해 창조되지 않았으며, 인생에는 생산성을 극대화해서는 안되는 성스러운 장소와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움. 히브리사상에서 인간은 창조의 완성이자 에덴동산의 수호자이지만, 하느님이 정한 한계내에서 일해야 함. 인간은 구체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한층 추상적 존재론적 의미에서도 창조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았음
- 고대인들은 신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음. 그들에게 신화는 유용한 허구였으며, 추상적 관념이나 결토 실제로 일어난 적 없는 이야기임. 그러나 동시에 사물을 설명하고 현세에서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밝히는 데 유용했으며, 종종 실용적 목적으로도 활용됨
- 현대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유롭다고 생각. 스토아학파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음. 의존할 대상이 적은 사람일수록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것. 따라서 스토아학파는 육체의 욕구(수요)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함. 세상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난 가장 대표적 사례는 디오게네스임. 그는 자신의 욕구를 최소화하고 자신에게 필요없는 물건은 모조리 버림. 그는 마지막으로 남겨둔 물병마저도 버렸는데, 물은 손바닥으로 마실 수 있기 때문. 그러므로 스토아학파의 구상은 명확했음. "소유에 대한 욕구를 없애자. 그러면 공급측면, 즉 노동도 감소하게 될 것이다." 얼마되지 않는 물건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살아감. 필요한 것이 적은 사람은 그만큼 애써 일할 필요가 없음.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행복한 삶을 위한 스토아학파의 처방은 에피쿠로스학파처럼 공급(또는 생산)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수요를 줄이는 것임
- 스토아학파는 선이 쾌락 혹은 효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행위에 앞서 계산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음. 어떤 선행은 쾌락(효용의 증가)으로 돌아오며, 어떤 선행은 전혀 대가가 따르지 않음. 그러나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행위의 결과나 영향을 전혀 의식해서는 안됨. 개인의 도덕성은 특정 행위의 결과와 무관하게 규칙의 준수여부에 따라 판단됨. 다시 말해 각 행위의 도덕성은 그 행위의 결과나 영향에 따라서가 아니라, 규칙을 준수했는지의 관점에서만 판단됨. 결과는 오직 운명에 맡겨야 함
- 에피쿠로스 학파로 대표되는 쾌락주의 학파는 선이나 규칙 어느것도 위에서 외생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음. 행위의 선은 행위 자체의 결과, 그 행위가 가져오는 효용에 있음. 그리고 그 효용은 행위자의 개인적 관점에 따라 판단됨. 에피크로스 윤리학의 원천은 계산과 신중의 수단으로서의 이기주의였음. 에피쿠로스는 그보다 상위에 있거나 이타적 원칙은 고려하지 않음. 그는 우정의 경우에만 예외를 둠. 이렇게 해서 효용은 훌륭한 삶을 위한 핵심전제이자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기준점이 됨. 스토아학파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계산을 금지한 반면, 반대로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그 계산이 도덕의 필수요소였음. "육체적 쾌락과 고통은 자연스러운 욕구와 혐오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대상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선과 효용이 동등하다고 보았음. 행위의 도덕성은 전적으로 그 행위가 개인의 이익을 어떻게 감소시켰는지 혹은 증가시켰는지에만 달려 있음.
- 상호간의 선물교환은 가격이 확실히 정해진 매매보다 훨씬 심오하고도 유서깊은 거래방식임. 오랜 인류의 역사 동안 사물에는 아예 값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값을 매기지 않고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았음. 옛날 사람들은 상호간에 물건을 주거나 물물교환이 가능한 공동체에서 살았으며, 이 중 전자가 더욱 일반적이었음. 최초의 비화폐적 사회체제는 선물경제였음. 물물교환은 대개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잠재적인 적하고만 이루어짐. 현대에도 돈은 보통 넓은 사회관계를 위한 수단이며, 좀더 오래되고 소규모의 사회에서는 돈이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음.
- 선은 보답을 받는가? 유대사상에서는 왜 선을 행하는지의 문제가 제기되었음. 그리고 신약은 이원적 방식으로 이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 기독교는 유대교에는 상당히 낯선 하느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문자그대로 도덕적 행위가 보답을 받는 새로운 공간을 펼쳐 놓음. 현세는 반드시 의로울 필요가 없으나,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의 앞에서 심판을 받음. 유대교는 정당한 보상의 문제를 오직 현세에서 다뤄야만 했지만, 기독교는 정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옮겨 놓음. 그러므로 선과 악은 보상과 경제의 논리를 갖지만, 이는 천국에서 이루어짐. 따라서 선을 행하고 악에 시달리는 것에는 보답이 따르는데, 의인은 천국에서 보상받기 때문.
