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략의 본질

경영 2022. 7. 24. 14:14

- 소련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전부 스탈린의 공으로 돌렸지 만, 주코프는 부정하였다. 주코프는 스탈린이 죽은 뒤 “작전에서 는 풋내기"였다며 그의 명성을 깎아내렸다. 현대 러시아에서도 스탈린 덕분에 승리한 것인지 스탈린의 지배 아래에서도 승리한 것인지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쟁점이다.
어느 쪽이든 히틀러보다 스탈린이 우수하였기 때문에 소 련이 승리하였다고 보는 것은 매우 안이한 생각이다. 스탈린도 히틀러도 이상을 담은 희망적인 예측을 하고 단기 결전을 실행 하였다. 게다가 전략적 철수는 거부하여 많은 장군을 희생시켰 다.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한 것은 스탈린도 히틀러도 마 찬가지다.
지도자는 자신의 권한을 계급이 낮은 자에게 넘기거나 양 보하고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만, 스탈린과 히틀러는 작전의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하여 장군들을 지치고 힘들 게 한 점도 비슷하였다. 작전이 실패하면 현지의 사령관에게 책 임을 떠넘겼다. 결단력이 뛰어난 듯 보였지만 정작 중요한 상황 에서는 망설였고 지는 횟수가 늘어나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인 것도 같았다.
최고총사령관이 가진 군사적 재능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면 무엇이 승패를 갈랐을까?
- 모스크바 
승패를 가른 열쇠 가운데 하나는 보급이다.
독일군을 저지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소련군은 각지에서 독일군에게 크고 많은 피해를 입혔다. 꾸준하게 타격을 받은 독 일군이 특기였던 전격전을 계속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전 쟁은 하나하나의 전투에서 어느 쪽이 병사와 무기를 많이 이용 할 수 있는지에 승패가 달린 소모전으로 변하는 형편이었다. 양 군의 전력 차이가 줄어든 상황에서 국내의 보급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소련군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중에서도 철도는 큰 역할을 하였다. 모스크바와 우랄 의 동쪽을 연결하는 철도가 피해를 입지 않아서 보급이 원활하 였다. 대량 수송 인프라를 통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지원군과 식량을 모스크바 최전선으로 꾸준하게 공급하였다.
- 스탈린그라드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이 역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세 가 지이다.
첫 번째로 전쟁 물자와 전투 가능한 병장의 준비가 독일군 보다 우위에 설 때까지 소련군은 참고 견디었다. 물적·인적으로 우위에 있으려면 시가전에서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도시라 고 부르기도 어려워진, 참담하게 부서진 파편 더미에 소련군이 많은 병사와 물자를 보낸 것은 이기기 위한 작전이었다.
두 번째는 전술의 변경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전까지 소련군은 도시가 포위되면 무리해서 탈출하였고 교외에서 독일군 전차에 쫓겨 포위 섬멸을 당하였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 서는 독일군의 특기였던 전격전을 막아내기 위해 보병을 중심으 로 하는 접근전을 펼쳤다.
세 번째는 군사 전문가 장군들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독소전이 시작되기 전에 소련군은 당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으 나, 이후부터는 권한의 위임으로 장군들의 지위와 명예를 회복 시키고 정력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게 하였다. 1942년 10월에 는 당으로부터 파견되어 군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정치위원의 직책도 폐지하였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참모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 방어 후에 스탈린은 참모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추격을 지시했지만 실패하였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작전의 입안은 참모본부에 맡기고 승인을 내리는 역할을 맡았다. 스탈린 자신은 부대를 감독하고 격려하며, 보급에 집중하고 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942년부 터는 작전에 관한 일이라면 측근 베리야보다 장군들과 협의하는 일이 늘었다.
스탈린과 반대로 히틀러는 전쟁 상황이 악화될수록 작전 의 세세한 부분까지 참견하였다. 참모들을 의심하고 경험과 능 력보다 충성심으로 평가하였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주변에는 예스맨만 남았고 유능한 장군들의 의욕은 사그라들었다.

- 대서양 전투는 전술로 보면 유보트와 호송선단과의 기동 전으로 펼쳐졌지만 전략으로 보면 되니츠가 지적하였듯 소모전 이었고, 소모전에서는 미국의 군수 생산 능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1943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연합국 호송선단의 우세로 상 황이 역전되고 나서 독일 유보트에 재역전의 기회는 없었다. 대 서양 전투는 시작으로부터 3년 반 후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1943년 일 년 동안 독일 해군은 243척의 유보트를 잃었는 데, 그 가운데 약 180척은 5월 이후에 잃은 것이다(표 2-6 참고). 연합군이 잃은 선박은 1942년 하반기에 575척을 넘었지만 1943 년 상반기에는 334척, 하반기에는 129척, 1944년 상반기에는 78 척으로 부쩍 줄었다(표 2-5 참고).
