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이유 없는 불안은 자신에게 맞는 어떤 활동을 찾으려는 본능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잘 알 텐데, 고양이는 불안감을 주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고, 거기서 도망쳤다가 쫓아가는 장난을 즐깁니다. 그러나 동물에 비해 본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한 인간의 경우,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힘이 훨씬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불특정한 방식으로 불안해하거나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추상적이고 매우 일반적인,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실존적 불안ㅡ옮긴이)을 겪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대 세계에는 낯설었던, '세계에 대한 불안(Weltangst)' 현상은 기독교와 함께 비로소 세상에 등장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두려워하지만 안심하라. 나는 세상을 극복했느니라(공동번역성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번역했으나 '불안'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이어가기 위해 독일어 원문 그대로 옮김-옮긴이)"라는 <요한복음서>의 한 구절을 근거로 중세 학자들은 이런 감정과 기분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논의를 활발히 펼쳤습니다. 그중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야콥 뵈메는 불안을 일종의 선물이자 삶 자체로 여겼습니다. 불안을 아예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고, 불안을 깊이 경험할수록 이를 극복할 힘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불안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은 자유를 향한 동경이자 갈망이기도 합니다
- 이런 생각은 불안과 자유 사이의 변증법에 중점을 둔 키르케고르의 실존철학으로 이어집니다. 불안의 개념에서 그는 말합니다. "불안은 현기증에 비유할 수 있다. 입을 벌린 심연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심연 못지않게 그의 눈에도 원인이 있다. 아래를 응시하지 않았다면 그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은 (..) 자유가 자신의 가능성을 내려다볼 때 일어나는 현기증이다. (..) 이 현기증 속에서 자유는 힘없이 주저앉는다."
불안은 모든 면에서 신뢰하기 힘든 형편없는 조언자입니다. 게다가 철학보다는 오히려 종교, 나아가 심리학의 범주에 훨씬 울리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불안 장애야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빠르게 퍼지고 있는 마음의 병이죠. 그런 점에서 일찍이, 1844년에 처음으로 불안이란 개념을 다룬 저작을 내놓은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 열정은 어떤 사물이나 인간, 또는 사상에 시간과 힘과 재산을 낭비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위대한 열정은 통제할 수 없는 탓에 일단 휩쓸리면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죠. 열정에 사로잡힌 자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열정은 이성으로 제어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날카로운 이성을 굴복시킵니다. 이로써 열정은 창조력을 낳는 기반이 됩니다
고전주의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가 다녔던 엘리트 사관학교의 교사 야콥 프리드리히 아벨은 <위대한 천재들의 탄생과 특징에 관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열정 없이는 결코 어떤 위대한 일도, 영광스러운 일도 일어난 적 없었고. 위대한 사상이 떠오르거나 위엄 있는 행위가 이루어진 적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도 열정적인 삶을 촉구합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그 어떤 삶보다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너희를 혀로 핥아줄 번갯불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가 접종받아야 할 광기는 어디에 있는가?"
- 죽음에 관해 철학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냈지만 한 가지에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갈망히지도 않고 삶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바라보면서 의연한 지성으로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에 관한 생각을 애써 억누르지 않고 그렇다고 항상 죽음만을 생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삶만이 죽음이 주는 끔찍한 공포를 없애주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이므로 적극적으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남긴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문장입니다 죽음이라는 현상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이는 결국 믿음의 문제이므로 철학적으로는 결론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즉. 한쪽에서는 죽음이 완전한 끝이라고 믿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을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의견이 갈리는데.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죽음은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어서 죽은 자들이 더는 어떤 것도 지각할 수 없는 상태이거나,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영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장소를 옮겨 살아가는 어떤 변화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죽음이 가장 끔찍한 불행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소크라테스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꿈꾸지 않는 잠, 삶의 영원한 휴식이기에 편안한 것이거나, 영혼이 거처를 옮기는 일이라면 오히려 기뻐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망자는 벗들과 온종일 철학에 몰두하며 새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죠.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불멸을 믿는 쪽이었습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개개의 존재가 해체되어 종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죽음은 우리를 직접 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산 자에게는 죽음이 없고.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어느 쪽이든 우리와 상관없다는 이야기지요. 죽음은 모든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느낄 수 없습니다
에피쿠로스는 계속 설명합니다
"선과 악은 모두 감각을 통해 경험된다. 그러나 죽음과 동시에 모든 감각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며 (..) 죽음이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님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 독일 철학자 파울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윤리학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쪽에서 찾아온다. 행복은 늘 우리가 찾지 않았던 곳에 있고, 선물로서 찾아오는 것이지 삶으로부터 빼앗거나 억지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삶의 풍부한 가치들 속에 들어 있다."
- 하이데거는 '초연한 내맡김'을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사물이나 현상을 존재하게 하는 숨은 진리에 눈과 귀를 여는 태도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초연한 내맡김에 관한 해명>에서 '초연한 내맡김'은 우리가 적극적인 의욕(의지)에서 벗어나도 된다고 "본성이 허용할 때 깨어난다"고 말합니다(인간의 의지로 얻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 '허용하다'라고 함-옮긴이). 그는 본성의 "그런 허용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초연한 내맡김에 이르는 최고의 길"이며. 특히 '조용한 대화 과정처럼 그 계기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초연한 내맡김의 길로 인도하는 순간'이 그렇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초연한 내맡김은 '열려 있음'이며 존재와 진리의 넓은 세상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조용한 기다림입니다. 따라서 초연한 내맡김이야말로 철학적 삶의 방식, 즉 철학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생활양식 또는 태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일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면서 당신이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렸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 양심이 던진 질문에 답함으로써 결국 당신은 올바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이후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죠. 프랭클에 따르면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다름 아닌 삶 자체입니다. 다시 프랭클의 말을 소개합니다 <삶의 의미에 관하여>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으로부터 질문받는 존재다. 인간은 삶에 대답하고 삶을 책임져야 하는 자다. 그러나 사람이 내놓는 대답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답일 수밖에 없다."
그는 이어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가 가진 '책임감 안에서 답을 얻고 존재 자체로써 사람은 자신이 던진 질문의 대답을 '완성'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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