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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03 사회학 본능
  2. 2014.10.03 세계사에 숨겨진 정치경제학
  3. 2014.10.02 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

사회학 본능

사회 2014. 10. 3. 11:51

 


사회학 본능

저자
랜들 콜린스 지음
출판사
알마 | 2014-05-0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계 사회학의 명저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책 사회학적 사고의...
가격비교

- 불화와 갈등의 존재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합리성의 힘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자체로는 대단히 합리적인 여러 정책이 입안자들조차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게 될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증명할 수도 있을 것임. 예를 들어 관료제도는 대단히 합리적인 조직으로 설계되었음. 합리적 계획과 회계야말로 조직을 관료적으로 만드는 요소임. 전문가들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계획을 짜고, 모든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처리되도록 규정과 절차가 만들어짐. 그리고 모든 일을 세심하게 설명하기 위해 기록이 작성됨.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서류작업이 때로 일을 지루하게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규정과 규제가 전적으로 부적절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함. 그래서 최대효율을 위해 설계된 관료제가 오히려 비효율로 악명이 높음. 많은 사회학자들이 바로 이점에 초점을 맞췄음. 관료제도란 기록 작성 전문가들이 합리적 계산을 이용하는 조직이라는 이론을 만든 막스 베버 역시 합리성이 서로 반대되는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음을 깨달았음. 기능합리성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냉정하게 계산하는 절차를 따르는 것을 말함.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합리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임. 하지만 기능합리성은 오로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반면 실질합리성은 목적자체를 고려함. 이 점을 상세히 설명한 사람은 1920년에 베버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몇년 디에 글을 내놓은 카를 만하임이었음. 그는 기능적으로 합리적인 절차가 실질적으로 비합리적인 결가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음. 관료제도는 전문가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목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수단에만 관심을 쏟음.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걱정해야 할 일임. 관료제를 상대하는 사람들이 때로 심한 분통을 터뜨리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임. 전문가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함. 관료제를 향해 불평을 해봤자 통하지 않는 것은 바로 관료들이 너무나 쉽사리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구조 때문. 그런데 이것은 관료제도에 관여하는 개인의 잘못이 아님. 조지그이 합리성 자체로 인해 관료들이 조직의 전체적인 목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임.
- 전체적으로 봤을 때 고대와 중세에 경제적 생산성을 높일 자원이 부족했던 것은 아님. 또한 중세 중국이나 이탈리아 또는 고대 그리스의 상인들이 상대에 대한 의심을 조금 풀고 기꺼이 장기적인 계약을 맺으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만큼 합리성이 떨어졌다고 말할수도 없음.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들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합리적이었음. 그들은 단기적 수지타산뿐 아니라 장기적인 득실도 고려했음. 만약 현대 미국인이 어느날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 위의 내용을 읊어댄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상대를 의심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훨씬 더 많은 돈을 잃게 될 것이라고 대답할 것임. 그리고 이것이 당시에는 옳은 생각이었음. 중요한 것은 현대의 계약사회가 도래한 방식이 정확히 뒤르켐의 예언과 일치했다는 점. 현대사회가 가능해지는 데는 신뢰라는 새로운 유대관계가 필요했음. 자본주의의 등장은 확실히 의심이 가득했던 중세의 거래방식으로부터 변화를 의미했음. 사업가들은 많은 거래를 통해 느리지만 꾸준하게 적은 이윤을 거듭 축적하는 방식을 강조하기 시작. 이는 계약조건을 지키겠다는 뜻이었음. 중세상인들은 수상쩍은 흥정과 단발성 거래 때신 장기계약이 등장. 대량생산이 실용성을 띠게 된 것도 바로 이 덕분이었음. 물건을 팔 길이 없다면 기계를 돌려서 대량의 물건을 만들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산업기술 덕분에 현대경제가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이런 거래방식의 변화덕분에 산업혁명이라는 기술발전이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음.
- 마르크스의 계급갈등이론도 어떤 의미에서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가장 관심을 쏟는 문제는 민중, 특히 노동계급이 효과적으로 힘을 쟁취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것. 대개 이 문제는 계급의식을 만들어내는 문제, 즉 각각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인식하게 만드는 문제로 묘사됨. 하지만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음. 사람들이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두 집단에 맞춰 자동적으로 유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순전히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으로 행동함. 예를 들어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기업들이 결코 동맹이 되지 않는 것처럼 노동자들도 같은 직장이나 승진을 놓고 경쟁할 때는 하나로 힘을 합치지 못함
- 사회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를 좋아하는 태도와 싫어하는 태도가 아님. 이 두가지 외에 세번째 선택지가 존재. 뒤르켐은 종교에 관한 뻔하지 않은 이론을 만들어 냈는데, 거기서 종교의 핵심요소는 믿음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의례임. 종교는 사회적 유대감의 열쇠이며 종교적 믿음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은 아니라 사회집단의 상징으로서 중요함. 따라서 종교는 비합리적인 현상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최고의 사례로서 사회학적 의미를 가짐
-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다음 두가지임. 모든 신도가 공유하는 믿음과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의례. 종교는 기본적으로 세상이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두가지로 나뉘어 있다고 믿음. 신성한 것은 정령, 눈에 보이지 않는 신, 특정한 동물이나 나무, 제단, 십자가, 경전, 믿음에 입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그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등 다양함. 신성한 것의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위험한 동시에 최고로 중요하다는 점. 우리가 그것에 접근할 때는 진지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며 정해진 준비과정을 거쳐야 함. 반면, 세속적인 것은 신성한 것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함. 우리가 기분내키는 대로 자신이 보기에 유용하거나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평범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 모든 것임. 이처럼 세상을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양분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 믿음. 이와 함께 종교의 기본행동, 즉 의례가 이루어진다. 의례는 평범한 행동과는 다름. 거리를 걷거나 일을 하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등 평범하고 실용적 행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음. 일단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담녀 그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든 달라질 것이 없음. 반면 의례는 아주 엄격하게 정해진 행동임. 의례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임. 기도, 찬송가, 원시적 희생제, 춤, 행렬, 우상 앞에 무릎 꿇기, 성호 긋기 등은 반드시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함. 의례는 실용적인 행동과 달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님. 따라서 목적을 이룰수만 있다면 그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든 달라질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음. 의례의 형식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 의례는 올바르게 수행되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방식이 틀렸을 때는 아무런 가치도 없음. 이처럼 종교를 구성하는 믿음과 의례는 서로 연관되어 있음. 의례는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믿는 것 앞에서 반드시 행해야 하는 절차임. 이 두가지와 정반대인 또 다른 두가지도 짝을 이룸. 의례가 아닌 평범한 행동은 세속적 환경에서 이뤄지는 우리의 행위임. 앞으로 보겠지만 뒤르켐은 믿음보다 의례를 우선시. 어떤 의미에서 의례의 올바른 수행이 신성한 것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다는 것.
- 사회는 우리 바깥에도 있고 우리 의식의 핵심에도 있음. 종교의 상징체계가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 종교의 상징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을 표현함. 그래서 종교적 상징체계에는 사회적 의무뿐 아니라 인간의 정체감에 대한 관념들이 통합되어 있으며, 우주를 다스리는 신이나 영적인 존재뿐 아니라 영혼이라는 관념도 존재. 종교가 사회의 중요한 현실적 측면들을 상징화하기 때문에 그 상징체계 속에 항상 사회적 갈등의 여지를 마련해둘 수밖에 없었음. 사회는 결코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는 법이 없으므로 종교는 항상 경쟁관계인 다른 신들, 이교도, 악령, 악마 등의 존재를 말할 수 밖에 없음. 종교의 상징체계는 사회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음.
