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배신

etc 2020. 1. 10. 12:36

- 죽어도 될 만큼 늙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더 오래 살기 위해 고통스럽고 성가시고 지루한 그 어던 일도 자초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잘 먹는다. 맛이 좋고 가급적 오랫동안 배고프지 않을 식품들, 예를 들어 단백질, 섬유질, 지방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나는 운동도 한다 더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의료에 관해서라면, 응급시에는 도움을 구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감지할 수 없는 건강상 문제들을 찾는 데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또한 이상적으로는 죽어도 될 만큼 나이 든 시점이 언제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당사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결정은 의료가 가져다주는 혜택이 있다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시점부터 남은 시간을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에 관한 판단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 나는 예방의료를 거부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의료화된 죽음이라는 고문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의료화된 삶을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 나의 결심은 나이가 들 수록 더 단호해진다.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듦에 따라 매월, 매일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창문없는 대기실이나 삭막한 검사실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됐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취이며, 그것이 가져다주는 자유는 축하할 가치가 있다.
- 양성 모두에게 시행되는 연례 건강검진의 증거기반은 이미 40여년 전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15년에는 한 의사가 "근본적으로 무가치하다"라고 쓸 정도. 이들 검진은 허위 양성판정에 따른 불필요한 검사나 심지어 수술로 이어질 수도 있음. 또 이와 반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그릇된 확신을 심어줄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검진 당시에는 전혀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이후 몇 달 안에 치명적 암으로 발전 가능.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많은 의사들을 단념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연례 건강검진은 공허한 의례인지도 모른다'라는 기사에서 인용한 내과의도 마찬가지였다.
컬럼비아 의대 내과의이자 의학사 연구자인 배런 러너 박사는 환자들에게 매년 검진을 받으러 오라고 말한다. 연례 검진 때 그는 환자들의 심장과 폐에 대하 청진, 직장검사, 림프절 체크, 복부촉진을 하며, 여성환자의 경우 유방검진도 한다. 그는 그러한 조치들에 대해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배웠어요. 환자들도 그렇게 하리라 예상하도록 길들여져 있죠."
- 의대에서는 때로 시신기증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작은 의례와 함께 그 과정을 인간화하려고 노력하지만, 해부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관습을 거스르는 일이다. 어느 생명윤리학자가 말한 것처럼...
해부실의 기능 중 하나는 의사들에게 다른 사회적 상황에서는 적용되는 사회규범을 위반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임상 실무에 필요한 기술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사체를 절단하는 일에 무심해진 의대생들은 훗날 임상의가 되어 환자들의 몸에 있는 다양한 구멍에 자신의 손과 의료기구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될 것이고, 환자들에게 가장 부끄러운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가장 취약한 자세로 맨몸을 드러내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직원 웰니스는 자본주의 대기업의 전통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은 역사적으로 직원의 건강에 해로운 근무조직을 제공해 온 것으로 유명. 모든 노동자들이 살인적 업무량과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위험물질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 사이에 기업들은 개인의 건강을 증진시킴으로써 직원 건강보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는 오늘날 기업 웰니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60억불에 달하는 산업으로 이어졌다.
- ADD와 ADHD는 이제 소아과에서 천식 다음으로 가장 흔하게 진단하는 증상이 됨. 하지만 실제 역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 때문에 생긴 유행병이다. 21세기의 처음 10년간 제약회사들은 에더롤과 리탈린 같은 각성제를 ADD와 ADHD 치료제로 판매하기 시작. 부모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직접적 타겟으로 삼음. 한 광고에서는 시험에서 B+를 받은 어린 아들을 껴안고 있는 엄마와 함께 이런 문구를 실었따. "결국 학교 성적은 아이의 지능과 일치합니다." 다른 광고에서는 괴물복장을 한 아이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미소짓는 금발소년으로 변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안에 위대한 아이가 있어요. 이 아이를 도울 새로운 방법이 생겼어요." 이 약들이 성적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가 있든 없든 간에, 부유한 부모들은 ADD나 ADHD 진단 자체가 시험에서 추가시간을 부여받을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명문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에서 작지만 결정적 이점이 될 수 있었다.
