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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사회 2014. 10. 18. 07:29

 


유동하는 공포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산책자 | 2009-01-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한층 두텁고 전일적인 ‘21세기 공포의 시대’에 대한 최고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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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의 문화란, 죽음에 대한 의식 속에서도 삶을 활기있게 하도록 고안된 교묘한 장치로 해독할 수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에도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문화의 창발성이야말로 경이적임. 다만 그 힘이 무한하지는 않음. 사실 알려져 있는 수많은 죽음회피전략들은 몇 안되는 범주로 구분될 수 있음. 온갖 변형이 있어도, 결국 사용되는 기본전략은 소수임. 이제까지 가장 많이 나왔고, 가장 효과가 있어 보이고, 또한 가장 유혹적인 문화적 고안이란 죽음의 최종성을 부인하는 것임. 죽음은 세상의 끝이 아니며 단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아이디어임. 최근 길버트가 한 말처럼, 종말이 아니라 종료라는 것. 죽음이란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에서 퇴출되는 것, 그리하여 소멸되고 무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님.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계속 존재하게 됨. 다만 그 존재의 형태는 죽음 이전과는 어느정도 다르겠지만 육체적 존재는 사라질 수 있으며, 낡고 헐어빠진 육신은 해체될지 모름. 그러나 세계 내 존재는 이 살과 뼈로 만들어진 감옥속에, 지금 여기에 한정되지 않음. 지금 이 육체적 존재란 끊임없이 계속되며 형태를 속속 바꾸어 나가는 과정의 하나에 지나지 않든지, 죽음과 함께 비로소 진정한 삶을 시작하는 영혼의 전단계일 뿐임. 따라서 죽음이란 육신이 스러짐과 동시에 영혼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음.
- 도덕적 판단을 평가절하하고 그것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부적합하다며 배제하려는 노력은 그 후폭풍을 통해 도덕적 판단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음. 그것은 의사결정자들이 어떤 수단을 사용할 것인지 찾는 일에 자유를 부여했고, 한편으로 난감함도 부여했음. 가치에 관한 관심과 고려가 줄어듦에 따라 가치 선택에 필요한 기술도 약화되었고, 가치선택이라는 과제자체가 평가절하되면서, 당장 쓸 수 있는 효과적 행동수단 중 어느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그때그때의 임의적 결정에 맡겨질 수 밖에 없어졌음.
- 우리, 자동기계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인 우리는, 복잡한 자연현상과 마주쳤을 때 우리의 창조물 안에 무력함을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후 흘러온 시간은 폰노이만의 예견이 정확했음을 확인해줌. 지난 반세기 동안 탄생한 신기술은 마치 자연물처럼 성장, 발전해왔음. 동기, 의도, 설계, 지향, 지휘 따위의 허깨비들은 완전히 맹목적인 메커니즘의 우발적 움직임에서 비롯되었고, 그런 움직임이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는 아무런 보장도 없었음. 아니, 우리를 막다른 골목이나 끝없는 늪으로 이끌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전혀 없었음. 뒤피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만든 기술이 발전 단계마다 더 큰 독자성과 자발성을 얻음으로써 하나의 비인간적 힘으로, 발명자인 인간에게서 자유와 자율성을 빼앗아가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자크 엘룰에 따르면 기술이 발전한 이유란 기술이 발전한 그 자체에 있지, 다른 어떤 원인도 동기도 없다고 한다. 엘룰보다 몇년 전쯤인 1958년,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인간의 조건에서 경고했음. 땅에 묶여 살면서 우주적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우리 인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해할 수도 없고, 가다듬을 수도 없다고, 그리고 또 몇년 뒤 한스 요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인간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영향을 주는 행동은 서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인데,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은 아담과 이브 이후로 거의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라고. 이 세명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모두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 우리는 도덕지체를 겪고 있다는 것. 