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쉐어링

IT 2014. 10. 12. 07:34

 


게이트 쉐어링

저자
유봉석 지음
출판사
매경출판 | 2014-01-0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정보 공유와 소통의 시대를 열 새로운 패러다임, 게이트쉐어링!게...
가격비교

- 기가옴의 매튜 잉그램 기자는 "페이스북은 이제 정보의 게이트키퍼다. 여러분은 단순히 정보 제공자에 불과하다. 그것도 여러명의 제공자 중 한명에 불과하다."고 지적. 페이스북이 자사 플랫폼 위에서 특정 앱이나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도록 혹은 더 적게 소비되도록 조정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 콘스틴 기자는 이런 이유때문에 특정 벤처기업이 페이스북 플랫폼에 참여해 사업을 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벤처캐피탈이 해당 기업에 선뜻 투자를 결정하기 어려워지고, 벤처기업들도 페이스북에서 새로운 앱을 내놓기가 망설여질 수 있다고 지적. 워싱턴포스트나 가디언처럼 페이스북 노출정책에 따라 한순간에 사업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 페이스북 플랫폼에서 트래픽 대란이 일어난 사례는 뉴스리더 앱이 처음이 아님. 페이스북이 앱 플랫폼을 처음 선보였을 때는 게임앱이 대부분이었음. 게임개발자들은 페이스북에서 게임앱이 잘 노출되어서 이곳을 구전효과의 노다지라고 생각. 자연스럽게 게임 개발자들은 앞다퉈 페이스북으로 몰렸음. 그런데 페이스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출정책을 변경해 버림. 당시 게임 앱 개발자들은 트래픽 급감으로 뉴스리더 앱 운영자들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혼란을 겪어야 했음. 그럼 페이스북 입장에서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앱 최적화를 포기해야 할까? 소셜 앱 참여업체 입장에서는 페이스북의 서비스 진화가 득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하겠지만 페이스북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음. 지속적 성장과 이용자의 만족을 위해선 다양한 시도와 개선작업이 지속되어야 함. 페이스북은 앞으로도 리퍼럴 트래픽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뉴스리더 앱 디자인을 계속 실험할 것임. 이에 따라 페이스북 플랫폼에서 사업기회를 추구하는 소셜앱 운영업체들 중 트래픽 롤러코스터를 경험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더 나올 수 있음.
- 유료 컨텐츠가 아니더라도 약한 연대 게이트쉐어링은 가능. 허브 사이트에 통째로 컨텐츠를 넘겨주고 그 대가로 정보제공료를 받는 것. 허브 사이트는 확보한 컨텐츠를 가지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 수익기반을 마련할 수 있음. 예를 들어 포털이 언론사 기사를 피딩받아 인링크(플랫폼 내에서 소비) 기반으로 뉴스 서비스를 구성하는 방식. 허브 사이트는 제공받은 콘텐츠 페이지에 광고를 붙여 일정부분 수익을 올리거나 이용자 재방문을 유도할 수 있음. 주변부 사이트는 콘텐츠 제공료로 1차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으며 허브 사이트를 통해 브랜드 파워를 높일 수 있음. 특히 주변부 사이트가 자체 웹 플랫폼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운영인력이 많지 않다면 고려해볼 수 있는 전략임. 진정한 의미의 게이트쉐어링은 강한 연대에서 그 특성이 두드러짐. 이 방식은 허브사이트의 게이트에 노출되는 컨텐츠가 주변부 사이트에서 제공한 것이지만 콘텐츠의 최종 소비가 허브 사이트가 아닌 주변부 사이트에서 일어나는 게 가장 큰 특징. 약한 연대의 소비방식이 인링크였다면 강한 연대는 아웃링크 방식을 기반으로 함. 즉, 허브사이트에 노출된 컨텐츠를 클릭하면 주변부 사이트로 이동해 소비가 이루어짐. 주변부 사이트는 허브사이트에서 자연스럽게 넘어온 이용자를 기반으로 독자적 전략에 따라 다양한 수익모델을 적용해볼 수 있음. 주변부 사이트의 기획능력에 따라 주변부 사이트에서 콘텐츠 2차 소비를 유도할 수도 있음.
