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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1.31 뜨거운 지구 역사를 뒤흔들다 1
  2. 2026.01.31 20260131

- 기후의 시계추를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일단 가능성이 높은 원인은 기울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지축이다. 조금씩 변하는 태양흑점활동 주기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17세기에 흑점의 수가 적어졌을 때는 기후가 눈에 떡게 서늘해져 소빙하기의 정점에 달했다. 그 밖에 아이슬란드, 동남아시아 등지의 화산활동도 기후를 변동시키는 요인이다. 1815년 자바의 숨바와섬에서 일어났던 탐보라 화산의 폭발은 화산 윗부분
1300m를 날려버렸다. 거대한 화산재 구름이 대기 속으로 치솟아 햇빛을 가린 탓에 1816년은 유럽의 유명한 여름 없는 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후학자들은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대기와 바다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기후변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기후학자 조지 필랜더(George Philander)는 그것을 가리켜 기민한 파트너와 서투른 파트너의 춤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렇게 쓴다. "대기는 빠르고 민첩하며 바다의 조짐에 즉각 반응하는 반면, 바다는 느리고 굼뜨다." 우리는 이 두 파트너와 함께 춤추면서 좋은 기회를 얻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또한 우리는 기후의 춤이 인간 사회에 대단히 직접적인 결과를 미친다는 것도 알았다. 6세기의 대형 엘니노는 엄청난 폭우를 일으켜 페루 북해안 일대의 강바닥에 몇 세대에 걸쳐 건설해놓은 관개용 수로를 파괴해 버렸다. 1천 년 전 미국 남서부에 주기적으로 닥친 대형 가뭄은 푸에블로족의 대규모 이동을 유발했다. 가뭄의 공격을 받은 푸에블로족이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질 무렵 유럽의 농부들은 예측 가능한 날씨 조건과 적절한 강우량의 환경에서 등따습게 지내고 있었다. 조금 더 따뜻해지고 건조해진 환경의 효과는 다양하고 섬세했다. 예를 들면 작황이 나아지고, 인구가 증가하고, 삼림 벌채가 가속되고, 무역과 심해 어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성당 건축이 붐을 이루었다.

- 중세 유럽에서 폭력은 삶의 현실이었고 정치의 일부였다. 엘리트와 특권층은 암살. 배신. 변절. 잔인한 군사 원정을 일삼았다. 기사와 같은 사회의 힘센 성원들은 용기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애썼다. 마상 시합은 창술로 개인의 용맹과 무용을 시험하는 경기였다. 다행히 라이벌 지주들이 벌이는 결투에서는 사상자가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영토나 정치적 영향력의 범위를 확정하고, 권위의 한도를 평가하고, 누가 누구를 통제할 수 있는지 관계를 확립하는 방식이었다. 거의 형식적인 행사처럼 벌어지는 군사 원정도 많았다. 풍년이 든 여름에는 어딘가에서 소규모라도 전쟁이 반드시 벌어지곤 했다
분열의 힘이 워낙 강한 탓에 커다란 정치적 집단이 형성되기는 어려웠다. 프랑키아, 즉 프랑스 왕국은 11세기 초만 해도 여러 자치체들이 늘 다투고 때로는 심한 경쟁을 벌이는 모호한 형태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 왕권은 기껏해야 왕이 직접 조세를 거둘 수 있는 지역에만 국한되었다.987년에 시작된 카페(capet) 왕조 초기의 왕들은 상속권이 아니라 개인적 역량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받아 왕이 되었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으며. 11~12세기에 많은 경쟁자들ㅡ튼튼한 성채를 가진 귀족들과 지주들ㅡ을 굴복시켰다. 때로 그들은 가톨릭교회를 내세우기도 했다. 교회와 수도원은 탐욕스러운 영주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대상이었다.

- 삼포농법은 밭 하나에 겨울밀이나 보리, 호밀을 파종하고, 다른 밭에는 봄에 귀리, 병아리콩, 완두콩, 렌즈콩, 잠두 등을 심는 방식이다. 나머지 받은 휴경지였다. 삼포농법을 이용하면 노동력을 연중 고르게 이용할 수 있었고 말 먹이로 쓸거리를 생산할 수 있었다.
콩과 식물은 질소를 고정시켜 토양을 비옥하게 하므로 가축을 더많이 기를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기근의 위험은 크게 줄었고 짐승의 배설물이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했다. 단백질 섭취량이 증대하자 영양 공급과 건강이 향상되어 인구가 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온난한 기후 조건이 가져온 좋은 작황과 집약농경으로 잉여 식량이 크게 중대했다는 점이다.

