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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경제를 노래하다

사회 2015. 4. 13. 18:00

 


팝, 경제를 노래하다

저자
임진모 지음
출판사
아트북스 | 2014-10-13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나는 팝으로 경제를 배웠다!" 위대한 팝의 명곡들로 배우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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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적 성향을 뒤로하고 대중의 up을 지향하는 대중음악 특유의 접근법은 대공황 이후 2차대전 동안에 절로 춤을 추게 만드는 스윙재즈의 폭발적 인기로도 알 수 있음. 총성과 폭격이 난무하는 전시에, 정신줄을 바짝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베니굿맨과 글렌밀러의 스윙음악에 발을 굴렀음. 이곳저곳에서 폭격과 살육이 벌어지는 전쟁기간에 빅밴드의 연주에 맞춰 춤 난리를 피웠다는 것은 얼핏 납득하기 어려움. 하지만 전통적으로 대중음악은 이런 상황에서 우울하거나 절망의 분위기를 담은 무거운 음악대신 원기회복을 지향하는 흥의 음악, 시름을 날려버리는 신나는 음악을 택함. 그것이 베니굿맨의 스윙재즈 Sing sing sing 이었다. 스윙이 점화된 시기도 뉴딜정책이 대공황과 씨름하던 35~38년 무렵이었음. 대중음악은 보수나 혁신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평화지대인 '업'을 사랑하는 것이다. 크게 보면 스윙이나 Over the rainbow나 다를 게 없음. 그렇다 쳐도 Over the rainbow가 막연한 긍정론에 바탕을 둔 허무맹랑한 희망, 널리고 널린 희망고문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함. 무엇보다 남녀의 통속적 사랑과 이별의 테두리를 박차고 시대, 그것도 대공황기를 살면서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시대를 그려냈다는 점은 발군이다. 그야말로 역사적 노래가 아닐 수 없다
- 로큰롤은 흑인 블루스, 정확히 말하면 리듬앤블루스에 기원을 두고 발전한 음악으로, 로큰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엘비스 프레슬리임. 영국 비틀스에게도 워너비의 꿈을 안겨준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로큰롤의 제왕임. 엘비스 프레슬리는 백인이면서도 흑인들의 창법으로 노래했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미국 남부 사람들은 엘비스의 공연을 보면서 "왜 저 친구는 멀정한 백인인데 검둥이 노래를 하는거야?"라고 비난하기도 함. 또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면서 로큰롤 초기공신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는 흑인 뮤지션 행크 발라드가 "흑인보다도 능란하게 춤을 추었다"라고 찬사를 보냈을 만큼 엘비스는 빼어난 몸놀림을 선보였음. 때문에 척 베리, 리틀 리처드, 칼 퍼킨스, 버디 할리, 리키 넬슨 등등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로큰롤의 권좌에 오를 수 있었음
- 50년대 미국 경제가 얼마나 활황이었는가는 수직 상승세를 보인 주요 지표가 말해줌. 로큰롤의 시대라고 할 이 시기 10년 동안 미국의 GNP는 2130만불에서 5030만불로 거의 2배반 이상 껑충 뛰었다. 국민평균소득도 50년 1526달러에서 10년이 지난 60년에는 2788불로 상승해 무려 82%나 증가. 이보다 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이 기간 실업률은 4%에서 5.5% 사이를 유지하면서 과거 대공황과 전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안정세를 보였음. 엘비스의 로큰롤은 이런 경제훈풍을 타고 완연한 산업으로 위용을 갖추어가기 시작. 갑자기 음악계에 도는 돈이 많아졌다. 틴에이저들이 주요 수요층으로 등장하면서 해마다 기록을 갱신할만큼 레코드 판매가 일대 상한가를 쳤기 때문. 레코드 매출은 50년 1억 8900만불에서 59년에는 자그마치 세배가 넘는 6억불로 급증. 음반은 구멍가게에서도 잘 팔렸고, 슈퍼마켓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상품으로 사랑받았으며 우편구매 주문도 호조였음. 레코드 산업의 분발은 할리우드 영화계와 더불어 미국이 유럽 그리고 공산권과의 보이지 않는 문화전쟁에서 앞서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경제가 살아나면서 소비가 늘어나는 부귀영화의 기운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정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장 중요한 심리적 효과는 아마도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 그 가능성에 대한 환상과 신념일 것이다. 과거에 그토록 부르짖던 'Happy days are here', 이어서 'Over the rainbow'에서 그대가 꾼 어떤 꿈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현실적으로 믿는 단계에 이르렀음.