- 오늘날 부티나고 세속화된 마음챙김은 실리콘밸리와 실리콘밸리를 특징짓는 산업을 넘어 펴져나가, 한때 긍정적 사고가 그러했듯이 무감각해질 정도로 흔한 언어적 풍경이 되고 있다. 이전의 보다 고된 방식의 불교수행이 리처드 기어 이외에는 유명인사를 별로 끌어들이지 못한 반면, 마음챙김은 수많은 현역 유명인사들이 참여를 자랑한다. 거기에는 아리아나 허핑턴, 귀네스 펠트로, 앤더슨 쿠퍼 등이 포함됨. 마음챙김은 13년 다보스포럼에서 수많은 청중들 앞에 처음으로 등장. 또한 위즈덤 2.0 콘퍼런스는 샌프란시스코뿐 아니라 뉴욕과 더블린 등지에서도 열렸고, 참가자들은 종종 새로운 사고방식의 전도사가 되어 자신만의 코칭 비즈니스를 시작하거나 새로운 앱을 개발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위즈덤 2.0 콘퍼런스 때는 스타벅스와 패션 브랜드 아일린 피셔의 대표들, 그리고 구글과 페이스북의 낯익은 인사들이 강연하는 모습을 홍보. 한편 애트나 건강보험은 직원 3만 4천명에게 12주가지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를 모든 고객들에게까지 확대하고 싶어한다. 고객들의 마음을 맑게 만들면 그들이 좀 더 건강해지리라는 기대 때문. 19세기에 설립된 식품회사 제너럴밀즈도 자사 빌딩마다 명상실을 설치. 그리고 7주간의 명상코스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는 걸 알게 됨
참가자들의 83%가 "나의 개인 생산성을 최적화하기 위해 매일 시간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명상코스 참가 전의 23%보다 높은 수치다. 82%는 이제 틈틈이 생산가치가 낮은 과업을 제거해 나가고 있다고 답했다. 이 역사 교육 참가 전의 32%보다 높다
- 하지만 여타 비즈니스 세계에서 마음챙김에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만든 것은 분명 실리콘밸리였다. 만약 그것이 제너럴 밀즈에서 처음 뿌리내렸다면 구글이나 페이스북에서 얻은 것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너럴밀즈가 취급하는 제과류는 디지털 기기가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아 명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 어쨌든 실리콘밸리는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 최고 두뇌들의 본거지이자 전 세계 혁신의 중심지이며, 금융위기 이후 잠시 주춤해진 월스트리트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다. 마음챙김의 뿌리는 고대 종교에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확립해준 것은 바로 실리콘밸리의 승인이었다.
- 명상이 특별히 건강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없다. 특히 디지털 기기로 경험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이는 정부 지원을 받아 대규모로 진행된 기존 연구들에 대한 메타분석을 통해 확인됨. 14년 발표된 분석결과에 따르면, 명상 프로그램은 스트레스 관련 증상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근육 이완, 약물 치료, 심리치료와 같은 다른 치료법보다 더 효과적이지는 않다고 밝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이 연구를 무시할 만한 명분은 없다. 그래서 말인데, 명상에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한 시간 동안 온전히 수학문제를 풀거나 친구들과 와인한잔을 마실 때도 마찬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하루 몇 시간 동안 어린아이들이나 아기들과 시간을 보내라. 이를 통해 누구든 손쉽게 그 아이들의 또 다른 우주 속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마음챙김 수련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 기여했던 유일한 요소는 신경사소성이란 개념인데, 이는 마음이 근육이라는 은유를 만들어냈고, 이는 다시 마음챙김이 피트니스 트레이닝의 한 형태라는 은유를 낳음. 마음은 몸과 마찬가지로 통제될 수 있다. 이는 회사 명상실 같은 특별한 장소에서 행하는 수련을 통해서 이루어짐. 차드 멍 탄은 명상살을 회사에 마련된 체력단련실과 다른, 이상한 곳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형이상학적인 의문점이 있다. 즉 누가 주체인가? 신체적 운동의 경우,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비물질적인 본질로 여겨지는 마음(나 혹은 우리가 있는 곳) 간의 이원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마음도 하나의 물질로 격하된다면, 이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는 의식적 동인으로 여겨지는 마음으로 마음 자체를 통제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역설 중 하나다. 영국의 유명한 마음챙김 연구자이며 지지자인 루비 왁스가 한 발언은 그 문제를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의 뇌는 뇌에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게 난감한 점입니다. 다리에 발진이 생기면 아래를 내려다보며 발진을 확인 가능.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뇌를 평가할 여분의 뇌를 갖고 있지는 않다. 뇌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늘 가장 늦게 알게 된다.
