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폐가 물물교환에서 탄생했다는 주장은 화폐를 차갑고 단순하고 객관적인 존재, 인간미 없는 교환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하지만 사실 화폐는 단순한 교환의 수단이 아니다. 화폐는 그보다 훨씬 싶고 복잡한 존재다.
화폐가 탄생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대체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 았다. 사람들은 사냥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채집해 식량을 조달했고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약간의 거래가 이뤄졌지만, 그 것은 주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철저한 기준에 따라 행해지는 공식적인 의식의 일부였다. 화폐가 물물교환에서 시작됐다는 주장과 달리 이러한 공식적인 의식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마드모아젤 젤리가 방문했던 섬에는 돼지, 칠면조, 코코넛 그리고 바나나로 모두를 위한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자신이 받은 물품으로 섬사람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면, 오늘날 병원이나 대학교 도서관을 지어 주는 사람들이 누리 는 사회적 지위가 그녀에게도 주어졌을지 모른다. 또 섬사람들은 대 접에 대한 보답으로 마드모아젤 젤리를 위해 잔치를 열어 줬을 것이다. 화폐가 등장하기 전에는 모든 경제 시스템이 이러한 호혜에 기반을 뒀다.
- 주화가 등장하고 수십 년 뒤에 그들과 지주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가난한 사람들은 날품팔이가 됐다. 그들은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하루가 끝날 무렵에 품삯을 받고 퇴근했다. 1년 동안 농장에서 일하고 의식주를 해결하던 관습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1년 동안 농장에 머물면서 일할 필요가 없었다. 대우가 나쁘거나 더 좋은 일자리가 있다면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나 버렸다. 그 리고 예전처럼 책임지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는 사람도 없 었다. 주화가 널리 사용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의식주 를 해결하게 됐다.
사람들은 새로운 임금 기반 경제 시스템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시민의 아내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시민의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신호였지만 여자들은 리본을 팔고 포도를 수확했다. 5세기 아테네인이 아크로폴리스에 새로운 사원을 세울 때 노예들이 고된 노동을 전담했다. 임금 노동자들은 사원 전면에 세워진 기둥에 홈을 새기는 것과 같은 세세한 마무리 작업을 맡았다. 우연히 발 견된 회계 점토판의 기록에 따르면, 노예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임금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노예들의 노동 시간의 3분의 2 수준 에도 못 미쳤다. 임금 노동자들은 여가 생활을 하려고 휴가를 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생존을 위한 노동을 거부했던 것일까? 데이비드 스캅스David Schaps라는 고고학자가 물었듯이, 그것은 여가의 축복 이나 실업의 저주였을까?!
- 주화의 확산, 즉 화폐의 부상으로 사람들은 더 자유로워졌고 자신의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더 고립되고 나약해졌다.
주화가 그리스에 미친 영향을 모두 달갑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아 리스토텔레스는 부를 오직 주화의 양으로 생각하는 그리스인에 대해 서 불평했고 소매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말 했다. 이러한 불평이 꼬리표처럼 화폐를 영원히 따라다녔지만 결국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이 됐다. 일단 그리스에 뿌리를 내린 주화가 전 세계를 장악했으니 말이다.
- 지폐는 그런 불편함을 타개하는 돌파구 같은 존재였다. 지폐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교역이 활성화됐고 사람들은 보다 많은 것을 배웠고 기술을 발전시켰다. 지폐는 노동 방식마저 바꿨다. 수백 년 동안 국가 에서는 옷감과 곡물을 세금으로 거둬들였다.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옷감을 짜고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주화와 지폐가 통용되자, 당국은 주화와 지폐로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전과 달리 자유롭게 직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됐다.
