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물었다

etc 2023. 3. 20. 21:25

- 석양이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도 활기 넘치고 건강할 때보다
인생의 짐을 완성하고 내려놓을 때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을 때 
어떤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는가?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김여환
- 완화의료란 삶의 끝자락에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 특히 통증을 완화시켜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세상을 떠 날 수 있도록 하는 돌봄의 의학이다. 신생아실에 소아과 전문의가 있듯이 우리의 마지막에는 완화의료 전문가가 있다. 완화의료자를 흔히 안락사 시켜주는 의사로 오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완화의료는 오히려 안락사를 막아 준다. 통증이 없어지고 증상이 좋아지면, 환자는 죽음을 찾아가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들은 죽을 때 아플지를 가장 걱정했다.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다가 극심한 고통 속에 서 죽어가야 한다면 마지막을 자살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암에 걸린 어머니가 극심한 통 증 속에서 떠나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 당한 폭력에 해당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죽 음 직전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통증을 거의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 1970년대에 위암으로 돌아 가신 내 외할머니는 암성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앉아서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2010년대에 폐암이 뼈로 전이된 어머니는 통증 없이 편안히 누워서 떠났다. 현대의학의 진수는 우리를 영원하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영 원한 이별을 할 때 통증을 없애주는 것이다. 죽음을 상상 조차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런 희망적인 정보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 죽음이 삶의 결과물이듯이 노년은 중년의 결과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노인이 되지는 않으므로 지금부터라도 무엇을 차곡차곡 채우고, 또 무엇을 비워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건강하고 찬란한 노년의 마무리는 영원
한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을 숙지하면 답이 보일 것이다.
- 완화의료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한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접근으로, 조 기 진단과 정확한 평가, 그리고 통증과 기타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문제의 치료를 통해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고 경감시킨다. (세계보건기구)
- 완화의료는 병의 어느 단계에서도 도움이 되지만, 병이 진행되어 신체적 고통이 극심해지고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장 큰 가치와 필요를 지닌다. 병의 예후가 좋지 않고 죽음이 임박하면 의사들 은 이런 예언을 내놓는다.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습 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더 이 상 병을 치료할 방법은 없을지라도, 그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남아 있다.
- 사람들이 죽음에 가까워져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고통을 느끼면서 진실을 감지하는 진정한 안테나를 갖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마치 신탁을 전하는 사람들 같다.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안다. 자신의 본질에 직접 적으로 닿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의 본질을 보는 능력을 얻는다. 이런 까닭에 누구도 불치병과의 싸움에서 패배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존엄을 존중 해야 한다. 진정한 영웅은 죽음과의 만남을 피하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심오한 지혜로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 죽음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증과 기타 신체적 고통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봐, 우리는 당신이 죽음을 체험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걸 해주기 위해 여기 있어." 따라서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고통이 삶에 대 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통증이 그쳐야만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 의사로서의 내 역할은 가능한 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신체적 고통에 대처하는 것이다. 숨 막히는 순간이 지 나가고 격심한 신체적 불편함이 사라지면, 삶이 스스로 를 드러낼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 많은 경우 신체적 고통 이 완화되면 그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감정적이고 정신적 인 고통의 표현이다. 환자 가족은 환자의 몸이 편안해지 는 걸 보며 안도하지만 환자 자신은 삶에서 무엇이 사라 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커져가는 걸 느낀다. 이제 곧 마주해야 할 '마무리되지 않은 일'에 생각이 미친다.

-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위험에 용감히 맞설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보다는
고통을 이겨내게 해달라고 애원하게 하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동지를 찾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찾게 하소서.
두려움에서 구원되기를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얻어낼 인내심을 소망하게 하소서.
저의 성공 안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실패 안에서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우리는 현실을 최대한 폭넓게 받아들여야 하며, 들어본 적 조차 없는 것들까지도 모두 그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용기는 삶에서 맞닥뜨리는 그 어떤 기이하고, 이례적이며, 불가해한 일이라도 마주할 용기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건강검진을 받고, 뱃살을 빼고, 자녀들의 삶을 돌보기 시작하는 때가 온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죽음에 대비하여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고 느끼게 된 것이다. 여기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무언가를 하는 것'에 몰두하여 '존재하는 것'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좋은 삶이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주고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병의 시간이 찾아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우리는 그것 이 죽어감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인간답게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고, 어디에 있건 본 연의 자신이 됨으로써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자신의 삶 에서 부재해온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그저 '부재'로 남 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거의 늘 부재의 삶을 살고, 어쩌다 존재할 때는 그 시간이 공허하다고 느낀다.

