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중엽, 영국의 변화를 재빠르게 간파한 윌리엄 길버트의 감각은 대단히 탁월했음. 당시의 관점에서 획기적인 조치일 수밖에 없었던 세가지 변화가 근대기업 탄생의 모태가 됨. 첫번째가 자연인과 동일한 입장에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법인의 탄생이었고, 두번째가 기업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임의적으로 매매가 가능한 주권을 교부했던 일이며, 마지막으로 투자자들의 책임한계를 투자금액 이내로 제한하는 유한책임제도의 도입.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치적을 꼽는다면 기업활동을 제약했던 제도적 장애요인을 제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도시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는 등 기업이 특수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의회의 인가라는 장애물을 철폐해 나갔다. 즉 사업목적이 다양한 기업을 설립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 회사를 만드는 데 필요했던 것은 골드베리가 유토피아 주식회사라는 오페레타에서 유토피아 섬 주민들에게 "가능하면 발기인으로 귀족들이 참여한느 것이 바람직하지요"라고 조롱섞인 말을 했던 것처럼, 등록할 회사 정관에 서명할 발기인 7명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채권자들은 주주들에게 투자의 범위를 넘어서는, 회사의 채무변제는 요청할 수 없다는 주주들의 유한책임이 정관에 명시되는 정도였다.
- 중국이 뒤처진 결정적 요인은 폐쇄정책. 제국주의의 확산에 힘입어 중국경제가 꽃을 피웠을 때인 15세기 초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보물선단을 건조하여 아시아 각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1424년 그가 죽자 그의 아들 홍희제가 보물선 항해를 중단시켰고 가장 유명했던 항해사 정화에게는 육상근무를 명함. 그뒤 다른 황제들이 아시아 국가와 관계복원에 나섰지만 그리 의욕적인 자세는 아니었음. 1793년에는 청나라 건륭제가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국의 대사가 보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우리의 물건을 주는 대신 외국의 미개인들에게 수입해야 할 물건은 하나도 없다"
- 16세기와 17세기에 가장 특이한 형태의 기업이 탄생. 바로 정부에게 특수사업을 위임받은 수탁회사이다. 동인도, 머스코비, 허드슨 베이, 아프리카, 레반드, 버지니아, 매사춧츠 등이 이런 범주에 해당. 이런 회사들의 사업내용은 범위가 워낙 넓어서 간추리기가 어렵다. 또 다른 특색은 수탁회사들의 수명이 예상보다 길었다는 점. 1700년 현대의 다국적 기업보다 많은 350명의 직원으로 출범한 동인도 회사는 272년 동안 생명력을 이어갔고, 1670년에 설립된 허드슨 베이는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국적 기업이라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음. 수탁회사의 주목적은, 콜럼버스, 마젤란, 바스코다가마가 발견한 신대륙의 상권을 정부와 상인들이 공동으로 장악하는 데 있었다. 이런 회사를 설립했던 관계자들은 왕실에게서 특정지역의 이권을 독점적으로 인정받았음
- 18세기와 19세기 동안의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수탁회사가 기업의 전형적 형태였다는 주장은 당시의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상업활동이 합작형태의 영세기업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때였으며, 종업원들은 한 가정을 집단 합숙소로 지정하여,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형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 말 파리에서 가장 큰 은행이라야 종업원이 고작 30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유럽의 영세상인들은 짧은 기간이나마 주식회사를 세우자는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며, 영국도 1690년대 한때나마 그런 환경에 휩쓸렸다.
- 초기의 주식회사들은 제국주의의 확산과 난폭한 투기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18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1689년부터 1714년에 있었던 양국간의 전쟁 후유증으로 파생된 국가채무 상환계획을 조정하기 위해 남해 주식회사와 미시시피 주식회사라는 국가재정의 수탁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회사들의 목적은 확정된 이자를 지급하던 국가채무를 수익률이 낮은 주식으로 전환하여 채무변제에 따른 경비를 줄이는데 있었음. 결과적으로 1920년대 미국 주가거품을 무색하게 하는 혼란을 야기했으며,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입안한 사람은 존 로였다.
- 독일 사회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의 저서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을까?'에서 이렇게 주장. '커다란 로스트 비프와 사과파이를 먹는 자리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는 설 자리가 없다' 새로 태어난 대기업들은 수백만명의 미국 보통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제공했으며, 거리의 행인들까지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헨리포드가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을 때 거부들에게는 조작이 가능한 장난감같다는 호기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덕분에 그는 17년 모델T라는 자동차를 150만대나 팔았다. 1877년 조지 이스트먼은 49달러를 주고 처음으로 카메라를 산 후 사용법을 배우는 데 5달러를 썼다. 그러나 1900년에 들어서자 1달러짜리 브라우니 자동 카메라가 선을 보였다. 거기에는 이런 선전문구가 적혀 있음. '셔터만 누르십시오. 나머지는 저희들이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규모의 크기는 신설회사들의 생산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한편, 조그마한 기업들이 시장진입을 하는데 진로를 가로막는 장해요인으로 작용. 이런 대규모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의 몸집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충분하 자금과 훌륭한 노동력만 갖추고 있으면 신제품을 만들어 시장 지배력을 얼마든지 강화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동업자들과 담합하는 것에 앞서 스스로의 몸집 부풀리기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미국 거대기업들이 각 산업분야에서 독보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가장 확실한 무기였다.