- 게이트 쉐어링 시대의 플랫폼 성장 전략은 게이트 키핑이나 게이트 워칭 시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음. 콘텐츠 생산자는 자체적으로 보유한 플랫폼에서만 이용자, 즉 독자를 만나는 것을 고집해서는 안되는 시대라는 것. 더 많은 이용자가 자사 플랫폼을 찾도록 다양한 유인방안을 강구해야 하지만 이 전략만으로는 역부족임. 다시 말해 신문사가 자사 플랫폼인 종이신문만으로, 방송사가 자사 플랫폼인 텔레비전에서만 이용자를 만나는 전략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음. 오히려 이용자가 많이 모이는 타 플랫폼으로 외연을 확대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이용자를 직접 찾아나서야 함. 심지어 경쟁 사이트도 포섭대상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
- 플랫폼 성장 관점에서 세 개념을 정리해보면 게이트키핑은 자체 플랫폼 시대, 게이트워칭은 주변부 사이트의 콘텐츠가 나의 플랫폼 내부에서 유통되는 시대, 게이트 쉐어링은 주변부 사이트의 콘턴츠가 나의 플랫폼에 있는 게이트를 통해 노출되지만 그 혜택을 주변부 사이트와 공유하는 시대로 나뉨. 게이트키핑과 게이트워칭은 정보생산자-정보수용자, 정보유통자-정보수용자 관계가 따로 존재하지만 게이트쉐어링은 정보생산자-정보유통/배포자-수용자라는 하나의 구조에서 성립
- 이용자가 많이 모이는 디지털 공간을 허브라고 표현했는데, 콘텐츠 생산자가 직접 허브에 커넥트하는 방식이 게이트 쉐어링. 이같은 적극성이 필요한 이유는 희소성의 원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 과거에는 항상 재화와 용역이 부족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중심으로 경제학을 풀어왔음. 불과 20년전까지 뉴스와 정보도 희소성을 가졌음. 신문을 사지 않거나 텔레비전 뉴스시간을 놓치면 사회이슈에서 소외되기 대문에 이용자가 알아서 뉴스 플랫폼을 찾아갔음.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정보과잉시대를 열었음. 이제 희소한 건 정보나 뉴스가 아니라 이용자의 관심과 소비시간이 됐음.
- 국내 포털 뉴스서비스 초기부터 구글처럼 로봇이 크롤링하는 방식이 아니었음. 해당 매체에 정보제공료를 주고 피딩 받은 기사를 데이터베이스를 중심으로 뉴스서비스를 제공해왔음. 포털에서 인링크로 서비스되는 뉴스는 대부분 정보제공료가 지불되었다고 보면 됨. 뉴스정보 제공료가 적정한가를 놓고 언론사와 포털간에 갈등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양자간에 합의된 계약이 있기 때문에 서비스가 가능한 구조임. 정보제공료를 받고 포털에 뉴스를 제공하겠다는 언론사의 선택은 상응하는 기회비용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음. 해외 유력자들이 시도하는 뉴스 유료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하는 게 대표적인 기회비용임. 물론 유료화 움직임이 더딘 이유는 언론사별 콘텐츠 차별화가 크지 않은 데다 국내의 유료 콘텐츠 수요층이 얇아서 수익전망이 밝지 않은 이유가 크지만 무료기반의 뉴스 서비스가 너무 팽창해 있기 때문이기도 함.
- 게이트쉐어링과 게이트키핑에 존재하는 문의 의미엔 차이가 있음. 게이트키핑의 문은 조직내에서 정보가 흘러가는 경로상에 존재하는 관문을 뜻함. 이와 달리 게이트쉐어링의 관문은 이용자와 콘텐츠가 만나는 영역을 말함. 두 개념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게이트피킹의 마지막 관문은 게이트 쉐어링이 의미하는 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음. 또 게이트쉐어링은 게이트키핑을 대체하는 개념도 아님. 게이트키핑의 힘이 약화되면서 게이트쉐어링으로 넘어가는 건 맞지만 게이트키핑은 정보생산 과정에서 사라질 수 없는 개념임. 이런 점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 관점에서 탐색되기 보다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지배개념의 진화로 보아야 함
-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값싼 전자저장공간 덕분에 엄격한 게이트키핑보다는 콘텐츠 유통공간의 확장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해지면서 게이트 쉐어링 개념이 자연스레 대두됨. 디지털 혁명은 플랫폼 구축 비용을 확 낮추었고, 그 결과 범용성 높은 중요 이슈뿐 아니라 제한된 독자관심에 기바한 작은 이슈까지도 다룰 수 있게 됨. 다시 말해 아날로그 시대에는 비용문제로 불가능했던 틈새집단 대상의 정보 서비스가 가능해짐. 자신들의 콘텐츠를 메이저뉴스로 제한했던 뉴스조직들은 이용자 스스로 더 넓은 이슈소스에 찾아가는 것을 보게 됨
- 사이버문화연구소 김양은 소장은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 리터러시에서 "정보사회의 리터러시는 읽기, 쓰기, 비판적 인식, 컴퓨터 리터러시 등 다양한 미디어를 대상으로 메시지 접근 능력, 분석능력, 평가능력, 그리고 메시지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지적. 리빙스턴은 비슷한 관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개념을 네가지 구성요소로 정의. 다양한 형태의 메시지에 접근해서 분석, 평가하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용자의 참여와 비판적 사고가 미디어 리터러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 나아가 르니 홉스는 리터러시 개념에 성찰과 행동 두가지 구성요소를 추가하면서 사회참여가 필수적인 생활능력이 된다고 언급. 리빙스턴과 홉스의 미디어 리터러시 구성요소를 세부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음.
