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1'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6.06.11 좋은 삶을 위한 안내서
  2. 2026.06.11 20260611



-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인간의 괴로움을 치유하지 못하는 철학자의 말은 공허하다. 몸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의술이 쓸모없듯이 마음의 괴로움을 몰아내지 못하는 철학은 조금의 유익함도 없다.'
스토아철학자인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에게 공부하는 자는 매일 한 가지씩 좋은 것을 배워 와야 한다. 그는 집에 돌아왔을 때나 돌아오는 길에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 "철학은 무엇보다 삶의 기술'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목수가 다루는 재료가 나무이고 조각가의 재료가 청동이듯이 철학은 '삶' 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삶의 기술'을 연마한다." -에픽테토스

- 철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탐구의 초점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꾼 데도 이유가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주변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오늘날 이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도 젊었을 때 과학을 공부했지만 인간이 처한 조건을 더 깊이 다루기 위해 과학에서 손을 떴다.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인 철학자인 키케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천상에서 사람들의 도시와 가정으로 끌어내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 철학이 삶과 도덕. 선악에 관한 질문에 답할 것을 처음으로 요청한 사람도 소크라테스였다." 고전 연구가 프랜시스 맥도날드 콘퍼드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했다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인간의 영혼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 경쟁하는 철학 학파들은 가르치는 과목도 조금씩 달랐다. 예컨대 초기 스토아철학자들은 삶의 철학뿐 아니라 자연학(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자연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부문)과 논리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들 학문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에피쿠로스학파도 스토아학파처럼 자연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물리 세계에 대한 관점은 스토아학파와 달랐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논리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편 키레네학파와 키니코스학파는 자연학과 논리학에 모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삶의 철학만 가르쳤다 삶의 철학을 가르치는 학파들은 권하는 철학의 내용도 서로 달랐다. 가령 키레네학파는 삶의 가장 큰 목적은 쾌락을 느끼는 것이며, 쾌락을 위해서라면 어떤 기회든 이용해도 좋다고 보았다. 반면 키니코스학파는 금욕적 삶을 중시했다. 그들은 좋은 삶을 살려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토아학파는 키레네학파와 키니코스학파의 중간쯤에 있었다. 그들은 우정과 부 등 삶이 선사하는 '좋은 것'을 즐기되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삶이 주는 선물을 즐기는 데서 종종 벗어나, 지금즐기고 있는 것을 언제든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숙고해야 한다고 보았다.

- 한 개인이 어느 철학 학파에 속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역사가 사이먼 프라이스에 따르면 "특정 철학 학파를 따르는 것은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개인의 지적 취향의 문제도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자기 삶의 철학을 택한 뒤 매일 그에 따라 살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 현대의 개인에게 종교가 자기 정체성의 핵심인 것처럼('거듭난 기독교인'을 보라), 고대 그리스 로마인에게도 자신의 철학적 `소속'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이는 중요한 지표였다. 역사학자 폴 벤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에게 진정한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그 학파의 교의를 실천하는 삶을 의미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과 의복까지 거기 맞추었고 필요하다면 죽음도 불사했다."

- 스토아철학의 매력 중 하나는 키니코스철학의 금욕주의를 버렸다는 점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단순할지언정 육체적으로 안락한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스토아철학자들이 금욕주의를 버린 논리는 이랬다. 만약 그들이 키니코스철학자들처럼 '좋은 것'을 피한다면 그것이 정말 좋다는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좋은 것을 즐기되 언제든 버릴 준비를 한 상태에서 즐겼다.

- 덕(virtue)이라는 단어를 오해하기 쉽다. '덕 있는 삶을 살라'는 스토아철학자들의 주장에 현대의 독자들은 다소 의아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덕 있는 사람의 적합한 예는 순결과 겸손, 따뜻한 마음씨를 갖춘 수녀님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스토아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수녀님처럼 살라고 권하는 것일까? 스토아철학자들이 말하는 덕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스토아철 학자가 볼 때 한 사람의 덕은 그의 성적 순결이 아니라 인간으로 갖춘 탁월성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인간 본래의 타고난 기능을 제대로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덕 있는 망치, 즉 탁월한 망치는 망치 본연의 기능인 못을 잘 박는 망치인 것처럼 덕 있는 사람은 인간이 타고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이다. 덕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살도록 만들어진 바에 따라 사는 것, 제논의 표현에 따르면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좋은 삶으로 보았다