- 정치와 종교는 뿌리가 같음. 특히 종교지도자나 정치웅변가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에서 커다란 개인적 에너지를 얻는 경향이 있음. 군중의 관심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고 청중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지도자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득 받아들일 수 있음. 집단이 충분히 흥분하면 지도자도 영감을 얻어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음. 그래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유명인사, 영웅은 물로 심지어 신성한 인물까지 될 수 있음. 이런 변화를 일궈내는 에너지의 원천은 지도자가 아님. 집단의 에너지가 군중 속을 돌아다니며 더욱 힘을 얻은 뒤, 군중을 대변하며 군중에게 말을 거는 지도자의 손에 의해 한곳으로 집중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집단에너지가 흐르는 채널이며, 바로 그 점때문에 군중속의 개인들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듯함. 하지만 지도자가 지닌 힘의 비결은 바로 집단 그 자체임. 청중이 예언자를 만들고 사회운동이 지도자를 만듬
- 수렵채집부족에서부터 위대한 세계제국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회들을 돌아보면 각각의 사회에서 잉태된 신들의 유형이 사회의 크기나 구조에 상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신은 일반적인 의미뿐 아니라 세부적인 면에서도 사회를 대변함. 각각의 사회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유형의 신이 있음. 그렇다면 역사적 의문이 하나 생김. 종교와 사회 중 어느쪽이 먼저 변하는 걸까? 종교가 사회변화를 야기하는걸까, 아니면 그 반대인걸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모든 사회들의 경우 어느쪽이 답이었는지 증명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음. 하지만 역사속의 특정한 변화에 대해 주장을 내놓은 사람은 있었음. 뒤르켐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베버는 현대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등장은 종교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음. 초기 저작에서 그는 특히 개신교의 특정종파(칼뱅주의)의 등장을 지적. 그리고 다른 글에서는 현대사회의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이 모두 기독교와 고대 유재교의 특징에서 자라 나왔다고 설명. 다른 사회학자들은 이 가설의 인과관계를 뒤집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가 지배계급의 권력과 그 기반이 된 재산권을 강화해주는 사회구조속에서 자라나온 이념이라고 주장.
- 현대의 자아는 때에 따라 아주 복잡해질 수 있음. 고프먼은 층마다 그 안에 다양한 층들, 즉 사람들이 공유하는 다양한 형태의 겉치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겉치장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노력이 필요. 고프먼은 후기에 이르러 사용한 은유법을 통해 이것을 일련의 사진액자와 같다고 비유. 그의 비유에 따르면 이미 존재하는 액자들 주위에 언제나 또다른 액자를 배치하는 것이 가능. 그렇다면 자연스레 생기는 의문이 있음. 이 모든 층들 뒤에 최종적인 자아가 존재하는가? 만약 모든 종류의 겉치장을 계속 벗겨낸다면 개인의 의식 중에서도 고갱이, 모든 꼭두각시 인형들을 조종하는 인형사에게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임. 하지만 고프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그가 묘사한 사회적 자아들 중 어느것도 협력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음. 사실 우리 각자가 내면에 이 모든 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한 사회 덕분. 우리의 내면이 이토록 복잡성을 띠게 된 것은 우리가 다양한 집단상황들 속에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자, 각각의 상황들마다 이상적 자라를 제시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기 때문. 간단히 말해 우리는 결코 핵심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내면의 층들을 무한히 늘려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임. 이 층들은 밖에서부터 덧붙여지며 우리 의식의 내면에 반영됨. 사람이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하나씩 늘아날 때마다 자아도 한층 더 생겨남. 전(pre)사회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 고독한 개인의 자아는 오로지 복잡한 형태의 사회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이 결론이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종교가 사회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 개인주의는 현저히 현대적인 특징을 지닌 종교의 새로운 형태임을 이미 보았으니까 말이다. 다른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생활이라는 무대 뒤를 우리에게 허락해주고, 타인들과 대화할 때 자신의 행동을 이상화할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현대사회의 구조다. 개인이 내면에 자기만의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관념은 이처럼 현저히 현대적인 특징을 지닌 상호작용 패턴에서 나옴. 사회적 의례를 통해 창조된 성물이 그렇듯이 현대적 자아도 일종의 신화다. 겉으로는 자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척하지만 실제는 그런것과 거리가 멀다. 이것 역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신화적 상징 밑에 사회라는 똑같은 현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주관적인 자아라는 관념으로 스스로를 상징화하는 것은, 복잡한 분업이 이뤄지는 가운데도 우리가 여전히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 교회처럼 대단히 전통적인 조직은 이제 경제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조직이 자기만의 의례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 예를 들어 장교들은 사관생도 시절의 의례들과 군대의전에서 커다란 의욕을 얻음. 해병대 같은 조직들은 자신들의 영웅적 이미지를 크게 강조하며 해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구성원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남자다움을 시험하는 다양한 의례를 끊임없이 시행함. 오늘날 높은 지위를 인정받는 직업도 초임자들을 사회화할 때 의례를 많이 이용. 예를 들어 의대생들은 사실 의대에서 실용적 의학을 많이 배우지 않음. 대신에 자신을 평범한 사람과 분리해 생각하고, 의사라는 지위의 특수함과 의사다운 행동을 받아들이게 하는 긴 통과의례를 거침. 이런 자체교육 덕분에 의사들은 일과 자신을 강하게 동일시하며, 의사들에 대한 외적 통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됨
- 평범하 직장에서도 의례는 조직이 계속 작동하도록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 앞에서 보았듯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임금체계에 그리 면밀히 통제당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을 할 때 자신의 능력을 어느정도까지 발휘하는 경향을 보임. 이는 주로 그들이 조직내의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이 맡은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만드는 일련의 작지만 의미심장한 사회적 의례에 참여하기 때문. 고프먼이 증명했듯이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소한 의례들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보이며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수용하게 만듬
-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임. 남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넣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를 위해 그들은 갖가지 미묘하고 명민한 방식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함. 가장 효과적인 통제방법은 간접적으로 작용하는 방식임. 순전히 힘으로 직접 냉혹하게 통제하는 것이 가장 뻔한 형태의 권력이기는 해도 일을 해내는 데는 가장 효과가 없음. 돈의 힘 또한 실제보다 더 크게 보임. 의례의 힘이 비교적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은 은연중에 작용하기 때문이지만 바로 이런 성질 때문에 이 힘은 조종하기가 어려움. 의례를 이용한다는 것은 대개 조직구성원들에게서 전반적인 복종을 얻어내는 대가로 권력을 나누어준다는 뜻.
- 권력은 때로 모든 도전을 깨부수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작용하기도 함. 정치적 논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음. 반대편의 주장을 탈선시키고 싶다면 그들이 핵심적 주장을 내놓기 전에 말을 끊고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를 내려보라고 하면 됨. 그러면 이야기가 쉽사리 곁가지로 빠져서 핵심적이 주장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게 됨. 어떤 것의 의미를 놓고 벌이는 모든 논쟁은 이렇게 질문의 무한반복으로 빠질 잠재성이 있음. 이와 관련된 전술로 반대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이 있음. 반대편이 자신의 제안이나 불만사항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면 나는 앞에 나서서 발언하는 사람의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면 됨. 상대방이 완전한 발언권을 지닐 자격이 있는지,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동기가 순수한지 등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 최소만족과 문제해결이라는 전략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 지금과 같은 여건에서 절대적인 효율성이라는 순저히 허구적인 수준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은 더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덜 합리적인 방법임. 조직의 복잡성은 인간의 정보처리능력을 뛰어넘음. 인간이 지닌 인지능력의 한계 때문에 사회는 기계처럼 움직일 수 없음.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에 순응해서 좀더 방어적 전략을 추구해야 함. 방어적 전략이란 대부분의 일을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대신 많은 것들이 부분적으로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는 전략을 말함
-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불확실성에 대해 자기만의 독특한 접근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남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 전문가가 실제로는 불확실성에 잘 대처하는 능력이 없다 해도 그들은 상황에 대한 해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음. 그리고 이처럼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분위기가 그들을 더욱 존중하는 분위기로 이어져 그들이 은영중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임. 전문가들 중에서 특히 많은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 따지고 보면 각자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탈이 난 부분을 고치는 문제에서 의사보다는 자동차정비공이 훨씬 더 믿을 만한 솜씨를 발휘함. 하지만 바로 이 이유때문에 사람들은 정비공의 기술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음. 내일 아침이면 차가 반드시 수리되어 나올 것이라고 너무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 만약 차가 수리되지 않으면 다른 정비공을 찾아가면 그만임. 하지만 의사는 진단과 치료가 훨씬 더 어려운 질병을 다룸. 의사가 특히 정해진 날짜까지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임. 의학은 자동차정비보다 더 신비로운 분야라는 것이 의사들에게 더 많은 특권과 힘을 부여하는 중요한 원인임. 권력을 잡는 기술 중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을 최대한 신비하고 인상적으로 보이게 포장하는 것. 의사들은 자신이 무대 뒤에서 하는 일과 자신에게 치료를 받는 대중 사이에 단단한 장막을 친다. 의학지식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데는 의사들이 대중에게 속 시원히 말해주기를 꺼린다는 점과 전문용어가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