- 산업화에 앞장섰던 영국이 기업을 대규모로 키우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자본주의 초기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음. 대영제국 전체 시장규모는 미국과 대등했으나 섬나라였던 관계로 대기업을 육성하자는 압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대기업이 출현하지 못했던 두가지 결정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하나는 가족이나 개인중심의 기업체를 선호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 사람들의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편견이었다. 영국기업가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사촌들이 프로근선을 배운 한참 뒤에도 개인중심의 경영에 집착. 2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수많은 영국 기업들이 창업자 가족들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들은 특별히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만 외부전문가의 도움을 청했으며 대부분은 회사내부에서 처리. 가족중심 회사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조직도표나 업무분장 지침서 등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인간관계와 가문의 전통이 경영의 전부였다.
- 기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영국이 가지고 있었던 두번째 문제점은 사업은 속물들이 하는 것쯤으로 간주했다는 것. 엘리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도 재능있는 학생들은 현학적일 뿐 실용성이 없는 고전학에 전념케 한 반면, 상업주의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는 학생들이 있으면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비난. 그는 리버풀과 버밍엄에서 잼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지! 라고 비아냥거리는 투의 운율이 상당히 인기를 끌 정도였다. 국립학교나 새로 생긴 대학에서도 이튼이나 옥스퍼드 또는 케임브리지의 비실용적 성향을 흉내내기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조지오웰의 지적이 흥미롭다. '이런 교육제도가 이성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무소유였다. 그러나 신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은 이미 대지주였고, 전문직에 진출하여 귀족다운 풍모를 유지했으며, 무역이나 상업으로 나라를 풍족하게 만든 대신 병역의무로 주어진 임무를 갈음했을뿐이다.' 영국의 지식인들에게, 특히 두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사업을 했다는 경력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일로, 바보나 상상력이 전혀 없는 비천한 사람들이 추구했던 일로 비춰졌다.
- 독일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은 이런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기업의 자율권이 상당히 박탈된 분위기에서 경제적 성공을 어떻게 이루었느냐는 점이다. 20세기 초 사회적으로 드러난 여러가지 반작용은 과연 독일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갖게 했다.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수차례 드러난 구조적 성격의 경기후퇴, 나치의 등장, 분단 등이 부정적인 면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 한편 독일 성공의 원동력은 국가 사회주의에 가까운 기업이 이익금을 환원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다른 두가지 요인에 있었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음. 그 첫번째가 과학적 사고와 직업교육에 바탕을 둔 교육숭배사상이다. 독일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피터 드러커는 독일의 제조업에 생산성이 뿌리를 내리게 만든 장본인은 1840녀대 현장실습과 교실학습의 병행이 가능토록 만들기 위해 기업도제제도를 고안해낸 초기 산업가 아우구스트 보르지히였다. 대학가운데서도 특히 이공계 대학은 연구개발과 산업체에 일꾼을 공급하는 두가지 역할을 훌륭히 해냄. 1872년 뮌헨 대학에서만 배출한 화학계통 연구원이 유럽 전역에서 공급한 인원보다 많았음. 또 베를린 연구소는 공장설립과 관리의 방법에 대한 2년제 연구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미국과 비슷한 시기인 1900년에 독일도 경영대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독일 기술자 연합회와 같이 구태의연한 단체도 과학지식의 보급과 자문역할에 팔을 걷어 부쳤다. 대부분의 기업도 사내 연구소 개설은 물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은 기초산업체인 석탄이나 철강회사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두번째 요인으로는 기업의 관리자들이 고위 공무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점. 저임금의 관리자들은 하위 공직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임금을 받는 고위임원까지도 기업의 하인이라고 부르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야 극히 소수의 임원이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영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고임금 관리자들이 특수관계인을 배제한 채, 기업의 감독기구를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실정이었음. 또 다른 독일기업의 특징 중 하나는 일반화된 기술자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특화된 기술자에게 책임을 맡겼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흉내를 내면서 뒤 따랐다.
