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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보같은 역사는 반복되는가

저자
빌 포셋 지음
출판사
매일경제신문사 | 2014-06-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역사를 바꾼 100가지 실수 1, 2]의 작가 빌 포셋의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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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악에 의해 나눠지고, 좁은 통로와 협곡들에 의해서 결합된 이 땅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 스스로를 자기네들의 지역과 인종집단의 모임으로 규정. 자신들을 결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음. 땅의 경계도 없고 인구가 계곡마다 분산되어 있는 형세는, 외세가 침략하기에 용이한 상태여씀.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은 계속해서 정복자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땅은 결코 점령할 수 없는 땅으로 판명됨. 기원전 6세기에, 키로스 대제는 그의 페르시아 제국에 많은 영토를 더했음. 부족들은 그를 인정했으나, 현실적으로 사업도시 외부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함. 단지 다리우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할 때까지 25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분으로 존재했을 뿐임.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제는 가우가멜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 결과 페르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 다리우스는 그 전쟁에서 패한후에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쳤는데, 이는 그땅이 그를 환영해서가 아니라 그를 따라오건 추적하기에 매우 힘든 지리적 환경 때문. 알렉산더도 5백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함께 추적. 그 과정에서 새로운 황제는 처음으로 힌두쿠쉬 지역의 허산준령을 보게 되었고, 결국 추적은 실패로 끝남. 훗날 다리우스는 자신의 부하장군에 의해 배신당하고 살해됨. 반면 알렉산더와 그의 군대는 바빌론으로 돌아가서 승리의 달콤한 열매를 맛봄.
- 모스크바의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아프간을 공산당 정부집권의 기회로 보았을 뿐 아니라 중요한 국경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시키는 길이라 여김. 아프간은 중동 한복핱에 있으며, 소련의 세지역에만 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란과 파키스탄 하고도 인접. 심지어 중국과도 다소의 관계를 갖고 있음. 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가 러시아 정부의 주된 목표였음. 처음에는 짜르, 다음에는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200년 이상 바라온 것. 소련 지도자들 역시 아프간을 지배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미국 외교정책의 균열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생각. 이는 트루면이 미국 대통령이던 시점에 시작된 공산주의 확장정책이었음. 모스크바의 통치자들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은 아프간의 다양한 민족들을 잘 다룬다면 그들을 성공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었음. 아프간은 가난한 문맹국가였지만, 러시아의 부자와 교사들에게는 그것을 바꿀 힘이 있었음. 그들이 가져다주는 혜택과 안정 때문에 붉은 군대가 환영받으리라 믿음. 이런 예측은 러시아 군대가 탱크 부대를 이끌고 아프간으로 쳐들어갔을 때,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다 사실이라 인정됨. 1837년 영국처럼, 러시아는 시골지역에 군대를 배치하고 도시를 장악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음. 그러나 러시아 또한 영국처럼 그 땅의 군대와 부족의 지도자들이 반기를 들기로 결정을 내린 이상, 반란을 완전히 진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깨닫게 됨. 영국은 4년 후에 아프간에서 쫓겨났고, 2만명의 군사를 잃음. 붉은 군대는 아프간에서 10년을 보냈는데, 7만 5천여명의 군사를 잃고 그 수의 갑절이나 되는 병사들이 부상을 입거나 불구가 됨. 러시아의 정치적이었던 태도와 임무는 점차적으로 아프간에 대한 점령과 탄압의 성격으로 바뀜. 그 과정에서 1백만명 이상의 아프간인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는 1300만명 인구의 10%임. 러시아는 모든 부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했으며, 마약상도 줄이지 못했고, 몇몇 도시외에는 효과적으로 점령하지도 못했음.
- 초강대국조차도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아프간의 다양한 인종들을 진압하고 지배하지 못함. 붉은 군대가 이뤄낸 유일한 성공을, 과거에 그 산악지역을 침공한 자들과 공유한 셈. 많은 인종집단들이 폭력성을 갖고 결집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함이었음. 이번에는 미국이 베트남때와는 정반대의 역할로 반란을 지지. 그러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음. 미국 고문들과 군사훈련, 의료장비를 지원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기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파키스탄과 협력작업을 펼쳤음. 미국 CIA는 아프간에게 스팅어 미사일과 같은 고도의 무기까지 지원. 이 무기들은 강력한 헬리콥터로 무장한 소련군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러시아가 산악지역에서 지니는 기동성의 우위를 빼앗음. 가난할 뿐 아니라 날로 침체되어가는 나라를 침공한지 10년 후, 현대식의 가공할 화력을 지닌 붉은 군대는 실로 무한정의 지원과 자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을 떠나야 했음. 89년 2월경, 붉은군대의 마지막 병사가 떠나자, 아프간에는 가장 과격한 저항단체인 탈레반이 권력을 잡음.
- 01년 10월 7일, 미국과 동맹국들에 의해 일명 영구적 자유작전이 시작됨. 탈레반으로부터 아프간의 통치권을 뺏기 위해 힘쓰는, 군사무장과 조직편성을 주로 하는 우호적인 군사지도자들로 구성된 동맹체였음. 이 전략은 먹혀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부족들과 각 지역의 힘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했음. 각각의 계곡은 자립적이고 자주적이었기에, 중앙정부가 제공하는 그 어떤 것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음. 이 국가적 정체성 결여가 각 지역 군사지도자들의 힘을 강화시킴. 바로 이것이 아프간을 통합된 하나의 민주국가로 바꿔가는 과정의 속도를 저하시키는 가장 큰 이유. 키로스, 알렉산더, 동인도회사, 붉은 군대, 현재 미국군대까지 모두 아프간에 별 저항없이 입성했으나, 그중 누구도 쉽게 그 나라를 점령할 수는 없었음. 3천년에 걸쳐 이 네강대국들이 펼쳤던 행동과 문제점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음. 처음의 세 침입자들은 그들이 정복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지 못했음. 마지막 침입자는 여전히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음.
-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테러분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국가의 승인을 받은 자들이 많음. 국가의 승인을 받은 테러는 약소국이 보다 강한 국가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무기로 간주됨. 이란의 정보를 갖고 공개적으로 미국에게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며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직접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도 없음. 그래서 국가들이 직접 테러분자들을 공급하고, 그들을 격려하여 강대국을 공격하도록 하는 것임. 자체적인 힘을 갖고 있는 국가의 시민들은 연약하다. 테러분자들이 군부대보다는 제트여객기를 목표물로 정하고, 팔레스타인이 국경초소가 아닌 이스라엘 마을로 로켓을 보내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민간인 목표물들은 공격에 비교적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아예 파괴하기 쉬움. 이는 곧 강대국들에게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임.
- 수천년간, 테러를 막기 위해 많은 수단이 동원됨.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변화할 때 가장 효과가 큼. 그 결과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건립처럼 비교적 유순할 수도 있고, 아르마니아 학살과 서기 70년의 3차 유대인 폭동처럼 비극적일수도 있음. 군집기반을 없애거나, 사회를 파괴하거나, 혹은 테러분자들이 실제로 사라지게 하는 방법임.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해결책이기에,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격이 될 때가 많음. 집단학살은 테러분자들을 일시적으로 억제하기는 하겠지만 멀리 바라보자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는 것임. 기계를 부수고 산업화를 반대하던 러다이트 족들은 기본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보호하겠다고 나섰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오히려 러다이트 족에게 달려들었기 때문. 그후 노동자들의 상황이 개선되고, 러다이트 족들은 일이 잘 진행되도록 도와 줘 서로가 이해관계를 가졌음. 결국 역사가 말해주는 더 바람직한 해결책은 대부분의 불만을 개선시킴으로써 급진적인 소수가 폭력에 대해 입지를 잃게 하는 것임.
