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면서 내가 자연과 한 몸이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내가 평온하면 자연도 평온하다고 느낀 적은 있는가? 인간과 자연을 칼같이 나누는 근대인에게는 무척 생뚱맞은 물음이지만, 한자권의 옛사람들에게는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물음이었다. 도가의 대표자인 장자는 천지와 나는 더불어 살아가며 만물은 나와 하나라고 단언했고, 불교에서도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고 만물은 나와 한몸이라고 가르쳤다. 도가나 불교와 대척점에 서 있던 유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온 세상은 모두 한 형제"라는 공자의 세계관을 더욱 확장하여 <사서집주>에서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천지만물은 본디 나와 한 몸이어서,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나의 기가 순조로우면 천지의 기도 순조롭게 된다." 주희에 휠씬 앞서 맹자는 "천지만물이 다 내게 갖추어져 있다고 단언했다. 이들이 이렇게 단정할 수 있었음은 다름 아닌 '인'. 그러니까 어짊 덕분이었다 유가에게 어짊은 천지만물이 한몸임을 알게 해 주고, 그들과 소통을 가능케 해 주는 도덕이었다 어짊이라는 도덕을 갖추면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한 몸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절로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 태초에 세계를 지배한 것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우라노스(하늘의 신)는 그녀가 세운 질서를 딛고 일어나 군림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우라노스의 체제는 다시 그의 아들 크로노스(시간의 신)의 도전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매복해 있던 크로노스는 아버지가 어둠을 끌어내리며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 번득이는 불멸의 낫을 휘둘러 아버지를 거세했다. 피투성이가 된 우라노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달아나야만 했다 이렇게 그리스신화에 그려진 신들의 역사는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갈등과 싸움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상상 속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역사를 잘 들여다 보면. 어느 지역의 어느 민족이든 발전하고 지속되는 역사는 그리스신화 속 신들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놀라운 것은 세대 갈등의 역사와 인간 삶의 진실을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사회적 담론과 교육 콘텐츠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 라틴어 '바카레(vacare)'는 '텅 비어 있음'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바캉스(vacances)'라고 부르는 말의 뿌리다. 이는 번잡한 일상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누적된 피로와 긴장감을 덜어내 나를 텅 비워 내는 여유의 시간을 가리킨다. 나를 비워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라고 느 낄 때, 모든 것을 훌훌 던지고 어디론가 떠나는 시간 같은 비움의 계기가 없다면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로마인들은 이런 여유와 한가함의 시간을 '오티움(otium)'이라 불렀다. 키케로는 공동체의 부름에 웅해서 일하는 직무, 즉 '오피키움(officium)'과 함께 '오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둘의 균형이 삶을 알차게 꾸려 나가는 지헤라고 생각했다. 일에서 벗어난 한가한 시간 동안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사색과 독서에 잠겼고, 그것이 새로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예 공부를 한다는 일 자체가 한가함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했다. 죽어라 일만 해야 하는 노예나 일반 서민들에게 한가할 틈은 없다. 노동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에 '학교'라는 것이 곧 '한가함'을 뜻했다. 그리스 말로 한가함을 스콜(schole)'라고 했는데. 이것이 로마에서는 스콜라(schola)가 되었고 영어에서는 스쿨(school)이 되었다. 공부가 곧 여유 있는 사람들의 한가함과 통한다는 뜻이다.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 한다면. 학교를 어떻게 가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는 일이 고된 노동처럼 여겨지고, 미래의 직업을 얻기 위한 예비 단계로 굳어져 치열하고 고단한 경쟁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노동에서 벗어난 한가함으로서의 공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
-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말했다. 오늘을 즐기라고. 카르페 디엠. 지금 여기 내가 누리는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그것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를 잊지 말라고 "그대 묻지 마라, 아는 것이 불경이니. 나에게, 그대에게 신들이 어떤 종말을 주게 될는지, 레우코노에여, 바빌론의 점성술에 기대지 마라. 뭐든 견디는 게 얼마나 더 좋은가? 더 많은 겨울을 유피테르가 허락하든, 아니면 지금 티레눔 바다를 맞선 바위로 힘을 빼는 이 겨울이 끝이든, 현명함과 술을 흐르게 하라. 짧은 인생에서 긴 희망은 잘라 버려라. 샘 많은 세월은 말하는 사이에도 달아나지 않는가. 내일은 최대한 조금만 믿고, 오늘을 즐겨라."
