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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의 세계를 움직이는 수업

저자
리처드 H. K 비에토, 나카조 아키코 지음
출판사
다산북스 | 2012-05-07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스타벅스, FRB, 루이비통, 미츠비시 상사 등 세계 리더들이 ...
가격비교

- 사람은 1인당 소득이 6000~7000불이 될 때까지 자기가 더럽힌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음. 현재 경제발전의 가속화 페달을 밟고 잇는 중국의 1인당 평균소득은 3500불 수준. 그들 역시 눈 앞에 걸린 성장이라는 두 글자에 정신이 팔려, 인내만 강요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환경을 파괴한다.
- 일본은 미국을 전략적 시장으로 설정했다. 또한 시장을 개척하고자 한계비용가격을 형성했다. 즉, 시장점유율을 획득하고자 가격을 한계비용 혹은 그 이하로 낮춘 것이다. 일단 미국에서 시장점유율을 획득해야 효율적인 규모의 사업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환율도 한몫했다. 2차대전 중에는 1달러 4엔이었던 환율이 1949년에는 1달러 360엔으로 고정되었다. 높은 환율이 유리하게 작용하며 값싼 일본제품은 저렴한 가격에 미국시장으로 유입되었다. 해외에서는 싸게 팔았지만, 국내에서는 과점을 유도해 비싼 가격으로 팔았다. 채산을 맞추기 위해서다. 국내시장에서는 규모를 다지고 국외에는 한계비용가격으로 수출해 점유율을 늘리는 것이 일본의 시장전략이었다. 제품전략도 실로 비범했다. 대부분 개도국은 값싸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으로 출발하지만, 일본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일본은 언젠가는 맞닥뜨릴 동남아 빈곤국과의 가격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원료와 에너지 자원의 수입액이 많으므로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직물 따위를 만들어서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결국 고도성장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 일본은 고부가가치 산업에 생산을 집중하기로 결정. 특히 석유화학, 알루미늄, 공작기계, 자동차, 전자기기, 철강, 조선, 항공기 분야 등 8가지 산업에 집중. 일본은 이 산업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보호육성정책을 발표함으로서 산업진흥을 꾀했다. 그러나 석유화학과 알루미늄은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는 산업이었기에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특히 1차 석유파동 후에 고전하면서 수출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항공기 사업 또한 미국의 방위정책과 궤가 맞지 않으면서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수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철강과 조선산업이 초기에 성공했고 최종적으로는 전자기기, 자동차, 공작기계 산업이 차례차례 주력분야로 성장했다. 이처럼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상품을 생산해서 수출하고 판매하는 일본의 전략은 적중했다. 게다가 미국시장은 소득탄력성이 아주 높았다. 다시 설명하면, 이미 부유한 생활을 누리던 미국인은 소득탄력성이 낮은 직물이나 크리스마스 장식보다 자동차와 전자기기를 구입하고 싶어했다. 이런 제품들은 자본집약적이므로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일본은 자본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 즉 미국시장이 원하는 상품을 수출전략에서 주력해야 할 상품으로 선택. 당시 미국은 자동차와 전자기기 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략을 펼치기도 전에 시장진입의 장벽이 존재했던 것이다. 50년대 후반에 일본의 자동차 산업의 보호육성성책을 추진했을 때 미국은 이미 세계의 자동차 시장을 지배한 상태였다. 제너럴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가 세계 자동차 시장의 90%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전자기기와 공작기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전략은 격심한 세계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일본이 스스로 선택한 장기정책이었다. 지금가지 설명한 전략을 채택했을 때 이미 일본인들은 스스로 우수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10년이든 20년이든 꾸준히 노력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상태였다. 더구나 일본에는 안정된 정치체제가 존재했기에 장기전략을 채택하는 데 걸림돌이 없었다. 