- 거대기업을 전문화하여 주력사업분야를 특화했다는 의미에서 사업부제를 택한 기업은 스스로 중대한 개혁조치를 취한 셈이다. 경영관리제도에 대해 심사숙고했다는 점에서도 위대한 결정으로 봐야 한다. 중세 때 경영을 맡았던 귀족들이 놀고 먹던 한량이었다면, 그들의 뒤를 이은 전문경영인들은 꼼꼼한 성격에 극히 논리적이었다는 점이 특징. 트로츠키파 제임스 번햄 같은 좌파 사회주의 작가들은 새롭게 개발된 관리체계를 몸에 익힌 경영자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점을 매립해 버렸다고 불평했다. 80년대에는 기업사냥꾼들이 영민한 경영자들에 대해 비슷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 새로운 형태의 경영이 성공을 일구어냈다. 19세기 말에 사업이나 경영에 대한 교육은 회계장부 기재와 서류를 관리하는 기능전수 정도가 전부였다. 1881년에 설립된 펜실베니아 대학 경영대학원인 워튼 스쿨만이 다른 소재를 가르쳤다. 곧이어 경영대학원의 설립이 급속도로 확산. 포드 자동차가 승용차 모델T를 선보였던 1908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이 문을 열었다. 1914년에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기업금융, 의사결정에 관한 강좌를 개설하였다. 경영에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이 프레더릭 테일러의 뒤를 따랐다. 아서 리틀이 경영컨설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데 힘입은 제임스 맥킨지가 미국 경영자 연합회 설립 3년 후인 1926년에 처음으로 컨설팅 사무실을 열었다. 정치인도 이 열풍에 동참했다. 허버트 후버는 새로운 경영기법을 정부의 운용체계에 응용하려고 노력했다.
- 실리콘 밸리는 두가지 방법으로 기업의 외양과 성격을 바꾸어 갔다. 그 첫번째 변화는 여기에서 만들어낸 상품이 기업구조를 바꾸어 간다는 것. 이곳에 있던 모든 회사가 변함없이 추구했던 원칙은 상품의 소형화. 20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계산업무에 투입된 인건비가 마지막에 가서는 99.99%나 줄어든 것으로 밝혀졌다. 역산을 해보면 매년 33.33%가 줄어든 셈. 컴퓨터는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여 여러곳의 사무실과 공장, 지방조직, 출장가는 직원은 물론 외부에서가지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인터넷은 거래비용의 절감에 크게 공헌. 20세기 말에 접으들 즈음 제너럴일렉트릭과 시스코시스템즈는 물품공급업자들에게 온라인 입찰방식을 이용하라고 주문해쏙, 인터넷 판매회사 이베이는 전세계에 4천 2백만명의 고객을 갖게 됨. 2001년 마지막 3개월동안 이베이의 고객들은 1억 2천6백만개의 상품을 구입하는 데 27억불을 소비. 이런 거래가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고 일어났더라면 아마 수만명의 중개인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리콘 밸리가 회사의 모습을 바꾸어 갔던 또 다른 방법은 기업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점. 휴렛패커드나 인텔같은 회사들은 몇십년을 견뎌 온 회사들이지만 실리콘밸리는 계속해서 창조적파괴를 주문하고 있었다. 이 계곡의 성장주역 또한 과거 4년동안 연평균 성장률 20%를 자랑하던 북아프리카 영양과 같이 적지만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있던 중소기업들이었다. 온갖 실패와 시련도 실리콘 밸리는 잘 견뎌 나갔다.
- 20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모든 기업에서 발생했던 변화를 실리콘 밸리의 지식노동자, 월스트리트의 자본가, 일본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3인방이 불확실한 시대의 배후에서 전혀 조율되지 않은 화음을 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경영이론을 본업으로 하는 산업의 부상이 신뢰감의 상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했다고 봐야 한다. 기업들이 모든 문제의 해결방안을 외부에서 찾게 되면서부터 심지어 간단한 사고력이나 판단력가지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던 외부의 가짜의사들에게 습관적으로 의뢰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 90년대는 기업이라는 황홀경에 넋을 잃은 10년이었따. 웃음 띤 표정의 최고경영자들이 표지에 얼굴을 드러내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에도 경제문제를 다루는 잡지는 헤아릴 수 없이 늘어났다. 또 그들 사이에서 기업영웅들에 대한 칭송이 그치질 않았다. 코카콜라의 노련한 사장 고이주에타가 주주총회에서 연봉 8천만달러의 정당성을 밝히려 하자 주주들은 네번에 걸친 박수갈채로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화담. 2001년 1월 미국정부가 MBA로서는 첫 대통령이었던 조지부시를 내세워 기업에 친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애썼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이 내각을 전직 최고경영자들로 채우고, 기업친화적 정책을 추진함은 물론 새로운 국가 에너지 정책 입안에 기업을 참여케 한 것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기업이 사회적 의무감만 강조했던 클린턴 정부의 정책을 기업 친화적인 정책으로 돌려놓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취임후 1년반이 지나자 모든 것이 바뀌어 갔다. 2002년 여름 부시는 30년대 이후 기업에 관한 입법 가운데는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진 사베인스-옥슬리법에 서명. 그 배경에는 경영자들의 비리를 알게 된 미국인들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 다국적 기업의 역사는 대체로 기업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함. 유럽에서 출생한 후 19세기 영국에서 성장한 다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국경을 넘어 그들이 처음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였던 분야는 금융산업이다. 중세 때 교황을 대신했던 이탈리아 금융자본가들은 종교세 대한 영국산 양모를 거두어 들여 해외에 판 다음 일정액을 자기들 몫으로 떼는 일을 했다. 16세기 독일의 푸거가문과 휏스테터 가문같은 금융자본가들은 다국적 조직망을 구축한 다음 가난한 군주들을 상대로 대금업을 영위.