- 알베르 카뮈의 말대로, 인간은 모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지만 그 미래라는 것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판에 어떤 희망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많다. 거대한 사회조직 속 하나의 부품처럼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 갇혀 죽어라 일해도 끝나지 않고 계속 제자리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우리는 죽음에 저항하듯 무의미에 반항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카뮈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산 정상에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 바위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바라보는 시시포스, 그러나 산 아래로 내려가 그 돌을 다시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그가 보여 주는 우직한 불합리함의 성실성을 마주하며 카뮈는 <시지프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 정상을 향한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둘로 나누었다. 시계바늘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했고,어떤 특정한 행동과 말에 적합한 결정적인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했다 둘 다 신격화되었다. 그리스 서사 시인인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으로서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버지였고, 그리스의 기행문 작가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키오스 출신의 시인 이온은 카이로스를 제우스의 막내아들이라고 노래했다. 제우스는 영원한 권력을 쥐고 난 뒤 '모든 것의 원인인 제우스'라는 별명을 얻었던 터라, 시간과 관련된 신화적 부자 관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크로노스 속에서 특정한 이유와 원인이 개입되면, 결정적인 순간 카이로스가 반짝이며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일에서 성공하려면 카이로스를 잡아야 한다
-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 지도자가 되는 길을 남성에게는 허용하면서 여성의 진입을 막는 것은, 마치 대머리가 구두를 만드는 일을 잘한다고 해서 장발의 장인이 제화공이 되는 것을 금하는 것과 같이 불합리하다고 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신체적∙생물학적 차이는 대머리와 장발의 차이만큼이나 국가의 통치와 관련된 일을 맡는 데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성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정치적 직무를 적절하게 맡길 때, 국가가 안정되고 발전할수 있다고 한다. 이 주장 역시 당시 그리스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실현되지 못했고, 철학적 논의의 공간 안에서만 갇혀 있었다
- 그리스신화에서 최초의 신은 공간의 신(카오스)이었다. 그다음에 태어난 대지의 여신(가이아)은 세상의 중심을 차지하며 최초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자신이 낳은 하늘의 신(우라노스)에게 밀려났고, 우라노스도 역시 아들인 시간의 신(크로노스)에게 잔혹하게 거세되며 권력을 잃고 말았다. 크로노스는 티탄 신족들과 함께 세상을 지배했지만, 그도 역시 자식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자식이 부모를 밀어내고 권력을 잡는 반역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바로 제우스다. "당당한 티탄 신족은 높은 오트리스 산을 거점으로. 반면 크로노스와 레아가 낳은 신들은 올림포스 산을 거점으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제우스는 아버지의 권력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후에도 올림포스 산을 근거지로 삼아 세상을 다스려 나갔다. 그의 권력은 영원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권력 투쟁에서 최종 결론인 셈이다
- 신화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모든 정보와 지식을 오롯이 기억에만 의존해서 만들어 내고 이어가던 구술시대에 만들어졌다. 그것은 단지 '심심풀이 땅콩'처럼 지루한 일상을 즐기기 위한 여흥으로 만들어 낸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실 그 막장과도 같은 흥미진진함도 기억을 잘하기 위한 묘안의 결과였다. 지식은 세상을 잘 살아 나가기 위한 무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한 공동체의 집단 지성은 험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삶의 숱한 문제들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 지혜를 신화속에 필사적으로 담아냈던 것이다. 신들의 권력투쟁 서사 안에는 역사와 권력의 비밀과 진실이 담겨 있다. 그리스신화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제우스의 이야기에는 지금도 되새겨 보아야 할 진리가 있을 법하다. 다소 지루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그래서 여전히 곱씹어 볼 고전으로 살아 있다.