특히 57년 보호육성산업으로 선정된 공작기계 분야는 77년 수출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무려 20년이나 걸렸다. 그리고 80년대, 일본산 공작기계는 미국시장을 지배. 그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일본제품이 미국을 점령하자 미국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67년 무렵까지 일본은 미국에 자동차를 한대도 수출하지 못했다. 도요타가 처음 수출한 자동차는 시속 85킬로도 나오지 않는데다 덜컹덜컹 흔들리며 의심스러운 소리를 내기 일쑤. 사실 20년 동안 쉬지 않고 근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본은 계속노력했고 철강, 조선, 기계처럼 강점이 있는 분야에선 독자개발도 추진. 물론 당시 일본의 임금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고 엔화약세로 이점을 톡톡히 누린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일본기업은 자기자본비율이 낮고 대형은행의 대출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음. 제조부문은 차입이 많은 반면, 주식자본비율은 몹시 낮다. 그래서 일본 제조회사들은 일정한 금액의 이자와 원금을 계속 상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주주에 대한 책임은 크지 않다. 이것은 의미가 있는 대목이다. 서구 기업들은 주주의 눈치를 보며 15~18%의 이익을 내고자 전전긍긍했지만, 일본기업들은 한 자릿수 성장만 기록해도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비용절감으로까지 이어졌다. 일본에는 은행가가 많지 않다. 당시 존재하던 76곳 가운데 12곳이 대형은행이었고 나머지는 규모가 작은 지방은행이었다. 대형은행은 계열과 연계해 융자를 제공. 참고로 그 당시 미국에는 은행이 25000곳이나 있었다. 은행의 수가 적은 일본에서는 대장성이 비공식적으로 은행에 지침을 내리거나 일본은행(중앙은행)이 창구규제를 실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미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 장기간에 걸친 고도성장은 매해 소득 증가로 이어짐. 증가한 소득의 배분을 둘러싸고 기업과 단체는 사업보조금으로 할당할 것을 정치가와 관청에 요구했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일본의 정치가들도 지역선거구에 밀착해 활동하는 업계나 단체에 유리하도록 관청을 상대로 로비. 또 관청은 권한 확대, 예산확보, 낙하산 취업자리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정치가를 적극적으로 도움. 정경유착이 시작된 것. 이런 경향은 기득권을 둘러싼 움직임과 재정의 경직화를 초래. 결국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세계화의 진행이라는 환경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어두운 면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일본사회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인 71년 8월 15일 미국 닉슨 대통령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료를 선언. 아울러 닉슨은 일본에 10%의 수입할당을 부과. 이로써 일본의 기적적인 고도성장은 막을 내린다.
- 국가의 성장단계를 들여다보면 대체로 제조업이 선행하고 서비스업이 그 뒤를 잇는 패턴이 흔하지만, 인도는 전혀 다름. 여타 신흥국의 서비스업은 적자를 기록하지만, 유독 인도만 흑자를 기록. 08년에는 흑자가 약 250억불에 달했다. 하지만, 인도는 10억명의 인구가 사는 대국이기에 효율적 농업, 석유화학, 에너지, 전기기기, 철강과 같은 제조업이 절실하다. IT서비스를 아무리 팔아도 10억 인구가 모두 자동차를 살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 결국,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인도인도 자신들의 이런 상황을 아는지 최근들어 제조업도 조금씩 궤도에 오르기 시작. 자동차의 타타, 세계 5위 풍력발전기업 수즐론, 미국 수출용 트랙터와 사륜구동 자동차를 제조하는 마린드라앤마힌드라가 인도의 대표 제조기업. 이들을 주축으로 제조업으로 점점 이행중이지만 아직 갈길은 멀다. 중국의 제조업에도 한참 뒤처진 상태고 일본과의 격차는 측정하기 힘들정도임
- 인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다양성이다. 그 다양성으로 인해 교육과 소득의 격차가 크고 남녀 성차별도 극심. 여성의 교육수준이 아주 낮은 주가 있으면 아주 높은 주도 있고, 몹시 부유한 주가 있으면 눈을 의심할 정도로 가난한 주도 있다. 예를 들면 인도 동부 비하르주와 북부 웃타르프라데슈주는 모두 1억 5000만명이 거주할 정도로 넓은 지역이지만, 믿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 반면 중서부의 마하라슈트라, 북서부의 구자랏, 북부의 델리는 더없이 풍요로운 지역이다. 이 격차를 극복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막대한 조정비용이 투입돼야 할 것이다.
