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은 협동조합 운동이 1830~40년대에 꽃을 피웠다. 그 이념적 기초의 하나인 사회주의도 출현했다. 보통은 사회주의를 시장 경제나 자본주의에 대비시켜온 것이 우리 사회의 오랜 관행이었 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이념적 대립물은 개인주의이다. 통상 로빈 슨 크루소의 우화를 인용하여 “태초에 개인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주류 사회과학(경제학)의 시장 우화에는 개인주의가 깔려 있다. 혼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강자의 논리로 이어지고, 각자도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의 논리로 이어진다. 반면 사회적 경제의 서사는 태초부터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사회 안에서 함께 노동하는 관계적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 유럽의 협동조합 운동이 1830~40년대에 활성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때 이미 유럽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보여줄 수 있 는 모든 명암을 드러낸 상태였다. 엄청난 생산 능력과 부의 축적, 그러나 동시에 빈곤의 확대와 양극화, 생태계 파괴와 인구 폭발 등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현상이 다 드러났다. 그 결과 국가를 통해서도 시장(노동시장)을 통해서도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광 범한 대중이 등장했다. 국가도 시장도 해결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때 활성화되는 것이 사회적 경제이다. 그 모습이 나라마다 다른 것은 자연스럽다. 사회적 경제는 서로 다른 삶의 현장에서 애쓰는 무수한 노력들이 창의적 으로 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시민 인본주의와 근대성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다. 르네상스는 이렇듯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의 절묘한 표현처럼 '끝나지 않은 여 명'을 나타낸다. 이탈리아 도시들의 시민사회적 공존 실험은 르네상스 시기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르네상스의 문화가 되지 않았다.
- 다양한 파벌 사이의 격렬한 싸움과 전쟁이 이 시기의 특징이 되었 다. 시민적 삶에 대한 사람들의 성찰은 너무나 빈약했고 내전과 문명에 역행하는 역사적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d Machiavelli의 저작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사상은 정치 및 시민 사상의 영역에서 당시의 유럽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와 그 이후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에게 개인이란 사악하고 무서우며 야수 같고 교활한 존 재였으며, 개인을 표현하는 이러한 말들은 근대성을 나타내는 인 류학적 어휘가 되었다. 사실 마키아벨리 정치 이론의 중심에는 그 가 목격한 이탈리아의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간에 대한 극단적 비관주의가 있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저서 전반에 스며 있다.
이 점은 인간 일반에 대해서 말해준다. 즉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기만에 능하며 겁이 많고 이득을 몹시 탐낸다. 평소에 ...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자신의 소유물, 생명 그리고 자식마 저도 바칠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당신이 정작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들은 등을 돌린다.《군주론(Tutte le opere)》, 17장)
만일 사람이 정말 이렇다면 공동생활의 기반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자를 배반할 때는 망 설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배반할 때는 덜 망설인다. 왜냐하 면 사랑이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해 유지되는데, 인간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자신이 사랑한 자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항상 효과적이다.” 《군주론》, 17장)5
- 나의 행복을 위해서 너와의 깊은 관계는 필요하지 않다. 나의 행복은 절대자인 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난다. 전근대의 근본적인 관계 구조는 이렇듯 3원적이고 불평등하다. 기나긴 중세 전반全般은 이렇듯 콤무니타스가 손상된 자리에 개인성이 하나의 범주로 서서히 출현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15세기 전반 토스카나의 시민 인본주의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조화로운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나 그 후 르네상스, 종교개혁, 17세기 계몽주의와 함께 점점 더 빠르고 불가역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었다. 