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재발견

etc 2021. 4. 3. 15:16

- 국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후한後漢(25~220) 시대의 사전 인 《석명名》에 나오는데, 그 이름은 삭병?이다. 새끼줄 삭, 떡병, 새끼줄 모양의 떡을 뜻하는 단어다. 그런데 한자 병?은 떡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을 의미한다. 밀가루를 반죽해 새끼줄 모양으로 빚었다면 국수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조리법을 포함한 국수의 구체적인 모습은 6세기 전반 남북조시대에 쓰인 가장 오 래된 종합 농업기술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등장한다. 이 책에는 수인병'이라는 음식이 등장하는데, 이를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물에 담그거나 띄운 국수 반죽 이다. 책에서 설명한 수인병의 제조법은 밀가루를 곱게 쳐 육수로 반죽한 다음 손으로 잡아 늘려 길게 만든다는 것이고, 이름은 조리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국수를 의미하는 '면麵이 아니라 떡을 뜻하는 '병?으로 표기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 중국에서는 밀가루를 면麵, 밀가루로 만든 모든 것을 병?이라 썼다. 즉, '병'에는 떡도 국수도 만두도 모두 포함됐다. '병'의 개념은 이탈리아어 파스타 pasta'와 닮았다. 파스타도 스파게티와 같은 국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모든 음식을 뜻한다. 스파 게티뿐 아니라 라자냐, 피자도 파스타인 것이다. 국수는 제분 기술, 즉 밀을 곱게 빻는 기술뿐 아니라 제면製麵 기술, 곧 밀가루를 탄력 있게 반죽해 길게 뽑아내는 기술까지 발달하고 나서 만들어진 요리인 것이다.
- 밀의 원산지이자 지금도 많은 밀 수출량을 자랑하는 곳은 흑 해 연안의 중앙아시아다. 그렇지만 국수를 세계로 전파한 곳은 중국이다. 당·송시대 이래 중국은 명실상부 전 세계 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이슬람 세계를 넘어 유럽과의 교 역도 활발했다. 동으로는 인접한 한반도 및 일본 열도, 남으로는 동남아시아 지역과 때로는 정복을 통해, 때로는 조공무역을 통 해 사람과 문화가 서로 섞여들었다.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서 큰 계기가 된 것은 명나라 영락제 때 있었던 정화의 원정이다. 29년간이나 이어진 이 대규모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 즉 화교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이때 동남아시아에 남은 수많은 중국 인이 국수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밀의 재배에 적합지 않은 동남 아의 기후 탓에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국수를 만들었으니, 이렇게 쌀국수가 탄생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역시 밀의 재배에 적합지 않은 기후 탓에 밀 대신 메밀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한국에서는 냉면(과 막국수), 일본에서는 소바(메밀 국수)가 대표적인 면 요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오히려, 밀을 주곡으로 삼은 유럽에서는 국수가 빵의 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밀가루 반죽을 끓이는 것이 아니라 굽는 조리법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탈리아에서만큼은 예외다. 파스타는 이탈리아어로 반죽을 의미하며, 얇게 편 밀가루 반죽을 적절히 잘라놓으면 모두 파스타라고 부를 수 있다. 《동방견문 록》을 남긴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13세기 베이징을 비 롯해 중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맛본 국수 요리를 고향 이탈리아로 들여오면서 파스타로 정착했다는 설이 퍼진 적도 있지만, 이미 12세기 시칠리아에는 '잇트리아'라는 건조면 형태의 파스타가 있었다. 파스타의 유래는 확실히 전해지지 않으나, 이슬람 문화 권을 통해서 전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 메이지시대(1868~1912) 중기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길거리 음식인 난킹소바南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번졌고, 이 음식의 이름이 지나소바를 거쳐 주카소바로 정착 했다. 주카소바는 먼저 일본에 정착한 중국인들이 먹는 음식으 로, 곧이어 일본인도 즐기는 대표적인 중국 음식으로 인기를 얻었다. 일본에는 이미 밀가루로 만든 면 요리인 우동이 있었다. 게다. 가 우동은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제분·제면 기술을 도입한 이래 오랫동안 먹어온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주카소바의 어떤 매력이 일본인들에게 어필한 것일까? 우동의 면발은 희고 고운 반면 주카소바의 생면은 약간 노르스름한데, 밀가루 반죽에서의 차이 때문이다. 밀가루, 소금, 물로 반죽하는 우동과는 달리 주카소바는 알칼리 성분이 함유된 간수로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다. 