- 멕시코는 나프타로 순조로운 성장을 이루었고, 마킬라도라에도 막대한 외국자본이 투입되었다. 마킬라도라에 입주하면 제품을 미국에 수추라기도 쉬운데다 멕시코 북부의 미국 국경 근처에서 생산하므로 멕시코 및 기타 중남미 국가에도 제품을 수출할 수 있기 때문. 미국기업뿐 아니라 일본기업도 국경지대에 공장을 건설했다. 임금이 훨씬 낮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자기기 사업은 통째로 멕시코로 옮겨왔따. 물론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모두 중국이 대두하기 10년전에 벌어진 일이다. 아무튼 미국과 멕시코의 무역량은 대폭 증가. 거래는 활발해졌고 미국은 경쟁력 있는 제품을 판매하고 멕시코는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제품을 판매하면서 상호간의 이익을 올림. 단, 일부 우려처럼 미국의 일자리가 상실되긴 했다. 미국은 멕시코만큼 값싼 가구와 자동차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 대부분 자동차 공장이 멕시코로 자리를 옮김. 그 대신 미국은 CT스캐너처럼 멕시코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분야의 제품을 제조. 나프타 체결후, 멕싴는 미국과의 양국무역에서 흑자를 낼 만큼 성장. 살리나스 전 대통령은 언제까지고 빚에 의존해 살수 없다고 말했다. 나프타를 두고 백년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멋진 기회라고도 말했다. 여태 멕시코는 정치적으로 가능한 개혁을 모두 시도했다. 하지만, 정치력 부재로 큰 진전을 이루진 못했다. 그런 멕시코에게 나프타는 마지막 돌파구였다. 멕시코는 나프타에 참가하여 미국, 캐나다와 경쟁함으로써 산업구조를 뜯어고칠 필요가 있었다. 개혁할 것인가, 역사와 함께 사라질 것인가. 살리나스는 양자택일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과감히 실행에 옮김. WTO에 가입한 중국과 비슷한 행보다. 중국도 정치적 수단으로는 경제개혁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WTO에 가입해 중국기업을 개혁으로 내몬 이력이 있지 않던가. 그래야만 서구기업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기 때문. 외압과 외국의 경쟁력을 이용해 국내기업에 적응을 강요하는 것이다. 멕시코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멕시코가 정체에서 탈출해 성공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추측하건대 살리나스 대통령의 심정이 어미 사자가 아기사자를 벼랑으로 내모는 것 같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의 일부 정치가아 노조는 멕시코와의 자유무역협정을 두고 아직도 일자리가 얼마나 사라졌는지 보라며 떠들어대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멕시코에 수출할 상품을 취급하는 미국기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지 알아야 한다.
- 90년에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은 사우디 국경까지 밀고 들어와 사우디에 침공위협을 가함. 그러자 파드 국왕은 사우디를 방위하고자 미군의 파견을 허가. 이에 미국은 60만명에 달하는 육군과 공군병력을 파견해 순식간에 후세인을 제압. 하지만, 그의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후세인이 순순히 항복했기 때문. 그로부터 12년후 미국은 다시 후세인과 총구를 겨눠야 했다. 걸프전이 끝나고도 사우디에 미군의 대병력이 주류하자 이슬람 과격파들은 사우디를 떠났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다. 그는 사우디 유수의 건설사를 경영한느 빈 라덴 일족 출신으로 이미 몇년 전에 사우디를 떠나 러시아와 분쟁을 벌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미군이 사우디에 주류하자 한층 더 과격함을 드러내며 사우디 정부의 전복을 노리게 됨.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뿐 아니라 사우디 정부까지 증오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재의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답지 못하기 때문. 90~92년까지 사우디의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엄격한 이슬람법을 채택하라고 국왕을 압박. 미군을 추방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부를 분배하고, 여성에게 일체의 권리를 부여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주장은 무장 이슬람 단체인 탈레반의 요구사항과 흡사했다. 실은 사우디에서는 70년대부터 80년초까지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허용되었고 스카프도 착용할 필요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국왕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국왕은 신심깊은 이슬람교도이기는 했으나 원리주의자들처럼 과격하지는 않았다. 가은 이슬람교도였으나 서로 사고방식이 달라 생기는 충돌이 여러차례 일어났고 90년 중반에는 몇건의 테러사건까지 발발. 과격파 이슬람교도들이 메카의 사원을 점거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감. 96년에는 사우디 동부도시 알코바에 있는 미군 공군기지가 폭격을 당해 수천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 두바이는 아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나라. 사우디와 달리 음주가 허용되고, 여성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남성과 같은 환경에서 일함. 베일은 착용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스카프조차 쓰지 않아도 됨. 두바이는 런던과 상해에 버금가는 국제적 금융, 상품 거래센터가 되기 위해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정도 분리. 다만 에부터 두바이에 정착해서 사는 현지인들은 수니파 이슬람교도임. 대부분 여성은 운전하지 않으며 베일을 착용한 여성들도 있음. 그러다 보니 미니스커트를 입은 인도 여성 옆에 베일을 착용한 두바이 여성들이 서 있는 대조적 광경이 현지에서 심심찮게 목격됨. 심지어 두바이에는 불교사원은 물론이고 기독교 교회까지 있다. 그뿐 아니라 바와 매춘부도 있음. 두바이의 인구는 고작 150만으로 그중 86%가 도시건설을 위해 건너온 외국인. 외국노동자라 해서 저임금 노동자만 있는 것은 아님. 온갖 직종의 노동자가 두바이로 들어왔음. 개중에는 관리직으로 고용되어 입국한 이들도 있다.