-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생각, 즉 개인의 무질서하고 종종 악하기까지 한 행위가 공공의 이익을 낳는다는 생각은 고대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음. 이 원칙을 처음으로 표현한 것은 애덤 스미스나 버나드 맨더빌이 아니며, 토마스 아퀴나스도 아님. 고대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런 시를 남김
옛날의 전설이 말하기를
우리의 모든 어리석은 계획과 헛된 자만심은
거꾸로 공익을 위해 작용한다
- 우리가 보기에 감각의 편견과 오류는 모든 부분에서 나타남. 그리고 이러한 편견과 오류를 이성으로 바로잡으로 한다면 서서히 무지막지한 역설과 난관과 모순에 빠져들 것이며, 생각이 진전될수록 증폭되어 마침내 우리는 수많은 복잡한 미로를 헤매던 끝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거나, 더 나쁘게는 허망한 회의에 빠져 주저앉게 될 것임. 그리고 갈릴레오는 이보다도 더욱 직설적으로 표현. "데카르트의 새로운 과학은 우리의 감각을 유린했다."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은 모순의 역설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음.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은 그 기반에 존재하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주류 경제학 사상의 주요 행동양식이 되었음
- 내부적으로 모순점을 안고 있는 체계는 현실과 일부 충돌하며, 의도적으로 철저히 비현실적 가정에 기초하고, 극단적인 경우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기도 함. 그럼에도 그러한 체계는 성공적으로 활용됨. 체계의 수명은 무오류성이나 논리적 일관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체계의 존재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임. 그러므로 경제모델은 얼마나 사실적인지가 아니라, 신뢰성, 적합성, 설득력이나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에 대한 내면화된 믿음과의 정합성에 기초하여 받아들여짐. 과학모델과 경제모델은 하나의 체계(신화)가 다른 것을 대체하거나 파괴할 때 신화와 비슷하게 작용. 이는 과학의 신화가 신화를 대체했을 때 일어난 일이기도 함. 우리는 데카르트를 읽흐면서 그가 얼마나 은밀하고도 조심스럽게 신학의 신화를 과학의 신화로 대체했으며, 이를 어떻게 진행시켰는지에 주목해야 함.
- 데카르트가 인간의 의미를 축소한 것은 경제학자들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를 낳음. 데카르트에 이래 인간은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논리적 추론에 의해 규정됨. 지각으로 인식되는 개성은 모두에게 동일한 객관적 이성의 보편성에 의해 실추됨. 계산될 수 없거나 최소한 숫자로 대리될 수 없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환상처럼 취급됨.
- 현대 경제학자들은 다시금 윤리학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규범의 내면화는 매력적 주제로 부각되고 있음. 행위자들이 게임의 규칙에 따르는 윤리적 환경에서 경제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보편적으로 인정받기 시작. 다양한 표제(기업환경의 질,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 비공식제도 조사 등)하에 권위있는 세계 기관들은 경제가 윤리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 그 관심은 윤리적일수록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초창기 히브리인들의 관념으로 거슬러 올라감. 애덤 스미스도 이런 생각에 동의했을 것임. 그리고 그 시초에는 도발적인 시인 버나드 맨더빌이 등장함
- 맨더빌은 탐욕의 필요성에 대한 철학을 주창한 핵심인물이었음. 이런 점에서 탐욕은 사회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임. 탐욕없이는 발전이 아예 없거나 거의 없을 것임. 그는 탐욕과 악덕 없이 우리가 어디를 향하게 될 것인지를 물음. 그 사회는 매우 기초적인 발달수준에만 도달할 것이며, 국가간 경쟁에서 버텨낼 수 없을 것임. 그는 쾌락주의 사상의 명백한 지지자였음. 우리가 원하는 것과 이미 가진 것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우리의 목표는 수요에 다다를 때까지 소유를 늘리는 것이 되어야 함. 그리고 그는 쾌락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감. 그의 관점에서 발전의 유일한 길은 수요의 증가이므로 그는 수요를 계속해서 증가시켜야 한다고 주장. 이런 의미에서 근대경제학은 맨더빌 사상의 후예임.
- 그러나 이성이 의심의 여지 없이 도덕성에 관한 일반원칙의 원천이고, 우리가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도덕적 판단의 원천이라고는 해도, 옳고 그림에 대한 최초의 지각이 이성에서 유래한다는 가정은 전적으로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음. ... 이런 최초의 지각은 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직접적 감각과 느낌의 대상임. ... 그러나 이성은 어느 특정한 대상을 유쾌하거나 불쾌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음. ... 이성은 이 대상이 본래부터 유쾌하거나 불쾌한 성질을 가진 다른 대상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임을 보여줄 수는 있으며, 이런 식으로 그 대상을 다른 어떤 대상을 위해 유쾌하거나 불쾌한 것으로 만들 수는 있음. 그러나 직접적 감각과 느낌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유쾌하거나 불쾌할 수는 없음.