- 지난 수십년 동안 모든 인종의 노동자 계층 상황이 안 좋아졌다. 나는 튼튼한 허리를 가진 남성, 더욱 이상적으로는 튼튼한 노조의 지원을 받는 남성이라면 대학 졸업장 없이도 혼자 힘으로 무난히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떤 미국에서 자랐따. 2015년 무렵 이런 직업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소매, 조경, 배달트럭 운전 같이 과거에는 여성들과 유색인종이나 하는 것으로 취급받던 일들만 남았다. 이는 백인들 가운데 소득분포 하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흑인들이 오랫동안 익숙하게 경험한 것과 비슷한 물질적 상황에 처하게 됨을 의미. 거기에는 불규칙한 고용과 복잡하고 위험한 생활 공간이 포함되어 있다. 내 일가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담보대출금 상환을 위한 돈을 빌리려 할 때,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 주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다른 두가족과 공유하고 있는 트레일러하우스였다. 가난한 백인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들보다 못살고 멸시받는다는 것을 아는 데서 늘 위안을 얻었다. 자신들의 상황이 나빠질 때조차도 인종적 지배는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땅이었고, 그들이 의지하는 토대였다. 그 미약한 안도감이 흔들리고 있었다.
- 만일 몸이 통일된 전체로서 작동하길 원한다면, 몸을 우리의 의식적 통제아래에 두기가 충분히 쉬워야 한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일체감 즉 전체성을 향한 이 자연스러운 욕구를 마음을 이용해 북돋우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명상, 요가, 신중하게 절제된 식단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는 결국 웰니스로 이어진다. 웰니스와 전체성 개염은 70년대에 처음으로 파출리 향기아 함께 미국문화에 퍼지기 시작. 그런 까닭에 히피들의 허튼 짓거리와 같은 일탈로 폄하되기도 했음. 건강 관련 문제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은 과학적 환원주의였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해부와 현미경 관찰, 그리고 생체조직을 세포보다 작은 조각으로 분류하는 기술을 이용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각 부분들간의 상호 연결, 그리고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고 여겨지는 전체에 초점이 맞추어짐. 우주 전체를 우리 각각을 포함하는, 혹은 최소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포함하는 단일 실체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관점은 따분한 수학중심적 과학보다 동양의 신비주의와 최근의 환각적 마약문화와 더 잘 맞는 것 같다. 반문화주의의 역사가인 시어도어 로샤크에 따르면, 히피 혹은 꽃의 아이들은 다름 아닌 과학적 세계관의 전복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반문화를 통제라는 개념과 정반대되는 느긋한 철학 정도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체론은 통제(마음이 몸에 대해 실행하는 통제)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 환원주의적 체계에서 몸과 마음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 둘이 동일선상에 함께 놓일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했다. 그러나 전체론 관점에서 몸과 마음은 이어져 있으며, 심신이라는 거의 단일한 (그리고 의식적 노력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실체를 구성한다. 심신의 연결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통합적이고 전체론적 건강, 치유, 그리고 변화' 라는 책 속에 나온 구절만큼 우스꽝스럽게 설명한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음이 부정적 환상으로 가득 차면, 불안감과 우울증을 일으키는 신경전달물질이 생성된다. 게다가 변연계는 반복되는 부정적 피드백 순환고리에 빠져 편도체가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 반응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이는 개인의 과거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신체적 변화를 일으키고, 이는 더 많은 불안과 부정적 환상을 만들어 내고, 이는 다시 편도체에 영향을 미친다.