- 그렇다면 로마 스토아철학자들이 그리스 스토아철학자들보다 평정심을 더 중시한 까닭은 무엇일까? 로마의 스토아철학자들은 그리스 스토아철학자들만큼 이성의 힘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스 스토아철학자들은 무엇이 좋은지 아는 사람은 덕을 추구하게 된다고 보았다.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지 깨달은 사람은(사람은 이성적이므로) 반드시 그것을 추구할 것이며, 따라서 덕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스토아철학자들은 덕의 추구에 따르는 유익한 부산물을(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평정심이다) 굳이 강조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나 로마의 스토아철학자들은 로마 시민들이 덕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평정심에 대해서는 로마 시민들이 본능적으로 중시할 것이며 따라서 평정심을 얻는 방법을 이야기하면 더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로마 스토아철학자들은 덕에 평정심이라는 설탕을 묻혀, 다시 말해 덕을 추구하면 얻게 되는 평정심을 가리켜 보임으로써 로마 시민들이 스토아철학에 끌리게 만들었다.

- 세네카는 평정심을 구하는 최선의 방법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흥분시키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이성의 힘으로 몰아내야 하네. 그러면 부서지지 않는 평정심과 지속적인 자유가 찾아온다네. 흔들림 없고 변하지 않는 무한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네." 세네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스토아철학의 원리를 실천 하는 자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내면 깊은 곳에서 끊임없는 활기와 기쁨이 솟아날 것이네. 자기가 가진 것에서 기쁨을 찾는 그는 내면의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을 구하지 않네. 육체적 쾌락은 내면의 기쁨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일시적인 것이네."
에세이에서 세네카는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스토아철학을 수련하고자 한다면 '기쁨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네카는 루킬리우스가 스토아철학을 수련하기를 바라는 이유에 대해 친구가 기쁨을 빼앗기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토아철 학자는 으레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세네카의 발언이 의외일 것이다. 하지만 `'기쁨에 찬 스토아철학자'란 표현은 결코 모순형용이 아니다.

-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운명의 여신이 잠시 빌려준 것임을 기억하라. 운명의 여신은 우리의 승낙과 예고 없이 언제든 그것을 되가져 갈수 있다네."(세네카)

-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죽음 중에서 정말 숙고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세네카도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매일 매일을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라고 했다. 나아가 세네카는 지금 이 순간'이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라고 했다.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극단적 쾌락을 좇으며 거기 빠져 사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닥치는 대로 산다 한들 치러야 할 대가도 없을 것이다. 마약에 빠지더라도 내일 죽으면 중독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신용카드를 실것 굵어도 내일 죽는다면 날아올 청구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라'는 스토아철학자들의 조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스토아철학자들에게 매일을 마지막 날인 듯 산다는 것은 부정적 시각화를 확장한 것이었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으며 따라서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를 지내는 동안 자주 떠올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숙고할 때 우리는 쾌락주의자가 되기보다,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사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이고, 그러면 남은 날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이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라는 스토아철학의 조언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행동할 때의 마음가짐을 바꾸려는 목적이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내일을 생각 하거나 계획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내일을 생각하고 계획할 때도 오늘에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스토아철학자들이 우리의 죽음을 숙고하라고 한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숙고할 때 삶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상 모든 일의 무상함을 숙고할 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 것을 마지막으로 하는 때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 없었던 의미와 열정을 불어넣는다. 이제 우리는 몽유병 환자처럼 살지 않는다. 무상함을 생각하는 것이 우울하고 무섭다는 이도 있지만 무상함을 자주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스토아철학자들의 목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위해 최선으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노력이 효과를 내지 못해도 내면의 목표, 즉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사실에 스토아철학자들은 만족했다.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는 자는 통제 삼분법을 염두에 두고 산다. 그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일.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나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일이 그것이다. 그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일은 제쳐놓음으로써 필요 없는 걱정을 던다. 대신에 통제할 수 있는 일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는 일어 관여한다. 그리고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관여할 때는 외면의 목표보다 내면의 목표를 세운다. 내면의 목표를 세움으로써 좌절과 실망을 상당 부분 덜 수 있다

- 스토아철학자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운명론적 태도를 지녀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네카에 따르면 "우리가 우주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므로" 자신을 운명에 맡겨야 한다. 에픽테토스도 우리는 운명이 쓴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연극의 배역을 선택할 수 없다. 어떤 배역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해 연기할 뿐이다. 운명이 거지 역할을 주었다면 거지 역할을, 왕의 역할을 주었다면 왕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삶이 무리 없이 흘러 가길 바란다면 삶의 사건이 우리의 욕망에 부합하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의 욕망을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맞추라고 했다. 삶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리라고'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쿠스도 삶에 대한 운명론적 태도를 지지했다. 

