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 설계자들

인문 2024. 4. 2. 06:59

- 홀로 있든 함께 있든 떨쳐낼 수 없는 것이 바로 몸이다. 몸은 욕구로 가득하다. 수면욕, 식욕 그리고 성욕. 수도자들의 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몸을 다스리기 위해 욕구를 적절히 해소하기도, 정면으로 거스르기도 했다. 하지만 목표는 늘 하나였다. 몸을 다스려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이 목표를 잃은 수도자들에게는 몸에 대한 집착만이 남았다.
- 수도자들이 신체를 단련하려고 개발한 일련의 수행법을 오늘날엔 '고행 asceticism'(또는 금욕주의옮긴이)으로 부른다. 이는 고대 그리스어인 아스케시스askesis에서 유래된 용어로, 신체 단련 이나 정신 단련, 또는 둘 다를 뜻한다. 하지만 자아를 전면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심신 수련법을 수도자들이 처음 개발한 것은 아니 었다. 실제로 수도자들은 수 세기 전부터 이어진 철학적·의학적 전 통에도 의존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충만함을 구원의 매개체로 강조한 기독교 신학에도 의존했다. 의사와 플라 톤주의자, 유대인, 스토아학파, 냉소주의자, 신플라톤주의자, 초기 기독교인은 신체와 영혼과 신성의 본질에 대해 각기 다른 이론을 내놨다. 하지만 영혼이 신체보다 위에 있는데도 신체에 영향받기 때문에 의학적·운동적·도덕적 훈련을 두루 거쳐 신체를 면밀히 점 검하고 단련해야 한다는 데 전반적으로 동의했다.
-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의 기독교 수도자들은 한결같이 몸단장과 수면, 성관계, 식사를 신체 단련의 주요 대상으로 보았지 만, 방법 측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간혹 그들의 다양한 권고는 상당히 다른 우주론과 신학에 뿌리를 두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성 은 대체로 몸과 마음의 경쟁적인 역학과 관련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둘을 함께 훈련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대개 그 시작은 몸단 장이었다. 이는 사소한 주제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산만함 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수도자들이 애초에 몸과 마음을 연계해서 바라봤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 "천국에 가기 위해 스스로 거세한 남자들"
5세기가 되자 대다수 수도자는 금욕이 육체적 도전이자 정신적 도 전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렇더라도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고자 다 양한 수행법을 고안했다. 일부 수도자는 거세까지 하면서 논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들은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영감을 얻었 는데, 여기엔 그리스도가 "천국에 가기 위해 스스로 거세한 남자 들”을 칭찬했다고 나와 있다. 그들은 또 정자가 부족하면 성욕이 고갈된다는 갈레노스Galenos파의 의학 이론을 따르기도 하고, 거세 하면 신체가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금욕주의자들의 속설에 이끌 리기도 했다. 가령 신체 일부가 “당신을 무절제한 상태로 이끈다 면, 전체를 망치느니 그 부위를 잘라낸 채 절제하며 사는 게 낫다." 이처럼 거세는 수도자를 지옥에 떨어뜨릴 수도 있는 산만함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거세의 논리에 결함이 있다고 반박하는 수도자도 꽤 있었다. 그들은 거세된 남자도 여전히 성욕을 느끼고, 또 성관 계도 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더 일반적으로는 수도자들이 은유적 으로만 거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세는 해결책이 아니라 회피 책이었다. 즉 고환을 잘라내거나 수술로 제거한 수도자는 어떤 결 심으로 감행했든, 실제론 자제력 부족을 드러냈을 뿐이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궁극적 도전에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 30
7세기의 수도자로서 동지중해 일대의 여러 금욕 행위를 조 사한 요한 모스코스는 이러한 논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수도 자의 성욕이 기적적으로 사라져도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 못 박았 다. 성적 흥분에 맞서 싸우는 수도자야말로 육체적·정신적·도덕적으로 강건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자이자 사제인 코논Conon을 예로 들었다. 코논은 여성에게 세례를 베풀 때마다 흥분했는데, 자 기 약점을 극복하려 애쓰는 대신 당황해서 의식을 그만두었다. 그 런데 기적이 일어나 다시는 성욕을 느끼지 않게 되자, 그는 다시 세례를 베풀었다. 하지만 모스코스는 코논의 성과를 전혀 인정하 지 않았다. 코논이 마음을 수련하지 않았기에 그의 무성애는 무의 미한 승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모스코스의 판단에 동의 하지는 않았다. 로마 법학자들과 교회 평의회가 수 세기 전부터 거 세를 금지했지만, 그들의 결정이 항상 지켜지거나 강제되지는 않 았다. 모스코스가 살던 시대에도 (특히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일 부 수도자는 계속 거세를 감행했고, 일부는 결사반대했으며, 또 일부는 거세된 수도자를 동료로 받아들였다.
이성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겠다는 수도자도 많았는데, 일부는 이 또한 의지 부족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남성 은수자들 은 흔히 여성 방문객을 외면하는 데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남 성과 여성 수도원은 통상적으로 이성 수도자의 접근을 거부했지 만, 대체로 (응접실이나 교회당 같은) 특정 공간, (친척과 고위 성직자 같은) 특정 사람, (건축이나 의료, 성찬 의식 같은) 특정 직군에 대해서 는 예외를 두었다. 심지어 출생 시엔 여성으로 기록되었으나 스스 로 남성이라고 주장한 수도자가 남성 수도원에 합류했다는 기록 이 수 세기에 걸쳐서 꽤 존재한다. 그들의 트랜스 정체성은 흔히 죽고 나서야 밝혀졌다. 동료 수도자들은 그런 사실에 깜짝 놀랐는 데, 초기의 충격은 대개 분노보단 감탄으로 바뀌었다.
- 적어도 중세 초기의 성인전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 트랜스 수도자들에 대한 그들의 묘사로 볼 때, 이성 간의 신체 접촉이 수도자들의 정신적 평정에 결정적 위협은 아니었던 것으 로 보인다. 수도자들은 그보다 더 큰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일부 수도자는 좀 더 일상적인 상황을 예로 들며 이러한 점을 강조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수도자는 마음이 흥분할 기회를 제한하고자 길에서 마주치는 이성에게서 시선을 돌렸지만, 다른 수도자는 그 런 행동이 피상적인 형태의 금욕주의일 뿐이라고 반대했다. 몸만 치열하게 고행할 게 아니라 마음도 똑같이 단련해야 한다고 보았 다. 널리 알려진 한 이야기에서 떠돌이 남성 수도자는 여성 수도자 무리를 마주쳤을 때 그들을 피하려고 길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무리의 지도자가 그에게 다가가 “당신이 완벽한 수도자였다면, 우리가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 겁니다”라며 나무랐다. 신체 에 얽매이면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성인전이 이성과 기꺼이 교류했던 도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포프테그마타 파트룸》, 테오도레 투스의 《종교사Religious History》, 그레고리우스의 《대화집》 등 대 단히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금언집들만 살펴봐도 모두 그러한 성 향의 수도자들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친밀한 공동체 안에서조차 정반대의 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6세기에 쥐라의 아버지들Jura fathers로 불린 수도원장들에 대해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주교는 한 명은 여성과 만나기를 거부했으나 다른 한 명은 따뜻하게 맞아줬 다고 언급했다.
- 수도자들이 개발한 식단은 전통적 충동과 파격적 충동의 특징을 두루 반영했다. 그들은 오랜 의학적·철학적 전통을 계승했는데, 둘 다 절제된 식사의 신체적·정신적·도덕적 이점을 강조했 다. 그들은 또 헤시오도스와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의 신화에서 세상이 변하고 타락하지 않았을 때 인간이 먹었던 음식에 대한 영 감을 얻었다. 일종의 구석기 식단paleo diet을 애용했던 셈이다. 한편 로마 엘리트 가정에서 만연했던 축하연 형태의 식사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새로운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공동 식사는 피트 스톱pit stop(자동차 경기 도중 아주 빠르게 급유하거나 정비하기 위한 정차-옮 긴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수도자들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료를 채우기 위해서 모였다.
그렇지만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 자체는 여전히 중요한 의 미가 있었으니, 함께 수행한다는 느낌을 강화했다. 수도원 지도자 들은 같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공동체의 결속이 깨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5세기에 상부 이집트에서 활동한) 셰누테와 (6세기에 갈리아, 또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바오로와 스테파노의 규칙Rule of Paul and Stephen》을 쓴 셰누테는 심지어 수도자들이 각자의 조미료를 식 탁에 올릴 수 없게 했다. 누구나 똑같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이유 였다. 하얀 수도원의 여성 수도자들은 셰누테가 식사량에 대해서 도 그렇게 주장한다는 점에 언짢아했다. 남녀 수도자가 같은 기준 을 따라야 한다는 셰누테의 논리에 따라 일일 배급량이 조절되자, 그들 중 일부는 성별에 따라 차별을 둬야 한다고 반박했다.
셰누테가 이런 반박에 응하진 않았지만, 그를 비롯한 수도 원 지도자들은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한 수도자에 대해선 예외를 인정했다. 다만 엘리트 수도자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 더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하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안을 따르는 지도자는 많 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수도자와 나이 든 수도자, 수확 같은 계절 노동으로 지친 수도자에겐 편의를 봐주려 애썼다. 아픈 수도자에 겐 특별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점에도 대부분 동의했다. 하지만 환자가 더 나은 음식을 먹고 더 많이 쉬는 것에 일부 건강한 수도 자는 분개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방된 음식을 먹지 않고 참고 견디 려는 수도자도 있었다. 그런데도 어떤 수도자는 그가 특전 때문에 아픈 척한다고 의심했다.

