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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22 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저자
패멀라 D. 톨러 지음
출판사
다른 | 2014-07-03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았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인류의 ...
가격비교

- 현생 네안데르탈인 : 많은 학자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교류는 인정하지만 그 교류가 혼인과 출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 그러나 최근 DNA염기서열 분석법은 그 이론을 반박함. 10여년전 몬트리올 대학 연구진들은 인간 X염색체의 DNA변이를 밝혀냄. 이 변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대립형질의 일배체로 구성되어 있었음. 그러나 몬트리올 대학 연구진은 이 일배체의 기원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10년 하버드 대학과 MIT 공대가 네안데르탈인의 화석뼈에서 추출한 DNA파편 10억개의 게놈염기서열을 분석하여 그 비밀을 밝혀냄. 네안데르탈이 게놈을 흔지 않은 일배체와도 비교하고 다른 지역 인간 DNA와도 비교. 그 결과 그 일배체는 네안데르타인 게놈의 연기서열 분석과 일치했고, 사하라 사막이남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라 출신이 아닌 현생인류 DNA중 1~4%를 차지했음. 이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했다는 설은 설득력을 잃음. 그들은 우리안에 살아있다.
- 왜 밀이었을까? 밀, 보리, 옥수수 등 야생곡물은 줄기끝에서 자람. 그래서 바람이 불면 낟알이 바람을 타고 흩어짐. 그러면 떨어진 자리에서 발아하여 더 많은 줄기를 생산. 그런데 밀과 보리의 유전자 돌연변이는 씨가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음. 씨가 떨어지지 않는 줄기는 진화상으로는 마지막 단계라서 스스로 재생산을 못함. 이런 씨앗이 농업의 시작이 됨
- 고대 아메리카인이 옥수수를 재배하게 된 경로에 대해서 식물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둘로 갈림. 하나는 현재는 멸종한 어떤 야생풀에서 진화했다는 의견. 다른 하나는 테오신트와 옥수수가 다르긴 하지만 옥수수가 테오신트에서 진화했다는 주장. 어쨌든 기원전 6000년 무렵 중앙아메리카 고대인은 특별한 농경방법을 개발. 곧, 콩과 호박과 옥수수를 한밭에 심는 것. 그러면 콩과 호박은 옥수수 대를 울타리 삼아 넝쿨을 치고, 옥수수는 콩의 질소소정뿌리혹에서 영양소를 흡수. 후대 아메리카 원주민이 세자매 농법이라 부른 이런 공생관계는 요리로로 디어져 콩과 옥수수를 함께 요리하면 영양이 풍부한 완전식품이 됨
- 기원전 9000년 무렵, 텔 문화라고 알려진 최초의 도시가 서아시아에서 나타남. 텔은 아랍어로 언덕이란 의미. 당시 잉여곡물을 노린 유목민의 침략이 빈번했고, 이를 방어하고자 언덕에 마을을 세웠던 것으로 보임. 마을 둘레에 돌로 벽을 쌓기도 했음. 이 시기 마을로는 나투피안족의 예리코가 가장 유명. 예리코는 현재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있음. 신석기 시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마을은 예리코만이 아님. 기원전 7000년 무렵 터키 차탈 휘유크, 기원전 6200년 무렵 불가리아 카라노보, 기원전 3000년 무렵 파키스탄의 코트 디지, 기원전 2500년 무렵 중국의 청쯔야 등 농경이 시작되었던 무렵의 도시임. 이 도시들은 문화는 달랐지만 공통 특징이 있음. 홍수를 다스리려고 관개에 힘썼고 신전과 곡물창고를 세웠음.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 있었고 신에게 제물을 바쳤음. 예리코에서 터키의 흑요석과 시나이의 터키석, 지중해의 바닷조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교역과 전쟁도 있었을 것으로 보임
- 농업혁명이 중동의 발생지에서 널리 퍼지기까지는 수천년이 걸렸지만, 새로운 청동제조기술은 순식간에 보급되었음. 기원전 2000년 무렴 중국의 상왕조 장인들은 독특한 청동그릇을 생산. 번화한 광산, 금속세공, 교역소가 기원전 1800년 무렵 중앙유럽과 기원전 1500년대 스칸디나비아에서 발달. 청동을 만들려면 구리와 주석이 모두 필요한데, 이 두 광석이 한지역에서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음. 그래서 이것들, 특히 주석을 얻기 위해 발트해 연안에서 지중해를 거쳐 북인도에 이르는 지역 무역망이 맞물리면서 발달할 수밖에 없었음. 주석은 희귀금속이기 때문에 호박, 모피, 견, 금, 파이앙스 구슬, 흑연, 세공한 청동, 소금과 함께 국제시장의 주요 상품이었음. 새로운 도시와 문화가 그 무역로를 따라 일어난 것은 당연할 것임. 구리와 주석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현재의 프라하지방은 도구와 무기를 생산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새로운 우네티체 문화가 발달. 청동기 시대는 자원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생존의 불안도 커짐. 청동무기는 돌이나 구리무기보다 훨씬 치명적이었음. 돌낫으로 무장한 농부가 구리창으로 무장한 병사와 싸워볼 수는 있지만, 청동 갑옷을 입고 청동칼을 든 병사와는 싸워볼 기회조차 없었음. 그리하여 새로운 군사 엘리트 계급이 생겨났음. 역사상 최초의 무기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음. 기원전 1500년대는 청동기 시대의 절정기였음. 지방 족장의 돌무덤에서도 정교한 청동도끼와 투구가 나왔음. 이제 청동은 중국 상왕조에서 영국 야만족에게까지 퍼져나감. 중동에서 처음 마을이 출현하고 몇천년마에 문명이 탄생한 것.