- 사회적 취약계층을 비롯한 영유아와 청소년, 노년 등에 대한 돌봄 일반은 국가로 대변되는 공적 영역에서 담당해야 함은 이미 맹자의 시대, 그러니까 2400여년 전부터 좋은 정치의 표본으로 운위되어 올 정도로 당연했다. 그렇다고 가정은 돌봄으로부터 자유로워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맹자는 환과고독 같은 사회적 취약계층은 국가가 정치로써 돌봄을 해결해야 하지만, 그렇지않은 일반의 경우는 가정에서 돌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국가는 백성들에게 항산, 곧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맹자는 50세를 넘긴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정도로, 70세를 넘긴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를 두고 사치스럽다고 한다면 이는 틀림없는 오판이다. 50세를 넘으면 비단같이 촘촘하게 짜인 옷감으로 만든 옷이 아니면 추위를 피할 수가 없고. 70세를 넘기면 고기가 아니면 배고픔을 막을 수 없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노인이 춥고 배고프지 않도록 제대로 돌보자는 취지였던 것이다 결국 돌봄은 국가의 법령이나 제도만으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당연한 기본인 것이고, 그에 더하여 맹자의 통찰처럼 일정한 수입의 보장, 곧 지속 가능한 생업의 보장이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돌봄은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과 함께 가야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 예수회 신부로서 영문학자였던 월터 .옹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라는 책에서 인간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계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그는 기억에 의존한 구술문화를 출발점으로 삼았고, 문자문화는 인간이 기억하기 위해 소비했던 뇌의 에너지를 정보의 분석과 지식의 창출에 쏟아부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인류 지성사에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정보와 지식의 기록과 검색의 종합 한 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한 새로운 시대에 진입해 있다고 선언했다. 바로 디지털 시대다 월터 .옹의 책은 디지털 시대의 의미와 가치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단하며 그 희망과 위험의 여러 가능성을 예견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통찰은 최근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생성형 AI의 등장과 직접 연결된다. 그리고 플라톤이 제기했던 문자문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입은 문자문화의 혜택 역시 지금 소환될 필요가 있다 놀라운 혁신을 거듭하는 인공지능의 기술은 인간의 지적활동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그동안 지식과 정보의 기억과 분석에 집중되었던 우리 뇌의 역량을 디지털의 혁신은 어느 쪽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 우리가 그것들을 적극 활용하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우리의 새로운 역량을 상상하며 혁신의 방향을 찾고. 무엇을 해야만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윤리적 지향성을 통찰하고 준비해야 할 때다
- 이 책은 오래도록 지속된 허구의 세계관, 즉 '환경 결정론'에 도전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기후와 물리적 환경이 인간의 지능과 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히 식민지 시대의 인종차별과 위계질서 그리고 머나먼 땅과 그 주민들에 대한 제국의 통치를 정당화하기에 적합한 믿음이었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결정론적 사고로 말미암아 지리와 환경에 대한 암묵적인 편견들은 결국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지리가 운명일 뿐만 아니라 문명의 흥망성쇠, 지배적인 세계 질서, 지정학적 미래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잘못된 가정이 그런 편견에서 싹튼 것이다. 세계에 대한 이 본질주의적 해석에서는 지리가 우선시되고 지도가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인간과 지리의 관계는 상호 영향을 주는 관계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세계를 형성하는 힘이 있다. 이를테면 북해를 간척해 네덜란드의 국경을 바꾸거나 아마존 열대우림을 벌채해 광활한 농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생하게 드러나듯이 인간에게는 새로운 지형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 핵무기와 드론처럼 신기술을 발명해 과거 전략적으로 중요시되었던 지역을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기후 변화에도 큰 힘을 끼쳐 육상 및 해양 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 트럼프의 국경 장벽, 영국 북부의 하드리아누스 방벽, 중국의 만리장성 등 무엇이든 간에 이런 대단한 공학적 업적과 노력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안전한 방어선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거대한 장벽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 다양하고 활기찬 국경 문화가 싹트기도 한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는 현재의 시리아와 루마니아 출신 이주민들이 한때 브리타니아였던 땅의 북쪽 국경을 지켰으며, 중국은 만리장성 너머에서 온 여러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국경은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만큼이나 끌어당기기도 하며, 안전보다는 불안의 기념비로 전락하기 일수다. 국경과 장벽은 그것들을 둘러싼 신화와는 반대로 정체보다는 이동을 상징한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완벽하지 않았으며(심지어 건설 직후에 버려졌다가 다시 점령되기도 했다), 트럼프의 장벽은 마약이나 이민 자의 흐름을 막는 데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높아질수록 미국인들의 두려움은 더욱 고조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이민자들의 시도는 더욱 절실해진다. 타인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국경에서 멈춘다면 아무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망가뜨리고 있을 뿐이다
