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국의 암묵적인 동맹관계 흔히 냉전은 공산주의와 벌인 십자군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근본적 질문, 즉 냉전의 이유를 되짚었다. 냉전은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이념 전쟁인가, 아니면 소련의 유라시아 지배를 저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갈등일 뿐 인가? 닉슨은 이념보다는 대국의 지도자라는 위상을 중시했고 키신저는 이념보다 지정학적 이익과 세력 균형을 더 중대시했으며 미국 군부는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 실을 중시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후, 냉전은 공산 주의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소련에 대한 투쟁으로 슬그머니 재정의됐다. 다만, 이런 전략적 설명은 평범한 미국인들을 설득하는 데 는 한계가 있었기에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이념적 설명이 더 강 조됐던 것이다. 처음에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데 탕트로 유도하려 했다. 소련 및 중국과 더 나은 관계를 믿는 게 목 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1973~1976년의 교류를 거치면서 미국과 중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강력한 파트너십을 형성했고, 미국이 중국에 군사 기술을 제공하는 등 중국 군사력을 현대화해 소련에 대 항하게 한다는 '중국 카드'가 굳어졌다. 양국은 군사 및 정보 분야 에서 긴밀히 협력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가 미국과 중국 관계의 방 향을 결정했고, 미국과 중국은 암묵적 동맹이 됐다. 미국인들과 세계에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뿐이다.
- 서로 도운 미국과 중국
레이건 정부 초기에 잠시 소원해졌던 미국과 중국은 1983년부 터 다시 관계를 돈독히 했다. 대만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서로 주고받을 게 많다고 여겼다. 두 나라 모두 소련의 군사력을 두려워하고,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경계했다. 중국은 미 국의 기술이 필요했고, 미국은 중국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에 무조건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대신, 비즈니스 관점에서 접근했다. 우선, 미국은 중국을 소련 견제의 파트너로 여기 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이 부분에 대해 협력했다. 소련의 아프 가니스탄 침공 후 미국은 파키스탄과 협력해 저항조직인 무자헤딘에 군사 지원을 했는데 이때부터 양국의 정보 기관도 협력하기 시작했고, 중국은 비밀공작에도 참여했다 중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길 바랐기 에, 무기 운송용 노새와 총기 등을 제공했다. 실제 아프가니스탄은 1983년에 무기 1만 톤, 1987년에는 6만 5,000톤을 지원받았는데 대부분이 중국제였다. 이는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구매하여 공급 한 것이었다. 이 같은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미국은 소련이 아시아 에서 팽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 2010년, 중국의 명목 GDP가 일본을 넘어섰다. 오바마 정권은 처음에는 중국과 의 견 차이를 관리하면서 협력할 분야를 늘리고 미중 관계가 대립으 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래서 2009년에 미중 전 략경제대화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중국은 무역 불균형, 환율 문제, 인권 문 제, 주변국과의 이해 충돌 문제를 둘러싸고 고압적으로 굴기 시작 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대적으로 중국의 지위가 상승했다 고 여기고 자신만만해진 것이다. 덩샤오핑 이래로 도광양회 노선을 버리고 중국의 힘을 바탕으로 국익을 추구하자는 분위기 가 형성됐다. 특히 2009년부터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어업 감시 활동이 활발 해지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는 등 중국의 강경 자세가 두드러지 자 해상 안전보장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높아졌다. 2010년 7월에 개최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클린턴 장관은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자유롭게 항행하고, 아시아에서 국제 공공재인 해 양에 자유롭게 접근하며, 이 지역에서 국제법을 준수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중국의 행동을 이 지역에 대해 강한 야심을 드러내며 미국의 위상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 미국의 유일한 경쟁국으로 자리한 중국. 역설적이게도 중국을 오늘날의 강대국으로 만든 건 바로 미국이다. 시카고대학교의 국 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JohnJ. Mearsheimer 교수는 미국이 중국 의 발전을 계속 지원한 건 비현실적 전제에 기반한 전략적 실책이 었다고 통탄한다. 세력 균형을 고려해 대처했다면 중국의 성장 속도는 휠씬 더 느렸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귀환했다. 트럼프 신정부는 1기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가속화할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 정부는 한반도 정책 혹은 북한 정책을 입안할 때 중국을 염두에 둘 가능성이 높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 유리한가, 아니면 불리한가? 이에 대한 미국의 판단이 북한과 의 관계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구에 계속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던 스탈 린이 돌연 입장을 바꾼 이유는 뤼순항과 다렌항을 잃을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두 항구는 태평양으로 통하는 부동항, 즉 동아시아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소련의 전략 거점을 한반도에서 다시 확 보하기 위해 전쟁 발발에 동의했던 것이다. 즉, 스탈린은 숭패와는 관계없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구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스 탈린의 남침 승인 및 지원은 철저히 지정학적 계산의 결과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면서 김일성에게 마오쩌 둥의 동의를 얻게 한다. 1950년 5월에야 베이징에 도착한 김일성 에게 남침 계획을 들은 마오쩌둥은 회의를 소집해 주요 인사들에 게 의견을 물었다. 군 총사령관 주더했와 부주석 류사오치 는 신중했다. 동북지역 책임자 가오강축만 찬성했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참전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제 T-34 탱크로 무장한 탱크여단 을 앞세운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삼팔선을 넘었다. 김일성은 중국 을 무시하고 남침 시작을 알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프랑스 통신 을 인용한 외국 신문을 보고서야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한 뒤에야 장교 한 사람을 보내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통보했다.
