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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뇽

역사 2014. 10. 29. 23:10

 


크로마뇽

저자
브라이언 M. 페이건 지음
출판사
더숲 | 2012-05-24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왜 지금 크로마뇽인인가? 고고학계의 세계적 석학 브라이언 페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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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이주자들에게 실질적 우위를 점하게 해준 것은 인지능력과 지적상상력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는 능력, 미리 계획하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살아숨뒤는 활기찬 세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었음.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능력을 예술과 주술의식, 의례, 노래, 그리고 춤으로 나타냈음. 그드른 그렇게 함으로써 급격한 기후변화와 매섭게 추운 날씨, 때때로 찾아오는 배고픔, 그리고 사냥을 하다가 발생하는 비극적 사건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음. 그들의 상상력과 주술의식은 잔인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어떠한 기술장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안전망이었음.
- 상징주의, 종교적 믿음들은 그들에게 후기빙하기 시대의 변화무쌍한 기후속에서 이웃보다 더 잘 견딜수 있는 결정적 이점을 안겨다 줌. 크로마뇽인들은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큰 무리를 이루며 생활했기 때문에 사회적 교류가 더 활발했고 어려서부터 큰 규모의 수렵/채집활동에 참여했음. 또 언어가 점점 더 정교해지고, 기술이 발전하고, 수명이 길어지면서 문화적 혁신이 일어났음. 모든 지식이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구전되는 세계에서 이런 강화된 문화적 완충제는 약 2만 1500년에서 1만 8천년 전 사이에 추위가 최고점에 다다랐던 최후 최성기 동안 현생 인류가 냉혹한 기후에서 생존할 수 있는 보호막을 추가로 제공해주었음.
- 20만년 넘게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구부러질줄 알고 극단적 추위나 장기간 지속된 따뜻함에 순조롭게 적응하는 유연하면서 단순한 생활방식을 따랐음. 엄청난 기후변화가 찾아와 좀더 온화한 남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을때 조차 항상 익숙한 환경에서 살았음. 돌도끼 모양이 서서히 변한 것으로 보아 기술적 혁신은 아주 드문현상이었고 그 변화는 거의 감지할수조차 없었음. 일상생활은 예측가능하고 친숙한 길을 따라 이주하고 확산되는, 삶과 죽음의 길을 따르는 동물들의 삶처럼 한 세대애서 다음 세대로 거의 변화가 없었음. 인간은 포식자 중에서도 서로 협력할줄 아는 포식자였고 사냥꾼인 동시에 먹잇감이었음. 또 나무창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와 사냥감을 몰래 추격하는 능력, 그리고 동식물에 대해 어렵게 스득한 지식 덕분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였음. 그리고 20만년이 넘는 동안 훗날 크로마뇽인과 마주치게 되는 원시 유럽인인 네안데르탈인의 모습으로 서서히 진화해갔음.
- 7만년전 유럽에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들은 기온이 급격하게 변하는 매섭게 추운 환경과 신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혹독한 세계에 적응했음. 그들의 묵직한 체형은 추위에 노출되는 피부의 표면을 최소화하면서 열을 보존. 현저하게 큰 코의 비강은 공기를 들이마실 때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따뜻하고 촉촉하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임. 네안데르탈인은 묵직하고 단단한 체구에 상당히 강하고 날렵했음. 힘들었던 삶과 부러졌다 치유된 흔적, 그리고 상당히 심각했던 부상을 포함한 다른 부상 흔적들이 그들의 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
- 사냥의 성공은 사냥감의 습성과 반응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활용해 바람을 안고 몰래 사냥감에 접근하는 기술에 달려 있었음. 무엇보다도 사냥꾼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관심을 끌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아야 했음. 그들은 무리를 이루어 사냥했는데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몸짓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음. 성공은 항상 있을 수 있는 실패를 받아들이고 인내와 영원할 것 같은 기다림 끝에 찾아왔음.
