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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클레스의 칼

경제 2016. 1. 28. 09:59

- 금화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신용질서가 문란해지자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대국은 금화를 재주조하거나 화폐개혁을 통해 신용질서를 다시 세웠다. 하지만 중계무역으로 먹고살던 많은 도시국가들로서는 재주조가 선택가능한 대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국 내에서도 자신들이 만든 것보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대국에서 만든 주화가 더 많이 유통되었고 암스테르담에서만 해도 천여종이 넘는 다양한 주화가 유통되고 있었기 떼문이다. 결국 이들은 재주조가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금화의 불신을 해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의 탄생을 불러왔다.
- 암스테르담은행은 예금부서와 대출부서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었지만 사실 대출은 귀족이나 동인도회사 등에 한해 매우 제한적으로 제공했을 뿐, 사실상 결제 편의를 제공하는 은행이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금괴나 금화는 물론 훼손된 금화까지 정부 조폐소가 화페단위인 길더로 평가한 금액만큼 고객의 계좌에 넣어주고 이 예금(이를 훗날 등장하는 은행권에 대비해 은행돈이라고 불렀다)을 결제에 활용하도록 했다. 특히 정부는 600길더가 넘는 환어음의 경우 반드시 암스테르담은행의 예금으로 결제하도록 하여 측면에서 지원. 암스테르담은행은 은행돈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일한 금액에 해당하는 금화 등 현물 화폐를 보유했고, 이로써 암스테르담 은행의 은행돈은 공신력을 얻어 1795년 문을 닫을 때까지 네덜란드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널리 활용됨. 애덤스미스도 저서 국부론에서 암스테르담 은행의 성공사례를 극찬한 바 있다. 은행의 예금은 프리미엄이 붙어 금화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고, 은행은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각종 명목의 수수료를 징수하면서 높은 수익을 올렸다.
- 1634년 네덜란드는 최초의 금융공황으로 알려진 튤립 광풍에 빠져들었지만 암스테르담 은행은 이 위기를 차분하게 넘길 수 있었다. 이는 암스테르담 은행이 동인도 회사 등 지극히 특권적인 소수 집단과만 거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튤립 버블의 여파가 알려진 것만큼 심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
- 1841년 영국 언론인 찰스 맥케이는 대중의 미망과 광기라는 책에서 튤립 구근의 가격이 비이성적으로 상승해 네덜란드 전역을 투기 열풍으로 들끓게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하면서 경제공황이 왔다고 묘사함으로써 이 사건을 투기광풍의 역사의 첫 페이지에 위치시켰다. 하지만 후세 연구에 의하면 맥케이가 묘사한 튤립 버블은 대부분 허구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즉, 당시나 지금이나 희귀한 구근의 가격은 높으며 희귀한 튤립 구근은 오늘날에도 수집가들 사이에서 그 정도 가격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특히한 백합 구근의 가격 역시 50만불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짐. 또한 투기에 참여했다 손해를 봤다 하더라도 도망가면 그만일 정도로 법 집행력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파산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아울러 투기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제한된 소수였기 때문에 튤립 버블로 네덜란드가 경제공황에 휩싸였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님. 따라서 네덜란드에 닥친 진정한 위기는 튤립 광풍이 아니라 1763년 위기로 볼 수 있다.
- 18세기에 들어 상업은행이 크게 늘어나면서 금융업은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 그러나 잦은 전쟁과 취약한 금융시스템으로 인해 금융위기도 잦아짐. 특히 금융발전을 이끈 영국, 프랑스, 미국을 중심으로 금융위기는 계속해서 대형화됨. 뉴턴의 재주조 이후 은화의 유통이 중지되면서 실질적으로 1717년 금본위제를 시작한 영국은 1차대전 이전까지 국제금융의 중심축 역할을 함. 전비마련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로 1694년에 설립된 영란은행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모델이 되었고, 1844년 제정된 은행법은 초기 상업은행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후 영국의 금융시스템은 많은 나라에 이식되었고 특히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설립에도 영향을 미침.
- 프랑스의 경우 초기 존 로의 거대한 금융실험이 실패하면서 금융과 맺은 악연이 프랑스 혁명을 넘어 근대 산업자본 형성 부진으로까지 이어짐. 신생국 미국은 금융의 역사뿐 아니라 금융위기의 역사도 영국 못지 않게 길다. 중앙은행은 건국 초기 두번의 시도가 실패하면서 1913년에야 설립되었지만, 상업은행의 역사는 오히려 영국보다도 앞선다. 1782년 북미은행이 설립되었으며 매사추세츠은행, 뉴욕은행 등도 독립이전부터 영업을 시작. 흥미롭게도 이렇게 은행제도가 일찍 들어섰음에도 은행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중앙은행의 설립마저 어려울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또한 은행에 대한 규제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 금융위기가 빈발했다. 독립전쟁 당시 불환지폐 컨티넨탈로 인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영국 자본이 대거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위기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미국의 잦은 위기는 외부적 요인보다 구조적 취약성에 기인한 경우가 더 많았다.