-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한 대륙의 구분은 19세기 내내 유럽 전역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실상 우랄산맥의 크기는 대륙을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여러 단점이 있지만 그 첫 번째는 일부 지역에서는 우랄산맥이 다소 낮다는 사실이었다. 우랄산맥은 대륙을 나누는 산맥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높이가 아니었다. 실제로 16세기 후반에 동쪽으로 진군하던 코사크 병사들이 강을 건널 배를 끌고 우랄산맥의 산둥성이를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을 막아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산맥이 남단에 이르러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우랄산맥의 높이가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사라진다는 사실은 이 산맥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경계라는 단호한 주장도 힘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물리적인 지형의 부족함을 보완할 방책으로 국경선을 복잡하게 확장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스트랄렌베리의 경로를 약간 수정하면서 타티시체프의 승인까지 받은 방법은 우랄산맥의 남단에서부터 우랄강을 따라 이어지도록 국경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강은 결국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고 이 지점에서 경계선은 남서쪽으로 방향으로 틀어 코카서스의 육지 경계선으로 되돌아간다. 대륙 구분선은 코카서스를 가로질러 아조우해와 흑해로 이어지면서 뒤르키에를 확실하게 아시아에 포함시키고 마침내 지중해에서 끝을 맺는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인에게 익숙했던 대륙 구분선으로 회귀한다. 이 혁신적인 지도의 주된 문제는 우랄산맥과 코카서스산맥 사이에 765킬로미터라는 골치 아픈 간격이 있으며 변변찮은 우랄강이 그 간격을 일부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수많은 도감과 지도에 나타나는 대륙 구분선은 명확해서 그 구분선을 따라가다보면 우랄산맥이 점점 낮아지고 우랄강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한 의구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로써 18세기 중반부터 우랄산맥은 적어도 지도에서는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지배적인 지리상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 과장된 표현이 담긴 지도 제작법은 16세기부터 유럽 제국이 전세계에 행사하기 시작한 지배력과 통제력을 반영한 것이었고 실제로 그것을 실현시켰다. 지도 제작자와 탐험가를 동반한 제국의 부상을 통해 유럽은 대륙 구도에서 동급 최강의 지위에 올랐다. 유럽을 세계의 상단에 위치시키는 것은 또한 '문명화된(선진의)' 북쪽을 당시 식민지화와 착취가 판을 치던 '미개한(후진의)' 남쪽보다 우위에 놓는 사악한 위계 구도와 맞아떨어졌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이런 시각이 전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유럽의 우월성이 자연의 순리라는 개념을 더욱 확산시켰다 어쩌면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진보적이라는 유럽의 자아는 다른 대륙과 비교해야만 정의될 수 있었다. 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일본까지 이르는 방대하고 이질적인 지형의 풍경과 민족의 풍부함 그리고 다양성은 조잡한 복합체로 격하되어 단순히 '아시안'이라고 문화적으로 정의되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북부의 반유목민인 마사이족과 오늘날의 이집트와 수단을 이루는 수천 년의 나일강 정착 문화가 '아프리칸'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듯이 말이다. 대륙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짐에 따라 상상 속의 '동양'이나 '아프리카'의 문화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으나 그런 문화가 그곳에 존재할 리 없었다.
- 현대 세계가 경계선에 집착하는 현상 또한 놀랍게도 최근에 와서야 생긴 것이다. 역사학자 조던 브랜치Jorodan Branch 같은 학자들은 16세기와 유럽 식민 강대국들이 신세계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지리적 경계선으로 깔끔하게 구분된 배타적이고 동질적인 영토를 가진 국가들의 기원을 연구했다. 세계를 선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기는 1490년대에 이르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였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새롭게 재발견된 지도제작 기법과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위도와 경도 체계가 처음 등장한 때와 일치한다. 신세계의 영토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임의적인 선을 그은 대표적인 사례는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그어진 선의 서쪽과 동쪽에서 새로 발견된 모든 영토를 각각 할당받았다. '역사상 최초로 추상적 .기하학적 체계가 방대한 전 세계의 지배 영역을 정의하는 데 사용된' 것이다. 유럽인은 영토 소유권이 없는 신세계의 공간을 분할하고 할당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을 때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 기법을 이용했다. 훗날 미국이 내외부의 경계선을 직선으로 정한 것 또한 이런 기법을 따라한 것이다.
