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걱정으로 가득하면 머릿속도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다. 우리는 내면의 평온을 깨뜨리는 그것이 속히 사라져주기 만을 바라기 때문에, 당장 일상의 브레이크를 밟고 내가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즉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기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 가?)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주된 실존 형식은 걱정을 통해 세계를 찾고,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를 찾는 것 이라고 말이다.
또한 하이데거는 걱정의 특징을 걱정의 대상이 명확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머릿속이 어지러우면 내가 뭘 걱정하는지 모를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가령 우리가 사내 인간관계를 걱정하는 건 남들이 날 어떻게 평가하는지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다. SNS에서의 '좋아요'는 일부의 세상에서 나마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수를 대표한다고 여긴다. 걱정이 있다는 건 최소한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적어도 우린 외롭지 않은 것이다.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개 자기 외부의 사람이나 사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걱정을 통해, 100% 우리가 원하는 대로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형성되어 간다.
둘째, 걱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사의 경중과 완급, 그리고 대체로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가치체계를 반영한다. "넌 못생기지 않았어"라든가 "넌 참 어리석구나"라는 말은 둘 다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어떤 말이 누구의 마음을 더 무 겁게 하는가는 매번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넌 왜 짝도 못 찾 고 여태 혼자니?"라는 말을 가족에게 들어도 걱정이나 상심 은커녕 당당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그렇게나 매력이 없나' 하면서 비관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다.
- 이렇듯 우리가 하는 걱정에는 나와 남들이 공유하는 인식과 가치가 반영돼 있다. 우리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뭔가는 걱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남들이 중요하게 여긴다고 내 가 생각하는 것 사이에 격차가 벌어질 때 걱정이 생겨난다.
걱정에는 나 자신의 인식과 세상에 대한 나의 인식, 이 두 가지가 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이중의 인식은 우리가 새로운 길을 열고 초탈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조건이 된다. 걱정에 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이번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다음번에는 같은 기회를 통 해 타인의 시선 아래 있던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스스로를 당당히 내세우는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초탈한 자아인가, 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 르겠다. 그렇지는 않다. 자아를 내세우고 표현하기를 좋아한 다 해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어떤 부류' 뒤로 숨기를 선택하 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타인의 깃털로 자신의 생김새 를 치장하려 드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면, 민주시민이라면, 좋은 선생님들은 대개......... 이러이러한 법이지" 라는 식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개성과 강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추상화된 특정 부류와 동일시하려고 애쓴다. 이 들은 모든 사람이 단순히 아버지, 어머니이거나 좋은 학생, 나쁜 학생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런 식의 분류는 생명력의 무한한 발현을 제한시킬 뿐이다.
하이데거가 이해하고자 애썼던 과제는 문학, 예술, 영화에서도 보편적으로 다뤄온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역할에 갇혀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남들 눈에 성
공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은 지독하 게 공허하고 무료해지고 만다.
그런가 하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회의 테두리에서 벗 어나고자 노력한 끝에 또 다른 사회적 테두리에 갇혀버리거 나, 특정 꼬리표를 떼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또 다른 꼬리표 를 달게 되고 마는가?
따지고 보면 많은 종류의 걱정이 스스로에게 붙이고 싶었 던 수식어를 끝내 못 붙였거나 혹은 떼어버리고 싶었던 꼬리 표를 끝내 떼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
- 우리는 우리의 의식으로 사물의 공간적 거리를 분별하고, 자아를 의식하고, 반성하고, 상상하며, 사람과 사물의 존재를 감지한다. 이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의식 활동은 반성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 우리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돌 이켜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의 식 활동을 하면서 의식되는 존재를 대자존재(being-for-itself) 라고 불렀다.
