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정부: 미래사회편

저자
이리유카바 최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08-04-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계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는 그림자정부의 음모와 야욕을 파헤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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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이야기의 초점은 래리 베이츠가 말했듯이 전세계의 경제권을 불과 몇 사람이 쥐고 있다는 사실. 그들은 돈을 많이 풀어 모두가 흥청망청 즐기도록 하다가 다시 거두어들임으로써 반복적으로 공황을 조작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농락당해 파멸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전쟁을 일삼는 양측에 돈을 대주며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임. 과거에는 경제권을 장악한 엘리트들이 국가단위로 이런 계획을 세웠으나, 1,2차 대전을 거쳐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한 국가를 과거의 개인회사 정도로 여기게 됨. 그래서 그들의 공작단위는 국가가 아니라 전세계로 확대된 것.
- 우리가 아는 범위내에서 환전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미로마의 줄리어스 시저때부터 환전꾼들과의 세력투쟁이 있었으며, 시저는 환전꾼들에 의해 희생됨. 시저가 살해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암살당한 이유는 별로 알려지지 않음. 기원전 200년 경 이미 로마에서는 2명의 황제들이 환전꾼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고리대금업 금지법을 만듬. 그런데 이 황제들이 모두 암살당함. 시저는 당시 유일한 화폐였던 동전 만드는 권리를 환전꾼들로부터 되찾아 정부가 직접 관리하게 함. 그리고 그동안 환전꾼들에게 돌아가던 막대한 이익금으로 콜로세움 같은 거대한 공공건물을 세우고 상하수도 시설을 설치하는 등, 로마인들의 생활향상에 힘썼음. 그 결과 일반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은 반면 환전꾼들로부터는 미움을 샀던 것.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로 이 때문에 시저가 암살당했다고 주장.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사실은 시저가 죽고 나서 동전을 만드는 권리가 다시 환전꾼들의 손으로 넘어가고 부패가 만연했다는 것, 환전꾼들이 통화량을 90%까지 줄인 결과, 로마인들은 많은 땅과 재산을 잃게 되어 가난해졌다는 것. 즉, 환전꾼들이 경제공황을 조장했던 것.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로마에는 정부의 고관들을 불신하는 풍조가 생기게 됨. 이처럼 로마인들이 정치가들의 허황된 소리에 동조해주지 않은 것이 결국 로마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근본적 이유가 되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암흑시대가 시작됨
- 유대인이 살던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음.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괴상하다고 여기며 몹시 싫어함.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태양신을 신봉해왔기 때문. 유대인들이 신을 모시고 종교행사를 갖는 신전에는 로마황제의 흉상이 새겨져 있는 로마은전을 갖고 들어갈 수 없었음. 마귀를 섬기는 사람들의 우상이 새겨진 돈을 어떻게 신성한 신전에 들여놓는단 말인가. 유대인들은 그러한 행위가 신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전 밖에서 그들이 만든 다른 은전으로 바꾸어 지금의 세금에 해당하는 봉헌을 하도록 자체적으로 법을 만들었음. 그리하여 유대인들 중에서 금은 세공기술자들이 은전을 만들고, 신전을 방문하는 다른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가서 로마은전을 지불하고 그 가격만큼 유대은전을 구입하게 됨. 그때 금은 거래상들이 로마은전과 같은 양의 은으로 유대은전을 만들어 교환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임. 하지만 그들은 훨씬 적은 양으로 만든 은전을 바꾸어 줌으로써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고, 결국 부자가 되어 시장을 독점. 여기에서부터 환전꾼이라는 호칭이 생김.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처음으로 완력을 사용하여 환전꾼들의 상을 뒤엎고 그들을 내쫓으며 강도에 비교하는 이야기가 나옴. 이렇게 환전꾼들은 고대에서부터 사회의 거머리며 남의 재산을 앗아가는 강도와 같은 존재로 여겨져 왔음.
- 부분지준은 제도는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간 고객이 사회에 유통되는 돈을 긁어모아 은행에 바쳐야 하는 것으로, 사기성이 농후한 제오. 또한 결과적으로 일반 대중을 가난하게 만드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남의 돈으로 부를 챙기는 매우 부도덕한 상행위. 한편 중세 금거래상들은 이미 시중에 유통되는 돈을 때때로 넘쳐나게 또는 부족하게 만들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 금거래상들은 돈을 많이 만들어 쉽게 빌려쓰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상업행위를 활발히 하게끔 했다가, 어느 시기에 가서는 갑자기 돈을 거두어들이고 융자받기 어렵게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취함. 시중에 돈이 귀해지면 융자를 받은 이들은 장사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만큼 빚진 돈을 갚기도 어려워지므로 돈을 빌려준 금거래상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됨. 그러면 금거래상은 약속 불이행을 문제삼아 상대의 담보물을 헐값으로 빼앗는 것.
- 17세기 말엽에는 영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한 처지에 있었음. 50여년에 걸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한 영국 정부는 다급해진 정황을 타개하고자 환전군들과 타협하게 됨. 이때 환전꾼들은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개인 소유의 중앙은행을 만들어달라고 요구. 자신들이 정부의 제재를 받지 않고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서였음.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세계 최초의 개인소유 중앙은행. 이런 과정에서 국민들 앞에 입장이 곤란해진 정부는 개인 소유의 중앙은행을 마치 정부기관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고심. 그 결과 영국은행이란 명칭을 붙임. 그리하여 여느 개인기업과 마찬가지로 영국은행도 주를 팔기 시작. 그러나 다른 개인기업과 차이점은 투자자가 누구인지 밝ㅎ지 않았다는 것. 또 당시 총 125만 파운드의 금전이 필요했으나 거둬들인 돈은 75만 파운드에 불과했다는 것. 그런데도 영국의 이 중앙은행은 1694년 정식으로 의회 심의를 통과한 국법에 의해 창립됨. 이때부터 영국은행은 실제 갖고 있는 돈의 몇배를 융자해주고 이자를 받는 사업을 시작. 그리고 이런 권리를 특정 개인에게 부여한 정부는 재정이 부족할 때면 언제나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음 이렇게 빌린 돈을 갚는다는 보증으로 국민들의 세금을 내세웠던 것
- 독일이 히틀러 지도하에 눈부신 국가산업을 일으키고 있을 때 미국의 국민들은 소위 대공황을 맞아 헐벗고 굶주렸다는 사실. 29년 미국 뉴욕증시가 주가 폭락으로 시작된 사상 유례없는 경제대공황 때문에 북미대륙 전체가 직업을 얻기 위한 방랑객들인 호보라는 거지아닌 거지들로 가득 찼으며, 그 당시의 비참한 모습은 한국전쟁 직후보다 더 심할 정도였음. 이처럼 로스차일드는 명실공히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미국에 각각 책임자를 지정해 그들을 재벌로 만듬. 그리고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은 자원을 공급하고 생산품을 소모하는 지역으로 여김. 남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세실 로드라는 사람을 보내 다이아몬드 광을 위주로 막대한 돈을 벌고 정치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원탁회의(누상정부 조직 가운데 하나)의 주동자로 삼음. 한편 남미에서는 미국 사업가들을 앞세워 점령시켰으며, 각국의 중앙은행을 모두 소유하게 만듬. 더욱이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 건국의 기둥일 뿐 아니라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건국에 필요한 모든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그후로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임. 특히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조직으로 손꼽히는 모사드(이스라엘 비밀 첩보국)의 예산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음.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케네디가 두형제의 암살을 자행. 다음과 같은 일화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권력규모를 짐작케 함. 프랑스에서 남작이 된 야콥 로스차일드는 파리 동부 쪽 교외에 페리에라는 이름의 거대한 저택을 지음. 이를 보고 독일황제 빌헬름 1세는 "왕도 못가질 저런 거대한 궁전은 로스차일드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평했으며, 19세기 후반 한 프랑스 논평가는 "유럽에는 단 하나의 권력이 존재할 뿐이다. 그 권력은 로스차일드다"라고 말하기도 했음
- 일개 식민지인 미국에서 제대로 된 화폐의 역할을 터득한 것에 긴장한 나머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미국의 지폐 제도를 없애버려야 겠다고 생각. 그렇지 않으면 유럽 각국에서도 미국의 사례를 따르게 될테도, 그에 따라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범위도 크게 좁아지리라 판단. 그 결과 1764년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서의 자체적인 화폐발행을 금지하는 화폐법을 서둘러 통과시킴. 아울러 식민지가 영국에 내는 세금도 금전이나 은전으로만 지불하도록 명령. 이는 곧 금본위 제도로의 강제환원을 의미. 환전꾼들은 그렇게 해야만 식민지 미국의 자립을 사전에 막을 수 있으며, 미국의 지폐제도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까지 미칠 영향도 차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이러한 영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 만일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 미국의 자체 화폐 발행권을 앗아가지 않았다면 식민정부는 차 등 다른 품종에 대한 세금제도는 기꺼이 낼 용의가 있었음. 그러나 화폐법에 의거한 영국의 조치 때문에 식민지에서는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어 그들의 높은 원성을 샀음. 이처럼 조지 3세와 국제금융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한 우리 자신의 돈을 만들 수 없게 된 일이 미국 독립전쟁의 주원인이 되었던 것임.