- 08년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두바이의 금융시장도 함께 붕괴. 그들 역시 자산담보증권같은 리스크 높은 금융상품을 보유했었기 때문. CDO는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담보로 하여 발행된 증권을 말함. 부동산 시장은 물론이고 금융시장도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08년 1월 두바이를 방문했을 때엔느 절반 정도만 지어지고 마무리 되지 않은 빌딩이 여기저기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고 크레인도 동작을 멈춘 상태혔음. 세게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버즈두바이도 아홉개 층만 남겨둔 채 건설이 중단되었음. 부동산 회사는 기술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지만, 필시 자금이 부족했을 것이다. 다만, 버즈두바이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으므로 언젠가는 완성될 것. 두바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대폭줄어 외국인을 포함한 대부분 노동자가 강제 해고당했다. 두바이에 들어와 고급 승용차를 구입했던 그들은 할부금을 마저 갚지 못하고 차를 공항에 버려둔 채 귀국. 두바이 공항의 주차장에는 수백대가 넘는 차로 넘쳐남. 이른바 고급인력은 두바이를 떠나고 저임금 노동자만 남았다. 두바이의 인구는 08년 한해동안 2/3로 감소. 정부는 거액의 채무를 떠안았고 서비스업을 비롯해 모든 경제활동이 중단됨. 두바이에 투자한 기업중 이익을 남긴 곳은 거의 없었다. 부동산 가격도 폭락했다. 가격이 폭락한 부동산은 대부분 정부소유였으므로 두바이 정부는 좀더 보수적이고 부유한 형제 토후국, 아부다비로 돈을 빌리러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아부다비는 두바이의 자산을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돈을 빌려줌. 두바이는 성공했지만 도가 지나쳤다. 현명하지 못한 일을 벌이고 말았다. 성공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착각에 빠졌고 부동산 투자에 실패했다.