유보트의 작전 행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되니츠는 연 합군의 수송선을 격침하기보다 항행을 방해하는 데 중점을 두게되었다. 유보트는 비스케이만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적의 폭격 기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사실상 비스케이만 안쪽에 갇혀 있었다.
1943년 11월 유보트는 대서양 동쪽에서 철수하였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칠 동안 영국 해협에 독일군 유보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보트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 다면 상륙작전의 대가는 실제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1945년 4월 말 되니츠는 유보트를 434척 보유했는데 그 가운데 166척이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 후부터 11개월 동안 유보트가 가라앉힌 연합군 수송선은 121척 이었고, 그 가운데 북대서양 수송 경로에서 격침한 것은 13척에 불과하였다.
- 대서양 전투에서 연합국이 수송선을 잃은 원인을 살펴보 면 유보트로부터 받은 피해가 69퍼센트, 항공기에 의한 손실이 13퍼센트, 수상함과 기뢰로 인한 손해가 각각 7퍼센트, 그 외 사 고 등이 4퍼센트였다. 독일 공군으로부터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 지만 유보트로부터 받은 손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유보트의 위협을 봉쇄한 것이 대서양 전투가 가진 의미이며 대서양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처칠의 공식 전기(傳記)를 쓴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는 처칠이 낭만주의자면서도 현실주의자라고 하였다. 처칠의 낭만 주의를 뒷받침한 것은 선조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 때 부터 가계에 뿌리내린 영국의 고귀한 역사에 대한 신뢰였다. 어 렸을 때부터 배운 역사가 처칠을 지탱하여 자신의 능력과 운명 을 믿게 한 것이다. | 처칠과 루스벨트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자각한 지도자였다. 처칠은 총리에 취임했을 때를 회상하며 “나 는 운명과 함께 걷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의 모든 과거는 오직 그때의 시련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A. J. P. 테일러(Alan John Percivale Taylor)는 다음과 같은 일 화를 소개하였다. 독일의 침공이 닥쳤다고 여겨진 날 밤 처칠은 “침공과 관련하여 토의하고 싶소”라며 측근들을 불렀고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독일의 침공이 아니라 9세기 전인 1066년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침공 이야기였다.
그러한 역사의 이해와 통찰이 전쟁 형국을 꿰뚫어 보고 적의 의도, 행동, 전시 지도자로서의 언동 등에 대한 처칠의 판단력과 직관을 키워준 것은 아닐까? 처칠은 청소년기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의 『로마제국 쇠망사」와 토머스 매콜리(Thomas Macaulay)의 『영국사를 암송할 정도로 읽었다. 26세에는 3개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5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체험 과 사색으로 전투의 본질을 판단하고 구별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처칠은 전쟁의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하였고 전쟁이 악과 싸우는 정의로운 전투라고 반복하여 설득하였다. 미국 역사가 존 루카스(John Lukacs)는 처칠만큼 히틀러의 생각을 깊이 통찰하고 속속들이 파악한 지도자는 없었다고 말하였다. 처칠은 영국이 자국의 존속뿐만 아니라 세계 문명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영국 국민은 전쟁의 의미와 자신들의 긍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 처칠은 낭만주의에 치우치거나 완고한 선입견으로 결단 을 내리는 실수도 종종 저질렀다. 그리하여 처칠을 보좌하는 참 도는 처칠의 성향에 따르면서도 거리낌 없이 비판할 필요가 있 었고 처칠도 전문가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였다. 전문가의 의견 을 경청한 것이 처칠의 위대한 점일지도 모른다.  J. P. 테일러에 의하면 처칠은 극단적으로 급한 성격과 새로운 계획을 시도하려는 의욕과 굳건한 극기심을 갖추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처칠이 유보트에 대한 작전을 인정한 것은 '극기심'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처칠은 부하를 신뢰하였고 일과 권한을 위임함과 동시에, 부하들이 일하는 모습과 성과를 늘 꼼꼼하게 확인하였다.