- 잭슨이 비록 사설 중앙은행을 분쇄하긴 했어도 그 뿌리마저 없애지는 못함. 환전꾼들의 가장 유용한 무기인 부분지준은 제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주 단위 은행에서는 여전히 가진 돈의 몇배를 융자해주고 이자를 받는 악덕 고리대금업을 계속할 수 있었음. 이러한 환전꾼들의 장난은 곳곳에서 경제불안을 초래. 그나마 미국에는 전국을 관장한느 중앙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남북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번영을 누림. 그러는 동안 다시 묵가의 중앙은행을 만들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환전꾼들은 마침내 가장 강력한 수법을 쓰게 됨. 전쟁을 부추겨 각 정부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돈이 필요하도록 만들고 양쪽 정부에 돈을 꾸어준 뒤 노예로 만드는 공작을 펴기 시작. 그러면 환전꾼들 소유의 중앙은행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세워질 수 있었던 것.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역사가 바로 남북전쟁임
- 미국 지명을 살펴보면 프리메이슨과의 연관성이 좀더 확실해짐. 먼저 뉴욕이란 지명은 흔히 연상되듯 영국 요크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세운 새로운 도시란 의미가 아니라 프리메이슨인 요크 라이트가 건너와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 다음으로 수도 워싱턴의 D.C는 District of Columbia라고 하여 컬럼비아 지역이라는 의미. 이 명칭은 프리메이슨의 한 계파로 현세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일루미타니의 컬럼비아파라는 이름에서 기인. 다시 말해 미국이라는 국가관념보다 컬럼비아라는 조직의 통치지역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물론 이 통치지역이 바로 전 미국의 수도이므로 결국 미국을 통치하는 곳이란 의미로 해석됨
-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독일 비스카르크는 이렇게 말함. 미국을 분단하여 비슷한 세력의 연합체를 만든다는 결정은 실제로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유럽의 막강한 금융세력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금융가들은 미국이 초대형 단일국가로 유지되면 세계의 경제 금융권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영역까지 위협할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이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난 약 한달후 환전꾼들은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게 2억 1천만 프랑의 돈을 주어 멕시코로 진격하도록 했음. 그리고 자신들의 원하는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즉위시킨 뒤 미국 남단에서 진을 치도록 함. 그와 동시에 영국은 2만 3천 명의 병력을 캐나다에 투입하여 미국 북쪽 국경에 집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 해군 함대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림. 링컨은 이처럼 남북전쟁을 일으킨 배후세력이 누구인지 간파하고 있던 터라, 남부에 대한 북부의 승리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일미국, 통일미국을 강조.
- 링컨이 남부의 해상을 봉쇄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참여를 막는 데 성공한 것은 틀림없으나, 이를 이용하여 막대한 돈을 번 무리들가지는 어떻게 하지 못함. 그래서 당시 민간인의 신분으로 배를 여러척 소유하고 생필품을 밀수하는 이들이 생겨남. 그들 중 대부분은 북측의 해군에게 저지당해 통과하지 못했으나, 일단 통과된 밀수품은 엄청난 이익을 가져옴. 그렇게 해서 남북전쟁으로 일약 거부가 된 사람으로는 토머스 하우스가 유명. 그의 아들 만델 하우스는 장차 우드로 윌슨을 대통령직에 앉혀 놓고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여 마침내 1913년 국제금융가들이 염원하던 중앙은행인 연방지급준비제도를 만드는 데 성공. 그로써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은을 몇 개인이 소유하게 되고, 미국과 전세계를 무대삼아 경제공황과 붐을 마음대로 조작하게 됨
- 링컨대통령의 남부해상 봉쇄는 당장은 실효를 거두었지만 사실 실패는 시간문제였음. 선박 제작력과 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영국과 프랑스가 링컴의 해상봉쇄를 물리치고 남부를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면 북군에게는 전혀 승산이 없었음. 그래서 링컨은 유럽에서 동맹국을 찾아야 한다고 믿음. 그러한 처지에서 볼 때 동맹국으로 러시아보다 더 적절한 나라는 없었음. 러시아는 유럽국가인데도 중앙은행이 없었고 국제금융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미국의 입장에 동정적이어서 1861년 7월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국 외무장관에게 러시아 황제의 각별한 위로의 뜻을 전하고 도움을 제의한 바도 있었음.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충분히 막아낼만한 해군력도 소유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링컨은 러시아의 국민들에게 미국을 돕고자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음. 그리하여 러시아 황제가 1861년에 공포한 러시아의 농노해방선언에 맞먹는 미국의 노예해방선언을 서둘러 공포하고 러시아 인민의 동조를 구했던 것.
- 링컨의 돈에 대한 정책은 주효했음. 그래서 풍부한 자금력으로 북군은 전쟁에서 계속 승리했고, 이에 힘입은 의회는 1863년에도 정부가 그린백을 발행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던 것. 그리하여 링컨은 정부소유의 중앙은행을 창설해 돈을 발행하도록 함으로써, 정부가 완전히 통제가능한 이자없고 빚없는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음. 그린백은 계속 통용되면서도 그 통화량이 늘어나지 않아, 인플레 없이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 또 가장 중요한 점은 이때부터 미국의 화폐공급이 완전히 이자도 없고 빚도 없는 유가증권, 즉 정부공채의 발행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이에 대해 미국 역사가 갤브레이스는 다음과 같이 평했음. "연방정부는 전쟁이 끝나고도 여러해 동안 계속하여 대규모의 흑자재정을 유지했음. 하지만 공채를 모두 거둬들이거나 다른 빚을 청산할 수는 없었다. 빚을 모두 청산한다는 것은 정부권을 화폐로 뒷받침하는 공채가 사라졌다는 뜻이며, 빚을 모두 갚는다는 것은 화폐공급을 파괴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미국의 화폐제도는 1875년 금태환법령의 제정으로 변화를 맞게 되었음. 그 법령은 그린백이란 지폐를 금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1879년 1월 1일부터 그린백을 갖고 은행에 가면 금으로 교환할 수 있게 된 것. 그후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중지시킬 때까지 그 법령은 계속 시행되었음.
- 남북전쟁 이후에도 링컨의 의도대로 그린백 정책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심한 경제침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임. 하지만 그 대신 통화 수축정책을 펼침으로써 의회로 하여금 은행 중앙통치 제도로 바꾸는 법안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이런 정책은 마침내 1913년 연방지급준비금제도라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 당시 환전꾼들이 원한 것은 두가지였음. 하나는 중앙은행을 완전히 그들의 소유로 만드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화폐제도를 금본위 제도를 환원시키는 일이었음. 그들은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중작전을 펴기 시작. 첫번째 방법은 반복적으로 경제공황을 야기시켜 미국국민들에게 환전꾼들이 관장하는 중앙은행이 있어야 경제가 안정될 수 있다는 사고를 심어주는 것이었고, 두번째 방법은 시중에 통화되는 돈을 거둬들여 전 미국을 극심한 빈곤상태에 몰아넣음으로써 정치에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나 중앙은행 설립에 반대할만한 기력을 빼앗는 것.
- 만일 사회주의가 부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부를 통합하여 통제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초특급 부자들이 사회주의를 지원한다는 것이 패러독스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임. 또한 이 모든 것의 숨겨진 이치를 순식간에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 권력을 잡으려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자들의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임. 공산주의, 좀더 정확하게 사회주의라 부르는 것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운동이 아니라 경제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운동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함
- 자본주의 금융세력은 자신들의 힘이 구석구석 미치도록 계획을 세우고 있음. 그들의 계획은 바로 절대적인 세력으로 각 나라의 정치체제를 통솔하고 전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만들 수 있는 세계 단일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이 세력은 봉건시대 절대군주의 통치방법대로 중앙은행을 통해 수많은 비밀회담을 벌이면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세계 정사를 지휘하고자 함. 이 세력의 정상에는 스위스 바젤의 BIS가 군림. BIS는 사설 회사인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로 구성된 개인은행. 그리고 각 중앙은행은 소속된 국가의 경제활동 척도를 조정하는 외환거래 관리 권한을 갖고 여신업무를 통솔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정부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이에 호응하는 정치가들에게는 그에 응당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대신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임.
