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정 기간에 과학 천재가 무더기로 쏟아져나온 '헝가리 현상'이 당시 헝가리 사회에 만연했던 2개의 사조, 즉 '자유주의와 봉건주 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 유태인들은 주변에 있는 다른 유럽 국가의 유태인보다 자유로웠 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기가 비교적 쉬웠지만, 권력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공무원과 군대는 헝가리의 귀족들이 거의 독점한 상태였다. 대체로 가난하면서도 상류층 의식이 유난히 강했던 전통 귀족들(흔 히 '샌들을 신은 귀족sandaled nobility'이라 불렸다)은 나날이 번성하면서 귀족사회까지 넘보는 비- 헝가리계 유태인들을 몹시 경계하고 있었 기에, 외국에서 이주해온 유태인을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금융계나 의료계에 종사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다른 생각을 품 지 못하도록 간간이 (믹사에게 했던 것처럼) 귀족 칭호를 하사하면서 충성심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로스앨러모 스의 화성인들은 예외 없이 유태인이었고, 그중 두 명은 귀족 칭호 를 하사받은 유태계 -헝가리 가문 출신이었다.
노이만은 자신과 비슷한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헝가리 현 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것은 일부 사회적 요인들이 동시에 작용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도태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개인의 성취동기를 극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유태인에게 관대했던 헝가리의 분위기가 하 룻밤 사이에 바뀔 수도 있었기에, 오직 살아남기 위해 초인적인 능력 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20세기 초에 유태인 학자가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헝가리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 는 분야는 수학과 물리학뿐이었고, 이 분야에서 성공하면 출신 성분 에 상관없이 공정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예 를 들어 일반상대성이론general relativity theory의 진위 여부는 제안자가 유태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상관없이 오직 실험을 통해 검증될 뿐이 다(아인슈타인은 유태인이었다-옮긴이).
헝가리 사회와 학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건, 노이만에게는 모 든 조건이 유별난 수학적 능력을 함양하기에 알맞은 조건으로 세팅 되었던 것 같다. 1914년에 루터교 재단의 파로시 김나지움에서 학교 생활을 시작한 후로, 그는 비범한 능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 했다. 당시 수학계에서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송두리째 뒤흔 드는 심각한 역설이 발견된 상태였다. 수학자들은 수백 년 전에 증 명된 정리까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새로운 기준에 기초한 증명을 들 이대며 "이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정리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총체적 위기에 처한 상황에 서, 열일곱 살의 천재 노이만이 실력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 베를린은 활기찬 밤문화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1920년대에 과학의 공용어는 영어가 아 닌 독일어였고, 양자역학의 초기 논문은 독일어로 써서 독일 학술지 에 게재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젊은 학자들이 참석하 는 학회와 세미나가 거의 매일 개최되었으며, 카페와 술집에서도 신 변잡기보다 학술적인 대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1988년에 위그너는 한 인터뷰 자리에서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비슷했습니다. 일류 과학 교육은 찾아볼 수 없고 덩치만 큰 나라였지요. 과학 최강국은 누가 뭐라 해도 독일이었습니다."
노이만은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과도한 준비로 발표를 망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세미나 장소를 향해 기차 를 타고 가면서 자신이 발표할 내용을 곰곰 생각하다가, 정작 세미 나장에 나타나면 아무런 노트도 없이 곧바로 수식을 써내려가곤 했 다. 한참 계산을 하다가 칠판이 가득 차면 먼저 썼던 방정식의 일부 를 쓱 문질러서 지우고 그 자리에 달라진 내용을 채워 넣었다(그의 계산을 노트에 받아 적던 사람은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노이만만큼 계 산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즉, 모든 사람)들은 그의 독특한 강의 방 식을 지워서 증명하기 proof by erasure "라 불렀다. 강연 도중에 청중들 이 지루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노이만은 3개 언어로 음란한 농담을 구사하면서 분위기를 바꾸었고, 다른 사람이 지루한 발표를 할 때에 는 청중석에 조용히 앉아 다른 엉뚱한 수학 문제를 풀곤 했다.
- 모든 문제는 원자와 광자의 상호작용이 현미경이나 분광기, 또는 우리의 눈을 통해 관측되는 '양자물리학과 고전물리학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양자 이론에 의하면 입자는 무수히 많은 상태가 겹쳐진 '중첩 상태 superposotion'로 존재할 수 있다. 원자에 속박되지 않은 자 유전자 1개는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 전자를 서술하는 파동함수에는 모든 가능한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누군가가 인광판phosphor screen(유리에 형광체를 칠하여 전자가 닿으면 발 광하도록 만든 판옮긴이)을 이용하여 전자 1개를 '붙잡았다고' 가 정해보자. 전자가 인광판에 닿으면 형광물질이 광자를 방출하면서 '방금 전자가 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로써 자 신의 위치를 들켜버린 전자는 여러 개의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가 아 니라, 위치가 하나의 값으로 정해진 '단 하나의 상태'에 놓이고, 관 측자는 모든 공간에 넓게 퍼져 있는 전자의 파동함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전자는 어떤 관측자도 볼 수 없는 중첩 상태 에 있거나(관측 전), 명확하게 정의된 하나의 위치에 놓여 있거나(관 측후), 둘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실행한 관측 행위 때문에 자신의 위 치가 발각되는 순간, 전자는 곧바로 양자적 특성을 던져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전적인 모습을 태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노이만은 관측 전후에 판이하게 달라지는 이 두 가지 상태를 이 론의 기초'라고 했다. 처음에 (관측 행위가 개입되기 전) 입자는 모든 가능성이 중첩된 파동함수로 서술된다. 이 파동함수는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의 해로서 임의의 시간, 임의의 공간에서 입자의 상태를 완벽 하게 서술하고 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지구 주변을 도 는 인공위성의 운동 상태를 정확하게 계산해주듯이, 슈뢰딩거의 파 동방정식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파동함수가 변해가는 양상을 정 확하게 알려준다. 여기까지는 뉴턴의 운동 법칙만큼이나 결정론적 이다(원인을 알면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원인을 알면 입자의 파동함수를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결정론'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다-옮긴이). 그러나 입자로부터 위치나 운동량 같은 정보를 추출하 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기만 하면 파동함수가 마치 거품처럼 터지 면서, 그 많았던 가능성 중 단 하나가 무작위로 결정된다. 