(1) 접근능력 : 미디어 콘텐츠 및 서비스 품질과 관련된 지속적 접근 능령
(2) 분석능력 : 상징적인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해내는 능력
(3) 평가능력 : 콘텐츠 맥락에 대한 지식체계, 객관성과 품질에 대한 비판적 평가능력
(4) 창조능력 : 참여, 사회자본, 시민문화와 관련된 콘텐츠 생산능력
(5) 성찰능력 : 사회적 책임감과 윤리성을 적용할 줄 아는 능력
(6) 행동능력 : 지식공유와 문제해결을 위해 공동체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
- 기본적으로 윈도8의 타일 서비스는 게이트쉐어링 모델인데, 문의 위치를 한 단계 상위에 두는 구조적 차별화를 통해 경쟁우위를 확보하련느 의도로 보임. 특별한 관심과 의도를 가지고 컴퓨터를 켠 이용자가 아니라면 윈도8 부팅 후 첫 화면의 타일을 채우고 있는 뉴스나 정보에 눈길이 갈 것이고, 자연스럽게 정보를 소비할 것임. OS사업자만이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이지만 콘텐츠 생산자는 타일 서비스에 콘텐츠를 노출할 수 있는 문을 확보해 새로운 이용자와 만날 수 있음. 타일 서비스에 나오는 정보는 국가별로 선택할 수 있게 글로벌 플랫폼 성격을 띤다. 국내에서도 한국 MS가 국내뉴스와 정보 콘텐츠를 생산하는 매체들과 제휴를 맺고 윈도8 한글버전에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기 시작. 그동안 구글의 웹서비스에 밀려 MS의 빙 서비스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상위계층 전략으로 회심의 카드를 던진 셈. 특히 MS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제휴사에 광고수익 배분과 유료화 연계 등을 통해 윈윈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 콘텐츠 생산자라면 상위계층 구조가 마련되면 적극 참여해 게이트쉐어링 모델을 시도해 볼만 함.
- 뉴스 사이트의 경우 홈페이지로 들어오는 비중이 25%, 검색을 통해 들어오는 비중이 30~35%, 개별 기사 페이지로 직접 들어가는 비중이 40% 이상인데, 전체 트래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에 불과한 홈페이지 디자인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것은 바보같은 짓. 여기서 기사 페이지로 들어오는 40%의 트래픽은 SNS를 통해 들어오는 경우로 보임. 홈페이지를 단장할 열정이 있다면 외부 플랫폼과 연계를 하나라도 더 맺는 게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음.
- 오랜기간 신문사는 거미줄에 해당하는 강력한 플랫폼을 갖고 있었지만 디지털 기술로 플랫폼 희소성이 사라지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 미디어 선택 옵션이 다양해진 독자는 파편화된 온라인 플랫폼에서 파편화된 소비행위를 함. 흩어져 있는 이용자를 박쥐처럼 정확하게 찾아내려면 게이트쉐어링 전략을 구사해야 함. 콘텐츠 생산자의 미래는 게이트쉐어링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 노멀  (0) 2014.10.12
클라우드의 충격  (0) 2014.10.12
응답하라 IT코리아  (0) 2014.10.11
인포그래픽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힘  (0) 2014.10.11
빅데이터를 말하다  (0) 2014.10.06
Posted by dalai
,

18세기의 맛

역사 2014. 10. 12. 07:33

 


18세기의 맛

저자
안대회, 정병설, 이용철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2-2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왜 교황청은 버터에 면죄부를 발행했을까? 감자는 어쩌다 악마의 ...