밀가루에 알칼리 성분이 들어가면 노르스름하게 변하고, 반죽에 탄력을 주어 면발을 쫄깃하게 만들어준다. 우동 반죽은 탄력을 얻기 위해 손으로 치대고 발로 밟는 등 많은 힘을 들여야 하지만, 주카소바 반죽은 간수 덕분에 적은 노력으로 탄력이 생긴다. 또한 가쓰오부시 육수에 간장을 더한 우동 국물과는 달리, 주카 소바 국물은 닭고기, 돼지고기 등으로 만든 육수에 채소를 더해 진한 맛을 냈다. 주카소바가 '라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아 직 정설이 없다. 중국의 납면拉麵(중국어 발음 lamian) 혹은 유면 柳변(중국어 발음 liumian)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1900년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는 이미 라우멘'이 라는 메뉴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주카소 바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라멘집은 흔하며, 중화요릿집은 대부분 라멘을 팔고 있다.
- 일본 라멘의 기원은 인천에서 중국인 노동자의 음식으로 시 작한 우리의 짜장면과 닮았다. 중국을 고향으로 한 이 두 가지 면 요리는 그 역사가 한 세기를 넘겼다는 역사성, 본토를 능가하 는 인기와 대중성, 남성 노동자들의 음식이었다는 기원 등 여러 모로 공통점이 많다. 메이지시대부터 시작된 주카소바의 인기는 산업화가 시작된 일본에서 더욱 커졌다.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 옛날 송나라 카이펑에서 주문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국수가 인기를 끈 것처럼, 또 소바가 에도의 패스트푸드로 조닌들의 주식이 되었던 것처럼, 값도 싸고 열량도 높은 주카소바는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 들에게 딱 맞는 식사로 정착했다. 1945년 이후 일본 전역에 걸쳐 주카소바를 파는 작은 음식점이나 노점이 늘어났고, 말린 멸치나 가쓰오부시 등을 육수에 첨가하는 등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되면서 일본에서 먹을 수 있는 주카소바의 종류가 더 많아졌다. 이처럼 완전히 일본화되고 메뉴의 종류도 다양해지자, 새 이름을 붙이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에서 시도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라멘'이라는 명칭은 인스턴트 라면이 탄생한 후인 1960년대에 들어서 보편화 되었다.
- 1963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이 세상에 나왔다. 1958년 일본에서 라면이 개발되어 나온 지 5년 만이고, 스프 별첨 라면이 등장한 지는 1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삼양라면의 가격은 10원이었다. 라면 개발의 결정적 계기가 된 꿀꿀이죽 가격의 딱 2배였다. 당시 담배 한 갑이 25원, 김치 찌개 백반이 30원, 커피 한 잔이 30~35원, 짜장면이 40원 정도 였으니,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일본 치킨라면의 가격이 35엔이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커피와 우동가격이 60엔 정도였던 것과 비교해도 한국이 확실히 더 저렴하게 가격을 책정한 셈이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 라면의 평균 중량이 85그램이었는데 삼양라면의 중량은 100그램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 일본의 라면이 중국식 면 요리인 주카소바를 바탕으로 한 것 처럼, 한국의 라면도 처음에는 기술 제휴를 맺은 일본 묘조식품 라면의 모조품이었다. 비록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대박을 터뜨리긴 했지만, 한국인의 입맛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묘조라면처럼, 삼양라면 또한 닭 육수를 베이스로 국물 맛을 냈다. 그러나 이 허연 국물이 한국인에게는 닝닝하게 느껴졌다. 한국인은 설렁탕, 곰탕 같은 진한 쇠고깃국에도 깍두기 국물을 타서 먹는 이들이 아닌가. 전종윤의 회고에 의하면, 1966년 삼양라면을 맛본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한국인들은 얼큰한 음 식을 좋아하니 스프에 고춧가루를 넣어보라는 제안을 할 정도였다. 삼양식품은 한국인의 입맛에 어떤 맛의 라면이 적합할지 조사했다. 같은 매운맛이라 해도, 일본인들은 후추와 산초의 톡 쏘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반면, 한국인은 김치를 통해 익숙한 고추의 경우에도, 한국인들은 굵고 쫄깃해 씹는 맛이 있는 면을 선호한다는 것이 당시 제품 개발을 위한 조사 결과였다. 점차 한국의 라면에는 마늘, 생강, 양파 등 매운맛을 내는 양 념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고춧가루였다. 급기야 삼양식품은 1990년 1월에는 하루 3,000킬로그램의 고춧가루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고추 분쇄 자동화 라인을 갖추기도 했다. 매운 라면에 대한 한국인의 선호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辛라면, 열라면, 불닭볶음면 등 매운맛을 내세운 수많은 라면이 여전히 판매 순위 윗줄을 차지하고 있다.