- 19세기 초, 풍요롭고 충분한 곡식을 생산하며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이집트는 유럽의 제국 경쟁자들에게 큰 매력으로 남아 있었음. 이집트의 전략적 중요도는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면서 두드러지게 커짐. 여전히 해양강대국이던 영국은 그 운하로 인해 크게 덕을 봄. 혹자는 그 운하를 인도로 가는 고속도로라고 불렀는데, 운하가 건설된 이후 선박이 아프리카 남쪽끝까지 돌아가는 길고 힘든 여정을 거치지 않고도 인도로 갈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그 운하를 운영하기 위해서 국가가 분수에 넘치는 지출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이집트의 자존심은 무너짐. 운하의 완성은 이집트에게 크나큰 빚을 짊어지게 했고, 통행료 또한 이자를 감당하게엔 부족했음.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이집트는 결국 영국에게 지분을 팔아야 했음.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내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발휘했고, 본질적으로는 또 다른 정부를 수립한 것과 다름없었음. 1875년경, 이집트는 실제적으로 파리와 런던의 지배를 받게 됨.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1882년부터 섭정을 하고 폭동을 진압. 정부는 꼭두각시로 남아있었고, 이집트 국민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 수십년 후에는 영국의 탄압이 다소 잦아들었지만, 그들이 원할 때면 여전히 이집트 곳곳에 대하여 간섭을 했음. 1차대전이 치러지는 동안,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영국은 이집트에 더욱 더 간섭하기 시작. 당연히 쌍방의 이익이란 있을 수 없음. 오스칸 투르크의 왕은 동맹국들과 공조하여 이집트의 야욕을 불태웠음. 22년 전쟁이 끝난 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이집트의 독립을 선엄.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수비대를 유지하고, 특권을 챙김. 영국의 마지막 군대는 1954년까지 이집트를 떠나지 않음. 이런 상황속에서 이집트는 진정한 의미의 자치권을 점점 더 갖게 됨. 이후 1952년 한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집트는 무하메드 나기브 장군을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 이집트 공화국이 수립됨. 그는 정부를 통제하는 장교들과의 권력싸움에서 패배해쏙, 54년 강제 퇴임. 가말 압델 나세르가 그를 대신함. 나세르는 민주주의 실행을 너무 급히 서두르지 않겠다는 점에 힘입어 권력을 잡았는데, 그래야만 무슬림 동포단이 모든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계산때문이었음. 56년경, 이집트 군대는 서로를 적으로 대하며 냉전으로 인해 두 패로 갈림. 일년이 못되어 영국과 미국은 이집트가 소련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스완 댐 건축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중단.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함으로써 대응. 이집트의 대응에 이스라엘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가 연합하여 이집트를 공격. 목표는 나세를 정권을 넘어뜨리고 운하에 대한 서양의 지배권을 되찾는 것이었음. 이 세나라는 결국 군사적 목적을 달성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비난을 받음. 두개의 초 강대국이 맺은 거의 유일무이한 협정이 나세르를 대통령으로 남기고,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의 지배권을 얻는 데 실패하도록 한 것. 특히 러시아가 이집트에서의 공적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임. 그 결과 서양 국가들이 당황했고, 이집트에 대한 소련의 원조가 강화됨. 적어도 안와르 사타트가 나세르를 대신할 때까지는 말이다. 11년 이집트 무혈혁명은 또 다시 표제거리가 돔. 수십년의 통치 끝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 당함. 이 반란은 미국에게는 딜레마가 됨. 그 운동은 친민주주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오바마는 중동지역의 민주주의를 비난할 수 없었음. 반대로 무바라크는 친서방파 정치인이었음. 그는 소련을 멀리하고 미국회사들에게 투자를 권장해 막대한 양의 원조를 받음. 심지어 미국 군자장비를 사용하기 시작. 이집트를 지배한 20년 이상동안, 무바라크는 근본주의적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자들을 반대하고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꾀했지만 일반 이집트인들이 그의 통치방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음. 미국과 이스라엘의 많은 관측자들은 무바라크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교체되는 것을 걱정했음. 그들은 그 증거로 이집트에서의 무슬림 동포단 조직을 가리켰음. 그것은 민주주의적 항거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복잡 미묘한 반응을 야기. 미국의 정부는 무슬림 동포단에 대한 50년 묵은 걱정과 대의 민주주의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지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했음. 갈등이 깊어지자 오바마는 불안해 하며 공식적 발표를 미루었지만 결국은 그 운동을 지지함. 전략적 이익과 이념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됨. 그가 이집트의 민족자결권을 옹호하는 것은 이전의 서양과 이집트 사이의 상호작용과는 엄연히 대조되었기 때문. 과거에는 전략적인 이익이 최우선이었고,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를 서슴없이 짓밟았었음.
- '드비어' 다이아몬드사는 영국 태생 사업가 세실 로즈에 의해 설립됨. 오늘날 재능있는 대학생에게 주어지는 로즈 장학금과도 연관됨. 국가의 영웅으로 오랫동안 추앙받던 그가 이제는 몹시 곤혹스런 상황임. 로즈의 상업적 감각은 의심할 나위도 없지만, 그가 지닌 도덕성의 범위는 자주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 그는 전 세계의 다이아몬드 중 90%를 장악. 인종에 대한 경멸심이 그로 하여금 원주민을 냉혹하게 다루도록 부추겼음. 88년에 로드는 은데벨레 족 왕인 로벤굴라를 속여서 마타벨렐란드 지역 광산 영업권을 부여받음. 로벤굴라와 그의 백성들은 영국의 침략에 저항했지만, 영국의 강력한 맥심 기관총에 의해 학살당함. 이것은 유럽사람들과 그 지역의 지도자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공인된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언론과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방법이기도 했음. 로드의 기만과 학살을 기념하며, 그들은 영토에 로데지아라는 이름을 붙임. 로데지아 북부와 남부는 각각 지금의 잠비아와 짐바브웨임. 오늘날 원주민들에 의해 지배를 받는 나라들에게 로즈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음. 우리 주민들은 여전히 그들의 조상들에게 로즈가 행한 잔악무도한 군사작전을 잊지 않고 있음. 그것은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발생했던 양상이었고 당시 상황을 이해하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변화와 분노만을 남겨놓음. 로즈는 폭력을 휘두른 제국의 유일한 대리인이 아니었음. 웨일스의 한 기자이자 탐험가인 헨리 모튼 스탠리는 스스로 자신을 리빙스턴의 후게자라고 생각. 그리고 벨기에의 왕인 레오폴드 2세로부터 콩고를 탐험해 벨기에의 영토를 확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음. 그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활약. 그 당시 탐험에 부의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애국심보다 돈에만 관심. 스탠리와 같은 사람들 역시 수입과 명예에만 관심이 있을 뿐, 국가를 위한 마음은 없었음. 이 자기중심적 태도는 아프리카가 유럽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다분히 반영되어 있음. 리차드 버튼 경 같은 당대 인물들은 "스탠리는 흑인들을 마치 원숭이처럼 여기고 총을 쏘아댔다."라고 말했음. 예를 들어 그의 부하 중 하나는 열한살배기 여자아이를 구입한 뒤에 그녀를 요리해 먹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인육을 제공. 이런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열등감을 내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일이 수세기동안 지속되며 아프리카의 바전을 더디게 했음.