- 북한군은 전쟁 초반에는 거침없이 남하했다. 그러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중국은 북한군이 붕괴되고 국군과 UN군이 삼팔선을 향해 반격하자 공공 연히 전쟁 개입 의사를 드러냈고 10월 1일, 소련과 북한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 요청을 접수했다. 마오쩌둥은 10월 8일에 미국의 위협에 대해 스스로 안전을 지킨다는 '항미원조 보가위국 못 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동안 출전 태세를 갖취둔 동북변 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하고 출병을 명령했다. 지원군 사령관은 펑더화이호현주였다. 만약 한반도가 미국의 지배하에 놓이면 동북 지방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즉,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서이지, 북한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김일성을 구한 건 어디까지나 그 부산물이었다.5 물론 국공내전에서 북한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데 대한 보답의 의미 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압록강으로 진격하던 한국군과 UN군 은 10월 25일부터 중국군의 공세에 맞닥뜨려 진격을 정지하고 청 천강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UN군의 진격이 재개된 직후인 11월 25일과 26일, 중국군이 18개 사단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으 로 서부전선을 공격하여 UN군의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이른바 '12월 후퇴'가 이루어졌다. 12월 26일, 중국군과 북한군은 삼팔선 을 넘어 남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1월 4일에는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 양국의 불신이 깊어지다 북한과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두고 반 목했고, 이는 전후 불신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중국군의 참전 후 김일성은 북한군 작전지휘권을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에게 넘 겼다. 북중 군대 간 연합 작전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중국 지도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스탈린이 중국을 편들자 어쩔 수 없었다. 이 일로 김일성은 모욕감을 느낀다. 본디 연합사령부 창설 후 작전 및 전선에 속한 모든 지 휘는 연합사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 김일성은 전쟁 수행을 둘러싸고 중국군 지휘부와 여러 차 례 충돌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50년 말 공산군의 3차 공세였다.
소위 '1.4 후퇴'로 널리 알려진 이 공세에서 북중 연합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37도 선까지 남하했다. 북한군 세 개 군단도 연합사 의 지휘 아래 최선봉에 섰다. 그런데 평더화이는 1월 8일에 전군 추격 정지 및 휴식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김일성이 발끈했다. 그 는 박헌영과 함께 펑더화이를 만나 부대의 휴식 시간을 단축하고 계속 남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평더화이는 적군 현황과 지원군의 난관을 설명하면서 남진을 거부했다. 이날 북중 지도자들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작전지휘권을 가진 연합사 지휘부의 뜻대로 되었다. 게다가 연합사 구성 이후 중국군 쪽에서 북한군을 비하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중국 지도부와 중국군에 대한 김일성의 불신은 커졌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 역시 전쟁을 겪으면서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마오쩌둥과 중국 지도부는 1950년 5월 당시 북한의 남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전쟁 개시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보였는데도 전 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 어쩔 수 없이 참전하여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중국군 의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장남 마오안잉을 한국전쟁에서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태도가 중국 지도부의 마음 에 들지 않았고, 불신이 깊어졌던 것이다.