- 처벌의례는 지배구조를 유지해준다는 점에서 사회를 하나로 묶어줌. 처벌의례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의례를 통해 정치인과 경찰이 감정적 지지를 얻는다는 점. 특히 무엇보다도 특권계층의 유대감을 강화해 그들이 자신의 이상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줌. 범죄에 대한 분노는 사회적 위계구조를 정당화해줌. 범죄의 처벌이라는 의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는 계층화된 사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범죄는 사회구조 속에 내장되어 있다. 지배집단이 통제를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거기에는 상응하는 범죄가 따라온다. 집단들은 지배권을 놓고 계속 투쟁을 벌이는 중이므로 일부 집단이 다른 집단의 기준을 어길 수 밖에 없음. 또한 어떤 집단에서든 가장 통합되지 않은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믿는 도덕을 신경쓰지 않고 개인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일도 일어난다. 따라서 사회의 많은 집단이 불쾌하게 여기는 행동들이 부족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지배집단도 이런 행동들을 어느정도는 환영하는 입장이다. 범죄를 통해 공동체의 도덕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처벌이라는 예식을 치를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사회에 자기들만의 특별한 범죄가 있음.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왠지 범죄와 처벌이 발생하도록 법이 제정된다는 점. 부족사회에는 금기가 있어서 금기를 어긴 사람들은 지독한 처벌을 받음. 도덕을 무섭게 강조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마녀의 주술행위라는 범죄가 있다고 믿었음. 자본주의 사회에는 재산과 관련된 범죄행위들이 한없이 규정되어 있음. 사회주의 사회에도 집단의 활동에 전심전력으로 참여하지 않는 개인의 범죄와 국가에 대한 불충이라는 정치적인 범죄 등 나름의 범죄가 있음. 의례를 기준으로 보면 모든 사회가 자기나름의 범죄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겨우 몇세대 전의 우리 사회에서 사촌간 결혼은 근친상간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촌수가 더 먼 사람과 결혼해야 했음. 반면 많은 부족사회에서는 기회만 된다면 사촌들의 결혼을 당연히 여김. 이는 가문들 사이에 정기적으로 동맹을 맺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사촌들(특히 고종사촌)간의 지속적인 결혼은 세대가 거듭되어도 가문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함. 참고로 이런 사례들은 사람들이 근친교배로 인한 유전적 결함을 걱정한 탓에 근친상간 금기가 생겨난 것이 아님을 증명해줌. 사촌간 결혼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사회는 확실히 근친교배를 금하는 방침과 반대로 가고 있기 대문. 게다가 바로 이런 사회들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근친상간 금지규칙을 갖고 있음. 우리가 보기에는 생물학적으로 그리 가까운 친척이 아닌데도 순전히 혈통을 문제삼아서 많은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근친상간 금기가 생겨난 이유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성적 소유권 교환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음. 우리 사회에서 가문들 사이의 대대적인 동맹은 이미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근친상간 금기도 최소한의 수준으로 줄어들었음. 하지만 자녀들에게 가정을 떠나 넓은 결혼시장에서 성적 파트너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규칙은 아직 남아 있음. 그렇다면 근친상간 금기는 세대적 소유권 체제의 부정적 규칙인 셈. 이 규칙은 자녀들이 서로에게 해서는 안되는 행동뿐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정해놓았음. 세대적 소유권의 긍정적 규칙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음. 우선 부모는 자녀에 대해 어느정도 물리적 소유권을 갖고 있음. 부모는 자녀를 집안에만 있게 할 수도 있고, 학교에 보낼수도 있으며 그 밖에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할 수 있음. 부모는 또한 여러 면에서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할 수 있음. 부모는 또한 여러 면에서 자녀의 행동에 대한 지시를 내릴 권리도 갖고 있음. 옷차림, 종교적 교육, 사귀어야 할 상대 등 많은 것들을 정해줄 수 있따는 뜻. 요즘은 부모들이 이런 권리를 딱히 강력하게 행사하지는 않음. 아버지가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식을 처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까지 내릴 수 있었던 로마시대의 가족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 전체적으로 최근 추세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간섭이 줄어드는 쪽으로 가고 있음. 세대적 소유권의 중요한 측면, 즉 자녀의 결혼상대를 정해줄 권리를 부모가 잃어버린 것이 여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 자녀의 결혼에 대한 통제권은 세대적 소유권을 직계자녀 너머까지 확장시켜서 여러세대에 걸친 후손들의 혈통까지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음. 하지만 혈통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세대적 소유권도 움츠러들어 지금은 핵가족 내에서 아이들이 어릴때만 적용되는 수준이 되었음. 세대적 소유권에는 경제적 측면도 있음. 법적으로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자녀의 소득은 부모의 재산임. 하지만 이것 역시 오늘날에는 그리 강력하지 않음. 오히려 자녀들이 부모의 소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음
- 어떤 대화는 짧고 실무적이어서 업무가 끝나면 함께 끝남. 사교적 분위기를 내려고 애쓰지만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 경우도 있음. 번갈아가며 이뤄지는 대화 중의 침묵과 재촉이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임. 대화에 참가한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기 때문. 어색한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상대에게 할 말을 쉽게 찾아낼 수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화 참가자 중 한 사람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뭔가가 표면아래 잠복해 있기 때문이기도 함. 발언권을 놓고 자주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대화 참가자들이 같은 것에 주의를 집중할 수 없어서 주구의 지위가 더 높고 누가 지배자인지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음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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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세계사에 숨겨진 정치경제학

저자
Anthony Choi 지음
출판사
지식과감성 | 2014-04-17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세계사를 통해 정치 경제학을 공부한다?세계사는 그저 역사공부의 ...
가격비교

- 만약 독일제국이 대영제국에 칼을 겨누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카이저 개인에게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빅토리아 여왕이었음. 빅토리아 여왕의 전쟁억지력이 어느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시험해 볼 기회는 없었음. 그렇지만 영국뿐 아니라 유럽의 할머니이자 독일, 러시아 황제들의 친척어른인 여왕의 서거는 19세기 후반기 들어 유럽의 숨은 갈등들을 근근이 봉합하고 있던 세력균형의 안전장치 하나가 떨어져 나간 상징적 사건이었음. 그나마 폭력성의 아이들을 훈계할 가능성이 있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사라진 셈.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가 저물면서 평화의 시대도 함께 조금씩 바래져가고 있었음. 그것은 로마의 마지막 5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과도 비견될 수 있었음. 이제 깊숭기 감추어두었던 민족간 갈등들이 평화의 위장막을 비집고 나와 세상을 활보하며 왕가와 제국들을 하나둘씩 무너뜨릴 것이다. 팍스 로마나가 영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아쉽게도 빅토리아 시대 또한 영원할 수 없었음. 1901년 당시는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은 대영제국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였음.
- 1차대전중 연합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질서를 통째로 바꾸어놓음. 1차대전은 독일의 거침없는 진격이 멈추고 양쪽이 참호를 파면서 서부전선이 고착화되는 순간 무승부로 끝이 났어야 했음. 양쪽은 조금도 전진할 수 없었고 초반에 퍼부은 자원도 이미 고갈직전이었음. 영국과 미국은 독일을 협상 테이블로 초대하여 독일의 체면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양보를 이끌어낼 수도 있었음. 그랬다면 최소 베르사유 조약과 같은 터무니 없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음. 하지만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금융가문 모건가가 미국의 전통인 비개입주의를 물리치고 영국에 물자를 제공하고 채권을 발행하는 순간 전쟁은 연장전에 돌입. 미국이 퍼부은 자원은 결국엔 독일 병정들의 전토력을 압도했음. 그로 인해 이 전쟁은 모두가 패배한 전쟁이 되고 말았음. 독일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굴욕의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질질 끌려 나옴. 여기에 20년대 들어 유례없는 마르크화의 대폭락까지 경험해야 했음. 프랑스는 국토가 황폐화되었을 뿐 아니라 영국에 빚을 졌음. 또한 그런 영국은 미국에 막대한 빚을 졌음. 이 문제의 부채는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의 원흉이 되었음. 게다가 세계무역을 지탱했던 파운드화의 위상과 금본위제에 금이 가면서 대영제국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자유주의 세계경제질서가 흔들리기 시작. 20세기 세계화에 닥친 첫 위기였음. 위기는 미국이 새로운 세계의 최종대부자 역할을 떠맡아 독일을 포함해 유럽에 자금을 공급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됨. 이는 미국의 선의라기보다 궁여지책이었음. 그러지 않고서는 거덜난 유럽으로부터 미국이 빚을 회수할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 미국의 금융가들이 발빠른 장기채권 회수플랜을 마련한 덕에 독일은 인플레이션에서 회복되어 안정을 되찾아갔고 20년대 또 다시 평화가 도래
- 1차대전의 진정한 비극은 총과 대포, 가공할 만한 최신 살상무기들이 아닌 트렌치에서 피어올랐음. 서부전선에서 양쪽이 약송이나 한듯이 참호를 파지 않았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전쟁은 빠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음. 독일군과 프랑스-벨기에-영국원정대 연합군이 격돌한 서부전선은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곳이나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까지 퍼진 세계 분쟁의 모든 매듭을 풀 수 있는 곳이었음. 마른 전투(1914), 베르됭 전투(1916), 솜 전투(1916), 세번의 이프르 전투 등 서부전선의 유명한 전투들 중 1차 마른전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연합국의 무능과 독단을 보여주는 경연장이었음. 모두 말그대로 엄청난 소모전이었는데 19세기식 낭만에 젖어 있던 연합국 장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군이 참호를 제대로 공략하는 데 성공하지 못함. 모든 것이 땅위에서 결정났던 나폴레옹 시대였다면 서부전선의 전쟁은 마른 전투에서 끝이 났어야 했음. 엄청난 사상자를 내는 불꽃튀는 대규모 전투가 이렇게 긴 시간간격을 두고 해를 넘기며 계속되었던 것은 참호가 상대진영 모두에게 수비를 위해 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 게다가 참호는 차츰 견고함을 더해 정복되지 않는 난공불락의 지하요새가 되어감. 진화된 참호는 하나의 방어 시스템이었음.