- 19세기 이후 대식세포는 종양 부위에 모여든다고 알려졌고, 피르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상처나 감염부위에 백혈구가 모인다는 점에서 볼 때 암이란 염증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추측. 혹은 보다 낙관적으로는, 대식세포가 종양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로 모여드는 걸 상상했을지도 모름.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대식세포가 종양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며 암세포가 계속해서 미친 듯이 증식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일 밝혀짐. 그들은 죽음의 편에 선 치어리더였다.
- 대식세포가 암과 결탁한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대식세포는 암세포에 화학적 성장인자를 제공하고, 종양이 자라는 데 필요한 새로운 혈관의 생성을 도움. 그들은 암의 치명적 발달과 너무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종양 덩어리의 50%까지 차지할 수 있음. 또 대식세포는 암이 가장 치명적인 단계, 즉 전이 단계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임. 따라서 암에 걸린 쥐의 대식세포를 모두 제거하면, 종양의 전이가 중단된다.
- 암과의 공모만으로도 대식세포에게서 착한 녀석이라는 자격을 박탈하기에 충분. 하지만 대식세포가 하는 나쁜 짓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드름에서 관절염에 이르기까지 많은 병리적(혹은 적어도 성가신) 문제들은 염증 때문에 일어남. 염증에는 다양한 백혈구가 관여하는데, 이때 또다시 대식세포가 앞장선다. 예를 들어 여드름은 보통 박테리아 감염 때문인 것으로 여겨짐. 그리하여 파이소헥스라는 살균 클렌저 제조사들은 그들의 제품이 "여드름과 뾰루지를 유발하는 박테리아, 오물, 기름기와 싸울 것"이라고 광고. 하지만 현재는 이 보기 싫은 분출물들이 박테리아라는 용의자가 없는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음. 한편 우리는 인생 후반기에 겪는 관절염과 당뇨병에 관여하는 대식세포를 알게 됐고, 살아 있는 뼈를 갉아먹어 골다공증을 유발하는 대식세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면역세포가 발견되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곳이 있다면 바로 심장으로 가는 혈관. 수년 동안 혈관이 좁아지면서 발생할 수 있는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같은 질환들은 혈관벽에 쌓인 지방 침착물로 인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따라서 심장건강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식단에서 최소한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하버드 의대 피터 립비에 따르면 "죽상동맥경화증은 모두 지방 및 기름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어서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 동맥들의 나쁜 콜레스테롤이 뇌졸중과 심근경색을 일으키는 염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밝힘. 립비에 따르면 이는 "우리 몸의 방어체계가 우리를 배반하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염증은 대식세포가 모여든다는 것을 의미. 15년 발표된 한 논문에서는 대식세포가 "동맥경화증의 모든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 이제는 인간질병의 원인으로서 염증을 강조하는 것이 유행처럼 됨. 예를 들어 제롬 그루프먼은 15년 뉴요커지에서 이렇게 썼다. "염증이 치매, 우울증, 자폐증, ADHD, 그리고 심지어 노화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질한들의 원인이라 믿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식단에서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공식품, 유제품, 그리고 고기를 뺀 항염증 식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이요법은 체중감소로 이어지는 좋은 일일 테지만, 이 식단이 염증성 질환을 억제한다거나 대식세포의 행동을 길들인다는 구체적 증거는 없다.