- 일반적으로 역병이라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림프절 페스트를 생각함. 림프절 페스트는 벼룩이 옮기는 치명적 박테리아가 림프절을 파괴시키는 병. 감염자는 림프절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데 피와 고름이 나오고 구토와 각혈을 계속하고, 괴저와 괴사도 겪음. 이런 림프절 페스트는 북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아시아를 초토화시킨 적이 있음. 6세기의 유스티니아우스 1세의 감염, 14세기 흑사병, 그리고 런던 대역병까지 모두 상인들의 배에 실려 들어온 쥐들이 옮긴 병임. 곡물을 실은 배와 마차에 올라탄 쥐들이 대륙을 횡단해서 수개월만에 들어왔고, 심지어는 그대로 배와 말을 탄 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음. 사망자수는 급격히 증가. 인도, 파키스탄, 심지어 발칸지역과 중동 많은 나라에서 역병의 비명이 솟구치기 시작. 이 역병에 대한 두려움은 그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음. 흑사병은 마을전체의 인명을 앗아갔고, 국가인구의 절반까지도 줄였기 때문. 이 고전적인 질병의 위험은 아직도 가시지 않음. 림프절 페스트는 아직도 후진국 주변을 맴돌고 있음. 마지막으로 위세를 떨치던 국제 유행병은 아시아에서 일어났고, 59년에야 종식됨. 미국과 유럽에 역시 림프절 페스트와 그 밖의 다른 치명적 질병이 다시 일어나는 것도 있을 수 있음. 현대 의하은 인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극동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에서 일어난 전염병, 나병, 폐결핵의 발병을 막지 못했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국제여행이 보편화되면서 누군가가 확산되는 질병에 감염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음.
- 매년 닥히는 독감의 계절마다 사람들이 가장 노출되기 쉬운 유형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백신이 개발되고 있음. 그러나 이 백신들은 독감의 계절 직전 혹은 계절중에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는 없음. 모든 유형의 독감은 자체의 면역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한가지 유형에 대해서 면역이 생겨도 또 다른 종류에 노출되면 그 면역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됨. 유행성 감기 바이러스의 종류는 수없이 다양하므로 우선은 하나의 백신을 개발한 다음 관련되어 있는 모든 종류의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는 백신을 개발해내는 것이 필요.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는 데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 그러나 새로운 유행성 감기는 급속하게 생겨나므로, 그 전년도에 받은 예방접종이 그 다음해의 다양한 바이러스들로부터 사람들을 반드시 보호해주지는 않음. 이 점이 모든 사람들을 매년 취약하게 만듬. 그러나 매년 개발되는 백신은 그 6개월전부터 준비하기 때문에, 어느 유형의 유행성 감기가 가장 위험하고 널리 확산될 것인가에 대한 추측에 기초를 두게 됨. 이 점에 질병통제 예방센터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유행성 감기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새로운 바이러스에 끊임없이 촉각을 세우는 이유
- 수세기 동안 전염성 질병의 역사를 추적해 본 뒤,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동물들과 접촉한 후에 사람에게서 나타났다는 결론에 이름. 또한 여러 시대에 걸쳐 국제 유행병을 야기해온 대부분의 미생물들이 전세계에 분포되어있는 특정 지역의 동물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됨. 이곳들은 바이러스 과열지역으로 알려지게 됨.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긴 하지만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미국 서부 많은 지역이 여기에 포함됨. 에볼라는 콩코에서, 조류독감은 베트남에서, 그리고 인간에게 옮겨질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독감들 역시 대부분 전 세계의 바이러스 과열지역에서 발생. 전염성 질병의 역사적 연구와 카메룬에서의 자신들의 기초조사를 토대로 해서 네이선 울프와 그의 동료는 유행병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심각하게 역설하면서 미래에 국제 유행병 예언은 물론 심지어 예방까지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 그들의 이론은 치명적 미생물들이 종의 장벽을 넘기 직전에 과학자들이 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동물에게서 잠정적으로 돌연변이를 시도하는 바이러스를 검사함으로써 의학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전이되는 일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름. 울프와 그의 동료들은 접촉성 전염병에 대한 조기경고체제를 전세계적으로 만들 것을 제안. 이 조기경고체제는 바이러스 과열지역에서 사냥꾼이나 동물원 사육사 등과 같이 야생동물과 규칙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기적 검사를 포함. 예를 들면, 이 연구가들은 사냥꾼과 그들의 사냥감으로부터 표본을 수집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바이러스가 종의 장벽을 넘어서 동물에서 인간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을 발견. 실제로 그들의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피실험체 중 하나가 고릴라 레트로 바이러스에 걸림. 레트로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유전인자가 DNA대신에 RNA에 입력되는 것임. 이것들은 자기복제를 하고 감염을 확산시키기 전에 정상세포와의 결합을 필요로 하는 바이러스 군임. 과정은 다르지만 그 결과는 보통 동일함. 이런 인간과 동물의 상호작용 또한 역사의 한 단면을 형성함. 미국 원주민들은 왜 유럽 질병에 훨씬 취약했는가? 정착민들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이미 그들이 기르던 감염된 가축에 노출이 되어 있었고, 덕분에 훨씬 이전부터 면역성을 길렀던 것. 미국 원주민들은 그런 유형이 동물들과 마주친 적이 없었음. 바이러스 과열지역에서 동물들과 잦은 접촉을 하는 사람들을 감시함으로써 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정확한 순간을 발견할 수 있음. 이를 통해 중요한 정보를 미리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며, 다가올 국제 유행병을 예방할수 있음. 역사는 이런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또 다른 세계적 역병이 번졌을 때 그것을 수습하는 일보다는 비용이 적게 든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당장 실행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비싸다
- 우리가 알게된 사실은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생각도 다르게 하고, 문법조차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레라 보로디스키, 스탠퍼드 심릭학과 교수)
- 역사를 통틀어서 언어는 특권층이 노동대중에게 군림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을 현재의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어져 옴. 12세기 영국에서는 귀족들은 노르만어를 소작농들은 색슨언어를 사용.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라틴어로 쓰고 말했음. 문제는 바로 '역사는 그러한 노력들이 성공했다고 말하고 있는가?'이다. 만약 그렇자면 영어를 요구하는 일련의 노력이 어린 비영어권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도록 도와주었는가? 로마가 다른 나라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지방의 언어나 관습을 침탈하지 않았음. 이 원칙이 한 제국을 수백년 동안 지속시켜 줌. 하지만 그들은 사실상 모든 공식적인 사업과 공고문을 라틴어로 표기하도록 함. 이렇게 함으로써 누가 무엇을 하든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유리하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인식시킴. 결과적으로 라틴어는 서구세계의 국제어가 됨. 그리고 기원전 2세기경에는 지중해 지역의 공통어가 됨.