근대 정치경제학의 탄생은 바로 이 문화적 과정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근대 이후 사회과학은 이렇듯 새로운 중재자들의 새로운 제3자 성第三者性, thirdness'이 발명되는 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개인들 사 이의 극적인 만남을 피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근대 이후 사회과학이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제3자는 더 이상 신神이나 콤무니타스에 해당하는 제3자가 아니며, 나너 관계를 열고 보편화하는 제3자, 즉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가 말하는 섬세한 의미의 그'나 '그녀'도 아니다. 이 새로운 제 3자는 우리의 관계에서 의무성이 소거消去되어 상호적으로 ‘책무 를 면제해주는, 즉 상처받지 않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자유 구역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약속하는 제3자다. 근대성은 '너'보다는 이러한 '그'를 선호했다. 곧 우리가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상처를 주지 못하게 하는 중립적인 제3 자를 선호했던 것이다.  이 제3자는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 Vladimir Jankélévitch가 말한 '다른 사람으로서의 '누군가'라고도 할 수 있고, 프랑스어 표현이 지닌 의미론적인 풍부함을 살려서 페르손personne, 사람이라고도 명명命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특히 존 롤스John Rawls의 자유주의 신계약 이론이 대표적이다. 감정, 소속감, 우정과 강한 유대감은 모두 위험하 고 집단 이기주의와 배타성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회 계약은 그 이론적인 전제 조건들 가운데 하나로 서로에 대한 상호 무관심'을 요구한다.(Rawls, 1971, pp. 128-129)
넓고 다원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공정’ 하려면, 그 사회의 개인들은 어딘가에 유대 관계로 얽매이지 않아야 하고 과도한 열정도 없어야 한다. 나와 너의 차이는 단순히 그 차이를 없애는 것으로 해결된다. 곧 나와 너의 차이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계약 및 사적 계약을 맺는데, 이러한 계약들은 점점 더 정교해짐으로써 사 람들 사이에 대화가 필요 없게 되고, 만남은 더더욱 필요 없어지 며, 단지 서로 간의 무관심만이 요구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장에서의 계약의 상호성contractual reciprocity은 상호성의 새로운 형태로서, 기존의 자유롭고 상호적인 선물에 기초를 둔 상호성을 대체하는 근본적인 것이 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선물은 우리를 하나로 결집시키는데, 선물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중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공동의 땅, 공통의 기반을 강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계약에서는 내 것은 너의 것이 아니고 너의 것은 내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는 사라지고, 계약은 우리 서로를 상호 면역immune 상태로, 곧 관계성이 소거된 상태로 만들어준다. 그 공동 의 땅, 공통의 기반은 특히 대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는 곳일 경우 갈등과 충돌,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성은 이러한 갈등과 충돌, 고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이를 위해 그 공동의 땅, 공통의 기반이 주는 삶의 결실들도 포기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근대성은 이러한 결합의 불가항력성을 깨고 싶어 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고, 이에 대해 너무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애덤 스미스를 필두로 하는 18세기 경제학의 출현은 근대 성의 이 대대적인 관계의 '면역화immunizing' 프로젝트에서 결정적인 사건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면역화 프로젝트는 마키아벨 리 및 홉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눈을 통해 시장관계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정치경제학의 진화를 특징짓는 이 첫 번째 전통에 따라 시장의 발전은 시민사회의 발전을 수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는 더 이상 선물이나 희생에 기반하지 않고, 희생이 따르지 않는 협력'에서 출발한 계약과 협약에만 전적으로 의존하 여 발전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우정(또는 계몽주의 언어로는 형제애)은 통상적인 시장 관계의 특성이 될 수 없다. (Bruni and Sugden,2007)
19세기와 20세기에 자유주의 사상은 애덤 스미스의 첫 번째 이론으로부터 발전했으나, 스미스의 구분 방식 가운데 일정 부분은 망각된 채였다. 시장은 언제나, 그리고 어떻게든 공동선을 위해 운영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시장은 시민사회의 가장 높은 단계의 형태로서, 가격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시스템에 수정을 가하려는 국가의 개입은 비록 사회 통합과 연대의 목적이더라도 모두 해롭고 부도덕하다고 간주된다.