- 죽음은 내게 개인적으로 가장 위대한 성취가 될 것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병은 진행되면서 공격성의 정도에 따라 속도가 붙는다. 그리고 병의 진행에 따라 몸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다음 해체는 물과 관련된다. 생물학적으로 이야기 하면 사람은 죽을 때 탈수를 일으키고 소변량이 적어지 는 경향을 보인다. 체액의 생성이 감소하고, 소화관과 기 관지에서의 분비물과 효소가 줄어들며, 점막이 마르기 시작한다. 오늘날 의학계는 사람이 약간의 탈수 상태에 서 훨씬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고 있다. 신체적 악화가 이 단계에까지 이르러 집중치료실로 옮겨진 환자들은 견디기 힘든 정도의 불편을 겪는 일이 흔하다. 본 격적인 죽음의 과정에 무지한 의사들이 환자들 몸에 액 체가 넘쳐흐르도록 만들어 점막에 염증이 생기고 피부가 고통스럽게 부어오른 결과이다. 더는 소변을 만들어낼 때가 아니기 때문에 신장은 기능을 멈출 것이다. 의사들이 물의 해체 과정을 무시해도 신장은 그 과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신장은 기능을 멈추고 의사는 수액을 처방 하는 기괴한 상황이 되면 자연스러운 죽음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죽어가는 몸이 과잉 개입에 맞서 힘겹게 싸우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결국 죽음을 막을 수 없기에 자연스러운 죽음을 방해할 뿐이다.
물의 해체 단계를 체험하는 환자들에게 매우 두드러 진 행동 특성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자기 성찰적인 면 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신의 삶을 들여 다본다. 진실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들이 걸어온 길 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시간 말이다. 그런 때에 의사들은 항우울제를 처방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조용히 침묵하며 생각에 잠기면 주위 사람들이 성화를 해댄다.
"무슨 일이야? 우울해지지 마! 힘내서 싸워야지! 믿음을 가져!" 환자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와 삶의 본질을 찾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사회의 강요와 항우울제에 상관없이 물의 해 체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 이 시기에 환자들에 게 미리 말도 해주지 않고 항우울제를 처방하면, 그들은 자신의 삶과 선택들을 돌아볼 때 고통을 겪지 않겠지만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부적절한 약 처방을 받은 환자들은
마치 셀로판지에 싸인 것과 같은 상태에서 느낌과 정서 자극을 받는다. 그 무엇에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무의 미해진다. 그들은 추위도, 더위도, 감정도, 그 무엇도 느 끼지 못한다.
환자에게 항우울제를 주지 않아서 그가 슬퍼지기 시 작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가족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슬퍼? 그래서 아무 반응이 없는 거야?" 아니다. 그는 반응하고 있다. 내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과
거의 어느 때보다 깊이 들여다보며 본질을 찾고 있다. 바 로 그 순간, 자신의 본질 속으로 깊이 파고들 때, 자신의 본질과 진정으로 만나게 되는 불의 해체가 시작되며, 환 자는 내면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완전함을 드러낸다!
불의 해체 과정에서 온몸의 세포들이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아직 살아갈 시간이 남아 있다 는 것도 안다. 자신의 삶을 주도할 기회는 언제든 있지만, 불의 해체는 삶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낼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당신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길이 더 아름다워지고 더욱 활기차진다. 당신은 몸에 있 는 세포들이 종말을 인지하면 절망으로 인한 혼돈이 찾 아오고 세포의 패닉 상태에서 모든 게 무너져버릴 거라 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일은 일 어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늘 이런 식으로 (불의 해체 과 정에서처럼) 세포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면, 당신은 언제 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세포들은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마지막으로 최고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간세포 들은 신속하게 대사를 처리하게 되고, 폐세포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능숙하게 공기를 교환하며, 그동안 활동한 적이 없는 뉴런들을 포함한 뇌세포들도 모두 깨어나 호기심에 차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좀 알아봐야겠어." 그리하여 갑자기 온몸이 제대로 기능하게 된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 한 사람 전체가 온전히 기능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죽음 전의 용솟음, 죽음을 앞둔 반등, 마지막으로 타 오르는 촛불의 아름다운 힘이다. 불의 해체 과정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인간으로서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깨달을 기회를 준다. 그리고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 사랑 이었음을 세상에 보여줄 기회를 갖게 된다.