- 다이애나 로스가 있던 슈프림스는 60년대 중후반 영국의 비틀스가 대중음악계를 휩쓸던 당시 미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그룹이라고 할 만큼 막강한 인기를 누림. 이 걸 그룹들 가운데 샹그리라스와 같은 백인 여자들로 이루어진 팀도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이 팀들이 흑인 여성들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 당대 흑인 공민권 운동의 흐름아래 아무래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흑인 소녀들의 신분상승은 무엇보다 50~60년대 미국 경제의 폭발시기가 낳은 아메리칸 드림과 훨씬 더 궁합이 맞았음. 이때부터 음반사들은 걸그룹의 상업적 파괴력을 확인하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걸그룹을 만들어 시장을 조리하는 전통을 확립. 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슈퍼스타 가운데 3인조 TLC를 빼놓을 수 없고 역사상 가장 많은 공연과 음반판매 매출을 기록한 스파이스 걸스는 토니 블레어 수상시절 영국의 희망이었음. 2000년대 초반 활약한 특급 3인조 걸그룹 데스티니스 차일드는 슈프림스를 롤모델로 삼음. 슈프림스에서 70년대를 지배한 다이애나 로스가 나왔듯이 데스티니스 차일드에서는 2000~2010년대 최강 스타 비욘세가 나옴. 걸그룹은 이후 호경기에 편승하는 음반 기획자의 단골수법으로 자리잡음. 걸그룹이 판치던 그 약동하던 50~60년대를 당대의 황금기 작곡가 게리 리버는 이렇게 압축했다. "그 시대는 참으로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시대였다. 희망으로 가득했고 환상으로 가득했고 약속으로 가득했다. 동화가 실현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바라는, 진정한 꿈이 실현되는 시대였다."
- 해변의 핫팬츠, 비키니, 건강미인, 즉 캘리포니아 걸도 캘리포니아의 자랑이지만 60년대 당시 캘리포니아의 풍경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자동차, 바로 스포츠카였다. 이 시기 고속엔진을 가리키는 핫 로드를 딴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경주를 가리키는 drag이란 말도 인구에 회자되었음. 비치 보이스는 서핑광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듯 속도광을 겨냥해 쉐보레 자동차 409형을 노래한 '409'를 발표
-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차가운 날씨의 뉴욕에서 따스한 캘리포니아로 가기를 희망하면서 캘리포니아가 주도하는 히피운동을 찬양하는 메시지. 경제가 꽃을 피운 60년대에 아메리칸 드림은 곧 캘리포니아 드림이었다. 그 캘리포니아는 이후 76년에 나온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와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었음. 이글스의 캘리포니아도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70년대 미국경제는 이미 성장의 속도가 꺾여 장기 불황에 빠져들게 된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
- 비틀스도 리버풀의 찢어지게 가난한 노동계급의 후손들이었음.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이 4명의 청년들에게는 직장이 아닌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이 운명의 행선지였음. 일자리도 없고 군대 또한 받아주지 않으니 음악밖에 할 게 더 있었겠는다. 링고 스타는 "우리를 군에 데려갈 제도가 없어졌다. 열여덟살이 됐는데도 입대를 하지 못했다. 모든 애들이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라고 당시를 회상. 비틀스와 같은 리버풀 출신인 해럴드 윌슨 당시 노동당 당수는 총선을 준비하면서 여당인 보수당의 경제정책 부재와 무기력을 신랄하게 비판. "해가 오고 해가 가도 학교를 청년들에게 단 하나의 고용기회도 주지 못하고 있는 이 시스템은 불신임과 극도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윌슨은 비틀스가 미국을 정복한 64년 그해 가을 야당 당수에서 마침내 수상이 됨. 고용의 기회를 얻지 못한 가련한 이 젊은이들에게는 멋지게 포마드를 발라 넘긴 헤어스타일과 가죽재킷 차림을 한 대서양 저편의 미국 로큰롤 스타들이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음. 