- 학자들은 중국의 화폐 등장을 유럽의 산업 혁명보다 수백 년 앞선 경제 혁명이라 설명한다. 활자와 자기 나침반이 발명됐고 농부들은 같은 크기의 토지에서 더 많은 쌀을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농법을 개발했다. 책이 인쇄되면서 정보가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점점 많은 사람이 공물제로 운영되는 봉건 경제에서 벗어났고 화폐 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 경제로 편입됐다. 사람들은 토양 상태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뽕나무를 키웠고, 뽕나무 잎을 누에에게 먹여 실크를 만들고, 뽕나무 껍질을 으깨어 종 이로 만들었다. 씨앗을 생산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들은 그 씨앗으 로 기름을 짜 요리하거나 램프에 불을 붙이거나 방수 처리를 하거나 머리에 바르거나 의약품으로 썼다. 어류 부화장을 시작한 사람들은 치어 성장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연못을 찾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할 특수 용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초기 황제들은 몇 개의 구역을 정해 두고 그곳에서만 시장이 열리 도록 했다. 정부가 관리하는 시장에서는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됐다. 시장이 아닌 곳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산 채로 땅에 묻혔다. 어느 지역에서는 한 번에 100명씩 산 채로 묻히기도 했다. 하지만 시 간이 흘러 시장에 대한 규제는 느슨해졌고 사람들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시장이 생기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시가 형성됐다. 런던과 파리의 인구가 10만 명이 채 안 되던 시기에 중국의 두 개 도시의 인구가 각 각 1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정체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개인은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등 장한 지폐가 이를 바꿨다. 화폐는 시장의 성장을 주도했다. 시장이 성 장하자 다양한 기술들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하루 일당으로 예전보 다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게 됐다. 이를 계기로 소수가 아닌 많은 사 람이 점점 더 부유해졌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기적이었고 생 활 수준은 지속적으로 높아져만 갔다. 주화가 발명되면서부터 고대 그리스가 집중적으로 성장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만 안타깝 게도 고대 그리스의 성장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마도 1200년 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가장 발달한 문명은 중국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몽골 제국이 등장한다.
-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면서 기술 혁명과 경제 성장이 200년 전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영국에서 경제 혁명이 발생하기 800년 전에 중국 에서 이미 경제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가 유럽의 경 제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종이, 인쇄술, 자기 나침반 등 중국의 발명품들은 유럽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이제 학자 들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중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300년대에 중국은 가장 발달한 경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신기술을 발명해 냈다. 그런데 어째서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뒤처진 것일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역대 최대 강대국인 중국이 경제적으로 앞서기 위해 이웃 국가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였던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중국은 상대적으로 정체됐다. 어쩌면 중국의 노동력이 저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노동력이 저렴 한 중국은 노동력을 절약할 기기를 지속적으로 고안해야 할 동기가 거의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화폐와도 관련 있다. 몽골인을 북쪽 초원으로 몰아낸 홍건적의 지도자는 화폐나 시장 경제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 홍무제는 중국을 완전히 이상화된 과거로 되돌려 놓고 싶었다. 단순히 몽골 침략 이전이 아니라 경제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또한 자급자족하는 농가로 구성된 나라를 꿈꿨다. 사람들이 스스로 필요한 것을 생산해 공유하는 나라 말이다. 그래서 홍무제와 그의 후 계자들은 체계적으로 중국의 경제 혁명을 견인했던 요소들을 제거 해 나갔다. 그들은 해외 교역을 금지했고 화폐와 시장 중심의 경제 시스템을 버렸다. 그 대신 정부가 소작농으로부터 옷감과 곡식을 거둬 들여 정부 관료에게 주던 공물과 재분배로 운영되는 과거의 경제 시스템으로 되돌아갔다.
1400년대 중반이 되자 중국에서 지폐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은전을 주로 사용했지만 가끔 동전도 사용했다. 홍무제는 중국을 완전히 과거로 되돌려 놨다. 평민들은 200년 전 자신들의 조상들보 다 더 가난해졌다. 지폐가 발명됐을 때 나타난 경제 혁명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혔다.  1,00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신기술을 개발하고 지폐가 유통되고 사람들이 고급 식당에서 화폐를 지불하고 식사를 하던 중 국의 황금기는 찰나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너무나도 오래전의 일인지 라 과거 몇 세기에 걸친 기술과 경제의 성장으로 중국의 황금기는 그야말로 보잘것없어졌다.

- 지폐는 프랑스 경제에 유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시몽 공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고 말했다. 공화국인 네덜란드나 강력한 의 회가 있는 대영 제국과 달리 프랑스는 완전한 군주제였다. 이 말인즉, 프랑스 국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므 로 불가피하게 왕이나 왕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은행의 권력에 휩쓸려 더 많은 돈을 찍어 내서 경제 시스템이 붕괴될 수도 있었다.
돈이 제 기능을 하고 은행, 주식 시장과 중앙은행이 건재하려면 긴장감이 존재해야 한다. 투자자, 은행원, 경제 주체 그리고 정부 관계자는 누가 무엇을 언제 시행할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경제 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말한다. 정부가 경제 시스템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은행권이 끔찍한 짓을 벌이고도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긴장 감이 존재한다고 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 만 적어도 이런 긴장감은 필요하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 투자자와 근로자 등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당사자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힘이 돈을 안정화시킨다. 경제사학자들은 잉글랜드 은행과 지폐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 중에 의회의 권력이 왕보다 상대적으로 강했던 정치 시스템도 한몫한다고 말한다. 잉글 랜드인은 왕이 규칙을 지키도록 의회가 옆에서 견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정부에게 돈을 빌려줄 가능성은 컸다.
