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사여구'로 장식된 말은 누군가의 모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로 살면서 터득한 말로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 은 어쩌면 '무작위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말고 방 법은 없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서 있는 위치였다. 곧 '무엇 을 말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 다. 오히려 '어떻게'가 정해지면 '무엇을'은 자연히 정해진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말할지 생각한 다음에 어떻게 말할지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어떻게'는 '무엇을'보다 못하지 않다고 그는 확신했다.
- 현대에는 학설이나 견해 등을 말할 때 '무엇을'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대부분 요약할 수 있다. 요약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읽어도 같은 내용으로 읽힐 수 있음을 의미 한다.
한편 '어떻게'는 요약할 수 없다. 곧 그 사람의 '말투'는 요 약할 수 없다. 게다가 치환 불가능하다. 그렇듯 요약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것 중에서 '진실'된 것을 발견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소크라테스가 말하려 는 내용의 요점을 정리하고 싶다면 이 책은 읽지 않아도 좋 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요약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투가 생생히 떠오르는 경험을 하 고 싶다면 이 책을 펼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말이 아 니라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몸을 던져야만 한다.
- 소크라테스는 왜 대화를 이어갔을까? 바로 자신이 무지 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불완전하다고 생각 하는 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지혜로 충만한 상태라고 소 크라테스는 말했다. 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무지 의지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무지의 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러나 나는 그와 만난 후 돌아가는 길에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보다 나는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이 남 자도 나도 아마도 선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만, 이 남자는 모르는데 무언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모르 기에 또 마찬가지로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아주 작은 차이로 내가 더 지혜가 있다는 결론이 나는 듯하다. 곧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단지 그만큼의 차이로 더욱 나은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절대로 옳 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절대로 틀리다. '절대'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거의 없는데, 이것만큼은 거의 절대에 가깝다.
- '무지의 지'를 진정 살아가려 한 소크라테스. 그가 인생을 걸고 생각한 것 중에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중 젊은이든 늙은이든 누구라도 가능한 한 영혼이 훌륭 해지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보다 앞서서, 혹은 같은 정도로 신체와 재물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 다. 재물을 많이 쌓는다고 해서 영혼이 훌륭해지지는 않기 때 문입니다. 재물 외에,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은 모두 훌륭한 영혼에서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몇 번이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외의 것은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영혼'을 좋게 만드는 일 이외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삶이란 '영혼'을 돌보는 일, '영혼'을 갈고닦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그리고 그 말을 후세에 남긴 플라톤의 확고한 신념이다.
- 대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대화가 오갈 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침묵'일 때도 있는 법이다.
이 책의 일본어판을 번역한 다나카 미치타로中美知太郎는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의 한계를 알았으며 어느 때라도 신들이 참석하기를 바랐다"고 썼다. 대화란 자기의 인식을 확 인하는 방법이 아니며, 상대방의 인식을 아는 일도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명백히 모습을 드러낼 무언가를 받아들이 려고 준비하는 것 바로 그 자체다.

- 데카르트의 사색은 단순히 '눈'으로 책을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교사들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되자 곧 바로 글자에 의한 학문(인문학)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러고 나 서 나 자신 안에서, 혹은 세계라는 커다란 책 속에서 발견할 지도 모를 학문만을 탐구하고자 다음과 같은 일에 청춘을 바쳤다. 여행을 하고, 각지에 있는 궁전과 군대를 구경하고, 기질과 신분이 다른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 고, 운명이 가져다주는 기회를 잡아 자신에게 시련을 주고, 온 갖 곳에서 눈앞에 나타나는 것에 관해 반성했다. 그것에서 이 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른바 학습을 끝낸 데카르트는 책상 앞에서 책을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커다란 책'을 읽기 위해 여행 을 떠났다.
한편, 여기에서 문제는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이다. 데카 르트는 여행을 떠나고,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그곳에서 배 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려 했다고도 말한다.
'다양한 곳에 간 것'을 통해서는 세계가 외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널리 외적 세계를 접함으로써 자신에 게 시련을 주고, 반성의 힘을 키워 그곳에서 최선의 것을 도 출해내려 애썼다. 이는 모두 그의 내적 세계에서 일어난 사 건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세계'는 다의적이다.
- '다의적'이란 하나의 말에 복수의 의미가 숨겨진 것을 가 리킨다. 그에게 여행은 단순히 외적 세계의 견문을 넓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적 세계를 파헤치는 것으로 통하는 일 이었다.
한편, 데카르트는 세계는 '책'이라고 말한다. '세계라는 커 다란 책에는 말로 쓰인 것은 거의 없다. 이때는 또 하나의 '말'을 '눈으로 읽는 힘을 키워야 한다.
이 문자와 다른 말,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의 꿈틀거림을 여기에서는 '말'이라고 표현하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는 다른 또 하나의 '말'이 철학에 필요하다고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쓴 것이다.
자연이 하는 '말'과 내적인 마음이 하는 '말', 이 두 언어를 뛰어넘는 '말'을 습득하는 것이 자신의 철학적 원점이라는 것이다.
-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다 쓰기까지 41년의 인생을 살았다. 착상은 더욱 젊을 때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시간 을 들여 확인했다.
현대인에게는 수많은 것을 빨리 알고자 하는 성향이 있 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빨리 아 는 것'보다는 '확실히 하는 것', '깊이 아는 것'이다. 곧 알아 야 할 것을 알아야 할 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가령 눈앞에 지팡이가 있어야 걸을 수 있는 노인이 있다 고 치자. 그 앞에서 50대의 내가 늙음'에 관해 아는 척할 수 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르겠다'와 '지금 알고 있다'는 인식을 깊게 해야만 한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일이다. 나아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는 일이다.
현 시점에서 모른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에 의미가 없지 는 않다. 때가 차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여행을 통해 데카르트는 그렇게 느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지'에 깊이를 더한 것이다.
- 공부는 물론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우 리는 그것에서 다른 사람이 가르쳐준 것 외에는 배울 수가 없다.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은 결국 제 손으로 찾아야 한 다. 데카르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배움이란 공부 바깥에서 자신이 만나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리라. 가령 지금부터 내가 '사랑이란 이러한 것이다'라는 강의를 한다고 치자. 이때 내가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해 동서고금의 명저가 말하는 것을 소개하면 여러분은 그것에 관해 배우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정한 사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 다. 그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설명으로 '사랑'에 관해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일'과 무언가를 '사는 일'은 다르다고 말한다. 나아가 무언가를 '배우는 일' 과 '사는 일' 양쪽의 길이 있다고 전한다. 우리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을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데카르트는 밝혀낸 것이다.