반항적인 옷차림과 행태의 그 청소년들을 가리켜 언론은 테디보이로 일컬었다. 테디보이들은 미국의 로큰롤 스타를 성공모델로 삼고 의상과 표정,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곤 했다. 작렬하는 빠른 리듬의 로큰롤이 청춘의 뜨거운 체온과 맞아떨어졌을 뿐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노동자 출신이면서 돈다발을 긁어 모으고 있는 저쪽의 로큰롤 가수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 60년대를 태평성대로 기억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이후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뜻. 정말 놀랍게도 오랫동안 호황일 것 같던 미국 경제는 7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거짓말처럼 곤두박질치기 시작. 정치적 측면에서 세계 질서의 축임을 자부하던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과 궤를 함께해 미국은 여러모로 어려운 국면에 돌입. 무엇보다 달러 가치가 몰락. 참전과 반전으로 여론을 거의 둘로 나누어놓은 베트남 전쟁은 격화일로로 치달았고 그만큼 미국은 국방비를 포함해서 많은 예산지출을 피할 수 없었음. 이 무렵 미국의 경제력과 경쟁력에 비해 높은 달러가치, 낮은 환율이 적용되면서 미국은 국제무역에서 불리해졌고 큰 폭의 무역적자가 발생. 결국 이러한 긴장을 이기지 못해 69년과 70년 사이에 달러가치는 무려 6%나 폭락. 닉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공공지출을 대폭 삼감하고 통화긴축 정책을 내놓음. 심지어 71년 8월 15일 닉슨 정부는 너무 많은 달러가 해외로 유출되어 가치가 떨어지자 달러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달러를 금과 바꿔주지 않는 금태환 정지를 발표해 세계경제를 충격에 빠뜨림. 결론적으로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것. 이른바 닉슨 쇼크로 불리는 이러한 정책은 사실상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음. 미국은 대공황 때의 악몽인 실업률 증가에 다시 부딪힘. 69년 4.5%였던 실업률이 70년에는 6.2%로 수직 상승. 갑작스런 경기후퇴로 미국 사회 전반에 찬바람이 불었다. 현실을 반영하는 대중가요에는 60년대 중후반까지도 보이지 않던 고통과 관련한 어휘와 주제의 노래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 70년에 발표돼 지금까지 세기의 명곡으로 꼽히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험한 세상의 다리 되어'가 여실히 증명하듯 현실은 고통과 역경으로 묘사됨
- 친구를 이야기하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캐롤 킹의 You've got a friend는 단순한 친구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 70년대가 개막하면서 외롭고 황량한 당대의 정서를 반영한 위로의 테마송으로 역사에 길이 남음. 이처럼 70년대의 팝 음악 가운데는 잘 달려가던 미국의 경제에 급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생겨난 근심과 고독을 달래는 위로의 노래들이 많음. 취업하기 힘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 심리가 지배하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는 개인주의 성향이 퍼지기 마련. 실제로 70년대는 미국에서 우리의 10년이었던 60년대와 달리 나의 10년으로 정의됨. 주변과 이웃을 돌볼 여유가 사라지면서 우선 자신부터 챙기자는 분위기였음