- 노이만의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뛰어난 수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최고의 명작으로 손색이 없다. 영국의 한 소년은 수학 경시대회에서 우승하여 이 책(독일어 버전)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단숨에 읽은 후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보냈다. "정말 재 미있게 읽었어요. 하나도 어렵지 않던데요?" 노이만의 책을 소설 읽 듯이 술술 읽었던 그 소년의 이름은 앨런 튜링 Alan Turing이었다." 그 러나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한 젊은 수학자의 거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책이기도 했다. 독자들 중에는 "28세밖에 안 된 신출내 기 수학자가 마치 자신이 양자역학의 종결자인 양 잘난 척을 하고 있다"며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 에르빈 슈뢰딩거는 코펜하겐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노이만의 책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후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교 환하면서 양자역학의 취약점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이다가, 대 상을 가리지 않고 양자역학을 마구잡이로 적용하는 추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한 가지 사고실험 thought experiment (현실적으로 실행이 불가능하여 생각만으로 진행되는 실험-옮긴이)을 제안했다. 노이만의 주장대로 양자역학의 법칙이 큰 물체에도 적용된다면, 벌레나 쥐에게도 적용 되지 않을까? 아니, 우리와 좀 더 친한 고양이는 어떨까?
슈뢰딩거는 1935년에 발표한 논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층 더 터무니없는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다. 고양이 한 마리를 철제 상자에 가두고,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무 시무시한 장치를 설치했다고 하자(단, 고양이가 이 장치를 망가뜨리지 않 도록 잘 단속해야 한다. 가이거 계수기 Geiger counter (입자를 탐지하여 방사 능을 측정하는장치-옮긴이) 안에 작은 방사성 물질 한 조각을 넣어둔다. 이 물질은 한 시간 안에 원자 1개가 붕괴할 확률이 50퍼센트이며, 붕괴 되지 않을 확률도 똑같이 50퍼센트이다. 만일 원자가 붕괴되면 계수기 의 눈금이 움직이면서 연결된 망치가 작동하여 시안화수소산(청산)이 들어 있는 작은 병을 깨뜨리도록 세팅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상자의 뚜껑을 닫고 한 시간 동안 방치해두었다고 하자. 만일 그 사이에 원자 가 하나도 붕괴되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한 시간 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가 붕괴되었다면 첫 번째 붕괴가 일어나는 즉 시 고양이는 죽는다. 그렇다면 전체 시스템을 서술하는 파동함수(4)에 는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죄송!) 같은 비율로 섞여 있을 것 이다.
-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 로 통일하기 위해 몇 년 동안 노력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노이만의 머릿속에서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 뜩였고, 오히려 너무 많이 떠올라서 주체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 1930년대에 제기된 노이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다음 한 가지뿐이 다. “노이만은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한 후 조금 있으면 그 주제에 흥 미를 잃곤 했다. 그 후에 실행해야 할 후속 계산이 산더미처럼 쌓였 는데도, 그는 모든 것을 후발 주자들에게 떠맡기고 곧바로 다음 주 제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고등연구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시기에 노이만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에르고딕 가설 ergodic hypo-thesis을 증명한 것이었다. 에르고딕ergodic은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ergon(에르곤'과 '길'을 뜻하는 'odos(오도스)'의 합성어로, 오스트리 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이 1870년대에 처음으 로 도입한 개념이다. 볼츠만은 기체를 구성하는 입자(원자 또는 분자)의 운동으로부터 기체의 특성(온도, 압력 등)을 알아냈다. 이것을 기체 운동이론kinetic theory of gas이라 하는데, 이 이론에서 그는 기체가 에 르고딕 가설을 만족한다고 가정했다. 대충 말하자면 기체가 보유 한 임의의 특성을 시간에 대해 평균한 값은 공간에 대해 평균한 값 과 같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풍선 내부의 압력을 긴 시간에 걸쳐 측 정하건, 임의의 특정한 순간에 풍선 내부의 원자들이 내벽에 가하는 압력을 모두 더하건, 그 결과는 항상 같다."
