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 인플레이션으로 침몰한 로마제국
로마제국에서도 황제가 주화발행권을 독점. 영어로 돈을 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여신 주노(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 아내 헤라)의 별칭인 모네타로부터 유래. 로마제국은 모네타 신전에서 독점적으로 주화를 제조.
지중해 주변국가를 정복한 뒤에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부담해야 했던 로마제국의 주요재원은 모든 거래에 일률적으로 1%씩 부과하던 물품세였다. 하지만 물품세만으로는 막대한 지출을 감당하지 못했고, 제국은 지속적으로 주화의 귀금속 함량을 낮추면서 재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오현제시대(96-180)에도 재정 가운데 절반이 군사비로 지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도로건설 역시 실업병사를 구제하기 위한 대규모 사업이었음. 갈수록 은 함유량이 떨어지고 급기야 5%밖에 섞이지 않게 되어 실질적으로 은화가 동화로 바뀌었다고 하니, 재정난이 얼만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은 함유량이 적어지면 화폐의 가치가 하락. 이것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지폐를 증쇄하는 것과 같으며 인플레를 초래하게 됨. 로마제국은 요즘 말로 장기 인플레이션으로 멸망한 것이다.

- 전략가였던 쿠빌라이는 페르시아만과 중국의 연안부로 이어지는 바다의 세계와 초원길로 이어지는 육지의 세계를 연결하는 유라시아 규모의 대상단을 갖추었고, 상단의 교역로를 자신이 건설한 정치, 경제도시인 대도(북격)까지 연결. 현재 중국 정부가 제창하는 일대일로 정책은 유라시아를 시야에 넣은 쿠빌라이의 상업전략을 모델로 한 것.
이 시대는 초원길과 바닷길을 연결하는, 유라시아의 육지와 바다의 간선이 서로 이어져 경제공간이 단숨에 확대된 경제의 약진기였다. 제노바,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상인은 육지와 바다를 통해 몽골 상업권에 진입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의 마르코포롤가 유라시아 각지에서 교역을 하며 부를 축정. 이 부를 토대로 상인들이 지원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었다.

-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국지적인 몽골제곡은 영국 등 유럽세력에 의해 내부대립이 일어나 망하거나 또는 맞서 싸우다가 멸망했지만, 곳곳에 침투해 있던 유목제국의 틀은 잃어버리지 않음. 지금도 러시아, 중국, 서아시아에서는 군사우위 체제인 강권국가의 흐름이 이어짐. 18세기 초의 역사지도를 살펴보면 국지적 몽골제국이 병존했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음.
(1) 터키인이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
(2) 무굴제곡
(3) 유목계 여진족(만주인)의 청제국
(4) 북쪽의 대삼림지대를 통합한 러시아제국
이 네개의 제국이 국지적 몽골제국에 해당.
청나라는 몽골인과 대립관계에 있던 만주의 유목민인 여진족이 세운 국지적 몽골제국이며, 러시아제국의 군대는 터키계의 카자크가 주력이었음. 따라서 폭넓게 보면 몽골인 대신 터키인과 여진족의 군대가 아시아 세계를 거의 이등분한 셈. 광활한 영역을 지배한 유목민의 노하우와 군사력이 계승된 것임.
영국 등 유럽세력이 각 제국을 정복한 뒤 지속적으로 쇠퇴해가던 러시아와 중국에는 사회주의가 유입되었으며, 이후 사회주의는 변질되어 힘을 잃어버렸고, 전통적인 강권체제가 부활. 2차대전 종전 후 민족간 대립과 사회주의 흐름이 거세지며 한때 유라시아 구세계가 일신된 듯 보였다. 하지만 리먼쇼크 이후 구미세력이 후퇴한 후 유라시아에서 전통사회가 급격하게 부활하고 있으며, 서아시아, 중국, 한반도 등에서 낡은 사회가 되살아나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 염격한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15세기 말 유대교도 추방령을 내리자, 추방된 유대인의 일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 그들이 지중해 경제권에 확대되었던 이슬람의 어음제도를 정착시킨 것이 네덜란드 경제성장에 도움이 됨. 해운에 필요한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게 됨.
산란을 위해 찾아오던 청어가 오지 않게 되면서 어획량이 줄어 소금에 절인 청어를 유럽에 공급할 수 없게 된 한자동맹의 맹주 뤼베크를 대신하여 네덜란드는 북해에서 유망으로 잡은 청어를 소금에 절여 유럽 전지역에 판매. 이것으로 경제발전의 발판을 만들었고, 조선업, 해운업, 상업, 출판, 금융등을 통합하여 단숨에 경제를 성장시캄. 

