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는 어떻게 창조되었나? 물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생명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보편적 질문 대신 "돌은 어 떻게 낙하하는가? 관 속에서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피는 혈관 속 에서 어떻게 순환하는가?" 같은 제한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때 를 현대 과학의 출발점으로 잡을 수 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자 경이로운 결과가 나왔다. 보편적 질문은 제한적 답으로 이어졌던 반면, 제한적 질문은 오히려 점점 더 보편적인 답을 내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수아 자코브, 1977년)

- <의존하는 유전자》를 쓰던 1990년대 말에 나는 아버지와 발달의 본질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처음에 이 문제에 흥미를 느낀 이유는 본인이 의사이기 때문이었지만, 이후에도 동 시대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질문에 꾸준히 관심을 기 울였다. 하지만 내가 '후성유전epigenesis'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그 용어가 어쩐지 못마땅하다 고 하셨다. 'epi'라는 접두사가 그리스어로 '위에', '겉에', '위쪽에' 라는 뜻임을 알고 있는데, 유전자 '위에 뭔가가 있다는 개념을 납득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나는 유전자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는 발달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그 러니까 은유적 의미에서 유전자 위에 어떤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포착한 단어라고 응수했다. 과학자들이 후성유전 에 관해 이런 식으로 말할 때는, 한 유기체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비유전적 요인들, 예컨대 호르몬이나 동물이 살아가는 사회적 맥 락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의사인 아버지는 이런 은유적 설명을 부적절하게 여겼고, '후성유전적epigenetic'이라는 단 어를 쓰려면 그건 물리적으로 유전자 위에 존재하는 것만을 지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당시 후성유전에 관한 나의 이해 는 잘 봐주어도 어렴풋한 수준이었으니, 아버지에게 이 이론을 납 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그로부터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후성유전학은 생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했고, 후성 유전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은 종양학, 영양학, 심리학, 철학 등 여 러 다양한 학문 분야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의 DNA 위 에 있는 혹은 DNA에 달라붙은 뭔가(이를 '후성유전적 표지'라 부른 다)가 실제로 존재하며, 이들이 DNA가 기능하는 방식에 결정적 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이유로 후성유전 과정은 우 리의 거의 모든 특징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은 과학자들이 후성유 전적 표지에 관해 알아야 할 사실들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단계지 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확실히 획기적이다. 경험(그리 고 우리가 처한 환경 속 여러 상황)이 일부 후성유전적 표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일란성 쌍둥이 사이의 차이, 식생활이 건강에 미 치는 영향, 어머니의 행동이 성인이 된 자녀의 스트레스 상태에 미 치는 영향 등 아주 다양한 것들을 후성유전적 표지로 설명할 수 있 다. 후성유전학의 이런 발견들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뿌리째 뒤흔 드는 데 일조했다. 요컨대 후성유전적 사건들은 DNA와 환경의 접 점에서 발생하므로 이를 알면 우리의 특징들이 언제나 본성과 양 육 두 가지 모두의 결과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식민지 주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 두가지 모두가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 지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했던 것처럼.
- DNA와 표현형의 관계
BRCA1에 관한 연구 결과를 집중적으로 읽으면 얻을 수 있 는 더 포괄적인 메시지가 하나 있다. BRCA1 유전자라는 DNA가 유방암을 유발하지 않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어 떤 DNA도 단독으로는 그 어떤 질병도 유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DNA는 우리의 그 어떤 특징도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 말 이 놀랍게 들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DNA 속 유전자들 이 우리의 일부 표현형(우리의 특징이나 성격을 일컬어 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단어다)을 만들어낸다고 분명히 배웠으니 말이다. 표현형 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눈동자 색과 머리 크기부터 음악적 재능, 주의력 지속 시간, 술에 잘 취하 는 성향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유전자가 표 현형을 결정하지 않는데도, 세상에 나와 있는 다수의 생물학 교과 서는 여전히 유전자가 표현형을 결정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고, 그렇게 일종의 유전자 결정론을 유포하고 있다. 눈동자 색은 특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다수의 생물학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눈 동자 색이라는 표현형이 유전적으로 단순한 방식으로 결정된다 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 미국국립보건원 암 연구소에서 일하는 정상급 유방암 전문가들이 펴낸 BRCA 유전자 변이에 관한 자료 속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우리가 그런 종류의 예측치를 대할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특별히 주의 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강조 표시를 했다).
BRCA1과 BRCA2 변이와 관련하여 유방암과 난소암이 생길 위 험의 예측치는 [암에 걸린 사람이 많은 대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연 구 결과로 계산한 것이며 (...) 이는 꼭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항 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일정 부분 유전자를 공유할 뿐 아 니라 환경도 공유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 가족들에게서 나타난 다수의 암 발병 사례는 어느 정도는 다른 유전 요인이나 환경 요인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1] 위험 예측치는(...) 전체 인구에서 BRCA1과 BRCA2 변이 보유자들의 발병 위험 정도를 정 확히 반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더욱이 전체 인구에서 [대조군 을 제대로 사용하여 암 발병 위험성을 연구한] 장기 연구에서 나온 데이터가 없으므로, (・・・) 위에서 제시한 확률 수치는 더 많은 데 이터가 나오면 달라질 수 있는 추정치다."
-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DNA는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전등 스위치처럼 작동 한다고 말이다. 아니, 조명을 약간만 밝히거나 적당한 밝기로 맞추 거나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도 조절할 수 있는 조광기처럼 작동한 다고 보는 게 더 낫겠다. 어떤 DNA 분절DNA segment (유전자)이 얼 마나 활성화되는가는 그 분절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달려 있고, 그 상태는 그 분절이 처한 맥락 등의 요인에 달려 있다.
이런 정의는 유전자 및 유전자의 작용을 바라보던 관점에 상당히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의 눈이 파란 것은 파란 눈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유방암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성유전의 정 의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 을 감안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무엇을 하는지다.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질 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아 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유전자를 가진 것은 열쇠 하나를 가진 것과 비슷한 일이며, 딱 맞는 열쇠구멍이 없다면 그 열쇠는 있어도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해보자면, 그런 유전자는 “광산에 묻혀 있는 은"과 같아서 별 의미가 없다.

- 후성유전의 작동 방식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예로 '잘 놀라는 쥐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몬트리올의 어떤 과학자들은 아주 주 목할 만한 연구에서 어미 쥐의 행동이 새끼 쥐의 스트레스 반응 조 절을 담당하는 일부 유전자의 활동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끼를 핥아주고 털을 다듬어주는 데 많은 시간을 쏟은 어미 쥐는 그 행동으로 새끼 쥐의 특정 유전 자들을 효과적으로 '고', 이 유전자들이 켜진 결과 새끼 쥐는 스 트레스가 심한 일에도 여유롭게 반응하는 성체 쥐로 자랐다. 헌신 적이지 않은 어미 쥐의 새끼는 스트레스에 훨씬 건강하지 않은 방 식으로 반응했다. 사람의 신경계도 쥐의 신경계와 매우 유사한 방 식으로 스트레스에 반응하기 때문에 이 발견이 지닌 의미는 대단 히 중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 일단 우리는 DNA가 맥락의 영향을 받으며 환경이 DNA에 중요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됐다. 하지만 DNA와 맥락이 어떻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함께 작동하여 현재의 우 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미 1960년대 중반 즈음 일부 발달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환경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 리는 환경이 어떻게 우리 몸속 분자들에 영향을 미치고 유전자와 협력하여 우리를 형성하는지 이제 막 어렴풋이 알아가는 수준이 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볼 것이다.