- 존 로의 시스템에는 본질적인 결함은 없었다. 결함이 있었던 것은 존 로 자신이었다. 그는 너무나 큰 권력을 원했다. 그토록 원하던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그를 견제할 세력이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존 로의 경제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데 필요한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존 로가 비참하게 실패했던 이유다.
생시몽 공작은 존 로가 은행을 설립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중 앙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절대 군주제에 치명적일 수 있다. 반면에 자 유 국가에서 중앙은행은 현명하고 수익성 있는 사업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 전 세계 국가들이 점차 국제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자 19세기 후반에 세계 경제가 세계의 금 공급량보다 더 빨리 성장했다. 사람들의 소비도 가용한 금의 양보다 더 빨리 증가했다. 그 결과, 금에 대한 수요는 증가했고 금값은 치솟았다. 금본위제도에서 금이 비싸지면 물가 는 하락한다.
흄의 사고 실험에서 살펴봤듯이, 어느 국가에서 금이 하룻밤 사이 에 사라져 물가가 하락하더라도 상대 가격이 그대로이기 때문에 국 내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물가와 동일 한 수준으로 하락하기 때문에 소비 규모는 이전과 변함이 없다. 하지 만 흄이 가정한 세상은 너무 비현실적인 상상 속의 세상이다. 더욱이 돈의 본질적인 기능 중 하나인 부채 혹은 채무가 무시됐다.
- 누군가 오늘 1,000달러를 빌렸는데 내일 급여와 물가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되면 그는 완전히 망한 셈이다. 이제 그는 매월 부채상환금을 내기 위해서 노동 시간을 두 배 늘려야 한 다! 반면 물가가 하락했을 때 부채가 없고 은행에 1,000달러를 예금 해 둔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는 들떠서 잠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어제보다 두 배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디플레이션은 채무자에게는 나쁜 소식이지만 채권자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 1873년, 미국이 금은 본위제도에서 금본위제도로 갈아타자 물가는 20년 동안 계속 하락했다. 이 시기는 자신이 가진 돈으로 점점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살 수 있게 된 부자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빚을 지고 매월 일정하게 빚을 갚아 나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해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 결과 미국에서 '무엇을 돈이라고 불러야 하는가?'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농민은 주로 빚을 내서 농토를 확보했다. 그들은 금본위제도와 뒤이은 물가 하락으로 갈수록 살기 힘들어졌다. 
- 1970년대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과 정부 개입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제 역사학자들은 자유 은행 시대를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켄터키주에서 버지니아주로 떠난 운이 나빴던 어느 여행자의 여행기 같은 일화 대신 전체 은행 수, 은행 도산 건수, 화폐 교환 비용 등 객관적인 데이터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유 은행 제도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여행자들은 지폐를 교환할 때 대략 1~2퍼센트 정도 손해를 봤다.
이것은 오늘날 거래 은행이 아닌 타 은행의 ATM을 사용할 때 내야 하는 수수료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경제사학자들은 당시에 수상쩍게 운영되던 은행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서부 개척지에서 시중 은행들이 미친 듯이 지폐를 발행하는 것도 쓸모가 있었다. 정착민들은 씨앗과 가축 그리고 필요한 농기구를 구 입하기 위해서 시중 은행으로부터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신용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돈된 시스템보다 무정부 상태가 개척지에 더 적합 했다.”라고 썼다.
남북 전쟁이 발발해 연방 정부가 전쟁 자금을 조달해야 했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행정부의 재무장관은 일종의 자유 은행 제도를 수립하기 위해서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규정을 충족하면 누구나 국법 은행을 설립할 수 있게 됐다. 결정적으로 국법 은행법은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정부 채권을 지폐 발행의 준비금으로 삼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국법 은행은 북부 연합에 대출을 해줘야만 했다. 남부 연합도 지폐를 발행했는데, 남부 연합이 전쟁에서 패배하 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1865년 3월 3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최종 은행 법안에 서명했다. 경제 역사학자 브레이 해먼드 Bray Hammond는 “그날은 집권 2기 취임 전날이었고 남부 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기 한 달 전 이었으며 그가 살해되기 6주 전이었다.” 라고 썼다. 이 법으로 주법 은 행이 발행한 지폐에 10퍼센트 세금이 부과됐다. 이것은 주법 은행의 지폐에 세금을 부과해 시중에서 유통되지 않도록 만들고 국법 은행이 발행한 단일 지폐만이 미국에서 유통되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법은 효과가 있었고 곧 주법 은행이 발행한 지폐는 모두 사라졌다.