-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100년 전쟁에서의 실패로 영국은 대륙의 속국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접고 그때 이래 대륙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 영국 외교의 기본목표의 하나" 라고 설명. 그러나 토인비의 말대로 그리고 영국의 바람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표였을 뿐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음. 영국은 대륙 국가간의 갈등과 동맹관계에 눈과 귀를 모두 닫은 채 강건너 불구경하듯 관망할 수는 없는 처지였음. 사실 토인비의 말은 잉글랜드의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가 그녀의 구혼자들을 다룬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었음. 숱한 스캔들에 휘말렸던 여왕이 끝내 결혼을 하지 않았던 데에 대해서는 수많은 추측과 설이 난무함. 엘리자베스는 독신주의자나 현대적 관점에서의 페미니스트는 결코 아니었음. 그렇지만 엘리자베스가 처녀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이유는 충분했음. 그녀는 스페인의 왕(펠리페 2세), 프랑스의 황태자, 신성로마제국의 대공 등 대륙의 강대국들이 던지는 구애에 질질 시간을 끌다가 끝내는 모두 교묘히 물리쳤음. 그녀가 경쟁국의 왕비가 된다는 것은 영국이 가지는 중립적인 특권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음. 엘리자베스가 원한 것은 잠재적인 적인 프랑스와 스페인이 서로 팽팽한 대립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양국이 자신에게 계속 구애의 손길을 뻗치게 만드는 것이었음. 당시 영국은 스페인과 프랑스에 비해 약소국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미혼의 여왕이란 지위를 이용하여 지정학적인 캐스팅보트를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음. 엘리자베스는 한 여자이기 전에 잉글랜드를 사랑한 진정한 군주였음. 이처럼 영국이 진정 원하는 것은 대륙의 문제에 휘말리지 않는 고립이 아니라 대륙의 어느 나라도 영국을 넘보는 일이 없게 하게끔 하는 것이었음. 다른 말로 잉글랜드의 확고한 주권이었음.
- 흔히 알려진 사실은 악명높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전쟁배상금과 해외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중앙은행이 마르크화를 정신없이 찍어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는 것.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진실을 심각하게 은폐할 소지가 있음. 두가지 측면에서 이는 근거가 빈약한 주장임. 독일의 전쟁배상금은 금에 연동되어 있었고, 그것이 아니면 파운드나 달러로 지급해야 했음. 외채의 경우에도 마르크화로 표시된 채권이 아닌 이상 동일한 원리가 적용됨. 마르크화를 마구 찍어내 이를 달러나 파운드로 바꿔서 갚는다는 발상 또한 설득력이 없음. 마르크화를 찍어낼수록 달러대비 마르크화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는데, 이는 남은 외화표시 부채를 갚기 위해 더 많은 마르크를 찍어야 함을 의미했음.
- 마르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데 가속도를 덧붙인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는 것인데, 공매도를 이용한 환투기가 존재했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함. 화폐전쟁의 쏭훙빙은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반 국제자본 기조에 입각하여 이를 유대인 가문의 국제금융세력의 소행이라고 결론지음. 92년 조지 소로스 일당이 영국의 파운드화를 공격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 하지만 20년대 초의 초인플레이션이나 92년의 파운드화 붕괴와 같이 금융사에 있어 예외적인 사건은 그 인과관계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음. 92년 파운드화가 붕괴된 근본원인은 엄밀히 말해 조지 소로스가 파운드를 잔인할 정도로 매도해서가 아님. 물론 소로스가 그 시기를 앞당기기는 했다. 파운드화가 그렇게 급작스레 무너진 것은 준고정환율제도인 ERM(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에 가입한 영국이 자국의 경제상황과 맞지도 않는 환율을 끝까지 고수하려 고집을 부렸기 때문. 조지소로스는 ERM때문에 그 가치가 묶인 파운드가 통일 독일의 마르크화에 비해 고평가되었다고 판단, 파운드화에 대한 전쟁을 선포. 영국 중앙은행이 그를, 광범위하게 이야기하면 시장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 실수. 결국 투기세력에게 틈을 보이고 엄청난 환차익 기회를 제공한 것은 런던이었음. 그 일로 상처를 입은 영국은 이후로 고정환율에 대한 환상을 모두 집어던지고 파운드화가 대륙의 화폐에 긴밀히 엮이는 것을 꺼리게 됨. 20년대 초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도 마찬가지임. 파운드화-조지소로스의 관계처럼 원인은 마르크화의 균열이었고 그 결과가 대규모 환투기라는 시각으로 보아야 함. 그래야 사건의 진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 중요한 것은 어느 시점이 되자 일시에 윤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점. 마르크 지폐를 쏟아내는 윤전기의 열기는 무기력한 공화국이 마르크의 가치를 지킬 의사가 없음을 시장에 분명히 주입시켰음. 그러자 유대금융가문을 포함한 투기세력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마르크화를 단숨에 넝마로 만들어버림. 그에 따라 독일은 초유의 혼란에 빠졌음. 이 때문에 유대인 투기세력에게 초인플레이션의 주범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짐. 하지만 이는 후에 나치가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함. 사실 독일의 혼란 속에서 유대인들이 얼마큼 이득을 보았는지, 또한 그 비중이 과연 유대인을 투기꾼으로 매도할 만큼 컸는지에 대한 신뢰할만한 통계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음. 게다가 로스차일드 가문등이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지도 않음. 투기세력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공화국의 인플레를 단순히 화폐적으로 측면으로만 볼 수밖에 없음. 인플레이션의 속도를 기하급수적으로 만든 것은 투기세력이었지만 핵심은 애초에 누가 무슨 목적으로 투기세력의 먹잇감으로 마르크화를 던져주었냐는 점이다. 그 시작은 지극히 정치적 결정에서 비롯되었음. 상식밖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초 인플레이션이란 혼란을 조장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자신이었고, 심지어 그 혼란을 절실히 필요로 했음. 또한 빚은 잔뜩 떠안은 패전국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승전국들의 이해관계와도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있었음. 마르크화의 대폭락은 바이마르 정부보다도 차라리 승전국들에게 더욱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음.
- 실제 20년대 초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정책가들은 독일의 재정 및 통화정책을 안정화시키겠다는 의지가 거의 없었음. 통화가치가 급락하면 연합국들이 배상금 문제를 다시 검토하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음. 그러자 독일 지도부는 당장 마르크화를 찍어내는 것 외에는 부채를 갚을 길이 요원하다는 것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보여줌. 그것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대외적인 메시지였음. 게다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잡음과 독일인들의 분조를 다시 베르사유로 향하게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음. 사실상 부채에 대한 우회적인 디폴트에 다름없었던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해 국제은행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음. 경악을 넘어 절망을 맛본 이들은 독일의 불특정 다수 유산계급이었음. 배상금은 어쩌면 이 역사적 사건의 명목적 구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름 내막을 살피기 위해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았는가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음.