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스페인의 왕이 단골고객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광산업으로까지 사업영역을 넓혀나감. 다음 단계에 들어서자 동인도 회사라는 정부의 수탁기관이 나타나 다국적 기업의 한층 활발한 모습을 드러냄. 하지만 현대기업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현대 다국적 기업의 역사는 영국의 철도회사에서부터 시작됨. 초기부터 철도는 수출산업으로 자리를 잡아감. 로켓호의 발명가인 로버트 시티븐슨은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철도부설 가능성을 조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를 고용했던 철도회사는 남미에 막대한 이권을 갖고 있었던 나머지 런던에서 아메리칸 모니터란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벨기에의 초기 철도망 전체도 영국인들의 소유였던 한편, 파리에서 프랑스 서북방에 위치한 샤넬지방의 항구로 이어지는 철도도 런던 사우샘프턴 철도 주식회사가 개발한 것.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기업가중 하나였던 토머스 브래시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 8천마일에 이르는 철로를 부설했고, 8천명의 기술자와 인부를 고용하여 프랑스 서북부 루앙에 기관차와 화차 공작창을 운여하기도 했으며, 한때는 5대륙에서 철로와 차량 격납고 운영을 직접 지휘한 일도 있다.
- 빅토리아 시대 때 주식회사들은 해외의 값진 원자재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철도회사들의 이런 기법을 잘 원용했다. 아프리카의 금, 다이아몬드, 구리, 말레이시아와 볼리비아의 주석, 말레이시아의 고무, 인도의 차, 중동의 석유 등이 그들이 노렸던 그 시대의 보물이었다. 외국의 값진 원자재를 수중에 넣기 위해서는 현지 사정에 맞는 상이한 형태의 이사회를 운영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며, 다국적 기업을 통해 그런 기능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이런 까닭에 초기 유명했던 다국적 기업에는 혼혈아들이 많았음. 드비어스는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혼혈, 리오틴토는 영국과 스페인의 합작품이었으며, 쉘 석유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공동경영하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19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다국적 기업은 두가지 방법으로 외양을 다듬어 갔다. 첫번째 변화는 주요 거래 상품을 철도와 광산개발과 같이 장대한 산업설비에서 약품, 담배, 초콜릿 비누, 마가린, 재봉틀, 기성복 등으로 바꾸어 간 것. 철도, 기선, 전화와 전신, 19세기 말에는 급기야 자동차까지 나서 교역의 거리를 좁혀 나가자 이런 상품의 이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 두번째 변화는 상대국가의 정치세력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제력이었다. 특히 관세문제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교역국가들이 하나둘씩 자국산업을 방어하기 위한 보호관세를 들고 나왔다. 1883년 미국을 시작으로 1887년 독일이 뒤를 이었다. 1차대전일 발발할 때까지 자유무역을 외치던 유일한 국가는 영국과 네덜란드 뿐이었다. 이런 여건 때문에 관세장벽을 넘어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선 다국적 기업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음. 한편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에 있던 공장들을 처분한 영국의 비누왕 윌리엄 레버는 오히려 자유무역 체제가 되면 굳이 영국 밖에서 비누를 만들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 여러모로 살펴봤을 때 19세기 다국적 기업과 제국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정상에 제국주의가 앉아 있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선동이 그렇게 만든 면도 있다. 당시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해외투자는 식민지보다는 개발상태가 조금 나은 국가들을 향했다. 낙후된 아프리카 원주민의 경제구조로는 서구제품을 뒷받침할 만한 구매력을 상당기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19세기 제국주의는 상업적 이해상관보다는 전략적인 면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에서 벌렸던 영토화곱 경쟁이 경제적 이득으로 이어진 경우는 보기 힘들다. 몇몇 기업가들이 아프리카라는 먼 식민지에서 조그마한 부의 창출에 성공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 기업은 20세기 중반 이후 과거와의 단절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요하는 주체로서 선두에 나서지는 않지만 헨리 애덤스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변화라는 틀을 짜 맞추는 데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기업이 변화를 서둘렀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포드의 모델T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 프로세스 같은 낯선 상품의 대량생산을 통해 사회질서를 바꾼 뒤 일상생활의 속도를 조절하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기업의 역사는 스스로 진화해가는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성공의 비결로 보아야 한다.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정부 하수인의 처지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변신에 성공했던 한편, 주주에게는 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소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윌슨이 새로운 조직사회라고 불렀던 기업은 종업원들과 호흡을 맞추어 가면서 가족기업을 운영했던 한가안 귀족들보다 훨씬 긴 생명력을 이어갔다. 초기의 경영자들은 이런 조직에 위계질서를 더해 역동성을 창출해 냈으나 여건이 바뀌자 그들 또한 더이상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버림. 이제 기업은 군살이 없는 평면적 생명체로 변해가고 있다.