- 네안데르탈인의 사냥무기는 잘 다듬어 만든 돌살촉을 창끝에 단 것을 제외하면 30만년도 더 된 쇠닝겐에서 발견된 무기보다 그다지 정교할 것도 없었음.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돌살촉을 단 창이나 불에 달궈 단단하게 만든 나무창으로 이 무기들이 날아갈 수 있는 범위는 인간의 팔 힘에 제약을 받았음. 8미터 정도가 최고로 멀리 던질 수 있는 범위였을 것임. 오록스나 들소 같은 큰 몸집의 동물을 잡기 위해서는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해야 했음. 이를 위해서는 몰래 접근하는 기술과 네안데르탈인 무리 전원이나 혹은 더 많은 인원의 협력이 필요했던 작업인 늪이나 협곡으로 먹잇감을 모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음.
- 생체고고학자들은 두부류로 나뉨. 한쪽은 다지역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로 호모사피엔스가 고대 세계의 몇몇 지역에 거주했던 고대인류에서 진화했다고 주장. 반대편은 아프리카 탈출이라 이름붙은 가설을 지지. 이 가설에 의하면 호모사피엔스의 기원이 열대 아프리카에 있으며 훗날 후기 빙하시대에 퍼져나갔음. 한세대가 지난 뒤 미토콘드리아 DNA와 Y염색체가 관련된 새롭고 더 정교해진 연구가 발표되면서 학계의 논란은 수그러듬. 유전적 증거는 무엇보다도 압도적이었음.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약 17만년 전에 생존했던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진화. 현재까지 확실한 것은 현생 인류가 약 5만 9천년 전 이후에 아프리카에서 이주했다는 사실.
- 7만년 준 이후로 추위가 물러가면서 아프리카 인구는 다시한번 증가하기 시작했음. 현생 인류가 가진 인지능력을 모두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7만년에서 5만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와 그 너머로 이주. 이주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Y염색체 연구를 통해 약 5만 9천년 전까지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외의 지역에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남성가계도를 만들 수 있었음. 이 때가 토바 화산 대재앙 이후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호모사피엔스가 마침내 아프리카에서 다른 대륙으로 퍼져나간 시점이었을 수도 있음.
- 크로마뇽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터전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유창한 언어뿐만 아니라 우월한 지능과 뛰어난 이동성, 수평선 너머까지 확장된 개인적 관계로 인해 거래를 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 네안데르탈인과는 다르게 오리냐크기 사람들은 석기 제작을 위해 종종 80킬로 이상 떨어진 먼 곳에서 석재를 가져왔음. 그들의 기술수준에 맞는 돌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었음. 세립질 바위는 작은 돌날격지를 만드는 데 거의 필수적이고 수많은 격지를 얻을 수 있는 몸돌을 더 쉽게 얻을 수 있었음.
- 오리냐크 문화 이전부터 구멍이 뚫린 이빨과 조개껍질, 그리고 다른 장신구들을 장거리 거래를 통해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대일 관계가 선물교환과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장기적 관계를 맺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음. 수천년 넘게 눈에 보이지 않는 교환 네트워크가 무리에서 무리, 영역에서 영역, 광대한 크로마뇽인들의 세계 너머까지 연결됬음.
- 호모 사피엔스가 창조한 수렵/채집사회는 모두 초자연적 믿음의 복잡성을 띠거나 자신들을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생명체라고 봄. 이런 믿음과 가정은 종종 주요 기후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에 소규모 사회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도록 도움을 주었음.