- 롯데가 소고기라면을 내놓기 전까지 삼양식품의 라면 시장 점유율은 90퍼센트 이상이었다. 소고기라면의 히트로 시장 점유율을 점차 넓혀가던 롯데가 대약진의 기회를 잡는 시기는 1975년, 회사 이름까지 바꾸게 한 '농심라면'이 출시되었다. 코미 디언인 구봉서와 곽규석이 등장해서 “형님 먼저 드시오, 농심라 면”, “아우 먼저 들게나, 농심라면”이라는 대사를 주고받았던 텔 레비전 광고가 크게 히트하면서 라면 판매도 대박을 터뜨려 시 장 점유율을 30퍼센트대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 라면의 성공으로, 1978년 롯데공업은 (주)농심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롯데그룹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 1980년대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3저 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던 시기다. 라 면 업계의 판도 또한 이때 들어 크게 흔들렸다. 삼양식품과 농심 두 회사가 지배하던 업계에 한국야쿠르트가 1983년 팔도라면이 라는 브랜드를 앞세우며 뛰어들었고, 바로 뒤따라서 청보와 빙그레가 라면 사업에 진출했다. 청보식품은 풍한방직의 계열사였는데, 1984년에 라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청보는 그다음 해인 1985년에는 삼미 슈퍼스타스 프로야구팀을 인수하여 청보 핀토스로 팀명을 변경한 다음 프 로야구 리그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이주일 등 톱스타를 내세운 광고는 호평을 받았고 가격도 싼 편이었지만, 기술력의 부족으 로 맛을 내는 데에서는 실패했다. 결국 청보식품은 3년 만에 도 산하고 말았으며, 생산 시설은 전통 있는 식품 회사인 오뚜기가 인수했다. 1986년에는 식품 업계의 강자 빙그레가 닛신식품과 기술 제휴를 하고 라면 시장에 진출했다. 우리집라면'이 제법 인기를 끌면서, 1989년에는 시장 점유율이 12퍼센트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이라면, 맛보면 등 독특한 이름의 라면을 출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빙그레는 라면 사업 진출과 함께 일곱 번째 프로야 구단을 창단해, 잠시나마 청보 핀토스와 라면 더비'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청보의 도산과 빙그레의 라면 시장 철수로 인해, 라 면 5강 시대는 오래가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1987년 말 청보의 시설을 인수한 오뚜기는 1988년부터 진라면, 참라면, 라면박사를 내놓으며 라면 시장에 데뷔했다. 처음에는 선발주자들을 따라잡을 만한 저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과 순한 맛을 내세운 진라면을 히트시킴으로써 새로운 소비자층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등장한 삼양과 농심, 1980년대에 뛰어든 팔도와 오뚜기는 지금까지 건재하며 라면 업계 빅4를 형성하고 있다.