- 문명의 시작, 철 : 인간은 처음부터 이런저런 형태로 철을 이용했음. 선사시대 우리 조상은 황철석을 갈아서 동굴벽화에 색을 입혔고, 그 후에는 토기의 유약으로 사용. 부적 속에 운철 덩어리를 넣고 다니기도 했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쇠를 녹여 합금을 만들기에 이름. 인류의 숱한 발견처럼 값비싼 청동에서 철로의 이행은 절박함이 낳은 발명의 결과. 청동제조에 꼭 필요한 주석을 더는 구할 수 없게 되자 키프로스의 한 청동 대장장이는 지중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검붉은 철에 주목. 철이 청동보다 더 잘 잘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도끼와 칼에 사용. 배를 만드는 데도 쇠못이 더 나았음. 100년도 지나지 않아 철은 농업과 전쟁을 힘센 부자들에서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확대. 철은 지구를 이루는 원소 중 가장 풍부하며 지구핵의 90%를 차지.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출이 수천킬로에 달하는 보호막을 형성함. 이 보호막이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태양풍과 태양흑점에 그대로 노출됨. 따라서 지구핵의 철이 계속 회전하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생명이 더는 존재할 수 없음. 철은 이렇게 우리 행성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에 땅위에서나 땅속에서나 광범위하게 발견됨. 아프리카 중앙에 있는 니제르는 지중해와 별도로 독자적인 제철공정을 개발. 니제르 사람들은 아주 높은 고온 용광로에서 작업했고 천연풀무를 이용. 그들이 사용한 용광로 유적이 오늘날 사하라 사막의 남부 초원지대에서 발견되었음. 이중에서 시기가 가장 이른 용광로는 제철기술이 이집트와 키프로스에 들어오기 훨씬 전인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임. 아프리카의 대장장이들은 지중해보다 더 일찍 철을 녹이는 비법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탄소원자를 철에 결합시킬만큼 뜨거운 고온 용광로를 제작. 이 기술이 바로 현대 강철 제작의 토대임. 기원전 1000년 이후 철은 청동을 제치고 세계의 주요 금속이 됨. 칼과 쟁기뿐 아니라 마차와 바퀴와 철로, 자동차 부품에도 사용됨. 작고 값싼 못에서 고층건물 골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철기시대를 살아간다 말할 수 있음. 주철 프라이팬에서 핵 반응로에 이르기까지 철과 강철은 세계에서 사용되는 금속의 90%를 차지.
- 페르시아 전쟁은 단지 제국과 민주주의의 싸움만은 아니었음. 그것은 서로 다른 전쟁방식의 대결이었음. 페르시아 군대는 시작부터 기병과 궁수라는 정예군으로 무장. 반면 그리스순은 긴 창과 양날의 칼로 무장한 보병위주. 각 도시국가는 자체 민병대가 있었고 민병대는 그들이 들고 다니는 호플론이라는 커다란 둥근 방패에서 이름을 딴 호플리테라는 시민군으로 구성. 이 방패는 팔랑크스라는 그리스 전투전술에서 중요한 요소였음. 팔랑크스 전술이란 중무장한 보병이 길게 밀집하는 전투대형이었음. 밀집한 보병은 서로 방패를 겹쳐들고 방어하면서 나팔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전진. 이 대형은 바꾸기 어렵고 적도 이 대형을 뚫기 어려웠음. 그런데 일단 대형이 뚫리면 오합지졸에 불과했음.