가격비교

- 유럽의 음식, 특히 프랑스 요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부드럽고 섬세한(달리 표현하면 느끼한) 맛을 내게 되었을까? 천년전 중세시대에도 유럽인들은 그런 맛을 좋아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음. 놀랍게도 후추를 많이 첨가한 유럽의 중세음식은 오늘날의 인도음식보다 더 매웠고, 매울수록 더 고급음식으로 쳤음. 귀족들의 경우 음식에 후추를 쳤다기 보다 오히려 후추를 즐기기 위한 베이스로 다른 음식재로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음. 이런 매운음식이 물러나고 부드럽고 순한 맛 위주의 음식이 널리 퍼진 것은 근대 이후의 일. 말하자면 유럽에서는 미각의 구조가 신료 중심의 중세의 구조로부터 향료 중심의 근대의 구조로 변화했다고 표현할 수 있음. 그런 큰 변화의 흐름에서 핵심적 역할은 한 것은 버터였음.
- 새로운 맛을 평가하고 새로운 조리법을 퍼뜨리는 주역은 대개 상층사회 인사들임.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어떤 음식을 즐기는 것은 그들만이 그 음식을 독점한다는 점과 무관치 않음. 그런 면에서 보면 맛의 유행에서 희소성은 지극히 중요한 요소임. 중세 유럽에서 매운맛이 그토록 고귀한 지위를 누린 것은 후추가 워낙 고가의 상품이기 때문. 후추는 지상낙원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얻는다는 전설까지 가미되어 최고의 상품으로 승격. 보석처럼 후추를 수집하고 선물한 데에서 알 수 있듯 후추는 단순히 맛을 위한 재료일 뿐 아니라 일종의 의식요소이기도 했음.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진출하고자 한 욕구는 세계사를 움직인 큰 동력으로 작용했는데, 그런 엄청난 사건이면에는 맛의 추구라는 언뜻 시시해 보이는 현상이 존재. 그런데 정작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직항로가 개척되고 후추가 대량으로 수입되자 모든 것이 바뀜. 가격이 하락하여 모든 사람이 후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상류층은 그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 17세기에 프랑스 엘리트들은 후추대신 다른 향료를 찾았고, 최대한 섬세한 맛을 추구하기 시작. 유럽음식의 역사를 장기적 시각에서 고찰할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중세의 매운 맛에서 근대의 부드러운 맛으로 이행한 것이고, 그 정점을 차지한 것이 18세기 프랑스 요리였음. 그것이 오늘날까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해왔음.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한 그 현상이 이제 바뀌어가고 있음.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사회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히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 오늘날 독일인의 식탁에 오르는 사워크라우트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13세기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진 중국의 쏸차이나 고려의 김치 등 동양의 절인 배추에서 유래. 지구력이 강한 말을 무기삼아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이 기마민족은 안장 주머니에 그들의 전통 음식인 육포와 동아시아를 정복하고서 받아들인 절인 배추를 식량으로 갖고 다니며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유럽에 전해진 것. 쏸차이는 신맛 나는 채소를 뜻하므로 사워크라우트와 의미상으로도 정확히 일치. 이후 식량으로서 배추가 지니는 가치가 알려지면서 14세기에는 독일에서 배추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됨. 근대초에 접어들면서 배추농사는 독일 땅에 서서히 확산됨. 그러다가 30년 전쟁(1618~48)으로 독일 경제가 황폐화되면서 배추는 싼값에 쉽게 배를 불릴 수 있는 서민식단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됨. 이렇게 하여 17세기 이후로 사워크라우트는 모든 서민가정에서 담가먹는 대표적 음식이 됬으며, 특히 우리 김장김치처럼 동절기에 대비해 반드시 마련해야 하는 음식이 됨. 항로에 오르는 독일선원도 이 고향음식을 배에 싣고 다니며 즐겨 먹었는데, 그 덕분에 사워크라우트는 18세기에 대항해 시대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의 주인공 역할을 맡으며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
- 유럽에 들어온 감자는 처음에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상당히 꺼리던 식물. 울퉁불퉁하고 못생겼으며 더러는 시꺼멓기까지 한 외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땅밑에서 자란난다는 점. 그리고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점까지, 아직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럽인들에게는 감자는 뭔가 악마의 계략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미심쩍고 수상한 느낌을 주었음. 특히 중세 유럽에서 흑마술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독성이 강한 벨라도나의 꽃과 감자의 꽃이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점은 의심을 더 키웠음. 감자에 대한 첫번째 편견은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생각. 나병은 유럽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병 가운데 하나였음. 이런 편견은 아마도 감자의 껍질이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나환자의 피부를 연상시켰기 때문일 것임. 감자가 일찍 수입된 프랑스의 몇몇 지방에서는 이 이유를 들어 감자재배를 금지하기도 했음. 두번째 편견은 감자가 미약, 즉 성적 흥분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 사실 처음 이런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토마토와 고구마였는데, 감자는 고구마와 생김새가 비슷했기 때문에 덩달아 의심을 받게 된 것으로 보임. 이후에 아일랜드와 북유럽 등 감자를 많이 먹게 된 지역에서 높은 인구성장률을 보이자, 이것도 감자의 최음효과 때문이라고 해석되기도 했음. 이는 물론 감자덕택에 그 지역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졌기 때문.