이와 관련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 밀턴 프 리드먼Milton Friedman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 한 논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조직으로서의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기업 활동이 속임수 나 사기 행위 없이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게임의 규칙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이익 증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자원을 활용 하는 것이다.” (1962, p. 133)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관 institution으로 서의 기업과 인간적 차원에서 관대할 수 있는 개인individual으로서 의 박애주의자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기업은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한편, 빌 게이츠Bil Gates 개인은 박애주의자로서 자신의 재산 일부를 가난한 국가에 기부함으로써 공익에 기여한다. 그러나 1923년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이었던 알프레드 슬론Alfred T. Sloan의 유명한 말을 빌리면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사업을 경영하는 것은 사업일 뿐이다(business of business is business).”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떤 관점에서 자 본주의 대기업과 시장 사이에는 밀접한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모두 개인으로서의 상대Thou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도 관료적 계층 구조와 가격의 자발적 조정 모두가 가능하기 때문에 콤무니타스를 비켜나서 임무니타스를 지향할 수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기업과 시장은 상대방이 상처 입지 않게 하는 두 가지 메커니즘이다. 이 또한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사회 협동의 전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관점과는 별개로 왜 시장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주의적 기업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러 면에서 계층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계층 구조란 시장의 중재처럼 타인들 간의 상처를 피하는 효과를 보장하 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 요약하자면 경제 이론가들은 시장에서의 연관성이 수평적이며 자유롭고 대칭적인 까닭에 계층 관계의 원칙에 따를 필요가 없으며, 재산권과 계약의 실행을 보장하고 중개하는 외부 기관에만 의존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근대 자본주의 기업은 부분적으로는 전근대 시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군대, 교회, 또는 구체제 의 사회를 모방한 계층적 모델에 의거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 기업은 무상성이나 관계성이 제거된 임무니타스라는 측면에서 시장과 한 궤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효율적 기능이 요구되는 시장에 내재되어 있는 수평화'12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 한다. 경제학자 루이지 징갈레스Luig Zingales는 다음과 같이 썼다. “거버넌스 란 권위, 지시 혹은 통제의 행사와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 단어가 자유시장경제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는 다소 이상 하게 들린다. 우리에게 왜 어떤 형태의 권위가 필요한가? 시장이 특정한 권위의 개입 없이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능력이 없 다는 것인가?”
- 로널드 코스Ronald H. Coase는 1937년의 고전적 논문 기업의 본성 (The Nature of the Fim)〉에서, 시장과 기업은 두 개의 대안적 존재 인데 시장은 계약의 원칙인 가격 체계에 근거하고, 기업은 본질적 으로 통제 시스템인 계층적 원칙에 근거하여 움직이는 실체라 언급했다. 시장은 거래 비용 때문에 값비싼 메커니즘이고, 필연적 으로 불완전하고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는 복잡한 관계성을 관리하는 데 항시 효율적이지는 않다. 기업은 이러한 시장에 관한 경험 적이고 이론적인 증거들을 토대로 형성되고 발전한다.
- 동등한 가치의 교환 원리에 기반한 계약과 달리 계층적 시스템 은 '주인'과 '대리인agent'이라는 비대칭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리인 이론은 여전히 경제학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조직의 이론적 모델이다. 주인(기업)과 대리인(예를 들면 경영자)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계층적 계약hierarchical contract 으로, 고전적 사고에서는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한 구절이 두 가지 사실을 뜻하는 모 순적 표현이다. 대리인을 기업이나 자산에 묶어두는 것은 계약이 지만, 그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계층적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 166 | 이는 관리자와 직원들 간의 기업 내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 다. 계약으로 맺어진 폭넓은 상하 관계는 조직 내의 모든 일반 관계를 지배한다. 
요약하면 전통적인 경제 이론은 시장과 기업 간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원론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하나는 기업이 고객 또는 공급업체와 같은 외부와 계약을 체결할 때, 그 관계는 동료들 사이의 관계처럼 어느 정도 수평적이라는 것이다. 기업이 원자재나 자본 같은 원료 factor 시장이나 최종 제품 시장에 참여할 때, 다른 기업들과 어느 정도 대등한 기반에서 상호작용을 하므로 애덤 스미스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기업의 내부 관계에서 조직 내 역학은 다분 히 계층적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상하 관계는 조직 구성원들의 행동 지침을 이끌어내고 구성원으로서의 그들의 행동 이 조직 외부에서의 행동과 구별될 수 있도록 담보하는 주요 수단이다. 더욱이 조직에 공식적 구조를 제공하기도 한다.