- 영어는 세계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영어는 과학, 항공교통 통제, 외교의 기본언어. 일본 아이들로부터 이집트 아이들까지 조기영어 교육을 받음. 언어가 쓸모 있기에 지배력을 가짐. 가끔은 라틴어의 경우처럼 정치적 이유 때문이기도 함. 혹은 그것이 사람들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켜서일지도 모름. 영어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중 하나는 융통성임. 당신은 매우 폭 넓은 환경과 개념들을 영어로 묘사할 수 있음. 영어는 이제 다른 유럽의 언어보다 두배나 더 많은 단어를 갖고 있음. 이 언어는 또한 과학과 기술적 토론에 적합하며 모든 과학논문을 출판하기 위한 언어로 채택됨. 만약 당신이 양자입자의 퇴행속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 양자입자라는 단어를 가진 언어로 생각해야 함. 만약 당신이 해류와 물고기에 관심이 있다면, 미크로네시아 언어가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임. 그러나 만약 당신이 배에 위성위치 확인장치를 설치하고자 한다면 사용법이 모국어가 아니라면 다른 언어보다 차라리 영어로 나오기를 희망할 것임. 미국영어는 앵글로 색슨 언어에 기초를 둔 복합어지만, 많은 다른 언어에서 비롯된 용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음. 따라서 영어는 지구상에서 가장 적용성이 뛰어나고 융통성이 있는 언어임에 틀림없음. 영어의 대중성은 미국과 영국의 합쳐진 영향력 뿐만 아니라 언어의 효율성 때문에 얻어진 것임. 미국 영어에 관해서 언어학자들이 하는 농담 중에 "영어는 어둠속에서 기다리다가 다른 언어에서 가장 좋은 단어를 가로채간다."는 말이 있음. 오늘날 영어는 보다 전통적인 언어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용어를 가로채는 데 여념이 없음. 이런 양상이 펼쳐진 것은 현대의 경우가 처음이 아님. 로마 공화국의 상업과 행정은 라틴어로 행해졌음. 마치 대부분의 글자를 아는 유럽인도 그리스어를 말해야 한다고 느꼈음. 18세기와 19세기 동안, 과학과 외교를 위한 언어는 프랑스어였음. 유럽과 미국의 상류층과 지식층은 필수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움. 오늘날 프랑스는 때때로 그 사실을 분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들 또한 영어를 배움.
- 매년 자산이 줄어들기만 하는 그루폰사는 수익을 남긴 적이 없고, 물리적 자산도 없는 회사였음. 그런데 2010년 4월 회사의 가치가 12억 달러로 평가됨. 단 한번도 배당금을 주지 않았고, 수익을 낸 적도 없는 스톡인 페이스북은 이 회사가 2012년 공개상장을 했을 때 2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산평가를 받음. 이런 평가가 합리화되는 것을 들으면, 마치 튤립, 플로리다 부지, 그리고 90년대 인터넷 주, 더 나아가서는 남해회사의 가격 합리화처럼 참으로 어이없게 들림. 단순히 말하면 주식은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여지에 따라서 평가되고, 이윤을 남기고 되팔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구제됨. 이런 일은 신용평가회사가, 회사가 실제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분배하는지 여부와 등과 같이, 회사를 평가하는 정상적 기준을 무시할 때도 발생함. 역사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의문이다. 투기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워싱턴, 런던, 그리고 베를린으로 하여금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영양을 끼쳤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악순환을 거듭 반복할 수밖에 없음. 선거에 당선된 관료들이 머나먼 과거가 아닌 지난 20년 동안의 투기거품을 통해 깨달아서 같은 실수를 방지할 수 있는가? 돈을 다루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역사로부터 배우고, 미래에 경기침체를 가져다 줄 근시안적 탐욕에 저항할 수 있는가? 여기에 맞는 사례에 관한 기록은 아직 없다.
- 오판하는 나라의 첫번째 만병통치약은 통화팽창이고,
두번째는 전쟁이다.
둘다 일시적 번영을 가져다주고,
둘다 영원한 파괴를 안겨다주지만,
둘다 정치적, 경제적 기회주의자들의 피난처이다. (헤밍웨이)
- 정부는 종이 같은 가치 있는 물품을 가져다가 그 위헤 잉크를 몇방울 뿌려서,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
- 역사적으로 강한 의지를 지닌 통일정부는 통화팽창과 싸울 필요가 있었다. 정치판에서 후보들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공약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당선되면, 그 공약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기를 원하지 않음. 쉽게 탈출하는 방법은, 정부가 정치적 현상유지를 위해서 마법의 돈을 더 많이 찍어내는 것. 이것은 짐바브웨에서 거대한 규모로 발생했던 일이며,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고 그 크기만 다른, 같은 일을 지금 미국이 하고 있음. 고대 로마인들이 최초의 희석주화를 사용했던 네로의 시대에는, 그것들이 진짜 주화만큼 좋은 것이라 믿었음. 그러나 말이 새나갔을 때에 그것들은 가치가 없어졌음. 그와 똑같은 일이 지금 미국의 달러에도 일어나고 있음.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은 물론이고 빚을 떠안은 투자자들과 시민들까지 그들이 1달러로 물건을 사기 위해 수레 한가득 채워서 들고 가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될 것임. 그러면 아무도 그 빚을 어떤 이자율에도 부담하지 않을 것이며, 확실치는 않지만 미국경제는 폭발하고 말 것임. 미국의 경제는 경제 대공황 이래로 최악의 경제위기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고 있고, 또한 통화팽창은 그 열기를 더하고 있음. 70년에 겪은 것과 같은 또 다른 스태그플레이션의 시기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음. 연준의 정책에 대해 우려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30년대의 끔찍한 불황을 피하려다가 70년대의 경제와 같은 치명적 상황을 안겨줄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음. 미국이 친숙하지 않은 국면에 처해 있는데, 세계에서 이렇게 크고 중요한 경제가 그런 빚을 진 적은 없었음. 유럽연합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과거 정부들이 한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함. 역사가 우리에게 수차례 보여준 것처럼, 과도한 통화팽창은 대부분의 경제위기가 비교적 가볍게 보이도록 만들고, 또 다른 불황이나 경기침체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음. 높은 통화팽창의 시기는 경제의 부진과 함께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 같음. 우리가 또 다른 통화팽창의 시기를 맞게될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님. 어느 국가나 세계가 회복을 꾀할 때에 통화팽창률의 상승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주었음. 연준은 이 통화팽창은 억제될 수 있으며 25번째 계산을 재정립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 하지만 아무도 통화팽창이 제거될 수 있다고 느끼지 않음. 미국을 비롯해 많은 유럽국가들은 대량의 부채와 적자지출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있음. 그 나라들은 항상 심각한 통화팽창의 전령들이었음. 남아 있는 유일한 의문은, 현재의 통화팽창 비율이 너무나 높고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로마제국의 몰락과 맞먹는 미국경제의 붕괴를 초래할 것인지 여부임. 우리가 봐 온 역사의 교훈은, 그런 일이 일너날 수도 있고 그 결과는 비극적일수 있다는 것
- 받아들일만한 수준의 실업이란, 받아들일 만하다고 말하는 정부의 경제학자들이 아직 직업을 갖고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 아마도 사회적 문제로서의 실업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16세기 영국으로 추정됨. 당시에는 거지와 실업자의 구별은 없었을 것임. 하지만 여러 요소가 합쳐져서 일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법을 어기는 것과 굶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함 했음. 부랑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허락하는 법도 있었고, 실제 그들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음. 일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죽일수도 있었음. 이것은 오늘날의 실업수당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개념임. 헨리8세의 집권시기에만 약 7만 2천명의 부랑자들이 거지로 몰려서 처형을 당했음. 1601년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복지 프로그램 중 하나가 영국 정부에 의해서 제정되었음. 이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일감을 원하는 사람과 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구분하였음. 그 법은 실업자들이 살면서 일할 구빈원을 만들어냄. 이 구빈원은 비참했으며 거의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음. 하지만 그들에게는 죽느냐, 감옥에 갈것이냐라는 외갈래 선택뿐.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관대하고 미래지향적 프로그램이었음. 산업화가 도시지역을 확고학 장악할 때까지는, 실직한 사람들 외에 그 누구도 실업을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음. 1800년대에는 전원의 농장에서 도시로 인구가 옮겨갔음. 도시에는 농장에서 필요한 인력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 산업혁명 후인 19세기 말경에는 실업이 증가하기 시작. 많은 노동자들이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겼고, 다른 유형의 많은 직업들이 쓸모없어졌음. 이 과정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바로 추수꾼들이었음. 탈곡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대규모의 농장에서 적어도 열두명의 일꾼들이 일주일동안 옥수수를 따거나 밀을 수확. 그런데 기계장비가 생기자, 같은 양의 농작물이 소수의 사람과 말들에 의해서 손쉽게 수확될 수 있었음. 인부 당 생산성과 농업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동시에 상품의 가격은 떨어졌음. 동일한 과정에 공장에서도 계속됨. 현 시대에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노동력을 로봇이 대신하는 극단적 예를 찾아볼 수 있음. 하지만 사람이 고용인이 아닐 때에는, 그들 또한 소비자도 아님. 그리고 그들이 공장의 물건을 살 수 없다면 물건을 만들 필욕 없게 되고, 따라서 아무도 직장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임. 이런 실업과 시장축소의 순환이, 비록 숫자상으로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기업들이 쓰러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임.