그런 점을 뚜렷하게 보여준 전투가 영국 본토 항공전이다. 처칠은 항공전의 권한을 전면적으로 다우딩에게 넘기고 작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프랑스에 패색이 짙어졌을 때 처칠은 다 우딩의 진언에 따라 프랑스에 전투기를 파견하지 않았다. 영국 상공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도 최대한 관심을 줄이고 상황을 주시하면서 다우딩을 신뢰하였다. 항공기 생산성에 기용한 비버 브룩을 한결같이 지지한 것도 부하를 향한 신뢰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 역사가 폴 케네디(Paul Kennedy)에 따르면 대서양 전투는 중급 레벨 실무 개혁가의 공헌을 보여준 전형적 사례였다.
폴 케네디가 말하는 실무 개혁가는 유보트에 맞서기 위해 신병기 · 신기술을 개발하고 실용화하였으며 개선을 거듭하는 인 재였다. 실전에 대비하여 장병은 신병기와 신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훈련을 되풀이하였고, 실전을 통하여 전투 방식 을 바꿔 가며 신전법을 갈고 닦았다. 물론 독일 측에서도 되니츠 가 같은 방식으로 연합국 측의 신기술과 신전법에 대응하는 전 투 방법의 개혁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 실무 개혁 자의 노력에는 끝이 없었다.
유보트와의 전투에서는 에어 갭을 없앤 항공기의 공헌이 컸다. 물론 유보트에 맞서 승리한 것이 항공기의 덕분만은 아니다. 항공기 외에도 레이더, 허프더프, 울트라, 헤지호그, 코르베트함, 호위 항공모함, 오퍼레이션리서치 등 여러 요소가 맞물려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기술 혁신을 이용하여 만든 신병기를 실전에 활용 한 인물이 서부 근접 해역 사령관 맥스 호튼이다. 호튼은 충실한 훈련을 통하여 기술 혁신을 실용화하고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 도록 노력하였다. 유보트와의 전투를 연구하면서 창출해낸 지원 군이라는 조직을 확대하고 강화하였으며 신기술 허프더프나 레 이더와 조합하여 재빠르게 움직였다. 지원군은 기술 혁신으로 만들어진 고속 호위구축함을 중심으로 장거리 폭격기나 호송 항공모함과 연계하여 유보트를 격침한 것이다.

-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라고 정의하 였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시점에서 보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전쟁의 목적은 근본부터 달랐다. 게릴라전으로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 나 전쟁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 전쟁 이었지만, 베트남전쟁은 북베트남 정규군을 주체로 하여 사회주 의 혁명에 의한 통일을 목적으로 한 남부 무력 해방 전쟁이었다.
미국군에게 베트남전쟁은 '역사상 가장 복잡한 전쟁'으로 불린다. 아군인 남베트남의 무능과 정부 부패, 적군인 북베트남 정부와 군대의 강인한 의지, 훈련받은 조직의 공격과 익숙하지 않은 게릴라전, 전쟁터의 지형과 기상 등 다양한 요인이 미국군 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국군이 베트남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통찰하지 못하여 전쟁 목적을 정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베트남전쟁은 아시아의 작은 국가 북베트남이 세계 초강 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하여 승리한 전쟁이다. 디엔비엔푸 전투 가 끝나고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는 교 설을 시작하였고 1954년 7월 21일 관계국이 모여서 제네바 협 정을 맺었다. 제네바 협정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위 17도를 임시 군사 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 누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북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1956년까지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제네바 협정으로 북베트남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지 만, 1955년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의 지원에 의존한 응오딘지엠 (Ingo Dint Diem) 정권이 등장하였다.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공산 주의에 반대하고 미국과 친하게 지내고자 한 가톨릭 신자였는 데, 게네바 협정에서 정한 남북 통일 총선거를 거부하고 반공(反共) 방파제의 성격을 띤 베트남 공화국을 세웠다.
남북 통일을 거부하는 데 몹시 분개한 호찌민은 1959년 1월 13일 하노이에서 열린 제15회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확 대 총회에서 남베트남 정권을 뒤엎기 위하여 무력 해방 전쟁을 결의하였다. 다만 무력 해방 전쟁 결의는 그때까지의 평화적 정 치투쟁 노선이 크게 바뀌는 것이어서 극비에 부쳤다. |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사회 개혁보 다는 미국의 원조 물자를 이용하여 정권 유지를 꾀한 지도자였 다. 메콩 삼각주 지역의 토지를 개혁하였는데 베트민 시대에 폐 지된 지주제를 부활시키서 인구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농민의 반 발을 샀고, 공산주의자, 반대 세력,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 교도까지 탄압하였다.