내가 돌보았던 거의 모든 환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찾 아온 불의 해체 과정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 해 이 세상에 왔음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불의 분해를 통해 찌꺼기가 사랑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이 세상이 좋은 곳이며 자신의 존재로 인해 더 좋은 곳이 되었음을 보여줄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지상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인간을 만나더라도 그를 바라보며 희망에 찬 미소를 지어보라. 그 사람 역시 죽음의 시간에 더 나은 인간이 될 놀라운 기회를 갖게 될 테니까.
- 죽음에 대한 사전 경고를 받지 못한 사람들, 급격히 사망에 이르는 병이나 사고로 죽는 이들 역시 죽음을 두고 행동의 변화를 보인다. 불의 해체 단계에서는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고 그때 사람들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고, 고맙다고 말하게 된다. 또한 자 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작별 인 사를 할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이때 따로 정해진 시간은 없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마다 남은 시간은 다르다. 만일 내가 의사로서 이 시간을 알아보고 죽음의 전체 과 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한다면, 나는 불필요 한 개입을 막을 수 있다. 사랑을 원 없이 체험하고, 자신 의 본질을 표현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왔는지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복잡한 시기는 본격적인 죽음의 과정에서 가장 의식적인 시간이다.
불의 해체, 즉 자신의 본질과 진정으로 만나게 되는 과정이 마무리되면 마음 깊은 곳에 어떤 신성한 것이 자 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가장 깊고 가장 신 성한 것 안에 숨이 있다. 숨은 공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우리가 지상에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으로부터(혹 은 우주로부터) 빌린 것이다. 임무가 끝나는 즉시 우리는 그것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바로 그때 공기의 해체가 시작된다.
이 단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감'이라고 부르는 시기로, 매우 고통스럽다고 알려져 있다. 공기의 해체가 시작되어야 우리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완전하게 인식한 다. 그 전까지 병을 앓는 환자는 의학에 의존하여 치료법 을 찾고, 화학치료나 수술을 받고, 임상 시험 단계의 약을 먹고, 영혼을 팔고, 접촉요법에 기대는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다.
물이 해체되면 슬픔이 동반될 수 있고, 항우울제가 그  슬픔을 경감시킬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다음에는 반등의 단계, 완전한 삶을 누리는 듯한 체험의 시간으 로 들어선다. 그리고 고통의 단계가 이어진다. 숨을 돌려 주는 시간에는 숨이 처음에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가게 된다. 호흡곤란의 단계, 호흡이 지나치게 빨라지거나 느 려졌다가 잠시 멈췄다가 깊은 숨이 이어진다. 물과 불의 해체 단계에서는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그와 동화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공기의 해체 단계에서는 다르다.
- 누군가와 동화되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과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으 면 그에게 동화되어 마음을 진정시켜주어야 한다. 그러 지 않으면 그의 불안감에 나도 '감염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어갈 때는 그와 호흡을 맞추는 것 이 불가능하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 한 동화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들에 동 화되고 그 감정들을 바꿀 수도 있지만, 죽음의 과정에서 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집중치료실에서든 병실에서든 집에서든 그 어디에서도 죽음은 일단 시작되면 반드시 끝이 난다.