- 팍스 로마나는 오래가지 않았음. 3세기 중엽 로마제국은 무너지기 시작. 235년에서 284년 사이 26명의 합법적 통치자와 40명의 왕위 찬탈자가 로마황제의 자리에 오름. 그들 대부분은 무능력했음. 두사람을 제외한 모든 황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음. 재위기간이 3개월도 되지 않는 황제도 있었음. 여러 황제가 동시에 난립하는 일이 잦았음. 그런 상황에서 로마군만이 유일하게 안정된 권력으로 남아 있었음. 그들은 장군의 명령에 따라 황제를 옹립하기도 하고 폐위하기도 했음. 지구 건너편 중국에서는 아직 한나라가 계속되었지만 초기 한나라 황제들이 누렸던 절대권력은 얻지 못했음. 2세기 중엽에는 어린 황제가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짐. 당파싸움이 극에 달하고 환관에 의한 궁중음모가 판치고 외척이 황제를 좌우함. 220년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고 중국은 세개의 독립국가가 공존하는 삼국시대로 접어듬. 중국의 권력구조가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도 실크로드는 열려 있었음.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를 대신해 처음에는 비잔티움이 나중에는 서유럽 왕국이 중국의 사치품 시장이 됨
- 455년, 쇠퇴일로를 걷던 문명의 중심 로마가 서고트족과 훈족의 공격으로 최후의 일격을 받음. 반달족이 로마를 침략. 황후를 납치하고 도시를 불태움. 로마의 철학과 역사, 과학, 수로관, 문자해득 능력이 폐허속에 묻히고 초기 로마 교회의 약속과 시가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 이제 하나의 제정 대신 대토지 소유자와 부족장을 중심으로 한 수십개의 소왕국이 치안을 맡음. 로마의 자랑인 도로는 그대로 있었지만 여행하기에는 위험했음. 우리가 암흑기라고 기억하는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됨. 인간의 문명은 유럽에서는 암흑기로 접어들었지만 동방에서는 전성기를 맞이함. 동로마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여전히 건재했음.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신도군을 이끌고 개종과 정복을 탁월하게 결합함으로써 아라비아 사막 너머로 교세를 확산시킴. 그 비용은 대부분 아라비아 금광에서 충당. 한편 13세기 중세시대가 끝나기 전 기사가 주축이 된 서구의 군대는 가슴에 십자가를 새기고 무슬림과의 전쟁을 선포.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피바다로 만들 것임. 이들의 대립과 갈등은 상업적 교역과 문화적 교류의 씨앗이 되기도 하지만, 수세기종안 지속될 문명충돌의 첫단계이기도 했음.
- 235년부터 284년까지 재위에 올랐던 통치자들과 권력찬탈자들은 정치적으로 무능한데다가 북쪽과 서쪽으로부터는 게르만족의 위협을, 동쪽으로부터는 페르시아에서 새롭게 일어난 사산제국의 위협까지 직면하게되어 도저히 제국을 통합할 수 없었음.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를 네 지역으로 분할해서 공동황제가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음. 황제는 일시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이는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영원히 분리되는 결과를 낳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 제국은 모든 부를 가졌지만 페르시아에서 새로 발흥한 사산제국의 방어에 집중해야 했음. 서로마제국은 부패하고 무능한 행정관들과 야만족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됨.
- 노르웨이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나 장인, 상인이었으나 봄이 되면 일부가 해적이 되어 수도원을 약탈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잡아감. 물론 교화를 모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엇음. 영국제도의 부유한 수도원은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음. 영국제도의 기독교 전례서에는 특별 기도문이 있었음. "하느님, 저희를 북쪽 사람들의 분노로부터 구해주소서"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음. 그들의 약탈은 기습공격이 특징. 배의 속도와 기동력이 단연 앞섰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는 어려웠음. 아일랜드의 연대기인 얼스터 연대기의 저자는 그들의 침략대상을 대서양의 태풍에 비유. "바다가 아일랜드 위로 이방인 홍수를 내뿜으면 안식처도, 부두도, 근거지도, 요새도, 성도 파도같은 바이킹 해적에 휩쓸려 가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830년대로 접어들면서 바이킹 약탈 양태가 변화. 고립된 수도원을 공격하기보다 대규모 탐험대를 조직하여 기지를 구축하고 방어공사를 했음. 다음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할 의도. 진지는 촌락까지 확대됨. 침입자는 지역의 왕과 혼인동맹을 맺으며 정치적 갈등에 깊숙이 개입하고 점점 노르만족과 러시아인으로 변모해감. 노르웨이 바이킹족은 아일랜드의 조용한 동쪽 해안에 더블린을 시작으로 안나가산, 웨스퍼드, 워터퍼드, 코크 같은 항구마을을 세움. 이 마을은 처음엔 다음 탐험을 대비해 배를 수리하기 위한 한적한 겨울 야영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 중심지로 발전. 그들은 아일랜드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의 항구마을 낭트를 약탈하고 843년에서 862년 사이에는 루아르 계곡까지 올라갔고, 850년대에는 에스파냐를 거쳐 북아프리카까지 진출. 북아프리카에서는 황실의 두여자를 납치하여 거액의 몸값을 받고 돌려보내기도 함