- 중국이 뒤처진 결정적 요인은 폐쇄정책. 제국주의의 확산에 힘입어 중국경제가 꽃을 피웠을 때인 15세기 초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보물선단을 건조하여 아시아 각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1424년 그가 죽자 그의 아들 홍희제가 보물선 항해를 중단시켰고 가장 유명했던 항해사 정화에게는 육상근무를 명함. 그뒤 다른 황제들이 아시아 국가와 관계복원에 나섰지만 그리 의욕적인 자세는 아니었음. 1793년에는 청나라 건륭제가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국의 대사가 보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우리의 물건을 주는 대신 외국의 미개인들에게 수입해야 할 물건은 하나도 없다"
- 16세기와 17세기에 가장 특이한 형태의 기업이 탄생. 바로 정부에게 특수사업을 위임받은 수탁회사이다. 동인도, 머스코비, 허드슨 베이, 아프리카, 레반드, 버지니아, 매사춧츠 등이 이런 범주에 해당. 이런 회사들의 사업내용은 범위가 워낙 넓어서 간추리기가 어렵다. 또 다른 특색은 수탁회사들의 수명이 예상보다 길었다는 점. 1700년 현대의 다국적 기업보다 많은 350명의 직원으로 출범한 동인도 회사는 272년 동안 생명력을 이어갔고, 1670년에 설립된 허드슨 베이는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국적 기업이라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음. 수탁회사의 주목적은, 콜럼버스, 마젤란, 바스코다가마가 발견한 신대륙의 상권을 정부와 상인들이 공동으로 장악하는 데 있었다. 이런 회사를 설립했던 관계자들은 왕실에게서 특정지역의 이권을 독점적으로 인정받았음
- 18세기와 19세기 동안의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수탁회사가 기업의 전형적 형태였다는 주장은 당시의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상업활동이 합작형태의 영세기업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때였으며, 종업원들은 한 가정을 집단 합숙소로 지정하여,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형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 말 파리에서 가장 큰 은행이라야 종업원이 고작 30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유럽의 영세상인들은 짧은 기간이나마 주식회사를 세우자는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며, 영국도 1690년대 한때나마 그런 환경에 휩쓸렸다.
- 초기의 주식회사들은 제국주의의 확산과 난폭한 투기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18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1689년부터 1714년에 있었던 양국간의 전쟁 후유증으로 파생된 국가채무 상환계획을 조정하기 위해 남해 주식회사와 미시시피 주식회사라는 국가재정의 수탁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회사들의 목적은 확정된 이자를 지급하던 국가채무를 수익률이 낮은 주식으로 전환하여 채무변제에 따른 경비를 줄이는데 있었음. 결과적으로 1920년대 미국 주가거품을 무색하게 하는 혼란을 야기했으며,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입안한 사람은 존 로였다.
- 독일 사회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의 저서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을까?'에서 이렇게 주장. '커다란 로스트 비프와 사과파이를 먹는 자리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는 설 자리가 없다' 새로 태어난 대기업들은 수백만명의 미국 보통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제공했으며, 거리의 행인들까지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헨리포드가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을 때 거부들에게는 조작이 가능한 장난감같다는 호기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덕분에 그는 17년 모델T라는 자동차를 150만대나 팔았다. 1877년 조지 이스트먼은 49달러를 주고 처음으로 카메라를 산 후 사용법을 배우는 데 5달러를 썼다. 그러나 1900년에 들어서자 1달러짜리 브라우니 자동 카메라가 선을 보였다. 거기에는 이런 선전문구가 적혀 있음. '셔터만 누르십시오. 나머지는 저희들이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규모의 크기는 신설회사들의 생산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한편, 조그마한 기업들이 시장진입을 하는데 진로를 가로막는 장해요인으로 작용. 이런 대규모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의 몸집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충분하 자금과 훌륭한 노동력만 갖추고 있으면 신제품을 만들어 시장 지배력을 얼마든지 강화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동업자들과 담합하는 것에 앞서 스스로의 몸집 부풀리기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미국 거대기업들이 각 산업분야에서 독보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가장 확실한 무기였다.