볼츠만은 이 가설을 증명하지 못했고, 노이만은 1930년대에 증명 에 성공했다. 그는 이 증명을 곧바로 공개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소 식을 전해 들은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수학자 조지 버코프 George Birkhoff가 노이만의 논리에 기초하여 더욱 확고한 수학 정리를 만들 어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전용 휴게실에서 마주쳤을 때 노이만은 발표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보다 스무살 연상이었던 버코프는 젊은 수학자의 요청을 무시하고 자신의 증명을 논문으로 출판했다. 노이만의 몸에 밴 유럽식 정중함이 경 쟁심에 불타는 버코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노이만은 버코프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지 않았고, 훗날 그의 아 들 개릿 Garrett과는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노이만과 개릿 버코프는 공동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논문의 주제는 고전적 논리연산이 양자역학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전 논리의 분배법칙에 의하면 'A 그리고 (B 또는 C)'는 '(A 그리고 B) 또는 (A 그리고 C)' 와동치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런 동치 관계가 성립하지 않 는다. 상식적인 직관에 어긋나지만, 사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로부터 파생된 결과이다. 그로부터 30년 후, 개릿 버코프 는 노이만이 1930년대에 이룬 업적의 일부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 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노이만의 면도날 같은 영 민함을 느끼고 싶다면, 그가 했던 대로 일련의 논리를 정확하게 구 사하면 된다. 단,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거실 책상에 앉아 최소 다섯 페이지 이상 계산을 해야 한다. 물론 자신이 목욕 가운을 입고 있다 는 사실을 도중에 알아채도 안 된다.
개릿과 공동 논문을 집필하던 무렵, 노이만보다 여덟 살 아래인 추레한 외모의 영국 청년 앨런 튜링이 노이만의 눈에 띄었다. 튜링 은 노이만이 개발했던 군론group theory을 발전시켜서 1935년 4월에 첫 논문을 발표했는데, 때마침 이 시기에 노이만이 영국 케임브리지 를 방문했고 튜링은 킹스칼리지에서 군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적인 자리에서 처음 만나 얼굴을 익힌 후, 다음 해 9월에 튜 링이 프린스턴에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었을 때 다시 만났다. 튜링 이 노이만에게 방문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로부 터 5일 후, 튜링은 파인홀에 있는 연구실에서 현대 컴퓨터과학의 초 석이 될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 문제의 응용에 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는 논문의 초안을 완성했다. 프린스턴의 수학자들은 이 논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 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노이만과 함께 컴퓨터를 연구했던 헤 르만 골드스타인 Herman Goldstine은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서 술했다. "튜링과 노이만의 연구실은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고, 노이 만은 그런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튜링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문 제인지, 노이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이만은 튜링 에게 높은 연봉의 연구조직을 제안했지만, 튜링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1938년 7월에 프린스턴을 떠났다. 자신의 조국인 영국에 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노이만의 선견지명은 1928년과 1939년에 괴팅겐의 수학자 루돌 프 오르트베이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또 그가 1935년 에 헝가리의 수학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앞으로 10년 안에 유럽에 큰 전쟁이 터질 것입니다. 그때 영국이 위기에 처하면 미국까지 참전할지도 모릅니다.” 노이만은 전쟁 중 에 유럽의 유태인들이 대량학살을 겪을 것이며, 그 규모는 오스만제 국 치하에서 아르메니아인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했다. 당장 돗자리를 깔아도 될 것 같은 그의 예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 다. "1940년에 영국은 독일의 침공을 해안에서 막아낼 것이며(당시에는 군사 전문가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다음 해에 미국이 전쟁에 끼어 들 것이다(미국은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공격당한 직후 제2차 세계대전 참 전을 선언했다)." 미국이 곧 전쟁에 휘말릴 것을 예측한 노이만은 자신 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전쟁 준비를 돕기로 마음먹고, 참전 여부 에 영향을 행사할 만한 정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다녔다. 그가 1941년 9월에 자신의 지역구 하원 의원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히틀러에게 대항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닙니다. 문명국이라면 당연히 참전하여 그를 물리쳐야 합니다. 미국이 히틀러와 타협한다면 머지않아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 노이만을 프린스턴으로 불러들였던 오스왈드 베블런은 제1차 세 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육군 병기국 소속 대위로 복무하다 가 메릴랜드주의 애버딘 무기실험장에 새로 건설된 탄도학연구소 Ballistics Research Laboratory (BRL)에 기술감독관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 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 연구소의 주요 업무는 포사체의 궤적을 연구하여 포탄의 유효 사거리와 파괴력을 개선하는 것이었는데, 상 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시 연합군이 사용하던 대포는 포탄을 수 천 피트 상공으로 쏘아 올려서 수 킬로미터쯤 날아가는 수준이었으 나, 독일의 악명 높은 '파리대포Paris Gun'는 사거리가 무려 110킬로 미터에 달했다. 포사체를 높은 고도로 쏘아 올리면 공기가 희박해져 서 저항을 덜 받기 때문에 사거리가 길어진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초기 계산이 아무리 정확해도 결국 포탄은 표적보다 먼 곳에 떨어지게 된다. 여기에 좀 더 복잡한 변수(움직이는 표적, 발사면의 상태 등)까지 고려하면 포탄의 운동방정식이 너무 복잡해서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데(수학 용어로 '비선형 방정식 non-linear equation'이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정확한 답을 포기하고 근사치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근사치를 구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계산이 너무 많다는 것이 다(방정식의 정확한 해를 구하는 과정은 우아하고 간결한 수학이지만, 근사치를 구하는 것은 무식한 중노동에 가깝다-옮긴이). 일반적으로 포탄 1개의 궤 적을 계산하려면 수백 번의 곱셈을 수행해야 한다. 이럴 때 1초당 수 천 번 연산을 실행하는 기계가 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당시는 아 직 발명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이 기에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그 덕분에 방 한 칸 크기의 육중한 컴퓨터가 최초로 탄생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미군의 관심사는 더 큰 대포, 더 큰 폭 탄을 만드는 쪽으로 옮겨갔다. 대포로 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탄은 폭격기나 미사일, 또는 어뢰에 장착해서 적진에 배달하면 된다. 