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힘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힘 속에 놓여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기원전 350년경)
- 지구를 정복하는 과정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조지프 콘래드, 암흑의 핵심, 1899)
- 오늘날 육지에 사는 모든 대형 포유류의 무게를 전부 더하면 그 가운데 단지 3%가 야생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인간의 육체가 전체의 약 30%를, 우리가 먹는 가축들이 나머지 67%를 차지한다.
- ‘우연히 닥친 인류세'라는 이야기는 마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지구 환경을 고치는 의사처럼, 병든 지구의 증상을 지적하고 전 세계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권력자들 역시 '우연한 인류세'가 가장 덜 불편한 이 야기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편리하게 다음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문제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지금부터 환경 위기에 대처하고자 더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말하기는 쉬워도 역 사적 사실과 부합하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은 1세기 이전부터 인류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 왜 서구에서는 홀로세라는 용어를 채택했는가? 이 개념은 인류를 환경 변화의 중요한 원인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19세기에 그런 대안이 흔했는데도 말이다. 어째서 소비에트 연방의 과학자들은 19세기 의 개념을 받아들이거나 독립적으로 만들어냈을까? 그 차이는 지배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때문일 수 있다. 환경문제를 경시하고 소외시키는 것이 20세기 전반에 걸친 서구 사회의 기조였던 만큼, 현재에 대한 지질학적 명칭에 인류세보다는 홀로세가 더 명백하고 논쟁의 여지가 적었다. 홀로세라는 단어를 선택하면, 지질학자들은 석유나 광산업계에서 일할 미래 의 지질학자들을 교육하는 조용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 용어는 지질학 관련 사업과 지질학 모두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 1917년 10월 혁명 직후 러시아 지질학자들이 인류세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일은 그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더욱 명확해진다. 세계를 정치경제적으로 변화시키는 전 지구적인 집단적 인류 행위자를 다루는, 혁명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개념적으로 살짝만 도약하면, 동일한 행위자가 전 지구적인 생태학적이고 환경적인 변화를 점점 더 이끄는 추동자라는 관점에 도달한다. 환경이 포함된 이 세계는 모두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물론 소비에트 연방이 혁명적 변화를 선포했던 초기에는 단순히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데 지나지 않고 서구와는 달리 환영을 받았다. 홀로세는 서양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1만 년 전 에서 시작한다. 이 시점은 10,000BP'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BP'는 '현 재 이전 Before Present'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때 지질학자들은 '현재'를 1950년 1월 1일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공식으로 정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인된 지질학 용어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2008년 5월 국제지질학연합이 홀로세란 1만 1650년 전에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대라는 공식적인 정의에 비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빙하기의 끝과 오늘날 온난한 간빙기의 시작 지점 사이에 들어가며, 지금 우리가 사는 세를 말한다. 이때 인간 행동에 대해 서는 간략하게 언급되었지만 단지 곁에 단 주석 정도다. 정의의 일부로 다뤄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상의 변화 때문에 2000년에 대기화학자인 파울 크뤼첸이 새로운 인류시대인 인류세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던 것이다. 크뤼첸에게는 홀로세가 인간의 영향'이나 '인류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온난한 간빙기 환경'을 의미했다. 그리고 어떤 지질학자도 이런 의견을 신속하게 바로잡지 않았다.
- 19세기의 지질학자들은 확실한 화석 기록에 초점을 맞춰 보다 알기쉽고 편안하게 시대를 구분하려 했다. 캄브리아기의 폭발은 어류의 시대,(고생대, '오래된 생명')로 이어졌고, 파충류의 시대(중생대, 중간의 생명'), 포유류의 시대(신생대, 새로운 생명')가 뒤따랐다. 마치 인간에 이르는 진화론적 인 사다리 같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제4기가 매끄럽게 이어진다. 이 시 기에는 빙기와 간빙기의 순환이 나타나는데, 이런 급격하게 변동하는 환 경에서 지능을 가진 유인원은 성공적으로 살아갔다. 그에 따라 대형 유인원이 세를 불리고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했으며, 이어 사다리의 마지막단이 홀로세에서 등장한다. 인류 문명이 나타난 현재의 간빙기가 그것이 다. 이 인류의 시대는 포유류의 시대 이후에 이어졌다. 지구의 역사를 지옥 같은 초기 지구의 환경에서 점균, 어류, 파충류, 인류, 문명으로 이어진다고 서술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지구의 역사가 우리 인류에서 끝을 맺는 것이 어쩌면 지나치게 깔끔해 보이지만 말이다. 비슷한 논리에 따르면, 인류세는 호모 사피엔스가 신 같은 종이 되면서 생명체가 자의식을 가지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마치 높게 올린 케이크에 뿌린 설탕가루 같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진화를 통해 알고 있는 바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지배적이고 우월한 종은 없다. 어류와 파충류, 포유류는 전부 다르다. 어떤 생명 형태도 다른 형태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특별한 기원을 갖지 않는다. 사다리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인 서사이며, 종종 무의식적으로 작동 한다. 처음으로 지구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묘사했던 뷔퐁 역시 인류에 대해 설명할 때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와 지질학적 지식을 뒤섞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말로 하면, 지질학에 인간을 더하면 정치학 이 된다. 인류의 활동이 지구를 새로운 세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이 주장하는 부인하든, 이것은 확실히 정치적인 함의를 가진다. 과학적 근거에 대한 좁고 합리적인 관점을 넘어서는 이러한 견해는 현대 과학계 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오늘날 제4기와 홀로세를 대변하며 연구하는 지 질학자들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 0.1%를 정의하기 위해 이전 시기와는 다 른 기준을 적용하며 이러한 선택을 합리화한다. 이들은 생명체에 나타난 변화보다는 기후의 변화, 특히 빙기와 간빙기의 순환에 중점을 둔다. 그 러면 인류세라는 개념과 그 용어를 지질학적인 시대 구분에 추가하는 것 사이에 더 복잡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역사에서 새로 운 장을 열 생명체의 변화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홀로세 간빙기의 환경 조건을 벗어나는 지구의 기후 변화를 찾고 있을까? 어떤 증거가 더 중요할까?