남북 전쟁 이후 사람들은 '미합중국들' 대신에 ‘미합중국'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즉, 서로 다른 주들로 구성된 연합체가 단일 국가로 다시 재편된 순간이었다. 주법 은행이 마구잡이로 발행한 수천 가지 지폐가 유통되던 세상이 사라지고 국법 은행이 발행하는 단일 지폐 가 유통되는 세상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것은 국법 은행법이 가져온 거대한 변화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일 화폐의 사용은 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 1907년 가을 작은 뉴욕 은행을 경영하던 어느 거물이 재정난에 처했고, 사람들은 그의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은 은행에서 시작된 뱅크런은 빠르게 뉴욕의 다른 은행들로 확산됐다. 앤드루 잭슨 집권 시기 이후 최악의 금융 공황이었다. 당시 가장 영향 력 있던 은행가인 J. P. 모건은 개인 서재에 은행가들을 모아 놓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서로를 구제해 주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문을 열지 않겠다며 엄포를 놨다.
그러고 나서 모건은 그 자리에 모인 은행가들이 자신의 제안에 동 의하고 해결 방안을 강구할 때까지 혼자서 카드놀이를 하며 시가를 태웠다. 은행가들은 마침내 구제 방안을 만들어 냈고 금융 공황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실물 경제를 구제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실 업률이 두 배 치솟았고 기업의 절반이 도산했다. 이로 인해 1907년 미국에서 중앙은행법이 통과됐다.
하지만 금융 공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한 은행가의 글을 빌리면,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가 '기업의 이기적이고 무모한 경영’, 과도한 투기’, 은행의 탐욕 또는 '월가의 교활한 관행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은행은 탐욕스럽고, 기업은 이기적이며, 월가는 교활하다! 이 러한 속성 때문에 금융 위기가 발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이 습 하기 때문에 홍수가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 20세기 경제학자는 월가의 탐욕이 금융 위기를 초래했다면 우리는 매주 금 융 위기를 경험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에 생각했어야 했던 그리 고 우리가 항상 고민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탐욕, 이기심 그리고 교활함이 사회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고 금융 시스템에 내재된 폐 해를 제한할 통화 시스템을 어떻게 추구할 수 있을까?
- 1907년 금융 공황은 몇몇 사람들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중에는 '킹핀으로 알려진 상원의원 넬슨 올드리치selson Aldrich 가 있었다. 그는 은행과 금융에 관한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고 당시 새롭게 출범한 통화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화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유럽으로 갔다.
1910년 올드리치는 미국에도 중앙은행 또는 그와 비슷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미국인이 이에 찬성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던 그는 합리적인 상원의원이 할 법할 일을 했다. 비밀리에 영향력 있는 은행가들을 불러 모았고 중앙은행을 설립하기로 묘안을 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중앙은행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 기차에 오른 한 은행가는 “기차에 올라타자 창문에 블라인드 가 드리웠다. 오직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만이 거기에 창문이 있음을 알렸다. 기차에 오르자 우리는 성을 밝히지 말라는 규칙을 따랐다. 우리는 서로를 벤, 폴, 넬슨 그리고 아베라고 불렀다." 라는 글을 남겼다. 기차는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명이 11월이 되면 인적 없는 조지아주 해안가에 위치한 고급 사냥 클 럽에 숙소를 마련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음모론자들의 꿈을 실현시 켜 주는 듯한 이름을 지닌 지킬 아일랜드였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미국에서 쓰이는 화폐의 본질을 완전히 바꿀 계획을 모의하게 된다.