폭 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충격파의 수학적 특성은 초음속으로 발사된 포탄의 수학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폭탄의 파괴력을 극 대화하려면 폭발의 유체역학적 원리 및 이와 관련된 비선형 방정식 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1930년대 초에 노이만이 관심을 기울인 문제였다(미군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돈을 우려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1937년에 베블런의 요청에 따라 애버딘 무기실 험장의 시간제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 1939년 1월 16일, "우라늄 Uranium (U)을 쪼갤 수 있다"는 초특급 정 보가 배를 타고 미국에 전달되었다.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 과 그의 조수인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이 우라늄 원자에 중 성자를 빠르게 충돌시켰을 때 우라늄의 절반보다 작은 바륨으로 쪼 개지면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당 시에는 그런 형태의 방사성붕괴가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학 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반응의 원리를 알아낸 사람은 오토 한 의 옛 동료인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Lise Meitner와 그녀의 조카 오토 프리슈Otto Frisch였다. 이 핵반응은 훗날 '핵분열 nuclear fi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빈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마이너는 1938년 7월에 극적으로 독일을 탈출한 후, 스톡홀름에 있는 노벨연 구소에서 약간의 급여를 받으며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직후에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의 실험 결과를 전해 들 은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우라늄 원자의 핵이 기존의 짐작처럼 단단 한 덩어리가 아니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젤리와 비슷하다고 생각 했다. 중성자가 우라늄 원자의 핵과 높은 에너지로 충돌하면 핵의 일부만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핵 전체가 분열되어 가벼운 원자핵으로 변하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이다. 1939년 새해 첫날, 프리슈는 미국행을 하루 앞둔 보어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면서 자신의 논문이 학술지에 실릴 때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보어는 함께 승선한 동료 물리학자 레온 로 젠펠트 Léon Rosenfeld에게 금단의 지식을 털어놓았고, 두 사람이 핵분 열의 세부사항을 계산하는 동안 어느새 배는 미국 본토에 도착했다. 보어와 프리슈 사이의 약속을 전혀 몰랐던 로젠펠트는 즉시 기차를 타고 프린스턴으로 달려가서 놀라운 소식을 전했고, 핵분열에 관한 소문은 거의 광속으로 퍼져나갔다. 노이만은 1939년 2월 2일 자로 오랜 친구 오르트베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라늄 바륨 분해 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기 프린스턴에서는 이 문제 때문에 아주 난리가났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몇 달 전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은 직후 이탈리아의 파시스 트 정권을 뒤로 하고 유태인 아내 라우라 카폰Laura Capon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참이었다. 핵붕괴 이론의 대가였던 페르미는 프리슈 의 이론을 듣는 즉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자 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창밖으로 맨해튼을 바라보 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폭탄 하나로 모든 게 사라지게 생겼 군...."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모든 상황을 파 악했다. 얼마 후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폭탄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 져 있었다.
- 몇 가지 증거에 의하면 독일은 이미 1943년 3월부터 미국의 핵폭 탄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정책 입안자들은 독일에 투하한 핵폭탄이 불발되었을 경우, 독일의 과학자들이 그것을 분해하여 그 들만의 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며 폭탄 투하를 반대해왔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과학기술이 독일 보다 못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심각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인종차별주 의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인 은 일본에서 건너온 이민자를 몹시 경멸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직후 미국 정부는 수천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집단수용소에 가둬놓고 평범한 시민을 범죄자로 모는 등 인종차별과 전시 히스테리 wartime hysteria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것은 전시상황에 벌어진 비 상대책이라기보다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 가깝다. 혹자는 핵폭 탄을 '진주만 공습의 복수'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이건 간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차출된 비미국 출신 과학자들에게 "여기서 만 든 핵폭탄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떨어질 것"이라고 미리 통보했 다면, 그들은 도중에 그만두거나 애초부터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이만에게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헝가리에서 벨라쿤의 횡포에 시달리고 독일에서 나치의 폭정을 목격한 그는 전체주의 정권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독일 이 항복한 후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스탈린이 이 끄는 소련이다. 그런 적을 견제하려면 핵폭탄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 어서 확실한 경고를 날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이 일본을 점령하면서 끝날 것이고, 스탈린은 태평양에서 확고 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것은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 자마자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일본 제2의 섬인 홋카이도를 넘겨달라는 '소박한 부탁'을 해왔고, 트루먼은 헛웃음을 참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만일 미국에 원자폭탄이 없었다면 그토록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 노이만은 ENIAC이 단순한 폭탄 제조용 도구가 아님을 보는 즉시 간파했다. 그는 ENIAC을 처음 본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종류의 컴 퓨터를 구상하고 있었다.
ENIAC의 설계자들은 프로젝트 초기부터 기계에 단점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50킬로와트(kW)에 달하는 소비전력의 절반 이상이 진공관을 달구거나 식히는 데 소비되었고, 각 부위의 계산부하량을 고려하여 배치를 아무리 열심히 조절해도 이틀에 한 번꼴 로 진공관이 파열되었다. 연구원들은 오작동이나 연결 불량으로 발 생하는 작동 중단 사태를 최소화하기 위해, ENIAC의 부품을 신속하 게 교체할 수 있는 표준 플러그-인 단위로 바꾸었지만, 그래도 작동 하는 시간보다 작동을 멈춘 시간이 더 길었다. 1947년 12월, ENIAC 이 계약에 따라 탄도학연구소로 옮겨졌을 때, 《뉴욕타임스》에는 다 음과 같은 기사가 살렸다. "전체 가동 시간의 17퍼센트가 기계를 설 정하고 테스트하는 데 사용되고, 41퍼센트는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 는 데 소모된다. 실제로 필요한 계산을 하는 시간은 전체의 5퍼센트 에 불과하다. 즉 일주일 내내 켜놓아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 단 2시간뿐이다.
