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백만의 가짜재벌 소비자들이 부질없는 성공의 이미지들(결국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거나 벼룩시장에 내놓게될 물건들)을 사들이기 위해 그들이 애써 번 돈을 날려버리는 사이, 체계적인 투자자들은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자유와 만족,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즐긴다. 그들은 소비함으로써 흥분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개인적 성취, 근면에 대한 보상, 인정받음 등이다. 그들은 성공이란 돈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성공은 성취이며, 그것에 따르는 독립적인 삶이다. 그리고 진정 부유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 당신이 무엇을 숭배하든, 그것이 당신을 산 채로 먹어치울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돈을 숭배하면-그로인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당신은 결코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름다운 육체와 성적인 매력을 숭배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의 모습에 불만을 갖게 될 것이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미리 수천번의 죽음을 맛봐야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권력을 숭배한다면, 당신은 항상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 약하게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더욱더 큰 힘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지성을 숭배한다면, 당신은 끝내 스스로를 누군가 알아주기만을 바라는 멍청한 협잡꾼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데이비드 포스트 월리스, 2005년 케니언대학교 연설)
-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부산물. 행복은 무언가 아름다운 것, 혹은 유용한 것을 창조해냈을 때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했을 때 따라오는 간접적 감정이다. 행복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불행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 행복을 위한 모든 처방전 중에서 가장 쓸데 없는 것은 아마도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 말일 것이다. "스스로에게 관심을 기울여랴" 어림없는 소리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매일매일 아주 바쁘게 보내고 있고, 스스로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끊임없이 "얼마나 더 가져야 내가 행복해질까?"를 묻는 대신 "내가 어디쯤에서 그만두어야 할까?", "내 욕심과 타인을 위한 배려와 균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그리고 "행복때문에 잊어버린 다른 중요한 건 없을까?"라고 질문해 보라는 의미
-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인생은 공부, 일, 용기, 명예, 감정이입, 그리고 고난을 통해 강해지는 과정을 경험하기 위한 훈련장이기도 하다. 진정한 만족은, 우리의 삶이 무언가 의미있고 위대한 것에 녹아들어가 가치있게 사용되고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옴.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를 감사로 이끈다. 그리고 감사는 행복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 스토아학파의 핵심. 우리가 삶 속에서 즐기는 모든 것들은 실은 거대한 운명으로부터 빌려온 것.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아무런 예고없이 운명이 다시 가져가버릴 수 있다. 우리의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지금 잠시 주어진 것일 뿐,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충고. 당신의 아이들에게 입맞추는 매순간 기억하라.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매일 마치 그것이 마지막 날인것처럼 살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순간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책임을 내동댕이치고, 어리석게 흥청망청 그날을 허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늘 하루를 대하는 당신의 마음자세를 바꾸라는 뜻이다. 한때 인류가 꿈꾸던 바로 그 삶을 지금 대부분의 우리들은 누리고 있다. 단지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지고, 싫증을 내고, 둔감해져 있을 뿐이다. 스토아학파가 우리에게 부정적 시각화를 권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이다. 우리를 흔들어 깨워서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음미하게끔 하는 것이다.
- 150년전 종교가이자 초월론자였던 헨리 채닝은 느긋하고 좀더 긴장 풀린 삶을 교향악에 비유했다. 적은 것을 소유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 호화로움보다 우아함을 추구하며, 유행보다는 세련됨을 즐기며, 존경받기보다 가치있길 원하고, 부유하기보다 풍족하길 원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조용히 생각하고, 진실하게 행동하고, 상냥하게 말하고, 시기를 기다리며,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한다디로 영적이고,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무언가가 일상생활 속에서 자라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의 교향악이다.
- 성공한 삶이란, 얼마나 성취했느냐를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하고 애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굶두리게 되고 영혼이 가난해진다. 우리는 여가생활을 어떻게 아름답게 가꿀지, 그것을 이용해서 어떻게 더 우아하고 지적인 휴식을 누릴 수 있을지를 궁리해야 한다. 게으름의 시절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정 풍요로운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 게으름은 고상하게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 되어주기도 한다. 문화라는 것 자체가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점을 기억하라. 게으름은 우리를 명상하게 하고, 창조력을 꽃피우고, 발명에 불을 붙인다. 그 게으름의 에너지들이 녹아서 문학이 되고, 시가 되며, 음악, 철학 그리고 예술이 된다. 게으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의 신분이라는 것의 증거다. 그것은 자유의 표상이다. 진정한 게으름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느긋한 시간은 에너지 충전을 위해서도 필요함. 우리의 머릿속을 비워주고 힘을 준다. 그런 시간이 없다면 집중력이 약해지고 면역체계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며, 추리력도 떨어진다. 우리는 피곤을 느끼고 신경질적이 된다
- 히브리의 현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자신의 과거를 적어놓은 기록과 마주하게 된다. 그 기록에는 우리가 놓쳤던 진정한 행복의 순간들, 즐길 수 있었지만 그냥 흘려보냈던 수많은 기회들이 적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무시했던 그 모든 삶의 기쁨들에 대하여 일일이 참회해야 한다. 허둥지둥 다급하게 사는 삶은 우리가 꿈꾸던 삶이 아니다. 작은 느긋함조차 살 수 없다면 왜 돈을 버는가?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은 그것을 최대한 즐기는 데 있다.
- 영국 역사학자 폴 존슨은 46년,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윈스턴 처칠을 만난 기억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내가 그의 시가에 불을 붙일 때 쓰곤 하던 커다란 성냥개비 하나를 주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내가 그에게 물었다. '존경하는 윈스턴 처칠 수상님, 인생에서 성공을 하신 비결이 무엇인가요?'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노력을 아끼는 것이지. 나는 앉을 수 있을 땐 절대 서 있지 않고, 누워 있을 수 있을 땐 절대 앉지 않는단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리무진 뒷좌석에 몸을 푹 파묻었다.
- 만약 그대가 외부적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 문제가 그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를 받아들이는 그대의 판단이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 판단을 지금 당장 날려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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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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