그들은 미국에 중앙은행이 필요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인은 은 행의 권한을 어느 하나의 조직에 집중시키는 것을 경계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그들은 타협점을 마련했다. 실로 미국인다운 발상이다. 미국 전역에 존재하는 은행을 하나로 연결하지만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은행 네트워크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네트워크를 중앙은행으로 부르지 않고 준비 연합'이라 부르기로 했다. 미국에 존재하는 모든 은행은 미합중국 준비연합 Reserve Association of the United States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됐다. 유럽의 중앙은행처럼 준비 연합은 정부 관료가 아닌 민간 은행가에 의해 관리됐다. 그리고 지폐를 발행하고 시중 은행에 대출을 해줄 수 있었다. 비밀 회동은 해산됐고, 올드리치는 몇몇 은행가들이 모여서 은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해당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준비 연합을 설립할 계획은 누가 봐도 은행가 몇몇이 모여 서 모의해 나온 계획처럼 보였다. 의회는 이에 대해 논쟁을 벌였고 올드리치는 은퇴했다. 앤드루 잭슨의 정당이자 미합중국제2은행을 없앤 장본인인 민주당이 의회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해당 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킨 한 민주당 의원은 “앤드루 잭슨의 유령은 낮에는 내 눈앞을 으스대며 활보했고, 밤에는 내 침상에 나타났다.” 라고 남겼다.
민주당은 민간 은행가들이 통제하는 은행 네트워크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킬 아일랜드에서 모의된 계획과 반대로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오늘날 연방준비은행 Federal Reserve Banks으로 이름이 바뀐 각 지역의 준비 연합을 워싱턴에서 감독 하기로 했다.
미국은 금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고 의회는 연방준비은행의 지 폐 발행 권한을 제한했다. 연방준비은행은 금 보유량을 기준으로 4달러 가치를 지닌 금으로 10달러 지폐만을 발행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방준비은행이 발행한 지폐는 미국 정부의 채무'가 됐다. 그것은 민간 은행이 발행한 사채가 아닌 공채였다. 단, 그 공채를 발행한 조직은 12개 은행으로 구성됐지만 일종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공공과 민간이 합쳐진 이상하면서도 새로운 조직이었다.
연방준비은행은 여러 위원회들의 위원회가 만들어 낸 엉뚱한 결과 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좋은 아이디어이고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였다. 놀랍게도 연방준비제도는 실제로도 그랬다. 앞으로 12년 동안 연방준비은행은 미국에 쓸모 있는 화폐를 제공했고 계절 적으로 발생하던 통화 부족을 유연하게 해소했다.
하지만 분절된 연방준비은행은 평범한 경기 침체로 끝날 수 있었 던 1929년 주식 시장의 붕괴로 촉발된 경제 위기를 20세기 최악의 경제 재앙으로 바꾸는 데 일조한다.
- 1929년 주식 시장이 붕괴했을 때,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정확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낮은 이자로 뉴욕씨티 은행에 대규모로 대출을 해줬다. 이것은 효과가 있었다! 이 조치 덕분에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는 은행의 줄도산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30년 실업률은 계속 상승했고 소비와 물가는 계속 하락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은행장은 경제가 다시 돌아가도록 은행 대 출 기준을 완화했다.
오늘날과 메커니즘은 다르지만 연방준비은행은 과거와 동일한 기본 원칙으로 운영된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연방준비은행은 돈을 찍어 내고 투자와 고용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대출을 늘린다.
- 시카고 연방준비은행은 통화량이 늘어나면 기업가들의 생산적인 투자보다 무역상들의 투기 활동을 촉진 시킬까 봐 걱정했다. 그리고 댈러스 연방준비은행은 '인위적인 수단 을 통한 경제 동향에 대한 간섭을 경고했다.
그래서 연방준비은행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물가 하락 과 실업률 상승이 사람들과 기업들의 채무 상환을 더욱 어렵게 만들 었다. 은행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1920년대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가 을씨년스러운 마법을 부렸다.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는 고객들의 예금액의 일부분만 지급 준비금으로 남겨 두고 나머지는 대출해 주는 은행제도다. 은행은 이 제도를 통해 대출을 늘렸고, 사람들은 지폐와 금을 은행에 예치하는 것을 줄였다. 이처럼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는 시중 통화량을 늘렸다. 하지만 1930년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의 마법이 역효과를 냈다. 사람들이 은행 예금을 한꺼번에 되찾기 시작하자 은행들은 문을 닫았고 통화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동시에 느낀 사람들은 소비를 줄 이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저축했다. 물가 하락이 예상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상품이 보다 저렴해지기 때문에 가격이 더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비하기 마련이다. 통화량 감소와 소비 하락으로 물가는 하락했다. 물가가 하락하자 채무자들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들은 대출금을 갚을 수 없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은행 도산이 예상됐다. 은행이 도산하면 시중 통화량은 더욱 줄어든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이를 '디플레이션 소용돌이' 라고 부른다. 자연스러운 현상도, 앞선 경기 과열에 대한 불가피한 조정도 아니었다. 디플레이션 소용돌이는 화폐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경제적 재난 사태이지만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위기이기도 했다. 연방준비은행이 디플레이션 소용돌이를 막아내야 했다. 하지만 연방준비은행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 루스벨트는 사람들이 화폐라고 믿기 때문에 화폐라고 불리는 것이 화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은행권이 신뢰를 잃자, 사람들은 은행에 맡긴 예금을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서 사람들은 앞다퉈 예금을 인출하고 자신들의 돈을 지폐의 형태로 보관하기를 원했다. 지폐에 대한 신뢰마저 상실하자, 사람들은 지폐를 금으로 교환하고 싶어 했다. 예금을 지폐로 교환하고 지폐를 다시 금으로 교환하는 일이 이어지자 다른 곳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화폐를 사용하는 데다 그런 화폐조차 부족한 세상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이런 사태를 되돌리 려고 했다.  다음 날, 은행들이 영업을 재개했다. 또다시 은행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서 늘어선 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놀랍게도 뱅크런이 역전됐다! 은행 휴업과 루스벨트의 노변담화가 효 과를 발휘한 것이다. 사람들은 은행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은행에 지폐를 예금했다. 사람들이 은행 예금을 화폐라고 다시 믿었기 때문이다.