- 18세기 커피하우스가 공론의 장이라는 공적 영역을 형성한 것과 유사하게, 맥주를 판매하던 에일하우스, 혹은 펍이라 불리던 술집은 소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집단적 쾌락을 공유하는 여흥의 공간을 형성. 커피하우스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확인했음.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에일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면서, 즉 소비의 쾌락을 공유하면서 공동체적 정체성을 만들고, 또 확인했던 것. 비슷한 기능을 하던 태번(숙소와 식당, 술집이 함께 있는 여흥공간)과 인(고급숙소와 술집이 결합된 형태)이 점차 고급화되고 진숍이 기층민을 빠르게 흡수해가는 와중에도 맥주를 주로 판매하던 에일하우스와 펍은 그 수와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해 나감. 그런데, 맥주는 앞서 언급한 소비재들과는 다른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음. 대부분의 사치재가 영국의 교역확대에 힘입어 국내유입이 증가된 수입품이었던 데 반해, 맥주는 원료와 생산시설 모두 영국의 내수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 18세기 들어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맥주주조 업체는 대규모 생산시설을 갖추기 시작. 국가경제에서 맥주가 차지하는 비중도 자연스레 커져갔음. 맥주는 단순히 영국의 오래된 전통음료일 뿐 아니라, 성장하는 영국의 미래를 보장하는 기간품목으로 인식되었던 것.
- 양성화된 맥주산업은 불법적인 진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제어하는 역할까지 담당. 18세기 내내 폭증했던 진의 수요는 정부의 골칫거리였음. 진의 생산과 유통을 양성화하여 이를 제어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세법과 인허가법을 입법했으나, 결과적으로 진 유통의 지하화는 더욱 심해졌음.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영국 의회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합법적 맥주유통을 활성화하는 법안이었음. 1830년 마침내 공표된 비어하우스법은 이런 노력을 집대성한 법. 이 법안은 가정이나 펍에서 맥주를 팔기 위해 내야하는 인허가세를 2파운드로 크게 하향조정했고, 이전에 요구되었던 음성적 진의 유통을 위축시키는 이러한 방밥을 통해 18세기 내내 음성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어 각종 사회 경제적 문제를 일으키던 진은 그 영향력이 크게 감소. 맥주는 다양한 경제행위에서 거래의 윤활유 역할을 하기도 했음. 흔히 18세기 커피하우스의 역할을 논할 때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상거래와 정치적 토론이 함께 다루어지곤 하는데, 각종 보험업무를 제외한 상거래 행위 대부분은 태번이나 인, 에일하우스와 같이 맥주를 주로 파는 장소에서 이루어졌음. 주식거래소나 영국은행 근방에 있는 태번은 거래자드로 항상 성황을 이루었고, 각종 이익단체나 클럽에서는 단골 에일하우스나 펍을 지정해서 그곳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논하고 각종 계약을 체결. 맥주는 이들에게 일정 정도의 흥분을 허락하면서, 그 흥분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들과의 상호교류를 통해 더 큰 이익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 맥주는 흥정을 부추기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매개체였음. 이처럼 맥주는 단순히 전통적 의미에서 영국 문화를 상징하는 소비재일 뿐 아니라, 18세기에 들어 나타난 성장의 징후들, 다시 말해 도시화, 상업화, 산업화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중요한 상품이었음. 호가스의 맥주거리가 찬양하는 맥주의 맛, 번영과 만족, 행복의 맛은 18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난 시장경제에 대한 기대와 낙관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음.
- 1554년 영호남 지방에 기근이 닥쳤음. 조선정부는 세종대왕의 구황촬요를 언해하여 전국에 반포. 국가가 구황방을 언해해 전국적으로 보급한 첫번째 사례였음. 서문을 쓴 우부승지 이택은 서울 사람들의 습속이 사치스러워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데 더욱이 죽 먹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아침에 좋은 밥을 지어먹고는 저녁에 밥 짓는 연기가 사라져버리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토로하고 느릅나무 껍질, 솔잎 등은 오곡보다도 사람의 위장에 유익하고 성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 구황촬요에는 솔잎을 먹으면 받드시 뒤다르는 변비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유피, 즉 느릅나무 껍질을 우려낸 물이나 가루가 효과적이라고 강조.