- 그 누구도 세포, 바이러스 혹은 아원자 입자가 의식이나 욕망, 인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작인 혹은 행동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조차 무모한 진술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작인을 신, 인간, 혹은 코끼리나 고래처럼 지도력이 있는 보다 큰 동물들이 아닌 다른 것에도 있는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제시카 리스킨이 '잠 못드는 시계'에서 적용했던 관대하면서도 철학적 의미로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의식과 같은 것. 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더 기초적이고, 원시적이며, 전제가 되는 속성, 작인 없이 의식적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의식적 존재가 아니면서 작인을 지닐 수는 있다."
- 작인은 "그저 세상에서 행동을 하는 능력, 미리 결정된 것도 무작위적인 것도 아닌 방식으로 일을 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말할 때, 의식이 없거나 심지어 살아 있지도 않다는 걸 아는 사물에 마치 작인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곤 한다. "차가 꿈쩍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그 차가 뭔가를 하고 싶지 않다는 걸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다. 리스킨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지금까지의 과학 (특히 17세기 중반에 발달하기 시작한 결정론적 과학)의 사명은 자연계에서 작인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번개란 신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 아니라 전하일 뿐이라 배웠다. 아메바는 자신이 원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의 화학적 변화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다. 과학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 무언가가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 하지만 작인은 인간들이나 그들의 신, 혹은 그들이 좋아하는 동물들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우주에 걸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규모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다. 과학은 리스킨의 주장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왔다. 최근 인지과학 분야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작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신의 형태로든 영혼의 형태로든 선천적으로 작인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따.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 선사시대 인류 내지 인류의 조상들은 수풀이 흔들리는 건 표범이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게 현명했을 것이다.
- 우리가 과시하는 지성과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것들의 운명에 관여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님. 당신은 열심히 운동하며 의학적으로 유행하는 식단을 꾸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난 벌에게 쏘여 죽을 수 있다. 당신은 건강한 사람으로서 귀감이 된다는 의미로 날씬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당신 몸 안의 대식세포는 초기 종양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할지도 모른다. 메치니코프는 그의 시대 이후 이를 이해해온 그 어떤 생물학자들만큼이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통적인 조화와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거부한 그는 몸 안의 갈등, 즉 체내 세포들이 공간, 먹이, 산소를 놓고 경쟁하면서 벌여 나가는 갈등에 근거한 생물학을 상정. 우리가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가져다줄 불가피한 결과, 바로 죽음을 미리 막을 수도 없다
-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다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죽는다는 목표는 말하자면 눈사태나 고산병의 개입없이 실현되기 어려울지도 모름. 실제로는 불길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고자 취하는 모든 조치들은 손상된 신체와 굴욕적 장애를 안고 더 오래 살게될 가능성으로 이어질 뿐이다.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폴라 스팬이 지적했듯, "수명 연장에 따른 대가는 인생 말련에 높은 비율로 장애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 노화에 관여하는 모든 화학적 과정들은 개별 세포 안에서 일어난다. 또한 그것들은 노화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중대한 흐름을 연상시킴. 바로 쇠락과 붕괴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계 혹은 기계의 가동부를 망가뜨리는 마모에 비유되곤 함. 다만 다른 것은 세포는 기계가 아니고, 세포의 가동부인 분자 내지 분자들의 집합체는 끊임없이 파괴와 재생을 반복한다는 사실. 세포의 기초화학 성분인 단백질은 계속해서 세포 내 소화효소에 의해 분해되며 신생 단백질에 의해 대체됨. 세포대사에 관여하는 몇몇 핵심 단백질들은 반감기가 겨우 몇 분밖에 되지 않는데, 이는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뿐 아니라 이를 바로잡을 기회도 수없이 많다는 걸 의미. 