- 중국군의 전격적인 철수는 분명히 북한의 안보를 위험하게 만 들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국가 안보보다 중국군의 철수로 인해 보 장되는 정권의 안전을 선택했다. 이 철군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북중 관계도 수평적 관계로 바 뀌었다. 이후에도 북중은 대외적으로는 긴밀하게 협력하면서도 종 종 사상과 노선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켰는데, 그럴 때마다 북한은 중국의 내정간섭을 더 강하게 배척하고 정치적으로 대등 한 관계를 추구했다. 한편 한국전쟁 후 중국의 대북 원조는 소련을 능가했다. 중국은 북한의 전후 복구 사업을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워갔다. 1954~1957년 에 중국은 3억 2천만 달러의 무상 원조를 제공했다. 이 기간에 북한 과 중국은 열다섯 차례에 걸쳐 정상급 회담을 진행했다.
- 소련과 중국 사이에 선 북한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자본주 의 진영과의 평화 공존을 주장하면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움직임 을 보였다. 이는 중소 갈등이 싹트는 계기가 됐다. 이후 1960년 소련은 중국에 자국 고문단과 전문가들을 귀국시키겠다고 일방적으 로 통보하고, 1960년 하반기부터 모든 교류를 단절했다. 중국에 대한 경제 및 안보 지원도 끊었다. 중소 대립이 본격화됐다. 중소 관계가 날로 악화되자,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서로 자신의 세력권에 묶어두려 노력했다. 이로써 김일성은 이들과 협상할 때 유리한 입장에 섰는데, 이는 북한의 전략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 한경험이 된다.
- 1960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흐루쇼프는 김일성에게 마오쩌둥 의 과거 발언을 전했다. 1956년에 마오쩌둥은 소련 대사에게 김일 성이 축출돼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 일을 김일성에게 애기한 것 이다.!5 한편 중국은 같은 해 대약진운동"으로 심각한 기근에 시 달리던 때였는데도 북한에 식량 23만 톤을 제공하고, 1962년에는 북한에 유리하게 국경선을 정하기도 했다. 북한을 달래려던 것이 었다. 이 가운데 북한은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대신 등거리 외교 를 펼쳤다. 1961년 7월, 5일 간격으로 양국과 각각 상호방위조약 을 체결한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중국군 철수로 인한 안보 공백을 다소 메울 수 있었다. 이 시기 북한은 양국에 표면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실제로는 흐 루쇼프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에 대한 불만 탓에 중국에 더 우 호적이었다. 중소 대립으로 중국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더욱 고립될 때, 북한의 지지는 중국에 있어 중요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후로 북한은 중국에 더 기울었다. 북한 은 쿠바 같은 약소 동맹국을 위해 맞서지 못한, 수정주의 국가 소련에 불만을 품었다. 소련이 미국과 대결에서 꼬리를 내린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은 1964년에 흐루쇼프가 실각한 후 신속히 관계를 회복했다. 북한으로선 소련의 군사 원조와 경제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1970년대 후반에 덩샤오핑이 최고지도자가 된 후 중국 경제의 근대화를 우선적 과제로 내세우며 개혁개방을 추진한 덕에 중국 은 과거 혁명적 국가의 길에서 벗어났다. 당시 중국은 세계 냉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한국과 관계 개선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22 하지만 북한 지도자들은 새롭고 실 용적인 중국의 접근 방식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러한 중국의 노 선을 따르면 외부 압력과 간섭에 취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다. 또, 덩샤오핑 노선을 따르면 중국은 북한의 적인 미국과 일본 에 그 운명을 맡기게 될 테고, 그런 상태가 경우에 따라 중국이 북 한의 이익을 침해할 위험도 커질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개혁개방 이 중국이 이전에 실험한 정책보다 더 성공적일 거라는 보장도 없 었다. 김일성은 중국이 성공에 집착하다 보면 북한의 이익과 안보 를 해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북한이 중국을 불신하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1979년 에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다. 중국은 1950~1975년에 20년 이상 베트남에 약 200억 달러 이상의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제공 했고, 1960년대에는 32만 명의 군대를 파병했다. 그런데 베트남이 1978년에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자, 그해 2월에 베트남을 '동 양의 쿠바'라고 부르며 침공한 것이다. 한때 동맹이었던 국가를 침 공하는 것을 본 북한은 중국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한편 미국과 서방의 도움을 받은 중국은 덩샤오핑의 주도로 적극적인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중국은 점차 국제사회로 통합됐다. 정치적으로 공산당 지배 체제는 유지되었으나 전체주의라기보다 는 권위주의적 체제에 가까웠다. 반면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고, 정치적 으로는 최고영도자의 유일 지배 체제하에서 권력세습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중국의 변화가 일정한 성과를 내자, 이를 외면하기는 어려웠던 북한도 1980년대 초에 중국과 비슷하게 개방을 시도했다. 중국을 모방해 1984년 (합작회사운영법 J을 반포한 데 이어서 외환관리법, 자유무역구법 등을 제정했다. 그러나 자력갱생을 근간으로 하는 북한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양국 간의 근 본적 차이가 드러났다. 이런 차이로 인해 중국이 북한의 태도와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는 더 어려워졌다.