- 초기 영국 금융은 금세공업자 은행가들의 무대였음. 기초적 금융행위인 예금수취, 대출, 환전을 제외하면 금을 보관하는 대신 증서를 내주는 일종의 금고업자에 불과했지만 의외의 사건이 이들을 은행가로 변신시킴. 전통적으로 영국 상인들은 금화를 주로 런던타워에 위치한 조폐소에 예치해 왔는데 1638년 자금사정이 어려워진 찰스 1세가 조폐소에 보관되어 있던 약 20만 파운드의 금화를 독단적으로 압류. 상인들이 찰스 1세에게 4만 파운드를 대출해주기로 하면서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불안감을 느낀 상인들은 이후 조폐소를 피하고 금세공업자에게 금화를 맡기기 시작. 금세공업자 은행가들이 금 예치증서를 내주고 금을 보관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금화손상에 따른 거래 불편도 해소됨. 하지만 사람들이 거래의 편의를 위해 금화대신 예치증서를 더 많이 활용하고 금은 찾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금세공업자들은 대출수단으로 예치증서를 추가로 발행. 즉, 신용을 창출하면서 금고업자에서 은행가로 변신한 것. 또한 발행된 증서가 실제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증서보다 많아지면서 부분지급준비제도도 만들어짐. 금세공업자 은행가들은 이로써 대출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특히 고리대금 금지로 이자를 5~6%밖에 받을 수 없었지만 왕실과의 거래에서는 예외적으로 높은 이자를 받아 수익을 늘림
- 로스차일드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세계적인 상업은행으로 자리잡고 있던 베어링사는 영국이 세계적인 무역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황제, 왕, 귀족, 대사들과의 거래를 통해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사실상 초창기 상업은행의 역사는 베어링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베어링사는 세기적인 거래를 수없이 성사시켰으며 때로는 막후에서 한 왕조의 흥망을 좌우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루이 14세의 재상이었던 리슐리외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와 함께 유럽 6강의 하나로 베어링사를 거론하기도 했다. 무역상으로 출발한 베어링사는 투자은행업에 진출해서 무역금융을 취급했고 공사채 증권인수 및 보험업으로 업무영역을 확대. 사실 베어링사는 신생국 미국의 가능성에 투자한 최초의 상업은행이었따. 1783년 프랜시스 베어링은 미국의 경제금융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던 필라델피아에 사무실을 열고 로버트 모리스, 윌리엄 빙엄 등 당시 미국 금융을 지배하던 금융가들의 모임인 소위 필라델피아 모임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생국 미국의 부족한 재원을 지원. 이후 베어링사는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이는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
- 영국이 금융위기로부터 배운 교훈. 베어링사의 위기 이후 영국의 금융시장은 안정적 성장을 이어갔다. 이렇게 시장이 안정된 데는 달라진 은행산업 구조가 크게 기여했다. 즉, 1825년 위기 이후 영란은행의 독점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조인트스탁 은행들이 대거 등장하여 소규모 은행들이 난립하던 은행사업의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고, 1858년 마침내 조인트스탁 은행들에도 유한책임이 허용되면서 중앙, 지점구조가 정착됨. 1836년 조인트스탁 은행이 61개였고 전국적으로 약 472개의 지점이 있었은나, 1870년에는 무려 111개 은행이 1127개의 지점을 두고 영업. 이 과정에서 위기에 취약한 소규모 은행들은 사라지고 대형은행들은 영란은행과 거래관계를 맺으면서 금융시스템이 한층 안정되었던 것이다.
- 영국은 이후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은행위기가 적었으며 특히 다른 나라들이 심각한 위기를 겪었던 20년대 초와 대공황 당시에도 안정된 모습을 취함. 1800년대에 10년 주기로 수많은 위기를 겪었던 영국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향후 각국의 위기대응에 큰 영향을 미친 두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우게 된다. 먼저 배젓 법칙으로 알려진 최종대부자 기능으로, 위기시 중앙은행이 유동성 위깅 처했지만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금융회사에 양질의 담보를 잡고 벌칙성 높은 금리를 부과하면서 무제한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관행이 정립됨. 또 하나의 위기대응 방안은 중앙은행이 경우에 따라서는 위기대응 부담을 다른 은행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1890년 베어링사 사태 해결을 위해 영란은행은 시중은행들이 위기극복을 위한 상호보증기금을 모으는 데 동참하도록 강력히 요청. 즉, 위기극복 과정에서 영란은행이 허리띠를 제공하고 다른 은행들은 어깨띠를 담당했던 것이다. 배젓 법칙과 상호보증기금은 향후 전 세계의 금융위기 극복과정에 단골로 등장한다. 한편 해협 너머의 프랑스와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금융위기가 위세를 더하기 시작했다.