- 29년 주식시장의 붕괴와 불황의 엄습은 근본적으로 수요가 따라갈 수 없었던 과잉공급의 문제였음. 또한 수요는 단순히 인구의 문제가 아니라 구매력의 문제였음. 이는 당연하게도 1차대전의 개입에 따른 결과였음. 전시지원에 따른 미국경제의 호황은 그 자체로 지속불가능한 버블이었음. 버블을 감추고 은폐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버블이 꺼질때의 파괴력은 더욱 커지게 마련. 미국은 전쟁후 당연히 겪었어야 할 경기하락을 빗겨갔픔. 대신 미국정부는 호황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표를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계층을 만족시키는 손쉬운 길을 택함. 온 국민이 빚을 내어 참여하는 저금리 파티를 연 것. 마크 트웨인이 표현한 도금시대가 막바지로 치달으려 감미로운 재즈 선율의 리듬에 중독된 사람들은 할부로 포드 자동차를 사고, 레버리지를 극대화시켜 주식을 사모음
- 고전경제학이 가지는 공통적인 약점은 이론을 떠받치는 기본 가정과 실제 세계 사이에서 결코 줄어들 수 없는 괴리에 있음. 그것은 다양성과 역동성이 공존하는 경험적 실증을 무시한채로 상식을 불허한 몇가지 가정위에 세워진 하나의 법칙에 세상을 끼워 맞추려는 놀랍도록 무모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음.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실제로는 그런 시장과 인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식인고기가 우글대는 아마존강처럼 완전 경쟁적 시장위에다 이익과 이기심 외의 감정은 모조리 배제된 합리적 인간을 뻣뻣하게 세워 두었음. 리카도가 그의 비교우위론을 펼쳐보인 세계는 영국과 포르투갈만이 존재했으며 그의 머릿속에는 착취의 대상이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식민지의 존재는 까맣게 잊힌 듯했음. 이런 식의 가정은 애덤스미스가 살았던 시절에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었고 제도가 점차 다변화되고 세계의 경제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더욱 쓸모없는 것이 되었음. 데이비드 흄 또한 고전경제학의 이같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함. 흄의 이론은 국민국가의 등장이전 시대에서나 일부 존재할법한 완전무결한 자유무역을 가정.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은 서로가 서로를 보장했음. 이들은 전 세계에 촉수를 뻗은 대영제국의 세계화를 떠받치기 위해 상호 보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부품들이었음. 한 쪽이 녹이 슬면 다른 한쪽도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음. 자유무역은 통화가치를 안정시키는 금본위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고, 금본위제 또한 서로 간의 장벽 없는 자유무역이 전제되어야 국제수지의 영구한 불균형 없는 자유무역이 전제되어야 국제수지의 영구한 불균형 없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음. 실제 자유무역과 금본위제의 기막힌 결합은 대영제국의 번영을 이끌며 각각 무역과 통화에 관한 확고부동한 신성부락침의 원리로 잡리잡음. 그리고 금본위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균형예산을 지향해야 했음. 즉 전쟁을 제외한 어떤 상황에서도 금 보유량이 증가하지 않는 한 정부는 개입을 통해 통화량을 늘리려는 유혹에 넘어가선 안되었음. 하지만 데이비드 흄이 태어난지도 200년이 훨씬 지난 시점의 복잡해진 정치, 경제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음. 금본위제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전무하거나 미미한 시절 때때로 대규모 자금을 빌려야 했던 정부와 그런 정부에 자금을 제공하고 채권을 보유한 금융가문과 부르주아 계층 양쪽에게 이득인 제도였음. 그러나 금본위제로 인해 소외되고 심지어 잠재적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채무자와 일반 임금 근로자 계층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었음.
- 미국 중동부의 유수 대학들의 경제학 강의실을 점령하고 있는 그들은 "특정한 조건이 만족된다면"이란 말로 신학기의 첫 강의를 시작하지만 그 특정한 조건이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러디어으 키플링은 "네가 평생을 바친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낡은 연장을 집어들고 다시 세우려는 의지가 있다면 너는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김. 수년간 쌓아올린 자신만의 경제논리에 매달리는 경제학자들은 키플링이 말한 성숙함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 그것은 물론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함
-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금본위제의 실패에 따른 폐혜를 지적.
"금본위제의 최종적인 실패는 바로 시장경제의 최종적인 붕괴가 되어 버림. 자급자족의 고립주의를 내세운 정치세력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곳곳에서 터져나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앞세워 사회를 전혀 새로운 형태로 주조해 나갔으며 당대의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러한 사태 앞에 그저 멍하니 넋을 두고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적 측면에서 분석한 것으로 본질을 간과한 논리적 비약이 될 수도 있음. 실제 각 나라가 경쟁적으로 통화가치를 평가절한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싹을 틔우고 전체주의의 등장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는 없었음. 금본위제의 폐지가 히틀러에게 예수와 같은 기적의 힘을 쥐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영웅으로 추앙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었음. 그것은 독일이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만든 요인이기도 했음. 29년 뉴욕 주가가 폭락하던 날 이미 금본위제는 필연적으로 종말을 맞이할 운명이었음. 금본위제의 종말을 맬더스의 인구론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산술적으로 늘어나는 금의 채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재화의 생산량을 따라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음. 30년대의 불황은 그 시기를 앞당겼음. 남은 것은 그것을 빨리 깨달았느냐 혹은 프랑스처럼 늦게 깨달았느냐의 차이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세계경제는 디플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주저앉았을 것임. 분명한 것은 금본위제를 가장 빨리 폐지한 국가가 가장 빨리 회복의 길로 들어섰음.
- 역사학자 폴 존슨은 그의 대작 Modern times에서 1814~15년 나폴레옹 전쟁 뒤 빈 의회로부터 시작되어 유럽의 지도자들은 한점의 의혹도 없이 세력의 균형, 합의된 이권지역, 왕족간 결혼, 공통된 규범을 따르는 군주간 또는 신사간의 개인적 양해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주장. 그러나 100년 뒤에는 그런 믿음에 대한 공유가 철저하게 깨졌음. 갈등으로 점철된 근대 이후 유럽의 어느 전쟁에서도 1차대전이후 만큼 영토와 민족이 뒤죽박죽되는 사례는 없었음. 역사상 최초의 미국의 유럽에 대한 전면적 개입은 결과적으로 전통적 규범과 가치를 지닌 왕가와 유럽의 세력균형을 붕괴시켜 근본적으로 유럽사회의 지축을 흔드는 지각변동을 일으킴.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승자와 패자간의 균형도, 합의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독일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했음. 과거 이교도로부터 로마제국의 후예, 서유럽을 수호한다고 여겨졌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 강제로 수술대 위에 눕게 되었고 중부유럽의 지도는 전면적으로 다시 그려짐. 그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카이저와 독일인들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전쟁 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급진적 결과였음. 간단히 말해 미국의 개입은 물리적으로 유럽의 지정학을 완전히 뒤바꿔 놓음.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까지 신성로마제국을 이끌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단숨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짐
- 대서양 건너편의 영국으로부터 독립후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은 줄곧 미지의 땅인 서쪽과 남쪽을 향했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1776년 당시 미국은 단지 13개의 주에 불과한 신생국이었음. 그후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 1845년 이후 멕시코와의 전쟁과 권모술수를 통해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병합, 1876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 1898년 필리핀 병합 등의 일련의 역사는 미국이 처녀지를 정복하면서 종국에는 태평양을 품은 제국을 완성시키는 긴 여정이었음. 그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사는 고립주의적인 내향기와 개입주의적인 외향기가 시대별로 교차. 1차대전과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관은 분명 180도 다른 것이었음. 1945년 이후 미국은 비로소 자신의 패권과 그 역할을 인식하고 본격적인 개입주의적 외향기에 접어들게 됨. 패권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세계 곳곳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 이런 개입에의 열정은 베트남 전쟁이 파국적 결말로 끝나자 회의론이 일면서 한때 주춤하기도 했음. 4년마다 교체되는 의회의 성향에 따라 혹은 9/11같은 사건의 발생에 따라 바뀌는 여론의 조류에 따라 워싱턴 정가는 불간섭과 개입의 카드를 번갈아가며 사용. 더 정확히 말하면 전략적 요충지에 대해서는 적극적 개입을, 그렇지 않은 곳은 미국의 이익과 이상주의적 가치 사이에서 정처없이 표류함. 세계인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군사적 개입의 결과에 대해 어떤 종류의 조롱과 의구심, 그리고 폭력적인 저항심을 내비치던 간에 2차대전의 전범인 독일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경제지원과 개입만큼은 전후 평화를 이끈 성공적 정책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함
- 영국의 식민지인들은 대부분 가족단위로 이주해왔고 새로운 정착촌을 형성해 나감.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 내내 대륙은 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징병요구에 노출되어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은 대규모 인구유출을 꺼림. 영국에 비해 프랑스의 식민지는 상대적으로 교역과 상업에 치우쳐 있었고 스페인은 식민지 개척때부터 금과 은을 약탈하기 위한 정복전쟁을 벌였으므로 군인출신의 남자가 더 많았음.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에선 남녀비율이 극단적 불균형으로 인해 일찍이 서로 다른 문명의 교배가 이루어짐. 스페인 식민지인들은 원주민 여성들과 결혼하였고 혼혈사회를 주조해냄. 이들은 지배자였지만 동시에 소수였기에 원주민 사회에 동화될 수 밖에 없었음. 특히 스페인 식민지는 엄청난 땅과 원주민을 이른바 엔코미엔다라는 제도를 통해 분배받은 소수 에스파냐 귀족출신의 지주들이 이미 지배하고 있었음.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는 스페인 귀족의 별장이 있는 드넓은 외국영지와도 같았음. 용병들을 파견해 살육을 벌이고 금을 싹쓸이해가져간 다음 일찍부터 이곳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착취적 경제가 뿌리내림. 일반 평민들이 여기에 끼어들어 토지를 할당받을 제도적 장치는 전무했고 이민이 장려되지도 않았음. 이같은 차이점은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식민지 인구에 그대로 반영됨. 정착촌을 형성한 영국 식민지의 인구는 출생률의 증가와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곧 프랑스와 스페인을 압도. 1740년이 되자 이주민의 수는 더욱 증가. 캐나다의 프랑스 이주민 숫자는 4만 2000명이었지만, 뉴잉글랜드의 정착민만 해도 무려 25만이었고 영국 식민지 전체 인구는 흑인을 포함하면 90만에 육박. 후에 이 대륙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이미 인구통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음.