- 산업화에 앞장섰던 영국이 기업을 대규모로 키우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자본주의 초기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음. 대영제국 전체 시장규모는 미국과 대등했으나 섬나라였던 관계로 대기업을 육성하자는 압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대기업이 출현하지 못했던 두가지 결정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하나는 가족이나 개인중심의 기업체를 선호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 사람들의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편견이었다. 영국기업가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사촌들이 프로근선을 배운 한참 뒤에도 개인중심의 경영에 집착. 2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수많은 영국 기업들이 창업자 가족들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들은 특별히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만 외부전문가의 도움을 청했으며 대부분은 회사내부에서 처리. 가족중심 회사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조직도표나 업무분장 지침서 등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인간관계와 가문의 전통이 경영의 전부였다.
- 기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영국이 가지고 있었던 두번째 문제점은 사업은 속물들이 하는 것쯤으로 간주했다는 것. 엘리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도 재능있는 학생들은 현학적일 뿐 실용성이 없는 고전학에 전념케 한 반면, 상업주의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는 학생들이 있으면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비난. 그는 리버풀과 버밍엄에서 잼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지! 라고 비아냥거리는 투의 운율이 상당히 인기를 끌 정도였다. 국립학교나 새로 생긴 대학에서도 이튼이나 옥스퍼드 또는 케임브리지의 비실용적 성향을 흉내내기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조지오웰의 지적이 흥미롭다. '이런 교육제도가 이성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무소유였다. 그러나 신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은 이미 대지주였고, 전문직에 진출하여 귀족다운 풍모를 유지했으며, 무역이나 상업으로 나라를 풍족하게 만든 대신 병역의무로 주어진 임무를 갈음했을뿐이다.' 영국의 지식인들에게, 특히 두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사업을 했다는 경력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일로, 바보나 상상력이 전혀 없는 비천한 사람들이 추구했던 일로 비춰졌다.
- 독일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은 이런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기업의 자율권이 상당히 박탈된 분위기에서 경제적 성공을 어떻게 이루었느냐는 점이다. 20세기 초 사회적으로 드러난 여러가지 반작용은 과연 독일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갖게 했다.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수차례 드러난 구조적 성격의 경기후퇴, 나치의 등장, 분단 등이 부정적인 면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 한편 독일 성공의 원동력은 국가 사회주의에 가까운 기업이 이익금을 환원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다른 두가지 요인에 있었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음. 그 첫번째가 과학적 사고와 직업교육에 바탕을 둔 교육숭배사상이다. 독일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피터 드러커는 독일의 제조업에 생산성이 뿌리를 내리게 만든 장본인은 1840녀대 현장실습과 교실학습의 병행이 가능토록 만들기 위해 기업도제제도를 고안해낸 초기 산업가 아우구스트 보르지히였다. 대학가운데서도 특히 이공계 대학은 연구개발과 산업체에 일꾼을 공급하는 두가지 역할을 훌륭히 해냄. 1872년 뮌헨 대학에서만 배출한 화학계통 연구원이 유럽 전역에서 공급한 인원보다 많았음. 또 베를린 연구소는 공장설립과 관리의 방법에 대한 2년제 연구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미국과 비슷한 시기인 1900년에 독일도 경영대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독일 기술자 연합회와 같이 구태의연한 단체도 과학지식의 보급과 자문역할에 팔을 걷어 부쳤다. 대부분의 기업도 사내 연구소 개설은 물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은 기초산업체인 석탄이나 철강회사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두번째 요인으로는 기업의 관리자들이 고위 공무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점. 저임금의 관리자들은 하위 공직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임금을 받는 고위임원까지도 기업의 하인이라고 부르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야 극히 소수의 임원이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영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고임금 관리자들이 특수관계인을 배제한 채, 기업의 감독기구를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실정이었음. 또 다른 독일기업의 특징 중 하나는 일반화된 기술자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특화된 기술자에게 책임을 맡겼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흉내를 내면서 뒤 따랐다.
- 거대기업을 전문화하여 주력사업분야를 특화했다는 의미에서 사업부제를 택한 기업은 스스로 중대한 개혁조치를 취한 셈이다. 경영관리제도에 대해 심사숙고했다는 점에서도 위대한 결정으로 봐야 한다. 중세 때 경영을 맡았던 귀족들이 놀고 먹던 한량이었다면, 그들의 뒤를 이은 전문경영인들은 꼼꼼한 성격에 극히 논리적이었다는 점이 특징. 트로츠키파 제임스 번햄 같은 좌파 사회주의 작가들은 새롭게 개발된 관리체계를 몸에 익힌 경영자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점을 매립해 버렸다고 불평했다. 80년대에는 기업사냥꾼들이 영민한 경영자들에 대해 비슷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 새로운 형태의 경영이 성공을 일구어냈다. 19세기 말에 사업이나 경영에 대한 교육은 회계장부 기재와 서류를 관리하는 기능전수 정도가 전부였다. 1881년에 설립된 펜실베니아 대학 경영대학원인 워튼 스쿨만이 다른 소재를 가르쳤다. 곧이어 경영대학원의 설립이 급속도로 확산. 포드 자동차가 승용차 모델T를 선보였던 1908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이 문을 열었다. 1914년에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기업금융, 의사결정에 관한 강좌를 개설하였다. 경영에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이 프레더릭 테일러의 뒤를 따랐다. 아서 리틀이 경영컨설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데 힘입은 제임스 맥킨지가 미국 경영자 연합회 설립 3년 후인 1926년에 처음으로 컨설팅 사무실을 열었다. 정치인도 이 열풍에 동참했다. 허버트 후버는 새로운 경영기법을 정부의 운용체계에 응용하려고 노력했다.