- "연준은이 창설된 이후 통화량과 물가의 생산량은 그 이전보다 확실히 안정적이지 못한 편이다. 가장 불안정했던 때는 물론 1920~1921년, 1929~33년, 1937~38년의 통화수축을 포함하는 2번의 큰 전쟁의 시기다. 미국 역사상 20년이란 기간 동안 이렇게 3번이나 극심한 통화수축을 겪은 적은 없었다. 이런 현상은 1차세계 대전 중이나 그 직후 일어난 물가상승의 최소한 3분의 1에 대해서 연준은에 그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며... 3번에 걸친 통화수축의 심각도는 항상 연준은에 의한 일련의 조치에 기인한 것이었다. 어떠한 제도에서건 소수의 특정 개인에게 그러한 막중한 권리와 재량권을 주게 되면 이유야 어떻든 이는 옳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정치 체제 관행상 올바르게 점검되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주기 때문이며...이것이 중앙은행에게 독립된 주권을 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갑론을박 정치 토론의 가장 웅요한 초점인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프리드먼-
- 돈이라는 것은 중앙은행에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물건이다. -클레망소-
- 미국은 6조달러가 넘는 정부부채가 있지만 수년내에 이 빚을 다 갚고 인플레나 디플레도 없고 실업자들이 없는 낙원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타락하지 않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있음. 과거 링컨 대통령이 보여준 것처럼 이자를 지불하는 공채를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이자없는 화폐를 직접 정부가 찍어내는 것이다. 물론 돈만 찍어내고 현재의 부분지준은 제도를 유지한다면 어마어마한 인플레를 조장하게 됨. 이에 대해 프리드먼은 어떻게 인플레나 디플레 없이 국가의 부채를 완전히 없앨 때까지 어떻게 통화량을 조정할 수 있는지를 설명. 즉, 재무부가 공개시장에서 현금으로 공채를 사들이면서 은행이 무에서 창출해내는 통화량을 조정해 나감으로써 시중 통화량이 변하지 않도록 조정. 정부가 이렇게 공채를 사들임으로써 부채를 줄일 수 있는 한편 공채를 매입하는 데 쓴 현금이 국민 개개인에 의해 은행으로 입금되므로 은행은 자동적으로 보유금을 늘려갈 수 있게 됨. 이런 방식으로 정부가 발행한 화폐로 공채를 모두 사들였을 때에는 부분지준은 제도는 사라지고 대신 보유금을 기준으로 하는 제도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앙은행은 다만 통화량을 조정하는 기구로 그 역할이 바뀌게 되며 모든 은행의 금고는 공채를 넣어두는 곳이 아닌 현찰을 쌓아두는 창고가 됨. 그러면 미국의 연방지급준비제도는 자동적으로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고, 정부는 재정에 관한 권한을 되찾게 될 것임. 중앙은행들은 통화량을 늘였다 줄였다 하는 장난을 더이상 하지 못할 것이며, 때문에 인플레나 디플레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안정된 경제사회를 이룩할 것임.
- 사회가 공황을 겪을 때마다 사회전체의 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중산층이나 빈민층의 자산이 소수 상류층에게로 이동함. 이와 관련해 체이스 맨하탄 은행의 총재이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환전꾼인 록펠러의 말을 인용해 보자. "지금 지구상의 변형이 막 일어나려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에 적당한 주요 위기를 조성하는 일이며, 이를 기화로 전세계 모든 국가들은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 발언은 얼마 안 있어 유사 이래의 큰 공황을 일으키겠다는 의미.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사상 초유의 거대한 공황이 다가오는 것이 기정 사실.
- 정부가 이자를 더 내지 않고 빚을 줄이기 위해서 돈이 되는 국가의 쌈지 꾸러미를 하나라도 더 모아 요긴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을 꾸어준 외국인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국민들이 낸 혈세로 만든 쌈지 꾸러미를 팔아 바치게 되는 것. 국가의 빚이 내국인에게 대한 빚이라면 다만 없는 자의 주머니에서 있는 자의 주머니로 돈을 옮겨놓는 결과를 만들 뿐이지만, 우리가 적절한 인물을 기용하여 국가에 대한 융자를 바깥 세계와 연결지어 국외로 빼돌릴 수 있게 하면, 그 국가의 부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금고로 옮겨지게 되며, 모든 고이들은 국민들의 부를 뽑아 우리에게 바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자유무역에 대한 정리
(1) 자유무역은 강한자가 약한자의 집에 침입해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제도
(2) 다국적 기업이 있는 국가의 세금으로 소위 원조라는 것을 벌여, 그것을 구실로 못하는 국가에 가서 그들만의 카르텔 조직을 공고히 하는 방편을 일삼음
(3) 이러한 제도에 의존할 수 있는 각 국가의 자유를 말하고, 이렇게 의존하는 국가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리키는 것.
(3) 고임금의 선진국에서 제3세계의 원주민을 야만적으로 착취해 일을 시킬 수 있는 지역으로 생산지를 마음대로 옮기는 자유
(5) 자국의 식량을 생산하는 농토를 빼앗고 산업을 파괴시키며 이미 개발된 국가 노동자들의 임금을 빼앗는 자유
- 자유무역이라는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그들은 각 사회에 분노와 절망과 분열을 조장하여 당파 싸움을 일으키게 하고 동시에 그들을 쉽게 조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 결국 2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20세기의 역사는 자유무역의 전개과정이라 할 수 있음. 브레턴우즈의 세계은행 결성과 함께 GATT를 위시하여 WTO라는 기구를 거쳐 앞으로 닥쳐올 자유무역 통제헌장이라 할 수 있는 완성품인 MAI(다자간투자협정)가 이제 21세기 초에 OECD라는 조직을 통해 막 소개되려는 참.
- 다국적 기업 입장에서 보면 많은 국가의 농업 정책이 실패하면 할수록 유리. 국민들이 가난하여 배가 고프면 그만큼 통솔하기가 쉽고, 일단 가난하게 만들어 기근이나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인구조정에도 도움이 됨. 그리고 일정한 때가 되면 산업을 육성하여 국민들을 잘 살게 했다가 다시 경제공황을 조작하여 그동안 축적한 부를 빼앗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 방법. 그리고 경제공황으로 인한 빈곤 때문에 범죄가 만연하고, 국민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질병에 쉽게 걸리게 될 것임. 엘리트들은 여러가지 전염병을 고안해 냄. 에이즈 바이러스, 탄저열, 발진티부트, 라사, 한타, 에볼라, 마벅 등 세균전을 위해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배양한 균들을 사용하여 인구를 줄이려 하고 있으며, 이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실험적으로 사용한 적도 있음.