- 적어도 18세기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들의 눈에 영국정부와 프랑스 정부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물론 영국이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재정에 관한 국왕의 자의적 권한을 줄이고 의회의 통제를 강화하는 근대적인 재정금융 체제를 갖춘 데 반해 프랑스는 여전히 국왕의 자의적이고 방만한 재정운영과 비효율적인 조세체계 그리고 재정집행의 불투명성으로 여전히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적어도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 독립전정과 이어진 프랑스 혁명이 양국의 운명을 완전히 갈랐다. 18세기 말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프랑스의 재정상황은 크게 악화되었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연결되었다. 설상가낫으로 혁명정부의 잦는 채무 불이행과 아시냐로 인한 초인플레이션 사태가 계속되면서 재정운영의 준칙이 무너졌다. 이로써 근근이 유지되던 투자자의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혁명정부가 이렇듯 심각하게 재정난을 겪은 이유는 두가지다. 즉, 구체제의 조세 시스템을 폐지한 상태에서 새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조세 체계가 무너진 데다,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 및 외부세력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재정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온갖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했기 때문. 이로 인해 나폴레옹 정부가 들어선 1800년에 와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재정운영에 확연한 차이가 났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면서 막대한 전쟁비용을 증세에 의존하지 않고 대부분 영란은행의 차입금 등 다양한 인플레이션성 단기자금으로 조달했다. 이 때문에 1797년부터 1821년까지 상당히 오랜기간 금 태환을 중단하는 금본위제의 일시정지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 전쟁으로 국가부채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지만 투자자나 채권자들은 전쟁이 끝나면 영국 정부가 이를 상환하고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하여 건전재정의 기조로 돌아갈 거싱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돈을 차입했음에도 영국의 조달금리는 크게 오르지 않았고 재원조달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따.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징세시스템은 잘 작동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1786년 일부 간접세를 특정해서 부채상환을 위한 싱킹펀드까지 설립하자 영국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영국정부는 전시에는 차입에 의존하고 평시에 이를 조세수입의 잉여 또는 약간의 증세를 통해 갚아나가는 세부담의 분산을 추진하면서 위기상황을 극복
- 흥미로운 점은 영국은 금태환을 중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통화가치가 큰 변화없이 유지된 반면 프랑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는 것. 교회에서 몰수한 땅 등 자산을 담보로 발행한 지폐인 아시냐마저 신뢰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여 계속 할인된 가치로 거래되고 있었음. 이후 발행량이 크게 늘면서 가치가 교회 재산으로 충분히 뒷받침 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자 아시냐는 곧바로 폭락하여 초인플레이션을 이끌었음. 이런 차이는 영국의 경우 비록 현재 금태환을 하지 못하더라도 장래에는 가치를 그대로 인정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반면, 프랑스의 경우에는 장래에 어떻게 처리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 이로 인해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금화 등 경화에 의존하는 금융시스템을 유지했고 이러한 경향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금본위제에 대한 유별난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음. 하지만 경화에 크게 의존하는 시스템은 프랑스가 다른 열강에 비해 산업혁명과 근대화에 늦어지는 이유가 됨. 프랑스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방만하고 불투명한 재정운영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큰 차이없이 채권자의 신뢰를 유지했지만 일단 이를 잃고 난 뒤에는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 캐나다 경제는 미국 금융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 먼저 주목할 것은 영국의 식민지배를 똑같이 거치면서 모든 제도와 문화가 유사했지만 특이하게도 은행산업 구조만은 정반대였다는 점. 캐나다 은행산업은 전국적인 지점망을 가진 소수의 대형은행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넓은 국토 면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불리함을 극복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있다. 정부는 이들 은행이 누리는 독점적 이익을 규제로 통제한다. 캐나다 은행들은 5년마다 의회의 재심을 통해 인가를 연장받고 있어 은행들고 과도한 이익을 내는 것을 자제한다. 즉, "적당히 살씬 돼지는 계속 살아남지만 과도하게 무게가 나가는 돼지는 도축당한다.(pigs get fat, hogs get slaughtered)"라는 격언을 명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지역기반이 확실한 수많은 단위은행이 경쟁하는 구조. 1900년에 이미 인구 100만명당 약 170개의 은행이 있었을 정도. 같은 시기를 비교해 보면 덴마크에는 34개, 호주와 캐나다에는 5~6개, 독일에는 3~4개, 심지어 영국에는 겨우 2개의 은행이 존재했따. 소규모 단위은행의 난립은 수많은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좁은 지역을 영업기반으로 하는 단위은행은 지역경제의 부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데다 위험을 분산하기 어려운 구조적 취약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은행산업 구조는 적어도 1990년대까지 계속됨
- 남북전쟁 이후 뉴욕에서는 신탁회사들이 급성장하면서 1907년에는 이들의 자산규모가 뉴욕 전체 은행의 자산규모와 비슷한 수준에 이름. 은행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은행과 유사한 자금중개 기능을 수행하지만 감독당국의 규제에 벗어나 있는 소위 그림자 금융에 해당. 신탁회사들은 은행에 비해 높은 금리를 제공했고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채권, 주식 등 위험투자를 확대. 문제는 예금의 25%르르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했던 은행과 달리 신탁회사들의 준비금은 5%에 불과했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지급불능상태에 빠졌다는 것. 고객들의 인출요청이 쇄도하자 신탁회사들은 자산을 급매도하기 시작했고 주식 및 채권급락으로 다른 은행들의 건전성까지 위협하는 전형적인 부채 디플레이션 상황이 연출됨. 10월 22일, 니커보커가 파산하자 이제 위기는 금융공황으로 발전. 그러나 이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해결한 만한 수단은 없었다. 뉴욕의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를 여행중이던 JP모건은 급히 뉴욕으로 돌아와 벤저민 스트롱 등 측근을 모아 위기대응방안을 모색.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도 재무장관을 뉴욕으로 보내 모건을 측면에서 지원. 모건은 니커보커의 재무상황을 조사하는 한편, 주요 금융회사 대표들을 자신의 집으로 소집. 조사를 통해 이미 니커보커의 손실이 커서 구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 위기가 트러스트 컴퍼니오브아메리카 등 다른 신탁회사로 옮겨 붙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지원자금을 모집하기 시작. 모건 자신이 300만불을 내고 다른 은행들이 800만불, 재무부가 2500만불 그리고 록펠러가 1000만불을 냈다. 모건은 이 돈을 위기를 겪고 있는 은행과 신타고히사에 투입. 동시에 은행들이 신탁회사들과 거래를 계속 유지하도록 설득. 하지만 예금자들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고 예금인출이 계속되면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짐. 1907년 11월 2일 모건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뉴욕의 대표적 금융인 50여명을 자신의 서재에 모이게 함. 그러고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내라고 강요하면서 실제로 문을 잠가버림. 결국 새벽 4시 45분에 긴급자금 2500만불이 마련되고 이 돈은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이 서재사건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공동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곧잘 등장하는 정부나 중앙은행의 강압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됨.
- 모건에 의해 뉴욕 금융공황은 진정되었지만 뉴욕발 위기는 이미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동요한 예금자들이 전국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도처에서 뱅크런이 발생.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주정부들이 나서서 은행 휴업을 선언. 그러나 은행 휴업조치는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 국민총생산은 무려 11% 급락했고, 실업률은 2배나 뛰었다.