- 정치적 혼란 속에서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 민족해 방전선이 결성되었고 남베트남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 베트 남전쟁의 시작이었다. '12월 20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군에 맞서 베트남 국민에게 '전국 항전'을 호소한 의미 있는 날이었다.
미국의 군사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정부군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민족해방전선과의 전투인 제1단계가 시작되었다. 민족해방전선은 모두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지식인, 농민, 기 업가, 여성 등으로 구성된 민족통일전선이었고, 상급 간부는 북 베트남 노동당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 점도 사이공이 함락될 때 까지 감추어졌다.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가했던 북베트남의 병사 들은 남에 잠입하여 민족해방전선의 육성을 돕고 힘을 키워나갔다.
1962년 새로 출범한 케네디 정권이 남베트남 군사원조사 령부(MACV)를 설립하였다. 군사 고문단이라는 명목 아래, 특수 작전부대를 사실상 정규군과 같은 지위로 높여서 적극적으로 베 트남에 개입하였다. | 남베트남군은 농민과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 고문단의 지도를 받아서 ‘전략촌 계획'을 펼쳤다. '전 략촌 계획은 영국이 말라야 (Malaya)에서 게릴라 진압에 성공했 던 작전이었다. 민족해방전선은 전략촌을 공격하고 마을의 책임 자를 제거하였으며 전략촌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 었다.
그러나 자연과 공생하는 농민의 자치를 빼앗고 정부군 병 사가 게릴라를 구실로 농민의 자산을 약탈하자, 오히려 농민과 게릴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되어 전략촌은 1964년 중지되었다.
- 맥나마라는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계량 분석을 구사하여 높은 실적을 올린 덕분에 창업가 외에 처음으로 사장이 되었지 만, 불과 5주 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의 요청으로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맥나마라는 컴퓨터와 하버드 경영학 석사 (MBA)가 충분하게 뒷받침되면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최 적 전략을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케네디가 암살당하여 급작스럽게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의논을 꺼렸다. 존슨은 매주 화요일에 맥나마라를 포함하여 상급 고문 3명과 점심을 같이 하며 의견을 교환하였다. 군사 전문가는 출석하지 않았고 합동참모본부 의장조차 부르지 않았다. 맥나마라도 존슨도 육군을 신용하지 않았다. 존슨은 취임 직후 군사 보좌관 3명을 '눈엣가시'라는 이유로 해임하였다.
합동참모본부는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진언하려 하였으나 대통령은 '맥나마라를 통하여 보고하라고 엄명하였다. 그러한 전쟁 지도 체제에서 맥나마라에게 보고된 베트남 전쟁의 중요 지표는 적군의 시체, 포로, 탈취한 병기, 파괴한 터널의 숫자였고, 적의 사기를 낮추는 질적 측면은 무시되었다. 맥 나마라가 지원한 컴퓨터의 촌락 평가 시스템'도 가축을 빼앗긴 농민의 분노, 가족을 잃은 부인의 슬픔, 네이팜탄으로 팔을 못 쓰게 된 아이의 아픔까지는 수치화할 수 없었다.
정글에서 강력한 북베트남군에 맞서 싸울 것을 강요당한 미국군이 아군의 사상자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직접 대결을 피하고 압도적 화력을 이용해야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북베트 남군의 기지를 공격할 때 보병은 적의 기지를 찾는 임무를 맡았 고 공격은 포병과 항공기에 넘겼다.
- 적의 기지가 파괴되면 보병이 공격하였는데, 주로 박격포 를 사용하였고 결과는 발사한 포탄의 수로 확률을 따졌다. 포탄 하나에 쓰러지는 적군의 수를 어림짐작하여 총 발사한 포탄의 수로 살상한 병사 수를 계산하였고,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상급 사 령부에 보고하였다.
맥나마라에게 보고된 성과는 항상 과장되었고 적어도 30 퍼센트는 부풀린 수치였다. 각 부대 지휘관이 개인의 명예를 위 하여 지나치게 부풀린 성과를 보고하는 일도 있었다.  맥나마라가 신뢰하는 워싱턴의 컴퓨터는 앞서 말한 신뢰 도 낮은 수치를 근거로 북베트남군과 민족해방전선의 남은 병 력을 빈틈없이 계산하였다. 그 결과 미국군 공식 발표에 따르면 1967년 말까지 적에게 입힌 손해는 22만 명에 이르며, 미국 내에 서는 북베트남군의 주력 부대가 거의 전멸하였으며 민족해방전선은 붕괴됐다고 믿었다.