-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후성유전적 이상 때문에 생긴 질병에 시달리면서 후성유전에 관해 알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 다. 후성유전 현상은 암 외에도 몇몇 자가면역질환 그리고 프레더 윌리증후군과 엔젤만증후군 등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에 도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현병이나 양극성장애(조울증) 등 몇 몇 정신장애도 후성유전적 이상과 연관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학습 및 기억 형성, 우리가 잠들고 깨어나게 하는 하루 주기를 만들어내 는 것 등 일상적인 기능에서 담당하는 역할 때문에 후성유전을 알 게 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후성유전의 대물림이 진화에 관한 현재 생물학자들의 이론, 즉 신다윈주의 혹은 '현대' 종합설이라 불리 는 이론에서 갖는 의미 때문에 후성유전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지난 60년 동안 생물학에서 진행된 거의 모든 연구의 밑바탕을 이 루는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우리가 살면서 획득하는 형질, 즉 경험 의 결과로 얻게 되는 형질은 절대 유전될 수 없다는 주장을 견지한 다." 하지만 후성유전의 대물림 현상이 발견되면서 그 주장이 사 실과 어긋난다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생물학의 기본 견해 일부 를 재고할 수밖에 없다. MIT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인 이블린 폭스 켈러에 따르면 "그 사실이 발견되고 유전학에 통합되면서 주 류 유전학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아마도 후성유전학은 질병 치료법의 개발, 구체적으로는 후성유전적 표지를 표적으로 하는 식이요법이나 약물요법 개발 분 야에서 가장 중요하게 적용될 것이다. 예컨대 현재 후성유전학 분 야에서는 아동기에 경험한 트라우마와 관련된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맞춤 의약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연 구가 진행 중이다. 이런 치료법이 발견된다면 그야말로 획기적이 고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다. 행동 후성유전학의 이런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의미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 후성유전학의 등장
새 배아가 어떻게 이렇게 작동할 수 있는지 알아내기까지 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오늘날 우리는 드리슈가 발견한 현상을 가 능하게 하는 것이 후성유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선구적인 연구 이후, 우리는 아주 어린 배아의 세포들이 '다능성' 세포임을 알고 있다. 즉, 이 배아세포들 각각은 간세포, 피부세포, 뇌세포 등 몸을 구성하는 서로 무척이나 다른 다양한 세포 중 어떤 세포로도 발달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머리를 만드는 데 필 요한 자원과 꼬리(그리고 신체의 다른 모든 부위)를 만드는 데 필요 한 자원 모두가 어린 배아를 이루는 모든 세포 각각에 분명히 존재 하며, 이 세포들을 일컬어 이른바 배아줄기세포라고 한다. 이 세포 들이 다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포 속에서 서로 다른 DNA 분절들(발달 자원들)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됨으로써 그 각각의 세포가 결국 서로 다른 종류의 세포로 발달하게 하는 후 성유전 과정이, 생물 발생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후성유전이 우리 몸속에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은, 처음 에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줄기세포들이 각자 독특한 형태 와 기능을 갖춰가며 다양한 세포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 드리슈의 연구에서 나온 중요한 통찰 하나를 꼽자면, 세포의 발달은 그것이 처한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똑 같은 세포라도 다른 상황에 두면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발달할 수 도 있다는 말이다. 어느 줄기세포 하나를 그냥 두면 그것이 독립적 인 한 사람으로 발달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세포를 다른 세포에 붙여 두면 예컨대 우리 뇌 속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세포인 뉴런으 로 발달할 수도 있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발생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뇌와 심장(각자 고유한 뇌세포와 심장세포들을 지녔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원래는 정확히 똑같았던 줄기세포로부터 분화된다.
이처럼 발달은 세포와 맥락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세포들이 하는 어떤 작용은 그 세포 속에 들어 있는 것 때문이고, 또 어떤 작용은 세포 밖에 있는 것 때문이다. 표현형(이 말이 세포의 특징 을 일컫는 것인지 전체 사람의 특징을 일컫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을 결정하는 것은 내부에 있는 것 또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부와 외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크 리스티아네 뉘슬라인 폴하르트가 2006년에 잘 요약한 것처럼, '세 포질'이라는 세포 속 물질은 “환경으로부터 신호와 정보를 받는데, 이 환경에는 이웃한 세포들도 포함된다. 이 정보는 이어서 유전자 로도 전달된다. (...) 이렇듯 한 세포의 운명은 세포질과 외부 영향 력 둘 다에 의존한다."

- 좀 어처구니 없지만, 대부분의 서로 다른 스플라이싱 산물은 한 사람의 서로 다 른 세포 유형 사이에서 발견되지만, 어떤 차이는 개인과 개인 사이 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믿기 어렵지만 이런 발견은 험프리 보가트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정확히 똑같은 유전자가 뭔가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최근의 데이터는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경험에 따라 유도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새로운 환경을 학습할 때 쥐의 뇌세 포들은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특정 DNA 분절을 사용하여 그 경 험을 기억으로 만든다. 그런데 쥐들이 전기 충격에 노출되면, 마 치 징벌 같은 이 경험을 환경과 결부시켜 기억을 형성하는 동안 바로 그 전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DNA 분절을 사용하여 다른 종류 의 단백질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까 DNA 분절 하나, 즉 유전 자 하나로 특정 경험에 반응해서는 특정 산물을 만들고, 그와 약간 다른 종류의 경험에 반응해서는 또 다른 산물을 만든다는 말이다. 따라서 후성유전학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맥락과 무관하게 항상 특정 표현형만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미심 쩍어 보일 수밖에 없다.
1999년에 생물학자들은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우리 DNA 가운데 많아야 3분의 1 정도의 전사 과정에서 일어날 거라고 생각 했고, 당시에는 그것도 꽤 높은 비율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고 보 니 이건 심하게 과소평가한 수치였다. 2003년에 한 연구팀은 “인 간의 멀티 엑손 유전자 중 적어도 74퍼센트에서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일어난다""라고 결론지었고, 그로부터 5년 후의 여러 연구 는 선택적 RNA 스플라이싱이 "실제로 인간 유전자의 보편적 특 징"22임을 보여주었다. 연구소에 따라 인간 유전자의 92퍼센트23 내지 95퍼센트24에서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일어난다고 밝힌 것 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성숙한 RNA 중 어떤 것은 하나 의 DNA 가닥 상에서 서로 꽤 멀리 떨어진 DNA 분절들로부터 만 들어진 둘 이상의 RNA 전사물이 이어 붙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 보다 더 놀라운 건, 현재 분자생물학자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두염 색체에서 추출된 RNA 전사물들을 스플라이싱하여 하나의 단백질 부호화 서열을 만들 수도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ENCODE 프 로젝트를 이끄는 과학자들은 부분적으로는 이런 현상의 발견 때 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유전체 전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DNA 서열들에 의해 부호화되는 이런 유전자 산물에는, 유전 자를 '하나의 위치(즉 염색체상의 특정 자리)'로 보는 고전적 개념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

- '유전자'를 정의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은, 유전체가 "생명이 있는 존재를 위한 운영 체제" 28 같은 것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나아 갔다. 이 직유를 따른다면 유전자를 컴퓨터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서브루틴'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전자를 정의하려는 시도 역시 ENCODE 프로젝트 이후에는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ENCODE팀도 자신들만의 (그리 직관 적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정의를 내놓았는데, "유전자란 잠재적으 로 중첩될 수 있는 기능적 산물들의 일관된 집합을 부호화하는 유 전체 서열들의 연합체"라는 것이다. 어쩌면 다소 불명료한 이 정 의가 결국.... 최종적인 정의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서 는 정통한 생물학자들의 공동체에서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유전자'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지 아직 알 수 없다.