- 스미스에 대한 일반적인 독법은 경제학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듬. 따라서 경제학의 현재상태를 이해하려면 두 스미스 모두를 읽을 필요가 있음. 왜냐하면 도덕감정론의 한층 폭넓은 맥라을 고려하지 않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국부론에만 집중할 경우 실제 스미스의 의도와는 다른 결론에 빠지기 쉽기 때문. 스미스가 남긴 유산은 다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는 윤리학의 결정적 중요성을 분명히 이해했으며, 사회에서 윤리의 역할을 매우 높게 평가했음.
- "모든 인간 본성에서 가장 하찮은 본성도 고통 없이는 변하지 않는다" 칼 구스타프 융
- 이 모든 옛이야기들과 바빌로니아 신화와 신약의 비유들이 어디에 도움이 되는가? 탈근대시대, 특히 경제학은 이 고대의 상징들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더구나 이미 충분한 걱정을 떠안고 있는 금융위기 시대에 이런 사상들이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 심리학자 융은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이 1000년이 넘도록 힘을 발휘하는 원형속에 존재한다고 믿음. 이런 원형들을 연구하고 아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도 그 때문. 그리고 이런 원형들을 연구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최선의 방법은 우리 문명이 갓 태어났을 무렵, 처음의 벌거벗은 모습을 살펴본 뒤 역사적 발전의 맥락에서 문명의 변화과정을 따라가보는 것.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간직된 것은 위기의 시대에 가장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음. 융은 이렇게 말함. "가장 예상을 벗어나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혼란스러운 것 속에서 보다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그에게 파괴점은 대개 자신이 쌓아올린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경제가 스스로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때는 총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약점을 표줄하는 순간이다. 경제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대는 경제가 자만에 빠져 다른 모든 것을 경멸하는 때가 아니라 벌거벗고 초라한 순간임. 약점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반면 강점은 종종 사물의 본질을 감춘다.
- 중세의 관면에서는 대개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최초의 죄가 성적인 것이었다는 주장, 즉 원죄의 형태가 성적차원이었다는 주장이 우세함.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설득력 있는 논거가 없음. 원죄의 특징이 과소비라고 하는 편이 훨씬 그럴듯함. 결국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 이브와 아담은 열매를 문자그대로 소비함. 역자학자 노먼 데이비스에 따르면 스미스는 "인간이 가진 탐욕의 의미를 자문함으로써 경제학의 세계에 발을 들였음. 스미스가 왜 국부의 원천에 대한 연구를 저술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이 상당히 합리적인 해석에 따르면, 탐욕은 사실상 원죄라는 바로 그 개념과 함께 이론경제학의 시초뿐 아미라 역사의 기원에도 자리하고 있음.
- 끊임없이 불만족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경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우리 문명과 인간존재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음. 불만족은 심지어 진보와 시장 자본주의의 동력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음. 20세기 시카고학파 경제학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인 프랭크 나이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 "더 부유해질수록 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나이트의 제자인 조지 스티글러는 심지어 이렇게 말함. "상식적인 개인의 주된 욕구는 그가 가진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더 많고 더 나은 욕구이다." 점점 더 많은 것을 갖기 원하는 끝없는 욕망 속에서 우리는 노동의 즐거움을 희생.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너무 많이 일함. 우리의 문명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문명보다도 풍요롭지만 지금과 뚜렷이 구별되는 원시적인 과거 어느때에 비해서도 충분내지 만족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면 멀었지 결코 가까워지지 못했음. 한문장으로 요약하며, 우리가 어떤 희생도 무릅쓰고 끝없이 GDP와 생산성을 늘릴 필요가 없다면, 얼굴에 땀을 흘려가며 끝없이 과로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임.
- 우리는 행복에 가까워질수록 행복에 대한 욕망도 커짐. 가장 치열한 욕망은 완전히 동떨어지고 이룰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없지만 손만 뻗으면 가질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에서 나옴. 그리고 이런 환상은 우리 사회의 금전주의 경향으로 더욱 강화됨. 이는 마치 무지개 끝에 있는 신비한 보물과도 같음. 무지개를 향해 더 멀리 나아갈수록 무지개와 보물은 더 멀어짐. "충족은 언제나 수평선 너머에 있으며, 우리가 접근할수록 수평선 뒤로 물러난다."