- 냉전 이후 북중 사이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중국은 북한과 담을 쌓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진핑 체제 등장 이후에는 다방면의 압박과 제재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했다. 특 히 중국은 북한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북한이 자국의 국익을 침해 할 것으로 판단했다. 게다가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차지하는 위상 과 영향력을 고려해 '국제적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 서 더 이상 '북한 편들기' 식의 대북 정책을 고수하기는 어려웠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중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의 핵개발 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국제사회와 협력했다. 당시 중국이 미국에 제기한 신형 대국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시금석 이 북핵 문제였다. 북한의 긴장 고조 행위를 방치할 경우 새로운 대미 관계 구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2013년 3월 13일, 오바마 대통령은 직접 중국의 태도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만과 불신은 더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 북한의 핵실험 이후 북한에 대해 악화된 중국 여론은 '북한 부 담론' '대북 정책 실패론' '북한 포기론' 등으로 분출됐다. 중국 내 북한 부담론자들은 북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대북 지원은 중국에는 정치적.경제적 부담일 뿐 국익과 국제적 위상에 손 해라고 봤다. 또 북한은 중국의 방어벽이 되어줄 생각이 없으므로 한중 관계를 발전시켜서 북중 관계를 대체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중공 중앙당교"가 발행하는 <학습시보부3며>의 부편집장 덩 위원때 홍은 <파이낸셜 타임스>에 '중국은 북한을 버려야 한다chino should atandon Nortih Karea'란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런 여론이 중 국 내 주류의 사고이거나 지도부의 인식은 아니었지만, 중국 당국 은 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반면 중국 내 한반도 전문가와 역사학자, 군부 내 북한 전문가 는 북한 자산론을 고수했다. 이들은 북한이 중국에 부담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미중 경쟁이 점차 격화되는 상황에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고 믿었다. 북한은 여전히 중국의 전략적 완충지대였다. 이들은 한반도의 현상 유지, 즉 북한이 존속하는 안정을 선호했다. 이들의 관점이 중국의 대북 정책 결정에 상 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북한, 중국, 러시아의 묘한 삼각관계 코로나19가 확산되자 북한은 2020년 1월에 국경을 폐쇄했다. 외부와 접촉을 전면 차단하며 전염병에 대응에 나선 것이다. 하 지만 코로나19도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 의지를 막지 못 했다. 2021~2023년에 북한은 100회 이상 미사일 실험을 했는데 이 중 90회가 2022년에 이뤄졌다. 중국은 대부분 비난하지 않 있고 자제할 것을 주문했을 뿐이다. 자연스레 바이든 정부에서 북미 관계는 위축됐고 미중 관계는 경직됐다. 미중 간 거리가 멀어질수록 중국으로선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다. 중국은 2022년 후반 코로나19 통제를 완화했다. 2023년, 중국은 대북 무역을 늘렸고 UN 제재는 그다지 따르지 않았다. 2023년 9월, UN 전문가의 보고에 따르면 북중 간 철도 운송이 재개되었고, 중국 지역을 통한 북한의 석탄 수출과 사이버 절도 등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북한과 중국은 2024년을 우호의 해로 선언했다. 자오러지했 전 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그해 4월에 평양을 방문해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북중 양국의 친선을 다졌다.