ENIAC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다른 용도가 부각되자 기계의 존재 이유가 가장 큰 단점으로 떠올랐다. 프로젝트 팀원 중 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간 파한 사람은 노이만이었다. 팀원뿐만 아니라, 그만큼 잘 아는 사람 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그 램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컴퓨터"의 설계도가 이미 노이만 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ENIAC 운영팀은 프로젝트 를 진행하는 동안 나름대로 기계의 단점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물색 해왔는데, 여기에 노이만이 합류하여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이들 은 ENIAC의 후속 컴퓨터 개발계획서를 빠르게 작성하여 탄도학연 구소에 제출했고, 8월 29일에 개최된 지휘부 회의에서는 골드스타 인과 노이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낭보를 전해 들은 무어스쿨의 연구팀은 새로운 컴퓨터 개발 계획에 '프 로젝트 PY'라는 암호명을 붙이고 곧바로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이 들은 다음 해 3월까지 노이만이 토론 결과를 요약해줄 것으로 기대 했지만, 실제로 노이만은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된다.
어느덧 노이만은 자신의 전공이 아닌 전자공학 분야에서도 상당 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진공관의 형태에 따른 장단점까지 파악한 그는 새로운 기계에 사용할 전기 회로를 직접 설계하고 싶었다. 그 러나 그는 공학자가 아니라 복잡한 문제를 낱낱이 분해하여 가장 근 본적인 질문으로 바꾸는 데 능통한 수학자였기에, 자신의 재능을 십 분 발휘해서 중구난방으로 제기되는 ENIAC 팀의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쪽에 쓰기로 했다. 헤이그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회상한다. "노이만을 심미주의자라 할 수는 없겠지만, ENIAC을 대 하는 그의 태도는 신실한 칼뱅주의자가 중세의 화려한 성당에 들어가서 프레스코화에 하얀 회칠을 하고 쓸데없이 화려한 장식을 사정 없이 지워버린 행위와 비슷하다. 이 과감한 자세는 새로운 컴퓨터 의 기본 형태를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공학자와 과학자들에 게 영감을 불어넣어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대로" 컴퓨터를 만들도록 이끌었다.
흥미로운 것은 노이만이 20세기 초에 수학에 닥쳐온 위기를 극 복하면서 연마한 실력이 첨단 컴퓨터의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는 점이다. 현대 컴퓨터의 지적 기원이 완전하고 결정 가능한 수학 체계를 세우려는 힐베르트의 시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힐베르트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발표한 직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쿠르 트 괴델은 "수학이 완전하거나 자체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악몽 같은 정리를 증명했다. 그리고 그 로부터 5년 후, 23세의 영국인 수학자 앨런 튜링은 힐베르트의 '결 정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공략하여 수학이 결정 불가능함 을 보여주는 상상 속의 기계를 소환했다. 노이만은 현대식 컴퓨터 의 개념을 구체화할 때 괴델과 튜링의 논리 체계를 가이드라인으 로 삼았는데,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컴퓨터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문으로 꼽히는 노이만의 역작 「EDVAC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 First Draft of a Report on the EDVAC」에 잘 나와 있다." (EDVAC은 Electronic Discrete Variable Automatic Computer의 약자이다-옮긴이) 컴퓨터 공학자 볼프강 코이 Wolfgang Coy는 이 논문을 "현대식 컴퓨터의 출생증명서"로 정의했다. 완벽한 수학을 추구했던 힐베르트의 프로그램이 좌초된 지 10년 만에 엉뚱한 곳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 괴델의 증명에는 그 유명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다시 등장하는데,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상하게도 이 명제는 거짓일 때만 참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문법학자와 논리학자들은 이 역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 었다. 그러나 괴델은 이것을 참, 거짓의 여부가 아닌 '증명 불가능 성'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재서술했다. "명제는 주어진 계system 안에서 증명될 수 없다."
- 문장 자체는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그러나 괴델은 문장 전체를 G라 는 명제로 표현하고 이것을 다시 g에 대입하여 재귀적인 문장으로 만들었다. 자, 이제 명제 G가 증명될 수 없다면 G는 참이다. 이와 반 대로 G가 증명될 수 있다면 G는 거짓이다. 그런데 이는 곧 "G는 증 명될 수 없다"는 원래 진술이 참이라는 뜻이므로, G는 참이기도 하 다. 그러나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진술은 수학에서 아무런 쓸모 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옵션, 즉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 는 진술이 존재한다"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 결과에 담긴 의미 중 하나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괴델 도 말년에는 이 점에 동의했다). "수학적 진실은 '이곳in here'에 있지 않고 '저 너머 out there'에 존재한다. 따라서 수학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 견된 것이다."