- 60~70년 대에 소위 푸른 혁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가난한 국가의 기아를 막기 위한 것으로, 농업방식을 개량하여 단위 경작지에서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주요 골자 중 하나였음. 그러나 그 혁명을 주도한 엘리트들의 진정한 목적은 재래 종자를 없애는 대신 자신들이 개량했다고 주장하는 신종 식물을 비료에 의존하여 경작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들이 특허권을 갖고 있는 접종법에 의해 개량된 종을 팔아 돈을 버는 것. 이렇게 화학비료에 의존하면 식물은 필요한 영양을 직접 받게 되지만, 화학비료뿐 아니라 살충제와 제초제 등으로 토양에는 유기질과 미생물 등이 모두 살지 못하게 됨. 토양이 여러가지 유기물질과 미생물을 포함한 벌레들과 상호의존관계를 유지하면서 식물에 영향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알고 있음. 그런데도 비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을 세뇌시킴. 그리하여 새로운 재배법으로 농부들은 매년 더욱 많은 비료를 사용해야 하며, 예전에는 자작 종자를 받아 농사를 했지만 이제는 매년 씨앗도 사야하는 경우가 많음. 결국 이대로 가다다는 증가하는 생산비 때문에 농부들은 농산물 가격을 매년 점점 더 올려야만 타산이 맞게 됨. 유럽공동시장 보고에 의하면 1986~91년 동안에 유럽 전체의 비료 소모량이 63%나 증가했다고 함. 이렇게 재배한 농산물은 비록 외양은 보기 좋을지 몰라도 영양가는 떨어져, 오래 섭취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됨. 이제는 재래종 씨앗을 구하는 일조차 점차 어려워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재래종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름
- 소말리아의 경우. 80년대에 IMF의 구조조정 세례를 받고 나서 정해진대로 화폐의 평가절하를 당했음. 그리고 IMF는 정부지출을 줄여 임금을 삭감하고 감원을 시켰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있던 그들에게 북미와 유럽의 잉여 농산물을 잔뜩 가져다 주어 농산물 가격을 떨어뜨림으로써 농업을 파괴시킴. 세계은행의 보고에 의하면 80년대 말 소말리아 공무원의 평균 수입은 월 3달러 수준. 그리하여 89년 국가공무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정부의 복지기관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학교교원이나 의료전문직 종사자들은 임금이 너무 적어 도저시 생활을 연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름. 이런 난관에 봉착한 소말리아 정부에 대해 IMF는 미국 등 선진국의 운영 컨설턴트를 고용하여 운영방법을 알려준 것. 이 컨설턴트들은 임금이 너무 적어 생활을 해나가기 힘드니 임금 수준을 인상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잉여 노동력은 없애고 능력있는 자만 고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 그러자 정부는 컨설턴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 전체 지출은 변동시킬 수 없으니 전직원의 25%를 감원시키고, 남는 돈으로 나머지 직원의 임금을 5달러로 올림. 그리고 이 컨설턴트들에 대한 비용은 IMF의 원조자금으로 충당되어 결국 소말리아의 부채에 포함됨. 이처럼 믿기 어려운 처방은 여러 서방국가 정부의 기록에 남아있음. 결국 구조조정은 국가단위로 지역의 특수성을 살리는 경제체제를 파괴하고, 단위사회의 기본조직을 파괴하며, 해당 국민들과 국가를 가난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인 것. 하지만 IMF는 이런 구조조정을 주도한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음. 소말리아는 가뭄과 정치적 파벌싸움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는 민족간 분쟁때문에 국가 상황이 그러하다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음.
- 유고슬라비아가 거시경제라는 멋진 용어로 인해 농락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80년대 후반 유고슬라비아에서 연달아 화폐를 평가절하해 오던 IMF는 89~90년에는 더욱 과감한 화폐평가 절하를 시행. 그와 동시에 연방정부에서 주 정부에 주던 돈을 일시에 동결시켜 버리고 그것을 채권자인 서방 국제금융기관의 몫으로 돌린 것. 이는 유고슬라비아 중앙정부의 연간 회계제도를 사실상 파괴시킨 것으로, 경제적으로 고립된 각 주는 더 이상 중앙정부와 유대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져 저마다 독립적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음. 마침 각 주는 거의 민족별로 구분되어 있었고, 따라서 주나 또는 민족 사이에 마찰이 생기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 그리고 IMF는 파산제도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도를 소개. 그때까지 공산국가였던 구소련 연방국가들은 모든 기업을 정부가 관리했기 때문에 파산이란 개념을 잘 몰랐으나, 시장겨제로 변환된 다음에는 사정이 달라짐. 경제적 능력이 없는 회사는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로 배워야 했음. 그래서 IMF가 소개한 것이 부실기업 정리였음. 그들은 산업체 명단을 보면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기업체들은 부실기업으로 낙인직고 정리하여 다른 기업에 넘겨주거나 해체시켜 버림. 이미 잘 정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법률적 단계를 거쳐 부채가 너무 많은 사업체가 도산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부에서 비능률적이라고 판단하면 하루아침에 부실기업으로 몰리게 되는 것. 이처럼 IMF가 고의적으로 산업을 해체하고 정리하는 바람에 89년 중반에서 90년 중반까지 약 1년 동안 100만명의 실업자가 양산됨. 유고는 발칸 지역의 산업센터 역할을 하던 국가로서 이미 훌륭한 사회보장 제도를 실천하고 있었고, 자동차, 철강 등 중공업의 틀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대단히 높은 교육수준을 자랑하던 인텔리 국가였음. 이러한 곳을 평균 노동자 임금을 월 10달러 정도로 떨어뜨린 것. 뿐만 아니라 세계은행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의료복지국가였던 유고의 병원 의료비용이 1인당 월 8달러면 족하다며 수준을 격하시키고, 아스피린 등 약품의 가격은 북미나 유럽 수준으로 팔게했음. 70년만 하더라도 벨그라드 병원에서는 1달러 만으로 모든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의료보건 제도가 훌륭했다는데, 이제는 다만 기억 저편의 일이 되어 버림. 과거 공산치하에서 능률은 떨어졌지만 타국의 원조없이 현재보다 훨씬 여유 있는 생활을 했는데, 더 좋다는 시장경제로 바뀌고 나서 오히려 이처럼 가난과 혼란을 겪게 된 것. 공산주의의 제도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닌데도 모든 제도가 하나씩 붕괴되고 있는 것이 현실임
- 한국에서는 정경유착이라고 하여 정치인들과 재벌들을 동격으로 보거나, 정치인들이 재벌들보다 우위에 있는 관계로 생각. 하지만 세계사적인 안목에서 보면, 재벌들이 정치인들을 장악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관리하는 것.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필요 이상의 죄인을 많이 만들어내는 법조문임. 다시 말해 정부는 법적으로 죄인을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고의적으로 법을 어겨 감옥에 갈 이유를 조작해 내는 것. 예를 들면 고질병이나 참기 어려운 통증 때문에 순진한 의사의 지시하에 진통제를 사용하다 마약 중독자가 되어 마약상과 중독자로 전락되는 일, 이에 따른 자질구레한 잡범과 살인범 양산, 유사 이래 항상 존재해온 매춘업을 불법화하여 범죄의 소굴로 전환시키는 일, 의학적 효능이 입증되었는데도 대마초 같은 것을 불법화시키는 일 등이 대표적. 특히 대마초의 불법화는 비교적 근래에 정해졌음.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삼베가 가장 싼 옷감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베옷을 많이 입고 다녔음. 아마 60세 이상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기억할 것임. 그러던 삼베가 어느덧 가장 비싼 옷감으로 둔갑하여, 가난한 집에서는 장례식 때 입을 삼베로 된 상복을 마련하는 것마저 어려워짐.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의 신문황 허스트 가문과 섬유왕 듀폰가문 때문. 허스트 가문은 미국 각지에서 막대한 산판(목재, 펄프용 산림)을 소유. 그는 삼베로 만든 종이가 훨씬 질기고 좋은 줄 알면서도 자신의 원목을 비싸게 팔기 위해 공해를 많이 일으키는 공정으로 만든 나무섬유만 사용하길 원했음. 또한 듀폰가문은 자신들이 개발한 나일론이나 데이크론같은 화학섬유를 보급하기 위해 값싼 삼베옷을 불법화하길 원했음. 그래서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대마에서 마리화나란 환각제 성분이 나오므로 대마 생산을 금지시키는 것이었음. 37년 법으로 마리화나를 마약으로 규정짓고 대마생산을 금지시켰으며, 이런 영향이 뒤늦게 한국에 미쳤던 것. 그런 조치에 따라 원래 삼베를 원료로 만들던 리바이스 청바지는 모양만 그대로일 뿐 수명이 훨씬 짧아져 버림.
