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사회는 머리를 맞대기는커녕 서로를 불신한다. 상급자는 애매한 단어를 사용하여 언제든 내가 시키지 않았다고 발뱀할 준비를 하고, 하급자는 잘못을 위의 탓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자료를 남기는 데 열성이다. 상황이 이런데 정책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한 마디로, 공직사회는 끊임없는 면피의 세계다.
앞으로도 상황이 좋아질 리 없다. 국민의 선택을 통해 권력을 위임받은 집권 세력은그기간엔 본인들이 무엇이든 할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한다. 게다가 갈수록 극단화되고 있는 정치는 정권이 바뀌면 서로를 향한 보복의 수위를 높인다. 그과정에서 직접 정책을 행하는 공무원은 앞으로도 계속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럴수록 공직사회에는 나중에라도 책임질 일을 극도로 회피하는 문화가 더 팽배해질 것이다.
- 공직사회는 블랙리스트를 지시받고 실행할 때도 무기력했지만, 처벌과 조사가 끝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반응을 최대한 자제하는 걸 어떤 미덕처럼 여겼다. 사석에서라도 블랙리스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든가, 원치 않은 일을 해야 했던 억울함을 토로한다든가, 그 일에 관하여 통렬한 반성을 하는 사람은 대단히 찾기 어려웠다. 모두가 그 사건은 잊기로 약속한 듯이 말이다. 시간이 좀지나 공직사회를 자세히 알게 된 이후 느낀 사실이지만, 그런 침묵은 사실 체념과 냉소에 가까있다. 공무원이 공익에 헌신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한다고? 그건 정말 이 사회를 모르는 사람들의 낭만적인 소리였다. 현실의 공직사회는 '재수 없게 정권이 시키는 이상한 일에 연루되어 패가망신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소박한 바람도 장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문학과 책을 좋아하던 청년이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할 한 위험한 사회에서, 개개인의 영혼은 정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면피와 행운으로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알게 된 공직사회의 첫 번째 민낮이었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아돌프 아이히만을 분
석하며,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깊은 증오나 사악함이 아닌 평범하고 무비판적인 복종과 직무 수행에서 찾았다. 이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구현되었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의 사람들이 만든 사회가 때로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아렌트의 섬뜩한 이론이다. 우리나라의 공직사회는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앞서 언급한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공무원들은 대부분 뻔히 잘못된 지시인 줄 알면서도 침묵했다. 블랙리스트와 같은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사골 우려먹듯 반복되는 정책의 재활용, 편리한 현상 유지, 뒷북 대웅 등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은 토론이 박멸된, 튀지 않는 이들의 공직사회가 만들어 낸 무난한 복종의 결과물이다. 영혼 없이 지시받은 대로 떠드는 관리자들, 회의만 시작되면 고개를 숙이고 무수첩첩 상급자의 지시를 빼곡하게 적을 줄밖에 모르는실무자들. 그들의 '무난한' 태도가 만들어 결과는 태만하고도 무심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상 매우 파괴적이고 때로는 악하기까지하다.
- 공직사회에는 변덕스러운 정치의 외풍을 걷어내면 직업 관료가 본래의 유능함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화가 있다. 무능의 원인을 관료가 아니라 정무직과 집권 세력에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신화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직업 관료의 순수한 영혼도, 유능함도 사실 그다지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정치와 집권 세력은 관료를 때리며 국민에게 표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관료는 정치와 집권 세력의 변덕을 탓하며 자신의 무능과 철학의 부재를 교묘히 감춘다. 케이와 K 사이에서 휠쓸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읽어야 할 진짜 함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집권 세력과 관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 관료는 순진한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책 실패의 지능적 공범이라는 사실 말이다.
- 세상엔 1장짜리 보고서로 모두 담을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하다. 문제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으며, 해결 방안 역시 많은 논의가 필요한 사안들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부 보고서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도'핵심만 간단하게'라는 원칙에 경도된다. 보고서 1장에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담길 수 있도록 문제점과 원인, 해결 방안을 2~3가지의 맥락으로 포섭하고, 서로 조응되게 구성하여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타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현실의 이해관계는 몇가지의 단순한 맥락으로, 의도적으로 치환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독서율 하락에 대한 대책을 보고서로 쓴다고 가정하자. 일단 독서율 하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OTT 등 영상매체의 약진? SNS의 범람? 장시간의 근로나 공부로 인한 시간의 부족? 어릴 적 독서 습관의 부재? 혹은 경제적 어려움? 하나하나 독서율 하락의 원인으로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이다. 그러나 한장의 보고서에 그 모든 걸 맥락 없이 담을 수는 없다. 결국 보고서는 이를 독서 환경의 미비,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 독서 습관의 부족 등으로 적당하게 포섭'한다. 이 과정에서 무엇이 독서율 하락의 진짜 이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결 방안으로 사용할 그럴듯한 정책적 수단이 있는지를 먼저 고민하고 그에 맞취 원인을 정리하는 식이다.
그 결과 독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도서관을 확충하고,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에 대응해서는 전자책을 보급하며, 독서 습관의 부족에 대해선 독서 장려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보고서가 완성된다.그럴듯하지만, 이러한 보고서로는 독서율 하락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수 없다. 원인 분석의 의도적 평탄화도 문제지만 거기엔 정말 우리나라의 도서관이 부족한지, OTT와 SNS를 보는 사람들이 전자책에 흥미를 갖는지, 독서 장려 프로그램이 독서
율증진에 효과성이 있는지등 정책 수단의 유효성에 관한 심층적인 논의 자체가 생략되어 있는 탓이다. 하지만 정부의 보고서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작성된다. 보고서 작성의 목적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깔끔한 문서 작성에 방점을 두고있기 때문이다.