- 백인들이 주도하면서 여전히 디스코를 백인문화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디스코는 흑인들이 드나들던 도시의 클럽에서, 그것도 흑인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발전해온 엄연한 블랙 문화. 8비트 리듬의 반복을 생명으로 하는 디스코는 당대의 흑인음악인 16비트 펑크보다는 강렬한 동작을 구사할 수 있으면서도 16비트에서 8비트로 비트수를 줄인 결과 한결 춤추기가 수월해 빠르게 춤 인구를 흡수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음. 백인 지배의 미국사회에서 늘 소외돼온 흑인들은 동성애자 음악인 디스코를 통해 성적 억압과 이성애 관습에서 탈출하고 또한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느낌, 현실에서는 누릴 수 없는 평등의 쾌감을 누렸음. 그 평등은 실제로 디스코를 추는 풍경에서 확인 가능. 여럿이 빙 둘러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추다가 돌아가면서 중심에 한 사람을 밀어 넣음.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로 등극하는 것이다. 특정 인물만이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스타가 된다는 평등의식은 흑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은 이 새로운 댄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스코를 쾌락의 도가니로 무조건 직결시킨 평가가 당대 평단의 대세였음. 이 판국에 춤추고 술 마시고 노는 것은 마치 사창가에서 즐기는 일시적 전율과 뭐가 다르냐는 것. 게다가 디스코 문화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70년대의 두가지 풍조인 섹스, 마약과 맞물리면서 세간에서 더욱 경계와 비판을 받음
- 디스코 문화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정치적 무관심 한편에는 경제적 함의가 저류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 호주머니가 텅 비어 심리적으로 쪼그라든 시절에 댄스파티로 그 괴로운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고 할까. 디스코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발로라는 규정이 더 온당할지 모름.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가 최악일 때 사회 분위기와 정반대로 디스코 음악뿐 아니라 댄스음악이 유행하는 경우가 있음. 사회 지도층과 식자층은 이에 대해 우려를 표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게 그것인 정치와 정책에 관심이 없는 서민들은 쾌락의 평등주의에 따라 춤과 음악으로, 그 위대한 놀이로 시름을 날림. 당대 미국의 흑인들은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대중의 가장 가까운 위안은 바로 춤과 음악이다.
- 핑크 플로이드가 활동하던 60년대에 출현한 록그룹들은 나이가 들면서 순수함과 멀어짐. 그들 외에 당대 최고인 롤링스톤스를 위시해 레드 제플린, 퀸, 폴 매카트니, 에릭 클랩턴, 피터 프램튼, 로드 스튜어트 같은 슈퍼 뮤지션들, 나이로는 바로 손위 형들은 이제 젊은 세대를 노래하는 아티스트들이 아니었다. 섹스 피스톨스와 같은 펑크는 굳이 세대를 분류하자면 포스트-베이비붐 세대에 속함. 그들 슈퍼스타들 탓에 포스트 베이비붐 세대의 펑크 뮤지션에게는 음반 취입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음. 음악을 해서 뜰 수 있는 기회가 원천봉쇄된 것. 음악계는 이들 청년들을 무시했고 오로지 돈을 벌어다주는 슈퍼스타의 이름값에 철저히 의존. 형들인 슈퍼스타들이 미웠던 펑크 뮤지션들은 영국 사회뿐 아니라 바로 그 슈퍼스타, 슈퍼밴드를 거칠게 공격해 들어갔다.
- 브르수 스프링스틴은 등장하자마자 한 평론가에게 "로큰롤의 미래"로 칭송받았으며 신인인데도 그해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지 표지인물로 등장. 당시 스태그플레이션 아래, 미국이 그간 지켜온 아메리칸 드림을 잃어가고 있다는 그의 뼈아픈 충고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이후로 록계의 왕초 또는 노동자의 대변인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통했고 통속적 사랑노래와 작별한 그의 리얼리즘은 80~90년대는물론 새천년을 10년 이상 넘긴 지금까지 계속됨. 정말 그의 말대로 노동자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노동자와 서민들은 아무리 열심이 일해도 생활은 더욱 비참해지고 더욱 빈곤해지는 가운데 사랑과 가정도 지키기 어렵다는 위기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75년 같은 제목을 단 앨범 '달아나기 위해 태어나'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외친 통렬한 주문은 "등뼈를 뜯어내는 이 도시를 빠져나가 멀리 달아나라"는 것이었다.