어떤 행동의 동기는 그 행동을 한 후에야 비로소 정리되며, 그것은 종종 뒤늦은 사과나 정상참작으로 나타남. 한편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이따금 도덕적 고려와 충동에 따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당장 무엇을 쓸 수 있느냐에 따라 이루어짐. 우리 행동의 기동자로서 원인대신 의도가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 부정적 세계화에 추동되어 이상하게 변해버린 사회의 개방성이야말로 부정의의 최대 원천이며, 은밀하게는 갈등과 폭력 역시 양산하고 있음. 로이의 표현처럼 엘리트는 상상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떠남.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꼭대기를 향해, 반면 서민들의 범죄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꼼짝도 못함. 미국과 미국의 위성과도 같은 존재인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의 활동을 함께 보면, 편향적 발전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각종 위험한 부산물들, 즉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 파시즘, 테러리즘 등등이 이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프로젝트와 발걸음을 나란히 하며 성큼성큼 전진하고 있음. 경계없는 시장은 부정의의 레시피이며, 궁극적으로는 신국제무질서의 레시피임. 이런 국제질서 속에서는 정치가 다른 수단에 의한 끝없는 전쟁이 되기 때문. 전 지구적 무법성과 무장폭력은 서로 보탬이 되며, 서로에게 힘과 활력을 줌. 고대의 현자들이 경계했듯이, 무기가 말을 하면 법은 침묵한다. 피해와 손해의 세계화는 분노와 복수의 세계화와 맞물려 움직인다.
- 우리시대 열린 사회에 깃든 수많은 악령, 그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악령은 공포라 할 수 있음. 그러나 우리의 공포 가운데 가장 무서운 공포,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공포를 낳고 기르는 것은 현대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임. 불안과 불확실성은 또한 무력감의 소산임. 우리는 더 이상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음. 개별적으로든 우리 사회에 대해서나, 전세계에 대해서나, 그리고 우리는 갈수록 또렷하게 깨달아감. 두번째의 제약을 그대로 놔두고서는 첫번째의 제약에서도 결코 풀려날 수 없음을. 우리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수준을 향상시켜 권력이 차고 올라가 앉은 곳까지 밀어 올릴 수단이 우리 손에 없다는 사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공통된 조건을 형성하는 힘에 대해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선택지들을 재설정하고 우리의 선택권에 경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을, 그런 통제력은 지금 우리 손에 빠져나갔음. 아니 어쩌면, 빼앗겨버렸음. 공포라는 악령, 그 악령을 퇴치하려면 적절한 수단을 얻어야 함. 아니 더 정확하게는 만들어야 함
- 매일처럼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추구하라. 타인의 이익과 만족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과 만족에 영향을 주는 한에서 고려하라는 권고와 강요를 받는 근대인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 또한 자신이 내놓고 권고받고 훈련받은 정도의 진실성 없는 동정과 협동심. 그 이상을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음. 그런 사회에서는 인간동료를 실존적 불안의 원천으로 보고, 덫과 매복으로 가득한 적지로 보는 태도가 만연될 수 밖에 없음. 일종의 악순환이 이루어짐. 이런 개인의 태도가 인간적 유대관계를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그런 약화가 일어나도록 한 공포를 부추기는 것임.
- '진보', 한때 극단적 낙관주의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속적 행복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 말이었던 이 말은 이제 그 반대 길로 돌아서서, 디스토피아, 그리고 사람이 기대하는 최악의 극단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음. 이제 진보라는 관념은 쉴새 없고 피할 수 없는 변화라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그러나 변화란 어느 정도 수준의 확실성이 있더라도 예측되기보다 추측되는 것임. 평화아 휴식을 예언하는 대신, 미래의 변화는 한시도 쉴 수 없는 계속적인 긴장을 예고하며, 새롭고 낯선 요구로 위협하며, 어렵게 익힌 대처방식을 무용지물로 만들리라 예상됨. 진보의 이미지는 마치 끊임없이 서로를 앞지르려 하는 게임과 같은 것으로 바뀌었고, 그 게임에서는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돌이킬 수 없는 패배와 취소될 수 없는 추방으로 이어짐.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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