사이공의 미국군 대변인은 구정 대공세 직전 1967년 말에 "전쟁은 이긴 것과 다름없다”라고 발표하였다.
- 호찌민과 보응우옌잡 두 지도자와는 반대로, 미국의 전쟁 지도자 린든 존슨과 로버트 맥나마라에 대해서는 신랄한 지적이 있다. 육군 장군이자 역사학자인 H. R. 맥매스터 (H. R. McMaster) 는 자신의 저서에서 존슨과 맥나마라의 리더십을 통렬하게 비판 하였다. “베트남의 참사는 무력 때문이 아니라 유례없는 인재 선택 으로 실패한 결과다. 책임은 존슨 대통령, 대통령을 보조하는 군사, 그리고 군인이 아닌 조언자에 있다. 많은 실패는 그들의 오만함, 나약함, 사리사욕의 추구, 무엇보다 미국 국민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것에 원인이 있다.”
- 1964년 존슨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기회를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베트남에 미국 군사가 개입하면, 존슨이 제창하였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의 의회 통과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맥나마라는 적은 비용이 드는 것처럼 보이고 국민과 의회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실시할 수 있는 단계적 압력 전략으로 '위대한 사회' 정책이 의회 를 통과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 맥나마라는 미국군의 최소 희생으로 적의 전투 수행 능력을 파괴하는 전술을 이용하여 전쟁의 효율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맥나마라는 베트남 민족 독립 전쟁의 본질을 착각하고 있었다. 호찌민에게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을 수행하려는 대의가 있었고, 반드시 해내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실행력이 있다는 것을 통찰하지 못하였다.
맥나마라는 회고록에서 “남베트남 국민이 구원받으려면 남베트남 국민 스스로가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한 중심 원칙에서 벗어난 우리는 본질적 으로 불안정한 기초 위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외부 군사력은 민중이 민중 자신을 위하여 쌓아 올린 정치적 질서와 안정을 대신할 수 없었다”라며 반성하였다.
- 실제로 미국군은 전쟁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고 패 한 쪽은 남베트남군이었다. 철수할 때까지 미국군은 항상 전방 에 나와 있었고 남베트남군이 홀로 북베트남군과 싸운 적은 없 었다. 그러나 6·25 전쟁처럼 중국군의 개입을 우려한 미국군은 제한적 공격과 전력을 순차 투입하여 제 줄로 제 몸을 옭아 묶은 상태가 되었다. 50만이 넘는 군대를 출병하고서도 한정적인 소 모전을 펼쳐야 했다. 한편 남베트남군은 사이공으로 달아났는데 북베트남군처럼 인민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모든 국민이 하나 되어 전투를 펼친 적은 없었다.
중일전쟁의 일본 육군과 베트남전쟁의 미국군은 '전투에 서 이겼지만, 전략에서 졌다'라는 비슷한 점이 있다. 일본 육군은 개별 전투에서 이겼지만, 마오쩌둥의 인민전쟁이라는 망망대해에 빠져서 전력의 60퍼센트 이상이 중국 전쟁터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전략적으로 진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군사전 략도 오직 근대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성립되었고, 인민전쟁의 근본이 되는 대중의 동원과 내셔널리즘이라는 요소를 계산에 넣 지 않았다. 미국은 인민전쟁의 근본을 고려하지 못하여 패한 것 이다.
분석 지상주의를 바탕에 둔 미국군은 전투에서 승리하였 어도, 인민전쟁의 본질인 베트남 국민의 애국심을 통찰하지 못 하여 전략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 존슨 정권은 '위대한 사회'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 고 6·25 전쟁처럼 베트남전쟁에 중국군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북위 17도를 넘는 지상군의 침공은 계획하지 않 고 마지막까지 국지전으로 끝내려고 하였다. 국지 전략의 기본 인, 적의 병사 보급 능력이 손해를 따라가지 못하는 소모전'을 목표로 하였다. 가장 많을 때는 54만 명을 투입하면서도 소모전 략은 살라미 소시지를 얇게 자르듯 적을 분열시키는 '살라미 전 술(협상 테이블에서 한 번에 목표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부분별로 세분하고 쟁점화하여 차례로 각각에 대한 대가를 받아냄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술 역자 주)'로 전력을 순차 투입하였다. 그에 맞서는 북의 병력 동원은 남의 혁명 병력으로 끊임없이 보강되었기 때 문에 미국군의 전력 투입은 소모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략을 사회 시스템 면에서 바라보면 북의 인적자원 보급력과 남에서 민족해방전선을 형성한 조직망이 북베트남 승리의 기본 요인이며,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 시스템 이다.