- 70년대에 쏟아져 나온 무수한 팝의 명작 가운데 단연 첫손에 꼽히는 곡이 이글스가 76년 발표한 호텔 캘리포니아다. 낭만적인 톤이 지배적이라서 미국인들에게 사랑받은 것은 물론 캘리포니아와 미국에 대한 동경과 선망을 자극하며 무수한 타국인들을 미국 땅으로 불러들인 곡이지만 곡에 저류하는 메시지는 그것과 다른 문제작임. 노랫말 내용을 두고 엄청난 논란이 야기됨.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것은, 캘리포니아와 그 상징인 미국의 실상은 그런 낭만적 환상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일종의 뼈아픈 고백과 준엄한 경고라는 사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에 대한 고도의 비유라고 할까. 미국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이미 끝났으며 허울뿐인 아메리칸 드림에 빠져 타국인들이 미국으로, 캘리포니아로 들어오는 현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이제 비치 보이스 때의 캘리포니아 잔치는 끝났다." 행간에 흐르는 의미는 낭만의 대척점에 위치한 무기력과 암울함이다.
- 레이거노믹스는 영국의 대처리즘과 마찬가지로 이윤의 추구를 경제정책의 최우선으로 두었고, 이는 국민들에게 돈이 최고라는 심리적 주문을 더욱 강하게 걸게 됨. 황금만능 풍조가 판을 친 것. 80년대 전체를 관통한 이러한 도덕의 추락을 대중음악이 놓칠 리 없었다. 레이거노믹스가 한창 위용을 떨치던 80년대 초중반에는 돈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유난히도 많이 등장.
- 배금주의 풍조가 지배한 레이건, 대처 시대에는 대중음악계도 당연히 상업주의가 득세. 음악성 보다는 히트 차트 상위권과 높은 음반 판매고가 우선이었음. 80년대의 음악 뉴미디어인 MTV와 함께 영상음악 시대가 도래하면서 음악가들은 자신의 개성적 음악세계를 굴착하기보다는 카메라 앞에 서서 대중에게 잘 보이기 바빴다. 비주얼 가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쿵쾅거리던 메탈도 당의정을 입고 상업적 성향을 갖춘 팝 메탈로 모습을 바꿔 일세를 풍미. 이 무렵 음악계는 탐욕으로 물들어 출세 지상주의가 모든 도덕적 가치를 비웃었다. 성공한 사람 눈에 하느님으로 비친다고 주장하듯 상당수 음악인들이 출세와 성공을 열망했고 축재에 열을 올렸다
- 80년대 미국의 실상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이 고통스런 작업으로 84년,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함. 80년의 강, 82년의 네브라스카는 예고편에 불과했음. 그가 대담하게 미국에서 태어나로 제목을 붙인 84년 발표작은 불경기를 살아간 미국 노동계급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앨범이었음에도 시장에서 초대형 대박을 침. 보통 이런 리얼리즘 음악은 평단의 찬사는 얻더라도 대중의 반응은 그저 그런 데 비해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들은 인기차트 상위권을 누볐다.
-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과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베이비붐 세대들이 10년간의 불경기를 겪으며 새롭게 눈을 뜬, 현실 각성의 소산"이라고 풀이한다. 그 무렵 통계에 따르면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앨범을 사고 공연을 찾은 관객의 평균 나이가 서른한살이었다고 함. 50년대 생들, 바로 베이비붐 세대들이다. 그들은 60년대 후반 학창시절 공민권 운동에 나서고 베트남전을 반대하며 거리에서 소리친 사람들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저항성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음. 70년대 들어서는 신나게 춤을 췄다. 7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디스코 붐은 그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한 마지막 문화현상으로 평가됨. 춤추고 놀며 그렇게 살다가 80년대 들어 차가운 현실에 눈뜨면서 약간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일각의 베이비붐 세대들이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들에 잠기게 됐다는 것. 그래서 브루스 스프링스틴 열풍은 60년대 저항을 이끈 베이비붐 세대의 컴백 덕분이라는 분석도 등장. 한마디로 양심이 되돌아왔다고 할까. 그들의 의식선회를 이끈 것은 바로 미국의 우울한 경제였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전성기를 누리던 80년대 중반만큼 경제의 자장이 대중음악에 그토록 강렬하게 퍼지면 궤적을 깊게 새긴 때도 없었다.