- 18세기 조선에서는 단맛의 원천을 꿀과 조청에서 주로 확보. 이에 비해 일본, 류큐국, 중국으로부터 확보한 사탕은 그것이 백사탕이든지 흑사탕이든지, 아니면 설탕이든지 연백당이든지 간에 약재 혹은 단맛을 강화하는 용도로 부분적으로 쓰였을 뿐임.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가 밝혔듯이 서유럽에서도 설탕은 처음에 향신료이자 의약품이었음. 18세기 이후 중앙아메리카에서 운영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은 설탕의 대독점가를 양산. 설탕의 대량생산과 그로 인해 발생한 설탕위주 단맛 소비는 사탕수수 농장주와 설탕 가공업주, 유통업주와 은행가 그리고 노예상인을 권력자로 만들었음. 이러한 사정은 적어도 18세기 일본의 사쓰마 번에 의해서 독점된 아마미 군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도 부분적으로 현실화되고 있었음. 하지만 조선에서는 20세기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설탕이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
- 영국에 가서 차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영국에서 마시는 홍차가 맛있다고 느꼈을 것임. 영국에서 마셔보고 맛있어서 국내에 사들고 와서 끓여 마시면 같은 맛이 나지 않음. 왜일까? 수질이 다르기 때문. 영국의 물은 경수인 반면, 우리나라 물은 연수임. 석회염 등 광물질이 다량 포함된 경수에서는 차의 맛을 내는 탄닌이 잘 우러나지 않음. 17세기말~18세기 초에 영국인들이 마셨던 녹차는 아마도 매우 옅은 맛이었을 것임. 반면 녹차에 비해 탄닌이 훨씬 많이 들어있는 발효차는 영국의 경수에도 진하게 잘 우러남. 또한 물을 식혀서 찻잎을 여러번 우려내 마시는 녹차와는 달리 홍차는 물을 끓여서 찻주전자에 한번에 우려낸 다음 뜨겁게 마시는 것이 포인트임. 일년내내 비가 많이 오고 을씨년스런 날씨가 계속되는 영국에서 홍차는 추위를 덜어주었음.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마시면서 영국인들은 보다 위생적인 식생활을 하게 됨. 영국인들이 중세부터 거의 끼니마다 맥주를 마셨던 일차적 이유는 위생때문이었음. 오염된 식수 때문에 질병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에 맥주는 건강음료였던 셈. 그러다 과다한 알콜섭취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면서 서아시아와 동북아 지역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맛의 커피와 홍차가 맥주의 대안으로 떠오름
- 1741년 80만 파운드의 차를 소비한 영국인들은 1750년 250만 파운드, 1784년에는 1100만 파운드에 가까운 차를 소비. 1693년에서 1793년 사이에 차수입이 400배나 증가했다는 놀라운 통계도 있음. 차소비가 미친 경제적 영향에 대해서는 다소 상반된 견해가 있음. 노동자들이 진이나 맥주대신 차를 선호하게 되면서 더 건강한 몸으로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국의 산업화가 촉진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노동자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구해야할 돈으로 차를 사 마시면서 오히려 더 허약해졌다는 주장도 있음. 1756년에 차에 대한 에세이를 출간한 조너스 핸웨이는 차가 영국인의 건강을 해치고 일을 방해하며 개인의 자산을 축내고 국가의 부를 유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주문. 영국인이 차를 마시면서 여성화되어 나약하고 무기력한 국민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믿었던 핸웨이에게 차는 도덕적 해이, 사회적 혼돈, 경제적 파탄, 아울로 국가적 낭비를 불러온 재앙이었음. 차소비가 한창 늘어나던 시대에 핸웨이의 격한 반응은 빈축을 샀음. 예컨대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문인이었던 새뮤얼 존슨은 핸웨이의 견해가 지나치다며 깎아내렸다고 함. 그러나 차는 실제로 영국경제에 갈수록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 영국인들은 점점 더 많은 차를 소비했지만 중국은 영국이 내놓을 수 있는 물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대문에 영국은 갈수록 심한 무역적자를 떠안게 됨. 이 불균형때문에 영국은 자국에서 재배하기 힘든 차를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했고, 중국에 아편수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아넘겨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음. 19세기 아편전쟁은 사실 차전쟁이었던 셈.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사건 역시 식민지 미국에서의 차수입과 유통을 통제하려 했던 영국의 정책에 반발한 시민들이 제국의 간섭없이 차 마실 권리를 주장한 사건이었음.