우리가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체험은 죽음의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다. 섹스도, 키스도, 비밀을 털어 놓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본격적인 죽음의 과정을 함께하 는 것만큼 친밀할 수 없다. 그 순간에 당신은 죽어가는 사 람을 위해 함께 있어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 또한 거기에 존재하는 의미를 찾고자 할 것이다. 당신과 죽어가는 사람 둘 다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에서 우선순 위와 짐, 두려움, 죄책감, 진실, 환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 의사로서 나는 환자를 죽이는 건 병이지 병에 관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중병에 걸린 걸 알게 되면 일시적으로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때 느끼는 슬픔 은 치유에 대한 환상이나 거짓 약속 없이 진실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으로 건너가는 유일한 다리이다. 환자의 희망을 죽이는 건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버 림받은 느낌이다. 진실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은 잘못됐 다. 나는 날마다 환자의 가족들에게 환자 본인이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알 권리가 있음을 납득시키느라 진땀을 뺀다.
- 환자들에게 그들의 심각한 상태에 대해 알 기회를 주면, 진실은 그들이 남은 시간을 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삶 의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제공해준다. 진실을 감추는 것 은 환자를 돕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환자를 죽음으로부 터 구해줄 수 없고, 환자가 홀로 있어야만 하는 시간에 감 당해야 할 고난을 피하게 해줄 수도 없다. 죽음이 다가올 때 환자가 절박함을, 죽기 전 살아 있는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죽음의 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환자에게서 살아 있을 기회를 빼앗기만 할 뿐이다.
- 나는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어주는 것보다 더 성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에는 다음 기회가 없으니 까. 당신이 어떤 종교를 가졌든, 종교가 있든 없든 이 생 에서 오직 한 번 죽는다. 죽음에 연습은 없다. 당신에게 자녀가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결혼을 몇 번 했든, 얼마나 많은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했든 죽음은 단 한 번이다. 당신 은 정해진 때에 죽는다. 완화의료를 제공하는 능력을 키 우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훈련에 덧붙여 자신의 몸을 느 낄 수 있도록 해주는 의식적인 신체 활동과 마음의 평화 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정서적 치료 및 체험들이 선행되 어야 한다. 당신 자신이 어디서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할 지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도울 수 있겠는가?
- 당신이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어줄 수 있음을 깨달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죽어가는 사람이 스스로 짐 덩어리 나 장애물, 성가신 존재가 된 기분을 느껴선 안 된다. 죽 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을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 우리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아파서 죽어갈 때조차도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며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낄 자격 말이 다. 죽어가는 환자 곁을 지켜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환 자의 감정을 가치 있는 것들로 바꾸는 법을 알아야 한다. 병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기분을 유한한 존재로서의 고통과 마주할 용기를 지녔다는 자부심으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삶과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면 그 시간은 빛을 발한다.
-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영화를 보면, 길을 잃는다 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멋진 대사가 나온다. "발견될 수 없는 곳을 발견하기 위해선 먼저 길을 잃어야 하지. 그게 아니라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곳 을 알겠지." 길을 잃었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 죽어가는 이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길 잃은 심정을 여러 번 느끼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도망칠 일이 아니다. 바로 그 시간 속에서 삶이라는 경이로운 곳에 이르는 난생처음 가보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호스피스에는 사람들이 고독에 붙인 멋진 이름인 프라이버시가 없다. 대개 2인실로 되어 있어서 죽음이 찾아 오면 당신은 룸메이트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다. 소름 끼치는 일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당신은 곧 자신의 차례가 올 것임을 알고 있으며, 이웃의 죽음에 대한 산체 험은 죽음의 순간이 평온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호스피스에서 완화의료를 받는 사람들은 '일등석'으로 여행할 기회를 갖는다. 여행은 죽음의 과정에 대한 은유로 흔히 사용된다. 완화의료 전문가 데릭 도일은 《플랫폼 티켓》이란 저서에서 삶의 마지막에 이른 환자들과 함께 일하는 의사로서 겪은 일화들을 소개한다. '플랫폼 티 켓'은 기차역에서 플랫폼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말한다. 이 입장권을 가지면 기차를 타는 사람을 플랫폼 까지 배웅하면서 도울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 는 우리는 그들이 기차에 올라 자신의 좌석을 찾아가서 편안히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고, 짐을 실어주고,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도록 해준다. 단, 우리는 그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나지 않고 플랫폼에 남는다.