- 가장 잘 연구된 히스톤 변형은 아세틸기라는 원자 무리와 연 관된다(그림 6.1) 16 히스톤 메틸화는 히스톤에 메틸기가 부착되는 현상이듯,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 정이다. 히스톤 아세틸화와 DNA 메틸화는 기본적으로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 히스톤 아세틸화는 아세틸화된 히스톤 근처에 있는 DNA 부분이 열려서 접근 가능해지게 만든다. 따라서 DNA 메틸 화가 일반적으로 DNA를 접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지 는 반면, 히스톤 아세틸화는 유전자 활성화와 관련된다. 이 아세틸 화 과정이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DNA가 아니라 히스톤이지만, 그래도 히스톤 아세틸화는 유전자의 발현 증가와 연관된다. 그리고 히스톤 아세틸화는 거의 항상 유전자 활성화와 연관되기 때문 에, 앞으로 이 책에서 자주 이 과정을 만나게 될 것이다.
DNA 메틸화이든 히스톤 변형이든, 이 과정들은 DNA의 특 정 분절에만 영향을 미치고 나머지 다른 분절에는 영향을 주지 않 는다. 그러므로 염색질의 서로 다른 각 부분은 각자 독립적으로 '열리'거나 '닫힐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부분들은 읽힐 수 있는 상 태가 되는데 다른 부분들은 전사 장치에서 아예 숨겨진 상태로 남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후성유전적 변형 시스템은 특정 유전자로부터만 단백질 생산을 증가시키는 식으로 정밀하게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아마도 DNA 메틸화와 히스톤 변형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 이는 DNA 메틸화가 훨씬 더 안정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히스톤 변형과 달리 DNA 메틸화는 유전체에 표지를 남길 수 있어서 한 세포의 표현형이 그 유기체의 평생에 걸쳐 유지될 수 있다. 이처 럼 장기간 지속 가능하다는 점에서 DNA 메틸화는 '후성유전의 프 리마돈나'라 불린다. 물론 히스톤 변형도 유전자 조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DNA 메틸화와 비교하면 훨씬 가변적이다. 두 경우 모두 그 과정의 효과는 염색질의 조성을 바꾸고 그럼으로 써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 가령 당신에게 천 개의 세포가 있고, 그 모든 세포에는 접근 가능하며 따라서 연관된 단백질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특정 유전 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세포들은 단백질을 아주 많이 만 들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포들 모두가 유전자를 억제했다면, 단백질을 아주 조금만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5백 개의 세 포는 유전자에 접근할 수 있고 나머지 5백 개의 세포는 접근할 수 없다면, 이 세포군은 모두가 활성화된 세포군이 만들어낸 것과 모 두가 침묵화된 세포군이 만들어내는 것의 중간 정도 되는 양의 단 백질을 만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전자가 정말로 '전부 아니면 무'의 양자택일적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유전자 활성화 에는 단계적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 2005년, 마드리드 소재 스페인 국립암센터는 전 세계의 공 동연구자들과 함께)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관한 중요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이 쌍둥이들의 유전 체 전체에서 일어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모두 검토 하여 젊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극히 유사한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이 나이 들면서 각자 삶에서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일수록 그들의 후성유전적 상태 도 서로 달라졌으며, "나이가 더 많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 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쌍둥이에게서는 유전체 전체 에 나타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에서 현저한 차이의 증 거가 보였다. 이 연구에 담긴 의미는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DNA 에 '표시'를 남기며 이 표시들이 우리의 유전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2005년 이후로 다른 일란성 쌍둥이 연구들도 진행되었지 만, 모두 같은 결론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건의 연구 는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다른 후성유전 프로필을 갖고 태어나 며, 어떤 경우에 그 차이는 쌍둥이의 태내 환경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게다가 한 연구는 마드리드 연구와 달리, 출 생 시점에 존재한 후성유전의 차이가 나이가 들수록 증가하지 않 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최소한 다섯 건의 연구는 DNA 메틸화 패턴이 나이가 들면서 분명 변화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일란 성 쌍둥이의 후성유전 프로필이 출생 시 정말 다르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국립암센터의 연구가 제시했던 경험이 유전자가 하는 일 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 여왕님의 식사와 그 후성유전적 효과를 논하기 전에 우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라는 말과 '결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말 사이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 런 상황, 그러니까 A 먹이를 먹으면 일벌이 되고 B 먹이를 먹으면 여왕벌이 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먹이 하나만으로 일벌에게 꽃가 루 바구니와 벌침이 발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진 다. 결국 모든 벌은 유전적으로 동일하고 벌들의 환경에서 유일한 차이는 먹이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A 먹이가 단독으로 꽃가루 바 구니를 발달시킨다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 만약 내가 갑자 기 암꿀벌 애벌레를 일벌로 키운 먹이를 먹기 시작한다고 해도 내 다리에 꽃가루 바구니가 발달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꽃가루 바구 니가 생기는 것은 먹이와 꿀벌의 유전체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이 다. 그러므로 여왕벌과 일벌의 차이는 먹이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먹이 자체가 단독으로 벌들의 행동이나 표현형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이 점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이 유는, 차이를 만드는 것이 이 예시의 먹이처럼 환경 요인일 때 어 떤 특징을 초래한다는 것과 특징의 차이를 설명할수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머릿속에 새겨두기가 더 쉬울 듯해서다. 상 황이 반대여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라면, 우리는 이 상황의 차이를 놓치고서 유전자만이 원인을 제공할 능력을 지녔다고 가 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유전학자가 X라는 질병이 있 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그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존재하 지 않는 유전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많은 사 람이 단독으로 그 병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이 유전자가 그 병의 표현 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유전자가 환경 요인과 무관하게 그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섭식이 단독으로 한표 현형의 발달을 초래할 수 없듯이 유전자 역시 그럴 수 없다. 정말 복잡하지만, 유전 요인도 환경 요인도 독립적으로 표현형을 초래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먹이가 꿀벌의 몸에 미치는 영향 연구 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전반적인 교훈은, 각각의 특징들이 현재 와 같은 상태를 갖춘 것은 환경적 원인과 유전적 원인 둘 다 때문 이라는 것이다.
먹이가 꿀벌에게 중요하다는 건 분명하다. 암벌의 생애 중 애벌레 초기 단계에, 일벌은 각자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샘에서 분비되는 로열젤리라는 물질을 애벌레들에게 먹인다. 이렇게 사흘을 먹인 뒤 보모 벌들은 대부분의 발달 중인 꿀벌의 먹이를 다른 '일꾼 먹이'"로 바꾸지만, 여왕이 될 애벌레들에게는 엄청난 양의 로열젤리를 계속 공급한다. 계속 로열젤리를 먹는 암컷 애벌레는 여왕벌로 분화하고, 이들은 남은 긴 생애 동안, 자신들의 쌍둥이 자매들이 (그리고 대부분의 자손까지) 죽은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 로 열젤리를 먹는다.
이 과정에 관해서는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계속되는 연구로 그 이야기가 더 명확히 규명되기 시작 했다. 로열젤리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단백질이 암컷 애벌레가 여왕 별로 분화되는 데 이바지하는 호르몬 농도를 높이는 것으로 보인 다. 하지만 어떻게 특정 동물이 먹는 한 가지 단백질이 그것을 먹지 않는 경우와 그토록 다른 모습으로 발달하게 만드는 것일까? 10년 전, 발달 중인 여왕벌과 일벌의 유전자 발현을 검토하던 연구 자들은 암벌들이 동일한 유전체를 공유하지만 여왕벌이 될 운명 인 애벌레들은 일벌이 될 애벌레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자신 들의 유전체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섭식 요인 이 애벌레에게 유전자 발현을 바꾸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고, 그럼 으로써 다른 경로를 따라 발달이 추진되도록 했을 가능성을 암시 했다.