- 상선을 대규모로 움직여 상업활동을 하자면 당연히 화폐가 대량으로 필요했는데, 유대인이 도입해온 어음거래와 암스테르담 외국환은행 덕에 부족한 화폐문제가 해결됨. 암스테르담 외국환은행이 계좌에 화폐를 기호화하여 상거래를 하면서 예금이 통화로 인정받게 된 것임. 세계 최초 예금통화의 출현이다.
네덜란드 조선업이 번성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된 사순절의 단백질원으로 애용되던 청어에 이르게 됨. 14세기 경에는 산란하기 위해 발트해 입구 덴마크령의 좁은 해협으로 대대적으로 몰려들었다. 이것을 뤼베크 등 한자동맹의 상인들이 잡아 소금에 절인 뒤 나무통에 담아 유럽 각지에 판매하여 큰 이익을 올림. 그런데 그 청어가 덴마크령에 몰려오지 않게 되었고, 15세기 이후 청어 어장이 북해로 옮겨감. 1-3월 북해 서부 어장에서 수많은 네덜란드 어선이 유망으로 청어를 포획. 청어는 선상에서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이나 식초에 절이는 등 가공되어 유럽각지로 보내졌고, 네덜란드인은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 해상에너슨 대항해시대 이후, 영국의 왕이나 귀족은 뱃사람에게 특허장을 주고 사략선에 태워 대서양을 왕래하는 스페인의 은수송선을 습격하게 했고, 스페인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사략선 활동을 위해서는 대형선, 무기, 선원, 자금뿐 아니라 뱃사람이 포로가 되면 석방을 위해 힘써주는 후원자가 필요. 간단하고 빠르게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합법적 해적이었던 것이다. 사략선은 평균 3000-4000파운드의 수입을 올렸는데, 그중 5분의 1이 선장의 몫으로 돌아갔고 잔액은 후원자인 귀족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후원자에게는 그야말로 불로소득이나 마찬가지. 영국의 지배층은 모험성과 약탈성을 띠게 된다. 
1588년 해적행위를 되풀이하는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스페인은 배 130척 선원 1만명, 육상병력 19000명으로 구성된 그랜드 아르마다(무적함대)를 파견했지만, 도버해협에서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사략선과 해군에 거의 괴멸됨. 이것이 이른바 천하를 겨루는 결전이 된 아르마다 해전이다. 그 결과 해상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감.

-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의 자멸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패한 이유는
(1) 지휘관인 귀족이 해전을 지휘한 경험이 없었고,
(2) 주로 대형함선으로 구성되어 움직임이 둔했으며,
(3) 계속 폭풍이 부는 등 기후조건이 나빴다는 점을 들 수 있음. 여기에 스페인 재정이 악화되어 함선을 제대로 보강하지 못한 점도 패배를 초래한 중요 이유였음.
대항해시대 이후 스페인은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으나
(1) 신대륙에서 들여온 방대한 은이 오스만제국과의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30년 전쟁 등의 군비를 충당하느라 국외로 유출되었고,
(2) 유대교도 추방령으로 경제능력이 높은 유대인을 국외로 추방했으며,
(3) 신대륙에서 대량의 은이 유입되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국내산업이 쇠퇴했고,
(4) 거래를 할 때마다 세금을 징수하는 아르카바라 라는 소비세로 민중의 삶이 피폐해졌다.

- 국민이 보증하는 빚은 믿을 수 있다.
현재 정부와 정부기관이 발행하는 채무를 소버린 본드라고 총칭함. 국왕이 전쟁 등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금융업자나 상인에게 돈을 빌리고 툭하면 떼어먹다보니, 왕의 보증은 신용도가 낮았고 상인들은 핑계를 대며 빌려주기를 거부했다. 그런데 명예혁명으로 주권이 의회로 옮겨지자, 국왕의 빚이 국가의 채무로 바뀜. 국왕이 아니라 의회가 채무반환을 보증함으로써 주권자인 국민이 납부하는 조세로 확실하게 채무를 상환하는 구조가 된 것. 이로써 국채는 빚의 상환을 확약하는 증서로서 화폐처럼 취급받게 됨.
영국이 해군을 증강하고, 백년에 걸쳐 프랑스와 벌인 패권다툼(2차 백년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시에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 매일 설탕을 넣어 마시는 커피와 홍차는 자본주의경제와 밀접하게 관련 있음. 가장 처음 설탕이 세상에 나왔고, 설탕 수요를 늘리기 위해 커피와 홍차 등 기호품 문화가 잇달아 육성되었음.
영국은 국제 경쟁력이 낮은 카리프해 설탕산업을 육성하기위해 국내에서 설탕판매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1600년 국민 1인당 설탕 소비량은 연간 400-500그램이었는데, 17세기에는 약 2키로, 18세기에는 약 7키로로 격증. 하지만 설탕은 보호관세 등으로 높은 가격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조미료로서는 수요에 한도가 있었다.
설탕상인은 증산되는 설탕의 판로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기호품 문화를 육성. 설탕 수요를 늘리기 위해 파트너로서 최초로 선택된 기호품은 커피로,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이며 이슬람 세계에서 즐겨마시던 것이었다. 커피판매는 네덜란드가 선도하고 있었으므로, 영국은 청나라의 홍차와 아메리카 대륙의 카카오 등도 기호품으로 유행시켰다.