- 도시의 수는 1000~1400년에 급격히 늘었다. 중부 유럽만 헤도 11세기부터 1250년까지 1500개의 도시가 새로 생겨났다. 규모가 제각각이었고 그저 큰 촌락에 불과한 도시도 있었으나, 인구 2천~3천 명의 공동체도 있었다. 중세 도시는 촌락보다 인구밀도가 높았다. 대장장이, 도공, 직조공, 바퀴장이 등 전문 기술을 가진 기술자도 많아졌다. 도시마다 정식 시장이 있었다. 사실 시장이 없으면 도시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시장에서는 물물교환이 아니라 화폐가 사용되었으므로 일부 도시에는 화폐 주조소가 설치되었다. 대형 교회와 시장 건물 같은 대규모 공공건물을 갖춘 도시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시는 사람들로 붐였고 '교통체증'이 자주 일어났다. 윌리엄 체스터 조던(William Chester Jordan)은 런던 외곽 서더크의 중세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소가 끄는 짐수레들이 북적거리고 과일과 채소, 원료, 완성품을 시장, 기술자의 가게, 창고로 운반하려는 마차들이 긴 행렬을 이룬다. 말을 타고 편지를 전하러 가는 사람들, 상점이나 모임에 가려는 사람들이 거리의 사람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소리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교통체증이 없으면 도시가 아니다."

- 온난기에는 삼림이 대대적으로 개간되었다. 500년 무럽까지 유럽 중서부 온대 지역은 5분의 4가 숲과 늪지였다. 그러나 1200년에는 절반 이하로 줄었는데, 대부분 중세온난기에 대대적인 개간이 이루어졌다. 네덜란드 농부들은 이른바 '공격적인 제방사업'으로 북해를 매립해 해안 다도해의 작은 섬들을 큰 섬들로 변모시켰다. 일단 해변 뒤편의 방대한 토탄 늪지에 도랑을 파서 물을 뺀 뒤, 토탄이 없어지자 물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며 힘겨운 매립 작업이 이어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도랑을 깊이 파는 방식으로 배수하다가 나중에는 펌프와 풍차. 물방아를 이용했다. 이 작업에는 수세대에 걸쳐 방대한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결국 황무지는 가축을 키우는 목초지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경지로 바뀌었다
유럽의 원시삼림을 제거한 것은 문화.경제∙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행위였다. 숲을 개간한 농부들은 스칸디나비아 격언으로 빈민의 외투'라는 안전망을 스스로 벗어던진 셈이었다.'' 숲은 건축자재, 목재. 장작, 사냥감, 약품과 식품을 주었고 가축을 기를 수 있는 풍요한 방목지였다. 

- 400년 동안 인구가 급증하고, 식량 공급이 대체로 원활하고, 삼림이 대대적으로 개간되고, 도시가 성장한 결과 온난기의 끝 무럽에 이르러 유럽은 완전히 환골탈태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에는 인구 증가가 농업생산력을 앞지름으로써 심각한 경제문제에 봉착했다. 1300년경 인구 대다수의 생활은 한 세기 전만 못했다. 인플레이션이 부를 갉아먹었고 상류층은 평민충을 상대로 더 가혹한 착취에 나섰다. 그러자 농부들은 한계토지를 개척하고 휴경기를 줄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비교적 예측 가능한 여름에는 수확량을 늘리는 그런대로 논리적인 방식을 취했다. 하지만 결국 농부들이 지주에게 진 채무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게다가 경제 불안정은 도시에도 영향을 미쳐 양모 무역과 기타 산업을 붕괴시켰고 군사적 봉쇄가 일상이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서유럽을 화약고로 몰아갈 위험이 있었다. 그러던 중 1315년에 기후가 극적인 변화를 연출했다. 당시의 연대기 작가인 장 데누엘은 "이 계절(1315년 밤)에 비가 오랫동안 아주 많이 내렸다'고 썼다. 비는 부활절 이후 7주 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새로 간 밭이 진군링으로 변하고 씨앗이 씻겨나갔다. 진흙이 갓 개간된 한계토지의 사면으로 흘러내려 새 밭에 깊은 도랑을 만들어냈다. 습윤한 조건에서 밀과 귀리가 간신히 익었다. 호우는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밀값이 금값으로 치솟으면서 기근이 닥쳤다. 날씨와 상관없이 강행되는게 보통이던 군사 원정도 중단되었다. 전투가 재개되자 곡식이 굶주린 공동체로 분배되지 못했다. 비가1316년까지 이어지자 낟알이 영글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빈곤해졌다. 포도가 곰팡이 피해를 입은 탓에 "프랑스 왕국 전체에 포도 작황이 형편없었다." 이 고통이 7년이나 계속되다가 마침내 1322 년에는 겨울 혹한으로 넓은 지역에 해상 운송이 중단되었다.

