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은 먼저 천분(타고난 재능이나 직분)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다양한 경력과 경험이 필요. 나아가 그것을 잘 관찰하여 머릿속에 적어 넣어야 하며, 그것을 다시 글로 표현할 수완과 역량, 문장화할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함
- 성격의 단순화란 작중 인물을 분류한 후 거기에 맞는 성격만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복잡다단한 여러 성격중 한가지 성격만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심한 인물의 경우 소심한 면만 부여하고, 쾌할한 인물에게는 쾌할한 성격만 부여. 그렇게 해서 소설속의 인물이 완전한 성격을 가졌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독자가 그 인물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성격의 단순화다.
- 사람의 성격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면을 그대로 소설에 나타내게 되면(사실 이런 표현 역시 불가능하다), 독자는 도저히 그 인물을 이해할 수 없다. 이에 한명의 인물에게 하나의 성격만을 부여하는 단순화가 필요.
- 묘사하여 남김이 없다는 것은 독자에게 빽빽하고 답답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이에 작가는 어느 지점에 이르면 독자에게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줘야 한다. 독자는 작가가 간략한 데서 잔향을 맛보고 여향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작가 역시 적당한 불서를 남겨 놓아야 한다. 이것이 그 작품으로 하여금 잔향을 갖게 하는 중요한 수법 중 하나다. 물론 지나치게 생략하여 독자가 이해할 수 없게 되면 그것 역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이다. 글을 지나치게 나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글이 쓸데 없이 길면 긴장감이 떨어지기 때문. 예컨대, 격노한 장면이나 심리를 묘사함에 '주먹이 OO의 뺨으로 날아갔다' 쯤으로 간략히 서술해도 될 것을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게 되면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과 긴장감을 떨어뜨리게 된다.
- 너무 상세한 해설은 독자에게 용만(쓸데 없이 긴)한 느낌과 지루함만 줄 뿐이다. 그 결과, 그것을 읽는 독자의 머리 역시 복잡하게 만들어 명확하고 날카로운 감명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포식보다는 약간 부족함을 느낄 때 멈추는 것이 좋듯, 소설 역시 약간 미흡할 정도에서 멈추고 나머지는 약간의 암시만으로도 독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해야 함
- 예술에 있어 기교는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사상과 감정을 예술로 표현하자면 반드시 거기에 맞는 기교가 필요하기 때문.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라도 그것을 표현할만한 기교가 없다면 그 생각은 하나의 생각으로서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 예술품은 아니다. 그 때문에 예술가는 기교를 무시할 수 없다. 또한 같은 예술품이라고 하더라도 표현기교의 우열에 따라서 그 가치가 좌우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교는 기교일 뿐. 그러므로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교를 위해 내용-즉 사상과 감정을 수단과 방법으로 끄집어온다면 그 예술품은 전혀 가치가 없게 된다. 그것은 마치 화장과 옷차림으로만 미인이 되려는 것과 같다.