사실 지금은 거기서 놓치고 있던 고리가 바로 후성유전이라 는 것이 명백해졌다. 과학자들이 특수하게 설계한 분자들을 직접 주입함으로써 후성유전적 상태를 조작하자 애벌레들은 꼭 로열젤리가 풍부한 먹이를 먹은 것처럼 확실히 여왕벌로 발달했다." 결 정적으로 이 연구가 증명한 사실은 여왕벌이 되려면 일반적으로 일벌들에게서 메틸화되어 있는 DNA가 탈메틸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이 꿀벌 퍼즐에는 아직도 다 맞춰지지 않은 조각들 이 남아 있다. 예컨대 로열젤리에 들어 있는 특정 단백질이 만들 어내는 후성유전 효과가 직접적인 방식인지 간접적인 방식인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섭식이 후성유전 메커니즘을 통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꿀벌의 몸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 후성유전적 변형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유전자 전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한다. 전사는 '전사인자'라 는 분자들이 DNA의 '조절 부위'라는 곳에 달라붙을 때 시작된다. 조절 부위 자체도 DNA 분절이므로 조절 부위는 전사인자와 '결 합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전사인자가 부착될 수 있는 특별한 뉴클 레오타이드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전사인자가 조절 부위에 결합하면 그 부위와 관련된 유전자의 전사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조절 부위라는 이름은 아주 적절하다. 각 조절 부위가 특정 유전자 의 발현을 조절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조절 부위들이 항상 자신이 조절하는 유전자들 근처에 있기만 하다면 상황이 훨씬 단순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조절 부위들은 조절하는 유전 자 가까이에 있지만 일부는 DNA 가닥 상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기도 하다. 놀랍게도 어떤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들은 다른 염색 체상의 조절 부위와 짝을 이뤄 조절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때로는 한 염색체에 있는 조절 부위가 완전히 다른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 의 활동을 조절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 정도로는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는 듯, 자연선택은 전사인자와 조절 부위를 단순한 열쇠와 자물쇠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 지 않았다. 즉, 하나의 열쇠가 단 하나의 유일한 자물쇠를 열 수 있 고 하나의 자물쇠가 단 하나의 유일한 열쇠로만 열리는 식과는 다 르다는 말이다. 오히려 상황은 몇 개의 열쇠가 몇 가지 자물쇠를 열 수 있고 몇 개의 자물쇠가 여러 종류의 열쇠로 열리는 것과 더 비슷하다. 현재 생물학 교과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의 유전자는 다양한 전사인자들과 결합하는 여러 DNA 조 절 부위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반대로 하나의 전사인자는 유 전체의 여러 부위에 부착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여러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려는 건지, 일부 전사인자들은 어떤 DNA 가닥 위에서 서로 가까이 있을 때 상호작용하기도 하는데, 이 상호작용은 유전자가 전사되는 방식에 한층 더 영향을 미친다. 다시 한번 교과서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찾아보자.
유전자의 조절 부위는 유전자 발현을 위한 일종의 통합 센터로 생각할 수 있다. 세포들은 서로 다른 자극들에 노출되면 서로 다른 전사인자들을 합성함으로써 그 자극에 반응하며 (...) 특 정 유전자가 전사되는 정도는 추정컨대 [그 유전자의 조절 부위 혹은 부위들에 존재하는 전사인자들의 특정 조합에 달려 있는 듯 하다.
- 히스톤 아세틸화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유전자 발현을 활성화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는지에 관한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한 가지 가설은 특정 히스톤의 꼬리에 있는 특정 아미노산에 아세틸기가 더해지면 그 히스톤의 양전하 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 히스톤과 가까이 있는 DNA는 그 히스톤에 '자기적으로 덜 끌리게 되고, 이렇게 DNA가 히스톤 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전사인자들이 접근하기가 더 쉬워져 RNA/단백질 생산 과정이 개시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설은 아 세틸기가 일종의 도킹 스테이션처럼 작용하여 그 부위로 또 다른 단백질들을 끌어들이고 그 단백질들이 염색질 리모델링에 기여한 다는 것이다.
아세틸기를 정확한 히스톤 꼬리에 있는 정확한 아미노산에 붙인다는 것이 내가 말한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히스톤은 네 가지 종류고, 히스톤 꼬리를 이루는 아미노산도 라이신, 아르기닌, 세린 등 여러 종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의 히스톤 꼬리 에 있는 아미노산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나의 꼬리에 특정 종류의 아미노산이 여러 개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같은 종류라도 어 떤 아미노산을 아세틸화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 다. 예를 들어 H3 히스톤의 꼬리에는 아세틸기가 붙을 수 있는 라 이신이 최소한 일곱 개 있으며, 각 라이신은 서로 똑같기는 하지 만 각자 다른 위치에 있다는 사실도 큰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라 이신이 몇 개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 못지않게 어느 라이신이 변형 되는가도 중요하다. 현재 우리는 메틸화되는 라이신이 하나인가 둘인가 셋인가에 따라 서로 다른 생물학적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 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후성유전 표지들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효과는, 어느 히스톤이 변형되는가(H3인가, H2A인가), 어느 화학물질기가 일으키는 변형인가(아세틸기인가, 메틸기인가), 어느 아미노산에 결 합되는가(H3의 꼬리 9번 위치에 있는 라이신인가, 같은 꼬리의 27번 위 치에 있는 라이신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미노산이 변형되는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메틸화인가, 삼중메틸화인가) 등에 따라 결 정된다. 그리고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벌어 지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변형의 조합에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아세틸화 같은 과정들이 닥치는 대로 일어나게 그 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현재 행동 후성유전학자들 사이에서는 생애 초기 경험이 다양한 뇌 영역 속 광범위한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경험을 한 이후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는 합의가 형성되고 있다. 쥐의 스트레스 반응에 관한 미니 연구팀의 발견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와 포유류 친척들이 진화를 통해 갖춰온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은 매우 복잡 해서, 그 모든 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아직 알아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경험이 몸과 뇌, 마음에 미 치는 영향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후성유전학 연구가 바꿔 놓으리 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스트레스 시스템이 경험에 반응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 지도 수십 년이 되었고, 경험에 반응하는 것은 애초에 스트레스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 장에서 논한 설치류 연구 는, 경험의 영향이 꼭 실시간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새로운 증 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히려 삶의 어느 시점에 한 경 험이 이후 다른 시점에서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이 는 어떤 후성유전적 변화들이 사실상 이전 경험을 간직한 기록 역 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경험은 우리 몸속으로 들어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안에 새겨 질 수도 있다.
-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기억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분화된 세포가 다른 세포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 이 유는 후성유전 상태가 반영된 특유의 유전자 발현 프로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세포들이 분열할 때는 항상 그 특유의 후성유전 상태를 각자의 '딸세포'에게 전달함으로써 딸 세포들도 모세포와 동일한 유형의 세포가 되도록 한다." 예컨대 간세포가 분열하여 두 개의 새로운 간세포를 만들 때, 간세포 안 에서는 어떤 유전자들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어떤 유전자들은 활 성화되면 안 되는지에 관한 정보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세포분열이 이루어진다. 이는 바로 간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포는 모두 반드시 간세포가 되고, 우연히라도 위 내벽에서 위산을 분비하는 세포 를 만드는 일이 (이건 계획에서 대단히 어긋난 일일 테니까) 절대 벌어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 세대 세포 속에 존재하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후성유전적 표지가 운반하는 세포 '기억'과, 우리 뇌가 사실 정보와 자전적 정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심리적 기억 사 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아마추어 실 험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연선택은 세포분열의 맥락에서 정보를 보유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잘 활용해 다른 맥락에도 그 시스템을 가져다 쓸 가능 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전략은 자연선택에서는 워낙 전형 적이어서, 진화생물학자들은 이 전략에 따로 굴절적응 exaptation 이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한 논문에서 스티븐 제 이 굴드와 엘리자베스 브르바는 굴절적응을 현재는 적응에 유리 한 특징이지만 "자연선택이 현재의 역할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닌" 특징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제시한 예는 깃털이다. 오늘날의 새들에게 날개는 날 수 있게 해주므로 적응에 유리하다. 하지만 깃털은 날지 않는 일부 공룡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깃털이 원래는 비행이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아마도 공룡의 체온 조절을 돕기 위해 진화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깃털은 다른 이유로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비행을 위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굴절적응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고, 자연선택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한 특징을 전혀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재사용하는 방식의 실례를 보여주었다.