- 부정적 시각화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안 좋은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세네카는 이 기법을 더 밀고 갈 것을 권한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아가 그 일이 '실제 일어난' 것처럼 살라." 재산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아가 가끔씩 실제로 가난하게 살아 보아야 한다. 거친 음식과 해진 옷에 만족할 줄 알 아야 한다.' 세네카에 따르면, 스토아철학의 경쟁자인 에피쿠로스도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가난하게 산 이유는 세네카와 달랐다. 세네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가난하게 살았다면, 에피쿠로스는 무엇 없이 살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난하게 살 았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그것이 없으면 삶이 비참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제로 그것 없이 살아보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가난하게 산 이유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였다. 무소니우스는 부정적 시각화를 한 단계 더 밀고 간다. 그에 따 \르면 안 좋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사는 데서 나아가 '일부 \러' 그런 일을 일으켜야 한다. 평소 같으면 간단히 피하고 마는 불편함을 일부러, 주기적으로 겪어야 한다. 추운 날씨에 옷을 벗고 지내거나 신발을 벗고 다녀야 하며, 물과 음식이 있어도 목마르고 배고픈 상태에 자신을 밀어 넣어야 한다. 푹신한 침대를 마다하고 딱딱한 바닥에서 자야 한다.

- "무화과나무의 기능은 무화과나무의 일을 하는 것이고, 개의 기능은 개의 일을, 벌의 기능은 벌의 일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능은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일, 즉 신이 인간에게 맡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세네카에 따르면, 모욕의 원천에 대해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덩치 큰 아이가 모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엄마에게 '모욕'을 준다고 여기는 엄마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치한 어른이 주는 모욕에 화를 내는 것도 어리 석은 일이다. 게다가 우리를 모욕하는 자가 심각한 성격 결함을 가진 경우도 있다. 마르쿠스에 따르면 이런 사람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보내야 한다. 스토아철학의 실천이 조금씩 향상하면 우리에 관한 다른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 주변의 인정을 구하고 불인정을 피하는 것이 더 이상 삶의 목표가 아니게 된다. 사람들의 의견에 초연해지며 그들이 던지는 모욕에 아픔을 적게 느낀다. 스토아의 현자는 주변 사람의 모욕을 '개 짓는 소리' 쯤으로 여긴다. 개가 짖으면 속으로 '저 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짐작하지만 심란한 마음으로 종일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는다. "맙소사! 저 개가 나를 좋아하지 않다니!"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 모욕의 얼얼한 아픔을 제거하는 스토아철학의 중요한 전략은 또 있다. 모욕으로 인한 괴로움의 원천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당신에게 모욕을 안기는 주범은 당신을 학대하고 때린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는 당신 자신의 생각이다." 따라서 "해를 입고자 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결코 당신을 해칠 수 없다. 상대에게 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만 당신은 해를 입는다." 이로써 다음의 결론을 얻는다 상대가 나를 모욕해도 내가 해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상대의 모욕은 조금도 아프지 않다. 이 조언은 스토아철학의 다음과 같은 일반적 신념을 응용한 것 이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 세네카는 카토가 공중목욕탕에서 자신을 친 사람을 응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자가 카토를 알아보고 사과하자 화를 내거나 벌을 내리는 대신 이렇게 답했다. "나를 쳤었나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카토는 상대가 자신을 친 일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상대를 용서했을 때보다 더 훌륭한 정신을 보여 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상대의 모욕에 대한 무응대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모욕 응대법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세네카가 지적하듯이 모욕에 대한 무응대는 모욕을 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는 우리가 모욕을 제대로 이해하기나 했는지 의아할 것이다. 더욱이 상대는 우리를 괴롭히는 기쁨을 빼앗긴 나머지 오히려 마음이 괴로울 수 있다.
모욕을 준 자에게 응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유치한 행동에 시간을 내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비치는 것이다. 

- 마르쿠스도 화를 일으키지 않는 법에 관한 조언을 주었다. 그는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속성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사물의 거대한 계획에서 볼 때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마르쿠스는 백 년 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서기 70~79년) 시대를 돌아본다. 당시 사람들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사랑을 하고 서로 시기하고 싸우고 잔치를 벌이는 등 여느 곳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았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오늘날 그 삶의 조그마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 세대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매우 중요해 보이는 것들은 우리 손자 세대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에 화를 내는 자신을 보았을 때는 그것의 우주적 (비)중요성에 대해 잠시 숙고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애당초 화의 싹을 자를 수 있다

-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자유를 지키려면 나에 관한 사람들의 평판에 무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불인정이 싫다면 그만큼 사람들의 인정에도 초연해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은 그들을 비웃어주는 것이라고 했다.(물론 소리 내어 웃어서는 안 된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우리에 관한 타인의 의견에 무심하라고 조언했지만 무관심을 속으로 숨기라고 했다. 그들의 생각에 개의치 않는다고 겉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최악의 모욕을 안기는 일이다. 마르쿠스도 에픽테토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 우리의 목표는 나에 관한 타인의 의견에 무심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마르 쿠스는 타인의 의견에 무심해질 수 있다면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고 말한다.