- 1707년 탄생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청사진은 명확했음. 일단 브리튼 제도는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따르는 최상의 정치적 국민들이 이끌어야 했음. 그 외에는 최소한의 신앙의 자유를 부여받고 비주류로 살아가거나 낯선 땅으로 이주하는 선택지가 주어졌음. 순식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이 비주류 국민으로 전락했고 그들은 주저없이 아메리카를 선택. 계층의 사다리 제일 아래에 위치한 아일랜드 빈민들은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한 아메리카 식민지로 보내짐. 무일푼의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대부분 계약하인이었음. 계약하인이란 이주비용이 없는 사람에게 경비를 제공하고 정해진 기간동안 하인으로 봉사하면 그 대가로 주인으로부터 토지를 제공받는 제도였음. 브리튼 제국이 신민들을 종교와 출신에 따라 분류하는 민족정책은 20세기 초 일본의 대동아 공영계획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었음. 대동아 계획에서는 아시아인을 좀더 상세하게 지배민족(일본), 우호적 민족(한국), 기생민족(중국한족)으로 분류. 마지막 집단의 반일성향을 보이는 사람은 죽거나 남쪽으로 추방되어야 했음. 이 시스템은 처음부터 커다란 문제점을 한가지 갖고 있었음. 이런 등급구조는 성공회를 따르지 않는 많은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으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서는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게끔 만들었음. 땅에 대한 약속은 그들을 더욱 부추겼음. 그런데 계약하인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이제 어디서 노동력을 데리고 올 것인가? 다행히 그것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으로 보완될 것이었다. 그러자 노예무역의 전성시대가 꽃을 피우기 시작.
- 비참함 속에서 아일랜드인의 인구를 부양한 것은 감자였음. 당시 감자는 유럽에서 환영받지 못한 작물이었음. 스코틀랜드인들만 해도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감자를 불경스렁누 것으로 간주. 가축이나 미개한 사람이나 먹는 것으로 여겨졌던 감자가 아일랜드인의 주식이 된 것은 아일랜드인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반증. 인구의 절반이상이 필요한 열량의 3/4이상을 감자에서 얻고 있던 아일랜드인들은 감자가 사라지면 언제든 대재앙을 맞게 되어 있었음. 19세기에 들어 감자에 마름병이 돌며 작황이 줄어들자 우려는 현실이 되었음. 아일랜드 대기근은 영국에 의해 철저히 기획되었고 예고된 불행이었음. 잉글랜드 식민화 작업이 아일랜드인을 감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만들었기 때문. 다수의 아일랜드 소작논들은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압력과 식량부족을 견뎌낼 수 없었고 생존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음. 아일랜드의 인구증가와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인구증가는 동시에 일어났음. 그리고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의 꾸준한 이주는 후에 영국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임. 아일랜드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카톨릭 교도였고 미국의 독립전쟁 기간 동안 카톨릭 교도들은 대부분 독립파를 열렬히 지지. 반면 영국국교회 신봉자의 상당수는 왕당파의 편이었음.
- 1765년 인지세법과 병영법 1767년 타운센드 관세는 어느면으로 보아도 조악하기 그지 없음. 이름만 달리해서 온갖 세금을 신설하는 것은 식민지인들에게 착취라는 구실을 제공했기 때문에 분명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국이 어떤 종류의 세금을 어느만큼의 세율로 신설하든 간에 그것은 무조건적인 반발과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음. 식민지에서 희대의 악법이었던 인지세법은 그 인기만큼 과세효과도 미미했고 1년도 못가 1766년 3월 폐기됨. 타운센드 관세 또한 1770년 폐기되면서 차를 제외한 모든 관세가 철폐됨. 영국은 결코 조세부담이 크지 않았다는 것과 식민지인들의 요구를 즉각 반영했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 같은 점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올 리가 없었음. 영국은 본질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었음. 문제는 세율이 아니었음. 식민지인들이 그런 종류의 기괴스러운 조세항목에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했음. 게다가 정작 전쟁의 목적이었던 서쪽 영토에 대한 식민지인의 접근을 막은 가운데 식민지에 조금이라도 전쟁비용을 전가하려는 시도는 팽창주의자들에게는 중대한 모순으로 비쳐졌음. 또한 이와 같은 세금들이 식민지의 대표가 섞여 있지 않은 영국의 의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지고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시행된다는 점이 식민지인들의 독립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였음. 이른바 대표없이 과세없다는 신조였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당시 가장 선진적인 정치구조를 가진 영국에서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음.
- 게르만족의 후예인 샤를마뉴는 기원후 800년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황제의 왕관을 받으면서 일종의 망령을 부활시킴. 그것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의 난동으로 너무도 허망하게 끝나버린 옛 로마제국에 대한 아득한 향수였음.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숨어 있었음. 이것은 392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을 국교로 공인한 이래 다시한번 정치와 종교의 끈끈한 결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음. 이는 양측 당사자에게 수지맞는 거래이자 제휴였음. 교황청은 군대를 가진 세속황제의 보호가 절실했음. 그 답례로 이제 황제의 군대가 벌이는 전쟁은 아무리 불순하고 사소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와 하늘의 은총을 듬뿍 받아 성전으로 탈바꿈했음. 이 거래는 후에 중세의 유럽 역사에서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로 기록될 십자군 전쟁을 남김
- 15세기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다른 가문을 물리치고 사실상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세습체제를 구축. 하지만 그것은 신의 뜻도 아니며 정복전쟁의 결과도 아닌 독일제후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한 것이었음. 합스부르크가가 다른 왕국이나 공국들을 모두 압도할만한 군사력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었음. 제후들은 그들 나름대로 제국이란 울타리가 필요했음. 독일의 여러 왕국과 공국들이 단합하지 않으면 서쪽으로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프랑스, 동쪽에서는 야만적인 오스만 제국에게 차례로 정복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나마 제국이란 이름의 연합을 이루어야 했음. 엄밀하게 말해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가 계속 황제의 관을 차지할 수 있던 것도 1453년 유럽인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대사건이 제국에 계속해서 극한의 공포심을 주입했기 때문.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차라리 소련의 위협에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뭉친 나토와 같은 연합방위체제에 가까웟음. 유럽인들의 동방제국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스 시절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궁정의 온갖 잔인한 이야기를 유포시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일치단결시키려 했음. 그 후의 그리스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페르시아 제국은 잔인한 야만족으로 그려졌고 후세에 이르도록 점차 그 이미지가 굳어졌음.