- 데인족은 잉글랜드를 집중적으로 약탈. 835년부터 템스강을 따라 방어기지를 세우고 이곳을 기점으로 30년간 공격을 가함. 9세기말까지 요크셔 북쪽에서 템즈강까지는 데인족의 지배하에 놓임. 노르웨잉인처럼 데인족도 영국해협 반대편까지 침략해 들어감. 911년 데인족의 지도자 롤로는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단순왕과 조약을 맺고 그의 가신이 되는 조건으로 네우스트리아 지역(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받음.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베르트라는 세례명도 받음. 그의 바이킹 전사들도 노르만인이 되었고, 1066년에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데인족 통치자를 무찌름. 스웨덴인도 동쪽으로 이동. 처음 발트해에서는 교역과 거래를 구실로 접근했지만, 후에 러시아에서는 정복자로 군림. 858년 지도자 류리크는 새로운 나라 러시아를 세우고 키예프를 수도로 정함. 현재 러시아인의 선조인 류리크의 바이킹은 비잔티움과의 교역로로 드네프르 강을 이용. 볼가강은 카스피해로 갈 수 있는 통로였음. 볼가는 이들이 모피와 노예를 팔고 중국비단을 사들이면서 동서 무역망의 일부가 됨
- 637년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고나서도 무슬림과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평화롭게 잘 지냈음. 아무도 기독교 왕국이 조치를 취해주기를 원하지 않아음. 그런데 11세기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독교가 전파되는 속도는 유럽이 로마제국보다 더뎠음. 유럽인들을 선교하는 것은 로마가 몰락하고 나서는 어렵고도 보람없는 일이었음. 785년 말 게르만 왕국사이에서 기독교가 거의 퍼져 나가지 못하자 샤를마뉴는 세례를 거부하는 색슨족에게 사형을 내렸음. 1095년에도 여전히 이교도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12세기까지도 개종하지 않았음. 동쪽의 슬라브 족은 훨씬 나중에야 개종.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끝까지 이교를 고수하다가 1386년에 마지막으로 개종. 변방의 이교도에게 1095년의 기독교 왕국은 로마 카톨릭을 의미할 뿐이었음.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왕국의 수장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자들보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더 많은 권력을 원했음. 로마가 멸망하고 난 후 유럽은 점점 번창했음. 기원전 9세기 근동의 발전에서 보았듯이, 유럽 농업기술의 작은 발전들이 여타 분야의 발전까지 촉진. 잉여 농산물이 생기자 상설시장이 생겨났고 이것은 마을로 성장. 어떤 사람들은 농노에서 해방되어 수공업자들이 됨. 도시에서 소수의 중간계급이 형성됨. 물물교환과 호혜주의에 의해 밀려났던 화폐가 11세기에 다시 경제에 나타남. 몇세기 만에 처음으로 부유하고 신앙심 깊은 유럽인들이 돈을 손에 들고 순례를 시작. 캔터베리, 로마,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지들을 순례. 순례자들은 종교적 경험과 모험, 그리고 이슬람 보물들을 갖고 돌아옴.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규모 순례여행이 확산될 즈음 근동의 권력판도가 변화. 1071년 셀주쿠 투르크족이 팔레스타인을 정복.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인은 이전의 이슬람 통치자들보다 다른 종교에 덜 관대했음. 기독교 순례자들은 소소하게 이런저런 모욕을 당했고 많은 돈을 치러야 했음. 이교도의 푸대접에 대한 불만이 점점 고조됨. 유럽의 지도자와 정복자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게임의 승자가 될수는 없었음. 장자상속제로 왕위계승 전쟁은 줄어들었지만 귀족중에 토지가 없는 젊은이들이 생겨남. 이들이 합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곳은 교회와 전쟁터뿐이었음. 11세기가 되자 쳐들어오는 야만인과 싸울 필요도 없었음. 바이킹 조차도 정착해서 노르만족이 되었기 때문. 동쪽에서의 전운은 미래가 불안한 젊은이에게 영광과 약탈품과 토지를 획득할 절호의 기회로 보였음. 이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던 교황 우르바누스는 군인들이 자신의 부름에 응하리라는 것을 알았음. 사실, 모든 사회계급 남녀가 십자군에 참가. 1096년 봄 동쪽으로 향한 십자군은 군인이 아니라 민중 십자군으로 알려진, 거지, 부랑배 등의 빈민집답이었음. 프랑스 수도사인 은자 피에르가 인솔한, 붉은 십자가를 새긴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있었지만 무기도 없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음. 누더기를 걸친 십자군을 처음 본 무슬림 통치자는 그들이 침략자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음. 무슬림은 산적을 소탕하듯 싹 쓸어버림. 두번째 십자군을 달랐다. 잘 훈련받은 지휘관이 이끄는 기사와 궁수가 1097년 여름 팔레스타인에 도착. 십자군은 니케아, 에데사, 안티오크를 차례로 점령하며 무자비하게 팔레스타인을 도륙함. 그러나 무슬림 지도자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유럽의 침입자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음. 십자군이 마라(현재 시리아의 마라트 알-누만)에 이르렀을 즈음, 포위하는 십자군도 포위당하는 무슬림만큼이나 식량이 절박했음. 십자군은 전령을 보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 그러나 막상 항복하자 십자군의 포악함은 극에 달함. 