- 실리콘 밸리는 두가지 방법으로 기업의 외양과 성격을 바꾸어 갔다. 그 첫번째 변화는 여기에서 만들어낸 상품이 기업구조를 바꾸어 간다는 것. 이곳에 있던 모든 회사가 변함없이 추구했던 원칙은 상품의 소형화. 20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계산업무에 투입된 인건비가 마지막에 가서는 99.99%나 줄어든 것으로 밝혀졌다. 역산을 해보면 매년 33.33%가 줄어든 셈. 컴퓨터는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여 여러곳의 사무실과 공장, 지방조직, 출장가는 직원은 물론 외부에서가지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인터넷은 거래비용의 절감에 크게 공헌. 20세기 말에 접으들 즈음 제너럴일렉트릭과 시스코시스템즈는 물품공급업자들에게 온라인 입찰방식을 이용하라고 주문해쏙, 인터넷 판매회사 이베이는 전세계에 4천 2백만명의 고객을 갖게 됨. 2001년 마지막 3개월동안 이베이의 고객들은 1억 2천6백만개의 상품을 구입하는 데 27억불을 소비. 이런 거래가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고 일어났더라면 아마 수만명의 중개인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리콘 밸리가 회사의 모습을 바꾸어 갔던 또 다른 방법은 기업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점. 휴렛패커드나 인텔같은 회사들은 몇십년을 견뎌 온 회사들이지만 실리콘밸리는 계속해서 창조적파괴를 주문하고 있었다. 이 계곡의 성장주역 또한 과거 4년동안 연평균 성장률 20%를 자랑하던 북아프리카 영양과 같이 적지만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있던 중소기업들이었다. 온갖 실패와 시련도 실리콘 밸리는 잘 견뎌 나갔다.
- 20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모든 기업에서 발생했던 변화를 실리콘 밸리의 지식노동자, 월스트리트의 자본가, 일본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3인방이 불확실한 시대의 배후에서 전혀 조율되지 않은 화음을 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경영이론을 본업으로 하는 산업의 부상이 신뢰감의 상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했다고 봐야 한다. 기업들이 모든 문제의 해결방안을 외부에서 찾게 되면서부터 심지어 간단한 사고력이나 판단력가지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던 외부의 가짜의사들에게 습관적으로 의뢰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 90년대는 기업이라는 황홀경에 넋을 잃은 10년이었따. 웃음 띤 표정의 최고경영자들이 표지에 얼굴을 드러내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에도 경제문제를 다루는 잡지는 헤아릴 수 없이 늘어났다. 또 그들 사이에서 기업영웅들에 대한 칭송이 그치질 않았다. 코카콜라의 노련한 사장 고이주에타가 주주총회에서 연봉 8천만달러의 정당성을 밝히려 하자 주주들은 네번에 걸친 박수갈채로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화담. 2001년 1월 미국정부가 MBA로서는 첫 대통령이었던 조지부시를 내세워 기업에 친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애썼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이 내각을 전직 최고경영자들로 채우고, 기업친화적 정책을 추진함은 물론 새로운 국가 에너지 정책 입안에 기업을 참여케 한 것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기업이 사회적 의무감만 강조했던 클린턴 정부의 정책을 기업 친화적인 정책으로 돌려놓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취임후 1년반이 지나자 모든 것이 바뀌어 갔다. 2002년 여름 부시는 30년대 이후 기업에 관한 입법 가운데는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진 사베인스-옥슬리법에 서명. 그 배경에는 경영자들의 비리를 알게 된 미국인들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 다국적 기업의 역사는 대체로 기업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함. 유럽에서 출생한 후 19세기 영국에서 성장한 다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국경을 넘어 그들이 처음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였던 분야는 금융산업이다. 중세 때 교황을 대신했던 이탈리아 금융자본가들은 종교세 대한 영국산 양모를 거두어 들여 해외에 판 다음 일정액을 자기들 몫으로 떼는 일을 했다. 16세기 독일의 푸거가문과 휏스테터 가문같은 금융자본가들은 다국적 조직망을 구축한 다음 가난한 군주들을 상대로 대금업을 영위.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스페인의 왕이 단골고객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광산업으로까지 사업영역을 넓혀나감. 다음 단계에 들어서자 동인도 회사라는 정부의 수탁기관이 나타나 다국적 기업의 한층 활발한 모습을 드러냄. 하지만 현대기업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현대 다국적 기업의 역사는 영국의 철도회사에서부터 시작됨. 초기부터 철도는 수출산업으로 자리를 잡아감. 로켓호의 발명가인 로버트 시티븐슨은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철도부설 가능성을 조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를 고용했던 철도회사는 남미에 막대한 이권을 갖고 있었던 나머지 런던에서 아메리칸 모니터란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벨기에의 초기 철도망 전체도 영국인들의 소유였던 한편, 파리에서 프랑스 서북방에 위치한 샤넬지방의 항구로 이어지는 철도도 런던 사우샘프턴 철도 주식회사가 개발한 것.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기업가중 하나였던 토머스 브래시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 8천마일에 이르는 철로를 부설했고, 8천명의 기술자와 인부를 고용하여 프랑스 서북부 루앙에 기관차와 화차 공작창을 운여하기도 했으며, 한때는 5대륙에서 철로와 차량 격납고 운영을 직접 지휘한 일도 있다.