- 미국 정보부가 마약거래를 시작한 것은 2차대전이 끝날무렵 CIA전신인 OSS가 프랑스 마르세유 항의 공산계 부두노동자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부두의 깡패조직과 손을 잡으면서 부터. 그후 줄곧 헌법상 불법적인 일을 해내고자 막대한 돈을 정부 예산외로 모으려는 목적으로 미국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가 주동이 되어 마약거래를 해옴
- 미국 정부로서도 정부군이나 정부 직원을 직접 외국 현장에 투입하는 대신 이런 사설 군대를 이용하는 것이 여러가지로 이로움. 외국에서 떳떳하지 못한 정부의 책략을 이행하는 데 되도록이면 정부가 관련되었다는 인상을 덜 주게 되어 비난받을 확률이 적어지고, 타국끼리의 분쟁에 미국군이 참여하여 필요없는 미국 국민의 희생을 초래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음. 또한 어설픈 평화유지라는 명목으로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이들을 보냄으로써 미국 정부는 마치 외교적으로만 문제를 해결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는 것. 국무부나 국방부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피해 없이 외국의 불만스러운 인사를 체포하거나 암살하는 데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도구인 셈. 때문에 앞으로 이 분야는 소리소문 없이 급성장할 것으로 보임
- 고이들은 그들끼리 항상 뿌리깊은 불협화음의 근원을 없애지 못하고 자멸하기 때문에 우리의 안녕은 염려할 바가 없음. 우리는 미리 고이들끼리 개인적, 국가적, 종교적, 인종적으로 반목하고 그 반목이 더욱 증대되도록 지난 20세기 동안 공작해 왔기 때문에 어느국가도 우리를 향해 무기를 드는 일이 없었음. 우리에게 대항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하는 국가들이 없었던 것은 그러한 것들이 자신들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우리의 힘은 너무 강해 아무도 우리의 세력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국가든 우리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기들끼리 협상하고 합의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우리가 진행하려는 안건에 대해 정치적 원칙에 입각하여 찬성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산업문제라는 새로운 정치적 안건을 내놓으면 한동안 자기네들끼리 멍청하게 토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새롭게 과거의 것과 비슷한 안건을 내놓으면 대다수는 새 안건이 과거의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느껴 별다른 저하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곧바로 우리를 향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흥행거리, 오락, 장난, 소일거리 등을 마련하고 언론을 통해 계속되는 운동경기, 공연 따위에 정신을 팔게한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창안하거나 비판할 사고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점차 우리의 공작과정에 장단을 맞추는 생각과 말을 하게 될 것이며, 그들 자신은 우리의 보조에 발을 맞추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 고이들의 수중에 있는 모든 산업을 완전히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발전, 보급시킨 사치를 조장한다. 욕심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끝없이 요구하고, 이것은 끝내 자멸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도록 부추긴다.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가면 동시에 우리가 생필품 가격을 올릴 수 있으므로 사실상 노동자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원인을 농업의 황폐화나 낙농의 비능률 때문이라고 발뺌한다. 또한 노동자들의 불복종, 무질서, 과음 등의 방법으로 생산원천의 차원에서 교묘하게 여러가지 난제를 계속 창조해 내고 산업이 더욱 황폐하도록 만들어 고이세력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 동시에 우리는 산업과 무역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기성 산업을 장려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산업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며, 투기성이 없는 산업은 개인의 손에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은행에 빚으로 담보 잡힌 토지를 되찾아 그들의 경제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산업이 토지나 노동세력과 자본 면에서 곤궁해 투기성 사업을 함으로써 거래가 있을 때마다 세계의 돈이 우리 수중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이며, 이는 결국 모든 고이들을 무산계급 대열에 속하게 만들어 우리 앞에 허리를 구부리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존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는 한 절대 우리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방법이다.
- 엘리트들의 세계 정복계획이나 칙훈서의 내용에 의하면 젠타일(유대인 외의 모든 인간)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나옴. 한국인도 젠타일이기 때문에 다시금 가난해져야 하는 것. 가난하게 만들려면 있는 것을 빼앗아야 함. 아프리카나 남미에는 빼앗을만한 풍부한 자연자원이 많아 그들에게 부자가 될 기회를 줄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일본을 비롯한 한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은 자원이 거의 없어 일단 생활수준을 높여줄 필요가 있음. 그래서 가난했던 과거에는 어떤 요소나 물건들이 없어도 필요한 줄 모르고 살 수 있지만, 일단 잘살던 생활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예전 수준을 회복하려 발버둥치는 게 인간의 본능. 이 본능 때문에 일단 잘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하고 그러면 그만큼 그 국민들을 노예로 만들기가 더 쉬워짐. 경제공황이라는 것이 항상 그랬듯이 경제붕괴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돈벌기가 쉬워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을 때 일어남. 그래야 빼앗아갈 것이 많아지고 배고픈 사람들을 더 부려먹기가 쉬워지기 때문.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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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5000년의 역사

저자
프레드 E. H. 슈레더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14-02-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신화, 마녀, 신들림, 농담, 히스테리, 발라드, 종교........
가격비교

- 물표 체계의 발전과정을 보면 물표와 기호의 관계가 우연이 아니며, 물표가 물자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음. 최초의 물표가 발견된 신석기 초기는 인류사회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음. 물표는 농경과 작물화, 가축화가 옛 경제를 서서히 대체한 신석기 현상의 일환이었을 것임. 따라서 농경에 다른 정착생활로 기록이 필요하게 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음. 초기 농경민은 새로운 문제들에 부딪혔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확물의 저장이었음. 수확물의 일부는 일가족이 일년내내 춘궁기에 먹고살기 위해 저장해야 했으며, 씨앗의 일부는 파종하기 위해 따로 떼어두어야 했음. 두번째 문제는 생태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물자를 얻는 것이었음. 이들은 유목생활을 계속하는 부족과 교역관계를 맺고 먼 지방의 외래산물과 원료를 수확물과 교환했을지도 모름. 따라서 식량자원을 관리하고 타 부족과 교역해야 할 필요성이 기록의 필요성을 낳았으리라 짐작됨.
- 통념과 달리 문자는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9000년 이전에 서남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기록체계의 발전단계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름. 이 최초의 회계체계는 다양한 기하학적, 불규칙적 형태의 물표가 토대가 됨. 이 체계는 기원전 4000년전까지 별다른 수정없이 쓰이다가 교역이 발달하자 급격히 변화됨. 상거래용 물표를 안전히 보관할 진흙용기 표면 안에 든 물표 개수를 표시해 새긴 것. 물표의 이미지(또는 기호)를 이용하는 체계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이내 기존기록 체계를 대체. 이 가설이 옳다면 고대 점토판의 특징들, 특히 진흙을 재료로 쓴 이유와 모양이 볼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음. 둘다 점토판의 선조인 불라의 특징이기 때문. 이것은 초기의 일부기호가 추상적 형태인 이유(물표의 형태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와 문작 방대한 지리적 영역에서 급속히 받아들여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임. 문자는 서남아시아 전역에서 5000년 동안 쓰이던 옛 기록체계에서 빌려온 친숙한 형태를 기반으로 함
- 크기, 인구, 부는 저마다 달랐지만, 로마세계에서 도시로 인정되는 공동체는 예외없이 그 밖의 모든 인간조직과 구별되는 기본적이고도 공통되는 특징이 있었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완전한 지방자율 또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누린다는 것. 본질적으로 자치는 공동체의 제한된 영역에 적용되는 규칙을 통해 표현됨. 이것은 주로 로마의 세나투스(원로원)나 그리스의 불레(심의위원회)에 해당하는 심의위원회의 형태를 띰. 입법기능과 선거기능을 갖춘 시민체 전체집합은 포풀루스, 에클레시아, 데모스를 이룸. 시민체의 선거로 해마다 선출되어 공동체의 구체적 업무를 수행하는 행정장관도 필수 요소였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독자적 창건설화와 뚜려산 과거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과거사는 대개 수많은 법령의 형태로, 또한 과거의 시민과 외국 지도자가 공동체에 헌정한 헌물의 형태로 나타남. 이런 헌물은 주요 공공기념물과 건축물의 형태로 구현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지속적 자부심을 불어넣음. 공동체가 갖추어야 하는 마지막 필수요소는 시민체의 수호신에 대한 자체적 신앙관습이었음. 형태와 내용은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이러한 필수요소를 갖추지 못한 공동체는 도시로 규정되지 않았음. 하지만 도시의 지위를 얻기 위해 무엇보다 로마의 공식 승인을 받는 것이 중요했음. 승인은 영구적이지 않았으며 로마의 뜻에 따라 부여되기도 철회되기도 함. 쇠락하거나 특히 분쟁 시기에 불명예를 저지른 공동체가 촌으로 추락하는 일이 종종 일어남. 그러면 기존의 정치적 삶을 더는 인정받을 수 없었음. 공동체가 여전히 거대한 인구를 자랑하고 전문화와 기능적 활동, 사회적, 문화적 삶을 독자적으로 표현하며 물질적 번영을 구가하더라도, 더는 도시로 분류되지 않음.