역사가인 엑스라샤펠의 알베르에 따르면 기독교 군대는 죽은 개뿐 아니라 살해한 투르크인과 사라센인을 먹는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십자군은 거침없이 진격해서 1099년 6월초 예루살렘에 도착. 40일간의 공방전 끝에 십자군은 마라에서 했던 제안을 똑같이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했음. 항복하라. 그러면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 놀랍게도 예수살렘 시민들은 항복했으나 또다시 십자군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림. 이틀동안 닥치는 대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고 거리에는 무슬림의 머리와 손, 발이 산더미처럼 쌓임. 예루살렘의 무슬림은 사실상 생존자가 전무할 정도였음. 유대인은 신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으며 유대교 회당에 숨었음. 십자군은 회당의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지름. 예루살렘의 기독교인조차 용서받지 못함. 예루살렘의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다양한 동방정교회 일원이었기 때문에 십자구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유배했음
- 대략 800년부터 1200년 사이 수백년 간 유럽인은 온화한 겨울과 기나긴 여룸, 그리고 풍작을 누림. 곡물생산량이 안정되는 호시절이 이어지면서 유럽인들은 암흑기를 벗어나는 첫 발판을 마련. 먼저 유럽내의 교역로를 정비하고 나서 아시아와의 교역로도 재건. 유럽의 최북단 지역에 살던 노르웨이인들은 빙하가 녹는 틈을 타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정착했고 북대서양도 건너감. 유럽이 온화하던 수백년간 다른 지역에서는 문제가 나타남. 온도의 상승과 불규칙한 강우 유형 등 이상기후 현상이 심각했음.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면서 뉴멕시코의 차코 협곡을 따라 거주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왕국은 종말을 맞았고, 중미 마야왕국은 세력이 약해짐. 몽골에서 중세 온난기는 덥고 건조한 기후로 찾아옴. 말을 먹일 초원이 점점 줄어들자 칭기즈칸은 군대를 일으켜 더 비옥한 땅을 찾아 동쪽으로 향함. 이처럼 지구 온난화는 제국 팽창에 지대한 역할을 함. 오늘날 중세 온난기는 지구 온한화에 대한 토론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임. 인간을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중세시대 상황을 자연적인 기후변화 현상에서 기온상승기에 해당한다고 지적. 그 근거로 소빙하기라는 비교적 선선한 기온 하강기가 뒤따랐다는 사실을 제시함. 사실 중세 온난기의 온도는 71년 이후 기록된 지구 평균온도보다 몇도 더 낮았음.
- 최초의 페스트는 1331년 중국 허베이에서 발생. 허베이 인구 90%를 죽음으로 몰고감. 질병인자를 지닌 벼룩에 감염된 쥐들이 곡물 마차와 교역물품에 들어가 대상 무리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그병은 중국에서부터 무역로를 따라 확산됨. 중국에서 서쪽으로 퍼져나가던 전염병이 멈춘 곳이 단 한곳 있었음. 현대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경계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인 이식쿨이었음. 이식쿨을 기점으로 대상들은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카파, 바그다드, 타브리즈로 여행. 기록을 보면, 1338년 이식쿨의 한 남자가 의문의 병으로 쓰러짐. 그의 아내가 온갖 민간요법을 치료했으나 끝내 사망하고 아내도 잇달아 사망. 이듬해 평균 사망주 수보다 102명이 더 많은 106명이 갑자기 병에 걸려 사망. 그리고 마을묘지 비석을 보면 106명 사망원인은 같았음. 1348년에서 1350년까지 흑사병이 절정에 달함. 얼마나 극심했는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서양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이름. 그 병은 1347년 제노바 무역선 열두척이 이탈리아의 메시나 항구에 정박하면서 유럽으로 유입됨. 선원 대부분이 전염병으로 죽거나 죽어가고 있었음. 그 병은 전염성이 너무 강해 말만 섞어도 감염되었음. 메시나에 도착한 전염병은 몇달 내에 제노바와 피사로 퍼졌음. 그해말 질병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극성이었고 상선을 타고 파리로, 저지대로, 영국으로 퍼짐. 1349년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로 퍼짐. 1350년에는 북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로 가서 바이킹 정착지를 휩쓸었음. 그리고 2년뒤에는 러시아에 도착.
- 14세기 슈트라스부르크의 유대인 학살은 인산사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성 말살을 상기시킴. 인간에게는 어려움이 닥칠때마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경향이 고개를 듬. 극심한 흉년이 들거나 전국적인 유행병이 번지거나 경제가 실패하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원인을 전가할 소수집단을 찾아 군중으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도록 부추김. 군중은 집단 히스테리에 사로잡힘. 이런 군중심리는 역사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남. 고대 로마에서 박해받은 기독교인, 16세기 마녀사냥, 19세기 러시아와 폴란드의 반유대주의, 20세기 초 터키에서의 미국인 학살, 2차대전 유대인 학살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 인종적 증오, 미신, 편견, 무지는 공동체와 국가를 분열시키고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는 강력한 힘이다.