- 스무 살 때는 세상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스토아철학을 거부했지만 여든이 되고 보니 세상은 '내 것'이 아니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무 살 때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았던 그는 이제 죽음의 필연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죽음에 닥쳐서야 '소박한 평정심'이 마음에 든 그는 마침내 스토아철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그러나 스토아철학을 비롯한 삶의 철학에 대한 고민 없이 늙는 일도 얼마든 가능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나머지, 여든이 되어도 스무 살 때보다 조금도 더 행복하지 않다. 삶을 즐기지 못하고 인생의 쓴맛을 본 그들은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주변 상황, 친척, 음식, 날씨 등 온갖 것에 대해 불평한다. 이런 상황은 비극이다.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음에도(지금 도 경험할 수 있음에도) 잘못된 삶의 목표를 택했다는 점에서 비극이며, 목표를 바르게 택했어도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비극이다. 이처럼 제대로 된 삶의 철학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한 번뿐인 삶을 낭비하게 된다.

- 세네카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은 대부분 돌연한 쇠락에 이르기 전 삶의 내리막길에서 누렸다고 했다. 또 그는 '돌연한 쇠락에도 나름의 기쁨이 있다고 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돌연한 쇠락으로 특정 쾌락을 경험하는 능력을 잃으면 그 쾌락에 대한 욕망도 함께 사라진다는 점이다. "욕망을 다했다는 것, 욕망을 졸업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예컨대 성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욕망을 보자. 많은 사람, 특히 많은 남성에게 성욕은 일상을 사는 데 성가신 존재다. 성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자제할 수 있지만, 자기 안에 내장된 성욕의 느낌 자체는 어쩔 수 없다(애당초 성욕이 없었거나 쉽게 꺼뜨릴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인류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음을 흩뜨리는 성욕은 우리의 일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 여러 가지 삶의 철학 가운데 스토아철학은 노년에 더 적합하다. 많은 사람에게 노년은 인생의 가장 도전적 시기인데 스토아철학의 주된 목적은 삶의 도전에 맞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인은 젊은이보다 스토아철학이 제안하는 평정심을 더 중요시한다. 젊은이는 소박한 평정심에 머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팔십대가 되면 평정심이 얼마나 소중한지, 평생을 살며 실제로 평정심을 얻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는다.
이런 이유로 무소니우스는 젊었을 때 스토아철학을 시작하라고 권했다. 그에게 스토아철학은 노년을 준비하는 최상의 방법이 었다. 그의 조언을 따라 젊었을 때 스토아철학을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나이가 들어 젊음과 기쁨을 잃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몸이 쇠약하고 건강이 나빠져도, 친척이 무시해도 불평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런 일에 대한 효과적인 해독제를 자신의 지성에, 그리고 그가 받은 교육에 갖고 있다.

- 삶에서 기쁨의 원천을 빼앗겼을 때 스토아주의자는 신속히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스토아주의자의 즐김은 눈 높은 자의 즐김과 다르다. 그는 얼마든지 다른 것을 즐길 줄 안다. 섬에 유배당한 세네카와 무소니우스가 우울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생활환경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쉽게 얻을 수 있고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삶에서 즐길 것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즐겼으며, 지금 이대로의 삶과 세상을 즐겼다. 이것은 결코 적은 성취가 아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삶의 많은 것을 즐겼을 뿐 아니라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도 기쁨을 느꼈다. 그들은 `기쁨 자체'를 경험 했다. 스토아의 현자는 이런 기쁨을 항시적으로 경험했다.

- 역사가 폴 벤느는 말했다. "역경 없는 고요한 삶은 스토아철학의 수련자를 불안하게 한다. 폭풍이 닥쳤을 때 의연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네카에 따르면 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 해를 입히려는 자를 오히려 반겨야 한다. 역경은 그를 다치게 하기보다 오히려 도움을 준다. "현명한 자는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두들겨 패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는 상처마저 유익하 다고 여긴다. 상처에서 자신의 덕을 시험하는 수단을 발견한다." 세네카는 스토아주의자라면 죽음도 반겨야 한다고 했다. 죽음이야 말로 스토아주의자가 지금껏 수련한 스토아철학에 대한 최종 시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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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1

Quote of the day 2026. 6. 1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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