- 책상 같은 사물은 사람보다 훨씬 단순하게 존재한다. 사람 은 반성을 통해 스스로 변화해갈 수 있지만, 자아의식이 없 는 책상은 영원히 외부 요소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고정 적. 피동적 상태에 있다. 누가 옮기거나 부수지 않는 한 책상 은 원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이렇게 피동적인 존재 형 태가 바로 즉자존재(being-in-itself)다. 자존재와 대자존재는 본질적으로 대립한다. 책상은 의식이 없기 때문에 완성된 상 태로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의식이 있기에 미완성의 상태 에서 변화해간다.
- 사람이 책상보다 복잡한 이유는 자존재와 대자존재의 일면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자존재의 일면은 출생, 과거, 부모 등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이는 책상 과 마찬가지로 완성돼 있으며 고정적인 것이다. 한편 대자존 재의 일면은 아직 하지 않은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다. 가령 '내일은 운동하러 가겠다'처럼 미래에 속한 일은 고정적이지 않다. 내일 다른 일이 생기면 운동 계획은 얼마든지 없어질 수 있다. 운동하러 가겠다는 계획은 줄곧 미발생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언제 어떻게든 변동될 수 있는 이런 상 태는 우리의 미래를 유동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게 만든다. 유신론자들은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도 책상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가 정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본질을 자존재로 보는 관점으로, 대자존재인 인간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사르트르는 생각했다.
- 미래의 유동성은 허무의 바탕인 동시에,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할 수 있게 하는 본질이 된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 고 싶다고 생각할 때, 미래의 나는 내가 실현해야 할 목표이며 그다음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이렇게 미래 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은 대자의 표현이다.
사르트르는 “가능성이란, 대자존재가 스스로의 자아에 결 여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아의 결여 란 무엇일까? 자오둔화,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는 그의 저서 《현대 서양철학 신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항상 결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영원히 불만족하기에, 새로운 가 능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 퇴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직장인만의 고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맞닥뜨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 가운데 하나일 뿐 이다. 사르트르의 자유가 해방으로 느껴지든 속박으로 느껴 지든, 자유와 불안은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모 든 사람의 선택을 에워싸고 있다. 인생의 방향이나 진로 때문 에 방황하며 불안을 느낄 때, 불안은 인간의 자유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림자로 인해 빛의 존재를 더욱 의식하게 되 는 것처럼.
- 퇴사를 두고 깊이 고민하는 까닭은 그것이 미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영원히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두 가 지 대답을 내놓는다.
첫째, 퇴사 여부는 맞고 틀림이나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라는 문제가 따른다.
둘째, 만약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해도, 당신은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선택을 새롭게 다시 할 수 있다.
- 회사는 망하고, 배우자는 떠나가고...... 이제까지 익숙했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릴 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카뮈에 따르면,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할 때 인간과 세계 사이의 긴장관계와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카뮈는 이 모든 것이 나쁘기만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우리가 부조리를 의식하고 그 근원을 이해하는 것은 자유를 획득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
- 카뮈는 부조리를 의식했을 때 견지해야 할 태도는 부조리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삶의 무의미함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비로소 우 리는 삶의 의미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게 된다.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어봤을 것이다.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 승진해야 하니까. 왜 승진해야 하는가? 그래야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높은 지위는 성공을 의미하니까. 성공은 그렇게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덜컥 큰 병에 걸린다거나 대형사고라도 당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삶의 무의미함을 절감하 며 세계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카뮈가 인정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인간은 세계에 대 한 설명을 요구한다. 둘째, 세계는 인간의 이러한 갈구에 응 답하지 않는다. 셋째,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불협화음에 대해서 이성은 무력할 뿐이다. 카뮈에게 있어 부조리는 도피해서는 안될 현실의 일부분이었다.
- 모든 외재적 가치는 이성의 산물이다. 거기엔 아무런 절대 적·고정적 이유가 없다. 부조리는 똑바로 서서 정면으로 마 주해야 한다. 인간의 공통된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 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사회적 기 대라는 속박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시시포스와 마찬가지로 반항 자체가 우리를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하지 만,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자유를 의식하고 삶에 우리가 소망 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삶에 대한 열정, 뜨거운 애정의 표현이다.