그럼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화가 진행되면 오류가 축적되어 세포의 온전함을 해치게 됨. 그리고 바로 그때 일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함. 손상된 세포는 면역세포를 유인한다. 좀더 정확하게는 손상된 세포가 면역세포를 유인하는 화학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면역세포가 와서 병든 세포를 잡아먹는다. 일부 면역세포들은 아주 지저분하게 먹으므로 잔해와 부스러기 같은 것을 남기며, 이는 결국 더 많은 면역세포를 끌어들임. 특히 대식세포는 손상된 세포에 끌린다. 사실 몸속에서 그들이 하는 주요 기능은 미생물과 싸우는 것 외에도 그와 같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세포들을 제거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세포가 손상된 부위는 염증이 생기는 부위가 된다. 이에 따라 대식세포가 많아지고, 이는 먹이를 나눠 먹으려고 하는 더 많은 대식세포를 끌어들인다. 염증이 미생물로 인해 발생한 거라면 물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되겠지만, 표적이 체내 세포거나 체내의 손상된 세포라면, (비록 서서히 진행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 2000년 이탈리아 면역학자 클라우디오 프란체스키는 유기체 전체의 노화과정을 기술하기 위해 염증성 노화라는 신조어를 제안. 노화란 개별세포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쇠퇴과정이 아니라, 확산되는 세포손상부위를 처리하기 위해 대식세포를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오늘날 프란체스키의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염증성 노화는 뭔가 기분 나쁘게도 '산화 스트레스와 염증 스트레스가 만성적으로 쌓인 것'으로 기술됨. 나이들어 겪는 대표적 질환인 죽상동맥경화, 관절염, 알츠하이머, 당뇨, 골다공증은 모두 대식세포가 한곳에 몰리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염증성 질환임. 예를 들어 죽상동맥경화가 일어날 때 대식세포는 심장으로 이어지는 혈관에 모여들어, 결국 혈관이 완전히 막힐 때까지 계속해서 지질을 먹어치움. 2형 당뇨의 경우, 대식세포는 췌장에 모여들어 그곳에서 인슐린을 생성하는 세포를 파괴함. 골다공증은 뼈에 거주하는 대식세포의 활동과 관련돼 있다. 파골세포라 불리는 이 세포는 정상적 골세포를 파괴함. 알츠하이머와 관련된 염증의 경우, 처음에는 대식세포가 알츠하이머 뇌에 끼인 베타-아밀로이드 플라크를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생기른 거라 생각되었다. (베타-아밀로이드 플라크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 표면에 형성되는 단백질 덩어리로 뇌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플라크로 인해 활성화될 수 있는 대식세포가 사실 병의 진행을 촉진시킨다는 것을 보여줌. 이들은 퇴행성 질환이 아니다. 단순히 오류와 혼란이 축적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면역체계가 몸에 대해 가하는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처럼 보인다.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아마도 더 좋은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 자아는 우리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성공적 노화라 부르는 일에 장애물이 된다. 나는 성공한 사람들이 마지막 몇 년을 어떻게 허비하는지 지켜봐 왔다. 그들은 마지막 승진을 비롯해 공로에 대한 인정을 받기 위해 다투거나, 비판자나 잠재적 비판자로부터 자신의 명성을 미친 듯이 방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현대 세계를 사는 우리가 배운 방식이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방어하려고, 애쓰다가 고통스러운 신경증에 걸리게 되면,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더 깊이 파고들라고 요구하는 형태의 치료에 기대게 된다.
-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라이오넬 트릴링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인간본성에 돌연변이 같은 것이 생겨났다"면서, 이는 역사가 예이츠가 '근대 유럽인가 미국인의 출현'이라 부른 사건의 필요조건이었다고 기술. 자아에 대한 개인의 자각이 확고해지면서 부르주아들은 거울을 샀고, 초상화를 의뢰했드며, 자서전을 썼다. 또한 복잡한 도시사회가 낳은 어수선한 생각들 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사명을 점점 중시하게 됨. 오늘날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자신 안에 또 다른 더 진정한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여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장-자크 루소가 다음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던 1780년대에만 해도 여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나는 전례 없는 일을 생각해 내고 있으며, 그 일을 수행하게 되면 그 누구도 모방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동료들에게 자연의 모든 진리 안에 있는 한 사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은 하나다 나는 나의 심장을 느끼고, 나는 이 사람을 안다. 나는 내가 알아왔던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나는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슷하지 않다고 감히 믿는다. 내가 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진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나는 다르다.