- 《인간의 조건> 서문에서 아렌트는 “이 책은 이러한 긴급한 문제나 난제에 답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대답을 단 한 사람의 이론적 고찰과 의견에서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저 하나의 대답밖에 없다는 듯 문제를 다루 어서는 안 된다.
- 철학이 답을 쥐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렌트는 유일한 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질 문에 깊이를 더하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답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도 표현되어 있다. 만약 명시적인 해답이 있다면 철학은 이미 필요하지 않기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부터 동서양을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철학'이라는 행위를 지속 하고 있다.
만약 어떤 문제를 진정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어느 특정 한 사람의 이론을 궁극의 해답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재촉하는 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철학 의 전제라고 아렌트는 말한다.
이때 아렌트는 단순히 해답처럼 보이는 것을 의심하라고 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절 대적인 말을 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개개인이 각자 사고 의 깊이를 더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 인간은 누구나 방황할 때 재빨리 답을 찾고 싶은 법이다. 그러면 인간은 그 답에 다소 독이 있어도 그것을 들이키고 만다. 철학적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목이 마르다고 해서 독 을 마셔서는 안 된다. 그 목마름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 다. 마음의 갈증을 진정으로 해소해주는 것은 세상에 떠도 는 '달콤한' 말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파헤쳐서 캐낸 '말'이다.
-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곧 아렌트는 답 없이 흔들리는 현실을 배경으로 자신의 철학을 수립하려 한다. 무언가 확고한 견해와 경험을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배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불안정한 상태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산다는 것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과 닮았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이 바다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영장은 다르다. 수영장에서는 배가 거의 흔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 노동과 일, 나아가 활동과의 융합을 위해 아렌트는 몇 가지 실마리를 남겼다. 그중 하나가 '손을 쓰는 것'이다.
가능한 한 '손'을 쓰지 않는 것이 편리하다고 현대인은 생 각하게 되었다. 확실히 편리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이 '생명'을 잃는 일이 된 것은 아닐까.
지적인 일이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없었다고 아렌트는 비꼬아 말한다. 무언가를 명석하게 해석하는 말만 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고, 아름다움이나 자연, 혹은 생명을 깊게 느끼는 것의 의미를 잃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에 성립한 지식인 계급은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그 개체 수는 심지어 급 증하고 있다”고 쓰며 아렌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지식인 계급은 고대 로마의 선행자와 마찬가지로 손을 쓰는 일을 하는 직업과 거의 공통점을 지니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만 무언가를 만들지는 않고, '정신'은 쓰지 않지만 머리라면 확실히 쓰고 있다. 심지어 머리는 육체의 일부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렇다. 따라서 지식인 계급 은 손으로 아무리 하찮은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라도 더없이 위 대한 예술가와 통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 곧 인간에 의해 세 워진 세계에 새로운 물건, 심지어 가능한 한 영속적인 물건을 더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식인들은 '머리'를 돌릴 뿐 '정신'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강한 표현이다.

- 이 책에서는 '환상'이라는 말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우선은 지금껏 봐온 '공동 환상', '대상', '자기 환상'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나아가 '관계 환상'이라는 어구도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앞 세 개다. 이것들은 세 개의 개 별 '환상'이라기보다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요시 모토는 '환상'을 분류함으로써 관계를 단절하려 한 것이 아 니라, 오히려 불가시적인 관계를 떠올리려 한 것이다. 《공동 환상론》 같은 책을 읽으면 개념을 분류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드니까. 그것이 쓸데없다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진짜는 언제나 독서라는 '여행'의 여정에 있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공동 환상'은 국가나 법으로 나타
난다.
- '대환상'의 극적인 예로 '가족'을 들 수 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하여 부부가 됨으로써 성립한다. 만약 사랑이 식어버리면 이혼이라는 형태로 가족은 해체된 다. 곧 요시모토가 생각하기에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도 환상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또한 스스로 '환상'을 구축한다. 그것이 '자 기 환상'이다. 사상, 철학, 문학 이론, 사회 이론 등도 '자기 환상'이다.
앞에서 나에게 교회가 죽은 이들과 함께 있다고 말했는 데, 이 또한 '자기 환상' 중 하나다. 그리고 한 쌍의 남녀가 죽음 이후에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 환 '이자 '환상'이기도 하다.
또한 가톨릭은 10억 명이 넘는 공동체로서 죽은 자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것을 '공동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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