- 역사적으로 볼 때, 돈이 사용된 방법은 매우 다름. 30년대와는 달리, 정부의 돈이 복지후생계획이 아닌 고용창출에 직접적으로 투입되기도 했음. 하지만 경기부양기금 중 많은 부분이 실업수당 확장이나 식료품 구매권, 의료보장제도, 주택 등과 같은 정부지출로 배정되고 있음. 그리고 미국 근로자들에게 소비를 독려학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수많은 세금공제들이 있음.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소득증대의 형태로 경제에 되돌려주기 보다는, 개인의 부채상환이나 다음 불황의 대비책으로 절세나 환급을 이용함. 이와 같이 많은 주들과 지방정부들이 고용창출보다는 경기부양기금으로 그들의 부채를 낮추었다는 증거가 있음. 경기부양기금은 또한 많은 주들과 지방정부들이 교육자들이나 그밖의 다른 정부 직원들의 해고를 일시적으로 방지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줌. 이제 그 지원금은 없어졌고, 그 주들은 파산했으며, 직원들의 광범위한 해고를 단행해야 할 것임. 이것이 악순환임. 대량실업의 부담이 세수를 감소시킨 가운데, 재정적으로 바닥인 난 정부들은 점점 늘어가는 실업수당을 지불해야 할 것.
- 프리드먼은 "우리는 겪고 있는 현재의 금융위기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구제하지 못한 것이며, 거기서 벗어나도록 경기를 부양시킬수도 없다. 믿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발명하고 교육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미국이 역사적 전환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국민들이 거대한 사회적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표준이상의 교육을 한다. 그것이 조면기이거나 전신기계이거나 초고속컴퓨텅든 간에, 우리는 출현하는 과학기술 위에 국민들이 머물 수 있도록 기술교육을 한다." 라고 말했음. 그래서 프리드면의 경제회복 5단계 중 첫번째는 국민을 교육하는 것임. 두번째는 이민 규정을 개편하는 것. "우리는 이민의 국가이므로 그들 중 가장 재능있고 혁신적인 사람들이 이 나라에 머물 수 있게 해야한다. 아직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학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외국태생의 인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닐 수 있는 교육비자를 얻는다. 이 재능있는 이민자들에게 이 나라에 머물 수 있는 보다 더 쉬운 방법을 제공하고, 교육을 마치면 미국에서 새로운 회사와 과학기술을 창조할 수 있도록 해주어라." 라는 이야기임. 세번째는 기반시설을 늘리는 것. 그는 "우리는 세계최고의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지금은 무너지고 있다. 운송관리국이 추정하기로는 2035년 경에는 국가 고속도로중 40%가 어떤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최대도시에서 영업을 하는 회사들의 능력에 영향을 끼칠만큼 심각하게 체증을 일으킬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과 의회에서 권한을 부여받은 위원회에 따르면, 미국이 다음 10년 동안 인구성장에 발맞추려면 기반시설 비용을 두배 혹은 네배까지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함. 그리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루즈벨트가 일으킨 기반시설에의 대규모 지출이 30년대의 장기침체로부터 경제를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음. 어떤 사람들은 그 시도가 08년 장기침체를 막는데는 충분했지만, 지속가능한 회복을 이룩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고 반박. 그들은 기반시설과 같은 유형의 사업을 통해 고용창출에 투입될 2차적인 경기부양기금을 원함. 경제적으로 가장 강한 독일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은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기반시설을 갖고 있어서, 상업과 고용을 용이하게 만듬. 미국의 기반시설을 수리하고 대체하는 것은 두가지의 주된 금융 이익을 낳을 것. 먼저 상업, 여행, 직장통근, 학교, 쇼핑 등과 같은 것들을 쉽게 만들어서 경제가 더욱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임. 이는 단지 건설직 종사자 뿐 아니라 미국인들 대다수를 다시 일하게 만들 것임. 또한 건자재와 장비를 공급하는 사람들, 자재를 운송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반시설의 공사가 많은 지역으로 이동하는 근로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도 직업을 공급할 것임. 종목을 들자면 수도 없이 많음. 이것이 친성장 투자이고, 정확하게는 민간부문이 좋아하는 유형임. 이 장기사업들이 민간 투자자들로 하여금 주, 지역, 연방정부와 손을 잡고 공공사업에 자금을 대도록 권장할 것임. 프리드먼의 네번째 단계는 무모함은 지양하면서 자본과 투자를 권장하는 적절한 규율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은행이 주택담보 대출 위기때 사용한 것들과 같이 불건전하고 복잡한 파생상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한편, 그들이 투자와 대출을 해주면서 수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함. 비유량 주택담보대출의 위기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에는 마련된 규제조항이 거의 없었고, 신용을 무리하게 높이기 위한 금융정책과 위험도가 높은 대출이 무모함을 부추겼음. 이 위기는 너무나 커져서 세계경제의 전체 질서를 위협했음. 이것은 또한 기업의 성공을 막거나 혁신과 투자를 좌절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환경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함. 기업들이 시민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어떤 예기치 못한 세금이나 법률조항도 그들의 계획을 무효화 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또한 의미함. 마지막 다섯번째 방법으로 프리드먼은 정부가 후원하는 종합적인 연구과 개발계획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을 주장. 이는 전세계의 과학기술 전체를 대상으로, 이론적인것과 실제적인 것 모두를 아우름. 예를 들어, 소립자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것이 고용창출에 당장은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할지 모르지만, 응용된 지식이 지금까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산업의 근간이 될 수 있음. 연구로부터 얻어진 지식이 효용으로 바뀌기 때문. 또한 DNA의 비밀을 푸는 것이 다양한 질병의 치료법과 새로운 직업을 동시에 만들어낼 수 있음. 매년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생리학 감지기, LED칩에서 인공위성 기상보도와 조사까지, 60년대와 70년대에 우주계획을 위해 개발됬던 파생상품들이 기업의 전 분야에서 고용을 창출. 많은 정치가와 경제학자들이 연구와 개발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정부가 민간부문을 참여시켜 합작투자를 해야한다고도 믿음. 어떤 전문가들은 심지어 민간부문에게 세금특혜를 주어서 연구와 개발부분을 키우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미국과 같은 비교적 젊은 국가조차도 수많은 방식으로 여러번의 경기침체를 겪었음. 어떤 방식이 효력을 발휘했고, 우리는 그 해결책들을 어떻게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가? 1797년 국가는 부동산 투기문제를 갖고 있었고,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았음. 그래서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기침체는 그다지 독특한 일이 아님. 그렇다면 해결책은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사람들을 최악의 문제점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임. 그 당시에는 파산을 허용하는 새로운 법이 미국이라는 신생국의 중산층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해주었음. 1837년에 경기침체의 자극제는 운하투기였는데, 운하형 선박과 해상운송이 새로운 시작을 형성. 또 다른 걱정은 너무나도 성가신 무역불균형이었음. 미국은 아직도 유럽 국가들에게 파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사들이고 있었음. 시도한 해결책은 수입관세를 도입하여 더 많은 미국인들이 더 많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조장하는 것이었음. 그 실제적 결과는 무역전쟁이었고, 유럽의 국가들이 자체적인 관세법을 제정했음. 그로 인해 최종적으로 미국은 대량의 실업과 필요이상으로 더 길고 깊은 경기침체를 겪어야 했음. 오늘날 우리가 중서부라 부르는 서부로의 확장은 기본적으로 큰 안전밸브를 제공했고, 결국 번영을 가져옴. 1857년 또 다른 기술거품이 붕괴했음. 그것은 철도. 늘 그렇듯이 집값도 하늘을 찌름. 