- 한 사회나 민족의 문학은 그 사회나 그 민족이 가진 과거의 문학적 전통과 현재의 문화 수준 및 양자간의 긴밀한 관계에 따른다는 것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대의 영국문학이나 프랑스 문학, 독일문학, 러시아 문학이 세계 최고에 이른 데는 소중한 문학적 유산과 더불어 현대 문화 수준이 세계적 수준에 있기 때문. 반면 미국문학이 이류에 속하는 이유는 미국자체의 고유한 문학적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또 중국과 그리스가 역사 깊은 문학적 전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역시 현대문화의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자신의 체험이나, 남의 체험을 막론하고 모두 소설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다만, 소설이란 인생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닌 인생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연에 대한 호소나 굶주림에 대한 호소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즉, 실연이나 굶주림이라는 단편적 사실의 전달보다는 실연의 원인이나 기아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인생의 진실을 추구해야 함. 이에 그 주인공의 과거는 물론 현재의 생활에 대해서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들의 사회적, 가정적 환경 등의 생활 일체를 파악함으로써 (실연의 경우라면 그 여자까지도) 인생의 진실을 추구해야만 한다. 거기에다 공상을 통해 보편화시켜야만 소설이 되는 것이다. 이 인생의 보편성 획득이야말로 작품의 성공을 좌우하는 핵심이라고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 도스토옙스키를 일컬어 최고의 작가라고 칭하는 이유 역시 그것 때문. 그의 작품은 악문으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소설속 주인공들이 말하는 그 어떤 인생의 의미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때문에 그의 명성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시인 릴케 역시 그의 작품 말테의 수기에서 창작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고 있다. '나이 어려서 시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있게 기다리지 않고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인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다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벌처럼 꿀과 의미를 집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겨우 마지막에 이르러 여남은 줄의 훌륭한 시가 써질 것이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만일 시가 감정이라면, 젊어서 이미 남아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시는 진실로 경험인 것이다. 그래서 한줄의 시를 위해 수많은 도시, 수많은 사람, 수많은 책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또 수많은 짐승을 알지 않으면 안되고, 하늘을 나는 새의 깃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며, 아침에 피는 작은 풀꽃의 고개숙인 부끄러움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 좋은 글을 쓰려면, 여러분이 날마다 직접 보고, 경험한 일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짧은 글로 쓰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 한 시대를 그리고자 할 때 문학가는 그 시대 전부를 그릴수 없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서 가장 전형적인 정황을 포착, 그 정황 속에서 활약하는 가장 전형적 인물의 행동을 통해 그 시대를 담게 된다. 그러나 역사 과학자는 다르다. 시대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여러 면을 통해 고찰하고 다시 그 시대를 초기와 중하로 나누어 추상적으로 고찰한 뒤 그 시대의 특성을 전대와 후대와의 구별 혹은 동일과에 있어서 명확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가 그리는 시대는 일반적인 논리적 규정의 종합으로서 재현되게 한다. 결국, 일반과 개별과의 통일소서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과학은 감성적인 개별을 일반적 논리적 규정에 의해 재현하고, 예술문학은 일반적인 것을 감성적 표상적인 개체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듯 과학과 에술문학은 서로 진리의 파악과 표현에 있어서 다른 태도를 가지면서 특수한 형식을 구성한다. 그 외에도 둘을 엄밀하게 구별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있다. 사실 진리 인식 능력만을 갖고는 그 방법과 형식이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결국 과학의 목적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예술문학과 과학이 다른 점을 궁극적인 결과에서 찾기란 곤란하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이 서로 다른 이상 표현하는 가치 역시 서로 달라야만 한다. 이것이야 말로 둘을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였는지 누구인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소설가는 요리법까지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 이가 있다. 보통사람인들 요리법을 알아서 안 될 이유야 없겠지만, 소설가가 부녀자나 요리사에게나 필요한 요리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은 매우 흥미롭다. 제법 소설을 끼적거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어떤 지식이건 그 윤곽이나 일부분만 어렴푸싱 알아서는 도저히 붓을 댈 수 없다.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두지 않으면 단 한줄의 묘사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요리법이 아닌 다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세태 혹은 풍속과 함께 당대 사회의 세계사적 이념까지 자세히 알지 않고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도 자세히 묘사할 수 없다. 또 안다고 해서 전부를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기록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기교를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예술이다. 말을 아끼지 말고, 덜고, 깎고, 자랑하지 말고, 뽐내지 말고-이처럼 문학에 있어서 참된 기교의 길은 매우 어렵다. 서도의 극치는 조솔고졸(조잡하고 옹졸한 글씨)에 있다고 하니, 곧 문학기교의 길과도 통한다. 그것은 헛되이 풍윤(풍성하여 넉넉함)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대신 낡고 옹졸한 곳에 수련된 명장의 손길과도 같은 것이어야 함. 나아가 홍차가 아닌 떫은 녹차의 맛이어야 하고, 사탕을 넣지 않은 쓴 커피의 맛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지의 숙달된 문학의 표본은 아직 문 앞에 보이지 않는다. 참된 기교의 길은 그만큼 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