진화의 작동 방식이 이러하므로 세포 '기억'과 인지 행동적 기억은 단순히 유사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동일한 세 포 시스템에서 진화한 결과 중요한 특징을 공유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세포분화를 조절하는 일에 관여하는 몇 가지 분자 메커니즘은 기억의 저장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20 어쩌면 기억을 정말로 굴절적응 중 하나로 보는 게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신경생물학자 데이비드 스웨트는 동료 조너선 레븐슨과 함께 기억 형성의 후성유전 메커니즘을 다룬 2005년 논문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뇌가] 장기기억 을 형성할 때 유전체의 후성유전 표지 붙이기 메커니즘을 가져다 썼다는 결론을 제안한다." 그 개념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와중 에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발달 과정에서 정보를 저장하는 데 중요한 기본적 후성유전 메 커니즘은 성인기에 행동으로 표출되는 기억들을 저장하는 데도 중요할까? 우리는 이 메커니즘이 성인의 신경계에 보존되어 있 으며, 신경계가 그 메커니즘들을 행동 기억의 형성에 활용하기 위해 가져다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 H.M. 이 초기 기억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뇌 영역과 기억 저장에 관여하는 뇌 영역이 다름 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해마는 새로운 기억의 형성에서 결정적으 로 중요하지만, 기억이 장기적으로 저장되는 장소는 아니라는 말 이다. 오히려 해마에 의지해 형성된 기억은 응고화라는 별도의 과 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저장되는 장소인 대뇌피질의 영역들 에서 장기적인 의탁 상태로 넘어가며,  몇 주 뒤에는 기억을 유지 하는 데 해마의 참여는 필요하지 않다.

- 생쥐의 기억 만들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스웨트와 동료들은 쥐들의 장기기억 형성에 히스톤 아세틸화가 관여하는지 알아보려 했을 때, 해마 세포의 핵 속에 존재하는 히스톤을 살펴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기억 형성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쥐의 뇌에 새 기억을 심는 효과적인 기술을 갖춰야 했다. 군소나 쥐나 마찬가지다. 쥐들에게 자기 할아버지의 기억에 관해 그냥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연구자들이 설치류의 기억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주된 방법은 '맥락적 공포 조건화 패러다임'이다. 듣기에는 끔찍해도(그리고 나처럼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끔찍하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아주 유용하다. 이 실험 패러다임의 기반이 되는 개 념은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에서 파생된 것으로 비교적 단순 하다. 쥐 한 마리를 중립적이고 무섭지 않은 '훈련실'에 집어넣고 그 안을 탐색하게 둔 다음 몇 분 뒤 전기 충격을 가한다. 이 쥐의 기 억을 검사하려면 24시간 뒤 훈련실에 다시 들여보내기만 하면 된 다. 만약 훈련실(맥락)에 들어갔을 때 쥐가 공포를 암시하는 경직 반응을 보이면, 이 쥐는 그 훈련실과 전기 충격을 연관 짓는 일종 의 기억을 형성한 것이 분명하다. 레븐슨과 동료들은 실험한 쥐들 의 해마 세포 속 염색질을 검토하여, 이런 종류의 연상 기억을 형성하는 과정에 히스톤 아세틸화 및 그와 연관된 염색질의 구조 변 화가 수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후성유전적 사건은 생애 초기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과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일 에 관여하는 것처럼 기억 형성 과정에도 관여한다는 이야기다.
연구자들은 또 다른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 설치류의 학습 과 기억의 후성유전적 효과를 테스트했다. 한 방법은 쥐들에게 미 로 속을 달리게 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쥐들의 공간 기억을 연구할 수 있다. 또하나는 잠재적 억제라는 방법이다. 여러 면에서 이 방법은 맥락적 공포 조건화와 아주 비슷해 보인다. 동물 들을 중립적인 공간에 집어넣고, 충격을 가하고, 그런 다음 그 공 간에 재노출한다. 하지만 잠재적 억제에서는 쥐들이 뭔가 다른 것 을 학습한다.

- 건강과 질병의 발달상 기원
20세기가 끝날 무렵 영국의 임상역학자 데이비드 바커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종합하여 오늘날 DOHaD, 즉 '건강과 질병의 발달상 기원developmental origins of health and disease'이라고 알려진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그는 출생 시 체중이 낮은 아기들이 "관상 동맥성 심장질환 및 연관 질환, 뇌졸중, 고혈압, 인슐린 비의존성 당뇨병의 발병률이 높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잘 입증되어 있던 사실에서 출발하여, DOHaD를 출생 전 자궁 내 경험이 표현형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연구하는 분야로 확립 하는 데 일조했다. 이 연구의 핵심에는 사람들이 생애 초기에는 가 소적이며 발달 환경에 잘 반응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바커 는 이런 현상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신체가 발달기에 가소성을 유지하는 것이 진화의 관점에서 유리하다고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가소성은 모든 환경에서 동일 한 표현형이 만들어지는 경우보다 각자의 환경에 더 잘 맞는 표 현형을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 자궁에서 사는 동안 동 물이나 사람이 자기 어머니에게서 '기후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그 예고를 통해 자신이 살아갈 세계의 유형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은 가소성 덕분이다. 영양 상태가 저조한 임신부 어머니는 뱃 속 아기에게 아기가 곧 혹독한 환경으로 들어가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기는 그 신호에 반응하여 몸의 크기를 줄이고 대사를 변화시키는 식으로 적응하며, 이는 아기가 출생 후 식량 부족에도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식으로 가소성은 한 종이 한 세대 안에서 단기적 적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임신한 여성의 음식 섭취를 제한하는 것이 자녀 에게 장기적 영향을 초래하듯이, 임신한 포유동물에게 고지방 먹이" 혹은 특정 영양소가 결핍된 먹이를 주는 것 역시 장기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자손이 태어난 후 만난 환경이 엄마가 임신 중에 경험한 환경과 다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경우, 태아는 자신이 만나게 될 거라 '예상한 환경에 걸맞았을 적응 방 식으로 발달했지만, 실제로 만난 환경에서는 그 적응이 결과적으 로 부적응이 된다. 임신기 동안 겪었던 환경과 태어난 후 살게 된 환경 사이의 '발달 불일치"가 네덜란드 겨울 기근 동안 엄마 배 속에 있었던 아이들의 특징적 경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섭식 조절로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전자 발현 조절 메커니즘의 발견은 음식과 건강의 관계에 관심 있던 연구자들에게 연구의 봇물을 열어주었다. 현재까지 몇몇 연구가 비타민 B군과 콜린 외에 다른 식이 인자들이 내는 후성유전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예 를 들어 인도 요리에서 즐겨 쓰이며 생강과에 속하는 향신료인 강 황의 특정 성분은 히스톤에 아세틸기를 전달하는 단백질들(그러 니까 앞 심층 탐구 장에서 이야기한 히스톤 아세틸 전이효소)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유사하게 녹차 등 다른 몇몇 식품은 DNA에 메틸기를 전달하는 단백질들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 그밖에 알코올이나 아연처럼 우리가 섭취하는 다른 물질들 도 SAM 형성에 사용되는 몇 가지 메틸기에 영향을 줌으로써 DNA 메틸화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발견들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자면, 어미 생쥐가 섭취한 알코올이 생쥐 배아의 후 성유전적 상태(그리고 결국 성체가 된 후의 표현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연구는 임신부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실 경우 인간 태 아에 어떻게 태아 알코올 스펙트럼 장애 fetal alcohol spectrum disorder, FASD가 생기는지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이 분야의 연구는 기근, 알코올, 영양부족 같은 자극들의 파괴적인 영향만이 아닌 그 이상을 밝혀낼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즉, 특정 식품의 잠재적인 이점에 눈뜨게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질 환의 치료법을 찾는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계속 나아갈 힘 을 줄 수 있다.