-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유산이 의미하는 것은 분리가 아니라 접촉과 이동, 만남이다. 방벽은 제국 최고의 설계자와 건축가를 끌어당기는 자석이었고, 이들의 기술과 장인 정신은 오늘날에도 영국 북부에 생생히 살아있다. 군사와 문화의 복합체인 방벽이 그 양편에 사회를 창조하고 이들의 세계를 연결하며 이동의 흐름을 조절했다. 그러나 기원후 410년 로마 군대가 영국을 떠났을 때 방벽 주변의 융성했던 공동체들의 이야기는 방벽이 분리와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신화에 가려져 버렸다. 방벽에 숨겨진 비밀의 일부는 영원히 베일에 싸여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길다스와 베다가 설명했듯이 방어용이었다는 주장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다음 여러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주권과 국가의 현대 신화가 낳은.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해할 수도 없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진정한 유산은 난공불락이라는 점이 아니라 그것이 경계선이란 새로운 정체성을 시험하는 혹독한 장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영국의 정치인과 일부 언론에서는 현대 이주민이나 동부 유럽과 중동의 난민을 악의 근원으로 묘사했으나 한때 브리타니아의 경계선을 순찰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이들의 조상이었다. 방벽은 공동체 사이의 지식과 문화적 가치가 교류되도록 자극했고 영국제도 전역의 정착 패턴을 바꾸고, 건축과 조경의 설계를 변경하고, 오늘날에도 건재한 공동의 유산을 남겼다.
- 만리장성의 진실 우리의 지리적 상상력에 사로잡힌 거대 성벽은 하드리아누스 방벽만이 아니다. 만리장성을 둘러싼 신화들은, 기원전 220년경 북부 중국에 산재한 토루 요새들을 연결한 최초의 사례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가장 끈질기면서도 유명한 주장은 "우주에서 맨눈으로 불 수 있는 인공물은 만리장성뿐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얼토당토않는 소리지만 이 주장에서 우리는 장벽의 이미지에 가려 그것의 물리적인 실체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 지도인 중국 북서부의 남송 지도에도 중국의 북쪽 국경을 가로지르는 벽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도가 제작될 당시 존재했던 실제 구조물을 재현한 모습이 아니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진나라(기원전 21~206)의 만리장성에 대해 문화적으로 기억한 흔적이었다. 이 지도야말로 실제 구조를 휠씬 뛰어넘는 광대한 시공간에 걸쳐 온전하게 보존되고 이상화된 만리장성이 매력적으로 여겨졌다는 역사적인 사례이다.
- 한나라부터 명나라까지 왕조가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거의 혹은 전혀 장벽을 건설하지 않은 긴 기간이 있었다. 진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끊김 없이 이어진 만리장성의 모습은 사실상 오랜 세월에 걸친 추측과 상상의 산물이다. 만리장성은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마찬가지로, 지역 부족들이 국경을 따라 주둔하는 중국군과 거래하고 심지어 담합해서 북방 대초원의 말, 금속, 비단, 식량. 면화, 기타 사치품을 사고파는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1571년 명나라는 마침내 국경에 공식 교역소를 설립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국경을 공식적인 만남과 연결의 장소로 만들었다. 청나라는 만리장성 북쪽의 만주를 역사적 본거지로 삼은 만주족이 1644년에 세운 국가다. 제국주의의 마지막 왕조로서 1912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 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린 이후에는 만리장성의 전략적 기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청나라 건국과 거의 동시에 장성의 전통적인 동쪽 종단인 산하이관에서부터 만주 국경을 따라 동쪽으로 장벽을 연장하기 시작했다. 청대의 이 장벽은 주로 흙으로 제방을 쌍고 버드나무를 빽빽하게 배치해서 건설되었고 일부 구간은 기존 명나라 시대에 건설한 장벽의 동쪽구간과 중복되었다. 만리장성의 정치적인 방향이 역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다. 