- 1차대전은 과거의 그 어느 전쟁보다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 독일과 오스만제국은 패전국이 되었지만 이러한 구별은 무의미했다.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 전쟁 이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엄청난 곤경에 처함. 전쟁은 과거보다 훨씬 파괴적이고 참혹했기 때문에 모두가 상상을 뛰어넘는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었다. 사망한 군임낭 약 850만명이 넘었는데 이는 이전 100년간의 모든 전쟁에서 사망한 약 560만 명보다 많은 수였다. 민간인의 희생은 더 커서 대략 500만명에서 10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물적 피해 역시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자료에 의하면 직접비용과 간접비용을 합쳐 약 3380억 불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 전쟁 4년간 미국 GDP의 약 1.5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 1차대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음. 무엇보다 전쟁이전 세계경제를 이끌던 영국이 쇠퇴하고 전쟁 중 대규모 금을 보유하게 된 미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축으로 부상. 하지만 전쟁이후 영국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해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계속한 반면 미국은 세계경제의 리더가 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금본위제 복귀를 무리하게 시도했고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압력을 가함.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들은 미국에 진 빚을 독일의 전쟁배상금으로 해결하고자 했따. 만일 미국이 리더의 역할을 받아들여 세계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고 문제를 파악했더라면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이후 고립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대응. 자신이 제안한 국제연맹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전시채권을 탕감해주지도 않음. 당시 미국은 국내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세계경제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 킨들버거는 이렇게 1차대전 이후 경제적 리더십의 부재, 즉 경제적 헤게모니 국가의 부재를 훗날 대공황의 심화원인으로 보고 있다.
- 국제경제 통화 시스템에는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는 내부화된 규칙을 가지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른 나라의 행동기준을 설정한다. 리더는 규칙을 지키게 하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큰 부담을 떠안으며, 특히 어려울 때는 잉여물품을 사들이고 국제적 투자자본을 공급하고 어음할인 등을 통해 시스템을 뒷받침한다. 세계공황이 장기간 지속된 이유는, 그리고 그 심각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영국이 국제경제 통화 시스템의 보증역할을 계속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1936년까지 그러한 역할을 떠맡기를 망설였다는 것이다.
- 그동안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대공황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공황을 실물부문의 충격이 가져온 거시경제적 결과로 인식. 엄청난 수의 은행이 파산하여 예금주와 경영자들이 손실을 보았지만 은행이 대공황을 야기한 원인과 관련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소위 청산주의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20년대 연준이 과도하게 통화를 풀어 과잉투자, 과잉생산, 과다차입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자원배분이 왜곡되어 불황이 초래되었다고 주장. 때문에 이러한 잘못이 해소되는 과정으로서의 불황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필연적이라고 주장. 하지만 경제학자 어빙피셔는 이런 전통적 견해를 반박. 그는 은행이 파산하면서 통화공급이 축소된 것이 대공황의 원인이라고 주장. 피셔는 부채 디플레이션이론을 통해 왜 경제주체들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노력했음에도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경제전체가 대공황으로 끌려 들어갔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잉 투자와 과잉투기는 종종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빌린 돈으로 투자와 투기를 했을 경우 야기되는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빚을 청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빚을 줄이려는 개개인의 노력이 오히려 상환부담을 키우기 때문이다. 즉, 빚을 줄일수록 빚 부담이 더 커지는 것이다. 경제라는 배는 한번 기울면 더 많이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피셔는 호황기에 은행들이 대출을 늘리고 가계와 기업들은 빚을 늘리면서 보다 위험한 투자에 나서는 행태에 주목. 이후 경제가 정점을 지나 불황에 진입하면 무리하게 행한 투잔 부도를 맞기 시작. 가계와 기업들은 빚을 상환하기 위해 부실자산을 헐값에 매각하게 됨. 은행역시 부도로 회수하지 못한 손실에 더해 보유자산의 헐값처분이라는 이중손실에 직면. 헐값처분이 가져온 전반적인 자산가격 하락은 물가를 하락시키고 실질금리를 올리면서 추가적 부실을 불러옴. 또다시 가계와 기업들은 부도를 맞고 헐값에 자산을 처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짐. 이 상황에서 개인이나 기업은 부채규모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피셔의 설명대로 전반적 물가하락으로 부채부담이 더욱 커지는 소위 구성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면서 물가는 계속 낮아지고 이로 인해 30년대 공황이 진행되었다는 것이 피셔의 설명이다.