- 9/11 테러 이후 석유가격이 급등하자 러시아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 그러나 러시아에 투자한 해외 자원회사들은 손실을 봄. BP를 비롯한 해외석유기업은 러시아의 문호가 열리자 투자를 시작했지만, 러시아의 정교하면서도 교묘한 세금제도로 인해 총수익의 100% 이상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결국 BP는 5억불의 손실을 냄. 또 다른 석유회사 쉘 역시 지금까지 사할린 천연가스 프로젝트에 200억불이나 투자했으나 보유주식의 1/4을 러시아 정부에 도로 빼앗기고 말았고, 지금까지도 러시아 정부의 지배 아래에 있음. BP의 프로젝트도 같은 실정에 처함. 그뿐 아니다. 푸틴은 호도르코프스키를 투옥하면서 거대자산인 유코스를 압수. 유코스는 러시아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천연가스 기업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사우디의 아람코에 이어 세계 2위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 석유기업 로즈네프트도 유코스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렇듯 푸틴은 경매로 헐값에 팔려나갔던 국가자산을 하나둘 다시 환수하기 시작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러시아는 채무를 줄였으며 석유로 올린 수입을 투자하고자 안정하 기금을 창설. 잠깐 설명한 바 있지만, 자원을 대량을 수출하는 자원국은 으레 자국의 통화가치가 크게 올라가기 마련이므로 제조업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움. 무엇보다 수출길이 막힘. 네덜란드가 1차 석유파동후에 경험했듯 경제성장이 멈추는 것이다. 러시아의 안정화 기금은 네덜란드 병을 앓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던 셈. 이렇듯 경제는 7% 성장했지만, 인플레는 여전히 억누르지 못한 채였다. 석유와 천연가스 수익이 발생하자 루블화 가치가 상승. 이 시기에 러시아는 유럽 최대 천연가스 공급자였다. 지금도 러시아의 거대한 파이프라인이 독, 프, 이, 네, 벨을 돌며 대량의 천연가스를 수송함. 러시아의 석유 역시 전 세계로 팔려나감. 러시아는 OPEC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사우디에 이어 세계2위의 석유 산출국으로 1일 생산량이 400~600만 배럴에 달함. 하지만, 세계 최대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면서도 그 윤택한 자원을 자금삼아 지속적인 석유생산을 위한 사업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는다는 점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 석유를 채굴하고 유전을 유지하려면 계속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마땅한데 다른 분야에 자금을 써버린 탓에 정작 큰 성장이 예기되는 분야에는 자금이 제대로 투입되지 않고 있다.
- 통합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각 나라가 유럽의 평화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1870년대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일에 유럽인들은 이력이 난 상태혔다. 그래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경제통합이었다.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면 인근 국가를 공격하는 행위는 결국 자국을 도탄에 빠지는 일이므로 두번 다시 서로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일본, 미국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규제를 완화하고 민영화를 실시해 대규모 경제권을 구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축소였다. 유럽에는 더없이 세련된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은 재정부담도 너무나 컸다. 복지증대가 쾌적한 환경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지만, 복지비용으로 투입되는 자금이 워낙 방대해서 일본이나 미국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턱없이 부족. 유럽통합을 통해 경쟁의 장으로 스스로 나아가고 사회보장 비용을 조금이나마 긴축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알다시피 대부분 유럽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유럽이 통합되면서 한 나라만의 민주주의가 아닌 브뤼셀을 중심을 한 더욱 큰 공동체 정치로 전환됨. 사실 그런 공동체 정치에 쉽사리 참여하지 못한 나라도 있었다. 특히 영국은 대처 정권하에서 개혁을 단행했는데 EU통합 때문에 한창 진행중인 개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금융규제완화가 가장 진척된 나라로, 자국의 개혁을 포기하고 프랑스나 독일처럼 된다면 국력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던 것 같다.
- 80년대 초에 달러가치는 무려 63% 상승. 미국 연준 이사회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공정금리를 대폭 인상했기 때문. 금리인상을 통해 미국은 외국자본을 대거 유치하고 달러 가치를 높였다. 85년 가을, 뉴욕 플라자 호텔에 G5의 재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파운드, 마르크, 프랑, 엔화의 가치에 비해 달러가치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통화조정을 단행했다. 그로부터 4~5년 동안 달러가치는 50~60% 하락했고 독일 마르크화와 엔화가치는 서서히 상승.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은 고통을 겪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경제의 주축 하나가 수출산업이었기 때문. 엔화가치가 50%나 상승했으니 수출산업이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한 예로 도요타는 미국 시장에서 기존 매출대비 50%나 더 벌어 들어야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판매가격을 인삭하거나 더 많은 자동차를 팔아야 했는데, 제아무리 도요타 자동차의 성능이 뛰어날지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임무였다. 그러자 일본 산업계는 일제히 구조조정에 착수. 가장 먼저 비용절감에 메스를 댔다. 서구기업들은 인력을 쉽게 고용하고 해고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은 고도성장기 이전부터 종신고용제라는 일종의 전통을 지켜왔기에 구조조정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판매가격을 낮춰 이익을 삭감. 