명대에는 한족을 위해 만주족의 진입을 막고자 건설되었던 장벽이 이제는 몽골은 물론이고 한족이 만주로 진출하는 것을 제한한 셈이다. 또 다른 종단인 중국 북서부에서 만리장성은 오랫동안 이중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한대에는 국경 지역을 보호하는 한편 고대 비단길(중국과 남아시아. 페르시아.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동아프리카와 남유럽까지 연결되는 무역로의 네트위크)을 따라 무역 환동과 문화 소통의 안전과 개방성을 보장할 목적으로 하서주랑과 나란히 장벽의 성벽과 요새복합체가 건설되었다. 장벽은 교류를 제한하기보다는 오히려 활성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국경을 단순히 고정적이고 난공불락이며 방어적인 선이라고 해석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비단, 발효된 생선 소스인 가룹, 말, 정보 등을 거래할 때 국경은 난공불락의 장벽인 동시에 무언가를 끌어들이는 지점이자 소통의 체계였다. 국경은 접근 금지의 장소이자 매혹의 장소이며. 권위의 표식이자 불안, 불안정. 불법의 근원이 된다. 모든 국경은 모순적이고 상충적이다. 트럼프가 1기 임기가 끝날 무렵 텍사스국경을 방문하며 아리송하게 "우리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100퍼센트 주었으니 이제 여러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말이다. 트럼프가 그날 엘파소-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그 분홍색 시소를 탔다는 기록은 없다. 혹시라도 그랬다면 그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 '크고 아름다운 장벽'이 그 소망을 이뤄줬는지 궁금해했을지도 모르겠다
- 더 최근의 국가 영웅들을 보더라도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키기기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국회의사당 맞은편의 광장에는 전쟁 중에 총리로서 수행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윈스턴 처칠의 인상적인 동상이 서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영국에서, 전시에 영국을 이끌었던 그의 화려한 언변과 불굴의 리더십은 동시에 대영제국의 인종 차별적인 위계질서를 열렬히 옹호했던 그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국가적 영웅과 황금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이렇듯 기억과 망각을 동시에 요구한다. 오늘날 우리가 기리는 과거의 영웅들은 현대의 국가나 국가와 관련된 가치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는 국가와 국가의 상징, 그리고 국가의 영웅이 의외로 근대에 와서 등장한 현상일 뿐만 아니라 복잡하고, 상충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오로지 국가와 국가 정체성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제 국가와 국가 정체성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 인류 역사 전체에서, 국가는 여전히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며, 외국에서 데려온 군주. 전직 국가 안보 요원, 리얼리티 TV 스타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쉽게 재구성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런 엘리트들은 모두 국가의 힘. 안보와 정체성에 국가가 행사하는 매력, 그리고 국가라는 개념이 사람들을 동원하는 데 어떻게 쓰이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수를 희생해 권력과 부,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엘리트층의 의도가 감춰져 있다 국가는 종교와 비슷한 영원성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계몽주의 시대에 기술 및 과학에 대한 믿음이 커짐에 따라 국가라는 개념이 확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프랑스에서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가 혁명이 일어난 때였고 당대의 지배적인 위계질서와 종교적 신념, 신성한 질서가 뒤집어진 것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개념 역시 엄청난 희생을 수반했던 과거의 정체성을 주장했던 운명과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될까?