- 지금도 컴퓨터 설계자들은 컴퓨터의 전체적인 구성을 '폰 노이만 구조von Neumann architecture'라 부르고 있으며, 요즘 사용되는 대부분
의 컴퓨터(스마트폰, 노트북, 데스크톱 등)는 이 원칙에 따라 제작된다. 단, 여기에는 메모리에서 명령과 데이터를 찾거나 가져올 때 순차적 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단점이 있다. 이것을 '노이만 병 목현상 von Neumann bottleneck'이라고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메시지를 앞뒤로만 전달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것은 어 떤 연속 처리 방식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단순한 구조에 서 얻은 엄청난 장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 단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ENIAC은 더하고 빼는 모듈module(독립적인 구성 요소-옮긴이) 이 20개인 반면, EDVAC에는 단 하나밖에 없다. 회로가 단순하면 고장이 적고, 이는 곧 기계의 신뢰도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뜻이다.
-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노이만 프로젝트에 합류하기 전에 몇 년 동안 IBM에서 일했던 비글 로는 1938년에 한 인터뷰 자리에서 "IBM은 매우 기계 지향적인 회사로서 전자식 컴퓨터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노이만 이라는 인물과 그로부터 탄생한 수많은 컴퓨터에 자극받은 IBM은 회사의 방침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EDVAC에 기초한 프로그램 저 장형 디지털 기기를 생산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비글로는 IBM 701이 "우리 기계의 단순 복제품"이라며 깎아내렸지만, 1960 년대에 IBM은 전 세계 전자 컴퓨터의 70퍼센트를 생산하는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텔러는 IBM이 벌어들인 돈의 절반이 노이만에 게 진 빚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노이만은 자신이 발명한 기계의 잠재적 가치를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1955년에 컴퓨터의 전체적인 능력이 1945년 이후로 매년 거의 두 배씩 향상되어왔음을 지적했고 그 후에도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노이만의 예측은 집적회로 integrated circuit에 들어가는 회로소자의 개수가 매년 두 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 Moore's law'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인텔Intel의 공동 창업주였던 고든 무어 Gordon Moore가 1965년에 했던 말인데, 연도로 보나 경험치로 보나 노이만이 원조였음은 두말할 필 요도 없다.
현대 컴퓨터의 기초인 논리학과 수학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사람이 그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영향력, 그리고 운영 능 력을 최고 수준으로 발휘하면서 더욱 강력한 기계가 만들어지도록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췄다니, 인류의 역사에 이런 인물이 또 나 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노이만이 세상을 떠난 후, 비글로는 다음 과 같은 글로 그를 추모했다. “노이만은 우리 마음속에 엉켜 있는 거 미줄을 말끔하게 제거했다. 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계산 능력이 과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침투하여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 틴 슈빅 Martin Shubik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학과 교수들은 오스카(모 르겐슈테른)를 아주 싫어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이해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판에 오스카가 아무 데서나 귀족티를 내고 다녔으 니,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거나 다름없었다. 훗날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MIT에 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학자 로버트 레너드Robert Leonard를 만난 자리에서 조용히 말했다. "모르겐슈테른은 나폴레옹 같아요.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본인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게임이론』을 푸대접한 진짜 이유는 "경제 문제를 다루 는 이론”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게임이론』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느슨한 결말이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3인 이상이 참여한 게임에서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제시한 '협동해 cooperative solution'였다. 『게 임이론』은 참가자가 얻은 효용성(소득)이 다른 참가자에게 항상 매 끄럽게 넘어갈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 '소득'이 묵직한 돈다 발이 아니라 성가신 물건이라면 이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0파운드짜리 지폐 한 장은 백만장자보다 노숙자에게 더 많은 가치가 있다. 게다가 『게임이론』은 연합을 맺은 플레이어들이 수익 을 나누는 규칙도 명시하지 않았다.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경우, 공정 한 분배의 원칙은 무엇인가?
2- 게임에서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제시한 '안정적 집합'도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모든 형태의 다중 게임에서 누군가가 더 나은 거래를 위해 기존의 계약을 파기해도 피해를 입지 않는 굳건한 연합 이 존재할 것인가? 노이만은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게임이론」이 출간되고 25년이 지난 후, 수학자 윌리엄 루카스 William Lucas는 안정 적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 10인 게임을 찾아냈다.
비제로섬 게임에 대한 노이만의 접근방식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다. 수학자 제럴드 톰슨Gerald Thompson은 말한다. "노이만이 도입한 가상의 플레이어는 몇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지만 비제로섬 게임 을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이것이 유난히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제로섬 게임이 현실에 적용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 『게임이론』의 가장 큰 맹점은 플레이어들이 연합을 결성할 수 없 거나, 연합을 원치 않거나, 연합 자체가 금지된 경우를 고려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게임이론』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기적인 개인 에게 초점을 맞춰서 대중의 인기를 끌었듯이, 책의 저자인 노이만 자신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이기적인 사람이 었다. 그러나 연합을 결성해야 유리해지는 상황에서 굳이 개인 플레 이를 선택하는 것은 노이만이 간직해온 중앙유럽인의 기질과 다소 거리감이 느껴진다. 노이만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 생각했다. 로버트 레너드는 "노이만에게 동맹과 연합은 모든 사 회조직 이론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고 했다.