- 루스벨트는 화폐와 관련된 이슈들에 대한 좁은 견해를 바탕으로 즉흥적인 대응을 했다. 그는 화폐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보유한 선하 고 현명한 사람들이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완벽하지도 않았다. 하 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1933년 봄, 대공황이 절정에 달했다. 다시 말해 그해 봄은 미국 역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 중 최악의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스벨트가 은행 영업을 강제로 중단하고 국민들로부터 금을 몰수하고 금본위제도를 포기한 뒤에 모든 것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채무자들의 채무 상환에 대한 부담이 마침내 완화됐다. 실업률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소득 수준과 주식 시장의 지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복세는 더디고 고르지 못했고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미국 경제는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완전히 회복 되지 못했다. 하지만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징후는 분명했다.  수십 년 뒤에 경제사학자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을 되돌아보며 이 국가들 사이에서 명백한 상관관계를 발견 했다. 정부가 금본위제도를 포기하자 차례대로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경제사학자들은 경제 위기와 금본위제도 사이에 인과관계 가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금본위제도가 국가들을 끔찍한 경제 적 순환 주기에 가뒀던 것이었다. 하지만 금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내 자 끔찍한 순환 주기 역시 끊어졌다.
- 그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세계는 가짜 금본위제도 위에서 움직였 다. 외국 정부들은 여전히 달러를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교환 비율은 1934년 루스벨트가 정의한 금 1온스당 35달러였다. 하지만 일 반인들은 더 이상 달러와 금을 교환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71년 미국은 금본위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더 이상 금이 아닌, 미국인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물품들을 기준으로 연방준비은행이 달러의 가 치를 관리했다. 다시 말해 마침내 미국은 다른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 로 피셔가 원했던 대로 돈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말 역사적인 순간은 1933년에 찾아왔다. 그해 가을 루스 벨트는 금본위제도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교수 이자 친한 고문에게 편지를 썼다. “그대는 인간의 고통과 이 나라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보다 이전의 인위적인 금본위제도를 우선시하는구먼.” 이 문장에서 핵심어는 '고통'이나 '절실히’아닌 '인위적인'이다. 금본위제도 신봉자들은 금본위제도에 자연의 힘을 부여했다. 그들은 화폐로서의 금을 자연의 질서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금본위제도가 아닌 다른 통화 정책들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금본위제도에 자연스러운 부분은 하나도 없음을 인지했다. 그것은 다른 통화 정책처럼 인위적인 정책이었다. 금본위제도는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했지만, 금본위 제도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선택한 통화 정책이었다. 루스벨트의 천재성이 “우리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고 세계는 금본위 제도에서 벗어났다.
- 트레이더 출신의 법대 교수인 모건 릭스Morgan Ricks는 “그림자 금융 기관들이 발행한 단기 차용 증서는 현금 등가물이라 불린다. 하지만 기업 재무 책임자들과 여타 사업가들은 그것을 그냥 현금이라 부른 다.” 라고 썼다. 다시 말해 그림자 금융에서 진짜 돈이 만들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2007년 그림자 금융은 전통적인 금융보다 비대해졌다. 기업 재무 담당자, 머니마켓펀드 운용사 그리고 연금 펀드 운용사는 수조 달러 에 달하는 현금을 그림자 금융에 투자했다. 하지만 불안감을 느낀 그 들은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미국 역사상 최악의 뱅크런이 촉발됐다.