- 커피가 유럽에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의 일. 처음에 커피는 아랍인들이 즐겨마신다는 이유로 악마의 음료라고 비난받았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를 마셔본 후 이런 음료를 마시는 즐거움을 이교도에게만 허용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선언하면서 커피에 세례를 주었음. 그러나 후일 역사는 교황의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증명함. 유럽에 확산되기 시작한 커피와 카페는 기독교의 교원에 반대한 계몽주의 운동의 촉매역할을 했기 때문. 최초로 계몽주의의 싹이 튼 영국에서는 1650년 경부터 커피가 수입되어 소비되기 시작했으며, 옥스퍼드와 런던에서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음.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공간에 철학자, 문인, 정치가들이 모여들면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점화됨. 영국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 존 로크 역시 커피하우스의 단골이었음. 1676년 영국의 검사장은 찰스 2세와 왕국에 대한 불경죄를 구실삼아 커피하우스를 폐쇄할 것을 명령했지만 반발이 너무 거세게 일어 칙령을 철회해야 했음. 마농 레스코의 작가 아베 프레보가 영국을 방문한 후 "정부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모든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커피하우스는 영국의 자유를 위한 의자"라고 했을 정도로 커피하우스는 영국의 정치지형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그러나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차가 수입되어 커피를 밀어내게 되었고, 이후 영국과 항상 대립하던 프랑스가 명실상부한 카페의 왕국으로 부상.
- 지금도 그렇지만 커피중독은 당시에도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음.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커피로 인한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 바흐의 커피 칸타타는 커피를 좋아하는 딸과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갈등을 소재로 삼고 있을 정도. 커피 애호가인 쥘리는 이성의 절제를 통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부르주어의 방식을 선택함. 쾌락은 금지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절제하게 방임되어서도 안됨. 무절제한 쾌락의 추구는 쾌락 자체를 습관으로 만들어 쾌락의 강도를 약화시키고, 이른바 자유의 수단인 돈을 낭비하게 만들기 때문. 사람의 육체적 쾌락 역시 마찬가지. 사랑의 육체적 쾌락은 그 강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절제되어야 함. 그러지 않으면 그 쾌락은 곧 소진되고 사랑의 감정마저 사라져버릴 위험에 처할 것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주의의 신화적 상징으로 제시한 오디세우스처럼,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려 바다에 빠져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이성의 밧줄로 자신을 묶는 것이 필요. 우리는 생프뢰의 말에서 계몽주의의 이것은 정신적 가치를 위해 감각이나 감정의 쾌락을 금지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통해 오히려 쾌락을 극대화하는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음.
- 18세기는 흔히 계몽과 이성의 시대라고 여겨짐. 그러나 한편으로 18세기는 욕망과 쾌락의 시기이기도 했음. 프랑스에서는 17세기말부터 기성의 도덕적 종교적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 이들은 리베르탱이라고 불렸음.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단지 자유로운 사상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 구속에서 벗어나 육체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한 오를레앙 공은 대표적인 리베르탱으로 남녀가 어우러진 야회를 즐겼으며 이 야회를 장식한 것은 샴페인이었음. 병마개가 터져 튀어오르며 뿜어져나오는 거품으로 여인의 노출된 어깨를 적시는 장면은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야회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줌. 카사노바와 사드 후작은 18세기의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그들에게 와인이란 성적인 금기와 억압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구현하는 매개물이었음.
- 프랑스에서 와인의 맛을 평가할 때 쓰는 용어중에 테루아라는 말이 있음. 이 말은 번역하기 까다로움. 사전에서는 '산지특유의 맛' 정도로 옮기고 있지만 충분한 설명이라고 보기 어려움. 테루아는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다양한 요소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 기후, 토양, 재배자의 정성과 양조기술 등 와인 맛과 관련된 모든 요소가 테루아에 포함됨. 그 모든 요소가 마친 DNA의 이중나선처럼 뀨여서 이루어진 것이 테루아라는 개념. 테루아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은 19세기임. 1855년 파리에서 열린 와인 박람회에서 보르도 와인이 산지에 따라 와인의 등급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19세기 후반에는 재배지역이 와인의 질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됨. 20세기 초부터는 와인과 치즈 생산업자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 요리책 작가, 요리사 등 음식의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들도 생산지와 맛을 관련시키기 시작. 이에 따라 테루아는 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료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됨. 이후 테루아는 AOC(원산지 명칭의 통제) 제도의 구축으로 이어져 지역농업을 보호하고 프랑스 와인의 명성을 높이는데 기여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량직업 잔혹사  (0) 2014.10.12
대중문화 5000년의 역사  (0) 2014.10.12
설탕, 세계를 바꾸다  (0) 2014.10.11
두개의 한국 현대사  (0) 2014.10.07
쌀의 세계사  (0) 2014.10.06
Posted by dalai
,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

저자
노엄 촘스키 지음
출판사
황금나침반 | 2006-02-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계 1%의 지성이자 양심, 촘스키가 고발하는 미국에 대한 이야...