- 기업과 시장 간의 문화적 연속성은 개인적이고 위험이 따르는 관계를 중재하 는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기업 내부와 시장에서는 모든 관 계가 개인적이지 않고 위험이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지도록 해주는 '제3자에 의해 중재된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에서의 인사이론과 대리인 이론은 시장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면하는 사 람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상처'를 예견하고 완화하며 최소화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라 하겠다.
- 나는 시민 생활의 근본적인 원칙인 이 보조성의 원칙이 새로운 방향성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계약은 우정이 할 수 있는 일을 하 지 말 것. 그리고 우정은 아가페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 것.”
따라서 잠재적으로는 긍정적이고 문명화시키는 특성을 지닌 계 약이란 것은 필리아와 아가페를 보조하는 도구로 간주되어야지, 싼값에 필리아나 아가페를 대체할 수 있는 관계성의 한 형태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반대로 현대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문화가 개인의 권리 문제에서 종종 보여주는 것처럼, 필리아나 아가페가 보조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 이 지점에서 결정적 질문을 하나 해야 한다. 오늘날 경제학에서 행복의 역설을 설명하려고 하는 학자들은 마음속에 어떤 행복, 어떤 사회성을 담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위에 제시된 이론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류학적 환원주의의 정도가 높기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여기에서 개별적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을 질투하고, 소유물을 통해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것을 좋아한다. “싫든 좋든 인간 존재는 경쟁하는데, 이제 주류 경제학은 이 지점을 '인간 본성의 핵심으로 설정한다.” (Layard, 2005a, p. 147)  인간이 그렇기도 하다는 점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레이어드 조차도 다른 책 (2005b)에서 그랬듯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가 보기에, 질투와 적대감이 인간 행복을 설명하는 근본적인 인류 학적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욕구의 좌절과 불만족이 광고에 의해 유도된 높은 기대의 결과이며 타인과 위치를 비교하는 결과라는 것에 동의하는 경제학자들이 많겠지만 나는 인간 행복이 질투와 경쟁의 차원에 한정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달리 말하면,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들이 불행과 욕구의 좌절에 대해서는 좋은 설명이 되는 것 같지만, 인간 행복에 관한 실증적인 이론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인간 행복은 이웃 사람들과 다소 비슷한 크기의 자동차나 집을 갖는 것과는 다르며 그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사실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자주 좌절을 겪기도 하지만, 우리는 직장 동료들보다 더 많이 소비한다는 이유로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거나 실현된 삶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오늘날의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행복은 고전적인 행복의 개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다. 고전적인 행복의 개념은 덕德에 깊이 연결되어 있고, 쾌락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오늘날 경제 이론의 행복 개념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인 에우다이모니아와는 매우 거리가 멀며, 오히려 제러미 벤담 의 행복 이론에 가깝다고 하겠다. 벤담은 행복happiness이 단지 쾌락 pleasure의 동의어일 뿐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적 전통에서는 행복을 최고선,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동일시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는 주로 '인간성의 고양된 상태human fourishing' 라고 바꾸어 표현하곤 한다. 여기서 영어로 human flourishing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happiness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전통 안 에서의 행복 개념은 시민적이면서도 취약한 면이 있는 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이 지점에서 고대인들의 행복 개념과 현대인들의 행복 개념은 깊은 차이를 보인다. 적어도 현대인 중 많은 이들에게 그러하다.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행복은, 좋은 삶의 구성 요소인 취약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사실 쾌락주의적인 즐거움과 합치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과 행복은 더 이상 비례 관계가 아님을 보여주는 '행복의 역설'은 쾌락이 곧 행복이라고 보는 이러한 개념의 기만을 밝혀주고 있는 셈이다. 시장의 확장으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거래에 의해 대인 관계의 질이 떨어지고, 경제 관계가 여타의 사회적 유대를 침식하게 되면, 재화goods는 악evils이 되어 더 이상 행복 well-being을 가져오는 수단이 아니라 불행ill-being을 초래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 소득 수준과 소비 수준이 높아지면 사람들이 소득으로부터 얻는 행복의 정도가, 관계재의 감소로 인해 그들이 잃게 되는 행복의 정도보다 적어지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또 실제로 그런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 예를 들어 소득 증가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질을 희생하면서 이루어질 때, 더 부유해졌지만 행복은 줄어든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특히 1인당 국민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고나면 그렇다. 세계 북반구의 선진 경제들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