- 신은 죽었으니 신을 핑계로 대지 마라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절대적 자유 를 두려워한다는 게 니체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제도와 규칙 을 만들고 나서 그것을 당위로, 나아가 불변의 진리로까지 여 긴다. 이는 한편으로 의지의 확장이다. 즉 인류가 자신의 권 력의지를 세상 전체, 심지어 우주로까지 확장하는 것일지 모 른다. 다른 한편으론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을 제한하는 것 이기도 하다.
- 결국 인간은 신을 창조함으로써 자기 의지의 무력함에 대 한 핑계로 삼기 시작했다. "하늘의 명을 따라야 한다" "신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같은 말은 인간의 의지를 움츠러들 게 하고 안일함을 좇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신은 죽었다" 는 말은 삶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신 은 이미 죽었으므로 인간은 더 이상 움츠러들거나 뒷걸음질 치도록 만드는 의지의 무력함에 대해 변명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젠 신의 뒤에 숨어, 책임이나 가치 평가를 신에게 떠넘 길 수 없다. 인간 스스로 모든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재구 성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에게 모든 실재는 영원히 뒤섞이고 부 단히 움직이는 것이었다.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라고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의 우주관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도 했다. 처음 발을 담갔을 때의 강물은 이미 흘러가고 없기 때문이다.
- 니체에게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동하는 권력에의 의지뿐이었다. 그것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움직이는, 부단히 솟구쳐 오르는 의지다. 니체의 '의지'는 쇼펜하우어, 그중에서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영향을 받은 것 이다. 쇼펜하우어는 실재의 본질은 무한한 의지, 갈망, 충동이 며 다른 모든 것은 의지가 충돌하여 생겨난 표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처럼 삶에 대한 비관을 진리로 여긴다거나, 예술을 도피나 위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오 히려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충분히 펼치지 않은 탓에, 비관과 부정을 진리로 여기는 자기기만으로 숨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재의 본질이 부단히 변동하는 권력에의 의지뿐이라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는 물질적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일체의 사물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연(緣)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지만, 의지의 변화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강조 한다. 결국 인간은 의지가 창조하는 표상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 고대부터 모든 철학자는 욕망을 멸시해왔다. 욕망은 혼란 을 야기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혼란 속 에서도 욕망과 의지의 힘을 다시 주목한다. 이성은 의지가 만 들어내는 파격과 무질서를 두려워하여 충동을 억누르고자 하 지만, 의지의 충동이 폭발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발견하게 된 다. 이성이 구축해놓은 질서는 충동 앞에서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말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니체만큼 급진적이며 극단적인 사상가도 흔치 않다. 우리는 그의 사상을 통해 영원히 변화하는 세계에 눈을 두고, 과거나 안정이라는 환각에 이끌리지 않으며, 모든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범인(凡人)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가 속한 시대에는 미움을 받을지 모른다.
이러한 초인은 결코 인간 세상에 강림한 신의 현현이 아니 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시대의 조건 속에서 허무를 깨 닫고, 비극과 자유를 끌어안기로 한 존재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맹자가 말하는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기려 할 때”의 '그 사람'처럼 차마 감당하기 힘든 기나긴 시련과 고난 속에 서도 증오나 혐오에 빠지지 않고 분노마저 힘으로 승화시키는 초인의 모습은, 현대인의 삶에 혐오와 분노를 극복하는 방법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 손자는 “용기와 두려움은 군대의 기세에 달려 있다"고 했다. 군대의 용기와 두려움은 전투의 형세에 따라 달라지며, 그 형세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손자병법>에 서는 형과 세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둘의 연관성 은 대단히 높다.
형은 전쟁 중의 객관적인 조건과 조직 내의 제반 요소를 가리킨다. 전략의 좋고 나쁨, 무기의 우수성, 병사의 훈련 수 준 등이 모두 형을 이루는 요소다. 이러한 승리의 형은 통상 승리의 세로 이어진다. 세란 전쟁 중의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좋은 요소로, 병사들의 사기, 지휘의 유연성 등이 모두 세를 만들어내는 요소에 속한다.