- 이족 보행하는 종이 반복적으로 등장했고 이들의 기원이 숲에 있다. 는 오늘날의 해석은, 지금으로부터 1000만 년에서 500만 년 전 사이에 동아프리카 전역의 경관이 변화했다는 현재의 지식과도 맞아떨어진다. 동아프리카의 융기와 균열이 점점 진행되는 과정에서 단순하게 숲이 초 원으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과는 무척 거리가 있었다. 열대 우림이 파편화되기 시작했고, 서로 다른 식생 형태가 모자이크처럼 뒤섞였다. 그에 따라 오늘날 동아프리카는 열대 운무림에서 건조한 사막, 탁트인 사바나에서 습도 높은 습지대에 이르기까지 식생이 엄청나게 다양하다. 이렇듯 숲 경관이 파편화되면서 유인원들은 여기에 맞춰 적응해 왔다. 아마도 이런 적응 가운데 하나는 숲의 총면적이 줄어들면서 침팬 지와 고릴라가 숲의 식량 자원을 특화해서 활용했던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무의 지붕처럼 우거진 곳에 달린 과일에 지속적으로 접근하면서 동시에 땅에 떨어진 식량도 주울 수 있도록 나무를 더 잘 타는 능력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이들은 수직으로 나무에 기어오르려고 점점 더 애썼으며, 그러면서 엉덩이와 무릎이 더욱 유연해져 땅에서도 관절 보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인류의 조상들은 또 다른 적응 경로를 취했다. 땅 위에 서 이족 보행을 하는 데 적응해 멀리 떨어진 식량 자원에 도달하면서도 나무에 오르는 능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식량에 대한 접근과 안전을 둘다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 불은 그것을 최초로 통제한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와는 관계없이 호미닌 사회에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처음에 산불에서 불을 얻은 다음 연료를 꾸준히 공급해 관리하고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려 면 불에 대해 관찰하기, 인내심을 갖기,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기 등의 활동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정교한 사회적 협상이 필요하다. 누군가 나무를 베어 가져와야 하고 누군가는 불을 지키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활용할 수 있는 식재료의 종류가 많아졌고, 여기서 추출할 수 있는 에너지도 늘었다. 그에 따라 초기 호미닌은 토양에서 보다 많은 자양분을 얻게 되었고 인구 밀도가 늘어났다. 불에 대한 통제는 환경 자체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의 범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상들은 화로의 불을 활용해 덩치 큰 포식자, 독이 있는 동물, 병을 옮기는 모기를 멀리 쫓았다. 또한 불은 환한 빛과 열기를 제공했으며 호미닌이 더 고도가 높고 북쪽인 추운 지역으로 이주하게 했다. 이러한 모든 영향으로 호미닌 개체군은 성장했다. 여기에 더해 호미닌은 불을 활용해 재료를 구부리거나 단단하게 해서 더 좋은 도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또 야외에서 불을 사용하면서 호미닌은 포식자로부터 더 안전한 상태로 야영지에 서 더 멀리까지 사냥을 떠날 수 있었다. 통제된 상태에서 주변에 불을 질러 초목을 제거하고 풀이 많이 자라게 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풀을 뜯어 먹는 동물을 사냥하기가 쉬워졌다. 보통은 인간 조상들이 한 번 불을 지르고 나면 많은 지역에서 초원이 더욱 넓어졌다. 호미닌이 일단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해 불을 통제하면서 우연히 생태계 전체의 재편성이 일어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 덕분에 호미닌이 대규모의 사회적 집단에서 협력해서 일하는 능력이 더 빨리 발전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불은 집단 내부의 신호 전달을 비롯해 특정한 토지에 대한 권리 주장, 의식을 비롯한 기타 사회 활동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는 사냥의 효율성을 높였고(요리를 통해 같은 무게의 고기에서 더 많은 칼로리를 얻게 되면서)집단 내부에서 보다 협동이 잘 이뤄지게 했으며, 전체 호미닌의 개체수 가 증가했다. 이때 환경에 대한 영향이 지역 규모에서는 큰 경우가 있어도 전 지구적인 규모에서는 미미하고 지질학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50만 년 전 호미닌이 세계를 재형성시키는 핵심 요소들이 있 었다. 즉 이족 보행 덕분에 효율적으로 흩어져 멀리 떨어진 땅에서 살 수 있었고, 불을 활용해 더 추운 기후로 이주할 수 있었으며, 두뇌가 커져서 무리를 지어 효과적으로 먹이를 찾거나 사냥을 하게 되었고, 도구를 사 용해 효율적으로 사냥하고 식량을 가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종이 동아프리카에 등장하는 데는 30만 년이 더 걸렸고, 오늘날의 호모 사피엔스와 비슷하다고 알아볼 수 있는 인류 문화의 명백한 증거가 나오기까지는 45만 년이 더 걸렸다.