- 세계에서 가장 세계화되고 연결된 국가로 손꼽히는 영국에서 '통제권을 되찾자'는 의제는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주권의 신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불가능한 일을 약속했다. 주권의 망상에 사로잡힌 브렉시트의 설계자들이 간과한 것은, 국가 주권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을뿐더러 제국에서 군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주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종교적 권위의 지배력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경쟁 세력과 공존해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국경을 초월한 이해관계, 자본 시장과 국제 금융의 변동성, 강력한 동맹국과 적국의 변덕, 초국가적 기관의 부상, 그리고 심지어 초국가적 범죄 네트워크의 활동 등 세계화의 현대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국가 주권은 점점 약화되고 재구성된다 절대 주권은 언제나 어느 한 국가의 통제권을 넘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비르 타월의 황량한 사막, 남극의 펭권 무리 온라인 커뮤니티, 몰타 주권 기사단의 생체인식 여권, 브렉시트의 지난한 과정 등 주권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사례는 제각기 21세기에 세계를 상상하고, 통치하고, 조직하는 지배적인 방식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한다 우리가 이미 제국과 최고 통치자의 신성함과 같은 개념을 제거했듯이 언젠가 우리가 지금 인식하는 주권이라는 개념을 상상 속에서 몰아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주권' 국가를 구분하는 장벽을 허물 수 있다면, 더 공정하고 지속가능하며 평등하게 세상을 조직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남극의 펭권들은 이미 우리 시대보다 앞서 탈 주권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권이라는 정교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우리의 생생한 지리적 상상력이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 GDP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경제와 그 성장을 정의하고 측정하려는 공동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GDP는 1930년대에 사이먼 쿠즈네츠가 고안한 개념이다. 벨라루스 출신의 망명자인 쿠즈네츠는 그가 일했던 미국 상무부로부터 일련의 국민 소득계정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42년에 이르러서야 연간 GDP 추정치가 처음 발표되었다. 쿠즈네츠는 원래의 공식을 만들면서 어떤 해로운 활동도 계산에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법 활동, 사회적으로 해로운 산업. 그리고 대부분의 정부 지출은 제외시킬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쿠즈네츠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경제 발전을 판단하는 계산에 모든 경제 활동이 포함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이런 활동에는 범죄 수익을 합법적인 것처럼 꾸미는 런던 은행의 돈세탁 과정, 부당 이득으로 취한 돈으로 사치품을 구매하는 소수 지배충의 과소비, 경찰, 변호사, 범죄자를 수용하는 교도소와 관련된 지출 둥이 포함된다. GDP 측면에서 보면 범죄 또한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셈이다.
- GDP수치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항상 부정확하다는 점이다 설문조사와 추정치는 수십 년 동안 더욱 정교해졌지만, 경제 또한 서비스 의존도와 복잡성, 글로벌화, 상호 연결성이 높아졌다. 자동차 회사든 기술 회사든 상관없이 GDP로는 개별 경제에 대한 다국적 기업의 기여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럽다. 한 기업이 한 국가에 본사를 둔 채로 제2의 국가에서 부품을 제조하고, 제3의 국가에서 조립하고. 제4의 국가에서 판매하고, 제5의 국가에서 세금을 납부한다면 이 일련의 활동을 어느 국가의 GDP에 귀속시켜야 할 것인가?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기업의 경우, 현행 GDP 수치로는 디지털 서비스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인터넷 현상은 GDP 측면에서 수십억, 수백억 달러의 가치가 있지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인류 지식의 총람인) 위키피디아의 가치는 정확히 제로로 평가된다.
- 부동항 이론이 직면한 또 다른 난처한 사실은 러시아가 여러 차레 해군 기지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은 헬싱키 바로 외곽에 위치한 포르크칼라 기지를 핀란드로부터 임대했으나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임대 만료 기간 전에 반환되었다. 현재 이 기지는 핀란드 해군 기지로 쓰이고 있다. 극동 지역에서 스탈린은 또한 1950년 부동항인 포트 아서를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중국에 반환했다. 좀 더 최근 들어 2002년에는, 소련 시절에 확장 사업을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던 베트남 캄란만 기지의 임대 연장 권리를 푸틴이 직접 포기한 바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기지의 경제적.군사적.정치적 유지 비용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예로 1867년 러시아 제국이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미국에 매각했던 것처럼) 주기적으로 바다에 대한 접근권을 포기하는 이런 습관적인 행태는 러시아 팽창주의를 분석할 때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러시아 영토에 부동항으로 이용할 후보지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왠만해서 거론되지 않는다. 북극해에 위치한 무르만스크시와 무르만 해안은 (서유럽과 북유럽의 해안선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물살이 빠른 대서양 난류인 맥시코 만류 덕분에 일년 내내 얼음이 얼지 않는다.
-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지리적 결정론이 아니라 푸틴의 운명에 달려 있다. 이 전쟁은 러시아가 강대국이라는 푸틴의 허황된 주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앞으로 몇 세대 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다. 푸틴의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유럽과의 무역과 영향력을 잃는 대신 중국의 하위 파트너라는 지위를 얻었다 이 새로운 러시아에서 푸틴과 나머지 엘리트충이 동서쪽의 정치적 군사적.경제적 강대국에 좀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자국의 현주소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레반시즘적 공격. 그리고 푸틴주의의 숨 막히는 억압과 도둑정치(관료와 정치인 등의 지배 계급이 국민의 자금을 횡령하고 개인의 부와 권력을 늘리고 부패한 정치 체제 ㅡ 옮긴이)로부터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칼을 들고 목숨을 바쳤다. 또한 푸틴의 레반시즘은 서방 세계가 공통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웅하도록 자극했다. 트럼프주의와 국가적 포풀리즘의 망령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푸틴은 침공을 결정하는 순간 대서양 양단의 공동체를 하나로 집결시키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다.