- 고대세계에는 여러 수준의 도회적 위계들이 두 측면에서 조화를 이룸. 도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번영하는 데는 이런 조화가 필수적이었음. 도회적 위계는 도시(또는 도시라 분류한 지역단위)와 시골 촌/읍이라는 두개의 수준으로 뚜렷이 나뉨. 두 수준은 도시민과 촌사람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삶의 표현을 토대로 계층화된 무게중심을 유지. 하지만 도시와 도시적 삶을 살아가려면 도시민에게 필요한 잉여생산물을 공급받아야 했음. 그 대가로 도시는 사회적, 문화적 생활양식과 폭넓은 세계관을 촌사람들에게 제공했음. 도시민의 세련된 삶은 실제로는 부차적인 것이었음. 상당한 규모의 농업 생산과 부에 기반하는 단단한 경제적 토대 없이는 도시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 따라서 도시의 세련된 삶은 사치(도회적 위계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에 의해 지탱되는 사치)였음.
- 지배계급은 제의적 신들림을 언제나 미심쩍게 여김.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음. 신을 직접 체험하고 접하면 중개자 (즉, 신앙을 국가적 목적에 이용하고 지배계급에 해를 미칠 수 잇는 자들이 종교를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는 사제집단)가 필요없어지기 때문. 제의 참가자들은 평범한 일상생활의 경계를 뛰어넘음. 지배계급은 사람들이 이런 경계를 넘는데 익숙해지면 계급같은 정치적 경계까지도 넘으로 들지 않을까 우려했음. 디오니소스는 언제나 하층계급의 신이었음. 로마인들이 특히 두려워한 것은 평민의 대중집회가 국가, 즉 지배계급의 통제와 감시를 받지 않고 열리는 것이었음.
- 생식을 위한 섹스조차 필요없다고 여긴 초기 기독교 시대를 시작으로 생식을 위한 섹스만 허용한 중세시대를 지나는 동안, 기독교 교부들이 성교의 예방적, 치료적 효과를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음. 따라서 이들은 히스테리의 신체적 병인을 부인해야 했음. 그렇지 않는다면 섹스가 자연스러운 것, 즉 인간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 이에 따라 히스테리가 기능장애란 관념도 거부해야 했음. 소마(몸)와 프시케(마음)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하는 것은 치료를 위해 죄악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 반면에 귀신들림을 원인으로 제시하면 히스테리의 성적 기원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엇음. (물론 귀신은 대개 음탕한 존재로 묘사되었으며 음욕을 채우려 드는 것이 특징이었음.) 게다가 질병과 정신이상의 원인으로 귀신을 부각시키는 것은 고대 후기의 여타 추세와도 잘 들어맞았음. 당시에 두드러진 추세 중 하나는 히포크라테스 학파로 대표되는 과학적 접근법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 고대 후기에 창궐한 무서운 전염병들은 의술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음. 게다가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와 기근도 잦았음. 토지의 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노예제도의 문제점이 커지자, 사람들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당하는 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현세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잃고 내세의 축복에 눈을 돌리기 시작. 귀신에 대한 믿음은 새로 등장한 기독교가 옛 이교도 신앙과 융화하는 데 한몫했으며, 악의 존재에 대한 그럴듯한 근거를 대중문화에 제공. 기독교인은 옛 이교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보다는 이들이 실제로는 사람이었다가 귀신이 되었다고 설명
- 1000년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신들림으로 광기를 설명하는 견해는 흥미롭게 변화해 왔음. 광기는 신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에서 저주로 바뀜. 퇴마사를 부르고 찾아가는 횟수로 보건대, 고대 후기의 일반적 추세(이를테면 금욕주의)가 더 강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광기에 시달린 듯 함. 이 자리에서 논지를 전개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고대세계에 일어난 변화들(사회/경제적 관계, 의료, 철학, 종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노예사회의 모순이 격화되고 더 높은 차원의 경제구조인 봉건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을 반영. 우리 사회에서 귀신들림에 대한 관심과 믿음이 다시 생긴 것은, 모순이 격화되어 사회제도가 무너지고 있음을 뜻하는지도 모름
- 고대에 주술과 마녀술이 실제로 행해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면 그 기원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이 물음에 대답하는 이론을 내놓음. 그중에는 터무니없는 것도 있고 그럴듯한 것도 있음. 이를테면 마녀술이 심리적 요인 때문이라는 가설이 제기됨.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나 개인의 정신장애라는 것. 하지만 마녀술 현상은 전적으로 보편적이면서도 일관됨. 주술과 의식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기본적으로 동일. 환각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일어날 수는 없음. 마음과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이며, 따라서 환각은 언제나 개별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 어떤 사람들은 마녀술의 기원이 맥각(호밀 이삭이 곰팡이에 감염되어 생기는 돌기로 먹으면 경련을 일으킬 수 있음.)이나 이와 비슷한 약물이라 생각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음. 마녀술은 기독교 교회가 이단과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라는 주장되 있었음. 11~17세기 유럽의 마녀재판을 생각하면 무척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토착문화에서 발견되는 마녀술은 전혀 설명하지 못함
- 주술과 마녀술은 고대 농경사회의 풍작기원 의식의 잔재로 보아야 함. 과거에는 풍작기원 의식을 여자가 주관했음. 이 이론에서는 최초의 공동체가 농경/모계 사회였다고 가정.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 초기에는 남자들이 여전히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여자들은 뒤에 남아 촌락일을 돌보았기 때문. 물론 여기에서 촌락은 매우 포괄적으로, 즉 소규모 집단이나 가족, 부족의 거주지라는 의미. 브리포에 따르면, 남녀의 역할구분은 타고난 본능과 기질을 토대로 정해진 것. 남성은 굳세고 지칠줄 모르는 사냥꾼이며 식량과 모험을 찾는 방랑자임. 반면에 여성은 집을 만듬. 최초의 집과 오두막, 천막은 여자가 만들었음. 오늘날에도 어떤 부족은 남자가 밖에서 자고 여자는 보금자리에서 살아감. 남자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동안 여자는 가족과 공동체의 대소사를 맡음. 여자의 지위가 높아진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음. 첫째, 임신과 분만은 남자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킴. 자연적 재생산 과정을 모르는 남자들은 여자가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음. 월경도 마찬가지임. 게다가 인간유아는 동물중에서 어미 의존도가 가장 높음. 성숙해 어미로부터 떨어지는 데 걸리는 기간이 어떤 종보다도 김. 이 때문에 자식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식량을 가져다주는 존재에 불과. 더 중요한 사실은 씨앗을 작물화하는 방법을 여자들이 처음 알아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신화가 이를 입증함. 농경의 기원을 다루는 거의 모든 신화는 농경을 발견한 공을 여자에게 돌림. 그도 그럴 것이 곡물과 과일처럼 모아들일 수 있는 야생식량을 채집하는 것이 여자의 임무였으므로, 씨앗이 떨어져서 다시 결실을 맺는 과정을 발견한 것이 여자였을 것. 경작의 비밀을 처음 알아낸 것이 남자라 하더라도 밭을 일군 것은 어쨌거나 여자였음. 남자는 여전히 짐승을 사냥하거나 목축(중석기 시대 시작)하고 있었기 대문. 따라서 초창기의 여성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부계사회에서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
- 그리스, 로마 마녀술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전시대 마녀의 의식과 주문 상당수가 생계유지를 위한 풍작기원 종교에서 직접 기원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음. 풍작을 기원하는 초창기 여사제는 작물을 자라게 하고, 계절을 길들이고, 비를 내리게 하고, 아이가 태어나게 할 수 있었음. 그리스, 로마 시대 들어 마녀는 여사제의 지위를 잃음.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남성이 오래전에 이들의 권한을 대부분 차지했기 때문. 하지만 옛 종교를 간직한 하층계급에는 주술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 일부의식은 원래 의미를 거의 잃어버렸지만 나머지 의식은 예전의 목적이 그대로 유지되었음. 해충을 구제하는 의식이 카토시대까지 여전히 쓰인 것, 고전시대 마녀술에서 사랑의 주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마녀의 적은 무능력이나 불임을 두려워한 반면 마녀의 친구는 성공과 다산을 기대한 것, 모든 마녀가 비약을 만든 것, 로마에서 베스타의 여사제가 그토록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 것, 로마에서 주술을 언급한 첫 사례가 이웃의 경작지에서 생산력을 빼앗는 행위를 금지한 법률이란 것, 최초의 신이 경작과 수확을 주관하는 어머니 대지의 여신이었다는 것, 마녀가 모두 예외없이 여자인 것은 이 때문. 그리스, 로마의 마녀는 단순한 문학적 허구가 아니었음. 그 기원은 공동체를 위해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을 지낸 여사제이며, 그 후예는 20세기 마녀들임
- 신약 외경 배후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몇가지가 눈에 띔. 첫째, 정경 복음서를 보완하려는 욕구가 있었음. 네 복음서는 심지어 네 복음서를 모두 합쳐도, 예수의 일생을 완전히 그려내지 못함. 예수의 생에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에는 매우 넓은 공백이 있음. 예수가 태어나 선교활동을 시작하기까지의 시기는 복음서에서 완전히 누락되어 있으며, 부활과 승천 사이에서 지상에서 머문 40일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음. 이같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기독교인들이 호기심을 느꼈으며 누군가 그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음. 그 결과물은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구였음. 하지만 이들 작품이 유포되기 시작하자 초신자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였음. 실제로도 이들 전승 상당수는 중세 교회의 교리체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신약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과정이 관찰됨.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예수와 관련해 여러차례 언급된 사람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의 남편 요셉, 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 본디오 빌라도는 그중 일부에 불과. 바울과 열두제자를 비롯한 사도들에 대해서도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임. 사도들의 선교활동과 최후도 알려져 있지 않음. 따라서 이번에도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해 신약에 누락된 정보를 채워넣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됨. 또 다른 동기는 일반적인 기독교 대중에게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하려는 욕구. 기독교 교회는 교인들이 연극과 서커스처럼 노골적이고 잔인한 이교도 오락을 즐기거나 혼음이 이루어지던 목욕탕 같은 공공시설물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음. 이교도의 통속문학을 읽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음. 그 이유는 2세기 로마 소설을 흘끗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음. 아풀레이우스의 황금당나귀는 시작부터 루키우스와 하녀 포티스의 성행위를 자세히 묘사하며, 끝에 가서는 루키우스를 이시스 여신에게 개종시키기까지 함. 교회가 이런 읽을거리를 권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음. 하지만 제약을 가하려면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제시해야 했기에 기독교 통속문학이 급속히 성장. 이에따라 기독교인 독자들은 사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벌이는 모험담을 비롯한 읽을거리를 즐길 수 있었음.