- 1500년 전의 수도자들에게 책은 신문물이었다. 현대인이 스마트폰에 빠져들듯 수도자들도 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책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능동적으로 쓰고 만들고 읽으며 책을 집중의 도구로 삼았다. 조판부터 디자인까지 그때 개발된 기술이 지금 이 책에도 녹아들어 있다. 집중을 논할 때 여전히 책을 강조하는 이유다.
- 최적의 시간에 책을 읽는다고 해도, 수도자들과 그들의 마음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았다. 키프로스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of Cyprus 등 열성 지지자들이 주장한, "이 책들을 보기만 해도 죄를 덜 짓고 의로움을 더 굳건히 믿게 된다"라는 식의 정서는 크게 공감받지 못 했다. 6세기에 레안데르가 말했듯 수도자들은 악마에게서 벗어나 기 위해 독서와 기도를 꾸준히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 게 꾸준히 수행하더라도 늘 위태로운 상태를 면하기 어려웠다. 산만함은 책이 베개로 전락하기 한참 전부터 수도자들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수도자들은 집중하는 데 도움 을 받고자 집중이 필요한 작업, 즉 책과 씨름해야 했다.
- 그래서 수도자들은 적극적으로 읽는 법을 배웠다. 이 말은 곧 현대와 상당히 다른 독서법을 채택했다는 뜻이다. 요즘처럼 속 독, 훑어보기, 폭넓게 읽기를 목표로 삼는 대신, 수도자들은 천천 히 주의 깊게 읽고,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었다. 스페인 북서부 에서 전래한 '일반 규칙'은 수도자들이 성부들에 관한 글을 반복 해서 읽고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권고했다. 심지어 글을 읽지 않 을 때라도 성부들이 사방에서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고 상상하게 했다. 이런 가상의 보호막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일종의 지원책으로 여겨졌다. 