- 말은 기동력이 뛰어나지만 소화력이 좋지 않다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그에 비해 소는 흡수한 단백질의 25%만을 배설한다는 점에서 소화력이 뛰어난 가축이다. 그래서 소는 말라비틀어지고 단백질이 거의 없는 풀을 먹고도 거뜬히 살수 있다. 말은 소와 반대로 흡수한 단백질의 25%만 소화하고 나머지는 배설해버린다. 두 동물다 이른바 발효통이라는 것을 사용해 식물성 단백질을 에너지로 바꾼다. 소의 발효통, 즉반추위는 음식물이 다소화되지 않는 신체부위에 위치한다. 여기서 박테리아가 .활동하며 주로 식물의 세포벽에 간직되어 있는 식물성 단백질을 분해한다. 이렇게 분해된 단백질은 십이지장으로 전해지고 한번 더 분해되어 아미노산을 형성한다. 그뒤 단백질은 소장으로 들어가서 혈류 속으로 흡수되어 근육을 만들거나 태아에게 영양분을 전달하는 등 중요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말의 반추위는 후장에 있는데, 음식물이 이미 십이지장과 소장을 통과한 다음 이르는 부분이다. 그래서 말은 아미노산을 적게 형성하며, 소장의 벽을 통해 많은 양의 단백질을 흡수하지 못한다
식물성 단백질은 쓸모없는 위치에서 박테리아 활동에 의해 분해도고, 질소를 풍부히 함유한 단백질로 바뀌어 말 자신이 아니라 토양을 풍부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스텝에는 목초가 풍부하므로 소나 말은 섭취한 식물성 단백질을 전량 흡수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품기에는 식물성 단백질의 공급량이 부족하다. 살아 있는 풀은 약 15%의 단백질을 함유하고 죽은 풀은 4%밖에 없다. 건기에 신선한 풀이 죽으면 식물성 단백질은 매우 중요해진다. 소는 말보다 세 배나 되는 단백질을 보유할수 있다.

- 바투의 철군은 한랭다습한 기후가 돌아와 스텝의 목초 사정이 좋아진 때와 일치한다. 그의 왕국은 수세대 동안 좋은 목초지에 힘입어 번영을 누리다가 전쟁으로 무너졌다. 바투는 늘 서쪽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지만 본국의 사정이 좋은 탓에 그의 백성들은 볼가강과 돈강에서 불가리아까지 방대한 영토를 목초지로 이용할 수 있었다. 형편이 좋고 남쪽 지역과의 무역이 활발했으니 굳이 야심 찬 정복을 재개할 유인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기후의 균형추가 흔들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전 세기의 경험으로 미루어 판단해보면, 전쟁과 끊임없는 이동이 지속되었을 테고 바투와 휘하 장수들은 서쪽으로 돌아갔을 게 거의 확실하다. 그의 첩자들은 이미 그에게 서유럽 왕국의 상황을 명확히 보고했다. 중무장한 기사가 위주인 서유럽 군대는 몽골 궁병과 기병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만약 그가 수부타이 장군과 함께 수립한 원래 계획을 추진했다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빈을 파괴한 뒤 독일 공국들을 쳐부수고 이탈리아로 방향을 돌렸을 것이다. 계획이 순조롭게 풀렸다면 계속해서 그는 프랑스와 에스파냐로 진군했을 것이다. 몇 년 뒤, 아마 1250년 초에 이르면 유럽은 몽골의 방대한 서방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 몽골 지배의 고조와 퇴조는 수천 년 전부터 전해져온 유목 생활의 현실과 상당한 관련이 있었다. 목초의 사정이 좋으면 평화가 깃들었지만, 기후가 악화되고 가뭄이 스텝을 황폐화하면 전란이 터지고 정주 지역의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혔다. 온난화와 한랭화. 풍부한 강우량과 가품, 넓은 풀밭과 목초의 부족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은 역사의 주요한 추진력이었다. 그것은 경제적 변화, 정치적 술책, 지배자의 개인적 능력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칭기즈칸과 그의 군대, 나아가 스텝의 가장 작은 부족도 그 현실의 영향을 받았다. 평원의 가품이 사회불안과 탁월한 지휘력을 만났을 때 역사의 골간은 흔들렸다. 가품이 지속되었더라면 유럽문명은 지금과 사뭇 다른 역사를 겪었을 것이다