- 길가메시 서사시와 초기 고대 그리스에서는 진보라는 개념은 애당초 거의 존재하지 않았음. 당시에는 시간에 대한 순환관념이 지배적이었으며, 발전도 없었음. 모든 것은 계절과도 같이 원을 그리며 순환. 계절의 역할은 변화와 회귀에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음.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대개 특정한 의식을 치름으로써 계절의 회귀가 가능해진다고 믿음. 그리고 이야기는 일종의 순환고리 안에서 불특정한 시간에 일어남. 셋째로 여러 문명들은 인류의 황금기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갔다고 믿음. 최초의 인간은 지금보다 더 뛰어나게 창조되었으며 그 기원에서 멀어질수록 인류는 더 나빠지고 퇴보했음. 반면 현대인들은 진보덕분에 예전의 원시 시대에서 해방되었다며 감사해함
- "여러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기본조건을 더 나은 쪽으로 현저히 향상시키는 존재로서 진보를 믿으며, 그 믿음은 종교에 가깝다." 로버트 넬슨
- 모든 시대는 자신만의 환상을 가진다. 우리의 환상은 번영의 힘에 대한 열렬한 믿음이다. (로버트 새뮤얼슨)
- 케인스는 경제학에 대한 최초의 인식처럼 경제학이 도덕과학으로 돌아가여 한다고 요구했으며, 정밀한 자연과학을 모방하고자했던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전형적 과학적 접근방식을 비판. 주류 경재학을 비판하는 여러 사람들의 요지는 사회학자 에치오니의 표현대로, 주류 경제학이 인간을 그릇되게 환원했다는 것임. 주류 경제학은 인간을 주어진 예산제약하에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이성적 행위자로 환원함으로써 경제학을 수학의 미로에 가둬 놓음. 오늘날 최첨단 주료 경제학 이면에 자리하는 기본철학은 사람들이 흔히 믿고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공리주의도 아님. 현대의 지배적 이론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효용함수에 반해 움직일 수 없음. 이 이론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쾌락주의임. 그러나 쾌락주의가 도덕에 중요하고도 긴밀한 관련성을 부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쾌락주의로 보기 어려울 때도 많음. 그 차이는 다음과 같음.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든 것이 자기애의 원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우정과 같은 영역은 예외라고 인정.
- 윤리와의 관련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작금의 상황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잘못된 해것에 기인. 실제로 경제학은 스미스가 거부한 버나드 맨더빌의 사상체계에 따라 전개됨. 경제학 연구는 도덕과학에서 단순히 수학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과학으로 전환됨
- 뭔가로 가리려는 욕망, 소유에 대한 욕망과 자시을 보호하고 쉽게 상처받지 않으려는 욕망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잃었으며, 우리는 뭔가를 필요로 하기 시작하면서, 그것들에 의존하게 됨. 루소의 글은 이 점을 탁월하게 포착.
미개인은 그저 안식과 자유를 누리며, 생존과 안식마을 바란다. 스토아 학파의 아타락시아(정신적 평정)도 그 밖의 모든 대상에 무관심안 미개인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함. 이와 반대로 시민은 언제나 땀을 흘리며 바삐 움직이고 수고한 대가로 그보다도 힘든 일자리를 찾음. 시민은 죽을 때까지 일하며, 심지어 살아남기 위하여 죽음을 재촉하고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함. 실제로 이 모든 차이의 참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미개인은 그 자신만으로 살아간다. 사회인은 언제나 자신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서만 살 수 있으며, 타인의 판단에 따라서만 자기존재의 감정을 끌어낸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고,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 애쓴다. 따라서 모든 진보는 비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조지 버나드 쇼)
- 우리가 세계를 둘로 보게 된 까닭은 현실을 모델화하려 애썼기 때문. 이 중 하나의 세계는 추상화된 세계 혹은 비현실적 모델 개념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세계를 지각. 또 다른 세계는 즉자적 세계, 실제 세계, 경험적 세계로서 모델화가 불가능한 세계임. 왜냐하면 이 세계는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생각이 그러하듯이, 살아있고 실제이며 임의로 옮겨 놓을 수 없기 때문. 그런 생각들은 마음대로 움직이고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바로 그 목적에서 생겨나는 듯 보임. 경제학에서도 똑같은 충돌을 볼 수 있음. 한편에는 개인의 행위나 전체사회를 설명하고자하는 경제모델이 있으며, 여기에서 모든 것은 그 자체와 아름답게 부합함. 그러나 이런 모델은 종종 비현실적인 토대에 놓여 있거나, 현실에 거의 적용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됨. 안타깝게도 우리 세계에서는 두 경우 모두 빈번하게 벌어짐.
- 때때로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짐. 우리는 최근 몇년간 세계경제의 성장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위기시에 경제학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완전히 잊음. 위기가 닥치면 모델은 작동하지 않음. 모델은 작동할 때는 제대로 작동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아예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변화가 지나치게 급격하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위기시에는 표준적인 수학모델은 사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임. 모델을 수립할 때 우리는 충분히 긴 시간을 들여야 함.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영감을 얻기 위해 역사와 직관에도 의지해야 함. 우리는 분석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수없이 들어왔음. "모델에 따르면 이러이러하지만 우리 생각에는....", 모델은 직관으로 보완되어야 함.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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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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