- 수도자들은 자기 내면에서 기억이라는 또 다른 책을 찾아냈다. 원하는 것만 기억하고, 잘 분류하며, 필요한 만큼만 끄집어낼 수 있다면, 산만함과 작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 개발된 불멸의 기술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으로 자기 내면에 집중한 수도자들은 머릿속 기억의 방에 가닿았다. 이후 어질러진 방을 청소하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채워 넣으니, 이를 통찰이라 불렀다.

- 집중의 단계가 심화할수록 수도자들은 가장 강력한 적, 즉 생각에 초점을 맞췄다. 생각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살 수도 없었다. 따라서 중요한 건 생각을 관찰하고 분별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생각을 생각하는 일, 곧 메타인지가 탄생했다. 메타인지의 최고 경지에 오른 수도자들은 집중에 집중하는 일, 곧 몰입의 순간을 경험했다.
- 생각 속으로 깊이, 더 깊이 파고들면 수도자들은 마음의 가장 기이 한 특징, 즉 어떤 정보를 처리하는 동시에 그 과정을 관찰하는 능 력과 마주쳤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성찰성reflexivity을 수다스러운 간섭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도자들은 재능으로 여겼다. 그들 에게 생각에 관한 생각은 산만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아를 안정 시키는 궁극적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머릿속으로 들어 가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략들, 즉 수도자들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공동체, 몸, 책, 기억을 활용하기 위해 고안한 온갖 수 행법은 집중된 마음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동심원과 같았다. 그런 데 수도자들은 마음을 단련할 때조차 산만함에 빠지기 쉬웠다. 설 상가상으로 잘 훈련된 수도자일수록 산만함을 제대로 인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정신이 고도로 기능하는 상태에서 방해받으 면, 방향이 잘못된 것인데도 순간의 통찰처럼 느껴졌다. 그레고리 우스와 니네베의 이삭은 6세기 말과 7세기 말에 저술한 책에서) 산만함과 계시는 대단히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둘 다 술에 취한 듯 통제력을 상실한 느낌을 주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인지적 "실수" 나 (이삭이 말한) "말더듬증" 때문인지, 아니면 개념적으로 압도하 는 현상을 갑자기 접했기 때문인지 구별하기 위해, 마음은 자기 자 신을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
이로써 메타인지는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의 수도자들에게 중요한 수행법이 되었다. 기법은 초급부터 고급까지 다양했다. 나 스파르의 아브라함Abraham of Nathpar이 600년경에 말했듯 "수도자 내면의 숨겨진 존재가 아기처럼 자랐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기의 옹알이를 내면의 언어로 발전시켜, 이를 활용해 자신의 움직임을 능숙하게 관찰하고 산만한 요소를 제거해야 했다. 즉 점점 더 어려 운 훈련을 통해 자기 생각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격려하고 확대해, 궁극적으로 (일시적이나마)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했다.
- 기도에 집중하고자 고안한 가장 간단한 메타인지는 마음속에 상상의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 온갖 생각을 가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7세기의 시리아 작가 사도나Sandona는 “사방에 흩어져 있 는 생각을 한군데로 모은다”라고 묘사했다. 이 방법은 주로 집중 전 준비 단계로 활용되었다. 셰몬 디에부타가 상상했듯이 생각을 목초지로 보낼 수 있다면, 울타리 안에 다시 가둘 수도 있을 것이 었다. 요한도 똑같은 전략을 공유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어느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한 수도자가 기도에 굉장히 집중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에게 어떻게 그리 집중할 수 있는지 설명해달 라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나는 기도를 시작할 때 습관적으로 내 생각과 마음과 영혼 을 끌어모읍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상대로 '어서 그리스도와 우 리의 왕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자!"라고 소리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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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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