- 중력, 공동우물, 안전한 집, 특정 유전체 등 이 모든 요인은 사람이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영향을 주므로, 그 원천(부모, 공동체 의 다른 구성원들, 자연)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발달에 중요한 자원이 다. 그리피스와 그레이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식 세대는 항상 자신들 에게 제공된 맥락 안에서 발달하며, 이 맥락이 그들의 표현형 발달 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자식들 역시 성장하여 번 식할 때는 자신의 성공적인 발달에 기여한 것과 같은 종류의 맥락 안에서 자기 자식들을 기르게 된다. 이런 세대 간 환경의 대물림을 이해한다면 경험이 만드는 후성유전의 효과 중 일부가 어떻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확실히 넘어갈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우리의 형질 중 그 무엇도 '유전적'이 기만 한 '기반'을 지닌 것은 없으므로, 다른 종류의 유전과 구별되 는 유전의 한 유형으로서 '경성' 유전이란 개념은 이미 무너졌다. 유전의 개념은 단 하나이며, 그것은 유전적 발달 자원과 비유전적 발달 자원 모두의 대물림을 포함한다." 다윈도 인정했듯이, 특정 형질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결같이 복제된다면, 그 일이 어 떻게 일어났든 간에 그 형질은 자연선택의 대상이며 진화적으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형질은 비유전적 요인들에 의존해 발달한 것이라 해도 '유전될 수 있다.
- 이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형질은 '획득 형질이다. 왜냐하면 그 형질들은 모두 접합자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발달 과정을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부모가 '획득한 형질을 자녀가 '물려 받을 수 있다는 발견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특히 부모가 경험했 던 발달상의 사건들과 유사한 일을 자녀가 경험하는 경우라면 더 욱 그러한데, 이런 종류의 일은 말 그대로 항상 일어난다! 그러니 라마르크의 생각은 바이스만과 20세기 생물학자 대부분이 우리에 게 심어준 믿음만큼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실제로 자녀가 자기 부모를 닮게 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후성유전적 표지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 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경우에 따라서 후성유전의 효과가 생식계열을 통해서도 대물림된다는 탄탄한 증거가 존재한다." 하지 만 미니의 연구에서 관찰된 후성유전적 효과는 그와 다르다. 쥐들 이 태어날 즈음이면 그들의 생식세포는 오래전에 체세포와 분리 된 상태이며, 따라서 신생아 쥐들에게 핥기와 털 고르기가 미치는 후성유전적 효과, 즉 쥐들 뇌의 (체)세포 속에 있는 DNA에 영향을 주는 것은 정자나 난자를 통해 대물림될 수 없다. 그러나 다음 장 에서 이야기할 연구들은, 유아기에 핥기와 털 고르기를 받은 쥐들 의 뇌 속에 있는 관련 DNA가 어미의 뇌 속 DNA와 후성유전학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후성유전적 표지가 생식계열을 통해 대물림될 수 없다고 해도, 후성유전적 효과는 '대물 림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진화에서는 대물림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와는 무관하게 형질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험이 만든 후성유 전적 효과가 생식계열을 통해 대물림되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대물림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지는지는 상관없이, 현재 분명한 것은 후성유전적 효과가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대물림의 특별히 흥미로운 한 예는 경험의 후성유전적 효과가 생식세포의 DNA에는 후성 유전적 영향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10장에서 보았듯이 새끼를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는 암 컷 쥐(즉 높은 LG 어미)가 키운 딸 쥐는 자신도 LG가 높은 어미로 자라는데 이때 그 딸을 키운 어미가 생모인지 양모인지는 상관 없다. 그 효과는 높은 LG 양육자에게 받은 딸의 경험에서 나온 것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양육 스타일의 세대 간 전달에 필 요한 것은 행동 메커니즘이다." 행동을 매개로 한 후성유전적 대 물림에 관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어떤 후성유전적 상태가 부모 의 행동에 영향을 주며, 부모의 이 행동이 이어서 자녀에게 영향을 끼쳐 동일한 후성유전적 상태를 갖도록 유도한다는 것이 밝혀졌 다." 이런 상황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질 패턴을 설정한다고 볼 수 있다.
- 이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 프란시스 샹파뉴가 이끄는 연구팀은 생모가 아니면서 LG가 높은 어미 쥐 또는 낮은 어미 쥐에게 양육된 암컷 쥐의 뇌 속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연구했다. 28 에스트 로겐 수용체는 암컷 포유류의 주된 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모 성 행동 자극을 포함해 제 기능을 수행하게끔 하는 필수 요소다. 29 에스트로겐과 LG는 둘 다 모성 행동에 영향을 주므로, 샹파뉴 연 구팀은 LG가 에스트로겐 수용체 생산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예상대로 그들은 높은 LG에 노출된 쥐들에게 더 많은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생성됐음을 발견했다. 핥기와 털 고르 기를 많이 받은 쥐들은 연구에서 살펴본 뇌 영역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만드는 DNA에 메틸화가 상대적으로 덜 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핥기와 털 고르기는 암컷 새끼 쥐들에게 뇌 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 수를 증가시키는 후성유전적 효과를 만 들어내고, 이렇게 증가한 수용체는 이 새끼 쥐들이 어미 쥐가 되었 을 때 자기 새끼를 더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게 유도했다. 이런 방식으로 높은 LG 표현형은 다음 세대로 효과적으로 전달됐다." 어미의 모성 행동 자체가 새끼의 모성 행동을 유발하는 DNA 분절 의 메틸화에 영향을 줌으로써 그 행동이 세대를 넘어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그림 18.1). 생식계열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음에도, 딸 쥐들이 결국 제 어미 쥐와 같은 메틸화 패턴과 행동 패턴을 지니게 되므로 이는 자식의 경험에 의존하는 세대 간 후성유전 효과의 예 라고 할 수 있다.
- 30년 전, 생물학자들의 '상식'은 이랬다. 첫째, 후성유전적 표지는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완전히 지워지므로' 세대 간 후성유 전적 대물림은 불가능하다. 둘째, DNA 서열정보만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대물림될 수 있다. 셋째, 따라서 '경성' 유전만이 유일 한 유전이다. 이런 상식에는 라마르크주의를 향한 바이스만의 불 신이 잘 담겨 있다. 바로 부모는 자기가 살면서 한 경험의 결과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1997년에 생쥐의 생식계열을 통한 후성유전적 대물림이 발견된 뒤 " 이 이야기에는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해졌다.
