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기억 기억의전쟁

저자
김현아 지음
출판사
책갈피 | 2002-02-0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이 책은 지난 3년간 매해 베트남을 답사했던 "나와 우리" 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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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 협정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반공정권인 고 딘 디엠 정권을 세우고 대리통치를 시작. 고 딘 디엠은 남북 총선거 실시를 통한 통일정부라는 제네바 협정의 규정 이행을 거부. 약속대로 남북 총선거가 시행될 경우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의 승리가 확실시되었기 때문. 호치민이 통일 베트남의 대통령이 된다면, 베트남의 공산화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된다는 것이 바로 미국이 베트남에 친미반공정권을 세우고 지원한 논리다. 이른바 도미노 논리다.
- 도미노 논리란 47년 트루먼 독트린에 담긴 내용 중 핵심적 요소의 하나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세계의 대응이라는 논리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그리스가 떨어져 나가면 터키가 뒤따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지배권은 중동과 아시아 전체로 파급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에 근거하면 제3세계의 어떤 지역도 중요하지 앟은 곳이 없게 된다. 이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전후 세계 지배에 대한 환사오가 상호작용하면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현실화시켜나갔다. 2차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산업을 부흥시키고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제3세계의 모든 지역을 미국의 잠재적 개입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세계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야망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총선거는 무산되고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와 부패로 남베트남 민중들의 불만은 높아져갔다. 55년에서 63년 기간에 미국은 남베트남 군사예산의 85%를 원조했으며, 민간부문과 군사부문을 합한 전체 사이공 정부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한다. 그러나 친미정권을 통해 대리 반혁명을 추진한다는 미국의 전략은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내적 기반이 전적으로 부재한 고 딘 디엠 정권은 비밀경찰에 의한 폭압정치를 해야만 했고, 이는 당시 베트남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농민과 학생, 지식인들의 대규모 저항을 초래했다. 독재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조직망만 더 넓혀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고 딘 디엠 정권은 붕괴되고 연이은 수 차례의 군사 쿠데타를 거치면서 미국은 직접 개입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그 신호탄이 64년 8월에 일어난 통킹만 사건이다.
- 통킹만 사건은 미국 해군함정 매독스호가 공해상에서 북베트남군으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한 사건. 그러나 이 사건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미국이 고의로 북베트남의 발포를 유도한 것이 아닌가 의심케 하는 측면이 많다. 원래 미국은 사이공 정권의 군대와 CIA작전을 이용해 통킹만 부근 북베트남 해안지역에서 도발적인 준 군사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미군 함정에 대한 북베트남의 공격은 북베트남 영해에서 사이공 군대가 불법적인 활동을 벌이고 미군 함정이 영해를 침범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데 대한 정당한 방위행동이었으며, 북베트남은 매독스호에 경고를 수차 발한후 공격을 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구나 매독스호에 대한 북베트남의 2차 공격이 있었다는 미국정부의 주장은 조작이었음. 통킹만 사건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셈. 그리고 이듬해인 65년 3월 2일 북폭을 함으로써 미국은 본격적인 베트남 전을 일으킨다.
-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논의는 50년대 이승만 정부에서부터 비롯됨. 54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남군에게 패배를 하고 있던 시기에 유엔 극동사령관 존 헐 장군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인도차이나 공산군과 투쟁하고 있는 프랑스군대를 원조하기 위해 한국군 전투사단을 인도차이나에 파병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공식적인 이승만의 첫 시도였다. 그후에도 이승만은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세력을 확대는 자유세계에 대한 국제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보고 자유아시아 국가들이 단합된 행동으로 이를 저지시켜야 한다며 한국이 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프랑스 정부가 이 제의에 반대해 이승만의 베트남 파병시도는 좌절된다. 미국 또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을 다른 나라에 파병하는 것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의 반발이라는 측면을 이유로 이 제안을 거절함.
- 베트남 파명이 다시 거론된 것은 6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박정희와 케네디의 1차회담에서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던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지지에 정권의 존폐여부가 달려 있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한일국교정상화와 형식상 최소한의 선거를 실시할 것(합법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민정이양의 모양새를 갖출 것)등을 요구하고, 박정희는 베트남 참전 가능성을 포함해 한국의 지원을 제의한다. 63년 10월 15일 선거를 통해 제3공화국이 출범한다. 그러나 첫 임기 4년 동안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반정부 학생시위와 야당의 극렬한 비판, 집권당 내부에서의 통치권에 대한 강력한 도전에 노출되었다. 즉 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15만표차로 누르고 당선되기는 했지만 합법적 민간정부를 전복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는 정통성의 부재는 박정희 정부의 태생적 한계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한계를 가진 박정희 정부는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으로서 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경제 원조가 감소하자 박정의 정권의 기반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에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통하여 베트남 특수라는 경제 효과와 파병의 대가로서의 원조를 획득하려는 목적을 상정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환경은 외화부족과 물가고로 인한 경제위기가 만연한 상태였다. 게다가 불경기, 식량난마저 가세해 전 국민의 삶은 피폐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미국은 무상원조를 차관으로 바꾸고 군원이관 등의 긴축재정을 취함으로서 성장정책을 추구하는 한국경제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게 됨.
- 박정희의 지도력에 대항하는 역쿠데타 시도와, 쿠데타 지도자들간의 내부알력 또한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61년 5월 군권 장악 이후로 63년 12월의 민간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 12차례의 역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즉 63년 12월 합법적 민간정부로 변모하긴 했지만, 군사쿠데타로 이한 합법적 민간정부의 전복가능성이라는 선례의 수립은 군부의 내재된 동요와 권력달등으로 표출되었다. 이 또한 박정희 정부를 압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 이런 정치적 상황하에서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 이것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냉전의식에 의해 베트남을 냉전의 전장으로 본 시각과 더불어, 주한미군철수 내지 감축을 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확고한 공약을 얻음으로써 자국의 안전보장 확보,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원조 획득, 베트남에서의 외화획득이라는 실리가 작용해 내려진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던 3공화국 정부는 당시에 처해 있던 대내적 정치, 경제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파병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압력에 따른 불가피한 파병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대내외적인 위기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박정의 정부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정책결정으로서 3공화국의 정치적 돌파구였다고 할 수 있다.
- 베트남전을 일으킨 미국의 경우 자국 내의 양심세력이 징집 반대와 반전의 목소리를 높여나간 것에 비해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성격규명에 대한 논의도 없었고, 파병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사회적 파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1, 2차 파병이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하고, 3차파병부터 반대의견들이 개진되었으나 담론을 형성하지 못했다. 국회가 4차 파병안을 통화시켰을 때 세계는 이미 이 전쟁을 반대하는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66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베트남에서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재판소를 조직했고,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67년 2월 이 재판소가 개최한 스톡홀롬 회의에서부터 집행위원장으로 참여. 이 재판에서 사르트르를 비롯한 대표자들은 베트남에서 미국의 행위가 민간인들에 대한 광범한 무차별 대량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라는 전쟁범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미국은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허명을 내세우며 베트남 인민에 대한 제노사이드라는 의도적인 무차멸 살상, 즉 전쟁범죄를 범했다고 이 재판소는 만장일치로 결로낸림. 미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해 68년 존슨 대통령의 대선출마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온 세계가 베트남전을 반대하고 반전시위를 하고 있었을 때도 한국에서 반전의 목소리를 찾기 어려웠다. 대한 뉴스에서는 귀신잡는 해병대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여전히 부산항에서는 여학생들이 눈물의 손수건을 흔들었고, 파병 군인들의 용맹성은 과장되어 미디어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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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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