- 20세기 초 매킨더는 대륙 철도 시스템이 상품과 자원, 병력을 수송할 때 더 효율적이라는 점이 영국의 해상 패권에 즉각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철도에서 해상으로. 그리고 다시 철도에서 해상으로 물자와 사람을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철도가 독일, 러시아, 심지어 중국을 통제하는 제국주의 일본과 같은 국가들에게 광대한 대륙 자원에 대한 접근을 열어줄 것을 우려했다. 매킨더는 또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자원이 풍부한 유라시아 내륙을 통제하는 강대국이 유라시아 '심장부'의 발전과 확장을 감독하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결국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는 오늘날 신실크로드를 해석할 때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매우 단순한 지정학적 은유다. 매킨더는 심지어 '오늘날의 권력 정치를 미리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 찬사까지 받았다. 그의 연구는 지금껏 지리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짐작건대 '오늘날의 전략가들이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 러시아와의 협력, 아프리카를 향한 외교적 .경제적 진출. 해양 세력의 확대에 내포된 전략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차이나 데일FL같은 중국의 공식 매체조차도 신실크로드(그리고 지역을 초월한 육상-해상 연결체의 탄생)가 "매킨더의 획기적인 연구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중대한 지리적 발견"이라고 단언했다.
- 한 세기 전 매킨더가 제시한 지정학적 논리는 중국의 신실크로드를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여전히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 논리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다. 매킨더는 철도 및 선박을 오가며 화물을 하역하는 과정의 비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해운업의 혁신과 물류 비용이 철도보다 훨씬 저렴한 컨테이너 수송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또 세계적인 제국이 아닌 민족국가의 세계가 출현할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했다. 부활한 그의 예언은 유라시아 지정학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하기는커녕 오히려 유라시아 지정학의 복잡성을 은근슬쩍 가리는 데 도움을 줬다. 매킨더의 분석은 신실크로드가 오로지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주도하는 지정학적 책략이라는 데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 전략이 중국 경제의 핵심적인 약점들에 대한 대응책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놓치고 있다
- 매킨더의 분석에 반론을 제기하자면 중국이 신실크로드와 관련된 메가톤급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것은 중국 경제의 둔화를 시급하게 해결하기 위한 대웅책이다. 경제 성장이 둔화함에 따라 지난 수십년 동안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유리, 석탄, 조선, 태양 전지판을 포함해 산업과 자본 그리고 노동의 수요가 감소하고 재정 흑자의 폭이 줄어들었다. 한 주장에 따르면, 중국은 신실크로드를 건설함으로써 그들의 시장, 자원, 기업이 있는 새로운 지역들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 그 과잉 생산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실크로드는 지난 50년간 전개된 한 전략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중국이 동부해안의 거대 도시들의 도시화와 성장, 그 뒤를 이어 내륙 개발을 위해 채택한 전략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신실크로드는 확연한 경기 침체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중국의 연간 GDP 성장률은 해마다 변동은 있었어도 평균 10퍼센트를 웃돌았다. 그러나 2010년부터 2021년 코로나로 인한 경제 반등이 있을 때까지 성장률은 매년 하락했다. 2022년과 2023년의 성장률은 각각 3퍼센트와 5.2퍼센트였다. 다른 주요 경제국에 비하면 그래도 인상적이지만 1990~2000년대의 한창때에 비하면 상당히 둔화한 수치다.
- 냉엄한 현실은 오늘날의 신화를 돌아보게 만든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재앙은 지리적 신화의 오류를 드러냈다. 즉 가장 민족주의적이고 주권을 강조하며 국경을 강화하는 지도자들이 실상 가장 무능한 관리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자 시진핑은 의사와 의료진의 입을 막음으로써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보리스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의 초기 대웅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들이 '통제권을 되찾자'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풍차를 향해 달려가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수백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자신들만의 고립과 예외를 강조하는 현란한 신화나 GDP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스스로 만든 암울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실패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