- 헤어의 연구팀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수컷 침팬지는 암컷보다 덩치가 상당히 큰 데 비해 보노보는 덩치 차이가 작았다. 이런 덩치 차이, 즉 성적 이형성 dimorphism은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차이에 의해 다시 유도된다. 하지만 암수의 차이는 단지 덩치 차이 이상 이다. 침팬지들은 특히 수컷의 경우에 무척 공격적이다. 하지만 보노보 는 집단 내부나 집단 간의 폭력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두 종이 같은 조 상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차이가 발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헤어와 동료들은 자기 교화' 과정을 통해 폭력적인 개체가 처벌받고 재생산을 금지당했을 것이라 제안한다. 보노보가 보이는 특징은 개, 소, 기니피그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인간이 길들였던 다양한 종들에서 관찰 되던 변화와 무척 비슷하다. 이들에 따르면 보노보가 성적 이형성이 덜 하고 침팬지는 그렇지 않은 이유는, 침팬지들은 콩고 동부에서 고릴라들과 직접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반면에 콩고 서부의 보노보는 경쟁하지 않 아 집단 외부에서 폭력을 행사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헤어와 동료들은 초기 인류에서도 동일한 과정이 있어났다고 제안한다. 어쩌면 집단내 폭력과 성적 이형성이 줄어들면서 보다 평등한 사회가 생겨났을지도 모른다.26 물론 오늘날의 수렵채집자 무리를 연구해 과 거의 인류 사회에 대해 추론하는 작업에는 주의가 필요하지만, 오늘날 콩고와 필리핀에 존재하는 인류 집단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어디서 누구와 함께 거주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성별과 무관하게 이뤄졌다.
-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농경에 의지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흐름에 저항했던 걸까? 실제로 저항을 계속하며 수렵채집자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어쩌면 그 이유는 수렵채집자 무리가 즉각 보상 집단과 지연된 보상 집단으로 알려진 두 종류 의 기본적 사회로 나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콩고 중앙부 다우림 지 대의 바카족이나 동아프리카 사바나 지대의 하드자족, 필리핀의 아그타 족을 비롯한 즉각 보상 집단은 전통적으로 위계가 없는 이동성이 높고 유 동적인 무리로 살아간다. 이들은 특정한 타인에게 의존해서 생활하지 않으므로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를 갖지 못한다. 이런 집단은 농경을 시작하기가 어렵다. 이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며 개인 재산이 존재하지 않고 즉각적인 이익을 위한 노동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동성이 적고 저장된 식량이라든가 개인적인 소유물을 통 해 과거 노동의 산물에 대한 재산권이 일부 인정되는 지연 보상 집단은 농경을 선택할 확률이 보다 높다. 이런 사회에서는 땅이 산출하는 식품 열량을 높이려는 욕구, 다시 말해 더 많은 식량을 저장하고 축적된 부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는 욕구가 동식물 길들이기를 향한 강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아마존 열대 우림에 살고 있는 야노마미족 같은 현대의 많은 지연 보상 집단은 채집과 농경을 결합하기도 한다. 즉 이동성이 덜한 집단은 농업을 통해 탄수화물이 풍부한 작물을 보다 쉽게 얻으면서, 동시 에 다른 대부분의 식량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채집으로 얻는다. 이 과정을 통해 농경은 야생 동식물을 우리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유기체로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 인간이 길들인 최초의 동물인 개 Canis familiaris는 아마도 늑대 Canis Lupus에서 두 단계를 거쳐 가축화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자연 선택, 즉 자기 가축화'였다. 이 단계에서 공격성이 덜하고 두려움을 잘 타는 늑대는 인간 거주지에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해 새로운 생태적 기회를 더 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택적인 이점을 얻었다. 이 동물들은 인간이 배출한 쓰레기와 배설물에서 먹이를 얻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에티오피 아 하라르에서는 지금도 밤마다 사람들이 직접 야생 하이에나에게 먹이 를 주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하이에나들이 도시라는 장벽을 통과하면 서 행동이 크게 바뀌어 보다 유순해지고 인간이나 다른 하이에나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용히 들어가서 먹이를 얻어 떠 나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 개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일단 늑대가 인간에게 계속해서 순하게 행동하기 시작하면, 공격성이 없는 특성을 비롯한 다른 바람직한 형질을 선택하는 의도적인 두 번째 사육 단계를 시작할 수 있다. 시베리아의 은여우 에 대한 유명한 실험이 보여주듯이 공격적이지 않은 동물을 선택하면 그 결과는 매우 빠르게 나타난다. 선택적 교배는 1959년에 시작되었다. 