- 1524년 늘 권위에 도전하는 메시지를 전해왔던 루터에 자극받아 독일 전역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난을 일으킨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메시아에게서 철저히 버림을 받음. 농민들의 창끝이 저멀리 교황이 아니라 당장 세속군주를 겨누고 있다는 게 문제였음. 사실 창도 아니었다. 변변치 못한 농기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에 성직자 루터는 살육과 야갈을 일삼는 농민무리에 대항하여라는 소책자를 써 각 도시의 영주들이 신의 이름으로 폭도들을 처형하라고 촉구. 영주들이 마침 꼭 듣고 싶어 한 말이었고 그들은 루터의 계시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실행에 옮겼음. 이때만큼은 루터는 그가 줄곧 비판해왔던 교황보다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 없었음. 르네상스 교황은 사치스럽고 돈에 눈이 멀긴 했어도 공개적으로 수만명을 죽이라고 선동한 적은 없었기 때문. 루터는 개혁가라기보다 자신의 후원자이자 보호세력인 군주들의 하수인에 불과한 것처럼 행동.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구원을 부르짖던 하층민들에게는 끔찍하고 사악한 주문을 걸어 죽음에 이르게 했음. 성직자로서 이런 행동 자체가 그 어떤 면죄부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음
- 1543년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알린 수장령의 목적은 교회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약탈하는데 있었음. 초기에는 교회로부터 로마의 교황으로 흘러들어가는 수입의 물줄기를 잉글랜드의 신의 대리자인 자신에게 돌리려는 것이었음. 후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반발을 핑계삼아 전국의 수도원을 해체시키기 시작. 교회, 수도원, 심지어 성지의 보물들까지 왕실의 금고로 흘러들어왔음.
-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던 잉글랜드의 비전은 18세기에 가서야 전성기를 맞게 되지만 그 시작은 튜더왕조였음. 그러나 에스파냐의 이자벨라 여왕이 탐험가 콜럼버시를 지원한 혜안 덕택에 신대륙 탐험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선점한 상태였음. 후발주자인 잉글랜드는 한계에 부딪혔음. 더욱이 튜더 왕조의 왕실 재정은 대규모 해외원정대를 파견할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음. 이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선택한 방법은 해적에 대한 지원이었음. 대영제국의 기초는 해적질에서부터 시작된 것임. 그것은 소국 잉글랜드가 선택한 국가적 전략이었음. 그중에서도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에스파냐 선박에겐 공포의 대상인 전설이 해적이자 탐험가였음. 1577년 시작된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항해는 에스파냐 항해가 마젤란에 비해 거의 60년이나 늦은 것이었지만, 드레이크는 해적질을 통해 그 갭을 단숨에 따라잡음. 1588년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 출격은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격퇴되었지만 이 전쟁은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양쪽 모두의 왕실 재정에 타격을 입혔음. 펠리페 2세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해야 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은 의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왕실의 독점권을 포기해야 했음. 이 미묘한 충돌은 스튜어트 왕가로 이어져 증폭되었고 왕실과 의회의 격렬한 대립을 예고하고 있었음.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나자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는 바다로 눈을 돌려 해상 무역을 차지하기 위한 소모전을 벌임. 서로의 함대를 바다로 가라앉히기 위한 싸움이었음. 찰스2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모두와 혈연으로 맺어진 입장이었지만 이 삼국간 전쟁에서 대부분 프랑스의 편에 섰음. 네덜란드의 눈부신 성장에 대한 질시와 네덜란드의 해상권을 빼앗고자 하는 마음은 루이 14세도 결코 뒤지지 않았음. 찰스2세와 루이14세는 바다에서의 네덜란드의 우위를 무너드리기 위해 동반자적 관계였음.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영국 의원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은 국왕과 프랑스왕의 특별한 유대관계였음. 그들의 마음은 나쁜 친구와 어울리는 아들을 둔 부모의 심정이었음.
- 17세기 당시 전쟁과 혼란속을 헤매던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해수면보다 낮은 지형 때문에 에스파냐의 식민지 시절부터 저지대 국가라 불리었던 네덜란드 공화국이 갑작스레 융기하여 솟아오르는 모습을 당혹스런 눈으로 지켜보았음. 그런데 네덜란드의 침강 또한 그들의 융기만큼이나 불현듯 찾아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가 한때 유럽의 패권국이었던 사실을 쉽게 잊어버림 해상강국 네덜란드이 조용한 퇴장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의 명예혁명이 시발점이 된 것은 틀림없음. 17세기가 네덜란드의 시대였다면 1688년 명예혁명을 전후로 그 영광은 영국으로 넘어감.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떤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기 위해 영국해협을 건널때는 혈혈단신이 아니었음. 그는 혹시 모를 프랑스의 군사적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군수품을 지원할 세파르디 유대인 금융업자들을 끌어들임. 그리고 이들 금융업자들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수많은 과학자들, 기술자들, 예술가들이 따르게 됨. 이로써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에서 영국으로 막대한 인적자본과 금융자본이 유출되기 시작. 바다를 건더던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은 자신의 행동이 바다의 주도권을 영국에 넘겨주게될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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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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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

저자
김태일, 좋은예산센터 지음
출판사
코난북스 | 2014-07-2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출산 보육 노후부터 교통 보건 교육까지 200조 머니게임 지방재...
가격비교

- 보충성의 원칙은 정부간 업무배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 간의 역할분담에 관한 원칙임. 이 원칙은 31년 로마 교황 비오 11세의 선언문에 잘 나타남. "저 작고 더 낮은 사회에 의하여 실효성 있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더 크고 더 높은 단체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회 철학의 흔들림 없는 근본원리이다. 모든 사회활동의 진정한 목표는 사회구성원을 돕는데 있는 것이지 그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하는 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보충성의 원칙은 유럽연합을 만들때 유럽연합과 개별회원국 간의 권한 배분기준으로 적용되면서 널리 알려짐. 개별 국가가 존재하면서 연합체를 만들 경우에는 이 원칙이 마땅해 보임. 유럽연합을 만들었다고 해서 기존에 개별국가가 수행해오던 일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 하지만 이 원칙을 한 국가내에서 상하위 정부간 업무배분에 엄격하게 적용하기는 힘들다. 엄격히 적용하자면 상하위 정부가 둘다 할 수 있지만 상위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경우에도 하위정부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완화된 기준을 제시. 둘 중에 더 잘할 수 있는 정부에게 맡기자는 것. 하위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하위정부가, 상위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상위정부가 담당하게 하자는 이야기임.
- 지방정부 재정의 가장 큰 특징은 사업비의 일부를 중앙정부가 주는 돈에 의존한다는 점. 그래서 자체재원만으로도 사업비를 충당해야 한다면 결코 하지 않을 사업도 중앙정북 돈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하게 됨. 이런 사업은 국가전체로 보면 편익보다 비용이 큼. 그러나 지역 입장에서 보면 지역에 돌아오는 편익이 지방정부 자체 재원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용보다 크다. 그러니 지역의 정치인이나 주민이나 한마음으로 이런 사업을 선호함. 소위 지역 숙원사업 중에 이런 것들이 많음. 물론 지방자치가 아니라도 지역구 국회의원의 활약과 대통령 선거마다 등장하는 선심성 지역공약으로 낭비성 지역 숙원사업이 실행되기는 함. 하지만 지방자치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 것은 분명함
- 지방화에 대한 강조는 대략 20세기 후반부터였음. 세계적 석학이나 저명한 미래학자, 이를테면 다니엘 벨이나 앨빈 토플러 같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방화를 강조. "국가는 삶의 큰 문제를 다루기에는 너무 작고 작은 문제를 다루기에는 너무 크다." 다니엘 벨의 말은 중앙집권적 국가기능의 쇠퇴와 지방화의 도래를 상징하는 문구로 인용되기도 했음. 서구역사를 보면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20세기 중반까지 산업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복지국가가 발전되어온 과정은 모두 중앙집권적 국가기능의 확대를 가져왔음.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탈산업사회와 복지국가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중앙집권적 국가기능의 비효율성이 부각됨. 이에 따라 시장화와 더불이 지방화(분권화)가 강조된 것. 지방화 주창자들이 강조한 만큼이나 국가(중앙정부)의 기능이 쇠퇴한 것은 아님. 국가는 여전히 중요함. 하지만 지방의 중요성이 커진 것도 사실. 이에 따라 20세기 후반부터 선진국들은 국가운영의 효율화를 위한 지방화(분권화)를 추진. 우리도 20세기 후반에 지방자치를 재개하였으니 시대조류에 부응한 셈이기는 하다. 선진국에서 국가운영을 효율화하기 위해서 추진했다면,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서 했다는 점이 다름. 이 차이는 중요함. 지방자치를 국가운영의 효율성과 연결하여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지방자치가 그토록 비효율과 낭비를 양산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 이제는 지방자치를 효율성 관점에서 따지고 개선안을 논의할 때도 된 것 같음. 효율성을 높인다고 민주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님. 오히려 우리 지방지차의 현실을 보면 효율성과 민주성은 함께 갈 가능성이 훨씬 높음. 이제는 우리도 국민생활을 더 윤택하게 하는 지방자치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 보조금 배분이 정치적 산물인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님. 미국 정치용어 중에 포크배럴 정치라는 말이 있음. 보조금이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 유리하게 배분되는 현상을 말함. 포크배럴은 옛날 미국 남부에서 농장주들이 노예들에게 주는 훈제 돼지고기를 보관하던 통을 말함. 지역구를 위해 보조금을 따내려고 달려드는 정치인들 모습을 농장주가 돼지고기 한 조각을 꺼대 던져줄 때 모여드는 노예들이 빗댄 표현임. 또 어느 일본학자는 국고 보조금은 정치인들이 표밭에 뿌리는 비료라고 말하기도 했음.