사람들이 대출금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은행들은 줄줄이 도산. 1863년 은행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국립은행법이 통과되었는데, 당시 은행들은 예금주의 돈을 갖고 마음대로 놀고 있었음. 이 장기침체를 종식시킨 것은 질병보다 더 나쁜 치료법이었는데, 바로 남북전쟁이었음. 1873년부터 1895년까지, 남북전쟁 후의 호황은 껍데기만 남았음. 철도 대부분이 다시 연루되었음. 적어도 그때까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22년 동안의 경기침체였음. 그때 벌어진 일은 오늘날 2000년의 인터넷주 거품과 08년 주택거품과 다시 한 번 비교해 볼 수 있음. 이번에 택한 해결책은 부자들을 개입시키는 것. 그들의 개인 재산을 빌려 앞서 빌린돈을 갚았는데, 이로 인해 초대형 은행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그들의 금 보유량은 바닥까지 내려감. 시티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 모건 스탠리,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이 사운을 걸고 현대의 불황과 싸우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행동한 사람은 다른 아닌 현재 모건스탠리의 창립자 JP모건이었음. 그로부터 12년후 1907년에, 또 다시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조하고자 나선 이 또한 모건이었기 때문. 이번에도 그는 월가 지도자들이 자신감과 신용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사용하게 했음. 빌 게이츠, 버핏, 래리 엘리슨, 조지 소로스, 도날드 트럼프에게 그들 개인 재산과 위신을 현재의 기나긴 불황을 타개하는 데 기꺼이 걸어달라고 요구한 것. 솔직히 말해서, 이 해결책이 또 다시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긴한다. 1929년 경제대공황은 오늘날 연방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해결책을 적용한 사례처럼 보임. 그 계획은 지출을 늘리고 기반시설을 구축하기 위해서, 공공사업 촉진국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었음. 많은 교각, 댐, 도로가 지어졌음. 심각하게 많은 적자 지출이 있었고, 새로운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우대 조치가 있었음. 그것은 효과를 보았다. 또한 은행이나 월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한 법이 통과됨. 1990년대에 스무트 할리 관세법과 같은 많은 법들이 중개업자와 은행들에게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폐지됨. 억제할 수 없는 그들의 탐욕이 경제를 다시 무너뜨리는 데는 고작 10년밖에 걸리지 않았음.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은행들이 최근이 다시 부활한, 유사한 법들에 대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고 있음. 이번만큼은 의회가 좀더 잘 배울수 있개를 바란다. 그리고 2차대전은 1937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림.
- 역사를 보면, 회복과 재성장을 위해서는 우리가 소비중심의 경제활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우리는 발명, 투자, 생산, 혁신에 기초를 둔 경제를 도모해야 함. 그리고 그것에는 정부, 민간부문, 그리고 국민들의 희생과 타협이 요구됨. 직업, 집, 사업, 모아둔 돈을 모두 잃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아픈 현실임. 그런 상처는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데, 다행히 가끔은 더 나아지게도 함. 그들은 진짜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됨. 더 많은 정부의 개입을 원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것의 한계와 부정적 영향을 깨닫게 됨. 정부의 개입을 덜 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역시 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삭감하는 순간,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를 직접 부딪치게 됨.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그들이 1907년 모건이 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가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한다면, 결국에는 기업가로부터 은퇴자들까지 모두가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회사들이 깨닫게 된다는 것. 그래서 역사가 주는 진정한 교훈은 미국과 유럽이 직면한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희생하고 일체감을 가지며, 개인의 이익을 제쳐두고 국가의 이익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 과거에는 이런 희생이 몇번이고 되풀이 되었고, 이후 상황이 호전되면 근로자나 고용주가 모두 이익을 얻었음. 이제는 우리가 다시금 이 희생에 대해 생각해볼 차례임
- 한 제국의 중산층이 사회적, 경제적 힘에 의해서 거의 완벽하게 제거된 예가 있음. 이 일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나라를 유지했던 고대 로마제국에서 일어났음.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일어난 일과 그로 인한 영향을 살펴본다면 정신이 번쩍 들 것임. 제국시대인 기원전 30년부터 서기 15세기까지, 로마의 원로원과 최고위 귀족들의 가족은 지나치게 부유했음. 그들은 자신들의 토지로부터 매년 2천만 세스테리스우스를 벌어들임. 오늘날의 미국달러로 환산하면 매년 2천만 달러 이상임. 그러나 오늘날 초대형 회사들처럼, 그들 또한 사실상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음. 거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은 크라수스만큼 돈이 많다는 소리를 들음. 불행히도 로마의 체제하에서 이처럼 부자로 대표되던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는 5년마다 한번씩 세금을 냈는데, 그 액수는 고작 오늘날의 달러화로 7만 5천달러였고, 그의 수입에 비하면 안낸 것과 같음. 로마에서는 부유한 귀족들이 세금을 낼 사람을 결정했기 때문에, 자신은 세금을 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은 당연한 일. 오늘날의 귀족은 회사들이고 로비스트들을 통하여 그들은 로마시대와 같은 이익을 챙김. 월급과 수당으로 수천만 달러를 버는 회사 사장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소비풍토 또한 2천년전의 남용과 동일함. 로마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물건은 없었음. 그들은 자신의 부를 뽐내기 위해 경쟁. 금은 지천에 깔려 있었고,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물건을 통해서 맵시를 자랑. 비둘기의 혀를 먹는 등의 극단적 요리도 등장했는데, 그런 음식들은 금화를 몇개씩이나 주어야 먹을 수 있었음. 그와는 정반대로 2세기에 일반적인 로마의 근로자들은 놋쇠로 만든 동전을 임금으로 받았고, 그 액수는 매우 적었음. 그들은 은화를 보기조차 쉽지 않았다. 최후의 2세기 동안에 로마제국은 파산하는 과정에 있었고 군비감축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가진 자들은 실질적으로 한푼의 세금을 내지 않음. 로마의 정부는 도로를 보수하고, 항구를 청소하고, 심지어 노상강도나 해적으로부터 상인들과 여행객들을 지켜줄 선원과 함대를 갖출 돈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 그들에게는 군대를 유지시킬 자원도 충분하지 않았음. 한때는 난공불락의 로마군대가 드러내 보인 새로운 약점은 고트족에서부터 훈족까지 온갖 침략자들을 불러들였고, 결국은 제국을 멸망하게 했음. 어떤 세법도 피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부가 하나의 강력한 작은 집단에 집중되어 있었던 로마는 더 이상 정부의 살림을 꾸릴 여유가 없었음. 결국 몇몇 침략자들에 의해 로마제국은 멸망. 사실상 비용을 아끼기 위해 선거권을 박탈당한 이탈리아 가난한 사람들은 로마를 위해 싸울 어떤 명분도 없었기에, 국경근방의 비로마인들이 징병됨. 역사의 수세기 동안 로마는 군대를 아웃소싱했다. 고대 로마에서 한때는 중산층의 농부였던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세금 및 채권회수 대행업자들에게 땅을 빼앗김. 순식간에 이탈리아의 모든 지역은 체불상태가 됨. 마치 오늘날 주택위기 때와 흡사하게, 로마의 은행들은 중산층의 농장과 주택에 대한 이자를 받기가 힘들어짐. 그래서 그들은 압류를 시행했는데, 그로 인해 한해에 한 지역에서만 수천개의 농장과 주택의 소유권이 바뀜. 오늘날 투기군들이 주택들을 사들여서 임대를 하는 것처럼, 그 농장들은 부자들에게 되팔렸고, 부자들은 땅들을 합쳐서 하나의 거대한 사유지로 만듬. 마치 거대한 회사가 지닌것과 같은 개념의 기업식 농장이었음. 부유한 로마인들이 거대한 토지를 사들이고, 전리품인 노예를 사용해서 남아있는 중산층 농부들보다 훨씬 싼 가격에 토지를 경작. 도매식품의 가격이 떨어지자 남아 있는 중산층의 영세농부들은 경쟁력을 상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남.