- 홍차로 반격을 도모한 영국
커피는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이며 아라비아반도 예멘의 항구 모카에서 유럽으로 수출됨. 그 뒤 커피는 각지에 이식되었는데, 처음에는 이슬람 세계를 통해서만 수입할 수 있었음.
네덜란드는 1640년대에 모카와 암스테르담 간의 커피무역을 정기적으로 진행했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간에 벌어진 커피무역 경쟁에서 네덜란드 상인이 이겨싿. 네덜란드 상인은 생 커피콩이 반출되던 남인도에서 커피 묘목을 몰래 가져와 식민지인 자바섬에 심고, 주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커피를 재배시킴. 18세기 초에는 세계 제일의 커피상이 되어 막대한 이익을 올림.
한편 경쟁에서 패한 영국은 청나라 홍차에 주목. 영국 동인도회사는 왕실에 홍차를 들여 모닝 티 등 귀족의 홍차문화를 만들어냈고, 이것을 젠트리, 서민, 식민지에 보급해 홍차산업을 대규모 비즈니스로 육성.
설탕은 지금도 우리 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으며, 청량음료, 과자, 가공식품에 첨가되어 있다.

- 미국 독립전쟁은 본국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자립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영국 상품과 생활양식을 거부하던 식민지 사람들은 홍차를 영국적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 마시지 않았다. 대신 홍차를 닮은, 연하게 추출한 커피를 마셨기 때문에 미국에서 대량으로 커피가 소비되었고 이것이 브라질 커피산업을 발달시킴.
에스프레소로 대표되듯, 유럽에서 커피란 어떻게 볶느냐가 중요한 향기좋은 음료였다. 하지만 갑자기 고안하여 홍차처럼 만든 미국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이 점에 착안하여 미국에 커피 본래의 향기를 즐기는 문화를 보급하려 나선 기업이 스타벅스다. 독립전쟁으로 인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생겨난 아메리칸 커피를 몰아내고 스타벅스가 크게 번창한 것은 당연한 흐름. 스타벅스 회사명음 멜빌의 백경에 등장하는 냉정한 일등항해서 스타벅스의 이름을 따옴.

- 기술혁신과 콘드라티예프 파동
산업혁명기의 경제성장률은 높은 시기에 2%, 평균적으로는 1.3%에  불과했다. 산업혁명은 100년 이상에 걸쳐 농업을 대신하여 공업이 경제의 중심에 서고 기술혁신에 의해 (1) 생산성 향상, (2) 생산량 증가, (3) 생산분야 확대 등이 축적된 과정. 
초기 산업혁명을 출발점으로 삼아 약 50년 주기로 기술이 변화했다는 주장을 전개한 사람은 러시아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다. 이에 따라 약 50년마다의 변화를 장기파동이라 부름.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세계사의 관점에서 공업의 변화를 고찰할 때는 이렇게 크게 묶어 보는 것이 필요함.
(1) 제1파동(1780-1840) : 산업혁명
(2) 제2파동 (1840-90) : 증기기관과 철도
(3) 제3파동 (1890-1940) : 전력과 철망
(4) 제4파동 (1940-90) : 대량생산과 자동차
(5) 제5파동 (1990-) : 정보통신