- 지방정부는 자체수입으로 지출을 모두 충당하지 못했음. 그래서 부족분은 중앙정부가 지원해줌. 이런 물렁한 예산제약이 존재할 때 지방정부는 스스로 노력해서 수입을 늘리고 비용을 절감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중앙정부 지원을 더 받으려 하거나, 어차피 자신의 노력보다는 중앙정부의 지원에 따라 재정형편이 좌우된다는 생각에 나태해짐. 지방교부세는 의존재원이긴 해도 법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배분되며 일반재원으로 사용되므로 이 돈자체가 낭비될 소지는 별로 없음. 그러나 형편이 어려우면 지원이 늘어나므로 자력으로 재정여건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꺾는 효과가 생김. 인구가 많을수록 많이 받기 때문에 일부 지자체에서는 인구를 늘리려고 꼼수를 쓰기도 함. 대행사업은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떠맡겨서 하는 것. 마지못해 하는 것이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경향이 있음. 그래서 효과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 지방교부세와 대행사업보다 훨씬 심각한 효율성 문제는 자체사업에 대한 국고보조금에서 발생. 국고보조는 지방정부의 입장에서 비용을 실제 사업비용보다 작게 만듬. 그래서 국고보조금이 없다면 하지 않았을 사업, 더욱이 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도 시행하게 됨. 뿐만 아니다. 지원여부가 사업의 필요성과 타당성보다 정치력에 의해 결정된다면 지방정부는 저마다 좋은 사업을 개발하기보다 정치력을 동원하는 데 더 힘을 쏟게 됨. 이런 왜곡된 행위에 따라 발생하는 무형의 낭비가 효율성을 더 떨으뜨릴지도 모른다
- 국가보조금, 민간투자, 공기업이라는 수단이 없다면 지방정부는 대형 개발사업을 벌이기 힘들다. 국고보조금은 중앙정부가 거저 주는 돈이니 많이 따올수록 이익이라고 생각하게 됨. (실제는 자체재원으로 매칭해야 하는 돈이 만만치 않음) 민간투자나 공기업의 빚도 남의 돈이라고 생각하게 됨. 그러니 꼼꼼하게 따지기보다 일단 벌여놓고 보자는 경향이 강함. 더구나 신중하게 일하던 지자체도 다른 지역에서 이런 방법으로 통크게 사업을 벌이는 걸 보게 되면, 가만히 있는 자신만 무능하게 비춰질까 두려워하게 됨. 국가보조를 받는 국제대회나 민자사업, 공기업 사업 중에는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예산을 낭비하고 재정을 위험하게 만든 사례가 차고 넘친다
- 공기업 부채의 원인
(1) 원가에 못미치는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서 생긴 부채. 한전 부채의 대부분은 값싼 전기요금 때문.
(2) 정부사업을 수행하면서 생긴 부채. LH공사의 상당부분은 신도시 건설과 공공주책 공급과정에서 생긴 것임.
(3) 정부가 무리하게 강요한 개발사업때문에 생긴 부채. 수자원공사의 부채의 많은 부분은 4대강 사업을 떠맡아서 생김. 석유공사, 광물공사 같은 에너지 공기업들 부채의 상당액도 정부가 독려한 해외자원개발 사업에서 발생.
(4) 공기업 자체의 경영과실에서 비롯한 부채. 공기업도 기업인 이상 경영상의 판단착오로 손실이 생긴 것이고 이것이 부채로 연결되기도 했을 것임. 하지만 전적으로 자율경영을 하는 공기업은 거의 없을테니 순전히 경영진의 판단착오에서 비롯한 부채크기가 얼마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움. 용산 역세권 개발사업의 실패로 철도공사가 지게 된 부채가 여기에 해당
(5) 방만경영. 어차피 수익에 민감할 이유가 없고 자율경영도 아닌 바에야 경비절감이나 구조조정을 위해 애쓸 필요도 없으니 경영이 방만해지는 것은 당연함
공기업 부채문제를 따질 때는 입장에 따라 이 다섯가지 중에 몇가지를 강조함. 정부는 방만경영을 강조하고 공기업 노조는 원가에 못미치는 가격의 서비스 제공과 정부사업 대행을 강조. 언론도 색깔에 따라 정부입장을 더 강조하기도 하고 공기업 노조입장을 옹호하기도 함. 부채 규모로 보면 (1), (2), (3)의 원인이 대부분
- 지키지 않는 게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기 어렵고, 집행과정에서 부패가 발생하기 쉽다는 것. 그리고 이런 부패를 없애려면 애초에 그런 규정을 만들지 말아야 함. 우리 사회 버벶도 곳곳에 이런 규정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공무원의 관행적 부조리도 어느정도 이런 측면이 있음. 과거에 공무원 급여를 인상하는 대신 초과근무수당이나 관내출장비를 급여를 보충하는 수단으로 써도 눈감아 주었음. 또 부서경비를 적정하게 책정하는 대신 관외출장비 등을 부서경비로 전용해도 모르는 척했음. 이럴 바에야 공무원 급여와 부서경비를 합리적으로 책정하고 초과근무수당과 출장비는 원칙대로 집행하는 게 훨씬 나음. 관행적 부조리는 그 자체도 문제임. 하지만 은연중에 모두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서 상사나 동료의 진짜 부정과 비리마저 눈감게 만드는 것이 문제
- 지역의 정치와 행정을 엘리트주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이론 중에 성장기구라는 이론이 있음. 성장기구는 지역의 성장을 이끄는 수단이란 의미. 부동산 개발을 중심으로 뭉친 집단과 그 영향을 받는 지방정부가 성장기구에 포함된. 부동산 개발로 이득을 보는 사람끼리 성장연합을 결성해서 지방정부로 하여금 부동산 개발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것. 성장연합을 구성하는 첫번째 계층은 지역의 건설업자, 투자자, 부동산 소유주임. 이들은 부동산을 개발하면 직접 이득을 얻는 집단임. 두번째 계층은 지역의 정치가, 언론인과 가스/수도/교통 등 지역 SOC공급자임. 첫번째 계층만큼 직접적이지 않지만 역시 부동산 개발로 상당한 이득을 얻는 집단임. 이 두계층이 성장연합의 핵심임. 이들 외에 보조역할을 수행하는 집단이 있음. 바로 지역의 대학, 예술/문화계임. 이들은 부동산이 개발되었을 때 과실을 간접적으로 누리기도 하고, 핵심 성장연합 집단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 되는 집단임. 성장연합은 지역의 정책결정을 좌지우지함. 지방정부에 부동산 개발을 독려하는 것은 물론이며 지역주민들이 이를 지지하도록 여론을 형성. 부동산 개발 혜택이 실제로는 소수에게 집중됨에도 지역을 개발해야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주민의 자산가치도 올라간다는 식의 성장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전파. 이로써 지역의 정치, 행정, 경제는 결국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한 부동산 개발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됨. 그러나 이렇게 부동산 개발을 중심으로 성장하면 결국 지역동동체가 훼손되고, 중산층 이하 계층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으며, 지방정부 재정도 멍이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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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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