- 인간의 비이성적 행태를 포함한 보다 체계적인 금융위기 전개과정연구가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에 의해 시도됨. 96년 발표한 불아넝한 경제 안정시키기에서 민스키는 부채 디플레이션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가 호조를 보일 때 은행, 기업, 개인 등 모든 경제주체가 신용팽창에 뛰어드는 소위 신용의 경제순응성이 모든 금융불안의 시작이며, 모든 위기의 배후라고 주장. 호황기에는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에 휩쓸려 투자를 늘리고 위험에도 주저없이 투자하기 때문에 경제내에 신용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경제가 비관적일 때는 모두가 몸을 움츠려 신용을 급속도로 축소시킴으로써 위기를 증폭시킨다는 것. 이는 주류 경제학자의 의견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주류학자들은 낮은 실업률, 낮은 물가, 금융시장의 안정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민스키는 지나친 안정은 낙관론을 불러와 과도한 위험을 추구하게 하고 이를 통해 더 심각한 물안정이 야기된다고 주장. 민스키는 모든 위기는 경제적 변위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변위란 사람들이 장밋빛 환상을 가지면서 그동안 유지했던 신중한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단계를 말함. 사람들은 이런 태도변화의 구실을 다양한데서 찾고 이를 스스로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장기불황을 불러온 아시아의 기적, 아시아의 호랑이들, 그리고 08년 미국 위기를 키운 신경제, 대안정기 등은 경제적 변위를 야기한 잘못된 믿음이었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경제적 변위를, 심리적 요인이든, 지하자원의 발견과 같은 물질적 요인이든, 기술혁신 같은 지적요인이든 경제주체들이 미래를 낙관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라고 설명. 경제가 변위단계에 오르면 곧바로 신용팽창이 가속화되는 환호의 단계에 진입. 예를 들어 단순히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주가가 오르고 올라간 주가가 더 많은 사람을 주식시장으로 불러 모으는 단계이다. 이를 소위 양의 피드백 현상이라고 함. 퍼거슨은 환호의 단계를 과도한 거래라고 설명. 기대수익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구실을 찾아나섬. 그러면서 이번에는 과거와 다르다는 근거없는 착각이 넘쳐남. 금융위기는 바보같은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일뿐 똑똑한 우리에게는 위기가 닥칠일 없다는 근거없는 믿음에 더해 현재의 호황은 대폭락 사태를 가져왔던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확신이 자리잡는 것이다. 라인하르트와 로고프는 이번에는 다르다는 이 말이 역사적으로 전쟁보다 더 많은 돈을 날리게 했다고 꼬집었다.
-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혼란은 사실 브레튼우즈 체제와 더불어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로버트 트리핀은 세계경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기축통화에 대한 수요는 커지고 결국 달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금의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금으로 태환가능하지 않은 달러가 풀릴 경우 이는 거꾸로 기축통화인 달러가 더이상 안전자산이 아니게 되는 모순적 상황을 야기한다고 주장. 이를 트리핀의 딜레마라 부르는데 50~60년대 국제시장에서 달라거 바로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었다.
- 달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미국의 국제수지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달러가치가 떨어지면서 다른 나라들이 달러 보유고를 늘리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 되었다. 달러는 더 이상 안전자산이 아니었다. 각국은 달러를 버리고 금으로 갈아타기 시작. 특히 68년 이후 물가상승 우려가 제기되자 연준 의장 마틴이 금리를 올려 통화량을 조이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시장에서 유통되는 달러가줄어들자 국제사회는 심각한 유동성 부족에 처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달러를 보완하는 특별인출권을 만들어냄. SDR은 브레튼우즈 협상당시 케인스가 제안한 방코르와 유사한 개념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화폐가 아니라 계산의 단위로 활용되도록 설계됨. SDR은 70년초 각 회원국에 쿼터에 따라 최초로 배정되었지만 브레튼우즈가 직면한 국제 유동성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각국이 변동환율제로 이행하면서 사실상 사장됨. 미국은 달러에 대한 불신을 잠재우고 브레튼우즈 체제를 지키기 위해 민간금시장과 중앙은행 금시장을 분리하고, 아울러 각국의 중앙은행이 달러를 금으로 바꾸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SDR까지 만들었지만 이런 대응은 결국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응급조치에 불과했다. 결국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의 수순을 피하지 못했다.
- 그린스펀은 87년 연준의장에 취임했는데 시장은 의외로 빠른 시간에 그를 시험대에 올렸다. 취임 2달만에 29년 대공황에 버금갈 만한 주가 대폭락 사태가 터진 것. 볼커의 강력한 물가억제 정책이 성공하면서 경제가 비교적 순항하고 있었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경상수지 적자와 동시에 재정수지 적자가 나타나는 소위 쌍둥이 적자로 인해 시장 불안은 나날이 높아짐.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약 7000만불에 불과하던 정부부채는 88년 약 2도달러에 달할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고 일본과 독일이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시장을 공략하면서 경상수지 적자폭도 눈덩이처럼 불어남. 불어나는 쌍둥이 적자에 볼커의 반인플레이션 정책으로 안정세를 보이던 물가가 흔들리면서 6%대까지 치솟자 투자자들의 불안이 커졌다.
- 87년 10월 들어 다소 흔들리던 주가는 10월 16일 약 100포인트 정도 밀리면서 위기조짐을 보이더니 10월 19일 월요일 단 하루만에 508포인트(22.6%)나 빠졌다. 바로 검은 월요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는 미국 역사장 최대의 폭락으로 508포인트는 29년 대공황의 시발을 알리는 검은 금요일의 폭락을 2배나 능가하는 규모. 개장과 동시에 주식시장의 팔자주문이 쏟아지면서 거래 시스템이 중지되었고 순식간에 금융시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강의를 위해 텍사스 주 댈러스를 방문중이던 그린스펀은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군용기편으로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와 상황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 그린스펀은 "연준은 중앙은행의 책임인 경제와 금융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수십억 불의 재무성 채권을 사들여 시장에 막대한 자금을 풀었고 동시에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은행들의 정상영업을 독려하면서 위기가 실물경제로 번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차단.