- 2010년대 소비 트렌드의 하나는 '모디슈머'다. 모디슈머는 'Modify(변경하다)'와 'Consumer(소비자)의 합성어로, 기성 제품을 구입해 사용하더라도 제조사가 제안한 방법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호에 맞게 여러 제품을 조합하거나 자신만의 새로운 활용법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소비 계층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스카 프를 스카프로만 두르지 않고 스커트나 헤어밴드로 활용한다거 나 의자나 책상 등 가구를 정해진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고 이렇 게 저렇게 조합해 자신의 공간에 딱 맞게 사용하는 것 등을 가 리킨다. 이렇게 자신만의 활용법을 개발하여 인터넷 등을 통해 공개하면, 그 아이디어가 확산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제조사 에서 그렇게 응용된 제품을 상품으로 개발해 출시한다. 이런 순 환이 가장 활성화된 분야가 다름 아닌 라면인 것이다. 한 가지 라면에 자신만의 식재료나 조리법을 추가해 먹는 것, 또 두 가지 이상의 라면을 조합해 새로운 라면으로 먹는 것, 이각각의 활용법을 제품화한 대표적인 라면이 삼양식품의 까르보 불닭볶음면과 농심의 짜파구리다. 매운맛을 극대화한 기존 불닭 볶음면에 크림 소스를 넣어 매운 정도는 가라앉히면서 고소함을 더한 레시피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다. 이에 착안한 삼양 식품은 처음에는 한정 판매 형태로 2017년 12월 까르보불닭볶 음면을 출시했고, 이 제품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자 2018년 5월 부터 정식 제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삼양식품은 핵심 제품인 불 닭볶음면을 중심으로, 치즈불닭볶음면, 짜장불닭볶음면, 미트스 파게티불닭볶음면 등의 모디슈머 제품을 다수 개발했는데, 이들 제품을 까르보불닭볶음면이 선도하고 있는 셈이다.
- 라면 입장에서 보면 가정간편식 시장 확장은 커다란 위기다. 라면은 간편식과 대체재 관계에 있다. 예전이라면 라면을 먹었을 상황에서 라면만큼, 어쩌면 라면보다 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정간편식의 시장 확대는 라면 시장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라면 업계가 선택한 방법은 이 위기를 기회 삼아 가정간편식 시장과 함께 성장할 활 로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시도는 '집밥 콘셉트의 라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추장찌개, 북엇국, 미역국 등 반찬으 로 먹을 수 있는 국, 찌개를 라면과 융합한 제품이다. 사실, 이미 1969년 삼양식품의 '칼국수'를 시작으로 짜장면, 비빔국수, 짬뽕, 우동, 냉면, 울면 등 대중이 즐기는 많은 음식이 라면 제품으로 출시되곤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국수의 라면화로 한정되었다. 이와 달리, 2010년대에는 우리가 흔히 먹는 식사 메뉴가 라면화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맛 칼럼리스트 황교익과 정은숙이 함께 쓴 책 《서울을 먹다》(따비, 2013)는 서울의 서민들이 즐기는 외식 17개를 다루었는데, 이 중 라면화된 음식이 무려 6개다. 삼양식품의 한국곰탕면 (2017년), 삼계탕면(2019년), 백순대볶음면(2020년)과 팔도의 놀 부부대찌개라면(2011년), 농심의 부대찌개라면(2016년), 감자탕면 (2017년) 등인데, 17개 외식 음식 중 족발과 곱창볶음, 골뱅이무 침, 돼지갈비, 빈대떡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라면화된 것 이다. 서울 시민들이 즐겼던 외식 중 대다수가 국·탕류였기 때문 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저 17개 음식에 포함된 냉면, 칼국수와 떡볶이는 진작에 라면화된 바 있다. 대표적 집밥 메뉴 중 하나인 미역국을 라면화한 오뚜기의 쇠 고기미역국라면(2018년)은 출시 2개월 만에 1,000만 개가 팔려 나갔다. 오뚜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북엇국라면(2019년)을 출 시했다. 삼양식품에서는 진짜 바지락이 들어 있는 바지락술찜면 (2019년)을 선보이기도 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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