이들 여우 개체는 평생 인간과 상호작용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생후 7개월이 되었을 때, 사람이 있어도 물거나 으르렁대지 않는 등 사람에 대한 반응이 부드러운 개체들이 교배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사람들은 동일한 조건에서 사람에 대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교배한 대조군을 기르기도 했다. 그 결과 고작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선택적으로 교배된 여우들은 사람이 오면 물러서는 대신 다가갔고 사람들이 만져도 물지 않았다. 20세대가 지나자 이들 여우는 개 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친근하게 굴었으며 심지어는 꼬리를 흔들기도 했다. 밀과 개의 사례를 보면, 가축화와 길들이기는 상대적으로 간단해 보이며, 우리가 이끌기 시작하면 진화는 꽤 빨리 일어난다. 일단 동식물을 길들이면 의도적인 교배를 통해 여러 형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에 따라 개들은 늑대 죽이기, 경주하기, 양 몰기, 사람 무릎 위에 안기기 같은 여러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빙기 - 간빙기 순환이 나타나는 이유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세르비아 출신의 뛰어난 수학자이자 기후학자인 밀루틴 밀란코비치 Milutin Milankovitch였다. 1941년에 밀란코비치는 지구 궤도의 흔들림이 지표면 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나 일사량의 분포에 변화를 가져와 지구를 빙하기로 들어서게 하거나 빙하기 밖으로 밀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밀란코비치는 궤도 촉성 orbital forcing이라 알려진 과정을 통해 북 극권 가까이로 들어오는 태양 복사량이 변화했던 것이 지구의 전반적인 기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면 북반구 고위 도 지대가 여름철에 햇빛을 덜 받게 되면서 이 지역의 얼음 가운데 일부는 일 년 내내 녹지 않고, 매년 새로운 얼음이 오래된 얼음에 첨가되면서 결국 천천히 빙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35년 뒤 3명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당시만 해도 논쟁적이었던 밀란코비치의 궤도 촉성 이론을 시험하고자 힘을 합쳤다. 이들은 해양 퇴적물에 생성된 장기적인 기후 기록을 활용했다. 1976년 짐 헤이스 Jim Hays, 닉 섀클턴 Nick Shackleton, 존 임브리John Imbrie는 지구의 흔들림에 나타난 예측 가능한 변화가 과거의 기후와 맞아떨어진다는 아주 중요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변 화는 세 가지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이심률(타원형 지구 궤도의 변화)과 기울기(지구 회전축의 기울기가 이루는 각도), 세차운동(지구의 축이 궤도 쪽으로 기우는 것)이 그것이다. 이 연구는 과거에 기후가 변화했던 근본 원인과 궤도촉성이 지구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연구영역을 촉발시켰다. 이제 우리는 지구의 기후 시스템에 미치는 궤도 촉성의 영향력을 14억 년 전인 원생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 있다. 또 헤이스, 임브리, 섀클턴은 궤도 매개변수의 변화가 단지 빙기-간빙기 순환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그런 순환보다 앞서 일어나기도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심률, 기울기 및 세차 운동의 조합은 여러 다른 기후와 관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구는 현재 빙상이 가장 큰 규모로 발달했던 2만 1000년 전과 궤도의 배열이 비슷하다. 기후 되먹임 메커니즘은 전 지구적으로 태양 에너지 분배상의 작은 변화를 축적해 지구를 빙하기로 밀어 붙이거나 빙하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빙상과 해양, 대기에서 일어나는 되먹임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지식 덕분에 우리는 온실가스가 과거 기후를 제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궤도 촉성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면 각 간빙기의 자연적인 길이를 예측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 지구 궤도가 어떻게 변화할 지 계산하면 다음 번 빙하기가 언제 시작할지도 예견할 수 있다. 고기후학자 크로니스 체다키스Chronis Tedakis와 동료들의 계산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간섭이 없는 경우 지구 시스템이 순환 주기의 마지막 빙하기를 벗어나면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다시 치솟아 최고 수준에 도달 한다. 그리고 약 240ppm이라는 임계 값에 도달할 때까지 감소하는데 이 값은 산업화 이전보다는 40ppm 낮고 오늘날보다는 160ppm이 넘게 낮다. 일단 240ppm에 도달하면 기후 시스템은 궤도 촉성에 대응해 변화하며 지구는 다음 빙하기로 넘어간다. 이 농도 아래로 내려가면 빙상이 천천히 자라나며, 마침내 순환 주기 속에서 전체 빙하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개입이 없으면 빙상이 자라고, 지금부터 1500년 사이에 언제든 다음 빙하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실제로 빙하는 더 커지지 않 고 있으며, 초기 농부들이 배출한 온실가스 때문에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는 240ppm라는 한계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천천히, 무심코 조금씩 미 묘하게, 1만 500년 전에 등장한 새로운 생활양식은 진정한 전 지구 규모의 환경적 영향인 그 다음 빙하기의 도래를 늦췄다.