『게임이론』은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생각했던 "전략적 행동 의 완벽한 지침서"가 아니었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우아하면서도 즉시 적용 가능한 모형으로 알려진 '2인 제로섬 게임'은 책이 출간되기 거의 20년 전에 노이만이 증명했던 최대최소 정리에 기초한 것이고, 명의 참가자들로 진행되는 "제로섬 게임은 게임이론』을 집필하던 무렵에도 노이만의 머릿속에서 한창 개발되던 중이었다. 그러나 효용성 utility의 개념과 게임의 엄밀한 서술, 그리고 다양한 표 현법 등 노이만이 이룬 위대한 업적은 후대 수학자들이 세울 웅장한 건축물의 주춧돌이 되었다. 노이만의 손때가 잔뜩 묻은 이론은 훗날 존 내시와 로이드 섀플리Lloyd Shapley, 데이비드 게일 David Gale 등 신세 대 학자들의 연구 의욕을 사정없이 자극했고, 노이만을 계승한 이들 의 업적은 1960년대 경제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 스스로 자신을 복제하는 기계
이 모든 시도에 영감을 불어넣은 책이 바로 노이만의 『자기복제 오 토마타 이론 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이다. 고등연구소에서 컴 퓨터를 만들고 정부와 산업체의 자문 역할을 하던 와중에, 그는 생 명체의 기관과 인간이 만든 기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서 무엇을 알게 되건, 제작 중인 컴퓨터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 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1951년에 발표한 또 한 권의 저 서 오토마타의 일반적 및 논리적 이론The General and Logical Theory of Automata』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일반적으로 자연 유기체는 훨 씬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기계보다 이해하기 어렵 다. 그러나 유기체에서 발견된 일부 규칙은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 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공신경망 artificial neural network에 대한 매컬러와 피츠의 논문을 읽 은 후로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노이만은 졸 스피겔만Sol Spiegelman 과 막스 델브뤽 Max Delbriück 등 분자에 기초하여 생명을 연구하는 과 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항상 그래왔듯이 노이만은 이 분야를 폭넓게 파고들다가 다소 불확실하면서도 직관적인 아이 디어를 떠올렸고, 그의 아이디어는 훗날 이 분야에 투신한 학자들 에게 방대한 양의 연구 과제를 안겨주게 된다. 또한 그는 세포분열 중 염색체가 분리되는 원리를 주제로 강의를 한 적도 있으며, 미생 물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여 수학자이자 생명과학자인 노버트 위너 Norbert Wiener에게 "전자현미경으로 박테리오파지 bacteriophage (세포 안에 서 증식하는 바이러스-옮긴이)의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 후로 20년 동안 델브뤽과 살바도르 루리 아Salvador Luria의 연구팀은 노이만이 말했던 바로 그 연구를 수행하 여 DNA 복제와 유전자 암호의 특성을 알아냈고, 최초로 바이러스 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 노이만은 1944년부터 노버트 위너가 주최한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두뇌와 컴퓨터의 연관성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 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한시적으로 열린 '목적론 학회 Teleological Society'와 '인공두뇌 학술회의 Conference of Cybernetics'에서 참가자들이 "두뇌와 컴퓨터는 어떻게 '목적이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일 때에도, 회의의 중심에는 항상 노이 만이 있었다. 다른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는 회의가 시작되 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다가,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서 정보와 엔트로피, 또는 논리회로에 관한 강의를 한두 시간동안 하고는 다시 허겁지겁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하다가 회의가 끝난 후 따로 시간을 내서 노이만의 강연을 주제로 자기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회의 에 참석했던 한 과학자는 신경해부학에 관한 노이만의 강의를 듣는 것이 "연 꼬리에 매달린 채 허공에서 펄럭이는 기분"이라고 했다. 위너는 토론 중에 코를 골면서 자다가 한참 후에 깨어나서는 "자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다 듣고 있었다"면서 그동안 오갔던 이 야기를 정리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누락된 내용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오토마타 이론은 1948년 9월 24일에 패서디나에서 '행동의 두뇌 역학Cerebral Mechanics in Behavior'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힉슨토론회Hixon Symposium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공개된 내용을 정리하여 1951년에 책으로 출판한 것이 노이만의 『오토마타의 일반적 및 논리적 이론」이다. 노이만은 오토마타의 핵심 아이디어 를 꾸준히 생각해오다가 2년 전에 프린스턴의 비공개 강의에서 처 음으로 소개했는데, 강의가 끝나갈 무렵 노이만이 “오토마타는 자 신만큼 복잡한 또 다른 오토마타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 기하면서 관심의 초점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처음에 그는 '부모'에 해당하는 기계가 새로 만들 기계의 모든 구조를 완벽하게 알고 있 으면서 조립에 필요한 도구까지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 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내 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자연 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명백하게 모순된다"고 했다. 유기체는 자신 을 복제하여 새로운 유기체를 낳고, 새로 낳은 유기체는 원래 유기 체와 똑같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명체들은 오랜 진화를 거 치면서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 변해왔다. 인공 및 천연 오토마타의 원리를 모두 설명하는 이론이라면, 인간이 만든 기계가 번식하고 진 화하는 방법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300년 전에 프랑스의 철학 자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인간의 몸은 기계에 불과하다"고 선언했을 때, 그의 23세 제자였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Queen Christina이 반문했다. "나는 아기를 낳는 시계를 본 적이 없는데요?" 너무나도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300년이 지난 지금은 기계 도 사람처럼 번식할 수 있을까? 노이만은 이 질문을 최초로 떠올린 사람이 아니었지만, 답을 제시한 최초로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 게 된다.