그러자 84년과 85년에 7~8%였던 이익률이 1~2%까지 뚝 떨어졌다. 일본기업은 대부분 자금을 융자를 통해 조달하는데다 계열그룹을 유효하게 활용했으므로 이익률 하락에 대한 주주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다. 주식시장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는 미국이나 유럽기업들은 자기자본이익률을 반드시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만 일본 기업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익삭감 정도로는 초유의 엔화강세에 충분히 대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놓은 다음 처방전이 신규투자였다. 다른 선진국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강경책이었다 기존의 공장설비를 부수고 생산성이 높은 최신설비를 도입했으며, 국외로 생산거점을 옮겨 미국, 유럽, 아시아에 공장을 건설했다. 일본은행은 금리를 5%에서 2.5%까지 단계적으로 낮추며 투자를 촉진. 그러자 수출이 다시 증가했고 일본경제는 엔화강세라는 장벽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연 5.1%의 성장을 이룸. 당연히 일본인들은 예전보다 부유해졌다.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자금을 일본은 어디에 사용했을까? 자금이 흘러들어간 곳은 지금까지 그토록 멀리해 왔던 주식시장이었다.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몰리자 9000대였던 닛케이 평균주가는 90년 39000 수준으로 상승. 아울러 미국과 동남아 등 해외 시장에도 직접 투자 형태로 자금을 투입. 은행은 민간 투자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융자에 착수. 국내기업분 아니라 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에도 돈을 빌려줌. 한편, 기업과 개인은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 일본은 인구가 많고 토지가 좁았기에 부동산 가격이 금세 뛰어오름. 물론 투기가 목적이었다. 은행은 융자를 마구 해주었고 토지와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렇게 일본은 거품경제에 접어들었다.
-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경제는 순항했다. 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인플레이션이 억제된 반면에 생산성은 높았기 때문에 높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다. 60년대 중반에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라는 이름의 대규모 사회보장제도를 발표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빈곤층에도 경제발전의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건강보험과 퇴직자 연금정책을 시행했다가 재정이 적자를 기록했기 때문. 린든존슨의 위대한 사회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재정지출이었으니 비록 적자가 났을 지라도 높이 평가할 만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사회를 문제의 발단으로 지목한 이유는 따로 있다. 위대한 사회가 베트남전에 들어가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자금원이기도 했기 때문. 모두 알다시피 베트남 전쟁의 대가는 무시무시했고 미국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렇듯 위대한 사회라는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세수입의 균형이 무너지자 미국경제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 60년대 후반부터는 인플레이션율이 조금씩 상승했다. 69년과 71년에는 실업률이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처음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 과거에는 두가지 현상이 따로 일어났지만, 당시에는 두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처하려 애썼지만, 오히려 심각한 불경기에 나라를 빠뜨리고 말았다. 카터 역시 70년대 후반에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미국은 계속해서 물가상승, 재정적자, 환율상승의 삼중고에 시달렸다. 결국, 80년에 미국의 성장률은 -3%로 대폭하락했다. 흔히 말하는 카터 불경기다. 미국은 물밀듯 들어오는 일본제품에 고전했고 사람들은 하나둘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률이 상승했고 물가도 끊임없이 올랐다. 80년에는 물가상승률이 10%에 달했고 소비자 물가지수는 12% 상승. 역대 최고 수준의 인플레이션이었다. 무역적자도 대폭 늘어났다. 13~17년까지 미국 무역수지는 흑자를 기록했지만 80년대에 들어서자 280억불의 적자를 기록. 대부분은 일본을 상대로 한 기록적 무역적자였다. 그러자 미국은 보호주의적인 규제와 관세정책으로 일본을 강력하게 압박. 79년과 80년에는 생산성도 감소. 노동자 1명의 생산량은 하락했음에도 조합 노동자에 지급되는 비용은 연 10%의 급격한 상승률을 기록하며 미국경제의 목을 옥죄었다. 또한 미국정부는 금융, 에너지, 공익사업, 교통 등 많은 분야를 규제했었으니 해당산업의 효율이 좋을리 만무했다. 카터는 생산성 강화를 위해 다양한 규제완화책을 발표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79년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 의장은 금리를 19%까지 인상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지만, 이듬해인 80년에 금리인상 방침을 단념한다. 카터의 재선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려는 심산이었지만, 그 정도로 국민의 환심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재정적자는 2.4%에 달했고, 경기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으며, 당연히 달러가치도 하락. 카터가 무슨 수를 써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국국민은 80년 11월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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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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