- 군살없는 근육질 식단에는 칼로리가 많지 않음. 건조무게의 1킬로그램당 약 1천칼로리가 들어있는 수준. 살을 에는 추운 환경에서 밖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냥꾼들은 하루에 4~5천 칼로리를 소모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이것은 말린 고기를 4~5킬로 섭취해야 얻을 수 있는 양임. 이 정도가 체중을 늘리는 것은 고사하고 간신히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임. 지방은 매년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 즉 순록과 다른 동물들이 엄청난 양의 지방을 축적한 시기인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얻을 수 있었음. 이것이 늦여름과 가을 사냥이 크로마뇽인들의 삶에 중요한 이유이며 동굴벽화에 묘사된 많은 동물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엄청난 양의 지방을 축적한 살찐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설명해주는 이유임. 겨울사냥 시즌에는 사람과 동물이 모두 지방을 찾아다님.
- 변변치 않아 보이는 바늘은 초기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 중 하나인 불의 사용과 지위를 나란히 함. 수만년 동안 네안데르탈인과 그들의 선조들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망토처럼 동물의 가죽을 몸에 걸쳤었음. 네안데르탈인들은 수석으로 만든 송곳으로 가죽에 구멍을 뚫은 다음 긴 섬유나 끈을 이용한 시을 구멍에 넣어 잡아당기면서 가죽들을 이었음. 이렇게 펑퍼짐안 바지나 조끼같은 조잡한 형태의 옷을 만들 수 있었음. 그후 바늘이 제작되자 여자들은 바늘을 이용해 몸에 꼭 맞는 여러겹을 덧댄 옷을 만들 수 있었음.
- 그들은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항상 자신있게 행동해야 했고 강인안 정신적/육체적 인내를 타고나야 했음. 모두가 어려운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몇 시간에 걸쳐 해낼 수 있을만큼 완벽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 지구력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정신적 강인함 또한 필수였음. 그들은 추위나 축축함,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안락함만을 추구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며 신체적 불편함을 견뎌냄. 크로마뇽인들은 현대인들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식량이나 옷 같은 거추장스러운 짐 없이 다목적 도구만을 가지고 가볍게 여행했음. 이것이 그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냥감을 짊어질 수 있게 해줌. 사냥꾼들은 항상 추위라는 위험요소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능력과 경험이 생존을 좌우하는 겨울동안, 꼭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최소한의 장비만을 지니고 다녔음.
- 모든 북극사회에서 그렇듯이 크로마뇽인들은 사냥할 때나 식량을 채집할 때, 그리고 이주할 때 서로 협동하는 것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혼자 활동하지 않았음. 모두가 함께 일했고 아주 사소한 과제조차 서로 도우며 해결.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삶 자체가 호혜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 이것이 바로 상호의무임. 모두가 사냥감을 나눠먹었고 비상시에 서로 협력했음. 갑작스러운 기온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도 있는 위험한 환경에서 협동능력은 필수적이었음.
- 크로마뇽인들이 공유한 자질과 그들이 속한 세계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생존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을 것임. 효율적인 기술과 정확한 자기인식, 환경과의 긴밀한 관계는 크로마뇽인드을 실질적으로 천하무적으로 만들었음.
- 이국적인 물건들은 단순히 진기한 물건이 아니었음. 조개껍질고 반투명한 호박조각, 크리스털 등은 두사람 사이의 거래나 어쩌면 먼 거리에소 수년간 혹은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우정이나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징표였을 것임. 선물교환은 거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서로 고립되어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소규모 무리들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는 매우 중요한 고리였음.
- 비너스 조각상들이 지모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과장된 해석임. 조각상의 독특한 해부학적 형태는 탄생과 생식력 숭배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공통된 예술적 관습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음. 대부분의 현생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아이들이 있으면 무리생활에 심각한 제한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 아이들이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는 데 시간과 공이 많이 들기 때문. 예를 들어 인류학자 리처드 리는 칼라하리 사막의 샌족의 아이가 태어난 첫해 동안에는 엄하게 성행위를 금지한다는 것을 발견. 예측불가능한 동물들에 의존해 생활하는 힘든 환경에서 크로마뇽인들은 지나친 생식력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 이런 이유로 비너스가 생식력과 출산, 부활의 상징을 나타내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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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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