노이만이 구축한 이론의 중심에는 범용튜링머신이 자리 잡고 있 다. 임의의 튜링머신의 세부 구조와 작동 원리가 주어지면 범용튜링 머신은 그것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다. 노이만은 주특기인 계산 을 잠시 접어두고 "튜링머신 스타일의 오토마타가 자신을 복제하려 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파고든 끝에, 세 가지 필요충분조 건(이 조건을 만족하면 복제가 가능하고, 복제할 줄 아는 머신은 이 조건을 만족 하는, 그런 조건-옮긴이)을 찾아냈다. 첫째, 자신을 닮은 복사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일련의 지침(명령)이 주어져야 한다. 이 지침은 원리적 으로 튜링의 종이테이프와 비슷하지만, 기계 자체와 동일한 재질이 어야 한다. 둘째, 기계에는 이 지침을 실행하여 새로운 오토마타를 만들 수 있는 구성 장치(조립 도구)가 있어야 한다. 셋째, 이 기계는 새 로운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침서를 작성하여 새로 만든 기계의 어딘가에 저장해야 한다(그래야 새로 만들어진 기계도 또 다른 복사본을 만 들 수 있다).
노이만은 자신이 생각한 기계를 특유의 절제된 문체로 다음과 같 이 표현했다. "이 기계는 좀 더 매력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기계에 하달된 지침은 유전자와 거의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며, 복제 과정은 살아있는 세포의 생식(유전물질의 복제)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 이런 식으로 생명체와의 유사성을 강조하고는 기계의 오류를 생명 체의 변이에 연결시킨다. "복제 지침을 조금 수정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은 변이를 일으킨 생명체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변이는 기능을 저하시키는 쪽으로 나타나지만, 기계는 복제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변이가 수정될 수도 있다." DNA의 구조가 밝혀지기 5년 전에, 그리고 과학자들이 세포의 복제 과정을 이해하기 한참 전에, 노이만 은 하나의 개체가 자신을 복제할 때 거쳐야 할 기본적 단계를 명확 하게 제시하여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의 이론적 기초를 다져놓았 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들었던 비유의 한계까지 정확하게 예 측했다는 점이다. 유전자에 하달된 복제 지침은 단계별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반적인 지시(신호)만으로 이루어지며, 나머지는 유전자 가 들어 있는 세포로부터 주어진다.
- 노이만은 말년에 떠올렸던 오토마타를 인생 최고의 업적으로 여겼다(말년이라고는 하지만, 40대 후반~50대 초반이었다-옮긴이). 이론에 함축된 의미가 가장 크고 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람도 노이만의 자기복제기계가 컴퓨터 분야에 남긴 업적과 함께 가장 영속적이 고 흥미로우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이론이라고 했다.
이 점에는 골드스타인도 동의한다. “노이만의 자기복제 이론은 그의 초기 관심사였던 논리학과 말년에 관심을 가졌던 신경생리학 및 컴퓨터를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도구로 3개의 분야에 심오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었 다. 그가 오토마타 이론을 프로그램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 난 것은 과학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 사람들은 노이만이 자기 자랑과 우기기를 좋아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자랑할 만한 일을 했을 때에만 자랑을 했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자 기 주장을 펼쳤다. 아마도 그는 오토마타가 자신을 상징하는 이론으로 남기를 바랐을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 냉소적인 과학자와 자상한 남자, 둘 중 어느 쪽이 노이만의 참모 습이었을까? 마리나는 둘 다 진짜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이만 의 내면에서 두 성격이 충돌할 때에는 마리나조차도 당혹스러웠다 고 한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상반된 두 캐릭터가 항상 치열하게 싸 움을 벌였고 그 와중에도 노이만은 가능한 한 관대하고 명예로운 모 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가 평소에 사람을 잘 믿지 않은 것은 감 정보다 이성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존폐를 좌우하게 될 위기 상황이 수십 년 안에 닥친다는 생각을 할 때, 노이만의 내면에서는 냉정한 합리주의와 관대한 박애 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다. 1955년 《포천> 6월호에 “인간은 기 술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Can We survive Technology?"라는 제목으로 실린 그의 논평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직설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우리에게는 여유가 거의 없다. 무기와 통신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역 간, 또는 국가 간 갈등이 고조 되고 있으며, 그 규모도 날로 커져가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 규모 충돌도 순식간에 지구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다. 무한히 크게 느 껴졌던 지구가 인지 가능한 수준으로 좁아진 것이다.
기후변화가 지구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한참 전에, 노이만 은 석탄과 석유를 태울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CO2)가 지구의 기 온을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단순한 경고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지면에 페인트를 입혀서 햇빛의 반사량과 기후를 조절한다는 새로운 지구공학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지구의 온도 상승 과 대책을 논한 것은 아마도 모든 분야를 통틀어 노이만이 처음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미 겪은 전쟁이나 핵무기의 위협보다 기후 변화를 극복하는 문제가 국가 간의 결속력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노이만은 핵반응로의 효율이 빠르게 높아져서 미래에는 핵 융합 에너지를 사용하게 될 것이며, 오토마타는 고체전자공학solid- state electronics의 발전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연구되어 초고속 컴퓨터 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교한 기 후 조절 장치를 무기로 사용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 재앙을 피하려면 새로운 정치적 형태와 절차가 필요하다(1988년에 설립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패널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은 바로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노이만의 논평은 다음과 같이 계속 된다.
아무리 부작용이 심각하다 해도,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현을 막을 수 는 없다. 오직 세상을 불안정하고 위험하게 만들기 위해 개발된 기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다. ... 진보의 부작용을 막 는 치료제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분야에서 폭발 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혜택을 있는 대로 누리고 싶다면 100퍼센트 안전한 삶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안전 한삶'이며, 안전도를 높이려면 국가 중대사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내리 는 판단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기술의 모든 폐해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다행 히도 우리는 부분적인 치료제를 갖고 있다. '인내심'과 '유연한 사고', 그 리고 지구의 생명체 중 오직 인간만 갖고 있는 '지성'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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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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