-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 제럴드 코리건은 "은행에 대출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황을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기억은 오래간다. 위기 때문에 은행이 고객을 상대하지 않는다면 고객은 이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서 은행에 대출을 회수하지 말라고 위협. 이같은 과감한 선제적 대응은 시장의 동요를 잠재우는 데 크게 기여. 추가적으로 금리인하가 뒤따르자 당초 우려한 대공황 같은 경제위기로 확대되지 않고 경제에 큰 악영향을 주지도 않은 채 위기는 잦아들었다. 10.19 폭락사태는 오히려 새로 취임한 그린스펀이 조기에 시장의 신뢰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신흥국 위기 유형은 선진국과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대응전략도 차별화되어야 함. 신흥국의 경우 선진국과 달리 사적인 채무계약이 통상 단기인 것이 일반적이고 국제시장에서 조달하는 자금도 자국통화보다는 달러 등 외화표시채권이 대부분. 이런 특징으로 인해 신흥국의 외환위기는 대부분 금융위기 또는 은행위기로 연결됨. 만일 신흥국의 환율이 예기치 않게 급변할 경우 외화 부채의 부담이 순식간에 크게 증가하는 위험에 처하는 것. 97년 한국이 경험했듯이 외화부채는 커지고 국내통화로 대출되거나 투자된 자산은 거꾸로 폭락하게 되는데 이 경우 은행의 BIS비율이 급격히 하락하므로 자본을 늘리거나 자산을 줄여 다시 BIS자본비율을 높여야 하는 소위 적기시정조치의 대상이 됨. 문제는 위기시 은행이 신규자금을 조달하여 자본을 확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따라서 은행은 자산을 줄이는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이는 대출회수를 의미. 은행이 대출회수에 나서면 기업이 무너지면서 경제전반으로 위기가 확산됨. 은행뿐 아니라 단기외채를 조달해 투자한 기업들 역시 환율의 급변동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됨. 이런 특징으로 인해 신흥국의 금융위기에서는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 등 유동성 지원 대신 재정을 통해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지급보증, 국유화 등이 많이 활용됨. 만일 신흥국의 금융위기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최종 대부자 기능을 수행하느로 무한정 돈을 찍어 위기에 빠진 은행을 구제한다면 오히려 자국의 통화가치를 더욱 폭락시켜 위기를 한층 심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 멕시코 위기는 이후 연달아 터진 아시아 외환위기의 극복전략에 많은 교훈을 주었다. 하지만 아시아 위기당시 지원에 나선 미국과 IMF는 지원의 전제조건을 멕시코에 요구했던 것과 같은 재정긴축과 이자율 인상을 아시아 국가에 요구했는데 이를 두고 상당한 반대의견에 직면한다
- 이번에는 다르다는 잘못된 믿음은 금융혁신이라는 믿음으로 포장된 신금융 기법, 신금융상품 등에 힘입어 금융회사들과 개인들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위험부담행위를 계속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대공황에 대한 망각, 그리고 잇단 위기 극복과 안정적 성장이 가져온 자만은 위기를 불러올 취약점이 이면에서 자라고 있음을 간과하고, 나아가 합리적 경고마저도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미 대형 위기를 초래할 조건들이 차곡차곡 갖추어지고 있었다. 금융위기의 역사를 오랫동안 관찰한 갤브레이스는 "금융천재는 몰락직전에 나타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바로 그린스펀이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 그린스펀은 중앙은행이 개입하여 버블을 끄기 보다는 버블이 터진 이후 개입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편을 선호했는데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옹호했다. 먼저 중앙은행은 자산시장의 버블방지보다 물가안정에 집중해야 하고, 둘째로 아무도 자산시장의 상태가 버블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할 수없기 때문에 섣불리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것. 그린스펀은 시장가격은 항상 자산의 진정한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효율적 시장가설을 신봉했으며 자산가치의 변동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새로운 정보에 반응한 결과이기 때문에 설사 가격이 높아지더라도 이는 정당한 가격이며 따라서 버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린스펀이 사전개입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버즐을 제압할 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현실적 고려도 작용했다. 유진 파마가 주장하는 효율적 시장가설과 같은 논리. 그린스펀은 금리정책은 문제가 되는 특정 부위만 도려내는 수술용 칼이 아니라 경제 전반에 무차별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해머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는 것은 경제에 부담만 주고 주식시장의 과열을 잡는데도 효과적이지 않다고 주장. 즉, 닭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수 없다는 것이다. 또 소폭의 금리인상으로는 버블을 잡을 수 없고, 그렇다고 금리를 대폭 인상하면 경제전체를 불황에 빠뜨릴 위험이 있어 함부로 쓸 수 없다고도 했다. 역사적으로도 1920년대 독일의 중앙은행 총재였던 샤흐트의 개입실패와, 주식시장의 과열을 잡으려다 대공황 발생에 일조했던 연준의 금리인상 경험이 그린스펀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따라서 그린스펀은 설사 버블로 의심되더라도 터지도록 놔두고 뒷수습하는 정책을 선호했는데 이를 시장에서는 그린스펀 풋이라고 불렀다. 버블이 터지면서 주가각 추락하고 금융시장에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연준이 어김없이 개입하여 정책금리를 인하하고 유동성을 풀어 지원한 그린스펀의 정책이 마치 투자자들이 주가하락에 따른 손실을 방어하기 위해 구입한 풋옵션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런 연준의 입장은 많은 비판을 불렀다. 중앙은행 통화신용정책의 주요 목표가 물가안정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금융시장의 안정도 결코 가볍지 않은 과제이기 때문에 금융불안을 야기할 만한 주가나 주택가격의 변동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것. 20년대와 90년대 미국 주식시장 버블과 일본의 80년대 주식시장 버블도 물가가 안정된 상황에서 발생했지만 한결같이 붕괴 이후 실물경제의 동반추락을 가져왔기 때문에 버블이 생성되지 않도록 중앙은행의 감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버블 진행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주장 역시 급격한 신용팽창 등 여러 징후를 종합하여 감지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했다. 