- 하지만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이 강화되면서 북한과 중국 사이에 균열이 심해지고 있다. 북러 접근이 자국의 이익에 반한다 는 중국의 인식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난 뒤 2023년 9월 김정은이 처음 방문한 외국은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이에 화답해 푸틴 러시아 대 통령이 2024년 6월, 24년 만에 북한을 방문했다. 김정은은 러시 아와의 관계가 최고조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김정은은 2024년 7월에 중국 주재 외교관들에게 "중국의 눈치를 보지 말 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 북한 내에서 화교의 이동을 제한하는 등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해 거리를 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푸틴 방북 당시 '포괄적전략동반자조약'을 맺은 후 이뤄진 조치였다.
- 최근에는 김정은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중국 을 겨냥해 '숙적'이라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정은이 이 넣게 반감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북중 관계가 좋지 않던 2015년 연초에 "미국과 일본은 100년 숙적이지만, 중국은 5000년 숙적이다.중국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니 중국에 사소한 양보도 하지 말라"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최근 또다시 중국을 '숙적'으로 규정한 것은 지금의 북중 관계가 약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렇듯 양국의 사이는 쉽게 바뀔 수 있는 관계다.
- 현실주의를 추종하는 북한
지난 75년간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겉으로는 혁명과 전쟁에서 동지로 함께 싸운 혈맹이었지만, 상호 불신과 갈등이 끊이지 않 았다.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의 장례 기간에 중국은 텐안먼 광장에 조기를 게양하지 않았다. 1994년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와는 달랐다. 이는 양국 관계가 질적으로 변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김정은의 3대 세습을 비난하기도 했다. 북중 관계는 특수한 사이가 아니라 전략적 이해에 따라 언 제든지 변할 수 있는 보통의 관계가 된 것이다. 북한은 항상 중국의 행위와 의도를 주의 깊게 살핀다. 외교적 미사여구와 달리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히 려 북한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최대 위협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중 국이 북한에 대한 기본적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벌 어지면 북한은 경제적으로 극히 어려워지고 생존이 위험해질 수 있다어 중국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일은 북한의 숙명적 과제다.
- 북한은 중국이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아이디어에도 결 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과 깊은 경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북한이 중국과 강력한 안보 관계를 및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하면 안된다. 반대로 북한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기에 안보적 의존을 하기가 더 어럽다. 그래서 북한은 강대국들의 전략적 경쟁 속에서 기민하게 움직 이며 거대한 체스판에서 쓸모 있는 말이 되려고 한다. 북한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와 미중 간의 경쟁에 주목 하면서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다. 북한 인사들은 미국 당국자들에게 중국에 대한 방어벽으로 자신들을 이용하는 대신 북한의 보호자가 돼 달라고 말한 적도 있다.
- 러시아 국립해양대학교 연구원 아나스타샤 바라니코바Anasasia Baranikova는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군사력을 증강하는 건 북한을 파괴하려는 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임을 북한도 안다고 지적했다. 과거 북한 지도자들은 주한 미군을 용인하는 발언을 여러 번 했고, 북한이 미국에 중국 견제를 돕겠다고 제안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능력과 외교력이 약했기에 미국은 그 제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휠씬 강해졌고, 그래서 그 제안은 유효하며, 북미가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경제적 관계를 믿으면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북미 관계 가 정상화될 경우 미군은 북한에 어떤 위협도 끼치지 않을 것이고 군사 협력도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여기에 더해 미국 노틸러스연구소 소장 피터 헤이스Peter Hayes는 장차 북한은 중국보다 미국을 더 신뢰할 만한 파트너로 여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 미국이 북한과 공존할 의사를 보이고, 북한 체제와 지도부를 수 용하며, 동북아시아에 관한 미국의 미래 구상에 북한이 참여할 공 간을 제공하겠다고 한다면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다. 북한은 중국과 일본에 대항한 장기적이고 큰 세력 균형 게임에서 자신이 미국에 유용하다고 믿는다. 중국도 이 사실을 안다. 북한은 본능적으로 이웃 국가들이 자신들에게 미치는 심대한 영향력 혹은 미래에 미 칠 영향력을 완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핵화는 북한이 전략적문 제가 해결됐다고 믿을 때 가능하다. 즉,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어 야만 한다. 그래서 북한은 그토록 미국과 단발적인 회담이 아니라 진지한 대화를 원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전략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미국이 북한의 지 정학적 가치를 인식하고 북한을 포함해 동아시아의 전략적 구도를 새로 그린다면, 미국과 북한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할 것이다. 