- 건조한 미국 서부에서 생존하려면 협동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넓고 척박한 환경에서 물과 식량자원에 대한 정보가 중요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물만 있으면 그런대로 먹고살 수 있었지만, 가뭄이 닥쳐 사막 펌프가 동물. 인간, 식물을 가장자리로 내몰면 식량이 크게 부족해졌다. 유럽과 북극권이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했던 시기를 맞았을 때 건조했던 미국 서부의 방대한 지역은 궁핍과 고통에 시달렸다. 아무리 적응력과 기동력이 유일한 구명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 해도 생존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경에 대한 지식과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으로 살아남았고, 지구상에서 보기 드물게 엄혹한 환경에서 수천 년간 극단의 홍수와 가뭄을 견뎌내게 해준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 북아메리카 그레이트베이슨의 사냥꾼 집단들은 징집 물의 양이 줄어드는 수원 부근에 살다가 고지로 이동했다. 푸에블로죽은 극심한 가뭄을 맞아 수백 년 동안 그들 세계의 신성한 중심이었던 차코캐니언의 푸에블로 보니토를 비롯한 큰 집들을 버렸다. 캘리포니아 남해안에 살던 추마시 인디언 집단들은 지속적인 기물으로 부족해진 물과 귀중한 도토리 수확을 놓고 서로 싸웠다. 이 건조한 환경에서 가품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은 적응력과 이동성이있다. 상호의무와 원조의 뿌리 깊은 전통은 미국 서부에서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막 펌프가 끊임없이 작동하면서 강우량이 많으면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강우량이 적으면 사람들을 내뱉었다. 남쪽 멀리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고대 마야문명이 전성기를 맞았을 무럽 온난기의 가뭄이 덮쳤다. 이 재난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고 마야 저지대 남부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 저수지와 수조를 갖준 물의 산이 있었기 때문에 티칼의 지배자는 저지대에 사는 많은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마야 군주들은 스스로 강력한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신적 지도자라고 내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실질적 권력은 물 같은 핵심 자원을 통제하는 권한에서 나왔다. 바꿔 말하면 백성들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이 곧 권력의 기반이었다. 마야인의 삶에서 핵심을 이루는 파종기. 생장기. 수확기는 전부 종교의식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종교행사는 마야인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티칼 같은 도시에서 군주는 권위적 지배에 의해 물을 통제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종교행사를 통해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작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했다. 물의 산은 그 정성 어린 공공행사의 무대였다

- 암울한 시나리오지만, 기후학적 기록으로 알려진 것처럼 다년간의 가뭄에 마야문명이 취약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가뭄 자체가 마야문명을 붕괴시켰다기보다는 건기의 경제ㆍ정치.사회적 영향이 그 원인이었다. 10세기 후반 페텐 같은도시들과 유카탄 남부는 굶주림과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린 주민들이 떠나면서 황폐해졌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변에서 수천년전에 그랬듯이 가뭄과 기근은 사회불안과 반란을 초래했으며, 완벽한 군주리는 이념에 토대를 둔 엄격한 사회질서를 무너뜨렸다
물론 마야문명이 붕괴한 과정은 이보다 휠씬 더 복잡하며, 여러가지 정치•사회적 요소들이 얽혀 있다. 어떤 곳에서는 주변에서 문명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엘리트들이 예전처럼 전쟁을 계속했다. 고고학자 아서 데머리스트는 5년 동안 마야 유적 여섯 군데를 발굴했는데, 그중에는 과테말라 북부 페텍스바룬 지역의 중무장한 요새 중심지인 도스필라스가 있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의 마야 군주들은 기습전을 즐겼으나 8세기에는 전쟁의 양태가 전면전으로 바뀌었다. 지배자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 이웃
들을 정복했다. 왕국이 점차 커지더니 마침내 더 작은 부족국가들로 나뉘어 서로 요새를 세우고 싸우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태와 만성화된 전쟁은 연약한 정글의 생태에 악영향을 미쳤다. 도스필라스에는 수km의 도랑과 해자가 있다. 데머리스트의 발굴 팀은 성벽의 발치에서 많은 창촉, 참수된 유골, 지금은 사라진 울타리와 탑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냈다. 집약농경은 마야 환경에 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는 장기간의 가뭄으로 이미 수리시설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결국 전쟁에 빠진 귀족들은 아메리카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문명을 파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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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1

Quote of the day 2026. 1. 3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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