- 베어스턴스 Bear Stearns에서 첫 번째 뱅크런이 발생했다. 베어스턴스는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소형 투자 은행이었다. 베어스턴스는 머니마 켓펀드를 통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융통해 주택 저당 채권을 매입했 다. 2008년 3월 머니마켓펀드 운용사들은 베어스턴스에 자금을 빌 려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큰 머니마켓펀드를 운용하는 피델리티 Fidelity 는 거의 100억 달러 를 베어스턴스에 빌려줬다. 하지만 한 주 만에 모든 머니마켓펀드 운용사들이 빌려준 돈을 모두 되돌려 줄 것을 베어스턴스에 요구했다.
뱅크런이 발생했을 때 거의 모든 예금자가 예금을 인출하려고 거 래 은행 앞에 길게 줄지어 섰다. 마치 영국 해군의 한 관계자가 “지폐 는 돈이 아니다.” 라고 말했던 순간과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5,000명의 개인이 은행에 맡긴 수천 달러를 한꺼번에 인출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50여 개의 대형 기관들이 각자 베어스턴스에 빌 려준 수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베어스턴스는 빌린 돈으로 수십억 달러를 주고 주택 저당 채권을 매입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구도 주택 저당 채권을 원치 않았다. 머니마켓펀드 운용사 들을 포함해 베어스턴스의 예금자들은 자신들이 맡긴 돈을 되돌려 달라고 했지만, 베어스턴스는 그들에게 되돌려 줄 돈이 없었다.
- 베어스턴스는 상업 은행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반 예금은 없었고 연방준비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연방준비은 행은 '특이하고 긴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자금을 빌려줄 수 있 는 법 조항을 근거로 베어스턴스에 130억 달러를 빌려줬다. 연방준비 은행은 '상인, 소형 은행가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융자해 주라 던 월터 배젓의 19세기 조언을 따랐다. 연방준비은행은 최후의 대출 기관으로서 최악의 뱅크런을 막기 위해서 그림자 금융에 돈을 퍼붓 기 시작했다.
베어스턴스는 연방준비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금요일에 영업을 개 시했다. 주말이 되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JP모건 체이스가 현금 으로 베어스턴스를 인수했다. 연방준비은행은 인수 거래의 조건으로 베어스턴스로부터 300억 달러의 주택 저당 채권을 매입하는 데 동의했다. 그렇게 베어스턴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마침내 주택 저당 채권은 안정화됐고, 연방준비은행은 이자와 함께 빌려준 돈을 회수했다.
몇 달 뒤에 또 다른 투자 은행에서 뱅크런이 터졌다. 바로 리먼 브 라더스였다. 리먼 브라더스는 베어스턴스와 같은 투자 은행이었지만, 규모가 훨씬 컸다. 리먼 브라더스는 부실한 주택 담보 증권을 엄청나 게 보유하고 있었고 너무나 많은 돈을 대출해 줬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에 돈을 맡긴 거의 모든 사람이 돈을 돌려 달라며 찾아왔다. 하지만 리먼 브라더스는 그들에게 돌려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 누구도 사려고 하지 않는 주택 저당 채권만 잔뜩 안고 있었다. 9월 15일 월요일 이른 아침에 리먼 브라더스는 파산을 선언했다.
- 머니마켓펀드가 불러온 2008년 공황 사태가 주는 핵심 교훈은 '돈을 따라가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금융 시장에서 돈이 흘러가는 곳을 살펴보란 의미가 아니다. 그림자 금융의 관점에서 새로운 종류의 유사 화폐가 탄생하는 곳을 면밀히 살피란 의미다. 사람들이 대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대출을 받는 곳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여기에 돈을 맡기면 은행에 맡긴 돈처럼 느껴진다. 이 말인즉, 지금 당장이라도 완전한 액면가로 인출이 가능한 돈이다.
1690년 금세공업자들이 발행한 차용 증서, 1930년 은행 예금 또는 2007년 머니마켓펀드 사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돈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가진 모든 사람이 한번에 그것을 현금화하 겠다고 결심하면 또다시 세계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악화될 것이다.