무엇보다 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린스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 버블이 터졌지만 중앙은행이 수습하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 버냉키는 일본이 장기불황에 빠진 이유로 먼저 87년에서 89년 사이에 자산가격의 과도한 상승을 막는 금융긴축을 시행하지 않은 점, 둘째로 89년에서 91년 사이에 주식시장의 버블이 커졌는데도 이에 과감하게 대처하지 않고 미온적으로 대응한 점, 마지막으로 91년에서 94년 사이 주식 등 자산가격이 급락하면서 은행들의 부실이 증가할 때 적극적인 금융완화 정책을 통해 돈을 풀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 이러한 정책적 실수에 더해 일본 지도자의 우유부단함도 지적. 버냉키는 30년대 미국 루즈벨트나 일본 다카하시 고레키요 같은 과단성 있는 지도자만이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99년 버몬트의 우드스탁 컨퍼런스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일본은행을 다음과 같이 비판. '극심한 정책실패가 대공황을 초래했다. 오늘날 일본의 정책 당국자의 발언을 보면 소름 끼치게도 30년대가 연상된다. 공격적인 통화 팽창 정책이 일본의 물가수준을 올리고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중앙은행이 어떠한 이유인지 몰라도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단기적으로 더 이상 해볼 여지가 없다. 이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가져온 폐해다'
- 버냉키는 심지어 디플레이션을 막는 정책적 수단이 있어도 막지 못하는 이유로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지도자를 없애는 입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일본의 정책 당국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제로 금리와 사전고지라는 전례없는 금융완화 정책을 추진하고도 경제를 불황에서 끌어내지 못한 정책 결정자들에게 스스로 위안하지 말고 검증되지 않은 정책까지도 시도하라고 촉구. 당시 버냉키는 일본은행이 사전고지로 제시한 '디플레이션의 우려가 사라질 때까지'라는 막연한 목표에서 한 발 더나아가 구체적 목표물가를 제시하고 일본은행과 재무부가 동시에 개입해야만 엔화가치를 끌어내릴 수 있다고 주장. 즉, 금리가 제로 바운드라고 해서 중앙은행이 실탄을 다 소진한 것이 아니라 단기금리를 제로로 상당기간 유지하겠다고 명확히 밝히거나 또는 목표하는 장기이자율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돈을 찍어내 장기채권을 매입해야만 경제를 불황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 한마이로 디플레이션에 빠져 있을 경우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때까지 헬리콥터를 띄워 돈을 뿌리라는 것.
- 돌이켜보면 08년 대형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져온 주범인 모기지 시장의 부실은 경제학자 민스키가 주장했던 금융의 부실화가 금융위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 민스키는 대출의 질이 악화되는 과정을 통상 헤지차입과 투기적 차입, 그리고 폰지차입의 3단계로 구분. 헤지차입 단계에서는 금융회사가 고객의 신용상태를 살펴서 이자는 물론 원금상환능력을 모두 확인하고 대출을 하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음. 하지만 투기적 차입단게에서는 고객이 이자만 상환할 수 있으면 대출이 일어남. 즉 원금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 자산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원금을 떼일 것을 걱정하지 않음. 따라서 이자위주의 대출이 가능해짐. 이 단계가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가면 극단적 위험대출이 일어나는데 이거싱 바로 폰지차입 단계임. 이제는 이자도 걱정하지 않는 대출이 일어남. 일정기간이 지나 주택가격이 오른 뒤 팔면 원금과 이자를 다 갚을 수 있는 수익이 생길 것이라는 지극히 낙관적 가정항 대출이 이루어짐
- 민스키는 폰지차입의 단계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다소 과민해지면서 스스로 너무 위험한 것이 아닌가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소위 민스키 모멘트가 나타나고, 이어서 순식간에 금융시장에 패닉이 들이닥친다고 주장. 마치 만화영화 톰과제리에서 제리를 쫓던 톰이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멈추지 못하고 절벽 위 공중에 자신이 떠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추락하는 장면에 비유되기도 하는 이 시점은 그동안 위기를 조장해 왔던 행동으로부터 모두가 탈출을 시작하는 시기를 의미
- 유로존이 출범하면서 각국은 재정정책은 자기 권한으로 그대로 둔채 통화신용 정책을 유럽중앙은행에 넘김. 만일 그리스가 자국통화를 유지하면서 유로존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위기로 자금이 이탈하면서 그리스 화폐는 폭락했을 것이다. 수출증가와 수입감소가 이어졌겠지만 몰려든 관광객 덕에 외화가 유입되면서 비록 고통은 따랐을 지언정 위기의 해결방안은 마련되었을 것. 하지만 자국 통화가 아닌 유로화를 쓰는 유로존에 가입된 그리스는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혀서는 통화가치와 같은 명목변수가 아닌 실질임금과 물가를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유로존의로의 편입이 평상시에는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지만 위기를 맞아서는 정책선택을 제약하는 갑옷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유로존에 편입된 국가들은 과거와 달리 국채가 지급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통상 독자적 통화를 가지고 있으면 국채의 지급불능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렵다. 즉, 초인플레이션이 우려되더라도 돈을 찍어 갚으면 되기 때문. 하지만 독자적 통화발행권한이 없는 유로존 국가에서는 국채의 상환불가능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를 모른채 유로존에 편입된 국가들은 국채 이자율 하락이라는 혜택을 누리게 되자 더욱 많은 국채를 발해했고 유로존의 은행들은 이들 국채에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은행위기가 재정위기가 되고 재정위기가 다시 은행위기가 되는 토대가 마련됨. 설상가상으로 유럽의 은행들은 달러표시 서브프라임모기지 채권에 대한 투자도 확대. 따라서 07년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가격이 폭락하자 대규모 투자손실을 입고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달러 자산에 대한 투자손실을 메우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으나 미국의 단기 금융시장이 거의 작동을 멈추면서 달러부족에도 시달리게 되었다는 점. 금융불안이 확산되자 연준은 유럽계 은행들의 달러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특별대출에 나섰지만 08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자 이마저도 불가능해짐. 결국 리먼의 파산은 미국은 물론 유럽의 동반 추락을 가져옴. 불황이 심화되고 실업이 증가하면서 실업수당 등 각종 사회복지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유럽국가들의 재정상황을 더욱 압박. 더욱이 유럽 각국이 위기에 빠진 은행들의 구제에 나서면서 천문학적인 재정이 동원되었고 상황은 재정위기로 악화됨