핵심은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분단 체제 유지와 북한 위협의 적 절한 관리였다. 2018년에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할 때만 해도 미국 행정부 관료들, 의회 의원들, 언론, 전문가 그룹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김정은과 세 차례 에 걸쳐 회담하면서 미국 정부는 북한을 더 깊이 이해했고, 그 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했다. 이는 중대한 변화였다. 트럼프 2기 정부는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려 할 것이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 때문이다. 자국의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트럼프 아닌가. 미국이 최대의 라이벌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을 전략적 구도에 끌어들이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한반도에는 엄청난 변화가 닥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웅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 요컨대 NATO는 독일과 싸웠던 서유럽 국가들이 서독과 경제 적으로 공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군사 플랜이었다. 특히 프랑스에 의미가 첫다. 마셜 플랜은 NATO의 설립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워 을 것이다. NATO가 설립되고 한 달 후 서방이 점령한 세 지역을 하나로 통합해 서독이 건국됐다. 이로써 유럽은 서독에 대한 웅징 정치 를 끝내고, 서독의 경제를 부흥시켜 재건된 서유럽에 통합되도록 했다. 미국은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적.물질적 회복만 을 추진한 게 아니라, 기존의 국가 간 대립이라는 갈등을 극복해 유럽 통합의 발판을 만들고, 유럽이 미국과 같은 시장과 잠재력을 갖추도록 했다.20 또 트루먼 정부는 점진적으로 서독의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려 고 했다. 서독의 파워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서유럽의 안보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서독이 서유럽 파워에 통합되는 냐 아니면 스스로 대국으로 성장하느냐였다. 하지만 NATO 결성시에는 프랑스의 동요를 막아야 했기에 미국의 이 목표는 강조되 지 않았다. NATO의 설립으로 안보 불안이 해소되고 마셜 플랜으로 경제 부흥의 기초가 마련되자, 제1차 세계대전 후와 달리 서독과 프랑스가 직접적으로 갈등할 일이 없어졌다. 이제 미소 냉전이 본격화 된 국제정세에 부응해서 서독과 프랑스는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 야만 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적과도 동침을 할수 있는 것이 바로 국제관계의 현실 아니겠는가.
- 제2차 세계대전이 제1차 세계대전과 크게 다른 점은 종전 후 곧바로 냉전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주된 갈등 축이던 독일-프랑스의 대결구도는 뒤로 밀렸다. 서독과 프랑스는 이제 더 상위의 지정학적 구도인 냉전적 대결로 함입하게 된다. 즉,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양국의 적대감이 여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 후에는 냉전이 양국의 적대감마저 삼켜버린 것이다. 비록 프랑스가 독립적 안보정책을 추구했지만 현실적으로 역량 에 한계가 있어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결과 미국이 주도하 는 질서 안에서 서독과 프랑스는 차가운 평화를 이룰 수 있었고 소련이라는 공통의 적을 앞에 두고 대립할 수 없게 됐다. 서독과 프랑스 사이에 오래된 적대감이 점점 사라지고 근원적 전환이 이뤄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 한반도가 한국 주도로 통일돼 북한까지 미국의 영향권 아래 두 는 것이 미국에는 최선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통제할 수 없는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고 그 결과도 불확실하다. 만약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되더라도 통일한국이 미국의 영향권 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면 도리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될 위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미국으로서는 큰 위험 없이 한반도 전 체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묶어 둘 길이 없는 한 현상 유지를 선호 하는 것이 당연하다. 브레진스키도 미국은 분단된 한반도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있었기에 그간 미국 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2017년 신냉전이 시작되고, 중국이 미국의 최대 경쟁국 으로 등장하면서 미국 내에서 동아시아의 전략적 구도를 새롭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고 직접 관여하자 미국의 외교 안보 엘리트들이나 언론, 의회 등 은 이를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깊게 연구한 미국 내 전문 가들의 견해가 확산되면서 미국은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다. 북한과 중국 사이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고 오히려 갈등 적이라는 점을 포착한 미국의 전략가들은 이제 중국 견제에 북한 을 활용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인식 변화는 새로운 행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트럼프의 북한에 대한 태도는 이런 큰 흐름 속에서 파악해야지, 그저 개인적인 수준에서 바라봐 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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