베트남전쟁의 배경에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자본 주의의 계층 사회'에서 사회주의의 '평등 사회'로 이동하는 시기 라고 보는, 보편적이고 역사로서 기록될 만큼 중요한 로망이 있 었다.
사회주의 시스템의 요점은 농업의 집단화에 있었는데, 많은 농민에게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심어주고 지금은 빈곤을 함께 나누며 자신을 희생하여 분투하기를 바라는 북베트남의 전쟁 지원 시스템으로 기능하였다. 농지 공유에 기반을 둔 집단 노동과 탁아소 등의 건설로, 성인 남자를 전쟁에 투입하여도 남아 있는 여성, 노인, 아이들이 생산을 유지하고 전선을 지원할 수 있었다.
본래 남베트남의 내전이었던 것이 미국의 개입으로 북베 트남의 공공연한 개입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는 중국 소련 연합이 지원하는 사회주의 국가 대 사이공 정권으로 상징되는, 좋지 못한 자본주의 미국의 전투로 진행되었다.
베트남전쟁의 본질은 인민전쟁이었다. 게릴라전으로부터 촌락을 보호하고 방어하려면 광범위한 정치·민생 정책과의 연계 가 꼭 필요하였는데, 정규전을 신봉하는 웨스트모얼랜드는 지나 치게 비군사적이라는 이유를 들었고, 군사작전의 효율성을 추구 한 맥나마라는 시간이 심하게 오래 걸린다는 논리를 들었다. 심 지어는 강압적인 사이공 정권에 대한 농민의 반감으로 '전략촌' 구상은 좌절되었다.
- 농촌을 잃고 사이공으로 이동한 농민은 이전한 날부터 미국의 원조금 없이는 생활할 수 없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어느 병사의 아내와 자식은 물가의 심한 상승으로 생활이 불가능해졌 을 때 벌이 수단이 없으면 군대를 따라 전선으로 향했다. 미국도 사이공 정권도 시간이 걸리는 '전략촌' 계획에 실패하여 농민을 위한 정치 경제 전략에 소홀하였다.

- 게이츠는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이 군사력을 행사한 것은 알 카에다나 헤즈볼라와 같은 국가 이외의 조직, 약소국을 상대 로 한 비정규전뿐이었지만, 군의 방침은 현실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훈련과 장비가 강대국을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더 작은 위협은 문제없이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됐다. 는 것은 2003년 이후 이라크 분쟁으로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존 나글에 따르면 영국군과 미국군의 사이에는 중요한 조 직 문화의 차이가 있다. 영국군은 전쟁의 성질을 정도(程度) 문 제'로 생각하고 '장기적으로 판단하여 승리라면 51퍼센트'로도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미국군은 전쟁을 승리 아니면 패배' 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여 승리는 '100퍼센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미국군의 섬멸전 지향'을 상징하는 사고방식이다.
- 미국은 '섬멸전 지향' 사고방식을 완전하게 떨쳐내지 못 하였다. 걸프전쟁에서 공지전투'의 교과서적 실천과 언뜻 보기 에 완벽한 승리는 이라크전쟁에서 럼스펠드 독트린'을 만들어 냈다. 대통령으로부터 결정력, 민첩함, 기동성 향상을 지시받은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은 군사기술 혁신의 성과를 최대한으로 활 용한 군의 변혁'을 목표로 하였다.  이라크전쟁 초기 침공작전’ 단계에서 '충격과 공포' 전략 은 소규모 병력으로 기동성과 결정적 파괴력을 지닌 최신 정밀 병기를 구사하여 신속한 침공을 계획하였고 성공하였다.
그러나 섬멸전을 지향하는 전략 문화는 나중에 이라크 국 내에서의 반란이나 내전에 대처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였다. '공지전투' 독트린은 오히려 미국군의 하이테크 병기와 화력의 압도적 우세를 활용할 수 없는 COIN 작전을 곤란하게 만들었 다. 미국의 전략 문화는 비정규전인 COIN 작전이나 순수한 군 사작전의 범주를 벗어난 '국가 건설' 작전에서 취약성을 보였다.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바르게 승리하라  (0) 2022.07.30
특허 지적재산권으로 평생 돈 벌기  (0) 2022.07.30
확률적 사고의 힘  (0) 2022.07.23
내일부터 디지털 마케터  (0) 2022.07.23
마찰 없음  (0) 2022.07.13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