- 통념적 격언에 따르면 고등교육을 받아야 고소득을 보장받음. 하지만 폴 크루그먼은 단지 대학에서 더 많은 학생들을 배출한다고 해서 중산층이 확보되지는 않을 것이라 주장. 지난 수십년 동안, 대학 학위가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됨. 우리는 적어도 교육에 관해서라면, 하나의 옷이 모든 사람에게 다 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 그래서 중산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육제도를 자녀들이 합리적인 보수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알맞게 준비시켜주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음. 또한 추방된 모든 육체 노동자들을 위한 폭넓은 재훈련 프로그램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 또한 미래 세대들을 위해서는 과거 미국 근로자들의 특징이었던 혁신과 창의력에 초점을 맞춘 직업교육이 필요. 그것은 대학 학위를 필요로 할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
- 로마와 미국사이의 가장 명백한 유사점이 있다. 두나라 모두 식민지 국가들이었고, 또 다른 강대국의 파생물이었다. 로마의 전통은 트로이가 무너졌을 때에 그곳에서 도망친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고, 미국은 영국의 속국이었음. 로마가 민중이 아닌 원로원에 의해 건설되었던 것처럼, 두나라 모두 과두정부에 의해서 세워지고 통치되었음. 로마는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었음. 사실상 선거나 대학과 같은 요소들은 미국의 건립자들이 로마를 본보기로 삼기 위한 과정에서 생긴 직접적 잔유물임. 두 나라 모두에는 우민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 사실상 대부분의 최초 미국 상원의원들은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고 왕국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었음. 미국과 로마가 모두 작은 주들로부터 시작해서 매우 공격적으로 확장됨. 이 확장은 때때로 그들의 이웃이나 이전의 거주자들을 희생시키며 이루어짐. 미국 원주민들, 스페인 사람들, 하와이 사람들, 멕시코 사람들에게 미국이 어떻게 영토를 확장했는지 물어보라. 물론 로마는 지중해 유역 전체와 그 너머까지의 지역을 정복하거나 위협했다. 로마는 전세계를 점령하고 지배함으로써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필수불가결의 의무라고 여겼다. 또한 미국인들에겐 북미와 그 너머의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일컫는 용어가 있었다. 명백한 사명설. 물론 둘다 성공을 거두었다. 두 제국 모두가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의 경찰관이 되었음. 라틴어와 오늘날 영어는 전 세계의 많은 나라로 현재 확산되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 로마와 미국의 문화 모두는 다른 나라로 많이 수출되었고 지금도 수출되고 있음. 로마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초반의 미국은 말할 나위 없이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군대를 갖고 있고 최신식의 과학기술과 여러 기법들을 사용하고 있음. 또한 두 나라 모두가 그들이 내보내는 군대들이 한계지역까지 뻗어가는 것을 보았음. 매커비족으로부터 영국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군대와 맞붙는 것은 자살행위였음. 로마에 저항하는 것은 테러, 비밀유지, 반란이 포함되었음. 미국 역시 자신이 선택한 어떤 전장도 지배할 수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적들은 오늘날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고 있음.
- 미국이 현대판 로마제국인지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사실상 실질적이기 보다는 의미론적임. 그 유사성이 미국의 미래에 있어 불길한 전조가 됨을 아는 것이 중요. 미국은 로마제국과 많은 유사성을 공유하는데, 심지어 대영제국의 후반기와 많은 공통점을 갖기도 함. 사람들이 비교를 못해서 안달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제국과 마찬가지로 로마제국도 결국 붕괴했다는 사실 때문. 아무리 크고 부유하더라도, 제국들은 결국 쇠퇴를 맞음. 똑같은 일이 몽골제국에도 일어났는데, 거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2세기가 지나서 몰락. 대영제국 역시 1600년부터 1979년에 영국의 마지막 식민지들이 독립할 때까지 진정한 제국으로서 지속됨. 소련을 두려워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빨리 흘렀고, 불과 1905년 볼셰비키 혁명부터 1991년 8월 공산당 붕괴까지 지속되었을 뿐임
- 로마는 거주민이 백만명 이상이 될 때까지 성장. 유능한 로마의 기술자들은 물과 하수관을 공급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이무리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서 6,7층짜리 건물을 지을수도 있었음.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위한 직장을 마련할 방법을 찾지는 못함. 그 결과 1세기말 로마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25%가 일터를 찾지 못함. 이것이 문제가 됨. 로마에서는 폭동이 자주 일어났고, 그중 어떤 것은 황제의 몰락과 대규모 파괴를 야기. 어떤 로마 황제도 굶주리고 화가난 수만명의 군중들이 그의 성에 들이닥치는 걸 원하지 않았음. 그래서 그 도시는 열악한 동네에 무료로 빵을 지급했음. 그러고 나서 실업자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정치가들은 오락거리를 제공.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군중을 한꺼번에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은 대형경기장 뿐이었고 대안은 서커스였음. 대중들은 먹고 즐기며 만족스러워 했음. 한 세대가 지나기 전까지, 수만명의 로마인들은 어떤 다른 삶을 살거나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빵과 오락조차도 그들의 권리로 주장하지 못함. 이것은 그 대가로 발전이나 새로운 기업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내부 평화를 유지했을 뿐임. 황제들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생겨난 불만은 폭동과 정치적 격변을 초래.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유사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정부들이 복지에 의존하는 하위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 희소식이 있다면 레이건 정부 이후로 미국 정부가 이 염려를 인식하게 되었고, 의존성을 제한하고 다세대에 걸친 악순환을 깨뜨리기 위한 최초의 조치를 취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고, 다른 측면에서는 오히려 급격하게 커지고 있음. 2010년도에 미국 국민중 절반이 그들이 받은 도움에 대해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고, 675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보조금을 받았음. 그것은 다섯명중 한명꼴인데 11년과 12년 상반기에만 8%가 더 늘어난 것. 이것은 무료급식권, 저소득층 의료보험, 노인 의료보험, 임대료 보조금, 아동양육 보조비, 그리고 많은 개인적 복지 프로그램을 포함. 그러나 그것은 고대 로마의 도시에서 오늘날 우리가 빵과 오락이라 여기는 것들에 의지했던 사람들의 비율과, 현대 미국에서 생존을 위해 정부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같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