- 스태그플레이션을 디스코춤으로 관통했지만 80년대 들어 그들의 실제 살림살이는 더욱 악화됨. 세월이 흘러도 똑같은 게 아니라 더 나빠졌다는 것. 그러한 악화를 보여주는 현상 하나를 꼽자면 여성이 가장인 흑인가정의 비율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점. 64년의 자료에 따르면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흑인가정은 25% 정도였음. 이것이 80년엔 40%로 크게 증가하고, 다시 4년이 지난 84년에는 여성 가장의 한부모 가정이 무려 50% 이상으로 치솟음. 이렇게 된 데는 막 출범한 작은 정부를 지향한 레이건의 복지축소 정책이 상당한 영향을 미침. 레이건 정부가 적자 재정을 줄이기 위해 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사회보장 혜택을 받아오던 빈곤층인 흑인 가정이 타격을 입는 것은 불가피했다. 여성이 가장인 가정에만 기존의 혜택이 적용되자 상당수의 흑인 남성들은 가족들이 지원받을 수 있도록 자신들이 집을 떠나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음. 80년에는 총 흑인인구 가운데 31%가 빈곤층으로 집계됨. 이 비율은 해가 갈수록 오히려 늘어났음. 1년 소득이 5000불 미만인 극빈층은 70년에는 총 흑인의 9.6%였지만, 86년에는 14%로 상승. 연간 소득 1만불 미만의 흑인은 30%가 넘었다. 실업률도 흑인 청년의 경우 87년 30%에 달했고, 이는 백인청년 실업률 15%보다 배나 많은 것이었다. 마빈 게이가 노래했듯이 돈을 모을 수 없고 세금도 낼 수도 없는 궁핍한 흑인들의 삶이 개선되기는 커녕 악화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지표들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흑인들이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이 음악을 한다면 지껄이는 투의 랩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 판국에 아름다은 선율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레이거노믹스가 흑인들의 분노인 랩을 불러낸 셈. 랩은 흑인에게 유독 차가웠던 경제상황 속에서 급성장.
- 소외계층, 하층민, 그리고 취업연령의 젊은이들은 부시시대의 대표적 피해집단이었다. 그들은 흑인, 백인 가릴 것 없이 모두 분노. 젊은이들, 특히 문화예술 분야의 젊은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잠재적 실업자군이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뜻에서 X세대로 통한 그 젊은이들은 미래의 불안과 분노를 버무린 공격성으로 시대를 저주. 그들의 절규가 미국 서부 시애틀에서 시작된 그런지 록 이었고, 언론은 그것을 얼터너티브록이라고 불렀다.