- 가장 무능력한 직원이 간부로 승진할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가장 높다는 딜버트의 법칙이 있다. 너무 똑똑한 사람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불안하기에 승진시키기 어렵지만, 아무리 바보라도 부하에게 호통을 치는 상사의 역할은 감당할 수 있으므로 먼저 승진시킨다는 인사 원리이다."' 말과에서도 무언가 변화와 성과를 내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보다 일과에서 윗사람의 심기 보좌와 자료 취합에 능한 사람이 평가를 더 잘 받고 승진하는 공직사회의 평가 방식은 이러한 '딜버트의 법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윗사람의 심기 보좌와 취합은 몹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시간과 몸을 같아 넣으면 그만인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이 현장과 소통하며, 사회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려는 태도와 능력을 갖추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공직사회의 인사원칙은 전자를 우대함으로써 스스로 무능을 조장한다. 이러한 유인구조 아래에선 공직에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을 뽑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바보가 된다.
- 202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의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 따르면, 가차 없는 밀도로 불규칙한 일정에 대응해 장시간 일할 것을 강제하며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탐욕스러운일'은, 주말이나 퇴근 후 긴급 호출에 지체 없이 대응할 수 있는 '온콜' 상태를 요구한다. 문제는 가정에서도 부부 중 누구 한 사람은 어린아이나 연로하신 부모님의 응급 상황 등 급한 일이 있을
때 사무실을 떠나 집으로 올 수 있는 온콜 상태를 반드시 유지해야한다는 점이다. 골딘 교수는 남녀 성별 간의 소득 격차가 나는 원인은 남성이 탐욕스러운 일을 유지하여 소득을 극대화하고, 대신 여성이 가정의 온콜에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중앙부처 사무관의 일은 (보수가 는지 않음에도 산구하고!) 명백히 탐욕스럽다. 예산 시즌에는 출퇴근 시간과 관계없이 기재부의 연락에 언제든 온콜 상태여야 하고, 국정감사 등 국회가 열릴 땐 전날 새벽까지 자료와 질의에 대웅해야 한다. 예산과 국회 등은 어느 정도 예측되는 시즌이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좀 나은 편이다. 더 큰 난관은 국무회의, 장관회의, 실.국장 회의 등 정부 내부에서 돌아가는 각종 회의 준비이다. 회의 내용에 자신의 소관 업무가 들어가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연락이 울지 모르기 때문에 담당자는 늘 바짝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장관의 현장 간담회는 치밀하게 준비된다. 실무진에서 제일 공을 들이는 건 참석자 선정이다. 참석자는 해당 업계를 선도하는 인사를 다섯 명 정도 추려 섭외하는데, 정부가 장관의 일정에 따라 간담회 장소와 일시를 일방적으로 정함에도 대부분은 장관과 만나는 자리라고 하면 흔쾌히 섭외에 응한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민간의 반응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관의 힘은 아직도 그럭저럭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관은 참석자들이 현장에서 발언할 내용을 조율하고, 그 결과를 예상 질문과 답변의 형태로 미리 보고한다. 장관이 모르는 논점이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등장하여 그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는 꼭 장관을 위한 일만은 아니다. 흑여라도 장관이 현장에서 실무진이 가닥을 잡은 방향과 반대로 대답하는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전 조율은 필요하다. 그나마 장관급의 경우에는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정리하는 수준이지만, 총리급 이상의 경우에는 참석자의 동선과 발언 시간, 순서까지 세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이쯤 되면 참석자의 행동과 발언에 어떠한 우연도 개입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간담회 보고자료가 연극의 대본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 중앙부처 기준으로 1급 공무원은 3~4개의 국을 총괄하는 '실장'보직을 맡는다. 대내적으로는 정무직인 장.차관과 일반 공무원들 사이에서 정책이 부드럽게 집행되도록 가교 구실을 하고, 대외적으로는 대통령실, 타 부처, 국회 등과 정책을 조율하며 부처의 외연을 넓히고 이익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공직사회에서 1급 공무원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에 대한 긴 설명은 실상 말의 성찬일 뿐이다. 부처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기획조정실장 등 극소수의 자리를 제외하면, 1급 공무원이 맡는'실장' 보직은 중앙부처에서의실질적인 역할이 아예 없는 경우가 휠씬 더 많다
- 직업공무원인 관료는 책임을 싫어한다. 특별히 승부를 걸어야 하는 때가 아니라면, 본인이 있을 맨 결정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하는 것이 공무원의 태생적 속성이다. 연구용역과 위원회는 정책의 전문성과 민주성 중진을 핑계 삼아 공무원이 시간을 벌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결정의 완충지대이다. 이런 완충지대는 논의와 검토의 과정을 길게 끌며 결정을 뒤로 미루는 데 적합하다. 즉, 당장 결정을 내려야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호막인 셈이다. 공직사회의 이러한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 몇몇은 그 덕분에 연구용역비에 위원회 수당까지 살뜰히 챙긴다. 이들은 반복적으로 연구용역에 참여하거나 위원회에 위촉되어, 때로는 실질적인 성과 없이도 보상을 챙기고 자기 자리를 공고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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