- 새로운 생활양식이 가져온 더 광범위한 효과는 지질학적 기록에 나타난다. 수천년에 걸쳐 농경지가 깔끔하게 정리되면서 지질학적인 과거에 비해 침식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작물과 가축이 점점 더 많은 경관을 지배하면서, 작물의 씨앗과 꽃가루를 비롯해 가축화된 동물의 뼈가 지질 퇴적물에 점점 더 자주 등장했다. 농업에 기초한 제국이 등장하고 금속가공이 보편화되면서 장거리에 걸친 오염도 발생했다. 페루 안데스 산맥의 빙하 코어 기록을 보면 3400년 전 잉카 제국의 발전과 함께 수은 농도가 높아졌으며, 그린란드 빙하 코어를 살피면 2000년 전 로마제국에서 구리 제련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 지구 적인 규모에서 다음 빙하기의 시작은 연기되었다. 하지만 농경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영향은 다음 빙하기를 연기하는 것보다 더 미묘하게 나타났다. 농경으로 인해 배출된 온실가스는 이전 간빙기에 장기간에 걸쳐 나타났던 전 지구적인 기온 하강을 거의 완벽 하게 상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새로운 생활양식은 수천 년에 걸쳐 기 후가 안정되는 기간을 만들어냈다. 이런 조건은 장기적으로 농경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농경 없이는 복잡한 문명과 제국이 형성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 사람들이 농경이라는 생활양식을 추구하면 서 부지불식간에 문명이 더욱 팽창하고 발전을 거듭하는 조건들이 만들 어졌다. 기술의 혁신, 상비군의 형성, 글쓰기의 발전, 넓은 땅에 걸쳐 수 백만 명의 인구를 아우르는 제국이 뒤따랐다. 그렇게 수천 년에 걸쳐 농 경이 이뤄진 뒤로 지난 천년의 중반부터 새로운 생활양식이 전 세계적 으로 퍼졌으며, 그에 따라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는 단계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 이제 우리의 핵심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자. 인류의 두 갈래가 1만 2000년에 걸쳐 분리되었다가 재결합한 사건이 지구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모두 변화시켰는가? 전 세계 인류가 치명적인 질병과 뒤섞이게 된 사건은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 Alfred Crosby가 '콜럼버스 교환' 이라 고 부른 전 지구적인 대규모 생물학적 혼합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병 원균이 여행했을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도 여행했다. 그리고 생물 종 이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한 대양 분지에서 다른 대양 분지로 그 종이 원래 자리했던 진화적인 맥락 밖으로 이동했다. 그에 따라 전 지구의 생물 종들이 균질하게 세계화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 유럽에서 '신세계'가 발견된 사건은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변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훨씬 미묘한 변화도 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세계에 대해 가진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 식물, 동물로 가득하며 그동안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대륙이 있는데 고대의 글이나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고대의 지혜가 가졌던 권위가 떨어지고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 했다. 어떻게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저서,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로마인들의 저서가 여기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걸까? 어떻게 해서 전혀 몰랐던 걸까? 그에 따라 고대의 글과 책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씩 명백하게 드러났다. 1440년대 이후로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더 널리 사용되면서 고대 문헌의 인쇄된 사본도 많아졌고, 보다 많은 사람이 비교 연구를 하게 되었다. 모든 사고방식의 혁명이 그렇듯 새로운 언어의 등장과 표현상의 혁명도 필요했다. 당시에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우튼David Wootton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항해하던 당시만 해도 유럽의 주요 언어에는 발견discovery' 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이 단어는 1504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자신의 항해를 상기하는 내용을 적은 이탈리아어 편지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했고, 1563년까지는 영어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는 '발견하다to discover'라는 단어가 정보 제공자를 드러내는 배신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6세기 말이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용법처럼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지식을 얻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미묘한 변화들이 중요했다. 1500년대에 시작된 과학혁명은 다음 두 가지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세하게 관찰하면 당 신이 공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과학혁명 은 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여기에 대해 뭔가를 했던 독특 하고 흔치 않은 지적인 찰나에서 시작되었다. 1660년에 창립되었으며 전 세계 최초의 과학 공동체로 여겨지는 런던의 왕립학회에 이 점이 잘 응 축되어 있다. 이 단체의 표어는 라틴어로 눌리우스 인 베르바Nullius in Verba'로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권위나 근거 없는추정이 아닌 경험과 증거가 진리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 초기에는 지주가 농부에게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농부가 더 오래 열심히 일하게끔 강압이나 폭력으로 위협하는 일을 매달, 매년 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이후 임대 시장 때문에 농부들의 생산성이 증가하면서 폭력으로 위협할 필요가 없어졌다. 노동자들로부터 부를 뽑아내는 새로운 경제적 수단이 등장했다. 임대인들 사이에 경쟁을 붙이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새로운 방법이 되었다. 이 임대인들과 농장의 임금 노동자들은 점차 지주들에 대한 의무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토지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임대 시장이 오래된 봉건 제도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꾼 데 지나지 않았다. 임대인이 자기가 생산한 부의 일부를 지주에게 주는 것이다. 이처럼 16세기 들어 잉글랜드에서 토지의 사유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농경 자본주의 계급 사회가 탄생했다.