- 산업사회를 궤도에 올린 철도
기계로 면포를 생산하게 된 것은 섬유산업 내의 사건에 불과. 하지만 소형화된 증기기관을 장착한 기관차가 발명되고, 새로운 교통기관인 철도가 보급된 것은 자본주의 경제를 성숙시키고 세계적 규모로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
철도 건설은 막대한 투자를 요구하고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는 산업이기 때문에 지구 규모로 대규모 경제성장이 일어남. 또한 속도가 빠르고 안정된 교통수단인 철도는 세계의 연결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음. 유럽을 중심으로 집중되는 체제가 완성되었고, 자본주의 경제가 지구화되었다. 철도건설은 세계를 지구규모로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팍스 브리태니카라는 영국의 경제패권을 초래

- 지정학은 유럽각국의 대립이 격화되던 19세기 후반에 생김. 러시아와 세력을 다투던 영국에서 역사와 지리를 통합하여 지리조건이 국가에 미치는 정치적, 군사적영향을 지구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지정학이 출현.
영국의 지정학자 매킨더는 세계를 (1) 해양국가 영국과 대항하는 육상제국 러시아의 세력권인 유라시아 가장 깊숙한 지역인 하트랜드(핵심지역), (2) 해상패권으르 지닌 영국과 육상패구너을 보유한 러시아가 접촉하는 중국, 동남아, 인도, 서아시아, 동유럽 등의 림랜드(주변지역), (3) 일본, 필리핀 등 해양국가에 물자를 보급해주는 힌터랜드(배후지역)로 분류하여 고찰하고, 하트랜드를 장악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 부를 불러들인 파운드 지폐
세계 토지와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패권국가 영국은 세계 경제를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금융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영국은 유럽의 은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고가의 금을 본위화폐로 삼는 국제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언제라도 금과 교환된다는 원칙 아래 대량의 파운드 화폐를 발행. 이는 4000년 동안 이어져온 은화의 시대를 지폐의 시대로 전환한 금융사상의 중요한 혁신이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71) 뒤 유대계 은행이 경제를 지배하던 독일이 금본위제를 단행하면서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전환하는 세계적 흐름이 생겼으며, 미국과 일본도 그 흐름에 따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세계에서 발굴된 금은 전부 모아도 올림픽 수영장 3개반에서 4개 정도 분량밖에 되지 않으므로, 파운드 지폐를 전부 금으로 교환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며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닥치면 확실하게 대응하여 언제라도 지폐를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면 사람들은 굳이 보관하기 힘든 금으로 교환할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다.

- 파운드가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
영국의 통화단위 파운드는 정식으로는 파운드 스털링이다. 파운드는 본래 고대 로마의 무게단위이며 스털링 실버는 순은을 의미. 중세 영국에서 고대 로마가 은 1파운드로 240개의 은화를 만든 것을 본떠서 은화가 주조된 것이 유래다. 요컨대 파운드라는 명칭은 이전에 영국에서도 은화가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줌. 영국이 금본위제로 전환한 것은 명예혁명 뒤의 일이며 유럽대륙에서 은 가격이 폭등한 것이 그 배경. 영국의 은화가 녹인 지금의 형태로 유럽대륙으로 유출되는 상황속에서 조폐국 장관이 된 뉴턴은 금화중심의 통화제도를 발안.

-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뒤인 1816년 화폐법을 제정해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1821년에는 금과 교환할 수 있다고 명기한 파운드 화폐를 발행했다. 당시에는 경제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은화를 제대로 공급할 수 없었기에 금으로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의 발행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필요한 일이었다. 영국의 파운드 발행은 이런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결과이기도 했다.
영국은행의 통화발행량은 보유하는 금에 1600만 파운드를 더한 금액으로 제한되었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제성장에 대응할 수 없게 됨. 당시 영국은행의 금보유고는 1000만 파운드 이하였다고 하니 어렵게 금본위제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영국에게 반세기 뒤처져서 1871년 독일, 1873년 미국, 1879년 일본이 금본위제로 이행. 1900년에는 세계 주요국 대부분이 금본위제로 바꾸었으며, 부족한 금 보유고는 갈수록 큰 문제가 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은행으로서 방대한 양의 금을 장기적으로 빌려주었으며 투자활동으로 전 세계에 파운드를 퍼뜨렸기 때문에 금이 부족한 상황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였다.