- 금리 인상은 걸리면 꼼짝없이 죽게 되는 죽음의 덫이었다. 높은 이 자를 지불하기 위해서 국가들은 세금을 인상하거나 지출을 줄여야 했다. 이것은 이미 높은 실업률을 더 높이게 될 것이다. 실업률이 더 높아지면 세수가 줄어들게 되고 빚을 갚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이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 있다. 중 앙은행이 통화량을 늘리고 공개 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들은 대출, 투자 그리고 고용을 늘려 세수가 증가할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부채를 갚기가 수월해진다. 여 기에는 또 다른 장점도 있다. 금리가 내려가면 통화의 가치가 떨어져 수출이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 방법을 너무 지나치게 사용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하게 사용하면 소비가 늘고 고용이 증가하고 수출 이 늘어난다. 이것은 일시적인 재정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완벽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그리스는 자국 화폐인 드라크마를 포기했다(스페인은 페세타, 포르투갈은 에스쿠도escudo,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파운드Irish pound를 포기했다). 유럽 주변부에 속하는 국가들에게는 금리를 낮출 중앙은행 과 평가 절하할 화폐가 없었다. 그들은 죽음의 덫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 어떤 면에서 미국은 남부 유럽을 닮았다. 둘 다 대외 수출국으로부터 물건을 사고 돈을 빌렸다. 남부 유럽인은 독일로부터 차와 기계 장비를 구입하고 유로로 지불했고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TV와 러닝화를 사고 달러로 지불했다. 중국은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장기 채권을 구입해 더 많은 달러를 미국에 빌려줬다. 덕분에 미국인은 중국산 수입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남부 유럽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미국은 중국이 통제할 수 없는 달러로 돈을 빌렸다. 설령 미국이 중국에 1조 달러를 빚졌다 할지라도 칼자루를 쥔 쪽은 미국이다.
- 금융 위기 이후에 연방준비은행은 이례적으로 난데없이 수조 달러를 발행해 미국 경제에 적극 개입했다. 이를 두고 일부 평론가들은 인플레이션을 유도하고 달러의 가치를 급격히 떨어뜨리는 위협으로 여겼다. 이것은 나중에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통화량이 엄청나게 늘어나면 중국이 보유한 장기 국채의 가치 역시 폭락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의 통화 정책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자국 통화로 돈을 빌릴 때 누릴 수 있는 이 점이다. 간단히 말해 내 돈으로 빌렸으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돈을 더 찍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 그리고 아일랜드와 스페인은 유로존에 가입할 때 자국 화폐를 포기했으므로 미국처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경제 시스템과 상황이 판이하게 다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플로리다주와 네바다주는 스페인과 아일랜드처럼 은행 대출이 증가하고 주택 건설이 활발해지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던 중에 금융 위기, 부동산 거품 붕괴와 높은 실업률을 경험했다.
하지만 2010년 네바다주의 실업률이 14퍼센트를 육박했을 때, 수 억 달러의 자금이 자동적으로 연방 정부로부터 나와 실업 보험과 식 료품 할인 구매권의 형태로 네바다주로 흘러들어 갔다. 이 자금은 미 국 건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마련됐다. 그중에는 경기 과열과 거 품 붕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던 텍사스주와 메인주 같은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도 있었다. 재정 위기에 처한 네바다주를 도와준다고 해서 텍사스주와 메인주에 사는 사람들이 불평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 역시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의 낭비가 심한 문화를 공격하는 논평을 내놓지도 않았다.
- 미국인은 자국 경제를 뉴욕주나 오리건주의 사람이 아닌 미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어느 지역에 사는지 상관없이 미국 국민으로서 미국 경제를 바라봤던 것이었다. 이는 옳은 관점이었다. 그들은 주 정부보다 연방 정부에 더 많은 세금을 낸다. 주로 직장 때문에 주와 주를 자주 옮겨 다닌다. 또 연방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사회 안전망에 기대고 그들의 은행 예금은 주 정부가 아닌 연방 정부가 보증해 준다.
- 돈의 역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돈으로 사용되는 것들에 관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은행권과 은행 예금은 채무를 기록하는 수단으로 출발해 서서히 완전한 돈으로 사용됐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림자 금융이라고 부르기 전 수십 년 동안 그림자 금 융은 성장했다. 돈으로 사용되던 것이 어느 순간 돈이 아닌 것이 되는 순간, 즉 금융 위기의 순간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이제 보니 은행권과 은행 예금 그리고 머니마켓 뮤추얼 펀드가 돈이었네.” 라고 말했다. 전자화폐의 역사는 정확하게 이것과 반대다. 데이비드 차움, 나카모토 사토시와 같은 누군가는 기발한 기술적 돌파구를 찾아내고는 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향해 '여기 새로운 돈이 등장했다!'라고 외친다. 그것은 실제로 돈이 되진 못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돈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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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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