- 농부들은 보통 탄소를 많이 저장하는 숲을 탄소를 적게 저장하는 농지로 전환한다. 그에 따라 탄소 배출이 이어지면서 대기 중의 이사화탄소 수준이 높아져 지구의 기온이 올라간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은 천천히 오랫동안 또 다른 빙결 작용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멈추게 해 전 지구적으로 기후 안정을 제공했다. 농경이 중단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간단히 예측할 수 있다. 탄소를 적게 저장하는 농지가 식생에서 탄소를 많이 저장하는 이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복구될 것이다. 이런 현상이 충분히 넓은 지역에서 발생한다면 대기에서 이산화탄소가 상당히 제거되면서 지구가 식는다. 이것은 오늘날 기후 변화의 속 도를 늦추고자 대량으로 나무를 심는 정책의 바탕에 놓인 원리와 동일 하다.
- 대기에서 탄소가 제거되는 시점은 어떨까?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망률이 최대치에 도달하는 시점이 1492년에서 수십 년이 흐른 뒤이며, 농지에 나무를 심어 탄소 흡수율이 최대치가 되려면 농지를 버리고 보통 10년에서 50년 뒤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탄소가 제거되어 최대로 저장되는 시점은 1550년 이후로 예상된다. 이 과정은 이후로 1650년대까지는 점차 느려지거나 멈췄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농지를 회복하면서 탄소가 흡수되는 양은 지구의 다른 곳에서 인구가 늘면서 농지가 계속 확장되는결과와 상쇄될 만큼 충분히 낮다. 1492년 이후 대기 중 이산화탄소 양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남극의 고해상 빙하 코어 기록에 따르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바로 이 시기에 흔치 않은 감소세를 나타낸다. 1520년부터 1570년까지는 매우 천천히 증가하다가 1610년까지는 낮아진 다음 다시 반등한다. 빙하 코어의 탄소 동위원소를 살펴보면, 이산화탄소 농도의 감소는 탄소가 대양이 아닌 육지에 저장되어 격리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감소 시점뿐만 아니라 규모도 맞아 떨어진다. <그림 5.3)에서 볼 수 있듯이 7ppm에서 10ppm이 감소했다. 이 기간에 우리의 앞선 추측에 따르면 5,000만 명이 사망하면서 130억 톤의 탄소가 제거되어 다시 성장하는 숲에 저장되었는데, 그에 따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6ppm 감소했다. 그리고 이렇게 이산화탄소 농도가 감소하면서 1594년에서 1677년까 지 전 지구적인 기온 하강이 나타났다고 추정된다. 나무의 나이테, 빙하코어, 호수 퇴적물, 석순, 종유석 같은 500개 이상의 지질 기록을 통해 과 거의 기온에 대한 지표를 전 지구적으로 종합한 결과가 그렇다. 전세계적으로 여러 지질학적 퇴적물에서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면 이산화탄 소의 일시적인 감소는 인류세의 시작을 가리키는 황금 못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라틴어로 '세계'를 뜻하는 단어를 따서 '오르비스 스파이크 Orbis Spike'라고 불리는데,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동쪽 반구와 서쪽 반구가 1만 2000년 이상 분리되었다가 합쳐지면서 단일한 전 지구적 경제 체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역사학자 제프리 파커 Geoffrey Parker는 소빙기에서 가장 기온이 낮은시기가 전 세계에 심각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설득력 있는 사례를 제시했다. 파커는 중세 유럽을 초토화했던 30년 전쟁(1618~1648)을 비롯해 근대일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농민 반란(1637), 영국의 대내란(1642~1651), 명나라의 멸망(1644), 중앙아프리카 콩고 왕국의 전복(1665) 같은 사례에 서 볼 수 있듯이, 17세기는 혁명과 반란의 시대라고 지적했다. 이런 예는 더 길게 이어진다. 전 세계적인 물리적 충돌이 16세기에 732건에서 17세기에 5,193건으로 증가한 데는 아마도 기근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리적 충돌을 빚은 원인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상륙을 포함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식량 생산에 방해를 놓은 기후 변화가 중요한 기여자였다.