가격비교

- 이라크 침략직후, 정책 입안자와 분석가 사이에서도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중동의 석유공급을 지배한다면 그 지역의 석유에 크게 의존하는 유럽과 아시아 경제에 간접적이지만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고 지적. 브레진스키는 2차대전 후 정책입안자들, 특히 조지 케넌의 결론을 되풀이하고 있었음. 케넌은 걸프지역의 에너지 자원을 지배하면 산업 경쟁국들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는 힘을 미국이 갖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음. 단기적 힘이나 부에 비교해서 인간의 생존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케넌의 계산은 무척 합리적이었음. 하지만 새삼스런 계산은 아니었음. 이런식의 계산은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음. 다만 오늘날에는 이해관계가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임.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라크는 석유 매장량에서 세계 2위인데다 에너지 자원의 주요 공급처인 중동의 심장부에 위치. 따라서 미국이 이라크를 지배할 수 있다면, 지난 30년 동안 형성된 3각구도의 세계경제(미국이 지배하는 북아메리카, 유럽, 그리고 남반구 및 남동아시아 경제권과 연결된 북동아시아)에서 경쟁국들을 압도하는 전략적 힘과 중대한 영향력을 워싱턴이 확보하는 셈. 2차대전 후, 정책 입안자들에게 이 문제는 언제나 핵심과제였음. 더구나 부시의 공격적 군국주의 때문에 미국의 지배에 반발하며 결속하는 세력이 형성되고,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에너지 자원의 지배력 확보는 어느때보다 절실한 문제로 부각되었음.
- 중동 산유국은 주로 사우디를 뜻했음. 이제 이라크가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부상. 이라크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 보상물임. 기존의 엄청난 매장량 때문이 아니라 아직 뚜껑조차 열지 않은 막대한 유전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 게다가 채굴비용도 무척 낮아,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획득하는 에너지 기업에는 노다지가 아닐 수 없음. 이번 침략으로 워싱턴의 규칙을 이라크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미국과 영국의 에너지 기업에는 큰 행운임.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중요한 쟁점은 접근권이나 이익이 아니었음. 석유에 대한 지배권이었음. 국제문제에서 결정적 영향력이란 과제는 예측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권력이기 때문. 파탄국가의 특징은 그들의 국민을 폭력, 심지어 파멸에서도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정책 결정자들이 그런 우려를 지배계급의 단기적 권력과 축재보다 우선순위에서 뒤에 놓는다는 점. 파탄국가의 또 다른 특징은 무법국가라는 점. 달리 말하면, 파탄국가의 지도자들은 국제법과 국제조약을 경멸하고 무시함. 국제법과 국제조약은 다른 나라들에나 적용되는 것이지 무법국가에는 적용되지 않음.
- 마케팅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교조적 체제는 적을 악마로 둔갑시킴. 이런 성격 규정이 때로는 맞지만, 적에게 뒤집어 씌우는 범죄가 무력응징을 요구할만한 이유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교저적 체제가 제시하는 증거들은 한 국가를 친구이자 우방에서 타도해야 할 궁극적 악으로 쉽게 전락시킴. 최근의 예가 후세인임.
-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사는 고집쟁이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음. 애덤 스미스가 그런 고집불통 중 하나였음. 그는 고결한 의도를 내세우는 영국의 입장을 경멸. 제국정책을 세운 주역이 장사꾼과 제조업자라며, 그들의 이해가 주로 반영되어 다른 나라, 특히 영국의 야만적 불법행위에 침략당한 인도만이 아니라 영국의 국민마저 통탄할 충격을 주는 정책이라고 주장. 따라서 스미스는 음모론자, 즉 역사의 기록과 문서를 뒤적대면서 국가의 권력구조와 이해관계를 추적한 사람에 속함. 음모론자는 민주주의와 정의와 자유를 세계에 알리고 심겠다는 열정과 같은 고결한 의도에 기계적으로 동의하지 않음. 따라서 그들의 치명적 영향력은 폭력국가에서는 무력으로, 자유국가에서는 다른 수단으로 차단됨.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미 시작된 인간지배 음모, 그림자 정부  (0) 2014.10.12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  (0) 2014.10.12
대한민국 사생활의 비밀  (0) 2014.10.11
현재의 충격  (0) 2014.10.11
나이를 속이는 나이  (0) 2014.10.07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