- 상대적으로 처지가 더 열악한 흑인들은 도피정서보다는 백인 사회와 맞장을 뜬다는 식의 강력한 입장을 택했음. 그러한 강경한 자세를 표출한 음악이 부시시대에 나와 순식간에 전성기를 맞은 갱스터랩. 억센 펑크비트를 바탕으로 마치 갱단처럼 정치, 경제, 사회, 성 전반에 걸쳐 과격한 메시지를 난사하는 살벌한 음악이었음. 몇몇 갱스터 래퍼들은 실제로 총기를 사용해 교도소를 들락날락 하기도 했음. 한인들의 피해도 많았던 LA의 흑인 폭동이 터진 것도 바로 이때임(92년 4월 29일~5월4일)
- 대부분이 일자리가 있고 돈이 잘 돌았던 클린턴 시대의 대중가요는 사회 비판의 저항성이 역력했던 부시시대의 노래와는 달랐음. 즐겁고 낙천적인 노래들이 돌아왔다. 여기서 빌보드 연속 14주 1위라는 흥행을 기록한 두 스페인 아저씨 로스 델리오의 마케라나를 빼놓을 수없다
- 경제호황기를 맞았기 때문인지 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랩이든 록이든 저항기조가 퇴색한 것은 당대를 특징짓는 흐름 가운데 하나였음. 랩부터가 특유의 저항적 열변보다는 프로듀서의 기술과 기획력이 중시되는 상업성 강한 흐름이 주도. 얼터너티브록과 갱스터랩이 부시 시대를 수놓은 안티 문화의 산물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러한 저항성의 음악은 클린턴 집권기의 호황을 맞아 서서히 그 힘을 상실해갔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임. 대신 풍요로운 시대답게 음반시장은 제각각 나름의 장악력을 자랑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로 넘쳐났음. 얼터너티브록, 갱스터랩, 디바 팝, 알앤비 외에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영국그룹 프로디지를 필두로 한 테크노 혹은 일렉트로니카가 시장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고, 마카레나를 시작으로 세기말에는 라틴 팝이 급부상
- 스파이스 걸스의 출현은 쿨 브리태니아라는 영국의 새 이미지를 만드는 리브랜딩 흐름에 불을 지름. 특히 영국의 그래미사인 브릿 어워즈에서 스파이스 걸스의 멤버 제리 할리웰이 영국국기, 즉 유니온잭의 옷을 입고 나온 것이 결정타였다. 영국에 모처럼 애국주의 열풍이 불었다. 이후 제리 할리웰은 영국 국기를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나았고, 쿨 브리태니아의 상징이 된 그녀의 유니온잭 의상은 나중에 자선경매에서 41000파운드에 낙찰됨.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클린턴 시대의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2000년 5월 롤링스톤지의 표지를 촬영하면서 성조기로 디자인한 옷을 입기도 함. 토니 블레어 시대에 대중음악의 강국 영국은 60년대와 70년대 이후 수십년만에 글로벌 대중문화 분야를 이끄는 기염을 토함. 부분적으로 그것은 영국 현대사에서 가장 길었던 호황경제 덕분이었음.
-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은 불경기에 찡그린 느낌의 우울한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과 정반대의 갈데까지 가보게 하는 쾌활한 노래를 찾는 경향이 있음. 그래서 불황이 대박 인기곡을 낳는다는 속설이 국내외 음악계에 존재. 그 말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 75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80년 조용필 현상의 시작인 창밖의 여자가 모두 경기침체기에 인기를 누린 역사가 이를 증명. 서태지와 아이들의 92년 난 알아요가 등장하기 직전에 상당수 가요관계자들이 이런 불황에 빅 히트곡이 나올텐데 라고들 했음. 강남 스타일의 전 세계적 회오리는 한국인들뿐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이 경제적 빈곤감과 박탈감에 빠져 있으며 이 현실을 경쾌한 노래로 순간이나마 잊고자 하는 심리를 보여줌. 대중가요는 이렇게 냉엄한 현실을 정반대로 표현하기도 함. 물론 돌려 말하지 않고 직시하는 경우도 있음. 노동계급의 대변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현실을 직시하는 뮤지션이다. 강남 스타일 열풍이 터지기 전인 그해 3월 그는 레킹 볼이란 앨범을 갖고 돌아옴. 한사코 빨간 띠를 맨 블루칼라만을 위해 노래하던 그는 여기서는 모처럼 넥타이를 맨 화이트칼라에 대한 노래를 부름. 그 이유는 바로 월가 시위 때문. 본인도 "월가의 탐욕을 비판하고 그것이 초래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풀어낸 앨범"이라고 했음. 롤링스톤지는 이 앨범을 그해 최우수 앨범으로 선정. 족쇄풀린 금융산업이야말로 경제 불평등을 야기하면서 미국을 이 지경으로 몰고 온 악의 추깅라고 성토하는 그는 한편으로 우리 스스로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 앨범의 첫곡 '우리 스스로를 돌보는 거야'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제 우리가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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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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