- 왜 이 특별한 유형의 산업화가 하필 영국에서 일어났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산업 자본주의의 요구 사항 각각 을 살펴보고 어떤 지역이나 국가가 그 산업에 적합한지 확인하는 것이 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다른 집단을 정복할 의향과 능력이 있는 하나의 집단이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영국 말고도 많다. 그다음으로는 더 훌륭한 기계를 만드는 기술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중국, 일본 모두 18세기 초에는 기술적으로 숙달된 사회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토지와 연결고리가 없는 대규모의 도시 인구가 필요하며 이들을 먹일 식량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는 서유럽 국가들만이 한정된 토지 면적이라는 제한 조건을 벗어날 수 있다. 서유럽 은 식량, 연료, 섬유의 생산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위탁하면서 생태적 제 한을 피했고, 이렇듯 멀리 떨어진 '유령 땅'을 통해 더 많은 도시 노동자 들의 생활을 떠받들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기술 산업이 발전했다. 그에 따라 산업화에 필요한 조건은 서유럽 국가들만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서유럽 국가 가운데 노동자 1인당 농업 생산성과 전체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켜 가장 먼저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전체의 50% 미만으로 떨어진 국가는 영국과 네덜란드 두 나라뿐 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도시 인구라는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영국의 도시 인구는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네덜란드보다 3배 더 빨리 급증했 다. 절대 인구가 이미 네덜란드의 3배였던 영국 도시 인구는 1800년대에 260만 명이었지만 네덜란드 인구는 7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중요하다. 순수한 통계적 관점에서 보면, 만약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상당수의 과학자가 이 지식에 실용적인 쓸모를 찾는 눈을 가진 상당수의 발명가를 만나야 하는 경우에 이 일련의 사건은 소규모 인구 집단보다는 대규모 도시 인구 집단에서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사슬은 훨씬 길게 이어진다. 이제 발명가들은 발명품을 어떤 문제에 대한 판매 가능한 해법으로 만들고자 상당수의 엔지 니어들을 만나야 하며, 마지막으로 엔지니어들은 이 위험한 벤처 사업을 시도하기 위해 벤처 기업 투자가를 만나야 한다. 도시 인구가 많을수록 공장에서 새롭고 값싼 물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과학적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영국에는 또 다른 장점도 있었다. 서유럽이 전 세계 많은 곳을 식민 지로 만들 수 있었던 주된 이유가 나중에는 산업화를 이끌었을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이웃 국가들과 여러 세기에 걸쳐 경쟁적인 전투를 벌였고, 그에 따라 전쟁과 관련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 왔는데, 이것이 세계제국을 유지하려는 영국의 욕망으로 변형됨. 이 시기 동안 평균적인 영국 해군의 전함은 약 1,000개의 도르래 부품을 사용했는데, 이 부품을 4~5년마다 교체해야 했기 때문에 기술적 지식과 정밀한 공학 기 술이 필요했다. 실제로 1800년대까지 영국은 자국 해군을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해군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부 지출의 25% 이상을 지출했다. 영국은 제도와 천연자원이라는 이점도 있었지만, 여기에 더해 16세 기에 내부 통행료와 관세를 철폐하여 다른 어느지역보다 먼저 통합된 시장을 만들어냈다. 철, 납, 구리, 주석, 석회석을 포함한 다양한 원자재 역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지질학적 요소였다. 영국의 많은 도시 노동자들은 에너지가 축적된 수백만 톤의 화석연료 위에 살고 있었다.
- 산업혁명이 지구적 탄소 순환에 미쳤던 영향력의 놀랄 만한 속도와 규모는 이전의 변화와 대조적이다. 초기 농민들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을 약 7000년 전 260ppm에서 산업혁명 초기까지 280ppm으로 증가시켰는데, 연간 0.003ppm이 상승한 셈이다. 아메리카 대륙 인구 감소로 인한 오르비스 스파이크는 100년도 채 되기 전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적어도 7ppm 감소했다. 연간 0.07ppm의 감소율로, 수천 년 동안 농부들에 의해 야기된 변화보다 훨씬 큰 수치다. 이후 산업혁명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는 처음에는 280ppm이었다가 계속 올라가 2016년에는 404ppm으로 증가했는데, 연간 0.6ppm인 이전과는 자릿수가 다른 증가세를 보였다. 이것을 더 넓은 지질학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마지막 빙하기의 최대치와 홀로세가 시작할 무렵 사이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는 7000여 년에 걸쳐 약 80ppm으로, 변화 속도는 연간 0.01ppm이었다. 즉 전 지구적 탄소 순환은 지구가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전환할 때보다 인류의 행동 에 의해 더 빠른 속도로 변화했던 셈이다.
- 1958년부터는 이산화탄소 양을 대기에서 직접 측정할 수 있기 때문 에 빙하 코어에 의존하거나 정확도를 향상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다. 하와이의 산지인 마우나로아 정상 근처이며 오염원과는 거리가 먼 3,397m 높이에서 측정된 이산화탄소의 평균 농도는 1958년 이래 1년에 1.5ppm상승해 산업혁명 초기 증가율의 7배에 달했다. 2015년 이산화탄소의 증가율은 20세기 후반보다 2배로 증가했으며, 측정된 최고치는 3.02ppm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행동 때문에 지구의 탄소 순환은 빙하기부터 변화했던 속도보다 빠르게, 그리고 1950년대 이래로 10배나 더 빠른 속가 농경지로 전환되면서 대기에 2조 2,000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더해졌 다. 이 양은 적어도 지난 80만 년 동안의 수치보다 많으며 어쩌면 지난 수백만 년 동안의 수치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농도 상승의 대부분은 지난 50년 동안 이뤄졌다. 인류로 인한 이런 온실가스가 기후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지질학적 퇴적물을 활용해 기후를 복원해보면 해양과 육지의 온난화는 1820년대 이후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변화 가운데는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 평균기온이 1°C 상승한 것이 포함되는데, 대부분 의 변화는 1970년대 초반 이후에 나타났다.30 이례적인 고온 현상은 전 세계에 걸쳐 점점 빈번해졌다. 유럽에서는 보통 한 세기에 한 번 일어나는 극단적인 사건이 이제 10년에 한 번씩 일어난다. 우리가 경험하는 날씨는 자연적 구성 요소뿐만 아니라 점점 커지는 인간 관련 구성 요소를 가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종류의 극단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확률은 달라지고 있다.