- 5세기 로마멸망 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수세기동안 비잔틴 제국으로 명맥을 유지. 제노황제 치하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자신이 로마의 유산을 이어받은 세계의 중심임을 주창. 황제들은 로마의 행정체계를 존속했지만, 행정과 군대 공식어로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채택.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근동아시아의 교차로라는 지리적 입지 덕분에 수세기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유럽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무역거점으로서 서양에 동양의 지원을 연결. 비단과 향신료가 수천킬로미터를 이동해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곤 했음.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향신료는 후추였음.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할 즈음 후추는 금값이 됨. 8세기 이슬람 팽창의 첫번째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비잔틴 제국은 끊임없이 공격을 받음. 비잔틴 제국은 아랍인과 불가리아인, 마자르족을 차례로 물리치고 영토를 지킴. 1204년에는 서구 기독교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 침략때마다 제국의 영토가 야금야금 떨어져나감. 수세기 동안 끊이지 않은 전쟁으로 비잔틴 제국이 재물과 방어막은 축났고, 병사들은 14세기에 부상한 신흥 강국 오스만 투르크를 더는 막을 수 없었음. 1361년 무렵 오스만 제국이 예전 비잔틴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고,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협도 장악. 이에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은 도시국가로 쪼그라들음.
- 비잔틴 제국의 초대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수도를 건설하면서 굳건한 성벽을 최우선으로 구려. 여기에 망루와 배수로를 갖투고 60미터 너비와 30미터 높이의 3중 방어막을 세운다면 후대의 황제들에게 영원한 제국을 물려줄 수 있으리라 확신. 오스만 제국 이전에도 숱하게 공격을 받았지만 어떤 침략군도 10층 건물 높이의 요새를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함.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수만의 병력과 대포를 주둔시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이 두가지를 병행하는 전면 공격법을 실행함으로써 그는 전쟁의 기술을 완전히 바꿈. 투르크인이 소유한 대포는 수많은 인명을 죽일 수 있는 살상무기였음. 대포는 원래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유럽인들이 교회종을 만들던 금속주조기술로 발전시킴. 15세기에 아직 비잔틴 제국에 속하던 근방의 사람들이나 나라로서는 자신들의 수도가 오스만 제국의 대포 화염에 몰락했다는 사실은 9/11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한 것만큼의 충격이었음. 난공불락의 요새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은 전쟁의 기술과 도시설계를 변모시켰음. 1453년 이전에 사람들은 공격을 피해서 도시로 몰렸는데, 성벽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었기 때문. 먹을 거리와 물, 무기가 충분하다면 방어군이 언제나 유리했다. 메흐메트는 도시성벽이 군대르르 더는 물리칠수 없음을 증명했음. 대포가 성벽을 공격하면서 공격군이 한층 유리해진 셈
- 초기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가장 많이 죽인 전염병은 천연두였음. 1520년 천연두가 제일먼저 발생했고, 뒤를 이어 1531년 홍역, 1559년 인플루엔자, 1545년 가래톳 페스트, 1586년 티푸스, 1601년에 디프테리아가 휩쓸었다. 이 전염볃들은 한 세대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되풀이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인구의 대량감소로 그치지 않았다. 군주들이 죽고 승계과정이 흐트러지면서 권력기반 자체가 무너졌다.
- 1511년 무렵 포르투갈은 베네치아 상인과 대상무역을 대신해 향신료와 실크의 주요 구매자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 발견한 해로는 위험이 컸음. 1500년과 1634년 사이 포르투갈에서 인도양으로 항해한 배의 25%이상이 길을 잃었지만, 위험을 감수할만큼 잠재적 이윤이 막대했음. 에스파냐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하는 것처럼 대규모 영토를 점령하고 유지하는 대신, 포르투갈인은 아조레스에서 마카오까지 무장요새를 잇다라 구축해 바다항로를 장악하는 교역소 제국을 창안. 인도양으로 가는 모든 외국배를 포획하고 그 선원들에게 갤리선에서의 강제노역형을 선고. 첩자로 의심되면 체포하여 리스본에서 재판을 받게 했음. 포르투갈의 향신료 독점은 두부분으로 나뉨. 하나는 인도 후추계약으로 상인들은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살수 있지만 그것을 포루투갈 왕에게 고정가격으로 팔아야 했음. 유럽계약에 따라 상인들은 포르투갈 왕에게서 후추를 사서 다시 팔 수 있다. 여러해 동안 포르투갈 상인들은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사들였지만, 유럽에서는 더 커다란 상선함대를 보유한 네덜란드인들이 유통을 장악했다.
- 서유럽인들은 시베리아의 지구반대편, 북아메리카 숲속에서 모피를 사냥하고 거래했다. 러시아의 모피무역이 최상급 모피에 대한 열망에 따라 형성되었따면, 북미의 모피무역은 펠트, 모자제작산업, 그리고 비버모자로 만든 모자패션에서 기원. 18세기 중엽 모피무역은 북미에서 가장 큰 산업이었다.