- DNA 메틸화는 경험에서 영향을 받는 것"과 생식계열을 통한 대물림이 둘 다 가능하므로, 이제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 다는 라마르크의 생각을 다시 검토해봐야 할 때다. 대부분의 진 화생물학자들처럼 리처드 도킨스는 "모든 증거가 이 개념이 한마 디로 틀렸다는 걸 시사한다"라며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음을 힘주어 부인했다. 만약 '획득'이라는 말을 꼭 꼬집어 바이스만이 생쥐에게 가했던 꼬리 절단 같은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도킨스의 말이 옳다. 한 세대가 경험한 절단이 다음 세대에도 나타 나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다음 세대도 앞 세대가 한 것과 똑 같이 절단을 경험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쯤이면 ‘획득’과 '유전(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이 단 한 가지가 아니 라는 것과 다른 정의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명백히 이해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전의 넓은 정의, 즉 어떤 표현형이 이어지는 세대들에서 한결같이 복제되는 한 그 표현형은 '유전' 것이라고 보는 정의를 채택한다면, 다양한 경험이 유전되는 표현 형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어떤 대물림, 이를테면 LG가 높은 어미 쥐의 딸 쥐들 역시 높은 LG 어미 쥐가 되는 대물림, 또는 인간의 내장에 건강을 증진하는 박테리아를 제공하는 유 형의 대물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넓은 정의가 필요하다. 좁은 미로만 대물림을 정의한다면 이런 특징들이 어떻게 가족의 내력 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대물림은 필히 생식계열을 통해야만 한다는 좁은 의미의 정의를 채택한다 하더라도,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 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일부 표현형은 조상의 표현형에 기여한 것과 같은 경험을 후손들이 하지 않 았을 때조차 후손에게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획득 형질의 유전을 덮어놓고 부인하는 것은 '획득'과 '유전'을 극단적으로 협소한 방식 으로 정의할 때만 가능한 일이며, 이 솔직히 이렇게 협소한 정의는 수많은 세대 간 영향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21세기 생물학이 유전 전반에 관한 사고를 어디까지 수정해야 할지에 대해 아직은 현대 이론가들의 합의가 이루어지 지는 않았지만, 유전자가 결정한 형질만 유전될 수 있다는 생각 을 철저히 고수하는 사람에게 거대한 격변이 몰아치고 있음은 분 명하다.

- 진화에 관해 생각할 때조차 어느 표현형의 발달이 생식계열을 통해 전달된 정보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원숭이들이 조상들에게서 고구마 씻는 행동을 어떻게 물려받았는지 이해하려 할 때 생식계열을 고려해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하지만 사회적 학습을 통해 전달되는 이런 행동도 진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띨 수 있다. 고구마를 씻는 원 숭이들은 바다에 더 익숙하며, 먹이로 해양 생물을 더 많이 (더 다 양하게) 먹고, 수영 같은 해양 활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며, 이 런 행동을 한다면 그중 한 하위집단이 이전에는 서식한 적 없던 섬 을 새로운 서식지로 삼고 원래 무리와는 떨어져 새로운 삶을 시작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일종의 번식적 격리 현상이 발생 할 것이며, 그 현상은 진화상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알려져 있다." 부모와 조부모에게 배우는 새로운 행동들도 유전자 변이 못지않 게 진화적 변화를 추동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세대 간 표현형의 전달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이 무엇인 지 반드시 알아야만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이를 예상했어야 한다. 다윈은 DNA뿐 아니라 그것이 유전 의 메커니즘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진화 에 관한 올바른 이야기를 알아냈으니 말이다.
반면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질이 어떻게 발달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부모의 목숨을 앗아간 비만을 미리 피하도록 어느 건강한 청년을 돕거나 학대적 양육의 세대 간 대물림을 멈추고 싶다면, 조상의 행동이 어떻게 후손들에 게 다시 나타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파괴적인 생물학적 또는 심리적 상태에 시달리는 사람을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 은 그러한 상태를 초래하는 메커니즘에 계속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정도로 상세한 수준에서 이해해야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발달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도 분명히 느끼겠지만, 나는 우리가 후성유전학(유전학과 심리학 그리고 그사이 모든 단계의 분석들 역시 말할 것도 없이)을 더 깊이 연구하도록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분자 수준의 정보에 관한 지식을 기 반으로 어떻게 하면 발달에 유익한 조작을 쉽게 할 수 있을지에 집 중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생식계열을 통해 전달되는 분자적 정보 한 가지 (그것이 DNA 염기서열 정보든 조상의 경험 때문에 변화한 후성 유전적 정보이든)가 우리의 신체나 마음에 관한 무언가를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 전반적으로 저메틸화는 종양 형성을 유도하지만, 놀랍게도 특정 유전자들의 과메틸화도 암과 연관된다. 얼핏 느껴지는 것과 달리 이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은 아니다. 정상적인 세포에는 세포 증식에 기여하는 유전자뿐 아니라, 보통은 암을 저지하는 단백질 생산을 돕는 이른바 종양억제유전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종양 억제유전자를 억제하는 것은, 위험한 과정의 속도를 더 높이게 되는 것이니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고장 내는 일과 비슷하다. 그러니 까 종양억제유전자가 과메틸화되고 따라서 발현되지 않는다면, 종 양발생 확률이 더 높아진다. 암 발생 초기에 후성유전적 변화가 중 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 저술가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발 암 요인을 "후성유전적 조절을 변화시키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 텔로미어는 구조상 메틸화될 수 없지만 텔로미어가 감고 있는 히스톤은 아세틸기를 더하거나 떼어냄으로써 변형될 수 있다.  이렇게 텔로미어의 기능은 후성유전적 사건에서 영향을 받는다. 과학자들은 포유류의 세포에 존재하며 히스톤에서 아세틸 기를 제거할 수 있는 시르투인6(sirtuin-6, SIRT6)라는 단백질을 발견 했는데, 아세틸기 제거는 텔로미어의 기능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분자에서 아세틸기를 제거할 수 있는 단백질이 시르 투인6만은 아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단백질들은 상당히 많으며 이 부류를 탈아세틸화효소라고 총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 아세틸화효소는 히스톤뿐 아니라 다른 분자들에서도 다소 무차별 적으로 아세틸기를 제거한다." 시르투인의 특별한 재주는 텔로 미어와 관련된 히스톤들만 콕 집어 탈아세틸화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시르투인6는 텔로미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히스톤을 탈아세틸화한다. 우리가 이를 아는 이유는 실험적으로 시르투인6을 고갈시킨 인간 세포에서 텔로미어 손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르투인6는 그 후성유전적 작용을 통해 수명을 조절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실험 연구들은 유전자 조작으로 시르투인이 결핍되었으나 나머지는 정상인 생쥐들에게서 일찍 노화의 징후가 나타난다 는 것을 밝혀냈는데, 이 발견은 시르투인이 젊음을 부여하는 속 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그야말로 세상 을 놀라게 한 연구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한 연구팀이 유전자를 조 작하여 시르투인6을 과발현시킨 생쥐를 만들었더니 아니나 다를 까, 이렇게 유전자가 조작된 수컷 생쥐는 일반 생쥐에 비해 유의미 하게 수명이 더 길어졌다. 연구자들은 "[시르투인6]에 의한 포유류 수명 조절은 (...) 노화 관련 질환 치료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라 고 결론지었다. 27. 28 분명 이는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다. 

- 만성적 사회적 패배 스트레스 프로토콜에서는 수컷 실험생쥐를 매우 공격적인 생쥐와 함께 두는데, 그러면 실험 생쥐는 전 형적으로 달아나려 시도한다. 그리고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 면 보통은 비명을 질러대다가 결국 굴복하는 상태가 된다. 공격적 인 생쥐와 10분 동안 함께 두었다가 그 우리 안의 분리된 칸으로 실험 생쥐를 옮기는데, 여기서 이 생쥐와 공격자 생쥐를 분리하는 것은 구멍이 뚫린 투명한 플라스틱 칸막이뿐이다. 다음 24시간 동 안 실험 생쥐는 자기를 괴롭혔던 생쥐가 바로 옆 칸에 있는 걸 보 고 듣고 냄새를 맡으며 만성적 스트레스 상태로 지낸다. 다음 날에 도 이 전체 과정을 반복하는데, 이번에는 괴롭히는 생쥐가 새로운 생쥐로 바뀌어 있다. 이어서 열흘 연속으로 매일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 실험 프로토콜은 사람의 우울증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증상과 유사한 행동을 보이는 '패배자' 동물을 만들어 낸다. 