그렇다면 승리의 형은 어떻게 해서 승리의 세로 이어지는 가? 방금 말한 형과 세의 특성을 참고해보면, 형은 우리 자신 이 갖춘 실력, 보유한 자원, 경영 방침과 제도 등을 의미한다. 또한 세는 그 방침에 따라 진행하는 자원 배분 및 관련 활동 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 조직이라면 잘 완비된 제도와 충분한 도구, 우수한 인력, 추진 가능한 전략 등이 있어야 순조로운 생산으로 우수한 실적을 낼 수 있다. 여기서 우수한 실적과 그 실적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순조로운 생산 활동이 세에 해당한다. 생산 활동과 실적이라는 결과는 모두 조직 내의 하드웨어, 즉 객관적 조건 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조직의 객관적 조건이 얼마나 완비 돼 있느냐가 승리의 형인 것이다. 아울러 경영자의 의사결정 내용과 태도도 직원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 순자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의 마음은 쟁반의 물과 같다. 바르게 놓고 움직이지 않도록 하면 지저분하고 탁한 것은 아래로 내려가고, 맑고 밝은 것은 위에 고여 그 물에서 수염과 눈썹, 잔주름까지 보고 살필 수 있게 된다.”
제아무리 탁한 흙탕물도 한쪽에 가만히 놓아두면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맑은 물만 윗면에 고인다. 사람이 그 물을 내려다보면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이고, 수면에는 자신의 모 습도 또렷하게 비친다. 그러나 바람 같은 외부의 힘이 개입되 거나 당신이 쟁반을 흔들어대면, 가라앉아 있던 흙먼지가 떠 올라 뒤섞이면서 물은 다시 혼탁해진다. 
- 허일이정은 여러 걱정을 안은 채 짜증과 혼란에 싸여 있는 직장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그대로 빠져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붙들어주기 때문이다. 허일이정은 '허(텅 비움)' '일(하나로 모음)' '정(고요함)'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하나 실천해나갈수록 어지럽고 복잡하기만 한 직장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도가적인 느낌이 들지만, 허일이정은 사실 외부의 사물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유가의 인식론 이다. 동시에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어떻게 자신을 수양할 것인가 하는 공부론이기도 하다.
- 마음은 늘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로 잘 모을 때도 있다. (.....)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여러 가지를 분별하게 된다. 분별한다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아울러 알게 되는 것이며, 여러 가지를 아울러 알게 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하나인 상태가 있다. 저쪽의 하나 때문에 이쪽의 하나가 방해받지 않는 것, 이를 하나인 상태라 한다.
- 직장에서 각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는 유가의 형이상 학적 성선론이 깊게 새겨져 있다. <맹자>에서 말하듯 "어찌 꼭 이익을 말하는가? 인의도 있는데!"라는 생각 아래서는 이 익이나 욕망을 말하는 것조차 일종의 수치, 배덕이 된다. 그 래서 우리는 거짓으로라도 겸손한 척, 양보하는 척 예의를 지 키고, 내 이익에 관심 없고 상대방만 위하는 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생활의 압박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 고 부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나의 이익을 희생하기까지 해야 하는가?
- 잔혹은 위선군자들에게 대항하는 무기가 되고, 직장 내 불 의나 불공평을 깨뜨리는 용기가 될 수도 있다. 보통의 동양인 들은 대립과 충돌을 두려워해서 억지 조화를 감내하려는 경 향이 크다. 이는 직장 내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심화시킬 뿐 이며, 위선군자들의 위세만 북돋울 뿐이다. 그러나 직장 내에 잔혹이 존재한다고 해서 치를 떨며 분개할 필요는 없다. 그건 그냥 인간 본성의 이 사회의 진상(眞相)일 뿐이다. 유가학설에서 이상적으로 그리는 도덕적 사회도 실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인간에게 있는 사리 추구의 마음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협상, 협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정으로 인의예지가 충만한 상태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한비자의 철학을 통해 잔혹은 일종의 덕행이며, 우 리 자신의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용기이기도 하다는 점 을 배웠다. 진정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미래를 만들고 싶다 면, 잔혹은 그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악, 심지어 선한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요소다.