- 우리가 텔레비전 앞에서 3시간을 소비할 때 감수해야 하는 위험은 전혀 없다. 반면에, 같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투자할 경우 많은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투자를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계로 인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곧 관계로 인한 해악, 관계악을 만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또는 다행하게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이라는 의사관계재는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전근대적인 세계나 기술문명에 반대하는 세계까지 꿈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이 책의 어조인 것도 물론 아니다. 단지 이러한 상처의 부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를 오직 가상의 인간관계들로만 이루어진 삶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위험성에 대해 숙고해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가상의 인간관계들은 그토록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매우 매혹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매력은, 어떤 사과가 탐스럽지만 이미 독이 들어 있거나 적어도 중독성이 있는데도 느껴지는 매력에 불과한 것이다.
- 타인과 우리 모두의 축복과 상처, 그리고 경제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비록 잠정적일지라도 이 제 몇 가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헤겔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현대 철학의 전통은 물론이고, 막스 베버부터 페르디난트 퇴니에스와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에 이르 는 사회학의 광범위한 전통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중성과 양면 성, 그리고 칸트가 말한 인간의 '비사교적 사교성 unsocial sociability' 을 너무나 정확하게 파악했다. 사회학은 전통적으로 콤무니타스, 즉 함께 살아가는 삶의 중심에 깃들여 있는 부정적 속성, 곧 타인은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니라는 그 비극적 부정성을 발견해왔다. 그러나 사회학은 그러한 모호함과 부정의 길을 가로지르기보다는 그것들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찾았다. 주된 탈출의 길은 시장이라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다. 헤겔부터 니체까지의 수십 년 동안 현대 철학이 타인들의 '아님’이라는 부정으로부터 탈출하여 결국 이르는 곳은 공허함과 허무주의일 뿐임을 간파하는 동안, 현대 경제학은 250년 동안 유아기적 수준에 안주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까지 어떤 시대도 세계화에 직면해 있는 현 시대만큼, 시장과 계약의 연금술을 믿으면 사교성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 다고 확신한 적이 없었다. 이 시대 경제학의 거대한 위기는 지나 치게 긴 유아기 안에 숨겨져 있으며, 불행unhappiness의 역설은 이를 웅변적으로 상징화한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가, 그리고 시장의 인본주의가 거대한 환상의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이 거대한 환상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앞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역설들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비록 멀리서나마 제시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 탈출로란 무상성에 활짝 열려 있는 여러 가지 경제적 경험을 말하며, 여기서 무상성은 타인들과의 고통스럽고 무서운 마주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경제적 삶의 경험을 의미한다. 이러한 탈출로는 대신 경제적 차원을 전인격적 인간 영역으로 상상하며, 그리하여 경제/사회, 선물/계약, 에로스/아가페 등 현대 사회의 주요한 이분법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시민경제는 더 행복하고 인간적인 시민적 삶을 탐구하는 데 이러한 이분법적 긴장을 과감하게 뛰어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여정이 갖고 있는 어려움과 치명적인 위험을 순진하게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내가 사실에 기반하여 총체적이고 온전한 인간적 경제 학이 어떠한 축소나 금기 없이도 전적으로 가능하다는 희망을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제시하고자 했던 이유이다. 나는 이 책이 최소한 이러한 인간적 경제학을 시도라도 해보려는 열정을 끌어올렸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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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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