- 모피무역은 동물 개체군만 멸종시킨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서쪽으로 확장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보호구역을 몰아넣었음. 러시아인들이 광업과 벌목, 감옥을 시베리아로 들여오면서 유목민들의 땅을 빼앗을 때와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음. 30년대에 소비에트는 살아남은 유목민 부족과 사슴을 집단농장의 정착촌으로 이주시켰음. 수천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수렵채집형 유목민의 생활은 끝이 났다.
- 17세기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다 했다. 1600년대는 지적, 종교적 동요가 들끓던 시기였다. 마녀재판, 과학혁명을 비롯하여 성체와 의식, 기적, 성인의 권위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 사이의 격론까지 줄을 이었다. 교육받은 이들이나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나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마녀와 악령, 천사, 요정, 영혼이 일상에 영혼을 미치는 실재하는 존재라고 믿음.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성경에서 비롯한 구세계의 사상들이 새로운 식물과 동물과 사람들에 대한 정보의 포화공격에, 그리고 신세계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되돌아 흘러온 신념체계의 공세에 비틀리고 금이 갔다. 1570년과 1680년 사이에 어림잡아 11만명이 유럽에서 마녀 등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고, 4만~6만 명이 처형됨. 피고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흑마술은 사형에 처할만한 중죄로 법에 의해 규정되었따.
- 자주 잊히곤 하지만 소나무 폭동은 북미 식민지에 대한 대영제국의 지배를 거부한 최초의 반란으로 숲에서 벌어진 보스턴 차사건임. 바로 20개월 후 보스턴에서 새로운 법률에 저항해 100만불 어치의 영국차를 버리면서 전세계 민주주의 확대에 영향을 끼친 혁명이 한걸음 더 가까이 온다. 역사 내내 인간은 모피와 소금, 금, 어장, 목초지, 유전을 비롯한 세계의 한정된 자원을 소비하고 장악할 권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웠다. 오늘날에는 이제 다가올 거대한 갈등이 마실물과 경작할 토지처럼 인간의 생필품을 두고 일어날 수 있음. 그동안 인류는 야생에서 더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을 합성하는 경쟁을 벌였음. 과학자들은 바람, 태양, 지열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작어뿐 아니라 수직농장 같은 거대 프로젝트, 아프리카 마을이 깨끗한 물에 지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소규모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음. 사냥하고 낚시하고 캐내고 기를 수 없다면 인간은 죽거나 아니면 남은 것을 두고 죽을때까지 싸우게 될 것.
- 민주주의, 민족자결권이라는 개념과 미국반란의 승리가 또 다른 혁명들을 촉발. 제일먼저 프랑스인이 1789년 미국의 뒤를 따름. 1791년 아이티에서는 노예와 자유민 흑인이 프랑스 지배에 저항해 봉기. 1820년대에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멕시코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독립을 가져옴. 유럽에서는 그리스인과 벨기에인, 폴란드인이 1820년대와 1830년대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움
- 고아들은 항상 인간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중 하나였음. 성인 보호자 없이 남은 이들은 사회전체의 보살핌에 의지해야 했음. 문화권에 따라 이런 시련을 대처하는 인간애의 정도는 다름. 고대 중동 문화권에서 고아는 보호를 받음. 로마제국이나 마야같은 문명권에서는 노예가 되거나 인신공양으로 희생됨. 19세기 중반 미국도시에서는 남북전쟁과 이민으로 불어난 고아가 엄청난 사회문제로 대두. 보육원과 구호협회는 어찌할바를 모름. 한 단체게 근대의 기술을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 1854년과 1929년 사이 고아열차가 10만이 넘는 어린아이들을 뉴욕 빈민가에서 농촌의 새로운 집으로 실어 나름. 고아열차는 1850년대 뉴욕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수천명의 집없는 아이들을 돕기위한 뉴욕 아동구호협회의 기획. 이 협회의 설립자인 찰스 로링 브레이스 목사는 노동력이 부족한 농부들이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자기 아이처럼 돌볼 것으로 기대. 많은 농부가 그 기대에 부응했으나, 아이들을 값싼 노동력으로만 여긴 이들도 가끔 있었음. 고아열차를 타고 서부로 간 거리의 소년 둘, 앤드루 버크와 존 브래디는 누구보다 잘해냈다. 이들은 자라서 각기 노스다코타와 알래스카 주지사가 됨
- 깨끗한 물이 더러운 물보다 건강에 좋다는 건 누구나 안다. 기원전 2000년 초에 고대 산스크리트 문헌은 물을 끓이고 거르면 불순물이 제거된다고 설명. 기원전 500년 무렵 그리스 외과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같은 목적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소매라고 알려진 최초의 가정용 정수필터를 만들었음. 하지만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이 1676년 현미경을 발명하기 전까지 깨끗한 물인지 알아낼 방법은 냄새를 맡아보고너 맛을 보는 것이 전주. 오늘날 정수 처리장은 현대 도시요건의 하나이지만, 여전히 폐수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곳이 많음.