그러니 조금 더 잔혹해져도 좋다! 잔혹에 온기를 더해 다시 그 잔혹을 상대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다!
- 한비자의 사상은 군왕에게 부국강병의 방책을 제안하는 일종의 정치철학이다. 그러나 《한비자》의 기저에 자리한 문제의식은 이기적 성향의 개체들로 이뤄진 국가에서 어떻게 사회질서를 구축할 것인가이며, 그 주된 방법은 이익을 구하고 손 해를 피하는 인간의 성향을 이용, 상벌이라는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유가가 주류였던 사상적 전통에서 한비자의 철학은 사악한 학설로까지 치부됐다.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비자》는 고사와 은유를 통해 철학이념을 풀어낸 탁월한 저서다.
-  '천지와 하나'라는 것은 대체 어떤 감각일까? 장자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런 사람은 자만하지도 않고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는다. 나아 가 "온 세상이 칭찬한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으며, 온 세상 이 비난한다고 해서 기죽어 슬퍼하지도 않는다. 안팎의 구분 을 명확히 하고, 영욕의 경계를 뚜렷이 짓기에 그리 할 수 있 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당신을 칭찬하고 떠받든다고 들뜨거나 우쭐해 하지 않고 온 세상이 당신을 비난해도 풀이 죽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깥의 사물과 나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 영광이고 무엇이 치욕인지 분별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신감은 결국 자기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자신감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 자기 자신은 내재적 무언가로 인해 '확고부동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장자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의 시간(나이)과 공간(천지간)적 위치를 정확히 알고, 남들(혹은 사물들)과 나 사이의 관계를 명 확히 분별하는 것이었다.
- 문제는 분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분노하느냐에 있 다. 분노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는 물과 같다. 우리 가 언제 분노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안다면, 분노로 인해 일을 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상치 못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분노는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절절한 감정 표현과 분출로서의 분노는 심리적 건강에도 유익하다.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거나, 미치광이 가 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이 감정일 때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감정이란 외부 사물에 대한 반응이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 이다. 같은 사건을 대할 때도 그 사람의 지위나 환경, 인생 경 험에 따라 생각의 내용과 수준이 달라진다. 하물며 타인의 움 직이는 감정에 마음을 향한 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왜, 무엇 을 위해 살아가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맹목 상태가 되기 쉽다. 당신은 무엇에 마음을 향한 채 살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 한 끝에 "그냥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면, 당신도 실은 움직이는 감정의 반응을 좇아 살아왔으며, 당신의 내면 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감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지 오래일 가능성이 높다.
- 《순자》의 <유좌> 편에는 공자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보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물을 그토록 진지하게 관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물은 만물을 두루 거쳐 흐르며 그들에게 생기를 부여하 면서도 공을 내세우지 않으니, 이것은 덕(德)과 같다. 낮은 곳 을 향해 굽이굽이 흐르되 반드시 자신만의 물길을 따라 흐르니, 이것은 의(義)와 같다. 하루라도 마를 날 없는 기세로 흐르는 왕성함은 도(道)와 같다. 나아가는 기세는 결연하고 깊디깊은 계곡에 이르러서도 두려움이 없으니, 이는 용(勇)과 같다. 물은 수평을 재는 기준이 되니, 이는 법(法)과 같다. 어 디든 가득 메운 뒤에도 평평하게 깎을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정(正)과 같다.
부드럽고 투명한 모습으로 미세한 데까지 흘러드니, 이는 밝게 살피는 것과 같다. 물이 흘러 지나간 자리는 깨끗해지니, 이는 선한 교화와 같다. 물길이 아무리 굽이져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으니, 이는 굳은 의지와 같다. 이렇듯 물의 덕성이 훌륭하므로 군자는 물을 보면 깊이 관찰하면서 감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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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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