- 병원에 노인들을 방치하여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는 거센 비난이 자주 들린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환 자들이 모두 외로울 거라는 속단은 피해야 한다. 암에 걸 리거나 60세가 넘으면 갑자기 온 가족의 숭배와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가진 성자의 위치에 오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질적인 관계는 스스로 구축해가는 것이며, 우리가 어떤 관계들을 맺어왔는지에 따라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삶의 마지 막 시간을 즐길 수도,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 다. 병원에 방치된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까? 그저 주고 또 주기만 했지 결국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바닥없는 우물 같은 존재가 될까? 만일 당신이 그 런 우물로 살아왔다면 죽음의 문 앞에 이르러서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길고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온 후, 그토록 잔인하게 혹사당하며 산 후, 뒤늦게 관계들을 개조하고 의미 있는 기억들을 되살리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돌보는 것과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자기 관리를 하는 건 다르다. 만일 당신이 마사지를 받기로 했는데 마사지가 좋아서가 아니라, 다음날 일에 지장이 없도록 허리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그릇된 이유일 수도 있다. 일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대개 후회에 이르게 되며, 인류에게 암적 존재인 두려움이 일 의 원동력인 경우 특히 더 그러하다. 돈이 없다는 두려움, 자녀가 좋은 학교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살 집 이 없다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일해야 한다는 낡은 핑계 뒤에 숨는다. 그들은 실제로 도움을 청한 적도 없는 사람을 돕고 있다고 믿으며 꿋꿋하게 일한다. 그러다 마침내 인생길이 끝나고 죽음의 벽이 솟아오르면 어떻게 될까?
- 일에서 얻는 에너지도 삶에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나쁜 에너지가 된다. 당신은 돈을 더 벌어서 금세 상 하는 음식을 사고, 툭하면 고장 나는 차를 사고, 다닐 시 간도 없는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고, 입지도 않을 옷을 사 고, 오래 기억에 남지도 않는 강좌를 듣는다. 삶을 들여다 보면 더 나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물건들을 사느라 인 생을 낭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물건들을 살 돈이 나오는 곳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좀비 같은 모습으로 차를 몰고 집에 돌아온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 죽어가는 사람을 돕는 행위가 스스로를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도울 때는 그를 온전한 한 인간으로 대하고 자신을 그와 동등하게 보아 야 한다. 우리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을 도울 때, 그를 위해 거기에 있어줄 때, 우리는 그 의 곁을 지켜야지 그의 안에 있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타인의 고통으로 들어가지 말고 오로지 자신의 고통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자신 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 내 말이 잔인하게 들리 겠지만 그게 진실이다. 당신이 사회복지사이든, 간호사 이든, 의사이든, 환자의 아들 혹은 배우자이든 당신은 환 자가 되기 위해 그를 돌보는 것이 아니며, 그를 통해 당 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관계, 진정한 만남 이라는 신성한 공간에 존재하기 위해선 연민을 지녀야만 한다.
- 잃는 법을 배우려면 우선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끝난 건 끝난 것이며, 영원한 연장은 없다. 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면 서 키워야 할 능력이다. 진실을 직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 다. 새로운 시작을 보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 을 분노하지 않고 아름답게 보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당신을 배반한 사람, 당신에게 수치심을 안겨준 상사, 삶을 더 힘들게 만드는 직업을 사랑하려면 우선 자신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런 태도를 취하고,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유해한 사람과 짝을 맺기로 결심했을 때 당신은 거기까지밖에 볼 수 없는 눈을 갖고 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당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그런 사람을 겪어내야만 했던 자신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 정서적 불구자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 체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을 더 낫고, 더 행복하고, 덜 원통하고, 새로운 관계를 더 잘 맺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 잃은 것을 놓아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실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이다. 관계가 끝났는가? 그럼 관계의 죽음을 실컷 애도하라. 일자리를 잃었는가? 일자리의 죽음을 애도하라. 아픔을 피하지도, 겁쟁이가 되지도, 체험을 과소평가하지도 말고, 충분히 아파하라. 그 체험이 25년간의 결혼 생활, 30년간의 친구 관계, 혹은 오래 몸담은 직장이라면 그 세월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충분히 애도하고 아파하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상황으로 들어갈 때 그 상황을 가장 잘 영위 하는 방법은 그 또한 끝날 것임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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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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