텍사스주 댈러스의 나디아 찬코바 연구팀은 이 처리법을 사용한 획기적인 연구에서 참담한 경험을 한 지 4주가 지난 패배 자생쥐에게서 꺼낸 해마를 검토했다. 연구팀은 해마 조직의 염색 질에서 특정 유전자들과 관련된 특정 히스톤들의 특정 위치에 더 많은 메틸기가 있음을 발견했고, 이로써 사회적 경험이 포유류뇌 에 장기적인 후성유전의 효과를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에 관해 이렇게 썼다. "우리의 발견은 히스톤 과메틸화가 해마에서 스트레스로 유도된 잘 변하지 않을 분자 수준의 흉터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음을, (...) 또한 억제된 유 전자들의 히스톤을 탈메틸화하는 데 효과적인 물질을 찾아내면 그것이 새로운 항우울 물질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

- 전자에 관한 은유는 부정확하다
후성유전학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유전체에 관해 사용하는 몇몇 은유가 우리의 형질을 초래하는 것에 관한 왜 곡된 관점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적 후성유전학 연구 시 기보다 훨씬 전부터 많은 이론가가 이런 은유들에 경종을 울렸으 며, 후성유전학 데이터는 그들의 주장을 한층 더 보강한다. 노스캐 롤라이나대학교 그린즈버러 캠퍼스의 심리학자 티머시 존스턴은 25년도 더 전에 그러한 염려를 표하며 "혼동으로 가는 길은 설득 력 있지만 부정확한 은유들로 포장되어 있다"라고 썼다.
존스턴이 우려를 표현한 구체적인 은유는 노벨상 수상자인 콘라트 로렌츠가 제시한 은유인데, 로렌츠는 "자연선택이 제공하 는 (...) 정보[는] (...) 유전자 청사진으로서 유전체에 부호화되어 있다"라고 생각했다. 이를 비판하며 존스턴은 이 은유가 “발달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성격을 심각하게 [오도한다]"고 강력히 주장했 다. 하지만 청사진 은유는 계속해서 인기를 누렸고, 그러자 다 른 비판자들도 이 논쟁에 가담했다.28 그래도 인기가 누그러들지 않자 뉴욕시립대학교의 과학철학자 마시모 필리우치는 2010년에 청사진 은유가 "한탄스러울 정도로 부적절하며 적극적으로 오해 를 유도한다"라고 썼다. 2
물론 2010년 즈음에는 몇몇 다른 이론가들도 비판적 관점 을 취하면서 다른 좋은 은유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한 과학자는 2006년에 "유전체는 청사진이라기보다 뜨개질 도안 이나 조리법에 훨씬 더 가깝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안타깝게 도 '조리법' 은유도 청사진 은유보다 그리 나을 게 없는 것이, 여전 히 부정확하게" 맥락과 별개로 사용할 수 있는 정보를 자연선택 이 우리 유전체 안에 부호화해서 저장해두었다고 암시하기 때문 이다. 후성유전적 표지가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는 발견 때문에 그 러한 은유들은 한층 더 쓸모없어졌다.
또 하나 '정보 은유' 역시 유전체가 발달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를 통제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것처럼 암시한다. 이 은유는 적어도 유전체가 유전체 이외의 것에서 들어오는 입력들에 반응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는 것이니 청사진이나 조리법 은유보다는 나아진 편이다. 하지만 다른 면들에서는 이 역시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은유의 최근 버전 중 하나는 우리가 유전자를 "거대 한 운영 시스템 속 서브루틴들"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33 그 러나 ENCODE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에 따르면 ENCODE 의 데이터는 "유전자가 거대한 운영 시스템에서 단순히 불러낼 수 있는 루틴이라는 은유와 맞지 않으며"3" 따라서 이 은유 역시 타당 하지 않다. 현재 우리가 후성유전학에 관해 알고 있는 바를 고려할 때, 이러한 은유의 공백을 채워줄 새로운 비유가 있을까?
후성유전학을 다룬 아주 훌륭한 책"에서 네사 캐리는 DNA를 대본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생각해보자. 1935년에 조지 큐커 감독은 영화판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레슬리 하워드와 노 마 시어러의 연기를 연출했다. 그로부터 60년 후, 배즈 루어먼 감독은 또 다른 영화 버전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 어 데인스의 연기를 이끌었다. (...) 두 편 다 셰익스피어의 대본을 사용했지만,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출발점은 같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수정돼야 한다
후성유전학 연구에서 얻은 둘째 교훈은 신다윈주의 진화론(엄격히 유전자 변이 빈도의 관점에서만 진화를 정의하는 이론)은 적 응적 형질을 만드는 일에서 발달이 하는 역할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물학의 통합 이론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서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여기서 필 요한 수정은 일부 지적설계론자의 주장과 달리 창조론의 관점 을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후성유전 연구는 사람이 다른 영 장류와 무관하다는" 신빙성 없는 관념 그리고 생물학적 시스템은 "환원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다윈주의의 관점으로 는 설명할 수 없다는 터무니없는 관념을 전혀 뒷받침하지 않는다. 또 하나, 신다윈주의에 필요한 수정을 실행하고 나면 사실상 우리 는 다윈이 원래 제시했던 개념들과 일치하는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80년쯤 지났을 무 렵, 다윈의 개념들을 전통적 유전학과 통합하려 시도하던 신다윈 주의 종합설의 설계자들은 유전자만의 관점에서 진화를 정의했 고, 그럼으로써 발달이라는 단순치 않은 문제는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적응적 형질은 발달에 의존하여 생겨나기(유 전자가 미리 정해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처사는 여러 문제의 소지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발달을 배제한 유전 자 이론으로 진화를 설명하려 한 신다윈주의의 시도는 '획득한 형 질은 '유전될 수 없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유전된' 형질과 '획득한 형질을 칼로 자르듯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일부 획득 형질들이 일관적으로 세대를 넘어 대물림될 수 있다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다윈의 원래 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아 보인다.
발달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신다윈주의 종합설을 수정해야 만 한다는 생각은 최근의 후성유전학에서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 기 전부터 있었으며, 후성유전학의 증거들은 신다윈주의 종합이 론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한층 탄탄히 해주는 것일 뿐이다. 에바 야블론카와 매리언 램은 정곡을 찌르는 논리로 이 상황을 잘 표현했다.
후성유전적 대물림은 (...) 진화론에 새로운 개념들, 현재의 신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전복적인 개념들을 도입한다. 후성유전학보다 문화를 먼저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상징적 문화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늘 진화적 변화 가 일어나고 있다. (...)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진화적 과정이 여러 다양한 문화를 만들 어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문화적 변이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DNA 변이와 별개로 분리된다. 그리고 문화적 진화를 이해하려 면 변이의 이러한 자립적 측면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후성유전 의 변이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전 가능한 후성유 전적 변이는 그 말의 정의상 유전자 변이와는 분리된다. 따라서 DNA 변이와는 별개로 진화에 선택될 수 있는 후성유전적 변이 들이 존재하며, 후성유전의 축에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일 은 불가피하다.
그러니 후성유전이 진화에 하는 기여를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는 진화론은 필연적으로 불충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정이 필요하다. 야블론카와 램은 다음과 같이 후성유전이 진화에 관해 암시하는 의미를 요약하며 논문을 마무리했다.
후성유전학은 유전 개념을 확장할 것을, 또한 자연선택을 작동 시키는 유전 가능한 변이에 서로 다른 몇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유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다윈주의, 즉 신다윈주의는 라마르크주의와 양립하지 않지만, 다윈주의는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라마르크주의와 다윈주의가 항상 상호배타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며, 서로 완전 히 양립 가능하며 상보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둘의 관계는 여전히 그렇다. 후성유전 체계가 진화에서 하는 역할을 인정한다면 발달과 진화를 더욱 밀접히 통합하는, 더욱 포괄적이며 강력한 다윈주의 이론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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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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