- 과대망상증 같은가? 아니면 반체제적 정치사상가의 당당한 주장 같은가? 당대의 생각은 후자로 기울었다. 루소는 프랑스 대혁명에 주요한 지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개인의 자아에 대한 루소의 주장에는 뭔가가 기운을 북돋는 면이 있긴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은 그것이 주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고, 어떤 증가가 제시되어야 할지 생각해 내기도 쉽지 않다. 역사학자 존 라이언스가 말했듯, 자아는 '발명'되었다.
- 자아는 어떻게 자아에게 인식될 수 있는가? 그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이것은 자기성찰의 피할 수 없는 역설이다. 자아는 어떻게 동시에 인식하는 자이자 인식의 내용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주체이자 객체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사랑하는 자이자 사랑받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샤르트르가 한 유명한 주장처럼 (다른 사람들은 짜증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진정한 지옥은 자아라는 감옥에 영원히 갇히는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대략 17세기에 시작된 자기인식의 발전이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멜랑콜리라는 유행병이 발생한 것과 연관돼 있으며, 그 질환이 보이는 정신상태에 대한 설명을 오늘날 우리가 우울증이라 부르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에 신경쇠약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만성 불안은 또 다른 근대적 성격의 질병으로 보인다. 우리가 사랑하며 돌보는 자아는 연약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일반적인 실험에서 환자는 마법의 버섯에 들어 있는 유효성분인 실로사이빈 1회분을 투여받고,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분위기를 갖춘 방에 누워 의사가 지켭는 가운데 몇 시간 동안 여행을 한다. 약의 효과가 사라지면, 환자는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후에도 여러 번의 후속 인터뷰에 응하게 된다. 폴란은 연구에 참여한 뉴욕대 정신과 의사가 밝힌 예비결과를 인용했다.
분명 죽음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에게서 공포가 사라졌다. 단 한 번 투여된 약물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러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전례 없는 발견이다. 정신의학 분야에서 그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환자들의 주관적 설명에 뇌 활동을 스캔해 추적한 결과를 더배보니, 약물이 자아 감각과 관련된 뇌 부위인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억제하는 것을 밝혀짐. (멍한 상태이거나 몽상에 빠졌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 이 영역에서 자아감각을 만들 뿐 아니라 자아를 과거나 미래로 투사해 후회나 불안, 두려움 같은 감정을 일어킨다고 함) 뇌에서 이 기능이 더 철저하게 억제될수록, 환자가 보고한 내용은 자연발생적 신비경험과 유사해짐. 이때 환자는 자기 소멸 내지 자아의 죽음 같은 것을 경험하며 우주와 하나가 되는 심오한 느낌이 뒤따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또한 환각 여행 혹은 신비경험이 강렬할수록 환자의 불안감이나 우울감이 더 뚜렷하게 사라진다. 말기 암에 걸린 54세의 TV 뉴스 보도 국장은 의학적으로 관리된 실로사이빈 여행 동안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 세상에나, 이제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아름답습니다.", "세균조차 아름다웠어요. 우리 세상과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 말이에요." 그는 17개월 후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사망했다. 살아 있는 우주에 관한 이러한 느낌은, 실로사이빈 경험을 한 영국 심리학자의 주관적 설명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실험연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건강했다.
어느 시점에 당신은 엄청난 생기를 띠는, 통상적인 인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현실로 옮겨 간다. ... 갑작스레 정신이 더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닿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이 뿜어 나올 수 있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며 유동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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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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