-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이 단순히 관료주도적 종교개혁으로 표현되었다는(즉 정치적 통치기구가 대응조치를 결정했다는) 가정은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했음. 시의회나 제후는 종종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조치를 취해야 했으며, 시민들은 새로운(또는 낡은) 종교를 열렬히 옹호하고 결정권을 행사했음. 대중의 동기는 단순한 한가지 원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요인이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역할을 단지 경제정의나 참정권, 종교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보아서는 안됨. 물론 제후의 군사력이 대중운동을 짓밟은 경우도 많았지만, 대중의 의지는 그뒤로도 살아남아 지역이 종교를 결정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음.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소수파는 제도권 예배를 거부하거나 박해를 감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종교적 독립을 추구. 따라서 독일의 종교개혁의 향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역할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물질적, 영적 요인의 중요성을 경시해서는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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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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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저자
노엄 촘스키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13-12-0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촘스키, 미국이 쓴 착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벗기다 제2차 세계대...
가격비교

- 자유무역은 경제학 또는 신문사설에서 다룰 때나 그럴듯해 보일 뿐, 현실에선 정/재계 인물 그 누구도 자유무역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음. 이는 미국이 국제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부문이 자본집약적 농업(소위 기업식 농업), 첨단산업, 제약, 생물공학 등 주로 국가가 보조하는 부문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음. 다른 산업국가들도 마찬가지. 미국 정부는 각종 연구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이들에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군사무기라는 낭비성 생산품에 대한 시장을 보장해 줌. 그러다가 어떤 상품이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민간부문에서 이 상품을 차지. 이렇게 공공보조금과 사적 이윤이 결합된 체계가 소위 말하는 자유기업의 정체임
- 전후세계를 기획한 케넌 같은 사람들은 다른 서방 산업국들이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미국 기업의 번영을 위해 미국 생산품을 수입하고 미국 기업에 투자기회를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음. 그러나 중요한 건 이 국가들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재건하는 것. 즉 전통적 우파질서를 부활시키고 기업이 우윌르 차지하게끔 하는 한편, 노동자는 분열시키고 약화시켜야 했음. 그리고 재건에 따른 부담은 전적으로 노동자 계급과 빈민층에게 전가해야 했음. 이 과정에서 미국이 부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이었음. 미국은 전세계에 걸쳐서 이 저항운동을 진압했고, 그 자리에 종종 파시스트나 나치 부역자들을 들어 앉힘. 때로 이 과정에서 미국은 극단적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선거결과를 뒤집거나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식량보급을 늦추는 등 한층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하기도 함
-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 민주주의의 결과를 미국이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없는 한, 미국은 이들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반대. 미국이 보기에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문제는 각국 정부가 미국 투자가들의 요구보다도 자국민의 요구를 쉽게 따른다는 것. 런던 왕립문제연구소가 발행한 미대륙 국가들간의 구조에 관한 연구가 내린 결론은, 미국은 말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본주의 사기업 옹호에 발벗고 나선다는 것. 만약 투자가들의 권리가 위협받게 되면 민주주의를 그만두어야 함. 다시 말해 투자가들의 권리만 철저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면 살인범과 고문자들이 권력을 쥔다 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음. .53년 이란, 54년 과테말라, 63년과 65년 도미니카공화국, 64년 브라질, 73년 칠레,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의회정치 국가가 미국의 지원과 때로는 직접적인 내정간섭으로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거나 전복됐음. 미국이 엘살바도르나 지구상 다른 수많은 지역에서 펼친 정책도 늘 마찬가지였음.
- 전쟁직후의 정책담당자 가운데는 좀더 긴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조지케넌이 그런 사람이었음. 그는 미국이 일본의 산업화를 촉진시켜댜 한다고 제안하면서도 한가지 조건을 달았음. 바로 미국이 일본의 원유수입선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되면 일본이 미국의 정책노선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미정부는 그의 조언에 따라 일본에 대한 원유공급과 정유시설을 통제해옴. 이 때문에 일본은 70년대 초까지도 자국에 필요한 원유의 10%만을 통제할 수 있었음. 미국이 서남아시아의 원유에 그토록 비상한 관심을 쏟았던 것도 마찬가지. 사실 미국 자체적으로는 이 지역의 원유가 전혀 필요치 않았음. 68년까지만 해도 북미의 원유생산량은 전세계에서 선두를 차지. 하지만 미국은 세계를 움직이는 이 조종간을 계속 장악하고서 그 이윤을 영국과 확시리 나누어 갖기를 원함. 미국이 아직까지 필리핀에 군기지를 둔 이유도 이때문임. 이 기지는 서남아시아를 겨냥한 세계적 차원의 미군개입 시스템의 일환으로 서남아에서 급진적 민족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
- 군부는 미국경제고문들의 처방을 그대로 자국에 적용했다가 대개 국가경제를 파탄에 빠트렸고 그 해결책은 민간에 떠넘겨 버리곤 했음. 예를 들자면 IMF를 끌어들이는 것 말이다. 이처럼 새롭게 이용할 수 있는 통치방법이 있다면, 공공연하게 군부통치를 할 필요가 없게 됨. IMF는 자금을 빌려주는 대신 자유화를 강요. 즉 해당국의 경제에 외세의 개입과 통제를 허용하도록 가용하면서 사회보장예산은 무자비하게 삭감할 것을 요구. 이는 부유층과 외국 투자가 세력을 더욱 확고하게 함. 이 때문에 제3세계의 전통적 양극화, 다시 말해, 한편에서는 최상층과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과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대다수 국민으로 나뉘는 경향이 강화됨. 민중세력이 정치적으로 도전하여 군부가 안정을 회복시켜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군부통치가 남겨놓은 부채와 경제혼란 때문에 이 나라들은 보통 IMF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음. 브라질이 대표적 사례. 브라질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고도로 발전한 산업덕분에 마땅히 부유한 국가가 되어야 했음. 그러나 64년에 발생한 쿠테타와 그 이후의 요란했던 경제기적 탓에 오늘날 브라질 국민 대다수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 비견할만한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음. 이는 브라질이 동유럽에 비해서도 더 열악한 상황에 놓였다는 이야기
-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도 일반적으로 동일한 패턴을 따랐음. 48년 국무부는 호치민이 이끄는 반프랑스 저항운동인 베트민이 베트남의 고유한 민족운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 하지만 베트민은 그 지역의 소수 토착지배자들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음. 또, 이들은 자주적 발전을 선호하고 외국투자가들의 이익을 무시. 베트민이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경우, 미국은 정책 담당자들이 수년동안 거듭 사용했던 용어를 빌리자면 썩은 사과가 퍼지고 바이러스가 그 지역을 전염시킬까 봐 두려웟음. 바이러스에 걸리면 보통 어떻게 하는가? 먼저 그 바이러스를 제거한 후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하여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게 함. 바로 이것이 제3세계에서 미국이 취한 기본 전략. 가능하다면 그 지역의 군대가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함. 만약 이들이 하지 못하면 미군을 투입해야 함. 물론 비용도 더 들고 모양새도 좋지 않지만, 때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 베트남이 바로 그런 경우였음. 6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이 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모든 시도를 가로막았음. 심지어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사이공의 장군들이 추진했던 협상까지도 그랬음. 만약 당시에 정치적 해결이 이루어졌다면, 베트남은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성공적으로 발전했을 것임. 하지만 미국은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음. 케네디 정부는 처음엔 남베트남에서 대규모 국가테러를 자행하다가 점차 노골적 침략으로 사태를 악화시킴. 케네디에 이어 존슨은 대규모 원정구을 보내 남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산시킴. 그 결과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했는데, 이러한 피해를 입은 인도차이나가 100년 안에 원상복귀될 수 있다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리라. 미국은 베트남에서 발병한 자주적 발전이라는 병을 뿌리뽑는 와중에도 65년 수하르토가 이끈 인도네시아 쿠테타, 72년 페르난도 마르코스의 필리핀 민주정부 전복, 한국과 타이의 계엄령 등을 지원하면서 이같은 병의 확산을 막음. 서방은 65년 인도네이사에서 일어난 수하르토의 쿠테타를 환영. 왜냐하면, 대중적 기반이 있는 유일한 정당인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제거됬기 때문. 쿠테타는 단 몇개월 동안 7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희생자의 대부분은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었음. 뉴욕타임즈의 주요 논객 레스턴은 이에 대해 아시아에 서광이 비친다고 만족해하면서도, 미국도 이런 성공에 한몫했다고 떠들었음. 수하르토가 그러한 범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부 털어내자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온건한 지도자라고 그를 묘사했고 서방은 그와 함께 사업을 하게 된 것을 매우 흡족해했음. 런던의 저명한 이코노미스트지는 이 엄청난 살인마를 마음속 깊이 자비로운 인물이라고 독자들에게 강조. 물론 서방 다국적 기업에 대해 그가 보인 적극적 태도를 두고 한 말이었음.