- 빅토리아 시대 때 주식회사들은 해외의 값진 원자재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철도회사들의 이런 기법을 잘 원용했다. 아프리카의 금, 다이아몬드, 구리, 말레이시아와 볼리비아의 주석, 말레이시아의 고무, 인도의 차, 중동의 석유 등이 그들이 노렸던 그 시대의 보물이었다. 외국의 값진 원자재를 수중에 넣기 위해서는 현지 사정에 맞는 상이한 형태의 이사회를 운영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며, 다국적 기업을 통해 그런 기능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이런 까닭에 초기 유명했던 다국적 기업에는 혼혈아들이 많았음. 드비어스는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혼혈, 리오틴토는 영국과 스페인의 합작품이었으며, 쉘 석유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공동경영하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19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다국적 기업은 두가지 방법으로 외양을 다듬어 갔다. 첫번째 변화는 주요 거래 상품을 철도와 광산개발과 같이 장대한 산업설비에서 약품, 담배, 초콜릿 비누, 마가린, 재봉틀, 기성복 등으로 바꾸어 간 것. 철도, 기선, 전화와 전신, 19세기 말에는 급기야 자동차까지 나서 교역의 거리를 좁혀 나가자 이런 상품의 이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 두번째 변화는 상대국가의 정치세력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제력이었다. 특히 관세문제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교역국가들이 하나둘씩 자국산업을 방어하기 위한 보호관세를 들고 나왔다. 1883년 미국을 시작으로 1887년 독일이 뒤를 이었다. 1차대전일 발발할 때까지 자유무역을 외치던 유일한 국가는 영국과 네덜란드 뿐이었다. 이런 여건 때문에 관세장벽을 넘어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선 다국적 기업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음. 한편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에 있던 공장들을 처분한 영국의 비누왕 윌리엄 레버는 오히려 자유무역 체제가 되면 굳이 영국 밖에서 비누를 만들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 여러모로 살펴봤을 때 19세기 다국적 기업과 제국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정상에 제국주의가 앉아 있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선동이 그렇게 만든 면도 있다. 당시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해외투자는 식민지보다는 개발상태가 조금 나은 국가들을 향했다. 낙후된 아프리카 원주민의 경제구조로는 서구제품을 뒷받침할 만한 구매력을 상당기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19세기 제국주의는 상업적 이해상관보다는 전략적인 면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에서 벌렸던 영토화곱 경쟁이 경제적 이득으로 이어진 경우는 보기 힘들다. 몇몇 기업가들이 아프리카라는 먼 식민지에서 조그마한 부의 창출에 성공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 기업은 20세기 중반 이후 과거와의 단절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요하는 주체로서 선두에 나서지는 않지만 헨리 애덤스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변화라는 틀을 짜 맞추는 데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기업이 변화를 서둘렀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포드의 모델T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 프로세스 같은 낯선 상품의 대량생산을 통해 사회질서를 바꾼 뒤 일상생활의 속도를 조절하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기업의 역사는 스스로 진화해가는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성공의 비결로 보아야 한다.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정부 하수인의 처지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변신에 성공했던 한편, 주주에게는 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소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윌슨이 새로운 조직사회라고 불렀던 기업은 종업원들과 호흡을 맞추어 가면서 가족기업을 운영했던 한가안 귀족들보다 훨씬 긴 생명력을 이어갔다. 초기의 경영자들은 이런 조직에 위계질서를 더해 역동성을 창출해 냈으나 여건이 바뀌자 그들 또한 더이상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버림. 이제 기업은 군살이 없는 평면적 생명체로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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