- 서부 로마 제국이 약화되고 시민들이 입대에 흥미를 잃을 때에, 군대의 질과 양이 떨어짐. 이윽고 여전히 부유한 제국은 충성심이 떨어지는 야만인 부대원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음. 그것은 연이은 침략자들의 너무나 유혹적이고 풍요로운 목표물이 됨. 만약 로마의 군대역사가 명백한 교훈을 하나 남겼다면, 미국과 유럽이 전쟁을 치르기 위한 방편으로 적극 활용하지 않더라도, 군대를 강한 상태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 모든 역사를 통틀어, 군대가 약하면 돈이 많이 소됴됨. 로마와 5세기의 경우 영국의 군대가 떠난 후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중국이 몽골에게 무너졌을 때에도 그러했음. 적자 예산을 운영할 때에는 이 사실을 알기 어려움. 하지만 누군가를 정복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방어만 하는 모습은 국가를 취약하게 만들고 외교를 제한함. 그리하여 결국 쇠퇴의 순간을 앞당김. 로마는 내부 테러분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 본보기가 되었음. 그들은 테러분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돕는 사람들마저 탄압. 이것은 이 전술이 항상 먹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님. 히브리인 자객을 저지했던 동일한 형태의 탄압은 거리에서 병사들이 했던 탄압과 마찬가지로, 결국 로마가 한 군단 전체를 잃고 수년 동안 포위를 당한 채 불안에 떨게 한 반란을 야기. 당연하게 반란에 무너진 유대인들이 치른 대가는 훨씬 더 컸고, 예루사렘의 재건된 성전 또한 파괴되었음. 로마는 효율적 정보부가 있어서 테러분자들을 색출하고 좌절시키는 데 사용. 기꺼이 필요한 대책을 세우는 것,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적절한 조치를 하는 것, 세계의 가장 효율적 군대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는 것 등이 로마의 전략이 효력을 발생하도록 만든 것. 9월 11일 끔찍한 아침을 맞았지만, 미국인들은 이 교훈을 통해 배운 것 같다. 미국은 동일한 방법의 집중적 정보수집, 테러집단에 대한 강경한 저지, 그리고 테러행위와 맞서 싸우기 위한 군대의 활용 등을 총 동원. 이것은 이라크와 아프간과의 전쟁에서도 사용된 전략이었음. 사실상 알카에다의 해체와 9월 11일 이후에 주요 테러분자의 낮은 성공률은 이런 대응이 효과적임을 보여줌
- 군대의 성공과 제국의 성장이 오히려 이 진정한 로마사회의 중산층을 비운에 처하게 함. 제국이 성장함에 따라서 부대원의 수요가 더욱 커짐. 남자들은 농장에서 불려나가서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쟁을 치르러 떠암. 율리우스 시저의 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 끌려가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의 농장은 실패하고 남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했음. 그들이 전쟁터에서 갑자기 돌아왔을 때, 건설을 도왔던 제국이 그들의 생계수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됨. 참전용사와 그의 가족들은 하류계층의 일부이자 대부분이 실직한 무리들이 처소인 로마의 빈민굴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됨. 누가 그 농장들을 빼앗았는가? 다름 아닌 부유한 귀족들과 로마의 원로원을 통제하는 상류층이었음. 이 사람들 중 한명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음. 그는 아마도 왕이나 황제를 제외하고 로마의 역사상 가장 큰 부자였음. 너무나 부유하고 영향력이 커서 율리우스 시저가 폼페이 대제와 로마의 지배권에 대해 협상을 할 때 그를 삼두정치에 포함시킴.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용하는 속어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크라수스만큼 부유한'이다. 그는 그만큼 부유했고, 그의 재산 대부분은 영세농부들로부터 땅을 인수해서 광대한 토지를 확보한 데서 왔음. 전쟁에서 군대의 성공은 로마 중산층의 파괴라는 또 다른 결과도 가져옴. 패배한 적의 병사들과 저항하는 도시의 주민들은 때로는 노예가 됨. 이것은 결국 로마와 이탈리아가 노예들로 득실거리도록 만듬. 크라수스를 포함한 부유한 귀족들의 땅의 높은 수익을 올리게 만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이 노예들이었음. 그것은 또한 도시에 모여든 이전에 중산층이었던 농부들에게는 직장이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 그러나 도시에서는 많은 직업들이 결코 노예들에 의해서 채워지지만은 않았음. 만약에 당신이 특별한 기술이 없다면, 노예들이 당신과 같은 일을 하고 훨씬 더 낮은 임금을 받을 것임. 도시에서 중산층은 일반적으로 장인신분으로 제한이 되었고, 가장 힘든 육체노동자의 계층상승은 거의 불가능했음. 수세기동안의 성공은 로마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고, 그 나라를 세계의 강대국으로 만든 중산층은 역사의 무대에서 멀어져 갔음. 부자들은 더욱더 큰 부자가 되었고, 그 밖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음. 이것의 결과는 바로 제국의 쇠퇴. 이 일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것이 아니지만, 한치의 주저도 없이 끊임없이 미끄러진 것임. 우리가 초강대국과 제국에 관해서 말할 때, 이 점차적인 쇠퇴가 4세기에 걸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 중산층을 제외하고 나면 제국의 성공과 보존에 있어 배당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구가 거의 없을 것임. 부자들은 원로원을 통제했고, 일반적으로 부자의 가족들은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해 싸웠음. 빵과 오락에 의존적인 계층과 결합한 결과, 후반기 공화주의 로마의 정치는 사나웠고 난폭하기까지 했음. 중산층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 만약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이 있다면, 심지어 매우 낮은 계층이라도 노력하고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음. 하지만 진정한 사회적 유동성이 막혀 버린다면, 그 사회의 모습은 암울하기만 할 것임. 로마에서는 중산층의 결핍은 특별히 로마인의 삶에 비관적이었고 부정적 영향을 끼쳤음. 로마의 쇠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 중 하나는 경제적 몰락이었음. 그 중 결정적인 것이 바로 중산층의 파괴. 중산층 농부와 상인들은 세금을 냈고, 군인들도 임금을 받지 않고 복무. 하지만 중산층의 상실로 인해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숫자는 감소되었고, 소비자인 중산층의 상실은 대부분의 제품에 대한 수요와 수입푼에 대한 관세의 감소로 이어짐. 만약 사회복지 사업과 그와 유사한 필수사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더한다면, 황제들은 결코 충분한 돈을 갖지 못했을 것임. 그 결과는 줄어든 군비와 사회적 불만, 그리고 경제적 술책 등이었음. 이것은 충고를 담은 이야기다. 로마인들은 결코 중산층을 부활시키지 않았다. 부자들은 부유한 상태로 머물렀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상태로 머물렀다. 군대는 점점 약해졌고 돈을 덜 받고 일하는 외국인으로 붐볐다. 그리고 야만인들이 몰려왔고, 마침내 암흑시대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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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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