- 미국서부에 급속하게 철도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자본의 투자 덕분이었다. 대불황으로 투자할 곳을 잃은 영국 자본이 신흥국 미국으로 몰렸던 것. 유럽 자본의 창구가 된 것은 유럽에 금융제국을 구축한 로스차일드의 미국 대리인을 맡은 JP모건이었다. 모건은 외국자본을 이용하여 미국 최대 재벌이 됨
또한 투자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영국의 투자가에게 철도 등 미국기업의 경영정보를 제공하는 회사가 필요해졌고, 1870년대에 미국 철도채의 신용평가를 시행하는 신용평가회사가 등장. 20세기가 되자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 등 신평사가 성장. 미국에 유럽에는 없는 증권, 국채 등의 신용평가를 하는 대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미국경제의 대영종속의 흔적이며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보통 지폐는 은행권이라 불리고 금과 교환되는 것이 원칙이나, 미국지폐는 연방준비권이다.
은행권과 준비권의 차이는 무얼까? 단지 말의 뉘앙스가 다른 듯한 느낌이지만 연방준비권은 (1) 금의 보증이 필요없고, (2) 국채구입에 충당된다는 특징을 지님. 지폐를 발행하는 연준에 정부는 출자를 하고 출자자는 모두 민간 금융기관이다. 통화발행에 대해 미국정부는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고, 민간은행이 이자가 붙은 정부의 국채를 매입하는 형태로 준비권을 발행. 정부로부터 이자를 받고 있다는 점이 미국 통화인 달러의 특징이다.

- 전쟁의 국면이 연합국의 우위로 기울어진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개최된 연합국 45개국 재무, 금융담당자 회의에서 금 1온스가 35불로 정해지고, 금달러본위제(브레튼우즈체제)가 성립됨. 이로써 달러만이 금과 교환될 수 있는 유일한 통화가 됨. 달러에 의해 각국 통화가치가 결정되는 고정상장제를 채택. 엔은 1달러 360엔으로 고정되었다.
각국 통화는 금과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통화인 달러와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금과 바꿀 수 있게 됨. 파운드를 포함한 각국의 통화는 달러의 분신처럼 됨. 최대 금융국가였던 영국은 미국과의 통화전쟁에서 패배.
미국은 19세기 영국중심의 식민지 체제를 절대적인 힘을 지닌 자국의 경제에 유리한 단일 세계체제로 바꾸려는 계획을 세움. 기존의 식민지가 비즈니스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 미국은 (1) 국민국가를 단위로 구성된 국제연합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의한 정치적 지배와 (2) 달러에 의한 세계 경제시스템의 일원적 지배로 패권을 차지했다.

- 유로달러로 영국금융이 부흥하다.
세계의 여러 통화 가운데 유일하게 금과 태환할 수 있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은 고정상장제는 불과 25년 밖에 지속되지 않음. 미국경제가 절대적 우위를 잃었기 때문. 달러와 금의 교환이 정지된 71년 이후 세계경제는 미국 경제가 허약해지면서 불안정한 상황에 놓임.
미국은 50년대 한국전쟁과 60년대 베트남전쟁을 치르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군사기지를 유지하며 재정적자가 확대됨. 67년에는 미국 채무가 금 준비금 1.5배까지 확대되었고,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짐.
한편 세계화가 진행되며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기업들이 증가했는데, 이런 기업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런던 시장에서 이익을 운용했기에 미국에는 이익이 돌아가지 않음. 이런 자금이 유로달러다.
19세기 이래 국제금융을 움직여 온 런던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피폐해진 것뿐이었다. 런던은 유로달러 시장으로서 끈질기게 금융력을 되찾았고 국제금융센터로서 뉴욕을 넘어서게 되었다.

- 제조부문을 중국으로 이전한 미국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큰 폭의 달러약세로 되살아난 미국은 90년대 후반 클린턴 정권하에서 금융제국 쪽으로 키를 틀더니 돌변하여 달러 강세정책을 취함. 월가는 변동상장제와 IT기술을 조합하면 금융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90년대에 금융을 급격하게 팽창시킴. 미국은 전 세계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 대담하게 고금리 정책으로 전환.
IT혁명과 나스닥 혁명의 조합으로 인플레이션을 동반하지 않는 호황이 이어진다는 신경제이론이 제창되었고, 금융을 주도하여 미국경제를 재생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짐. 그때까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던 민주당은 클린턴 정부 하에서 월가와 함께 화폐로 화폐를 증식시키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길을 선택. 견실한 제조업에서 금융으로, 즉 일확천금을 버는 길로 미국경제를 바꾼 것.
미국에서는 금융제국화와 경제의 공동화가 앞뒤로 진행되었고, 자동차, 철강 등의 공장이 노동력이 저렴한 아시아로 대규모 이전. 21세기가 되자 IT산업까지 중국에 집중됨. 이런 경향은 80년대부터 가속화됨. 2000년이 되자 미국은 기업수익의 45%를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데 반해 제조부문은 불과 5%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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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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