- 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정책의 주목적을 자신드링 저지른 폭력으로 황폐화된 나라들이 더 큰 고통을 겪도록 하는데 두었음. 그 잔인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로 경악스러웠음. 메노파 교도들이 캄보디아에 연필을 보내려고 하자, 국무부는 이를 막으려 했음.
- 호주외무장관은 세계란 힘으로 남의 것을 뺏은 사례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매우 불공평한 곳이라고 일축하면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과 병합을 정당화함. 인도네시아가 티모르의 풍부한 원유를 약탈할 당시에 자신들도 끼어들어 한몫 챙겨던 사실도. 그러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에 대해서는 강대국이 이웃 약소국가를 침공하도고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며 요란한 성명을 냄. 서방은 동티모르 문제에서는 냉소적 태도를 보였으면서도 이라크 문제에서는 도덕군자로 행세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음.
- 미국에게 외교라는 것은 자신의 총부리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달갑지 않은 것임. 미국이 추구하는 목적은 제3세계 대중들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기 때문. 미국이 지배와 착취구조를 강요하려드니 그리 놀랄일도 아님. 그런데 외교적 해결이란 협상상대의 이익도 어느정도는 보장해주어야 함. 미국같이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면 이는 곤란한 문제. 이 때문에 미국은 보통 협상을 피하려고 함. 미국은 협상을 선호한다고 그럴듯하게 선전하면서도 실상 미국은 동남아와 서남아, 중앙아메리카에서 오랫동안 협상을 피해옴.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부시정부가 제재나 외교보다는 군사력을 주요한 정책 수단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미국은 현재 제3세계에 질서와 안정을 강요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비용을 남들로부터 충당해야 함. 이는 필수적인 것임. 다들 알지만, 누군가는 주인에 대해 합당한 보답을 해야하기 때문. 걸프에서의 원유생산 이익금을 경비로 충당하기도 하지만, 국제적 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언론들이 권고한대로, 독일이 이끄는 유럽과 일본도 미국이 용병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자신들의 몫을 치러야 하는 것.
- 미국과 소련 양국은 상대방을 그저 간단히 없애버리길 원했을 것임.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했다가는 양국 모두 전멸할 것인 확실했기 때문에 냉전이라 부르는 세계관리체제가 등장. 통념에 따라 해석하면, 냉전은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두 강대국 사이의 분쟁. 따라서 미국은 그 분쟁에서 소련을 억제하고 세계를 그들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것. 만약 이런 시각이 신학교리라면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음. 그러나 역사에 빛을 조금만 밝힌다면, 이런 주장의 사실 여부를 쉽게 알 수 있음. 단, 아주 간단한 점을 유념해야 함. 즉, 냉전을 이해하려면 냉전중에 발생한 사건들을 살펴야 한다는 말. 그러면 냉전에 대해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됨. 소련쪽을 보면 그들이 냉전중에 저지른 사건들은 동유럽에 대한 끊임없는 간섭이었음. 그 결과 동베를린, 부다페스트, 프라하에 소련 탱크가 진주했음. 이런 간섭은 금세기 세번이나 외국이 러시아를 공격하고 파괴할 때 이용했던 통로를 따라 이루어졌음.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비록 소련의 국경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 통로에서 벗어난 예임. 미국쪽을 보면, 역사상 최초의 세계권력으로서의 위치를 반영하듯, 그들이 자행한 간섭의 범위도 전세계적이었음. 국내적 측면에서 보자면, 냉전 덕분에 소련의 군-관료 지배계급이 권력기반을 굳히자, 미정부는 국민들에게 첨단산업에 보조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변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김. 그러나 이러한 구실 모두가 국민들에게 쉽게 먹혔던 것은 아님. 그래서 사용한 기술이 오랫동안 의지해왔던 방법, 즉 무서운 적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냉전은 그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었음. 소련이 그 낙지같은 발로 서방의 목을 조인다는 발상은 너무 터무니없긴 했음. 하지만 악의 제국은 실제로 악마이자 제국이었으며 잔인했음. 이 두 강대국은 상대방이 저지른 범죄들을 들추어내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적, 즉 자국국민들을 통제했음. 그러므로 핵심적인 측면에서 냉전은 소련과 미국 사이의 무언의 협정과도 같은 것이었음. 소련의 지배세력들은 그들의 제국내부와 동유럽의 위성국들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고, 미국은 제3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유럽의 동맹국을 통제할 수 있었음. 양국은 각각 자기세력권에서의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했던 것.
-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사회주의란 용어는 최소한 다음을 의미. 자본주의 기업이냐 전체주의 국가냐에 상관없이 생산에 대한 관리를 노동자들 스스로 하는 것 말이다. 즉, 노동자를 지배하고 모든 결정권을 손에 쥐고 있는 소유주나 경영자들이 생산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교리적인 이중화법이 쓰인 재미있는 경우. 1917년 볼셰비키 쿠테타로 레닌과 트로츠키는 국가권력을 손에 넣음. 이들은 몇달전 일어났던 민중혁명을 계기로 이미 성장하고 있던 초기 사회주의 제도돌, 즉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 그 밖의 모든 민중 통치기관들을 재빨리 해체. 그리고 노동자들을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이른바 노동군으로 바꿔버림.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진정한 의미에서 본다면, 볼셰비키는 당시 존재하고 있던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일거에 파괴한 것. 그 이후로는 어떤 사회주의적 일탈도 허용하지 않았음. 결국 전위당과 그 지도자들 손에 권력을 집중시킬 것이라고 레닌의 교리를 오랫동안 비판해왔던 지도적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이런 상황 전개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음. 혁명이 있기 몇십년 전에 아나키즘 사상가 바쿠닌은 혁명과정에서 새롭게 출현할 지식인 계층은 다음 두가지 중 하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으. 하나는 스스로 국가권력을 쥐고자 대중의 투쟁을 이용한 뒤에 잔인하고 억압적인 붉은 관료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혁명이 실패하면 이들이 국가자본주의적 사회의 관리자나 그런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수호자가 되리라는 것이었음. 이 예견은 두 측면 모두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음.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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