- 미국의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 Alan Weisman은 2007년 자신의 저서 《인간 없는 세상 The World Without Us》에서 이 질문에 대한 사고실험을 실시했다. 와이즈먼의 지적대로, 우리가 아는 인류의 제거 방법은 지구 시스템에 커다란 교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적인 유 행병이 돌거나 핵전쟁이 일어나 수십 억 명의 시체가 썩어 환경을 오염 시켰다. 우리가 사라진다면 도시, 주택, 도로, 철도를 비롯한 기간 시설 은 방치되어 망가진다. 와이즈먼은 우리가 사라지면 500년 안에 주거 지 역은 숲이 되고, 방사성 폐기물, 조각상, 플라스틱은 인간이 지구상에 존 재했다는 증거로 가장 오래 남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 세계 대부분의 강에서 댐이 무너지고 자연적 분해 과정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후 채취되는 토양 시료에는 중금속, 미세 플라스틱, 이물질이 많이 포함 된다. 5만 년 전의 석기 시대 예술의 일부가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처럼 일부 인공물은 수만 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의 산물 가운 데 화석으로 남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일부는 수백만 년 동안 남는다. 바닷물의 플라스틱은 해양 퇴적물에 침전하며 결국에는 일부가 암석 속에 합쳐진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인류 문명의 인공물 대부분은 1000년도 안 되어 사라질 것이다.
- 오르비스 스파이크: 1610년에 시작된 지질학적 시간 단위로 인류세를 정의하는 것은 이 날짜 이후의 인간 활동이 지구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지구가 새 로운 상태로 전이하면서 앞으로 뚜렷하고 내구성 있는 지층을 형성할 것임을 의미한다. 지구 시스템의 수준에서 이 시기는 인류세로 접어들어 오랜 기간 온난해지기 전 마지막으로 지구 전체 온도가 서늘했던 순간이 었다. 그리고 지구에 새로운 판게아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진화 적 궤적을 거치면서 생물상이 전 지구적으로 조금씩 균질화된 이후의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것은 2장에서 살폈던 기후와 생명체에 초점을 맞춘 지질시대에 대한 견해와 부합한다. 수수한 지질학적 증거 말고도, 인류세를 정의할 때 지질학적 기록에 나타난 콜럼버스 교환의 첫 번째 전 지구적 영향을 활용하면 역사적으로 더 광범위한 일관성을 얻을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이 도착한 사건은 세계사와 환경사의 주요 전환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인 유발 노아 하라리 Yuval Noah Harari는 하나의 제국이 처음으로 세계화되면 서 인류 문화가 점차 단일한 문명으로 맞물리는 모습을 '역사의 마지막 단계'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세의 기초를 근대 세계의 시작점 으로 깔끔하게 정의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으로의 전환과 연결 된다. 그리고 이윤에 대한 투자라는 쌍발 엔진 또는 자기 강화적인 순환 과 이어져 생산력이 더욱 증대된다. 과학 지식의 증가는 과학 지식을 더 많이 얻는 능력을 촉진시키는데, 이것은 인류가 어떻게 해서 자연에 영 향을 주는 힘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또한 오르비스 스파이크는 여러 19세기 지질학자들이 교과서에 쓴 내용을 확인시켜 준다. 즉 2장에서 살핀 것처럼, 우리가 지금 인간이 생 명과 생태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기로 정의된 인류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려 준다. 여기에는 농업과 첫 번째 에너지 혁명에 의해 일어난 중요한 변화가 포함된다. 농경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에 미친 영향은 대 륙 전역에서 농업이 중단되었을 때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5장에서 살폈듯이, 이는 생태계와 지구 생명체에 직접적인 변화 를 불러왔으며,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초기에 난방을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물질대사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인류세를 1610년에 시작하면, 여러 과학자와 역사학자가 핵심 부분 으로 간주하는 산업혁명의 모든 영향을 포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럽 의 아메리카 대륙 병합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이었던 식량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을 제공하는 데 꼭 필요한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최초의 시장 사회가 서서히 거대한 전환'을 시작했을 때인 16세기 영국의 거대한 가속이 일어난 근원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1610년의 오 르비스 스파이크는 인류세에 대한 지질학적, 역사적으로 일관된 출발점을 제공한다.
-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상대방을 설득해 빛을 보게 해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이 결국 죽고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진리에 익숙해지면서 승리를 거둔다. (막스 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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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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