- 케인스는 한때 '긴축이 필요한 것은 불황기가 아닌 호황기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김. 하지만 그리스 위기로부터 촉발된 유로존의 위기과정에서 EC, 유럽중앙은행, IMF등이 요구한 것은 긴축이었다. 독일 정부는 남부 유럽이 위기에 빠진 것은 그들이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나태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과거 어젠다 2010을 통해 뼈아픈 개혁을 추진했던 것처럼 절약과 긴축, 그리고 구조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 이런 독일의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메르켈 총리의 스와비아 주부 비유였다. 독일 남부에 위치한 스와비아 지역의 주부들은 근검절약과 빚을 혐오하는 생활로 유명. 메르켈은 '스와비아 주부에게 물어봐라. 수입을 초과하는 생활은 계속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08년 리먼브라더스 몰락을 설명. 이러한 생각을 가진 메르켈이 그리스 위기 이후 긴축을 해법으로 선택한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위기 극복의 최선봉에 섰던 유럽중앙은행 트리셰 총재도 '긴축이 성장에 부정적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라며 긴축을 옹호. 유로존의 성장이 지체되는 것은 유럽의 높은 정부 부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 않는 데 원인이 있으므로 성장 모멘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정부부채를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 물론 이들 정책 결정자들의 생각은 그레고리 멘큐, 알베르토 알레시나, 카르멘 라인하르트와 케네스 로고프 등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이들 학자들은 차입을 줄일 경우 투자자 신뢰가 상승하고 차입금리를 낮출 수 있는 등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적 설명과 함께 실증적 연구결과들을 제시. 아울러 이율배반적인 단어의 조합인 확장적 긴축을 통해 긴축이 성장을 유도한다고 주장. 라인하르트와 로고프는 그들의 공저 이번엔 다르다에서 국가부채가 90% 선을 넘으면 성장이 둔화된다는 실증적 연구결과를 내놓아 주목을 받았고 알레시나는 재정적자를 대폭 축소할 경우 사람들이 소비와 투자를 늘리고 성장을 이끌게 된다는 긴축과 성장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제시. 이러한 주류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IMF, 유럽중앙은행, EC는 위기에 싸인 유로존 국가들의 긴축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 특히 인구 200만에 불과한 북유럽의 작은 나라 라트비아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라는 손쉬운 방안보다 강도높은 긴축을 통해 성공적으로 위기를 벗어나자 긴축 옹호론자들은 더욱 힘을 얻음. 라트비아 경제는 유럽으로부터 투기자금이 몰려들면서 2000년에서 2007년까지 9%에 가까운 성장을 했지만 08년 글로벌 위기가 닥치자 속절없이 추락. 외국인 투기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파산에 직면한 라트비아는 IMF와 EC에 도움을 요청. 흥미로운 점은 독자적 통화를 가진 라트비아가 IMF의 평가절하 권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초긴축 정책을 택함으로써 실질임금과 물가를 낮추어 경쟁력 회복을 시도한 내적 평가절하를 단행했다는 점. 강력한 긴축으로 GDP가 20% 감소했고 실업률이 6%대에서 18%대로 뛰어올랐지만 결국 성장률이 브이자를 그리며 반등하여 12년에 거의 위기를 수습하는 데 성공. 사실 라트비아가 환율의 평가절하라는 손쉬운 방법대신 긴축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은 유로존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라트비아 사례는 긴축을 밀어붙이는 정책 당국자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긴축정책이 만병통치약으로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분위기에서 폴 크루그만, 브래드포드 드롱, 로렌스 서머스 등은 경제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긴축정책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바보같은 짓이라고 비난. 이들은 경제가 지극히 위축된 상황에서는 긴축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이론적 연구를 바탕으로, 주류 측이 증거로 제시한 라트비아는 소규모 개방국이기 때문에 이를 유로존과 같은 거대 경제권에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 즉, 라트비아가 긴축을 할 당시에는 운 좋게도 때마침 교역상대국이 호황이어서 줄어든 국내수요를 수출이 뒷받침해주었지만 유로존의 경우 교역상대국인 중국 및 미국도 08년 위기 이후 불황에 빠져 있기 때문에 긴축을 보완할 수요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주장. 크루그먼은 오히려 자국 통화의 폭락과 구제가 필요한 은행들을 방치하면서 사실상 국가부도를낸 아이슬란드를 통해 배울 게 있다고 주장. 아이슬란드는 자국통화의 폭락은 방치하면서도 사회보장은 그대로 유지하며 긴축을 거부했지만 11년 8월에 위기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남. 크루그먼은 "모두가 이쪽으로 가야한다고 했을 때 아이슬란드는 반대쪽으로 갔다"고 말하면서 긴축과 은행구제를 거부한 아이슬란드의 정책 선택을 칭찬. 서머스도 장기불황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보다 적극적인 재정금융 정책을 통해 디플레이션 위협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 여기에 더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오른 21세기 자본론의 저자 토머스 피케티도 현 유럽위기를 해소하는 방안 중 긴축을 최악의 선택으로 비판하면서 긴축을 옹호하던 많은 정책결정자들을 당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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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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