* 세계인구의 6분의 1이 안전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함
* 지난 10년 동안 설사로 죽은 아이들이 2차대전 이래 무력갈등으로 죽은 사람보다 많음
* 매일 6000명의 아이들이 안전한 식수부족과 불결한 위생에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
* 세계인구의 절반은 2000년전 고대 로마인이 누리던 물과 위생환경을 누리지 못함
- 1860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노예제도 폐지안이 발효될까 봐 두려웠음. 링컨이 당선되고 한달후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미국에서 분리해 나갈 것을 선언했고, 미국은 4년간의 참혹한 전쟁에 돌입. 남북전쟁은 이전시대에 속하는 전술과 최신기술이 결합한 전쟁이었음.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무기들이 전쟁터에서 대량살상을 가져옴. 기관총의 전신인 캐틀링 총은 놀랍게도 분당 200발을 쏘았음. 공기역학적으로 설계된 납 탄알을 장전한 머스킷 장총 때문에 일반군인이 저격병으로 변신. 중국 명나라에서 총이 발명된 이래 처음으로 일반 군인도 먼 거리의 표적을 조준해서 맞힐 기회를 얻었음. 보병이 앞장서 돌격하던 시대는 끝이 났음. 물론 미 육사에서 훈련받은 장교들은 여전히 무장 보병에 대항해 영웅적 자살공격을 주도. 사선에서 멀리 떨어진 병력도 참호와 요새로 방어하는 법을 배우면서 1차대전에 쓰였던 참호전투의 조짐이 보임. 남부의 패배에 공헌한 것은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된 새로운 무기만이 아니었음. 미국의 철로, 전신체계와 제조생산 시설 대부부이 북부에 있었음. 광대한 철도망 덕분에 북부군은 군인과 자재를 남부보다 훨씬 수월하게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음. 새로 창설된 미 육군 전신부대가 전쟁 첫해에만 전신선 6430킬로를 가설했고, 100만여통의 전보를 전쟁터와 주고 받았으며, 링컨은 전쟁 보고서를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장군들과 전략회의를 이끌 수 있었음. 무기와 군수품, 군복이 북부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옴. 새뮤얼 콭트의 공장에서만 전쟁기간에 장총 7000정, 머스킷 11만 3000정, 6연발 권총 38만 7000정을 생산.
- 남북전쟁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전환점을 상징. 남북전쟁을 지지하던 산업기반시설뿐만 아니라 무기와 전술, 상황의 기록 방법 등에서 이전의 전쟁보다 오늘날 우리와 더 친숙한 듯하다. 물론 이전의 전쟁들에도 근대적 요소가 등장했음. 크림전쟁(1854~56)에서는 처음으로 전신이 사용되었고, 전쟁사진과 종군기자가 등장했고, 근대적 간호법이 탄생. 1857년 세포이 항쟁때는 철도가 중추적 역할을 함. 이 각각의 전쟁에서 근대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맡음. 미국 독립전쟁 때에는 이런 혁신이 전쟁 자체의 성격을 규정했고, 종전 무렵에는 인류는 용감한 신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음.
- 사무라이는 일본에서 공개적으로 검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었음. 벨트 양쪽으로 찔러 넣은 검 두자루는 사무라이의 가장 중요한 소유물. 그중 하나가 가타나라는 장도이고, 다른 하나는 와키자시라는 단도. 사무라이의 혼으로 알려진 이 검은 공직 신분증이자 명예의 상징. 예술가로 존경받는 검장이 강철로 주조한 카타나는 지구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휘거나 부러지지 않고 갑옷도 뚫을 수 있었음. 검의 제작은 엄격한 의식을 따라야 했음. 주조하기 전 검장과 조수는 기도와 함께 육식, 성행위 금지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함. 신토의 승려가 대장간을 정화하는 의식을 행함. 실제 검을 만드는 동안에 검장은 신토식으로 찬물로 목욕재계하여 자신을 또 정화. 사무라이 검은 6,7세기에 개발된 금속을 사용해 만들어짐. 각 검은 두 등급의 강철을 결합. 단단한 외피가 다소 유연한 내핵을 둘러싸고 있음. 두 겹모두 내핵이 외피안으로 삽입되기 전에 접고 두드리기를 수없이 반복. 그러고 나서 복합금속에 열을 가하고 두드려 두 강철층 사이의 공기나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 이 칼은 진흙을 바르고 더 빨리 냉각함으로써 단단한 강철을 면도날처럼 얇게 만듬. 더 두껍게 덮인 뒤쪽은 상대적으로 유연함을 유지. 그 결과 단단한 절단면과 함께, 유연하고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칼등과 내핵을 지닌 검이 만들어짐. 최종단계는 광택을 내는 것으로 3주가 소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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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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